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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의 왕

 

이 햄버거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맛만 좋구만.”

좀 시큼한 게 상한 것 같은데.”

그거야, 양파 맛이지. 오늘따라 왜 그래, 예민하게. 잘 먹어왔으면서?”

아니 그냥 ...”

나는 그날도 동료와 점심으로 햄버거 세트를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혼자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원하지 않는 메뉴를 먹는 게 싫었다. 찌개를 모구 함께 숟가락으로 퍼 먹는 것도 질색이었다. 물론 신입 때는 억지로 참석했지만 이젠 짬도 얼마만큼 됐고, 또 영업으로 보직을 바꾸면서 유도리가 생겼다.

혼자만의 즐거운 고독을 즐기고 있을 때 그 사람이 들어왔다. 경력직으로 들어와 동기는 아니지만 나이가 같아 서로 말은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게다가 과는 다르지만 대학교도 같았다. 학교 다닐 무렵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풍채도 있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남들과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의외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햄버거 마니아였다. 이태원에서 자란 터라 김치보다 햄버거 빵이 훨씬 더 익숙하다고 말했다. 나처럼 홀로 먹어도 눈치 보지 않는 곳이 좋아 들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프렌차이즈치고는 이곳이 그중 낫다구. 뭐 이왕이면 수제 버거 집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변두리에 그런 게 있을 리는 없구. 하는 수 없지.”

그는 마치 교수처럼 각종 햄버거에 대한 장황한 평을 늘어놓으며 콜라를 쪽쪽 빨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물론 그만큼은 아니지만 여기 저기 체인점을 돌아다녀보았지만 여기처럼 그릴 맛이 강하고 감자튀김이 두툼하게 나오는 곳은 없었다. 특히 치즈버거는 풍미가 남달랐다.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치즈향이 났다.

맞아, 제대로 본 거야. 여기는 치즈를 직접 본사에서 관리한다구. 어떤 사람은 느끼하다고 싫어하는데 그건 뭘 모르는 소리지. 아주 비싼 건 아니지만 퀴퀴하고 큼큼한 게 아주 그만이라니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연신 맞장구를 쳐대며 언제나 더블치즈버거를 시켰다. 상한 듯한 느낌이 나는 게 진짜 치즈지, 하면서.

그날 저녁 나는 결국 심하게 설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설사는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결국 복통으로 병원에까지 갔고 의사는 상한 음식이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치즈에 문제가 있든 아니면 내가 몸에 맞지 않든 앞으로는 햄버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동료는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면 말했다.

나이 드는 증거라구, 나이드는. 햄버거 먹고 배탈이 났다니 그런 밥하고 김치는 괜찮아? 온통 매운 것 투성이가 더 안 좋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어떡하나? 어쩔 수 없이 구내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시간이 겹치지 않게 조금 일찍 혹은 늦게 가곤 했다. 그래도 누군가를 만나면 최대한 빨리 식사를 마쳤다. 그는 여전히 햄버거 가게를 돌아다녔다. 호기심에 몇 번 따라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점식식사로는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 처음 한두 번에 그쳤다. 햄버거를 끊은 지도 석달 째 내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늘 감기나 두통처럼 달고 다니던 설사도 사라지고 장도 편안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 나였다. 역시 햄버거가 원인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부서가 달라 직장 내에서 볼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은 얼굴을 보던 사이였다. 소문이란 공기와 같아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다 순식간에 퍼지게 마련이다. 병가를 냈다고 한다. 덩치가 있기는 하지만 늘 활동적이었기에 의외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송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상대는 햄버거 회사였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고 간도 많이 상한 이유가 햄버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본사는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하다고 발뺌했다. 영화 <패스트제국>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군. 그런데 과연 소송에 승리할 수 있을까? 혼자라면 힘들 텐데. 마음같아서는 복통으로 입원한 병원의 진단서를 보내주고 싶어졌다. 그 친구가 한 잘못이라고는 어릴 때부터 햄버거를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결국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병문안을 가려고도 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장기능이 극도로 악화되어 얼굴이 많이 상했기도 했지만 그에게 모멸감을 주고 싶지 않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 때 그렇게 모멸감을 주더니 꼴 좋다.

, 점심이나 하러 가지.”

, 저는 고객과 약속이 잡혀서요, 먼저 가세요.”

그래, 그럼 오후에 보자구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혼자 밖으로 나왔다. 식사시간이라 거리는 사람들도 붐볐다. 오직 하나뿐인 중심지니 그럴 만도 했다. 생수병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돌아다녔다.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홀로 편하게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게 안은 초등학생들로 만원이었다. 이곳이 방학동안 초딩의 아지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라면, 햄버거, 핫바 따위를 들고 전자레인지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이미 플라스틱 그릇 째 들고 들이키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짜고 맵고 느끼한 냄새가 온 천지에 진동했다. 배가 살살 아파왔다. 뭔가가 하고 안쪽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이내 속이 미슥미슥해지더니 토하기 직전상황까지 다다랐다.

