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김선미 지음 / 마고북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으로 여행관련서를 읽은 듯하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굳이 그런 책들을 읽을 필요가 없었거니와, 그것외에 읽어야 할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라는 책도 나와 인연을 맺기에는 참 어려웠을 듯하다. 이 책도 하나의 상업적전략으로 인해 여름휴가철에 때맞춰 출간되었고, 이 곳 알라딘에서 홍보차원의 서평단을 모집, 거기에 덜컥 당첨이 인연을 맺게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관심은 이 책과는 너무 먼 곳에 계속 있었을 터였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나의 성격은 우선 귀차니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격탓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인천만해도 한 10여년을 살았으나 살고 일하는 곳 외에 다른 곳엘 가본 적이 많지 않을 정도이니, 어디 몇 날을 잡아 먼 곳으로 가는 진짜 '여행'은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또한 실행해 본 기억도 없다. 멀리 떠나봐야 명절에 시골집 내려가는 정도인데, 그것도 고속도로를 타고 훌쩍 갔다가 훌쩍 올라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귀차니즘과 함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도 어쩌면 이 여행을 기피했는지 모른다.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매번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여행 이면의 많은 어려움들을 나는 두려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내 기억속의 여행은 전무에 가깝다. 아! 이것은 지금의 나 -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나 - 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 책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는 우선 기행문이다. 엄마와 두 딸의 여행. 3모녀의 여행은 그저그런 여행이 아니어서 특별하다. 거반 보름간의 여행, 그것도 매번 야영을 해가며 숙식을 해결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어쩌면 위험천만한 여행이었다. 어머 어떻게 그럴수가! 라는 감탄을 우선 동반하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감탄을 대단함에 대한 극찬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아주 잘 이 여행을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사직을 각오하고 한달간의 휴직계를 낸다. 그리고 여행을 계획한다.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여러가지 문제와 고민하지만, 결국 여행에 돌입하고, 3모녀가 14일간의 3번국도를 따라가 제주도와 마라도까지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에서의 즐거움, 우여곡절, 여행중에 일어나는 엄마와 딸들간의 티격태격 등 그야말로 흥미진진 읽게하는 기행문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나 또한 그 도전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 책은 기행문이면서도 살아있는 교육론이라고도 생각이 된다. 제목을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내가 간혹 한자시험과 관련된 일을 하다보면, 요즘 엄마들의 극성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아직 유치원,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시험에 억매이게 하는 엄마들은 극성은 자칫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과 성숙을 저해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이 엄마는 아이들의 그렇게 자라고 성공하길 바라지 않는다. 살아 쉼쉬는 길 위에서, 자연과 세계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서 성숙하고 성장하는, 바로 길 위에서 자라게 하려는 엄마의 교육적 의지가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엄마들이 이 책을 읽고 무작정 자식들을 끌고 나가지나 않을까 하는, 전국 도처에 여행학원이 생겨나고, 여행자격시험이 생겨나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이 책은 또한 자기성찰과 인간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여행을 통해 자란것은 아이들만이 아닌 우선 자기자신이다. 인간을 자라게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길 위'에서 이다. 세상속에서 자연속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세상을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한층 성숙된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실체로써의 세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권의 책 속에서 보는 세상은 눈앞의 하나의 세상보다 못하다. 이런 통찰이 이 책에는 담겨있어, 흥미진진한 기행의 현장에 간접적이나마 동참하게 되는 즐거움과 동시에, 인문학적 성찰에서 오는 깨달음, 그것들이 어울려 이 책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 감동에 내가 동하여 나는 주말과 광복절 사이에 낀 하루를 휴가내서 무작정 떠났다. 밤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의 하나의 경상도 울산엘 내려갔다. 무작정이라고는 하지만, 지인들이 있는 곳이기에 내려간 것이다. 거기에서 울산의 먼 바다를 바라다보며 내 안에 가둬두었던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으로 미뤄두고 싶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혼자만의 멀고 긴 여행을 생각해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 또한 훌쩍 자라기 위해서는 "길 위"로 나가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여행을 위한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계획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서양의 사상가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몇 이름 건너지 않아 나올 이름 중에 하나가 바로 장 자크 루소일 것이다. 루소, 그 이름이 우리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하지만은 않지만, 중요한 이름이었고, 그 중요도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서 그의 사상의 유효함을 반증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나름 지금의 내게도 루소는 소홀할 수 없는 이름이다. 그가 남긴 저서 <<에밀>>때문이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루소는 또한 큰 산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루소를 알지만, 그의 저서를 읽어본 이는 얼마 되지 않는듯 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의 대표적인 역작인 <<에밀>>이나,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등은 그 유명함에 비해 그리 썩 잘 읽히지 않는 것임에 분명하다. 굳이 그것을 읽지 않아도 시험보는데는 지장이 없으니 말이다. 교과서나 문제집에, 그리고 임용시험대비 교육학서적에 잘, 아주 잘 요약되어 설명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의 임용고시생인 지금에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루소에 대한 앎은, 사실 우리를 곤욕스럽게 할 뿐이다. 그의 교육사상을 요약하여 암기한다고 해도, 단지 소용이 다하면 지워져버릴 따름이다. 그의 사상이나 현대 사회에 미친 영향들을 단지 요약하여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우리의 루소 배우기는 그만큼 따분하고, 짜증날 뿐이다.

