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내의 시간 - 13년의 별거를 졸업하고 은퇴한 아내의 집에서 다시 동거를 시작합니다
이안수 지음 / 남해의봄날 / 2021년 11월
평점 :
초연(超然)한 사랑을 거듭 느끼게 하는 책
여러분들은 사과를 어떻게 깎으시는지? 손에 쏙 들어오는 과도로 너무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껍질을 깎은 뒤, 똑같은 크기로 균등하게 잘라 접시에 내어놓으시는지? 나 역시 크게 다르지않은데, 세상에는 사과를 희한하게 잘라 먹는 분도 있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이안수 선생님. 그분은 커다란 식칼로 사과를 툭툭 삐지듯 잘라 드셨다. 잘린 사과 조각들 중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었다. 방송에서 그 장면을 보고는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튿날 곧바로 이안수식 사과 자르기를 모방해 보았다. 덕분에 그날 아침 평범한 사과가 아닌, 신선한 충격을 아삭아삭 씹어 먹을 수 있었다.
유투브 알고리즘으로 하여금 나의 권태를 눈치채게 한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어느 지역방송에 소개됐던 이안수-강민지 부부의 영상을 우연히 접하고는 단박에 매료되고 말았다. 남편은 파주에서 모티프원이라는 북스테이 숙소를 운영하고, 아내는 북한산 어귀에서 단ㅊ한 공간을 얻어 누리며 살고 계셨다. 두 분이 같이 살지 않는 건, 결코 물과 기름 같아서가 아니었다.
부부는 한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살아야 한다는 통념, 혹은 부부는 일심동체여야 한다는 속박 같은 것에서 진즉 자유로워진 두 사람이었다. 각자의 꿈과 개성이 녹아 있는 공간을 상황 따라 공유하는 그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결혼 생활 10년 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보다 이심이체(二心異體)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관용적으로 쓰는 말들에 생각 없이 끌려갈 것인가, 혹은 맞지 않는 옷처럼 훌훌 벗어버릴 것인가. <아내의 시간>을 읽으며, 부부 관계를 구속하는 말들이 거듭 뻔하고, 괜스레 어깨만 무겁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부부 관계에 대한 통념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15쪽)라는 문장처럼 선명하게 선언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좀 더 경쾌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주로 이안수 선생님의 나직한 목소리로 전개되지만, 중간중간 강민지 선생님의 <아내의 노트>라는 짧은 글이 소개되기도 한다. 그중 69쪽에 나오는 메모는 이 부부의 삶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명장면이다.
“식사할래요?”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남편이 물었다.
“아니요.”
남편은 두 번 다시 묻지 않고 1인분의 상을 차렸다. 홀로 1식 2찬의 간편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식기를 닦아 장에 넣은 남편은 다시 내 앞에 앉아 하던 일로 돌아갔다. 우리 부부에게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인습의 굴레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13년간의 별거가 가져다 준 수혜이다. (69쪽)
서로 간섭하지 않고, 단순하게 살며, 성 역할을 따지지 않고 자기 몫의 일을 다하는 것, 강민지 선생님의 은퇴 이후가 활짝 피어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자전거 여행과 트레킹, 민화 수업, 연극심리 수업, 마을 활동가… 현재 진행 중인 이 풍성한 체험들은 ‘남편 밥 차려주기’에서 훌쩍 벗어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내는 오늘도 전화 한 통 없군.” (224쪽)이라는 문장이 전혀 쓸쓸하게 읽히지 않는다. 초연(超然)한 사랑만을 거듭 느끼게 된다.
내 끼니는 내가 해결하는 연습을 13년 동안 해온 터라 여성의 자기 활동에 가장 큰 걸림돌인 남편 식사 챙기기에서 자유로운 만큼 아내의 활동은 당일에서 보름까지, 제주에서 DMZ까지 시공간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 P204
남편, 자식들과 잘 지내고 있지만 혹시 혼자가 되어도 잘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 P207
"내가 자주 실직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홀로 나라 밖을 떠도는 모험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내 영혼이 끌리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안전과 안정에 연연하지 않는 아내의 성정 덕분입니다. 가족을 굶길 셈이냐, 당신만 외국으로 떠나는 일은 도피다,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집을 짓지, 하고 나의 무책임과 무대책을 먼저 힐난했다면 우리 가족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오늘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 P236
우리가 동거에서 고수하는 두 가지는 ‘간섭하지 않는다’와 ‘단순하게 산다’입니다. - P23
우리 부부에게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인습의 굴레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13년간의 별거가 가져다 준 수혜이다. - P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