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회주의인가

'왜 사회주의인가'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미국 좌파잡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1949년 5월)에 쓴 글이다. 매카시즘의 미친바람이 몰아치던 즈음, ‘천재’와 동의어이던(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과학자의 ‘사회주의 선동’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먼슬리 리뷰’는 지금도 창간 특집호를 꾸밀 때면 이 글을 다시 게재한다.

(아래, 리오 휴버먼은 1968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먼슬리 리뷰' 편집자였다. 그의 동료 폴 스위지는 지난 2월 세상을 떠났다.)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알버트 아인슈타인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 - 신기섭)

Posted by gyuhang at 2004.04.03 11:3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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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xov 2004-04-1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의 글인데도 지금 읽어봐도 새롭네요.

balmas 2004-04-13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인슈타인이 정말 천재이긴 천재인가 봅니다.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으면, 우리나라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정말 ...... 입니다(필화를 방지하기 위해 자진삭제-_-;;). 어제 철학과 교수들 90여명이 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 참, ... 그래도 그나마 용기와 양심을 가진 분들입니다. 철학과 교수들, 아니 대학 교수들 중에는, 정말이지, 열우당 지지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열렬한 한나라당 지지자들인 대학교수들을 볼 때마다 가끔 <어떻게 저만큼 학식 있는 사람들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있을까>라고 해야 되는지, 아니면 <저런 정치의식을 갖고 저만큼 공부를 하고 점잖게 사는 게 그래도 참 놀랍다>라고 해야 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 후자의 의문은 일부에만 해당됩니다.

궁금이 2014-10-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현재 신자유주의 상황 하에서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고 착각할 것 같습니다.
역시 근본을 따지고 뭄는 것이 중요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있음을 알려주셔서~
 

* 4월 12일치 [대학신문]에 실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관한 주제서평입니다. 번역자들이 저와 가까운 관계에 있고 어떤 식으로든 번역에 영향을 미친 터라 서평의 객관성이 심히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들 및 국내의 들뢰즈주의를 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국내의 들뢰즈주의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는 제가 들뢰즈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국내에서 들뢰즈에 관해 출간된 책이나 글들의 수준이 (몇몇 드문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스콜라쉽이 의심스러운 수준이어서, 읽기도 힘들 뿐더러 논평하기는 더더욱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개인적인 심미적 취향 때문에 연구자로서의 책무를 등한시해온 셈인데,  앞으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런저런 지면을 빌려서 좀더 책임 있는 논의를 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대학신문]과 비슷한 서평을 [문학과 사회]로부터도 청탁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두 서평의 분량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 글을 약간 보충해서 [문학과 사회]에도 실을까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적은 분량의 서평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문학과 사회] 서평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쓰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이 완성되면 같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조주의의 형이상학, 또는 들뢰즈주의의 쉬볼렛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 관하여

 

  오랫 동안 기다려 왔던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가 마침내 번역, 출간되었다. 들뢰즈를 사랑하는 독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철학 전공자들도 크게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들뢰즈의 저서들 중에서도 난해한 것으로 알려진 책들을 원서의 가치에 걸맞는 노력과 정성으로 잘 번역해 냈으니, 더욱 기뻐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약 30여년 전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운동이 절정을 지나 숨가쁜 갈등과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화를 거듭하고 있을 때, 프레드릭 제임슨은 구조주의 운동을 20세기의 독일 관념론 운동으로 지칭한 적이 있다. 서양 근대철학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룩했던 독일 관념론 운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 운동은 레비-스트로스, 라캉, 캉길렘,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과 같이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수많은 철학자-사상가들이 각 분야에서 하나의 시대를 가름하는 중요한 업적들을 배출했을 뿐아니라, 롤랑 바르트, 알랭 로브그리예, 장-뤽 고다르, 피에르 불레즈 같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들이 철학과 정치를 가로지르며 20세기 후반 문화의 면모를 일신했기 때문이다.
  제임슨의 예견의 정확성 여부는 나중의 철학사가들에게 맡겨 두더라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조주의 운동은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역시 구조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 파악될 때 그 의의와 중요성이 좀더 정확히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와 반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사후에 발견된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68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은 푸코의 다소 과장된 예언(“언젠가 이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을 제외한다면, 풍부한 내용과 비범한 깊이에도 불구하고, 재능있는 한 소장 철학자의 학위논문으로 이해되었을 뿐이다. 이 책의 중요성과 가치가 발견되고 재발견된 것은 『앙티 오이디푸스』(1972),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천 개의 고원』(1980) 이후의 일이다.
  이처럼 이 책이 사후에야 재발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지닌 내용상의 특성 때문이다. 전성기 구조주의 철학들과 비교할 때 이 책은 두 가지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구조주의 운동은 형이상학, 더 나아가 철학 자체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고발, 탄핵의 움직임과 분리될 수 없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20세기에 보기드문 거대한 형이상학의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둘째, 다른 구조주의 사상가들이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 소쉬르 같은 사상가들의 작업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차이와 반복』은 스토아학파에서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매우 낯선 철학적 계보의 끝자락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음에는 매우 유별난 것으로 간주되었던 『차이와 반복』의 형이상학적 건축, 그 철학적 계보는, 구조주의의 다양한 경향들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 운동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서양 철학사의 감춰지고 잊혀진 흐름들을 길어내고 있음이 사후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초월론적 경험론 또는 존재의 일의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되는 우리에게 낯선 이 철학은 (주체론을 포함하는) 실체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따라서 관계론으로서의 구조주의가 이루는 거대한 저수지들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주름』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주름이라는 표제로 재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접고 펼치고 다시 접는 주름의 운동으로서 라이프니츠 철학은 『차이와 반복』에서 전개되는 내적 차이화의 운동을 간명하게 표현해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성이 어떻게 외부의 운동에 의거하고 그로부터 구성되는지, 따라서 주체성이 어떻게 외부적인 관계들에서 파생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들을 구조주의의 형이상학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들뢰즈주의의 쉬볼렛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다. 앞으로 사람들이 이 책들을 통해 들뢰즈주의의 식별 기준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뢰즈주의자라 부르기 위해서는 이 책들을 제대로 읽고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따라서 이런저런 개념들을 되는 대로 주워섬기며 들뢰즈주의자로 자처해온 이들에게 이 책들은 오히려 큰 도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책들은 사후성의 저작들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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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4-1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o you really think Deleuze is a Strutualist philosopher?... It's just my curiocity.

