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구단 DNA - 메쎄이상의 코로나19 극복기
조원표.이상택.김기배 지음 / 하다(HadA)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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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첨단 전자상거래 회사(알리바바)가 왜 전시회를 하는 건가요? 오프라인 전시회와 알리바바닷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알리바바가 본사에서 오프라인 전시회를 수시로 개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나에게 이 책 본문에 등장하는 '오프라인 전시회와 알리바바닷컴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는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는 물음이었다. 그러게? 왜 알리바바닷컴이 오프라인 전시회를 하는거지? 어차피 모든 물건은 온라인으로 거래하지 않나? 




 이 질문을 읽고 나면 문득 매년 열리는 북페어-도서전이 떠오른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이 책을 구입할 때 예스24나 알라딘, 교보문고 등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고 있는데 이 북페어는 왜 매년 열리는 걸까? 오프라인에서 책을 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으프라인에서 열리는 북페어는 단순히 책을 구입하는 곳이 아니다. 책을 중심으로 한 문화 전체가 전시되고 그 문화의 실물을 경험하고 체감하는 곳이다. 더구나 어린이도서, 교구 같은 것들은 온라인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 자료만으로 제품을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 실물을 보고 확인한 다음에 구입한다면 얼마나 믿음직스러울까! 온라인 매매가 성행하는 만큼 오프라인 전시회 역시 꾸준히, 점차 더 크고 빈번하게 열릴 수 밖에 없는 이치다.

 그래서 알리바바닷컴은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B2B 보증사업을 하던 메쎄이상도 전시회 사업에 뛰어들었다. 




‘B2C 마켓플레이스는 이미 알려져 있는 완성품을 사고파는 것이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모두 가능합니다. 하지만 B2B거래는 다릅니다. 오랫동안 반복될 공급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B2B 거래를 위해서는 직접 만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한두 번은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공장 방문 등 스킨십이 이뤄지는 만남까지 주선하는 것이 마켓플레이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알리바바닷컴의 담당자는 “B2B 거래는 단발 거래가 아니고 원자재나 반제품을 지속해서 공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완성품 역시 오랫동안 되풀이될 수 있는 거래가 필요하기 때문에 대면거래가 필수”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책 38쪽




 [외인구단 DNA]는 전시산업 회사 메쎄이상의 임원들이 쓴 메쎄이상과 전시산업에 대한 책이다. 메쎄이상과 전시산업이 모두 생소한 독자라 해도 이 책은 무척 재미있게 읽힌다. 우리의 일상과 산업, 문화가 연결된 지점인 전시회를 주목하여 왜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길을 지나다 보면 전시회 현수막이나 광고 간판, 버스 광고판 등에서 전시회 광고를 보게 된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전시회면 특히 더 금방 눈에 들어온다. 인테리어, 애견용품, 육아용품 등 우리 생활에 밀접한 분야마다 연에 1회 혹은 2회 정도 전시회가 개최된다. 전시회 장소는 주로 코엑스나 킨텍스 등이다. 왜 전시회는 보통 코엑스에서 많이 열릴까? 그렇게 넓은 장소가 거기 밖에 없어서? 왜 민간 기업은 전시장을 짓거나 운영하지 않을까? 그 많은 전시회들이 다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전시장 운영자가 되기 위해선 초기 투자를 상상이상으로 많이 해야 한다. 민간투자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킨텍스는 토지가격을 제외하고 건축비만 1조 원 이상 소요됐다. 지방자치단체가 전시장 1만제곱미터를 짓는 데에도 보통 2천억원 이상의 예산이 사용된다.

256쪽 



단순계산으로는 무조건 적자이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는 전시가 일으키는 파생효과가 중요하기 떄문이다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오는 외국인 관광객, 전시회를 통해 바이어를 만나고 수출기회를 얻는 중소기업, 전시회 자체가 k-pop 처럼 한국의 브랜드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 등을 감안해서 전시회를 키우는 것이다.