  루소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를 모조리 읽어낼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해도, 그의 중요한 저작들을 읽어내는 것은 루소를 배우는 가장 기본적 소양일 것이다. 적어도 <<에밀>>이나 <<사회계약론>> 등은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 몇 페이지에 도식화하여 암기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 책 한 번 읽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압축은 추상화를 낳고, 극도의 압축은 극도의 추상을 낳아, 사람들의 이해를 매우 곤란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사상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어떤 위대한 사상가의 저서를 읽어낸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대부분 옳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내는 것은 둘째치고, 그 서문만을 읽기에도 벅차다. 철학이나 사상가들의 저서는 현대인들에게 읽혀지기 매우 어려운 것임에 분명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의 예가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나온 이 책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오해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 분명하다. 굳이 <<사회계약론>>에 입문서가 필요할 것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이 입문서로써보다는 어려울 것이라는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수 있다는 데에 오히려 이 책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이 독자에게 <<사회계약론>>이나 <<에밀>>을 바로 집어들게 한다면, 이 책은 그것으로 목표를 다하고도 남은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학술서로써는 모자란 점이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사회계약론>>에 대한 친절한 안내자 혹은 해설자로써도 훌륭하다. 고등학생들이 교과서에서 루소를 배우는 것보다, 더욱 쉽게 친절하게 설명되고 있다. 말하자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사회계약론>>으로 이끌어주는 역할과, <<사회계약론>>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역할. 이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만족한다는 것에 이 책을 루소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하다. 사실, 루소를 해설하는 많은 책들이 진정 루소의 저서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오히려 더욱 진정한 루소 해설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장점을 하나 더 들자. 이 책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현재적 의미, 현재적 유효성에 대한 큰 주제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사상으로써 추상적인 죽은 사상으로써가 아니라, 루소의 사상이 아직까지 어떻게 유효하고, 그것을 현재적 의미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하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18세기를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 책의 세 가지의 미덕은 이 책의 얇지 않은 두께가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더욱 풍부한 루소의 세계로 안내해 주고 있다. 재밌게 읽을 수도 있는 책이다.

  지금 나는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주문하러 간다.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미뤄두었던 서평쓰기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이 책이 나온 직후 읽어두었다가 서평은 미루고 미루고 이져야 쓰게 된다.

  왜 이제야 쓰는가? 나 자신의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보다는 이 흥미로운 기획, 곧 우리 문학사의 거대한 봉오리들을 라이벌이라는 대립적 구도로 읽어내는 이 획기적 기획에 다소간의 회의라고나 할까? 혹은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이 책의 집필진들은 수유연구실의 인연들이 아닌가? 그들이 고전문학계에서 아직은 주류가 아니고, 하나의 아류이고, 아직은 젊은, 즉 정통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그들의 시기가 오지 않은 학자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 흥미로운 기획이 단지 흥미차원 이상에서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설정해 놓은 각각의 라이벌구도에 나는 약간의 메모를 해 놓았다. 그것은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편향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은 우리 문학의 정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입장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다분히 대중적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간 우리 고전문학자들이 놓쳐온 부분을 보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전이 대중들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부분말이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해볼 때, 정민 교수나, 이 책의 집필진 중 한 사람인 고미숙 씨 같은 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라거나 <<한시미학산책>>같은 책에서부터, <<열하일기>>의 열풍을 일으킨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이르기까지, 고전문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책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부분에 어느정도 부합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다소 나는 위험천만의 우를 범하고 있는지 않난 하는 회의를 갖게 한다.

