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출판] 인문출판 20년 동문선 신성대 사장

[속보, 생활/문화, 연예] 2004년 02월 02일 (월) 18:39
‘신학이란 무엇인가’(데이비드 F 포드 지음, 강혜원 등 옮김), ‘코란이란 무엇인가’(마이클 쿡 지음, 이강훈 옮김), ‘푸코와 문학’(시몬 듀링지음, 오경심 등 옮김)….관련 전공자가 아니면 들춰보지도 않을 만큼 난해한 내용, 표지엔 저자 사진 한 장 달랑 넣은 단순한 디자인으로 일관된 동문선의 ‘문예신서’ ‘현대신서’시리즈는 사흘이 멀다 하고 한두 권씩 나오고 있지만 판매와 거리가 멀다. 문예신서는 1988년, 현대신서는 98년부터 선보이고 있다.신성대(50) 동문선 사장은 20년간 이처럼 ‘안 팔리는 책’을 만들어온 괴짜 출판인이다. 84년 ‘뭣 모르고’ 출판사를 인수한 후 지금까지 500종가까이 책을 내면서 그에게 남은 건 수 억원의 빚과 팔리지 않은 수십 만권의 재고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표정은 밝기만 하다.

‘자선사업을 하는 것인가’란 물음에도 “이윤 따지려면 진작에 배추장사로 나섰다. 웬만한 책은 다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에둘러 말했다. 그래도 책을 엄선해서 낼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태산은티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으로 응답한다. “팔릴 만한 책을골라서 내는 것은 자기 집에 정원을 꾸미는 것에 불과해요. 보기 좋은 정원수를 가꾸기보다는 자연을 흉내내고 싶다고 할까요.”그의 뚝심과 옹고집에 원고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오히려 판매 걱정을 해준다고 한다. 지금까지 출간한 책 중에 99%가 초판만 찍었고, 그것도 팔리지않아 대부분이 창고에 쌓여 있으니 그럴 만하다. 일산에 있는 60평짜리 농가 창고 3개 동에 보관된 책들은 관리비만 한 달에 270만원, 1년이면 3,000만원이 들어간다.그러나 ‘소도 뒷걸음질하다 쥐를 잡는다’고 했던가. 그 동안 많은 책을내다보니 베스트셀러도 있긴 있었다. 2000년 처음 출간된 ‘느리게 산다는것의 의미’(1~3)는 30만부가 팔려 효자노릇을 톡톡히 했다. “어려운 책들을 다루다 보니 답답해서 머리 식히려고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이끝나고도 6개월이나 묵혀두었고 초판도 2,000부만 찍었죠.”여기에 소설가 이외수씨의 작품 ‘말 더듬이의 겨울수첩’을 비롯해 10여권이 그의 빈 주머니를 그나마 채워주고 있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들과 함께 상경한 신 사장은 신림동 판잣집에서 새벽엔 신문배달, 밤엔 지게를 지고, 주말에는 소와 돼지를 키우는 등 해보지 않은일이 없을 만큼 고생도 실컷 했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해양대 부설 해양전문학교를 졸업, 7년간 외항선 기관사로 세계를 누비며 돈을모아 출판사를 냈다.

서울 마장동 전셋집에서 살다가 최근에야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했다는 그는 가난이 지긋지긋하기도 할 법한데 여유만만하다. 쪼들리는 생활속에서도 중학교 때부터 배운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1년에 2,000만~3,000만원씩 지원금도 내고 있다.IMF 외환위기 후에는 회사 사정이 더 어려워졌지만 출판에 대한 열정은더욱 뜨겁다. 지난 해에는 86권을 냈는데 올해에는 100권, 앞으로 하루에한 권씩 내는 게 목표이며 조만간 각종 사전 편찬에도 뛰어들 예정이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작업에 방해를 받을까 봐출판사 간판도 없애버렸다.“‘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서울 종로구 관훈동 사무실 한 켠에 적힌 ‘꾸준함을 이기는 경쟁자는 없다’는 글귀가 동문선의 꿋꿋한 자세와 신념을 함축하고있다.