258쪽

 


모든 업종에서 오프라인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오프라인 전시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수많은 물건을 온라인으로 구매합니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거나 고관여 제품으로 온라인으로 구매하더라도 그 전에 오프라인으로 확인을 합니다. 예를 들어 대형 매장에 가서 신제품 냉장고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집에 돌아와 확인한 모델을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오프라인 매장은 전시장의 기능만을 담당했을 뿐입니다. 업체 입장에서는 전시장 기능만 하는 매장을 상설로 운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프라인 전시회를 통해 제품을 확인하도록 돕고, 온라인을 통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도우면 되니까요.

275쪽 




 하나의 전시장을 짓고 운영하는 데에는 굉장한 비용이 든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시장은 민간이 짓고 운영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 2020년, 최초로 민간 기업이 짓고 운영하는 전시장이 등장했다. 바로 메쎄이상이 수원역 앞에 짓고 운영 중인 수원메쎄다. 메쎄이상이 전시장을 건립한다고 했을 때 업계에서는 "미쳤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이디어 였으니까. 설령 생각했다 하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아이디어 였으니까. 그런데 메쎄이상은 했다. 이미 전시업계에 발을 담그기 시작한 그 날부터 기존 업계의 많은 부분에 도전하고 개척하며 청개구리처럼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메쎄이상이니까. 기존 업계는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전시회를 매수하고 전시회의 광고를 바꾸고 새로운 전시회를 기획하고 수많은 전시회 운영을 통해 얻은 방대한 자료를 데이터화하여 더 질 좋은, 더 수익률이 높은 전시 운영으로 도약하는 일. 기존 업계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몇 번이고 해내왔던 사람들이 메쎄이상이다. 

 이 책은 메쎄이상이라는 회사가 전시산업에 뛰어든 배경과 어떻게 운영해 왔는지, 메쎄이상의 사내 문화와 분위기는 어떤지, 메쎄이상이 앞으로 가지고 있는 전시산업의 방향은 무엇인지를 담고 있다. 이들이 겪은 시행착오, 실패 등도 가감없이 담겨 있다. 승승장구해 온 것 같지만 난데없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도,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까다로운 상황도 있었던 메쎄이상의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메쎄이상의 사내 문화에 대한 부분이었다. 


 

일찍 출근해라, 돈을 열심히 모아라, 워라벨은 없다. 모두 꼰대 소리를 들을 만한 주장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다. 우리 회사는 기꺼이 꼰대가 되고자 한다.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해야 할 말은 하는 메쎄이상은 삼시 세끼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178쪽 




 생각은 진보적으로, 규칙은 보수적으로, 실행은 파격적으로. 

서로 부딪힐 것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의외로 위 조합은 상당히 잘 어울린다. 메쎄이상에서. 혼자서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걸으려면 사실 크게 어렵지 않다. 그냥 쌩또라이가 되면 된다. 누가 뭐라든지 마이웨이로 내 마음 가는대로 노빠꾸 직진할 뿐이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걷는 건 혼자서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특히 여럿이 함께 실행을 파격적으로 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내문화가 중요하다. 여럿이 함께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려면 분명한 구심점이 필요하니까. 

 메쎄이상의 기업문화 중 최고 장점은 아이디어의 선순환이지 싶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 아이디어가 수용되고, 실현되고 나면 다함께 더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또 그렇게 나온 좋은 아이디어가 수용되고 실현되는 아이디어의 선순환. 

 아이디어를 낸다 -> 아이디어가 수용이 된다 ->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한다 -> 더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 아이디어를 낸다 -> 아이디어가 수용이 된다 ->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한다 -> 더 새롭고 좋은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 아이디어를 낸다

 여기서 함정은, 이 아이디어대로 실현을 할 때, 그것을 실체화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말처럼 쉽게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처럼 그냥 뚝딱 만들어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때로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수만이 동원되기도 한다) 같은 목표를 두고 손발 맞춰가며 일해야만 생각에 불과했던 아이디어가 비로소 손에 잡히는 현실이라는 몸을 얻는다.