  "그렇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도 바로 여기다.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산맥은 우뚝한 봉우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상에 가린 작은 봉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을 좀더 우뚝하게 만들어 주는 깊은 계곡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아득한 정상에만 시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삶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다채로운 일생 가운데 아주 특징적인 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의 삶을 기술하는 작업도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진대,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대비시켜 그들의 삶을 다루려는 이 글에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라이벌로 맞세운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정 국면만을 부각시키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전문학사의 라이벌>> 책머리에 8쪽)

  저자들 자신도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 위험성을 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의 이러한 위험성에 큰 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 월명사 VS 최치원

  월명사와 최치원이 과연 라이벌이 될 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다. 여기서는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이게 만들었다는 것이 고작이다. 다소 긴 시간의 층을 건너뛰면서까지 이런 자의적인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여기서는 조동일 교수의 생극론적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곧, 향가와 한시의 상호대립적, 보완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표자로써 월명사와 최치원을 내세운 거인데, 과연 이러한 생극론적 관점이 라이벌의 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의문이다. 시대가 그들을 라이벌로 읽히기를 가능하게 했다면, 그것은 시대의 역사이지, 문학사라고 하기에는 다소 의문스럽다. 그들의 작가적 존재가 많이 가벼워 지는 것에서 그러하다.

  <삼국의 여성을 읽는 두 '남성'의 시각> 김부식 VS 일연

  김부식과 일연이 이러한 라이벌로써 읽히는 것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과연 문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을 라이벌로까지 내세울 수 있겠는가? 그것은 그들이 강력한 문학사의 라이벌로써 존재하기 위한 문학사의 거대한 봉우리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는 데서 오는 회의이다. 그들은 문학사에 있어 중요한 존재들이긴 하나, 그들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함은 그들이 남겨놓은 역사서때문인 것이다. 또한 여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논하고 있는 이 글도 편협한 데가 없지 않음을 느낀다.

  <두 시대의 충돌과 균열> 이인로 VS 이규보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라이벌다운 라이벌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둘은 다양한 문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했다. 시대와 공간과 세월의 굴곡을 넘어 현시점에서 이규보의 승리를 단언하는 것은 자칫, 잘못이겠지만, 이규보의 문학관, 세계관에 동조되어지는 것을 어쩔 수는 없는 듯 하다.

  <건국이 만들어낸 역사의 두 갈래 길> 정도전 VS 권근

  여기서 정도전과 권근의 라이벌 구도에 의문을 던진다.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세울만한 능력을 지녔고 권근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지켜나갈 능력을 지녔다. 정도전과 권근, 라이벌이라 하기에 그들의 임무가 달랐던 것이 아닐까 한다.

  <사대부 문인의 두 초상> 서거정 VS 김시습

  김시습에 무게가 확실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이 가는 길이 달랐건만, 김시습의 삶의 다이나믹함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일까? 서거정과 김시습은 김시습의 거대한 때문에서인지 모르지만, 라이벌로 인식되시기에 서거정은 조금 작다.

  <가문소설의 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김만중 VS 조성기

  김만중의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반면, 조성기는 전문학자들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여기에서는 다소 반가울 만한 것이, 조성기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킨데 있다는 것 뿐, 라이벌로 읽기에는 조성기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다.

  <유쾌한 노마디즘과 치열한 앙가주망 사이> 박지원 VS 정약용

  너무 다른 두 인물이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이나 둘은 이런 구도를 결코 용납지 않았을 것만 같다. 너무 멀리서 있는 거대한 봉우리는 어쩌면 그 크기와 외양을 비교하기에는 그 위치가 너무 멀지 않은가? 이것은 고미숙씨가 말하고 있는 박지원과 정약용의 거리이다.

