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조너선 울프 지음, 김경수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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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는 현재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反問)할 수 있다. “에이, 이 사람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마르크스가 뭐가 무서운가?” 그렇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반도 남단(南端)에 반공(反共)정권이 들어서고 7~80년대의 군사정권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는 그 이름 자체의 언급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절이 변했다 한다. 90년대 이후 이 땅에 민주화의 토대가 굳건히 서고 이제는 새로운 천년의 도래와 함께 그런 무서운 시대는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왜 그런가?

 

  ‘맑스’라고 한다면 더 친근감(?)이 들지 모르지만 현재 외래어 표기법상 ‘마르크스’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맑스’라는 표현이 더 현실발음에 가까우면서('Marx'는 1음절의 단어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보다는 ‘맑스’(또는 [막스])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더욱 강한 분위기를 띄는 것이 ‘마르크스’보다 더욱 ‘마르크스’스럽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하여간에 ‘맑스’면 어떻고 ‘마르크스’면 또 어떤가? 굳이 구분하자면 이전의 군사정권하 악마시(視)되어 왔던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맑스’가 친근할 터이고, 현재에는 그냥 마르크스일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마르크스는 어떠한가? 왜 나는 아직까지도 마르크스가 ‘무시무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현문(賢問)이겠다.

 

  “마르크스는 현재에도 유효(有效)한가?” 즉, 오늘날―구(舊)소련의 공산정권이 무참히 무너지고 미국을 대표로하는 자본주의의 재편,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와 서서히 타협해 가는 중국을 보라―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미 실패한 사상이 아닌가? 그러한 마르크스를 현 시대에도 읽어야할 필요성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한 마디의 답변이 바로 ‘여전히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라는 말에 제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현대의 학자연(學者然)한다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피해갈 수 없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녹아들어가 있다. 즉,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무서운 노릇(?)일 테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하게 입증한다. 그 사실인즉, 마르크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예언적 통찰이 그것이다.

 

  예언적 통찰(豫言的通察)이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그렇지 않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이미 마르크스의 저술에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마르크스는 현대의 자본주의의 비판적 성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래서 그가 여전히 유효하며, 여전히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언 100여년이 넘었다. 과연 100년의 후의 미래를 마르크스는 눈앞에 놓고 보듯이 예리하게 서술해내고 있다. 이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전혀 뒤질 바 없지 않은가?

 

  결국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하다. 이런 마르크스를 알지 않고서는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지성인으로서의 명함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인이고자 한다면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인데,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 마르크스를 배우는 것일 터이다. 《자본론》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 그 뿐인가?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한 마르크스주의의 방대한 양의 이론서들을 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히 ‘무시무시’함은 엄청나게 증폭되어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아는 것 또한 이렇게 무시무시하니 내 말이 또한 엄청나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무시무시한 마르크스”

 

