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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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나는 판타지소설을 좋아했다. [반지의 제왕] 같은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도 물론 좋아했지만 국내 작가들이 빚은 판타지소설을 더 좋아했다. [드래곤라자]와 [하얀 로냐프 강]은 지금도 가끔 생각나서 찾아 읽을 정도로 좋다. 네모난 교실, 네모난 책상, 네모난 칠판이 전부였던 나의 청소년기에 판타지 소설들은 돌파구였고 피난처였다. 책장만 열면 판타지의 세계로 풍덩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

판타지소설에서 시작된 소설 사랑은 우리나라 장편소설을 읽는 방향으로 뻗어갔다. 누런 갱지에 인쇄된 [토지]를 한 권, 한 권 넘어가며 나는 수학여행으로도 가본 적 없는 경남의 하동, 일본, 만주를 마음으로 누볐다. 앨리스가 저도 모르게 토끼굴로 빠져든 것처럼 소설 속은 블랙홀 같아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동안 나는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그 소설의 세계를 여행하다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여행을 갈 때 책을 들고 가는 애서가들이 많은데 나 역시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소설만은 웬만하면 들고 가지 않는다. 현실의 여행과 소설 속 여행이 겹쳐 시너지를 일으킬 때도 있지만 묘한 괴리감을 받은 경우가 더 많아서다. 여행은 몸으로 가든지, 소설 속으로 가든지 둘 중 하나만 하는 걸로, 경험이 가르쳐줬다.

 

여행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소설가 김영하야말로 온갖 경험들을 찰진 표현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유능한 여행가로 꼽을 수 있겠다. 이미 방송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증명한 바, 그는 여행을 즐기는 여행광이다. 김영하 작가가 최근에 펴낸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김 작가는 자신이 왜 그토록 자주 여행을 떠나는지를 고백한다. 그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 독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가 여행에 매료된 이유와 같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신생아는 자기가 도착한 나라의 말을 모른다. 부모와 친척들이 참을성을 가지고 몇 년을 도와야 비로소 기초적인 언어를 익힐 수 있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여행자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갈 때, 남아 있는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책 [여행의 이유] 138쪽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인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집중시킨다. 우리는 한 도시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변두리의 단조로운 주택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중략)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책 [여행의 이유] 204쪽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 표현은 낯설지 않다. 독서를 여행에 비유한 표현 역시 낯설지 않다. 김영하 작가는 이 익숙한 비유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서로 닮아있는 여행과 인생과 독서의 상관관계가 이 책 [여행의 이유]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여행의 이유]에서 저자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여행, 자신의 맨 처음 해외여행, 소설가로서의 여행 등 그동안 그가 했던 다양한 여행의 기억을 들려준다. 그러나 이 책이 여행기는 아니다. [여행의 이유]는 저자의 유년기롭터 지금에 이르는 인생의 흐름 속에 '여행'이 저자에게 어떤 감정과 경험을 선사했는지 그 내밀한 정서를 고백한다. 과거와 미래는 사라지고 오직 현재가 육박해 오는 여정, 낯선 이들 속에서 얻는 뜻밖의 배려와 친절,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겸허해지는 시간. 여행은 익숙한 일상에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감정과 생각들을 선사했고 길 위에서 보낸 시간 속에서 건진 진주 같은 이야기들을 저자는 이 책[여행의 이유]에 담았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예측 불가능하고 무질서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지켜낼 심리적 틀을 배운다고 저자가 썼듯, 독자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 이야기를 읽으며 혼란과 두려움 속 현재의 일상을 견딜 이유를 얻는다.

 

