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점차 사라진다?


기독교는 원죄를 바탕으로 한 종교다. 곧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를 짓고 있다. 기원은 이브가 선악과로 알려진 사과를 따 먹으면서 시작되었다. 구원은 오로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크리스천이 아니기에 이 논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꽤 오래 살아보니 자신의 생각과 관련 없이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게 된다. 굳이 범죄가 되어 법적인 처분을 받지 않더라도.


이다영 이재영 자매가 쏘아 올린 미투 운동이 지저분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역설적이게도 피해당사자는 또 다른 가해자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죄로 묶여 있는 셈이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기억속의 피해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정직하게 말해 마땅한 해결방법도 없다. 직접 만나서 사과를 받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탈출구는 부딪치지 않는 거다. 영어 속담처럼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점차 사라진다Out of site, out of mind.


문제는 상대방이 유명인일 경우다. 연예인이든 스포츠스타든 티브이나 인터넷을 켜면 자주 등장하는. 아무리 기를 쓰고 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속된 말로 늘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스스로의 처지가 초라하다면 더욱 더 비참해진다. 실제로 한 때 좋아했던 연예인이 있었는데 어떤 계기로 싫어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 사람만 등장하면 채널을 돌리기 바빴다. 급기야는 인터넷의 연예란을 한동안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악플을 달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기독교 교리대로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할 수도 없고, 폭로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그럴 때 난 글을 쓰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의 악마성을 모두 토해내보세요. 복수는 그런 다음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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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미투운동이 거세다. 이번엔 운동선수와 연예인이다. 어렸을 적 이런 저런 괴롭힘을 당한 자들이 가해자를 대상으로 폭로전에 나선 것이다. 그 중에는 진실도 있고 거짓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양상이다. 곧 을들이 더 이상 참지 않는다. 사실 폭로가 연이어 일어나는 건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아무리 중범죄라도 공소시효가 지난 이상 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창 떠들썩했던 배우 성추행 사건들을 보라. 거론된 인물들 가운데 감옥에 간 사람은 거의 드물다. 물론 명백한 범죄에 해당하고 공소기한이 남아 있는 경우는 예외다. 곧 죄를 묻지는 못하지만 도덕적 책임을 따지겠다는 뜻이다. 


시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스타들에게는 법적 단죄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평판이다, 사람들이 보기 싫어지는 순간 바로 퇴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진짜 피해자들에게 이런 저런 오퍼가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눈 감는 대가로 뭔가를 건네는. 설령 그런 제안이 없었더라도 본인에게 득되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도리어 본인의 피해가 드러남으로써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역 소송에도 불구하고 증명을 하기 어려운데도 법정에 세울 수 없음에도 이들이 나서는 이유는, 다시 말해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고 복수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단 한마다의 사과 말을 듣기 위해서? 글쎄, 인간은 미스터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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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바라보는 하늘 끝, 과연 그 곳에는 무엇이 있길래 


아찔하게 높고, 아득하게 먼  


막장이라는 단어는 드라마와 결합하여 화려하게 부활했다. 처음에는 그러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로 감정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장모가 사위에게 김치 포대기로 싸대기를 날리거나 복수에 불타는 여인이 볼에 볼펜으로 점하나 찍고 불사신처럼 살아 돌아오는 식이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에 왜 사람들은 환호하는가? 현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저건 판타지야. 우리의 어두운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펜트하우스는 이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시청자들은 사자우리에 던져진 등장인물들의 치고받는 싸움을 보며 같이 흥분하고 울고 웃고 떠들어댄다. 저 놈을 당장 죽여라, 저 년을 어서 불구덩이에 파묻어라. 모든 의문의 열쇠를 가진 여인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펜트하우스가 새로운 시즌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초반부터 스케일은 더욱 커졌으며 내용은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전 편이 계급간 싸움이었다면 이번 편은 대등하게 올라선 가진 자들끼리의 투쟁이라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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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발달은 인간의 숨은 본성도 일깨운다. 비대면이 그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매우 소모적인 행동이다. 특히 처음 대하는 경우엔 두려움까지 생긴다. 머릿속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낯선 이들을 접할 상황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대중사회가 본격적으로 막을 열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마주쳐야 한다. 그럴 때마다 얼굴을 꾸미고 목소리고 다듬고 행동까지 신경을 쓰며 지낸다.


그러나 인터넷의 확산은 이런 우려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게다가 때마침 팬더믹까지 덮쳤다. 무인으로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쇼핑은 대표적인 예이다. 클릭만 하면 주문 완료. 물건도 집 앞으로 바로 온다. 딱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 문제가 발생해도 문자로 내용을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자, 이제 드디어 진정한 유토피아 세상이 열렸구나, 라고 선언하고 싶지만. 설 전에 온라인 쇼핑을 했다. 연휴기간을 고려해 배송과정이 어느 정도 걸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주문 후 열흘이 넘어도 소식이 없자 걱정이 되었다. 홈피에 들어가 보니 출고는 했는데 배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서울터미널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 더 참아보자고 기다렸는데 소용이 없었다. 장장 이십일이 지났는데. 게다가 먹을거리라 제대로 보관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보냈더니 쇼핑몰과 택배회사가 서로 책임을 미루며 핑퐁게임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전화통화는 일체 없었다. 속상했다. 별 거 아니라면 별 게 아니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끄는 게 짜증스러웠다. 결국 어찌어찌 환불을 받아 드디어 끝났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웬걸 다음날 택배사에서 또 문자가 왔다. 해당 물건을 반품해 가겠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반품처리가 끝났는데 이게 뭔. 관련 내용을 답장을 보냈더니 확인이 안 된단다. 결국 최후의 칼을 빼들었다. 전화를 걸어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진작 통화를 했더라면 이런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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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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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덜의 교언영색


한 때 정의 붐이 몰아친 적이 있다. 마이클 샌덜 때문이다. 하버드 교수인 그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인기를 끌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의내용을 모은 것이다. 그는 책머리에서 재난지역에서 생필품을 비싸게 파는 현상을 보고 개탄한다. 이게 과연 공정한 것이냐? 마이클 조던도 소환한다. 아무리 그의 농구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벋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 것 아니냐? 사이다 발언 덕에 그의 인기는 올라갔고 한국에서의 위치도 높아졌다. 매년 강연을 오고 최근에는 설을 맞아 티브이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까지 했다( 제이티비씨 차이나는 클라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장기를 발휘했다. 책 제목도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 신입생을 일정한 자격을 거친 선발자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하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겸손해질 테고 떨어진 이는 운이 없었으니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이지만 패널 중 한 명의 우스갯소리에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면 제비뽑는 학원이 생길걸요?


샌덜의 말과 글을 일컫는 한자성어가 있으니 그것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다. 말 그대로 말을 교묘하게 하여 논리와 문장의 얼굴빛을 꾸미고 있다. 그의 자식 둘 다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한 명은 같은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이고 다른 이는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이클은 두 아들에게 경쟁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둘은 타고난 천재인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난 덕은 아닌가? 차라리 드라마 팬트하우스의 등장인물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꼭대기에 오르려 치고받으며 싸우는 게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것 아닌가? 샌덜의 주장은 개천에서 잘 놀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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