  이런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를 “한 권으로 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역시 불가능(不可能)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르크스를 ‘무시무시’가 아닌 ‘무시(無視)’의 태도로 대하는 불경(不敬)을 보이는 것이다. 헌데, 190쪽(차례와 찾아보기, 그리고 빈 페이지를 제외하면 끽해야 160여 쪽 밖에 안 된다.)의 그것도 규격이 B6(A4 용지의 절반도 안 된다.) 밖에 안 되는 책의 제목은 당당히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이다. 허, 이런 당돌한 이름을 붙이다니 웃음도 안 나올 일이다. 이런 당돌함과 무모한 이름을 내걸은 책이 어련하겠냐 하는 의심의 눈, 그리고 끝내는 이 책 또한 무참히 그 당돌함에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겠다는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이 책을 읽어냈다고 일단은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표방한 제목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한 권’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끔 하는 강한 힘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경우 독자가 이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그 텍스트가 가장 잘 읽히게 마련인데, 그것은 확실히 마르크스에게도 해당된다. …… 기초 지식을 먼저 갖춘 뒤 텍스트를 읽게 되면 그 사상가의 세부적인 생각을 평가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옳은 말이다. 또한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깊은 수렁에 풍덩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자멸하기보다는, 마르크스의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사상의 바다를 잘 저어갈 배와 삿대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그 배와 삿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남음이 있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이 책이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를 보면, 2장에서는 초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요소들을,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전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즉 지배적 개념인 ‘계급(階級)’, ‘역사(역사)’, ‘자본(資本)’에 대해 간명하면서도 이해하기 수월하게 서술해 내고 있다. 생각만 해도 따분하게 그지없는 이러한 개념들을 누가 뭐래도 ‘쉽게’ 설명해 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해내고 있으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4장에서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Why read Marx today?”이다. 즉, “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인데,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이 담겨있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마르크스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좀더 유연하게 말한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마르크스에 정면 도전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의 저작들을 읽어내게 하는 ‘한 권’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마르크스에게로의 안내자 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참고문헌과 ‘깊이 읽기’를 위한 안내”의 역할까지 해내고 있는 자상함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출판된 것을 전제한다면,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어판 마르크스 참고문헌들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이 책과 아주 비슷한 책이 이전에 한 권 더 있었다. 그것은 시공사에서 펴낸 ‘로고스총서’ 시리즈로서 2번째인 데이비드 매클릴런의《마르크스(Karl Marx)》라는 책이다. 책의 부피와 체계가 매우 비슷한데, 이 책은 전체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깊이 읽기의 안내서로서 참고문헌의 제시는 이 책이 훨씬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이 책은 마르크스의 저작과 그에 대한 참고서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한국어 출판물 목록을 따로 제시해 두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비슷한 두 책을 비교해 보면,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 요소들을 선별하여 보다 쉽고 평이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충실히 돕고 있으며, 마르크스 읽기의 필요성, 즉 현대적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에게로 강하게 이끌어 들이고 있다면, 매클릴런의 저서는 마르크스의 생애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되면서 전체적인 마르크스 사상을 통찰력을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두 책을 함께 읽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먼저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를 읽고 다음에 매클릴런의 저서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가 보다 쉽고 간명하게 서술함으로써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로서 읽는 이에게 부담감을 훨씬 덜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한 권으로 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이끄는 귀한 안내자로서, 전도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의 바다를 유유히 헤쳐갈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배로서, 삿대로서, 이 책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가치가 있고, 그 당돌한 제목 또한, 용서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 참으로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통해 도전해 볼 만한 높이로 허리를 숙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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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술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민병덕 옮김 / 범우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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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당신은 책을 읽을 줄 아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이 사람이 나를 바보로 아나!'하며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당연히 "Yes"라고 대답하거나, "눈이 침침해져서 못 읽어"라거나(연세 꽤나 드신 분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묵묵부답 웃거나(아직 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일게다.) 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문맹은 찾아보기 힘들어 누구나 다 책을 읽을 줄 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문맹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을 줄 안다.


  책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의 첫 번째 조건은 ‘눈’이다. 즉,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점자책 등이 보급되어 ‘볼 수’ 없어도 책을 읽을 수는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보편적으로 ‘읽는 행위’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이라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나 예외 없는 것으로 ‘책을 읽는’ 행위의 필수 전제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눈’으로 책에 적힌 문자를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책읽기는 이처럼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책읽기는 사실상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오히려 복잡하고 어렵기 그지없다. 한 페이지를 제대로 넘기기 전에 책장을 덮어버려야만 하는 책이 많다. 이것은 대부분 독서가들의 경험에 의한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책을 읽을 줄 아는가?”라는 질문도 그리 유치한 것도 아니며, 그에 대한 대답도 간단치만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책읽기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통해 그 대답을 얻어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생각해 본바와 같이 책읽기는 단순하지 않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글, 즉 기호의 담긴 의미를 해독해낼 줄 안다는 것이며, 그 기호들의 조합 속에서 각각의 의미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고, 그 결합이 어떠한 의미를 산출해 내는지 판독해 낼 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호는 읽을 줄 알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결코 책을 읽을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의 책읽기를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성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문제들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조금 양보하자면 우리가 읽을 줄 모르는 책이 많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대부분 양서, 즉 우리에게 많은 가치와 의미를 전해줄 수 있는 책들이 많다.