이러하므로, 일반적인 회사에서 평범한 직원의 아이디어가 채택이 되고 그것이 현실화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나기만 한다면, 회사의 임원부터 평범한 직원까지 모두가 그 아이디어에 자극받아 ‘그래, 이거 함 해보즈아!!’하고 팔 걷고 나서서 정말로 그대로 만들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디어를 낸 직원 뿐 아니라 모든 직원에게는 굉장한 동기부여가 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누구나 좋은 아이디어, 여러 번 고심하고 고뇌한 결과로 나온 꽤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려하고, 아이디어가 좋으니까 반영이 되고, 아이디어대로 나타난 결과물에 모두가 다시 긍정적인 자극을 받으면서 그 회사는 퐁퐁퐁 마르지 않는 샘처럼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 있고 에너지 넘치는 직원들의 회사가 된다.




 메쎄이상의 가치관과 비전이 확실해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전시산업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전에 일상적으로 찾아갔던 전시회들도 거대한 산업 흐름의 중요한 일부로 바라보게 된다. 무엇보다 메쎄이상이 가지고 있는 사내 문화가 인상적이다. 직원들의 커피값을 아끼기 위해서 아예 질 좋은 커피를 제공하고, 주말에 제발 책 좀 읽고 공부하라는 잔소리 시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회사. 꼰대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밥은 잘 챙겨먹어야 한다며 구내 식당 식단에도 관심을 갖는 회사. 세상에, 너무 재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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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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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는다고 하면 대번에 '오~~~' 이런 반응을 얻곤 한다. 최근에 발표된 작품은 아니고 적게는 30~40년, 많게는 몇 천 년 전에 세상에 나온 시들을 좋아한다고 하면 '아, 진짜?' 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시들과 내가 비슷한 나이인 것처럼 나를 바라보는 표정도 만날 수 있다. 


 이상하게 요즘 출간되는 시들은 마음이 가지 않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시들은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 애늙은일 태어나고 자란 천성때문인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형의 어떤 것들을 언어로 뭉쳐 시로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런 싯구들을 읽다보면 탄성이 절로 나고 박카스 몇 사발을 들이킨 것처럼 마음이 시원하다. 누군가는 시가 정적이고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으나 정말 잘 빚은 시들은 롤러코스터와 방불한다. 정신과 마음이 중력을 벗어나 위, 아래, 동서남북으로 왔다갔다 한다. 




 소소의책 출판사에서 펴낸 [시의 역사]는 시의 재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시를 많이 알지 못해도, 시에 익숙하지 않아도 괜찮다. 시가 주는 재미, 시 언어의 그 감칠맛을 느낄 줄 안다면 이 책도 필히 재미있을 것이다. 

 첫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두툼한 책 두께에 기함할 수 있는데 겁내지 마시길. 그만큼 많은 시와 시인들이 이 한 권에 실려 있다.



 이 책을 지은이는 옥스포드 대학 영문학 교수다. 그 흔한 저자의 여는 글, 펴는 글, 시작하며 등등의 프롤로그 없이 목차 끝나면 곧바로 첫 챕터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무척이나 할 말이 많구나. 말이 없어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현대 영시까지, 수 천 년에 걸친 영어권 시와 그 작품들을 쓴 시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니 한 문장, 한 쪽이라도 바쁘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정말 많은 시 작품과 시인들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 책 뒤에 관련한 자료 수록을 감사하며 작품의 발표자와 발표 매체들을 일일이 적어둔 부분이 있는데 이 내용의 양이 9쪽을 넘는다. 여하간..... 진짜 많다. 이 정도로 많은 시 작품과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니만큼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던 시인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호메로스, 사포부터 시작해서 단테, 초서, 셰익스피어, 허버트, 워즈워스, 키츠, 바이런, 푸시킨, 휘트먼, 랭보, 오스카 와일드, 프로스트, 예이츠, 엘리엇. 동서양에 널리 알려진 시인 외에 나로서는 처음 만나는 시인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샬럿 뮤의 시는 읽자마자 '우와, 천재구나.' 싶었다. 