/글 사진 최진환기자 choi@hk.co.kr

 

교수신문

외국서적 번역 이대로 좋은가...짧은 시간에 졸속 양산
프랑스 철학서들 오역논란 빚어

2004년 02월 26일   강성민 기자 이메일 보내기

최근 철학계에 오역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논란은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가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데리다의 '불량배들'(이경신 옮김, 휴머니스트 刊)에 대한 독자서평을 올리면서 불거졌다. 진 씨는 '불량배들'이 "거의 페이지마다 오역이 있으며, 개념을 잘못 옮긴 부분도 많다"라며 예를 들어가며 지적했다.

또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옮김, 민음사 刊), '마르크스의 유령들'(양운덕 옮김, 한뜻 刊)도 오역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진 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진경·권순모 씨가 옮긴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 刊)도 "매 쪽마다 심각한 오역이 하나씩 나온다"라고 지적하는 등 "학술적 인용을 위한 전공도서로는 문제가 많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철학서적의 번역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프랑스 철학일수록 오역논란이 그치질 않는다. '믿음에 대하여'(슬라보예 지젝 지음, 최생열 옮김)를 비롯한 지젝의 책들, '진보의 미래'(도미니크 르쿠르 지음, 김영선 옮김) 등이 구설수를 타고 있다. 특히 '진보의 미래'는 읽을 수도 없을 지경이라는 후문이다. 그러다보니 프랑스 철학서들을 많이 펴내는 동문선, 인간사랑 출판사는 '오역 공장'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다.


동문선의 신성대 대표는 "우리 책이 오역이 좀 있죠. 고쳐야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줄일 지는 대책이 서지 않고 있다. 동문선은 거의 4일마다 책을 한권씩 내는데 "실용서 개발로 경영손실을 충당하면서 학술번역은 좀더 신중을 기하면 어떤가"라는 질문에 "전공자의 번역기피가 심각한 상황에서 마냥 역자를 기다릴 순 없다. 올해는 3일에 1권씩 내야 먹고살 것"이라고 해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좋은 책이 죽는다는 것도 문제다. 안 팔리다보니 금방 절판돼, 불명예를 안고 죽어가는 책들은 보는 識者들의 한숨을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오역을 막기 위한 공동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프랑스학회, 프랑스학회, 한국불어불문학회 등 관련 학회에서는 필요성만 인정할 뿐 구체적 고민은 없는 상태다. 최근 '영미문학연구회'가 학진 지원연구로 광복 이후 2003년 7월까지 발간된 번역본 573종을 평가한 사례는 꽤 고무적이다.


학술지에서 '서평'란이 없어지는 것도 번역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학진의 학술지 평가나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에서 서평에 점수를 주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글쓰기를 꺼리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학술진흥재단 측은 "학술지평가의 평가 항목 중 편집위원 연구실적 부분에서 서평을 연구실적으로 일정비율을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제 지식인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진태원 씨는 번역에 대한 토론영역을 섹트별로 나눠서 차례차례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식인을 활용하는 출판시스템의 문제, 오역과 스타일의 구분, 분석철학·정치철학·형이상학 등 분과별 참조점의 차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하는 문제, 많은 인적자원을 거느린 대학출판부의 역할강화 문제 등을 논해서 번역에 대한 지적 公準을 마련하는 일 말이다.