  내가 읽은 이 책 <<독서의 기술>>은 바로 독서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책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독서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은 그간 꾸준히 재판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기술을 가르치며 좋은 독서가들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의 기술’은 크게 4가지 단계로 나뉜다. ‘초급독서’, ‘점검독서’, ‘분석독서’, 그리고 독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토피칼 독서’의 단계에 따라 독서를 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의 단계의 순차적인 것으로 마지막의 ‘신토피칼 독서’를 하려면 앞 단계의 독서방법들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상정하고 있는 독서의 최종 목표인 ‘신토피칼 독서’란 “동일 주제에 대하여 2종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최고의 독자, 이상적 독자의 경지일 수 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초급독서’의 단계를 거쳐야 하고, 그런 다음 ‘점검독서’와 ‘분석독서’의 단계를 통과해야만 가능하다. ‘초급독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책일 읽는다는 것의 기본적인 조건인 ‘글자를 읽을 줄 알며 그 의미를 일차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 단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 했던 바, 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이 ‘초급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준에 불과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점검독서’와 ‘분석독서’로 나아가야만이 최종의 목표, 즉 좋은 독서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점검독서’와 ‘분석독서’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방법들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단계들을 이룬다는 것이 나로서도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하기가 무척 벅차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독서의 기술>>에서 제시한 방법들을 우리의 독서생활에 계속적으로 시도해본다면 어느새 ‘신토피칼 독서’의 경지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독서의 경지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독서생활 가운데 우리의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듯 하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책 읽는 책>>(마이리뷰 첫 번째 글 참조)을 읽었다. 여기서 ‘네트워크 독서’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토피칼 독서’를 발전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의 방법을 알려주는 책으로써 나는 <<책 읽는 책>>을 조금더 추천하고 싶지만, 이 책 <<독서의 기술>>과 함께 읽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독서의 기술>>은 독서에 대한 보다 이론적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기에 그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책 읽는 책>>의 경우는 보다 한국적 독서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책은 상호 보완적인 의미에서 더욱 완벽한 독서가의 탄생에 기여한다고 하겠다.


  어쨌거나 독서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책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독서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 독서생활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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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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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년 여 전이다. 박노자라는 이름을 이곳저곳에서 많이 보아왔고, 들어왔다. 그가 귀화인이라는 것, 근데 하필 왜 노자인가? 老子와는 썩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그의 사진을 보고 나름대로 한국인의 모습도 있는 듯 해 호감이 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서점 한 켠에서 박노자의 이 책을 보고는 선뜻 집어들어 읽게 된 것이다. 왜 선뜻일까? 나는 이 책의 제목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제목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왜 나에게 이런 신선함(신선함이라는 말은 그리 정확하지 않다. 왠지모를 비하감이랄까? 이 사람이 괜히 딴지를 거는듯한 느낌이랄까? 뭐 그런 것이다.)을 느낀 것일까? 저자 박노자는 귀화인이다. 귀화를 했다면 모르긴해도 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일체감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니? 이 사람이 뭐하러 귀화한 것인가? 아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하는가?

  여기서 박노자에 대해 조금 소개를 하고 가야겠다. 박노자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태생으로 이름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였다. 그는 <춘향전>에 반해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귀화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이름 대학시절 은사님이 지어주신 것으로 '러시아에서 온 현인'이라는 뜻의 '露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귀화한 그는 역사학자로서, 한국의 명철한 지성으로서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이런 박노자의 첫 저서이다.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진짜 한국이 된 것이다. 귀화한 그의 첫 저서가 왜 "우리들"이 아닌 "당신들의 대한민국"일까? 나는 거기에서 어떤 의아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당신'은 '나'가 아닌 '너'이다. 예전에는 높임의 의미에서 주로 쓰였지만, 요즘의 우리말에서는 대화 상대 일반을 높낮이 없이 고루 가르키며, 상대를 비하하거나 비속하게 이를때도 주로 쓰인다. '당신'이라 하면 괜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아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당신들'이라 하면, '내'가 속하지 않은, 곧 '우리'가 아닌 타인들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쉽지 않은 귀화과정을 통과하고 대한민국의 일원이 된 그가 왜 '나'를 뺀 대한민국을 말하는가? 왜 자신을 굳이 배제시키는가?

  나는 그를 진정한 한국인으로 인정한다. 이것은 그의 이 책을 읽고나서의 확신이다. 그리고 그를 나는 '경계인'이라 정의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모순일테지만, 그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한국사람이 아니라는 뻔한 사실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이제는 당당히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에서 자란 러시아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경계인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요건인 것이다.