  <두 중세인이 그려낸 사유와 정감의 극점> 이옥 VS 김려

  반가운 것은, 이옥과 김려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고 의식화되고 무비판적이 되어버린 고루한 편견들을 버리라는 추상과 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울리고 있다.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 VS 안민영

  판소리와 시조라는 두 장르는 우리에게 우리 문화 전반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특히 안민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깊은 관심이 간다.

  다소 난잡하게 서평을 쓰게 된다. 하지만, 이 흥미로운 구도의 연구는 그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고 의도적인 라이벌 구도의 형성에서 오는 문제점을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사의 굴곡을 보다 세심하게 그려내는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앨버트로스,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불리는 이 새는 시 속에 많이 등장한다. 꾀꼬리만큼이나. 그 중 아마도 제일 유명한 시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다.


    자주 뱃사람들은 장난삼아

    거대한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바다 위를 지치는 배를 시름없는

    항해(航海)의 동행자인 양 뒤쫓는 해조(海鳥)를.


    바닥 위에 내려놓자, 이 창공(蒼空)의 왕자들

    어색하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흰 날개를 놋대처럼

    가소(可笑) 가련(可憐)하게도 질질 끄는구나.

        ― (C.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ꡔ악의 꽃ꡕ, 김붕구 옮김, 민음사, 1991.)


  여기서 ‘알바트로스’는 속세에 사는 ‘저주받은 시인’을 상징한다. 이들은 ‘창공의 왕자’의 자태를 보여주지는 이제 그들은 ‘가소 가련’하기만 한 것이다. ‘지상에 유배’된 시인의 운명이란 뻔한 것. 이 세상은 이 ‘알바트로스’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모 코미디에서처럼 “아무도 우릴 이해 못해!”인 것이다. 그런 세상 사람들에게 시로써 아무리 떠들어 봐도 “우리가 이해시”키는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러니 시인은 고독하고 허무한 것.

  이야기가 빗나간 느낌이 들지만, 앨버트로스에는 이런 느낌이 담겨져 있다. 시인의 비극 같은 종류의. 그래서 그런지 이런 앨버트로스가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이 그리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는다. 여기 앨버트로스가 만들었다는, 아니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졌다는 작은 나라가 있다. ‘나우루 공화국.’ 어쩜 이 나라도 앨버트로스의 시인과 같은 운명, 즉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 갇혀버릴 것만 같지 않은가?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 졌다는 나라가 있다? 동화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웃자고 지어낸 우스갯소리도 아니다. 여기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가 있다. 바로 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위의 한 점, 바로 나우루 공화국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나우루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동화속의 이야기인줄 만 알았더니, 진짜로 이 작은 섬이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 되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유토피아’? 그렇게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일까? 이 나라에는 부자들만 있단다. ꡔ홍길동전ꡕ에나 나오는 이상국(理想國)일까?