잠깐, 잠깐... 얘들아, 아저씨 좀 나가게 길 좀 비켜줄래.”

나는 배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손을 휘저으며 그곳을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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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특급

 

자 다들 타셨죠. 그럼 출발합니다.” 오랜만의 나들이. 지긋지긋한 일상을 탈출하는 순간. 다들 즐거운 표정이다. 비록 경품행사에 당첨되어 가는 여행이지만 어쨌든 여행은 여행이다. 피곤하다며 가지 않으려던 아내도 행복한 표정이다. ‘그럼 그렇지.’

고속철도는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아니 기차 안에 있는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그저 모니터에 표시되어 있는 속도표시를 보고 알 뿐이다.

이제 우리 기차는 터널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약간의 소음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약간이라구? 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내 귀청을 때린다. “으으윽신음소리가 가늘게 배어나온다. “헉헉헉땀이 흥건하게 젖은 내 얼굴을 아내는 의아스럽게 바라본다.

왜 그래요?”

왜 그래요라니 지금 이 소리 들리지 않아?”

아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객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은 나뿐이다.

이제 우리 열차는 광명을 지나 대전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최고속도를 낼 예정이오니 심장이 약하신 분들은 창밖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슈유우응” “어어엇내 뒷자리의 할아버지가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 ... .”

말은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역무원, 역무원

역무원은 다급한 기색 없이 다가와 할아버지의 안색을 살핀다. 역무원과 함께 온 의사인 듯한 사람이 혈압과 심장박동수를 체크한다.

이상 없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듯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이?” 화가 버럭 난다.

침착하십시오. 제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객차 내에서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승객들을 보십시오. 다들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흥분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다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다. 아내도 나를 꾸짖는다.

가만히 있어요? 왜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래요.”

아니 이게 왜 별일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뻔 했는데.”

대전을 지난 우리 열차는 발전소를 지나갈 예정입니다. 강력한 자기장이 발생할 예정이오니 자리에서 이탈하지 마시고 조용히 앉아 계시기 바랍니다.”

찌리리릿강력한 자기장이 열차 안을 휘감는다. 마치 배멀미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까부터 얼굴색이 좋지 않던 앞자리의 아주머니가 드디어 바닥에 토를 하기 시작한다. “우웩 우웨엑어느새 의사가 달려와 아주머니의 얼굴을 살피고 체온을 재고 음식물을 수거해 간다.

이제 나는 소리칠 기운도 없다. 침묵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나를 압박한다. ‘도대체 이게 뭐야?’ 고개를 돌려 아내를 본다. 그저 창밖만 내다볼 뿐 내 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는다.

잠시 후 저희 열차는 초고속으로 건널목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는 소리가 열차를 흔든다. 순간 창밖으로 무엇인가가 튀어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자동찬가? 아니면 동물? 혹시 사람?’

이제 저희 열차는 종착역인 부산역에 들어설 예정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돌아가라구?'

그리고 저희가 준비한 기념품을 전해드릴 예정이니 도착 후 잠시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기이이익드디어 열차가 선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승무원이 선물상자를 꺼내 하나씩 나누어 준다. 비누와 볼펜이 들어있다. 기념품으로 준 것이겠지. 박스 안 구석에 종이가  접혀있는 것이 보인다.

 

당신의 건강상태

 

장과 신장이 좋지 않음

특히 신장이 매우 약해져 있어 가벼운 이명(귀울림)증세가 있음

완치 불가능

히스테리 질환도 있음

디스크 증세 발견, 완치 불가능

치아 또한 세균에 감염된 상태임

고속열차를 탈 수는 있지만 연 10회 이상은 탈 수 없음

 

이 개자식들 이게 뭐야? 나를 실험대상으로 이용한 거 아냐? 아니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안 그래 여보?”

내내 말이 없던 마누라에게 내 시선이 꽂힌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말을.”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아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눈물이 번져나가는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산한 상태에서 고속열차 탑승, 향후 6개월간 고속열차 탑승 금지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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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백화점 5층 식당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와의 오랜만의 외출이니 외면할 수 없었다. 그 곳에서만 파는 냉면을 드시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30분쯤 기다리니 자리가 났다. 이미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얼른 먹고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회냉면은 새로울 게 없었다. 홍어 대신 가자미를 고명으로 올려 훨씬 씹는 맛이 더 고소하다는 선전문구가 벽에 붙어 있었지만 글쎄. 어머니는 내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워 보이셨다. 나를 바라보며 맛있지 않니?”를 연발했다. 나는 건성으로 , 하며 고개를 숙인 채 먹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에어컨 고장으로 대신 틀어놓은 선풍기 바람은 시원하기는커녕 되레 끈끈했다.