  "나무를 보면 숲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천성 한국사람이 이 한국사회를 제대로 볼 수 있는가하는 자명한 의문을 갖게한다. 대한민국의 사회안에서 태어나 자라고 배운 한국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못된 구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이 자명한 이치에서 살짝 벗어날 수 있다. 아니 많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을 샅샅이 해부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누가 뭐라도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또다른 이치도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에도 박노자는 해당한다. 분명 그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경계인'의 자격조건을 완벽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하는 이 대한민국의 초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경계인'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는지 타인의 냉철한 지적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으로, 나와 같은 한국인의 뼈저린 반성의 자세로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경계인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점은, 서문격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귀화과정을 겪으며 느낀 감회를 쓴 <국적 취득기>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그가 이런 경계인이 아닌 진짜배기 한국사람이라면 이런 한국 사회의 곁가지에 자라있는 문제들을 지적해 낼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박노자라 분명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 겸허해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의 충격을 가라앉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장부터 그가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단적으로 이순신 동상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을때 나는 멍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충격들이 이 책 가득 담겨져 있다.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을 경계인 박노자는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이 박노자의 이야기가 우리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知彼이전에 知己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을 알려주는 박노자의 이 책은 분명 우리에게 소중한 목소리이다. "그는 이방인의 눈을 가졌으나 그의 가슴은 한국인의 것이다." 이런 경계인 박노자가 냉철하게 전하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의 숨겨진 실상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제 나는 말한다. 박노자는 진정한 한국인이라는 것을,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지 않고는 한국인이라 말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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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젊은 레이서들 어디로 갔을까

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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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결국 "미쳐야 미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狂'이라는 이 한 글자는 광인(狂人), 즉 미친놈을 의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狂은 단순한 미친놈은 아니다. 단순한 미친놈이 아니면 무엇인가? 논어(論語)의 옹야(雍也)편에 이런 말이 있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

  공자님의 말씀인 즉, 무엇인가를 단순히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해야 하고, 좋아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거워해야 道(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도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道通한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이 '樂之者'의 경지가 '狂'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를 즐겨행하고, 그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경지! 그것 하나에 푹빠져 밥먹는 것도, 여자친구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의 경지! 이것이 곧 '狂'인 것이다.

  이 '狂'의 경지가 되면 '及'한다. 곧 미치면[狂] 미칠[及] 수 있는 것이다. '及'은 곧 '道通'이겠다. 이 어쩌면 단순히 진리를 말하고 있는 책이 바로 정민 선생의 <<미쳐야 미친다>>이다.

  정민 선생은 국문학자 중에서는 꽤나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MBC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민 선생의 저서들이 대중적 취향을 잘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정민 선생은 조선시대의 한문산문 중 명문들을 선별하여 현대인이 읽기 쉽도록 새롭게 번역하여 해설하는 작업들을 많이 해 온 사람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손꼽는 박지원의 산문들을 엮은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이덕무의 소품을 엮은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등이 그러하고, 최근에는 <<죽비소리>>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정민 선생의 그러한 작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역작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다. '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기도 하듯이,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하고 있다. 조선시대를 살아온 천재들이 어떻게 천재가 될 수 있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미침[及]의 경지에 이르렀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곧 '狂'에 있음을 정민 선생은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허균,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인물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몇몇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일화들, 그리고 그들의 문장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狂'이 어떠했으며, 그로인해 어떻게 '及'했는지를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첫 장에서부터 나를 미치게 만든 것은 '창가벽'을 가진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들과 함께 엮어나간 이 책을 읽고 나면 어느덧 우리는 '狂'하고 싶어질 것이다.

  현대사회를 생각할 때, 이 시대는 전문가를 요하는 시대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專門란 어느 하나에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의 통달이라면 곧 위에서 말한 '도통'의 경지, 곧 '樂之者'의 경지이다. 결국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狂'의 경지를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곧, 현대인들에게 "미쳐라, 미쳐야 한다. 그래야만 이 시대에 살아 남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어느 하나에 미칠 수 있게끔 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해내야 하는 것은 현실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에만 맘 놓고 달려들 수 없는 것이 현실아닌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不狂'하고 결국 허망하게 사라진다.

  나는 이 책을 우리 현대인들이 읽고 한번쯤 미쳐보길 바란다. 미침[狂]은 많은 노력과 고생과 타인들의 차가운 시선들을 수반한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그러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게하는 행복이 있다.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미친다고 해서 정신병원에 가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단, 부스럼을 뜯어 먹는 짓은 좀 그렇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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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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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초, 우리 사회는 이상야릇한 열풍을 경험했다. 세번째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찾아온 이 태풍은 자본주의의 망망대해에 거대한 물결로 온 사회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다름아닌 '체 게바라'의 붉은 물결이었다. '체 게바라'는 과연 누구인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빛나는 별이 박힌 베레모, 아메리카 민중 해방을 위해 끝없이 제국주의와 싸운 그의 게릴라 활동을 보여주듯 길게 풀어헤친 장발, 그가 언제나 입고 다녔던 게릴라의 자존심 군복. 이러한 모습은 온 거리의 포스터에서, 이 나라 청년들의 티셔츠에서, 상점에서, 그리고 서점에서, 책에서, 이곳 저곳에서 우리에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은 이 나라에서 이 물결을 선도했다. 사실, 이 물결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이 공산주의자에 대해 관대할 수 있기 이전에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 엄청난 물결로 밀어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체는 남미에서 영웅이었고, 신격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한가?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의학도였다. 하지만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 피델 카스트로와 뜻을 같이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혁명가이자 게릴라였다.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일등공신으로서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장관, 그리고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 등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자요, 공산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존경했던 인물이며, 민중 혁명을 위해 총을 든 혁명가요, 게릴라였다. 그런 그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꿈틀거리고 있는 이 사회에서 강한 태풍을 일으킨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 물결을 살짝 피해왔다. 사실 내가 그 물결을 피한다고 해서 피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이 '체 게바라'의 물결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것이 두려워서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을 멀리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 물결을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온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에서, 유행처럼 입고다니던 티셔츠에서 나는 이 인물을 대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술집 이름에서까지.