뮤의 시들은 기술적으로는 전위적이며 독창적이고 감정적으로는 심오하다. 가장 훌륭한 시로 꼽히는 작품으로는 [교회의 매들라인]과 [나무들이 쓰러졌네]가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초고의 걸작은 [농부의 신부]다. 섹스를 끔찍하게 무서워하는 젊은 아내를 둔 남자가 이 시의 화자다.


저 위 다락방에 혼자서, 잔다오.

불쌍한 여자. 우리 사이에는

계단 하나밖에 없는데. 아! 맙소사! 그 솜털,

부드럽고 젊은 그녀의 솜털, 갈색,

그녀의 그 갈색- 그녀의 눈, 그녀의 머리카락, 머리카락이라니!

She sleeps up in the attic there

Alone, poor maid, ‘Tis but a stair

Betwixt us. Oh! my God! the down,

The soft young down of her the brown,

The brown of her-her eyes, her hair her hair!

311-312쪽


 


이 책은 극작가로 너무도 유명한 셰익스피어가 남긴 소네트도 잠시 소개하고 있는데, 그가 남긴 소네트를 읽어보면 왜 시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장르인지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남김없이 짚단으로 묶인 여름의 녹음은

하얗고 까슬까슬한 수염이 나서 장례 마차에 실려 가네.

summer’s green, all girded up in sheaves,

Borne on the bier with white and bristly beard.

85쪽



 여름 녹음이라는 추상은 하얗고 까슬까슬한 수염, 묶인 짚단으로 이미지화되어 손에 잡히는, 촉감마저 느껴지는 구체적인 형상이 된다. (셰익스피어.... 굉장해. 굉장해) 동시에 푸른 청춘이었던 사람이 늙고 병들어 장례 마차에 실려가는 인간의 지극한 전철까지 연상시킨다. 이 짧은 두 줄의 문장은 읽는 이의 정신을 끌고 광속보다 빠르게 이미지를 확장한다. 

 저자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시의 역사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챕터에서 시인은 죽어도 시는 죽지 않는 시의 신비를 언급했다. 



어떤 시들은 죽지 않고 인간 수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어째서 그러한가는 수수께끼다. 날마다 눈사태처럼 우리를 무서운 속도로 덮치고 흘러가는 망망한 언어 속에서 시인이 몇 개의 단어를 골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것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예술을 창조한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까지 아무도 이 신비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시인은 이 목표를 추구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금세 잊힐 거라면 무엇하러 고생스럽게 시를 쓰고 고심해서 완벽하게 다듬는단 말인가? 시인이 우리에게 만물은 재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마저도 시는 재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고자 한다.

18쪽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나, 오래도록 살아 남는 시에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뮤의 시, 셰익스피어의 시가 그렇다. 형체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들을 언어로 붙잡아 독자 앞에 데려다 놓고, 독자마저 시인이 느꼈던 그것, 그 강렬한 혹은 분명한 그것에 동화되도록 만든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표현이 무척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고 심지어 따분하지만, 이런 시들을 지은 시인에게는 저런 표현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다 보니 시는 언어, 자국어를 벗어나면 순식간에 본연이 가졌던 힘을 잃고 만다. 삼손이 머리카락이 잘린 후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원작의 언어를 떠나 타국으로 옮겨간 시는 시가 아니라 말의 나열로 전락하기 쉽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특히 시를 번역하는 일은 그래서 무척 어려우리라. 이 책을 옮긴이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처음부터 실패할 수 없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고 말한다. 


