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p.67)

 열세살의 소녀 브리오니의 오해에 의해 누군가의 인생은 파괴된다. 동일한 사건이 여러 사람의 가슴속에 새겨지는 방식은 이렇게도 다를 수 있다. 누군가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인해 누군가의 가슴은 피멍이 들다 못해 인생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의 영향을 받는다. 2부에서 그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방황하는 로비의 삶이 그려진다. 책을 둘러싼 띠지에는 <어톤먼트>영화의 한 장면이 들어가 있다.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므로 소설을 영화로 어떻게 그려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를 곱씹어 읽어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의 로비는 자신의 운명 앞에 무력감을 느끼는 듯 보여 좀 답답했다.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브리오니 집안의 파출부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브리오니가 자신의 증언을 번복하고자 한다고 세실리아로부터 전해 듣고 그는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의대진학을 위한 꿈도 포기하고 무엇보다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로비의 운명도 딱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가는 것은 죄를 저지른 브리오니라는 인물이다. 그야말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속죄를 위해 그녀가 택한 것은 간호사의 일이었다. 3부에는 그녀의 일상이 세세히 그려진다. 온갖 규칙이 통제하는 얽매인 일상을 반복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미에서 소설가로서 성공한 브리오니의 삶을 끝맺음으로 한다. 소설가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설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가 자신이 속죄를 한다는 것도 아니며 그럴 필요조차도 없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소설에서 로비와 세실리아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서술하지만 그건 끝이 없는 속죄를 위한 노력이고 중요한 것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다.
 꽤 두껍지만 강인한 흡인력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 그야말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오랜만에 읽는 하루키의 장편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스토리 자체보다는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물들의 자세한 외양의 묘사가 그들의 성격, 직업, 행동, 말 등과 일치하는데 소설은 역시 서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전의 편견들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단연코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게 된다. 9를 Q로 바꾼 사연은 조지 오웰의 소설과는 그닥 상관이 없다. 우연한 계기로 남들과 똑같은 1984년의 현재와는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이 다소 판타지적이고 결말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는 열 살 무렵의 서로에 대한 강렬한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소설에서도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누구에게나 살아오는 동안 잊지 못하는 풍경을 여러 개 가지고 살아간다. 그 풍경 속의 인물은 반드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만 늘 머릿속에 맴도는 경우일수도 있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그 인물을 실제로 찾아 나설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마음이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돌고 돌아 서로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 둘을 쉽게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어떤 역사적인 한해를 규정짓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오마메의 특별한 1984년은 자신의 사랑을 찾아나서는 한해였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서라도 찾고 싶었던 사랑을 하루키는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에 그려보고 싶었던 것일까. 첫사랑의 강렬한 인상이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참으로 시시하다. 더군다나 그런 것을 별로 믿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가장 흔하고 통속적인 것들이 어쩌면 진실이고 근원일 수 있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마루는 체호프의 말을 인용한다.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그 뜻은 이야기 속에 필연성이 없는 소도구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이라고 아오마메에게 설명한다. 우연으로 점철되는 소설은 현실과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야기속의 모든 것들은 맞물려 마치 거대한 계획에 의해 지어진 정교한 건물처럼 완성되어야 한다. 1Q84는 그런 면에서 많은 공을 들인 듯 하다. 아쉬운 것은 후카에리의 소설이면서 덴고의 소설이기도 한 “공기번데기”가 정작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듯 하루키의 1Q84 역시 어떤 측면에서 읽어야 할지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러한 반응을 염두하고 그런 대사를 넣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듯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였고 책 앞날개의 사진은 이제는 연륜이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이 보여 반가우면서도 애잔함이 느껴졌다. (뒤늦게 안 사실.. 3권이 4월에 일본에서 나온다는데.. 끝이 아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98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히사오의 청춘일기이다. 대학을 재수까지 하며 들어갔지만 도중에 중퇴하고 나와 카피라이터로서 일하며 살아가게 된다. 히사오의 이십대는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의 이십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아이가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처음 맛보는 충격과 직장인으로서의 고뇌들(?)에 동감하며 빙그레 웃음 짓게 된다. 나도 히사오처럼 서른에는 대단한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스무살에 꾸웠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잊어가며 살아가는 지금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건 죽는 그 날 까지 꿈을 꾸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만큼 슬픈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서울에 와서 처음 먹어본 버거킹의 버거 맛처럼 충격적인 어떤 것이 내 인생에 또 있겠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인생의 ‘시작’이라는 설렘들을 다시 한번 추억해볼 수 있어 즐거웠다.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파이팅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아프가 본 세상 2
존 어빙 지음, 안정효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어빙의 소설 중 "사이더하우스 룰즈"를 먼저 읽었고, 당장에 반했었다. "가아프의 세상"은 섬뜩하고 처절하고 집요하다. 포스트잇을 수십군데 붙여놓을 정도로 베끼고 싶은 구절이 많고 그래서 다시 읽고 싶기도 하지만 반대로 다시는 읽기 싫을 정도로 가학적인 묘사가 많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의 욕정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인물이 이 욕정에 의해 자신의 삶이 휘둘린다. 인간의 욕정을 철저히 부정하는 제니 필즈는 가아프를 단 한번의 섹스로 낳기만 할 뿐 욕정 없는 평생을 산다. 그에 반해 가아프는 평생을 이 욕정에 휘둘리며 산다. 무자비한 욕정으로 희생당하는 혀짤린 열한살 소녀 엘런 제임스, 그리고 스스로의 혀를 잘라버린 제임스파들이 있다. 그밖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도 욕정이라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분류된다.  

 이러한 서술방식에 처음에는 낯설고 사실은 조금 짜증까지 났었다. 하지만 존 어빙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은 도중에 이 책을 닫아버리도록 하지 않았다. 가아프 가족에게 불어닥친 우연한 사건들로 마치 폭풍우를 견뎌내듯 이들은 살아간다. 가아프가 본 세상에서는 저녁에 허리를 잡고 웃다가도 이튿날 아침은 살인적일 수도 있었다,는 말처럼 예기치 못한 오히려 희극적이기까지한 여러 인물의 죽음이 수긍이 갈 정도이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안은 던컨이나 엘런에게는 가슴아픈 동정심이, 여러 해동안 글쓰기자체를 힘겨워하는 가아프에게는 또 그런대로의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 많은 인물들 중 이 소설의 출발이기도 한 제니 필즈의 간호사, 작가로서의 강인한 인생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과연 여권주의자였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생을 자신의 선택에 의해 추진해나가는 힘이야 말로 그녀가 가진, 그리고 가망없는 환자와 같은 우리들이 갖어야 할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가아프가 꿈꾸던 안전하고 평화로운 아버지의 환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가아프 이후에도 삶은 계속 존재한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삶들이 존재하는 방식마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랑없이도 살 수 있냐고 묻는다. 소설은 로자아줌마와 모모라는 아이의 관계를 통해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리 비참한 환경에서 살아갈지라도 사랑만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이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슬프지만 따뜻하다. 창녀들의 아이들을 키우는 로자 아줌마는 역시 창녀의 아이인 모모와 헤어지기 싫어 모모에게 나이를 속인다. 자신의 출생의 슬픔 때문에 모모는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 아이의 조숙함, 그러한 자기 앞에 놓인 생을 이끌어가는 아이의 모습은 나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로자 아줌마, 카츠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와 같은 마음 따뜻한 어른들의 믿음 속에서 모모는 자신의 생을 등에 지고 한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한가지는 그들을 진실로 믿어주는 일 뿐이 아닐까. 모모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로자 아줌마를 떠나 보냈지만 로자 아줌마와 진실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에 올바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설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