  이 책을 읽는 데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나의 씁쓸함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살짝 던져놓고 간다. 그 씁쓸함이라는 것은, 이 지구상에 ‘유토피아’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또 하나의 반증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근대의 제국주의와 야만적 폭력의 문명이 망가트려 놓은 한 평화롭던 작은 섬의 비극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어떤 것일까? 근대문명이 가져다 준 ‘부’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과연 ‘유토피아’일까? 그렇다면 여기 나우루 공화국은 한 때지만 이 유토피아를 경험했다. ‘앨버트로스의 똥’이 쌓이고 쌓여 섬을 이루고, 이것이 어떤 화학작용을 거쳤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인광석이 되어, 이 섬의 국민 모두를 부유하게(한 때에 불과하지만) 했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경험한 행복한 나라였던 것이다. 부러운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지 않는다. 지금의 나우루 공화국의 현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긴 하지만, 인광석의 고갈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나우루 공화국의 지금 현실은 흔한 유토피아의 붕괴를 말하지는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전의 국민 모두가 부유했던 그 시기가 절대 유토피아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제국주의와 근대 문명이 가져다 준 하나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문명과 기계를 인광석이라는 자원을 이용해 물질적 부를 미끼로 준 것이다. 어쩌면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기 이전의 이 섬이 어떤 의미에서는 유토피아에 더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인광석을 이용할 수 있었을 때부터가 이 나우루 공화국의 비극의 시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기, 아니 지금의 대책 없는 현실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 ꡔ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ꡕ에서 우리가 얻어낼 것은, 자원의 고갈을 대비해야 한다거나, 아무리 부유해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거나, 나우루 공화국의 국민들이 너무 무식해서 그 좋은 걸 가지고도 나라를 망쳐버렸으니 어의가 없다거나 하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 문명이 가져온 이 지구의 비극의 축소판으로 나우루 공화국을 읽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이 근대 문명 속의 ‘알바트로스’와 같은 시인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재미있게 만은 읽을 수 없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런 씁쓸함을 무엇으로 대신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집을 읽어볼까! 어쩜 앨버트로스의 외침을 엿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망할 놈의 세상, 이제 좀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근대(近代)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은 대단히 자의적이다. 중세라는 시대는 그대로인데, 근대는 자꾸만 길어진다. 상대적 불합리. 近代라는 설정 자체가 이런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근대는 “지나간 지 얼마 안 되는 가까운 시대”를 말한다. 우리 역사 구분에서는 현대를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에 현대는 없다. 왜 그런가? 역사는 과거를 그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는 단 1분 1초도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내온 모든 것이 근대이다. 어디까지를 ‘가까운 시대’라고 할 것인가?

 

  따지자면 대단히 골치 아프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근대’를 받아들인다. 역사 연구자들이 던져준 근대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시대 구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진짜 골치 아프다. 역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시간을 쪼개어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어쩌면 신의 능력을 소유해서나 가능할 수 있는 가공할 상상이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하고 있고, 따라서 신적 능력의 발휘자(發揮者)들이 던져준 근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도리 밖에 없다.

 

  과연 근대란 무엇인가? 아니 근대적 사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는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이 애매모호한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에서 앞서 말했던 역사의 시대 구분의 위대성을 따지는 것은 자칫 불경죄에 해당하는 신격모독일 수 있으므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타협을 하고 간다. 아하 이 ‘근대’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로구나!

 

  저자 고미숙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최고의 지성 연암 박지원의 역작 ꡔ열하일기ꡕ를 새롭게 읽어낸 ꡔ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ꡕ에서였다. ꡔ열하일기ꡕ라는 그 방대한 고전을 이처럼 재미나게 읽어내는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숙 선생이 ꡔ열하일기ꡕ를 얼마나 재미있게 읽어 냈던지, 어지간한 전공자나 완독할 법한 이 방대한 분량의 ꡔ열하일기ꡕ가 일약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게 했으니,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겠다.

 

  ꡔ나비와 전사ꡕ는 그런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아니 고미숙 선생의 읽기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역작이다. 여기서는 이 ‘근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싶다. 근대라는 거대한 산에 바위나 칠 법도 못한 계란을 던지는 형국이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반란은 반란이다. 어쩌면 ‘근대’는 하나의 거대한 ‘리바이어던’이 아닐까?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전의 시대와는 단절된 근대를 주장한다. 즉,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은 돌연변이라는 것이다. 좀더 확실히 하자면, 시대의 단절은 불가능하므로, 근대가 아닌 근대적 사유가 이전의 사유와는 완연한 단절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근대적 사유라는 것, 근대성이라는 것에 대한 공격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복시켜야만 할 탈근대적 사유, 탈근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반란, 혹은 혁명.