 더구나 이 책은 한국의 시, 많이 봐줘서 아시아의 시도 아닌 영어권의 시의 역사다. 그것도 대부분이 영국의 시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시와 시인들에 대한 내용을 읽다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으나 '아, 그래?'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내용도 더러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펴낸이의 말이 아니라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고 첫 챕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의 역자(김선형)는 영어권 시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것을 전해 줄 수 있는지를 [옮긴이의 말]에 남겼다. 한 편의 시를 여러 번 곱씹으며 그 시의 깊이를 충분히 음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데, 이렇게 다른 언어의 시, 훌륭한 작품과 구절들만을 모은 이런 책을 읽으며 시가 시간을 초월할 뿐 아니라 (번역자의 엄청난 노력에 힘입어) 문자를 초월하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해보는 것도 각별한 일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원래의 형태를 잃고 해체되어 재조립된, 복제된 언어의 직조물이라고 해도 언제나 타자를, 타 문화를, 타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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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의 시대 - 인플레이션 쇼크와 금리의 역습
김광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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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내가 읽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경제서적을 만났다.

 최근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면서 제품 가격이 저번 주와 이번 주가 다른 것을 확실하게 발견할 정도로 빠르게 물가가 오르는 것을 체감한다. 주마다 물건 가격이 달라지는 걸 체감하다보니 이제는 물건을 사려고 둘러보는 게 무서울 지경이다. 그나마도 물건이 있으면 양반이다. 이마트에서 이마트 PB 식용유를 사려고 몇 달을 기다리다가 포기했던 적도 있다. 물건이 안 들어온다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신호탄이었다. 공급부족과 그에 연이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가 상승을 알리는 신호탄. 더 무서운 건 경제 전문가들 대부분이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단한다는 사실이다. 물가가 오르다 오르다 진짜 이 정도로 무섭게 오르는 건 처음 겪는 일인데 꼼짝없이 이걸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는 게 참 암담하다.

 주식 투자도, 코인도, 금이나 달러도, 부동산 투자도 하지 않는 이유는 나에겐 그럴만한 자본금도, 깜냥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살고 있는 집 한 채 있는 걸로 족하고 여기서 뭘 더 자산을 늘려봐야겠다는 생각도 없다. 댓가 없는 이득은 없다. 작용-반작용은 우주의 섭리다. 누군가는 이런 가치관을 자본주의에 무척이나 위배되는 어떤 극렬무도한 것으로 생각하여 대놓고 비웃었으나, 뭐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게 꼭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요령을 부려 자산을 늘릴 욕심은 자칫하면 화를 부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경제 무식자로 사는 건 안 될 말이다. 오히려 나에게 꼭 필요한 수준으로만, 자본에 있어서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자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경제잘알이 되어야 한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볍게 살아가는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 필요한 것(혹은 수준)을 갖추려면 어떤 방법이 있는지를 아는 게 먼저다. 그래서 경제서적을 읽는다. 투자에 대한 팁을 얻기 위한 것도, 어떤 대박의 비결을 훔쳐보려는 것도 아닌, 생존을 위해서.

 

 2020년의 경제 여건과 지금의 경제 여건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달라진 여건에는 달라진 대응이 필요하다. 2020년에 무언가에 투자해서 성공했다고 해도, 그때 투자했던 방식과 습관을 고스란히 가지고 2022년에 똑같이 투자했다가는 실패할 것이다.

 163쪽

 

 김광석 저자가 지은 [긴축의 시대]는 인플레이션 쇼크와 금리의 역습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완전히 지금 우리가 직면한 세상을 축약한 표현이다. 무엇보다 '금리의 역습'이라는 표현이 뇌리에 꽂힌다. (유가, 물가 그리고 금리까지 모든 게 다 오르는데 내 월급만(내 수입만) 안 올라간다며 울상을 짓는 거 나만 그래?) 경제 읽어주는 남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경제전문가 김광석 저자는 유튜브 [경제 읽어주는 남자] 채널에서 매주 경제 현안을 강의하고 있다. 2019년부터 경제 전망 도서를 연이어 출간하고 있는데 이 책 [긴축의 시대]는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 지금의 지점에서 아주 중요한 내용을 이야기한다는 면에서 저자가 매년 발간한 경제 전망 도서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긴축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고 정해진 미래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적 변화 속에 우리 개인은 어떤 변화에 직변할 것인가. 부동산은? 주가는? 환율은? 그리고 그 변화 속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는 어떤 투자를 하고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까?

