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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와 나 - 세계 최악의 말썽꾸러기 개와 함께한 삶 그리고 사랑
존 그로건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그저 강아지 한 마리 키우는 사람의 즐거움, 행복에 관한 책인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린 시절 그런 추억의 개 한 마리쯤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말리는 여느 개와는 심각하게 다른 못말리는 사고뭉치라는 것을 말이다. 사고뭉치라고 아주 귀엽게 표현했지만 몇 장만 읽어보면 그 사고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쩜 좋니 말리..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더랬다. 인간으로 치자면 넘치는 에너지를 정말 주체 하지 못하는 과잉행동증후군(이런 용어가 있다면)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못말리는 말리는 13년을 주인 그로건 가족과 살았다. 신혼시절, 아이들이 태어날 시기, 이직하는 시간, 플로리다에서 펜슬베니아로 이사가는 것 등 이 가족의 모든 역사에는 말리라는 등장인물이 늘 함께 했다.
책을 읽다가 몇 가지 기억이 너무 선명한 장면들에 말리가 영화에 2분 동안 출연하게 되는 과정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하마터면 지하철에서 혼자 웃다가 소리를 낼 뻔했다.-_- 꼬마 남자애와의 장면이었는데 간만에 너무 우껴서 마치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 밖에 도그 비치에서 신나게 놀다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것, 눈썰매를 주인과 함께 타고 내려오다가 큰 일 날 뻔한 장면 등 번역이 잘 되어서 인지 재밌는 문장들이 정말 많았다. 덩치가 큰 말리가 몸을 한번 털면 ‘털보라’가 일어난다는 둥, 노년의 말리가 귀가 잘 안들려서 음식을 훔쳐먹다가 주인에게 걸릴 때 몸통이 털 밖으로 빠져나갈 정도로 놀랐다든가 하는 표현은 정말 예술이지 않은가. 이밖에도 더 있었는데... 나만 우낀가? ㅠㅠ
우리 인간보다 생을 조금 더 일찍 마감해야하는 동물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유한함을 느낀다. 노년을 받아들이는 말리의 모습에서 이제 가족과 같은 이 녀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정말 마음 아프다. 차라리 죽는 순간에는 좀 편할 지도 모르겠다. 이 전에 오는 증후들.. 귀가 점점 잘 안들린다던지 눈도 잘 안보이고 다리에 힘이 없어져 2층으로 이제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이런 상황을 보게 된다면 정말 믿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말리를 보며 그렇게 순수하게 기뻐하는 생명체를 본적이 없었다고 그로건은 회고한다. 나 역시 개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순간에 집중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의 말에 100% 동감할 수 있었다. 컬러 사진도 아니고 매 장마다 말리의 흑백 사진이 나오는데 그 사진만으로도 나는 말리가 어떤 개 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건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을 지도 짐작이 간다. 동물이건 사람이건 사랑받는 생명체에서 뿜어나오는 기운은 딱 보면 알 수 있는 법이니까.
말리가 어떤 식으로든 삶의 모범이 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발코니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생각해보니 녀석이 ‘잘 사는 것’의 비결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며, 마치 사춘기 소년 같은 활력, 용기, 호기심,
장난기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내라.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달력이 몇 장이 넘어가건 여전히 젊은 것이다. 괜찮은 인생철학이었다.
물론 소파를 찢어 놓거나 세탁실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부분은 제외하고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