코로나19로 사회적거리두기가 계속되는 지금, 우리의 일상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속에 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 혹은 예약한 모든 여행 계획을 취소해서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이 무거운 공기 속의 일상을 이겨낼 용기, 온갖 변수 가운데 진정으로 옳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혜안을 얻기 위하여 꼭 몸으로 떠나야하는 건 아니다. [여행의 이유]와 같은 에세이든, 주인공이 고군분투 하는 소설이든 아직 우리가 갈 수 있는 여행지는 무척이나 많이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직 독서가 있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집중시킨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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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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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옵션을 고르듯이 부모도 고를 수 있다면 운명은, 각자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세상에 태어날 때 상속받는 유전자는 선택할 수 없더라도 태어난 이후 살아갈 환경을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면 어떨까? 그건 행운일까?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테스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테스트를 해주셨던 선생님이 그랬다. "누군가는 사랑의 표현을 말로, 누군가는 궂은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누군가는 선물을 하는 것으로 한다. 사람마다 사랑의 표현법 즉 사랑의 언어가 다른데, 한 가정 내에서도 가족 구성원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 특히 부모가 쓰는 사랑의 언어와 자녀가 쓰는 사랑의 언어가 다르면 서로 간에 오해가 쌓이기 쉽다." 부모가 자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자신의 기준과 취향,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자녀에게 강요하면 생기는 건 갈등 뿐이다. 부모가 그들의 부모와는 다른, 독립된 인격체이듯 자녀 역시 부모와 구분되고 분리된 인격체다. 부모가 자녀에게 똑똑하고 성실하거나 착하고 부지런하거나 등등을 바라듯 자녀 역시 부모가 지혜롭고 인내심이 많거나 상냥하고 다정하거나 등등을 바란다.

 

청소년 소설 [페인트]는 자녀가 바라는 부모에 대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페인트] 속 시설(NC)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 부모가 아닌 국가로부터 양육을 받은 시설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기르면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 보조금이 절실한 기혼 커플들은 부모 면접에 뛰어든다. 아이들은 이력서를 낸 지원자들 면접을 보는 가게 사장님처럼 부모 지원자들을 심사한다. 생활 형편은 괜찮은지, 성격은 원만한지, 말이 통하는 타입인지, 취향은 비슷한지. 마치 결혼시장에 뛰어든 여자와 남자가 서로의 조건을 계산하고 만나보듯 부모와 자녀가 조건만남으로 가정을 이룬다. 그래서 [페인트] 속에서는 시설의 아이들이 만족스러운 가정을 이루는지 어쩐지는 비밀. 궁금하신 분들은 책[페인트]를 읽어보시라.

 

 

아내와 남편 사이는 무촌이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천륜이다. 어느 관계가 더 운명적이고 절대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페인트]를 읽고 나서 부모와 자녀 사이는 천륜이라는 말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낳아준 부모에게 양육을 받은 자녀 사이는 운명이고 생물학적 부모는 아니더라도 기른 부모와 자녀 사이 역시 운명이다. 인연은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닿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운명적이다.
인연이 운명이라면 생활은 노력이다. 어떤 인연으로든지 한 가정을 이루게 된 구성원-부모와 자녀-들이 각자 어떤 노력을 하는지에 따라 가정 생활의 만족도가 달라진다. [페인트]는 그래서 묻는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행복한 가정이란 어떤 거냐고?

 

 

“바깥에서 지내다보니까,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애들도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더라. 부모와 남보다 못하기 지내는 경우도 있고 의견 충돌도 잦고. 부모에게 바라는 거라고는 제발 아침마다 잔소리 좀 하지 마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VR룸에서 보낼 수 있게 해 줘라, 친구하고 비교 좀 하지 마라, 몰래 멀티워치 좀 살펴보지 마라 뭐 이 정도거든. 한마디로 부모에게 특별히 기대할 게 없단 거지. 그런 부모들이 프리 포스터로 왔다고 생각해 봐. 누가 페인트를 하겠냐? 바로 안녕이지.”
[페인트] 183쪽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나는 나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나란히 걸었다.
가족이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몰랐다.
‘먼발치’라는 말의 뜻은 시야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대화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떨어진 거리, 라고 한다.
[페인트] 160쪽

 