202-203쪽

 


 이 책을 읽으면서, 다 읽고 난 후에도 마음이 무척 씁쓸하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긴축의 시대.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어떻게든 돈이 풍요롭게 돌게 하려던 시대는 몇 년 전으로 사라져 가고 이제는 수도꼭지를 잠궈 나가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이건 마치 지구의 자전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속이 참 아리다. 살기 좋던 때는 다 지나갔구나 싶고. 저자가 썼든 불과 2020년과 2022년이라는 시간,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나 많이 다른데 위드 코로나인 지금과 또 그 이후인 내년과 내후년 역시 무척이나 많은 변화가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 기대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내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게 슬프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지기에 긴축의 시대에, 내가 나의 자본을 지키고 내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무얼 알아보고 공부하고 대비해야 하는지를 아는 게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 김광석 저자는 우리 개개인이 직면한 이 엄정한 시대의 변화를, 각종 경제 지표와 정책 변화가 예고하는 전환을 세밀하게 포착해서 이 책에 담았다. 위드 코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보호무역주의, 식량전쟁 등 우리가 오늘 뉴스에서 읽은 이슈들을 경제의 눈으로 세공하여 이 책으로 가져왔다. 그러다보니 이 글의 맨 첫 문장으로 썼듯, 내가 읽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추천하게 된다. 실시간으로 공부가 되고, 그야말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 한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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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인자의 마음을 읽는 이유 -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위한 권일용의 범죄심리 수업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9
권일용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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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어머니께서 보이스피싱을 당하신 적이 있다.


대출 안내 문자인 줄 알고 링크를 클릭하시고 친절하게 전화 너머에서 유도하는 모든 단계를 차곡차곡 밟으신 끝에 어머니는 500만원 정도를 사기 당하신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어머니께 신신당부를 했다. 제발 휴대폰으로 어떤 링크가 오면 그걸 보낸 기관이 어디더라도 나한테 꼭 먼저 물어보고 클릭하시라고.


 내가 당시 가장 두려웠던 것은 돈 500만원을 잃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보이스피싱으로 신고를 했어도 그걸 찾을 수 없는 현실도 아니다.  다음에 다른 내용으로, 다른 번호로부터 미끼가 던져졌을 때 어머니는 또 당하실 수 있다는 것. 그때는 지금보다 금액이 훨씬 클 수 있다는 것이 당시에 가장 두려웠고 실은 지금도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르는 사람이나 걸리는 거지. 순진한 사람이나 당하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으면 안 당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1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즉, 무척이나 순진무구하고 무지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순히 '내가 조심하고 내가 주의하고 내가 신중하게' 살아간다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얼마 전 대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난데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나 텔레그램 채팅창을 통해 몰카나 개인신상 유출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부주의해서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니니까. 그런 사건사고의 뉴스를 읽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저런 사건사고들의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도 저런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범죄 역시 복잡해졌고 요즘은 특히나 온라인이나 휴대폰 상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2000년대 이전의 범죄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이었다면 요즘의 범죄는 간접적이고 심리적이다. 그래서일까. 알아차리고 대응하기가 이전보다 훨씬 까다롭고 곤혹스러워졌다.