이번 '불량배들'에 대한 비판 역시 이런 비평문화의 부재 위에서 제기됐다. 이 책의 번역자인 이경신 씨는 "모든 페이지가 오역이라는 비판은 잘못됐으며, 짧은 기간과 薄利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번역에 나선 역자에게 치명타를 안겨주는 발언"이라며 자기성찰적인 비판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포월 2004-03-01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 책들은 기초 인문도서인 1차 저작물입니다. 이런 분야의 저작이 쌓여야 인문학이 살고 그래야 출판이 발전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는대부분 이런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3차 저작물입니다. 언론도 대중들의눈높이에만 맞추지 말고, 세상에 어렵고 복잡한 사고를 하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아연실색입니다!!
이만하면 필화사건(?)으로 불붙은 건가요? ^^; 당연히 중요하게 지적되었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혹 어려움 겪고 있다면 힘내세요. ^^

balmas 2004-03-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은(^^)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좀더 문제가 널리 알려지고 검토되고 해법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동문선 출판사라는 한 출판사의 문제는 아니지만, 동문선 출판사는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 사회 지식-출판 시스템의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증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관해 조만간 제가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간단히 적어서 올려놓겠습니다. 한번 같이 토론해 보지요.
 

로쟈님께

로쟈님께서 이번에 달아주신 논평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마이 페이퍼>로 답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좀 길게 써볼 생각이었는데, 밀려 있는 다른 일들 때문에 제대로 짬을 내서 글을 쓰기가 어려워서 간단히 몇자 적겠습니다. 로쟈님의 논평은 네 가지 논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différance의 번역에서 <차이>나 <차> 또는 <差移>라는 번역이 내세우는 ‘원칙적인 충실성’의 주장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갖는 환상과 유사한 환상에 빠져 있다. 더욱이 이는 <차연>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강변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있다.
    2) <差移>라는 번역은 한글 전용 원칙을 파괴할 우려가 있으며, 더 나아가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가 e와 a 사이의 차이인 데 비해, <차이>와 <差移>의 차이는 문자 체계 자체의 차이인 만큼,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를 옮기는 데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3) 디페랑스는 단지 글자체만의 차이가 아니라 철자상의 변이를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이나 차 같은 고딕체 번역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차연>이 더 낫다.
    4) <차연>이 번역어로서 한계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이 때문에 <차연> 대신 차이나 차, 또는 差移라는 번역어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충분한 역주를 통해서 <차연>의 (번역어로서의) 부족함을 지적한 다음, 그대로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이 논점들 중에는 제가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이 점들에 관해 논의할 수는 없을 듯해서,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쟈님 지적을 보고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제가 문자 체계의 차이라는 문제를 좀 가볍게 여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차이>와 <差移>의 차이는 différence와 différance의 차이와는 좀 성격이 다르고, 또 différance라는 신조어의 용법이 함축하고 있는 위반의 함의를 인정한다 해도, 이것이 상이한 문자 체계에 속하는 <差移>라는 역어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차연>이라는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적절한 해결책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différance에 관한 역주에서 지적한 내용이 이미 <차연>이라는 역어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썩 만족스러운 건 아니고 또 아직 생각이 확정된 것도 아니지만―로쟈님의 지적을 일부 수용해서 <差移>라는 역어 대신 <차이(差移)>라는 역어를 사용할까 합니다. 이런 역어를 택한 이유는 제가 보기에는 différance의 번역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음성적인 식별 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며, 또 로쟈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e와 a의 차이를 문자 체계의 차이로 확대하는 비약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로쟈님은 차이나 차 또는 差移 같은 역어를 사용하려는 시도가 현전의 형이상학의 태도가 갖고 있는 환상과 유사하고 또 도덕적인 우위를 부당하게 참칭한다는 점에서 부당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런 역어들을 사용하려는 시도들을 현전의 형이상학과 연결시키는 것은, 데리다 철학에 대한 얼마간 부적절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듯합니다. 더욱이 이는 지난 번에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다소간 실존주의적으로 제시하신 것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역어들을 사용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도덕적 우위를 강변하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각각의 경우에 대한 좀더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겠지요. 제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지금 여기서 뭐라고 답변드릴 처지가 아닌 듯합니다. 유물론자라면 의도나 의식에 근거해서 (도덕적, 이론적) 결백을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졸지에 이런 도덕적 비난까지 당하게 돼서 상당히 당혹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좀더 시간을 갖고 검토를 해본 뒤에 다시 논의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쟈 2004-02-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적 비난까지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차이(한자)'로 하시겠다는 데 대해서는 저도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차연'을 배제한다면,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번역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역능'이란 역어가 제거된 것인데('역능'은 '권능'이란 단어만큼 저에겐 역겨운 단어입니다), 그만한 역량을 데리다 번역에서도 계속 발휘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balmas 2004-03-01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혹스럽긴 합니다만, 어쨌든 문제를 좀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인식은 바깥으로부터의 충격, 불편함에서 시작한다는(맞나? 