 

  근대는 왜 ‘리바이어던’인가?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9장까지를 이 근대의 모순들을 파헤치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시간’, ‘인간’, ‘性’, ‘몸’, ‘앎’이라는 큰 테제들을 가지고 여기서 잠복해 있는 근대적 사유의 ‘괴물성’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이 단수가 된 건 20세기 근대의 산물이다. … 오직 인간의 활동만으로 역사를 구성하게 되면서 시간은 단 하나의 척도로 가늠되었다.”(p.22.) ‘단 하나의 척도’는 바로 ‘돈’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이다. 근대의 괴물성은 바로 시간, 속도의 균질화, 혹은 화폐화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일컬어 “속도의 파시즘”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인정해야할 근대의 모순이다. 저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어떻게 “사랑하는 이와 뜨겁게 교감하는 시간과 증오와 분노로 마음지옥을 헤매는 시간, 혁명적 열정으로 바리케이드 위를 지키는 전사의 시간이 동질화될 수 있”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 근대의 속도는 우리를 “시간을 수로 계산하고, 그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강제”한다.

 

  지금까지는 이 책의 1장 서두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시간, 속도의 불합리성 혹은 모순들을 다양한 예에서 찾아내고 있다. 재미있던 것 중의 하나는 이 근대적 시간화, 속도화의 상징인 ‘기차’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우리를 평범하게, 혹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다양한 소재에서 이 근대적 사유의 맹목성과 파시즘적 성격을 찾아내고 있다. 유쾌, 상쾌, 통쾌, 그리고 쓰라린 웃음!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는 예민한 주제이다. ‘인간’을 테제로 한 장에서 ‘종교’를 논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아주 민감하고 예민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왜? ‘신성불가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근대’에 대한 규정만큼, 아니 그 이상이나 신적 영역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생매장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종교’ 안에도 근대의 괴물성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겉으로 뚜렷이 인식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에 대한 반성 혹은 전복.

 

  3장과 4장은 ‘性’이라는 주제에서 역시 근대라는 리바이어던을 탐색하고 있다. ‘변강쇠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근대의 전형적 괴물성을 유감없이 끄집어내고 있는 뜨거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9장까지의 내용은 이 근대의 리바이어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소월과 만해, 그리고 허준까지도 등장하니 말이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가볍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가볍게 다루어야 한 책 안에서 많은 소재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만큼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 될 수 있으면서도, 단점이 될 여지가 많다. 그것은 근대라는 이 거대한 괴물을 그렇게 가벼이 다루어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닌 기암절벽 거대 산치기가 아닐 수 없다.

 

  끝의 2장에서는 이런 근대성, 혹은 근대적 사유의 리바이어던을 전복시키는 것에서 나아가 탈근대의 비전을 탐색한다. 그 비전은 연암에게서 나오고 있다. 아 이 또 무슨 괴이한 일인가? 18세기 중세의 문인이 21세기를 넘어 탈근대를 추구하는 한 지식인에게 그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다니! 오 놀라움! 그 놀라움으로 그 비전을 읽다보면, 에휴, 또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니 거대한 괴물과 맞선 나비, 혹은 나비의 꿈.

 

  이 책 제목 “나비와 전사”에서 나비는 바로 박지원이다. 그럼 ‘전사’는? 다름 아닌 푸코이다. 이 책 각 장의 시작은 나비와 전사의 공통된 사유 속에서 끄집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절단과 채취를 통해! 그런데, 근대적 리바이어던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서는 정작 전사는 숨어버리고 나비만이 고군분투하는 형국이라니! 이것은 어쩌면 저자가 근대에 대한 맞섬에서 살짝 꼬리를 내리는 기미로 보일 수도 있으려니와, 다정한 애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반란은 하되, 혁명이 아닌 반란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 ꡔ나비와 전사ꡕ를 읽으면서, 나는 근대적 사유의 모순들을 새삼스럽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에 가장 큰 보람과 가치를 느낀다. 그 거대적 담론에도 불구하고 유연하고 가벼운 터치는 다분히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곧 이것은 약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 그 깊이를 줄이고 있는 것은, 다분히 체계적이지 못한 서술이기 십상이다. 그만큼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체계라는 것 또한 근대적 사유에 다름 아닐 수 있기에 뭐라 딱부러지게 말하기 꺼려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좋은 책 한 권을 만난 후의 보람은 크다. 저자 고미숙씨가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탐구, 곧 근대에 대한 반란, 탈근대에 대한 비전 찾기는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하지만 근대와 싸우는 나비만 있고 전사를 어디를 갔는지? 진정한 싸움은 전사의 등장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나비와 단짝을 이룰 전사를 찾아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가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