 그래서 [내가 살인자의 마음을 읽는 이유]와 같은 도서가 반갑다. 대한민국 경찰청 제1호 프로파일링 마스터를 지내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 광운대 범죄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내고 있는 권일용 저자는 30여 년간 강력사건 현장에서 활동해왔다. 대한민국 범죄분석에 잔뼈가 굵은, 현장감각이 혁혁하게 살아 있는 노장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범죄심리에 대하여 했던 강연을 모아 다듬어 책으로 엮었다. 왜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사람은 저지르지 않는가? 범죄자는 어떤 자극을 받아 비로소 범죄를 저지르는가?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하여 저자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여러 연구와 이론들을 바탕으로 범죄심리를 해석하려 노력했다. 이 책은 30여 년 현장에서 그가 보고 듣고 연구해온 내용들의 집합이다.

 

 미래의 범죄 유형은 어떻게 변할까? 지금도 이미 드러나고 있지만 향후에는 정서적 학대와 심리적 고통을 가하는 범죄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교묘한 가스라이팅이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루밍, 온라인상에서 일어나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 등이 더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성착취 범죄는 지금부터라도 강력하게 차단해야 한다.76쪽

 

 

 


  이 책을 단 하룻밤 만에 완독했다. 일단 주제와 내용이 나의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 있고 문체와 내용이 원만하여 어떤 독자가 읽어도 무리 없이 읽힌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심리적, 사회적 배경을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뿐 아니라 최근 몇 십년 간의 범죄 유형 변화, 그 변화의 원인, 그렇다면 개인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이 겪는 최근의 특이점들, 확증편향이나 고립감 등에 대한 염려도 언급한다. 이 책을 차분히 읽어가다 보면 결국 '범죄'란 어느 개인의 돌발행동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함께 인지하고 범죄를 낳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특히 저자는 경찰들이 수사를 할 뿐 아니라 법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말해 눈길을 끈다. 법과 현실의 괴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체험하는 분야 중 하나가 경찰이다. 분명 해서는 안 되는 나쁜 일인데 현행법으로 처벌할 수 없거나 그 처벌이 미미한 일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대면해야 하는 이들이 경찰이다. 일이 일어난 후에 호들갑스럽게 대책을 논의한다면서 누구의 책임이네를 따지지 말고 현장에서 일하는 경찰관들이 문제점을 적극 개진해야 한다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개인화가 점차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에 지나치리 만큼 집중한다. 이러한 변화들이 범죄를 점점 더 우리의 삶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159-160쪽

 

'남의 일'로 여겨 신경을 꺼야 할 것은 남의 흉잡기, 다른 사람의 SNS, 온갖 가십거리 정도가 아닐까. 옆집에 사는 내 또래 여자가 묻지마 폭행을 당했다면, 같은 직장 동료가 뜻하지 않게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면 그건 신경꺼야 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 있음에 같이 아파해야 하는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이 책 [내가 살인자의 마음을 읽는 이유]에서 경제 발전과 함께 새로운 양상의 범죄가 등장하고 동시에 범죄율이 높아지면서 피해자 수가 늘어나는 것을 이야기했는데(192~201쪽) 이 부분에 큰 공감을 했다. 경제 발전이라는 달콤함, 생활이 윤택하고 편리해졌다는 호사는 다양한 반작용, 부작용을 불러왔고 그게 우리 사회의 지금 얼굴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했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일정 부분 대가가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세금을 내고 국가의 보호를 받듯,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문제를 인지할 때 우리의 안전 역시 그만큼 보장되는 것 아닐까.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개인화가 점차 심화되면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원하는 것에 지나치리 만큼 집중한다. 이러한 변화들이 범죄를 점점 더 우리의 삶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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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 -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차이를 넘어 함께 성장하기
박명선.정유진 지음 / 아이스크림(i-Scream)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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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작년에 코로나 때문에 우리 손자가 학교를 8번인가 그것 뿐이 못 갔어. 근데 야가 1학년인데, 학교를 8번 갔다 오니 2학년에 되뿌렀네."