  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거대한 물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참 아이러니다. 체 게바라와 자본주의는 절대 공유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바다는 이 혁명 전사 체 게바라까지도 집어 삼킨 것이 아닌가? '체 게바라'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한 상품이 되었으며, 유행이 된 것이다.

  이 상품화된 유행이 되어버린 체를 나는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공의 교육에 세뇌되어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체 게바라를 읽게 되었다. 왜 이 인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싸웠던 제국주의 문화에서 상품화되고 열광을 일으키고 유행이 되었는지를, 내가 가지고 있던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거미줄을 이제는 조금씩 걷어버리고 싶어서, 나는 그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체라는 인물이 왜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이 문화에 거대한 물결, 거대한 태풍, 거대한 파도와 같이 몰아쳤는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체는 더이상 혁명 전사도 아니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총을 든 게릴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감히 주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체는 아르헨티나의 그리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귀한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늘 안고다니던 천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혁명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우와 함께 한 남미여행 때이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아메리카의 민중들의 삶과 그 고통과 아픔을 몸으로 체험하고 그는 마음속에 이 민중들의 아픔을 위해 싸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여행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쿠바의 혁명전선에 가담함으로써 혁명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혁명가로써 볼리비아의 한 시골 마을 학교에서 총살됨으로써 그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체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는 더이상 '민중 혁명'이 아니다. 더욱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이런것은 전혀 먹혀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 청년들을 열광케할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볼 때 '열정'이다. 그는 혁명가 이전에 '열정'을 가득담은 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체 게바라 아니,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한 인간의 열정이 이 땅의 청년들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이 아닐까? 그의 의학도로서의 모습, 다재다능의 면모, 멀고 험한 고생길이 분명한 모험의 감행,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하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인간적 면모, 무엇이든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 내려는 집념, 민중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끝없는 헌신 등등. 그는 무엇하나 하찮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일에서, 모든 생각과 삶에서 열정으로 살아온 인간 게바라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그런 그였기에 그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타파하고자 하던 제국주의의 신식민사회의 청년들에게 깊은 꿈 하나 던져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혁명'의 붉은 물결이 아닌 '열정'의 더욱 강한 물결로 말이다.

  체 게바라의 삶을 읽어가면서 나는 몇가지 점에서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열정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 그 첫째다. 둘째는 그는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릴라의 야전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늦게 잠에 들었다. 이유는 물론 독서라는 사실. 그가 그토록 많은 역할을 그 누구보다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완벽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점도 어쩌면 이 점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그는 가족을, 친구를, 부하를, 민중을, 조국을 사랑할 줄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가족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닌, 가르치고 인도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진정한 혁명가가 되도록 도움을 주며, 민중들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몸소 느끼고 그들과 같이 그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 조국을 위해, 나아가 민중해방을 위해 삶을 바쳤던 체, 그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네번째, 그는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았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다양한 필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게릴라 생활의 기록돌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 게바라였기에 이 땅, 이 나라 청년들에게 강한 열풍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눈에도 강한 상품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이 사회가 이제는 아무리 체 게바라가 살아온다 하더라도 총을 들고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쳐봐야 돈키호테로 봐주면 다행이요, 곧장 교도소아니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야할 처지가 될 만큼 성숙(?)했기 때문에 체의 그 열정과 모험, 다이나믹한 삶 등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에서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리뷰를 마무리하며, 그의 혁명정신과 투쟁, 사회의 변혁 등에 대해 그 중요도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그의 열정만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체 게바라가 주는 한가지 금언 만큼은 우리에게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 21세기에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체 게바라의 뜨거운 열정과 정신은 무엇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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