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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ㅣ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진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에서 보는지, 어떤 날씨에 보는지, 심지어 어느 시간에 보느지에 따라서도
자연 풍경마저 달라지지 않는가.
이게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인 줄 알았다면 아마 진즉에 찾아 읽었을 거다. 헨리 제임스가 쓴 [나사의 회전]은 1898년에 발표한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현대 고딕 소설, 심리 소설의 사조라고도 불리는데, 나는 고딕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인지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심리 소설로 읽었다.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사람 중 하나인 나는 공포영화 속에 심어놓은,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나 '혐오감을 들게 하는 장치'들을 아주 불편하게 느끼기에 그런 류의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을 즐기진 못한다. 그런데 [나사의 회전]에서 감탄한 부분은 놀라게 하되 아주 천천히, 안개가 스며들어 어느새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느리지만 분명하게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공포영화는 싫어하지만 긴장감 가득한 스릴러는 또 무척 좋아하는 기묘한 취향의 내가 정말 몇 년 만에 취향저격 소설을 만난 것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소설의 가장 주된 화자인 가정교사의 입장에 서서, 그녀의 시선과 관찰과 감정을 따라가며 읽어도 기이한 긴장과 스릴이 느껴지고 그 정반대의 입장에서 읽어가도 다른 결의 스산함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는 처음에 읽기 시작할 때부터 가정교사의 불안한 심리 상태가 마음에 걸렸던 터라 그녀가 묘사하는, 그녀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어디까지나 '가정교사가 재단한 사물과 사람'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읽어갔다. 그래서 마일즈가 저택으로 돌아오고 가정교사가 유령을 목격하고 전전긍긍하는 단계에서는 가정교사의 극단적인 렌즈가 저택 전체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문제는 그 날 밤이었다. 한밤중에 마일즈가 저택 마당에 서서 저택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 날 밤.
실은 여전히 가정교사가 목격했다는 그 유령들이 미스 제셀과 피터 퀸트 였는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경험이 많지 않고 예민하고 젊은 가정교사를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특히, 자기를 고용한 고용주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그의 인정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면 자기 무덤이라도 팔 것 같은 이 여자의 이성과 감정의 기울기는 과연 평행한가? 마일즈와 플로라를 찬양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가 '아.. 이 분 얼빠네. 그 아이들 삼촌한테도 그러더니.'라고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래서 호숫가에서 가정교사가 미스 제셀의 유령을 보았을 때, 호수를 등지고 놀이에 전념하는 플로라를 관찰하면서 '세상에, 플로라는 이미 미스 제셀의 유령을 보았고 심지어 애써 저 여자의 등장을 무시하고 있어!!'라며 경악할 때 심지어 우습기까지 했다.
가정교사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그로 인한 시야의 왜곡에 나마저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작품을 읽어나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 가서는 가정교사에 대한 불신이 나에 대한 불신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혼자 숲으로 간 플로라와 그를 쫓아간 가정교사와 그로스 부인과의 대화 장면이 결정적이었다.
플로라는 작고 발그레한 얼굴을 굳은 듯 경직시킨 채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난 표정으로 내 속을 꿰뚫어보며 비난하는 것 같았다.
173쪽
이 장면에서 플로라가 보여주는 반전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가정교사가 플로라를 정확하게 보았고 내가 틀렸나?' 작품 초반부터 지금까지 내내 내가 가지고 있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가정교사의 집요한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 플로라가 어른들이 경악할 만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무서운 아이 플로라로 변신하는 부분이다. 이 장면 이후로는 이야기가 그야말로 급물살을 타면서 앞에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결과로 작품은 끝이 난다.
가정교사가 할리 가의 주인인 고용주와 짧은 만남을 하면서 맺었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단연 '절대 고용주를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었다. 조카들과 조카들이 사는 곳에 대하여 모든 관심을 끄고 싶어하는 고용주의 의지는 상당히 강력했다. 심지어 이 고용주는 가정교사가 플로라와 마일스가 사는 저택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마일스가 다니던 학교장이 보낸 서신을 봉투도 뜯지 않은 채 가정교사에게 고스란히 넘기면서 '나는 알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보고하지 말라'고 전하기도 했다. 이야기 초반인 그때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의아했다. 아이들을 너무도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인가? 자기가 떠안게 된 조카들이 짐스러워서 싫은가?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결말을 모두 읽은 후에 돌이켜 보면 조카들에게 여러 번 당한 기억이 있어서 치를 떨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플로라가 결말부에서 보여준 변신을 감안하면 그러고도 남을 만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 작품은 아이들의 말과 반응에 대한 가정교사의 해석과 응대만을 통하여 작품 속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야기 속에서 가정교사가 '이건 이런 뜻이야, 저건 저런 뜻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라고는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런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교사가 해석한 내용을 반박할 수도, 다른 의미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이 소설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유일 것이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건대 가끔 두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오빠나 동생을 팔꿈치로 살짝 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꼭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못하실 거야!” 여기서 ‘한다’는 표현은 나의 훈육에 간섭하기 시작한 그 여자의 유령에 대해서 내가 한 번쯤은 직접적인 언급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127쪽
빛나는 재치와 따듯한 배려가 담긴 그의 제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리가 함께 읽었던 중세 이야기에 나오는 진정한 기사들은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았어요. 이제 선생님의 마음을 알겠어요. 이제부터 선생님은 저를 혼자 있게 해주실 거고, 제 걱정을 하거나 몰래 엿보지 않을 것이며, 항상 저를 옆에 두려고 하지 않으실 거죠. 제가 어디든 다녀올 수 있는 자유도 주실 거예요.”
161쪽
이번에 읽은 [나사의 회전]은 미래와 사람 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시카고플랜 고전문학 시리즈 중 하나다.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든지 주의를 기울여 충분히 즐기면서 읽으면 좋은 게 독서이지만 이 '시카고플랜'은 더 나은 독서와 사고를 위하여 누구라도 해볼 만한 유익한 독서법이지 않을까. 책 속에서 모델을 정하고, 가치를 발견하고, 발견한 가치에 대하여 비전을 가지라는 세 가지 과제를 생각하며 책을 읽는 건데, [나사의 회전] 같이 장르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소설에 저 세 가지 과제를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독서모임의 주제 도서나 토론 때에 이야깃거리로 매우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분명히 기억하건대 가끔 두 아이 중 하나가 자기 오빠나 동생을 팔꿈치로 살짝 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꼭 하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못하실 거야!" 여기서 ‘한다’는 표현은 나의 훈육에 간섭하기 시작한 그 여자의 유령에 대해서 내가 한 번쯤은 직접적인 언급을 할 것이라는 뜻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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