“우리는 다 열세 살이 넘었어요. 오히려 부모와 멀어지는 시기라고요. 가장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부모를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이겠어요? NC출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인 거죠. 물론 정말 아이를 원하는 프리 포스터들도 있겠죠. 진심으로 부모의 사랑을 원하는 아이가 있듯이.”
그게 누군지 아시죠? 나는 박에게는 눈으로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말을 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살아가는 거, 저희만의 얘기가 아니잖아요. 바깥세상의 가족들이 사랑으로만 연결되어 있나요?”
[페인트] 190쪽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정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어서기도 하다. 서로가 너무나 소중해서, 사랑해서, 정이 깊어서 등등 동화 같은 답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족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인가, 이런 질문에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로부터, 자녀는 부모로부터 혹은 보호 받고 있던 존재로부터 자립하여 오롯이 자신의 모습이 되는 것. 그게 참 어른일텐데,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보면 참 어른은 많지 않아 보인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이 준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기대를 하고 의지를 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 그래서 가족은 행복의 근원인 동시에 상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란 참 기묘한 구성체 안에서 공존하는 상처와 행복에 공감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때문에 가족 내부에서의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의 것이다. [페인트]가 자기의 현재와 미래를 자기 손으로 그리고 싶어하는 청소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고민하는 성인들에게도 깊은 공감과 울림을 남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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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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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사의 엔지니어가 지방의 영업직원이 되고 그마저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퇴직으로 밀려났다가 산골 노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하청업체 노동자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고객과 민원인들에게는 회사의 대언자가 되곤했지만 정작 그가 곤란할 때 회사는 그의 대언자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는 고객과 민원인들에게 회사가 시키는 대로, 회사의 입장대로 말하는 일을 수행했지만 고객과 민원인들이 그에게 찾아와 회사의 입장과 조율울 보고자 할 때에 그 조율에 응하는 일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실체도 형체도 없이 그저 '회사'라는 글자로만 존재하는 조직과 그 조직이 떠맡긴 일을 수행하는 그, 9번. [9번의 일]은 그 9번이 회사로부터 받은 일의 실체와 그 일이 9번의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살벌해, 점점 더 살벌해진다니까. 단물만 다 빨아먹고 이제 빈손으로 나가라는 거지. 안 그래요?

어디 여기만 그런가. 다 그래. 다 그렇다고. 개새끼들. 못된 건 서로들 또 얼마나 금방 배우는지. 하는 짓거리들 보면 다 똑같아.

맞아. 못된 건 금방 배워. 왜 그럴까? 응? 왜 그런거야?

85쪽

 

 인간성이 파괴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사람을 파괴할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냄비에 든 개구리가 물이 따뜻해지는 동안은 그걸 즐기다가 결국 물이 끓을 때까지 냄비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죽게 되듯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동안 개구리는 알지 못한다. 이 뜨거운 물이 결국 나 자신을 죽일 거라는 사실을. 그러나 만약 알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 따듯하고 아늑한 냄비 안을 포기하고 나올 수 있었을까? 냄비 속 따듯한 물이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9번의 일]의 주인공 그에게는 이것이 '일'이었다.

 

걷다 보면 거대한 싸움판 한가운데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 비열하고 야비한 방식으로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것 같았다. 매일 아침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를 주시하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싸움을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자신과 나란히 걷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165쪽

 

 직업이나 회사 내에서의 역할로서의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일은 무척 치명적이다. 자아 실현의 방법으로서의 일은 이제 지나간 시대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시대의 자아 실현은 더이상 자의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자의를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sns에서 방송에서 온갖 미디어와 거리에서 그리고 집에서마저 우리는 자아를 의심받고 자신의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당한다. 가진 것도 많고 누리는 것도 많은 잘난 타인들 속에서 우리는 자꾸만 주변으로, 변두리로 밀려나고 밀려난다. 그래서 일을 한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일은 사회 구성원으로, 가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가족으로, 현대 사회에서 낙오되고 소외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나 자신이 되게 해준다. 그렇게 일이 내가 되고 내가 일이 된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했는데 일에게 잠식당한 후로 일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켜버린다.

 

오랫동안 그에게 회사는 시간을 나눠 가지고 추억과 기억을 공유한 분명한 어떤 실체에 가까웠다. 그의 하루이자 일상이었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친구이자 동료였고 가족이었으며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부이자 전부였던 것.

그는 잠에서 깨어나듯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의 생각은 스스로를 여기까지 밀어붙인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책 229쪽

 

[9번의 일]은 일이 사람을 잠식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렸다. 9번에게 닥친 상황은 특이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며 기이한 것도 아니다. 아주 보통의 상황, 우리 중 누구라도 잘 아는 상황이다. 한 번 이상 겪어본 상황이기도 하고 아직 안 겪어본 이에게는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꼭 한 번 겪을 법한 상황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섬뜩하다. 9번의 일은 나의 일이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뼘씩 두 뼘씩 성큼성큼 자라나서 마침내 스스로 서 있게 된 철탑을 올려다볼 때마다 그의 내부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차올랐다. 그건 두려움으로 번졌고 이내 공포심으로 몸집을 키웠다.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완성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만든 것이 저토록 흉물스러운 것이었다는 깨달음과 이곳의 작업이 끝나가고 있다는 불안감과 충돌하며 밤새 그를 깨어 있게 했다.