예전에 [차이와 반복]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좀 가물가물하군요) 들뢰즈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그리고 아직 이 문제는 계속 남아있으니까 좀더 생각해봐야 할 듯합니다. 사실은 [차이]라는 글 및 이 글이 수록된 [철학의 여백]이 번역되어야 좀더 논의가 구체적이고 생산적일 텐데, 언제 이 책이 번역될 수 있을까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벤야민은 하루빨리 좀더 많은 작품이 번역,소개되어야 할 사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문필가, 철학자, 문예이론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가 아마도 20세기 전반기의 사상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놀라운 이미지 이론과 매체 이론이 그렇고,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신학과 유물론, 또는 신학적 유물론이 특히 그렇다.
   이 분야의 글로는 말년에 씌어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보통 [역사철학테제]라고 번역되지만―와 초기의 단편 한 두개만이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파리 아케이드](“Passagen Werk”)를 비롯한 이 분야의 글들은, 좀더 체계적으로 소개된다면, 벤야민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사상적 지형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릴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지난 20여년 동안 국내에서 가장 널리 읽힌 벤야민 번역본이다.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아직 생소했던 시기에, 더욱이 군사독재의 엄혹한 탄압이 짓누르고 있던 시기에, 난해한 벤야민의 글들을 짜임새 있게 묶어서 소개한 공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벤야민을 번역해본 사람이라면, 그 일이 얼마나 힘겹고 생색이 안 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벤야민을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문장들을 틈새 없이 조밀하게 이어주는 깊은 논리전개를 따라잡아야 하고, 도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본문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지만 벤야민이 매우 친숙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이론들, 이데올로기들의 유래를 추적해서 밝혀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번득이는 통찰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잘 붙잡아두었다가 옮겨 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이 이 번역본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는다. 이 책의 역자가, 20세기 독일 지성계의 귀중한 유산을 번역, 소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반성완 교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번역가의 과제] 앞부분에 해당하는 320쪽의 논의를 보자. 번역문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떤 상대적 개념들은, 그것들이 처음부터 인간들에게만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만 그 자체의 가장 좋은 의미를 보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삶이나 아니면 잊을 수 없는 순간―비록 우리가 그것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고 하더라도―이라는 말을 운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러한 삶이나 순간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요구를 할 경우,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이 말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내포하고 있을 따름이며, 나아가서는 동시에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 개념들]은 원문이 'Relationsbegriffe'이니까 [관계 개념들], 또는 [관계적 개념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건 매우 사소한 문제다(하지만 321쪽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문제다). 맞줄 사이의 [우리]도 'alle Menschen'의 번역이니까 [모든 인간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 역시 사소한 문제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 요구]를 [인간이 부응할 수 없는 요구]로 고쳐야 하고, [인간에게도 해당될 수도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에 대한 기억]을 [그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으로 고쳐야 한다는 건 중대한 문제다. 번역문만으로는 벤야민의 논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언어적 형상의 번역성 여부는, 그것이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도 [비록 '어떤' 언어적 형상물들이 인간에게는 번역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수정되어야, 앞의 논의와 일관성있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321쪽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은 그것이 번역될 수 있음으로 해서 번역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원전의 번역 가능성 덕분에 원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와 같이 주어를 바꿔 번역해야 역시 논의의 문맥이 이해될 수 있다. 이것들은 이 번역본이 지닌 문제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시간이 있고 지면이 허락한다면 이런 문제점은 수도 없이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는 벤야민 전공자가 여럿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벤야민 저작의 번역이 이처럼 더딘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제 제대로 번역된 벤야민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게 단지 나의 바램만은 아닐 것이다.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것 같아 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니면 이 일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벤야민 전공자들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09-1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카페에서 알게된 바에 따르면, 그 주인장이 [모스크바 일기장]의 번역 초고를 완성한 상태고,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랍니다. 주인장이 올린 몇편을 보니, 아직 초고라 그런지 어색한 문장이 좀 있더군요. 기대 반 의구심 반입니다.