아는 분이 자기 손자 이야기를 하시다가 기가 찬다는 듯 손사레를 치셨다. 어디 이 뿐이랴. 최근 코로나 확진자가 충격적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까닭에 아예 자녀들 등교를 시키지 않는 부모님들이며, 아이들이 비대면 수업을 하긴 하는데 이건 뭐 수업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니라며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부모님들까지. 급격히 찾아온 비대면 시대에 과연 우리 아이들의 학습 상황은 안녕할까? 어차피 학교 수업 제대로 못 받아도 학원에 가든, 과외를 받든 하면 되니 괜찮은 걸까? 공교육에서 채우지 못한 학습의 빈틈을 사교육이 채우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공교육은 대충 구색만 맞추면 그뿐일까?

이런 이야기들은 이 비대면 시대에 아이들의 학습을 어떻게든 끌고 가보려고 교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에게는 너무 서운하고 서러운 말들이다. 갑자기 바뀐 학습 상황에 아이들만큼이나 선생님들 역시 쌩고생 중이니까. 특히 학습 격차가 더욱 커진 교실을 책임지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필요한 학습 환경을 제공하려 애쓰는 선생님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무척 많다.

 

 [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는 코로나19가 빚은 교실 풍경 속에서 현직 교사들이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명선 선생님과 정유진 선생님은 초등학생들의 의미 있는 배움을 위하여 수년 간 애써오신 분들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단연 코로나19로 촉발된 '학습 격차'의 문제를 가장 먼저,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분명히 알게 된다. 교실 속 일상 즉, '교사가 아이들의 학습 상태를 확인하고 격려하고, 아이들이 함께 대화하고 서로 가르쳐주는 것이 학습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책 6-7쪽)'

 

그 소중한 일상의 조각을 잃은 우리들은 그럼 잃어버린 부분을 무엇으로 채워넣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배움의 속도가 다른 아이들 각각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 방법과 도구들을 제안한다. 학습 격차를 진단할 수 있는 방법, 난독 진단 및 개선 방법, 학습 저해 요인 진단 검사 등 학습이 부진한 아이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개선할 수 있는 자료들과 해당 자료들이 있는 홈페이지들을 자세히 안내한다.

또한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멀어진 학생들과 화상으로 유대를 형성하는 방법, 학습동기가 없는 아이를 위한 동기유발 지도법, 그림책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법 등 흥미로운 학급 활동을 제안한다. 저학년과 고학년 교실로 나누어 학습 격차를 극복하는 방법도 안내하고 있는데, 특히 저학년 부분에서 아이들의 한글교육과 문해력 공부법을 집중해서 다루고 있다.

 

이미 몇몇 다큐멘터리 등의 시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요즘 아이들의 국어 능력은 무척 심각한 상황이다. 글자는 읽어도 그를 해득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정확하게 읽고 말하는 능력,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학습 격차를 줄이는 수업 레시피]는 현직 교사 뿐 아니라 초등학생을 키우는 가정에서도 한번쯤 꼭 읽어보실만한 책이다.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은 아이의 공부 습관, 학습 태도의 기반이 마련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아이가 배우고 익혀야 할 공부 습관을 익히지 못하면 이후 성장하는 동안 아이의 답답함과 불안, 불편함 역시 함께 커질 것이다. 단순히 성적이 부진하다는 문제가 아니다. 교실에서, 학습의 시간과 공간에서 주체로 서지 못하는 아이들은 점점 소외되고 밀려나게 된다. 보편적인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속하는 가장 큰 조직인 '학교'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건 아이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너무나 큰 손실이 아닌가.

 

이 책이 많은 선생님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 초등학교 현직 교사뿐 아니라 공부방, 학원 등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형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이 책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의 혼란한 시기에 아이들의 공부 습관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인 동시에 무척이나 귀한 일이다. 귀한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이 책에서 많은 팁을 얻고,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들을 아이들과 함께 풀어나가며 즐거운 교실을 만들어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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