그것이 그가 만든 것의 실체였다.

245쪽

 

어쩌면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건 아주 적절한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9번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흉물스러운 것의 실체를 마주한 때는 그가 완전히 세상과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차단되어 고립된 후였다. 다음 9번은 누구인가? 이대로 우리가 각자의 세계에만 갇힌 채 일에 몰두한 채로 이 세상에 지속된다면 '일'의 시커먼 아가리에 물리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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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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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풀어. 어깨에 힘 풀고 표정도 풀어. 세상을, 우리가 사는 현실을 이야기하자는 데 굳이 무게 잡을 필요는 없으니까. 꼭 맥주컵에 소주 부어서 안주도 없이 마셔야만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분위기가 잡히는 건 아니다. 세상이 빌어먹게도 엿같은 건 사실이고 그런 세상 속에 별 거지같은 인간들이 많다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필요한 건 분위기가 아니라 날렵한 감각이다.

 

배드민턴을 제법 쳐본 사람을 안다. 스매싱을 제대로 날리려면 어깨에 힘을 풀어야 한다. 어깨와 온 팔에 모든 힘을 다 빼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스맵으로 완성한 스매싱이 발현된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말하자면 완벽한 스매싱같은 책이다. 굳은 표정으로 각잡고 세상을 옴팡지게 후두려패겠다는 근육은 없다. 소금쟁이가 물 위를 미끄러져가듯 가볍게 날렵하게 그러나 정확하고 민첩하게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낱낱이 그려낸다.

 

 

십년 뒤에 우리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나는 혼자 십년 뒤, 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십년 뒤, 그때까지 언니가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회사에 있을 수 있을까.
32쪽 [잘 살겠습니다]

 

그 순간 케빈과 내 스마트폰 알림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봤다. 케빈과 내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60쪽 [일의 기쁨과 슬픔]

 

“전 막 열심히 하기도 싫고,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돈사장이 장우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크게 웃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음악은 잘 만들겠네. 아까워 죽겠어.”
그리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유미의 반응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114쪽 [다소 낮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속눈썹이 자신의 눈에 닿은 것처럼 느꼈다.
문밖의 남자가 내쉬고 있을 콧바람이 여자의 인중에 뜨듯하게 끼쳐 오는 것만 같았다.
너무 빨라서 박자조차 잊은 듯한 심장박동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문밖의 남자에게 전해질까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자가 잡고 있는 동그란 문고리는 땀으로 흥건했고, 더 잡고 있다가는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남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더니 몇 번을 더 깜빡인 뒤 렌즈로부터 얼굴을 뗐다.
177쪽 [새벽의 방문자들]

 

 

그렇다. 같은 시대를 숨쉬고 있는 20-30대의 우리들은 대부분 그렇다. '막 열심히 하기도,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다. 뭐 크게 어떤 걸 해보겠다는 마음도 없고 막 엄청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문자에 기뻐하고 첫출근길에 겨드랑이가 젖어서 해고될까봐 초조해하고 새벽 3시에 혼자 사는 집을 두드리는 낯선 사람때문에 공포에 떠는 우리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부피 역시 소소하다. 피를 토할만한 울분이나 세상이 무너진듯한 절망같이 거대한 감정은 우리의 현실 속에 없다. 그래서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반갑다. 힘을 다 빼고 가벼운 스냅으로만 날리는 스매싱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이 날리는 공은 재빠르게 현실의 우리들을 공략한다.