balmas 2004-09-1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벤야민 저작들이 출간되는 건 반가운 일인데, 번역이 제대로 됐으면 좋겠군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앞으로 종종 들르시기 바랍니다.^^
 
글쓰기와 차이 동문선 문예신서 162
자크 데리다 지음, 남수인 옮김 / 동문선 / 200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에 번역된 데리다 책들(데리다의 저서 및 해설서) 중 많은 수가 심각한 오역으로 훼손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 번역본은 좋은 번역본일까? 알라딘의 편집자는 이 책을 “Editor's Choice”로 표시해 놓았고, 서평자 중 한 사람은 서평의 제목을 “데리다 번역본 가운데 가장 낫지 않을까 ...”로 달아놓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그래도 믿고 구입해볼 만한 번역본인 듯하다.

그런데 다른 서평이 재미있다. 실례인지 모르지만 일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와~~ 뭐 이렇게 어렵냐? 장장 10일 동안이나 자세히,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원래 철학 하면 어려운 것이라는 내 고정관념을 더욱 강고히 만든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글쓰기와 차이다.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볼 때 이 서평자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고, 이 서평은 매우 좋은 서평이다. 국내의 데리다 번역의 문제점을 몇 줄로 집약해서 표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국내의 데리다 번역본은 10여일 동안 꼼꼼하게 읽은 독자가 잘 모르겠다고 탄식을 하게 만들 만큼 내용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철학은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만 강화시키고 있다.

둘째, 하지만 데리다는 원래 어려운 철학자 아닌가? 이런 반론이 제기될지 모르겠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논증이 복잡하고 내용이 심오해서 한번 읽어서는 내용 전체를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사용되는 언어나 기호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철학이 어렵다면 아마도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역본은 데리다의 어려움을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가까운 어려움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도대체 글쓰기와 이 책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무식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위의 서평자의 지극히 정직한 고백에서 잘 나타난다. 이 서평자는 책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이니 책을 읽어보면 당연히 제목에 관해 이해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그 연관성을 알 수가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그런데 역자는 알고 있을까? 왜 이 책의 제목이 <글쓰기와 차이>인지, 도대체 '차이'가 '글쓰기'와 무슨 관계에 있는지?)

그렇다면 이제 데리다 책을 사보겠다고 나설 독자가 있을까? 책 제목의 뜻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번역본이 가장 나은 번역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말고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데리다와 교양대중의 거리는 더 멀어질 것이고, 철학과 교양대중의 거리도 더 멀어질 것이다. 전문가들은? 그들에게 이런 번역본이 연구에 참조가 될까? 그들이 이런 번역본을 강의나 수업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아마도 (대학원 수업이라면) 차라리 영역본을 권할 것이다.

그렇다면 데리다 번역은 왜 하는 것일까? 아마도 출판사로서는 이미 계약해 둔(또는 오히려 전매해둔) 저작권을 사용하기 위해서, 역자는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 했으리라. 대중의 교양습득이나 전문가들의 연구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저작권 계약과 번역,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끊임없는 오역의 악순환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원인을 제거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누구 해답을 아는 분 없습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09-11-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그렇게 어렵지 않던데... 이제 대딩 1학년입니다만. 케바케 아닐지요. 그냥.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4-09-3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잘 이해는 못했지만 추천은 하죠

balmas 2004-10-10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고마울 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