저기요.”

처음에는 몰랐다.

이봐요.”

머리를 들어보니 오른손에 큰 가위를 든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서있었다.

, 됐습니다. 안 자르셔도 돼요.”

여자는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키는 16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고 약간 마른 타입이었다. 머리카락은 묶은 채 뒤로 넘겼고 앞치마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식당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마 오늘이 삼사일쯤 됐겠지. 인상은 날카로웠다. 코가 뾰족하고 성형한 티가 확 나는 짙게 쌍까풀 진 두 눈은 화가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숨을 서너 번 고르더니 날카롭게 되물었다.

왜 손가락질을 해요?”

?”

나는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줌마는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로 가위를 높이 쳐들었다.

계속 나를 보면서 손가락질을 했잖아요. 기분 나쁘게.”

정확한 사태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가만있다가는 완전히 뒤집어 쓸 판이라 언성을 높여 되받아쳤다.

뭐라구요? 왜 생사람을 잡아요.”

여인네는 주눅 따위와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인 듯 얼씨구나 하며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어디서 시치미를 떼? 계속 나를 쳐다보며 손을 들었다 놨다 했잖아.”

이미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집중되어 있었다. 까딱 잘못하다간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갑질하는 진상손님으로 몰릴 판이었다. 더위는 어느새 사라지고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지나났다.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이 지옥굴에서 건져달라구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나 시선을 피하고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계셨다. 이런 젠장.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꼼짝하지 않고 아이고 이젠 나 몰라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더니. 아들이 곤경에 처했는데도 똑같군 똑같아. 어느새 주인까지 여자 옆에 서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어서 사과하라구, 어서.

숨 막힐 듯 한 정적을 깬 것은 옆자리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던 젊은 여성이었다.

이 분은 손가락질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차분하게 종업원과 주인집 여자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뭔가 착각하셨나 보네요.”

그 순간 희한하게도 아주머니의 기세는 팍 꺾였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식당 주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부아가 치밀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에게 거 봐요, 사람을 뭐로 보고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의문이 번개처럼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르며 분노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손가락질을 했는지 안했는지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텐데 왜 나를 변호해주었을까?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여인의 눈은 크고도 맑았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 입속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성은 그런 말은 필요 없다는 듯 빤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디서 봤나? 아니면 나를 아는 사람인가?

결국 나는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한 채 절반이나 남은 냉면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는 왜 그러냐며 눈치를 주었다. 나는 갖은 인상을 쓰며 다시 쏘아보았다.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어서, 빨리라고 또박또박 끊어 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이곳에서 벗어나자구, 조금이라도 더 있다가는 나도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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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이자 월요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정규 직장을 그만두고 치러 온 나만의 의식이다. 일이 생겨도 웬만하면 월요일은 피해왔으며 오로지 관악산만 오른다. 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다는 장점 때문만은 아니다. 연주암에서 제공하는 공짜 점식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재미있는 건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정상에 올랐다는 홀가분한 마음에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졌겠지.

어제도 그랬다. 한동안 읽기에만 치중하고 글쓰기는 간단한 서평 외에는 건드리지도 않았다. 억지로 쓰라고 하면 쓸 수도 있었겠지만 도저히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는 열정이 생기지 않아서다. 그럴 땐 팬을 들어서는 안 된다. 노트북을 펼쳐 전원을 켜서도 안 된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 무작정.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보면 문득 뇌 안의 시작 버튼이 깜빡하고 켜지면서 단어가 팝콘 튀기듯 툭툭 튀어나온다. 처음엔 하나씩 천천히 솟아오르다 어느 순간 테트리스처럼 빠르게 마구 떨어진다. 급하게 단어들을 이리저리 맞추어 나가도 보면 서서히 익숙해지다가 어느새 문장이 술술 흘러나온다. 희한하게도 늘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산에 가거나 수영을 할 때 혹은 자전거를 타고.

문제는 책상 앞에 딱 앉아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있던 단어와 문장을 끄집어내어 자판으로 옮기려 하면 그만 턱하고 숨이 막힌다는 거다. 그 빛나던 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제목 하나는 건졌다. 어떤 내용의 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개인주의자로 살아가는 내 모습에 착안하여 이야기를 꾸려갈 것이다. 일종의 개인주의자 선언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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