가벼운 것은 경박하고 얄팍한 법이라고, 누가 아직도 그런 말을 해? 가볍기 때문에 [일의 기쁨과 슬픔]은 끝도 없이 현실적이고 현실감 가득한 이야기들로 말미암아 이 책에 실린 8개의 단편은 독자의 뇌리에 오래 남는다. 이 단편들은 언젠가 내가 느꼈던 기쁨, 저번에 내가 느꼈던 슬픔들인 탓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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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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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싸우게 된걸까? 그런 고민에서 출발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지 않던 시절도 있었을까? 심진경 평론가의 말대로 과연 우리 시대에 자매애란 가능한 것일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는데 (지금도 어느 커뮤니티에서는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적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만인은 만인에 대하여 투쟁한다. 굳이 토마스 홉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시민론]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아도 이 사실은 명백하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구촌 인류 중에 이 말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 프레임을 들이대면 곤란하다. 여자는 여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남자는 남자에 대하여 싸운다든지 뭐 이런 프레임 말이다. 사람의 뇌는 변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변수는 위기와 위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변수를 줄이기 위하여 뇌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 중 하나가 프레임이다. 시야를 자꾸 좁히는 것이다. 타조가 구덩이에 대가리를 박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행태를 우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발 타조 대가리를 비웃지 마시라. 사람의 뇌도 비슷한 행태를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자주 반복한다. 지금도 뉴스 기사나 그 기사의 댓글란에 보면 프레임을 자처해서 뒤집어쓰고 자기가 보고 싶은 세상만 보는 타조들이 얼마나 많은지.

[붕대 감기]는 가능한 모든 프레임을 거두고 21세기 한국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삶을 재단하지 않은 소설이다. [붕대 감기]는 제목과는 달리 친절하고 부드러운 소설은 아니다. 독자에게 친절하게 붕대를 감아주기 보다는 붕대를 툭 던져주고 어떻게든 저떻게든 감아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이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책 뒤에 실린 심진경 평론가의 글을 읽고 작품을 읽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이 무엇을 묻는지, 무엇을 생각해보자고 제안하는지를 좀더 선명하게 느낀 후에 작품을 읽으면 훨씬 얻는 게 많을 테니까.

전업주부와 워킹맘, 기혼녀와 비혼녀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적대시한다. 서로 불화하는 이 여성들에게 과연 자매애란 가능한 것인가. 서로 입장과 처지가 다른 다양한 여성들이 펼쳐가는 각색의 에피소드와 대화를 통해 이 소설이 암시하는 고민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175-176쪽 심진경 평론가의 글 중에서

이 책은 여성들의 연대에 대하여 감히 이야기하는 동시에 왜 이렇게 우리-여성, 남성, 장년과 청년, 부모님와 자녀 등등-는 서로 싸우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힌트까지 담고 있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형은과 채이의 대화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언니, 자원이 부족한 거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거지 같은 걸 어떻게 해? 지금은 모두가 풍족해질 만큼 힘을 나눠 가질 수가 없어. 덜 가진 쪽은 더 가진 쪽을 보면 화가 나기 마련이야. 얼굴을 보자마자 화가 나는데 만나고 싶겠어?

146쪽

나는 지금 우리 세상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계급'과 '차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데에 있다고 본다. 어느 사회나 계급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든 동물의 세계든 식물의 세계에서조차 계급이 있다. 조직이 존재하는 한 계급은 없어질 수 없다.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 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적합한 역할에 따른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계급과 차별이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계급은 구분되는 것이지 차별의 정당화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구별이 안 되는 게 지금 우리의 세상이다. (이 구별이 되었던 적은 지금까지의 역사 중에 한 번도 없었다) 차별을 없애려면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급을 빌미로 차별을 당연시하는 것 모두가 틀렸다고 본다. 그런데 이 구별이 어려워서일까? 현실에 적용하기 까다로워서일까? 계급은 권력과 자본 즉 가진 자들의 소유로 인식되는 게 현실이다. 형은과 채이의 대화는 이 비틀린 현실을 꼬집는다.

그럼, 그래서 뭐 어쩌라고? 보기만 해도 화가나니까 계속 싸우자고? 그런 방향 말고 다른 방향을 제시하려고 [붕대 감기]는 이야기한다. "시간이 지나야 해. 서로를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걸려." 진짜 좋은 말이라고, 이 소설에서 [붕대 감기] 중에서 가장 뜨거운 한 문장을 고르라면 나는 이 문장을 고를 것이다.

단순한 여성주의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참 다양하고 다각도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 [붕대 감기]

서로에게 붕대를 감아주기를 원하는 모든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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