balmas 2004-04-11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를 구조주의에 집어넣었더니 로쟈님이 좀 당혹스러우신가 봅니다. 글쎄요 ... 들뢰즈를 구조주의의 편입시키는 것은 분명 <일반적인> 분류법은 아니지요. 그런데 제가 들뢰즈를 이렇게 분류한 건 실은 이 <일반적인> 분류법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반적인> 분류법이란 실제로는 1960년대 말 이후 미국 학계에서 정형화된 분류법이고, 구조주의와 탈(post) 구조주의라는 명칭으로 5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의 흐름을 분류하지요. 나름대로 근거도 있고 일리도 있는 분류법이긴 하지만, (1) 이러한 분류법은 구조주의에 대한 협소한 기준을 갖고 있고(언어학/기호학의 모델), (2)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특정한 관점(해체라고 하든, 탈구조주의라고 하든)을 사전에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분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류법을 따를 경우 구조주의 운동의 연속성과 다양성이 제대로 파악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조주의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분류하느냐의 문제는 구조주의 운동의 철학적, 이론적 핵심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데, 저는 어쨌든 기존의 분류법(들)을 개조하고 변형시킬 때에만 50년대 이후 프랑스 사상의 흐름을 좀더 충실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들뢰즈를 구조주의 안에 편입시킨 건 이런 생각의 한 반영이라고 보시면 될 듯합니다.

로쟈 2004-04-1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 see. May I expect another histoy of structalism not by Doss, but by balmas?^^

balmas 2004-04-1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다른 역사는 분명한데, 얼마나 신통한 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구조주의의 역사>야 앞으로 두고두고 새롭게 쓰일 역사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직 <탈구조주의의 시간>은 도래하지 않은 셈입니다.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tout autre est tout autre

이 문장은 일차적으로 동어반복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이 때 이 문장은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로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이 문장은 항상 참이지만 아무런 새로운 지식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문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또한 (2) "모든 타자는 전혀 다르다"로 읽을 수 있다. 곧 하나하나의 타자들 각각은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것들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1)이라는 외관 내지는 허상 아래 숨겨진 (2)라는 본질, 진리를 말하려는 것일까? 오히려 이 명제의 묘미는 이처럼 두 가지(또는 그 이상)의 상이한 의미들이 결합되었을 때 생기는 효과에 있다. 곧 이 명제는 (1)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동어반복을 말하는 것처럼, 따라서 전통적인 논리학 및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동일율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동일율의 되풀이를 통해 이 동어반복 명제를 (2)에서 드러나듯이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모든 타자들 각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명제로 바꾸어놓고 있다.
  (3) 하지만 동어반복 내에서 타자론heterologie의 드러남, 파열은 다시 동어반복의 형식으로 바뀐다. 이 때의 동어반복은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곧 신이라는 전혀 다른 자, 인간과 다르고 동물과 다르고 기타 모든 유한하고 무한한 존재와도 다른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전혀 다른 자가 전혀 다른 자이다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때문에, 데리다가 본문 2부 마지막에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서명에 대해 말하듯 서명은 실패하게 된다. 신이라는 절대적 환유, 절대적 타자성은 그것이 절대적 타자성이다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 모든 (유한한) 존재자들로서의 타자들과 다르면서도, 늘 이들을 대신해서, 그리고 이들에 앞서 절대적 타자, 절대적 환유의 이름으로 미리 서명했(던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혀 다른 자는 전혀 다른 자이다"라는 동어반복 문장은 전혀 다른 자는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과 전혀 다른 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전혀 다른 자와 각각의 독특한 타자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문법적·논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4) 따라서 이 문장은 고도의 사변적sp culatif 진리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이 사변적 진리를 작동시키는, 또는 이 사변적 진리에 항상 이미 따라다니는 거울반영sp culation의 법칙을 보여준다. 이 거울반영의 법칙은 사변적 진리에 항상 수반되지만 사변적 진리가 포함하지 못하는, 일종의 사변적 진리의 유령일 것이다.
  이 문장은 이런 측면들로 모두 소진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는 이외에도 더 많은 의미, 더 많은 비의미들이 담겨있으며, 그것들을 읽어내고 전개하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몫이다(이 문장에 관한 데리다 자신의 논의는 Donner la mort, Galil e, 199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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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기입inscription

기입 또는 기입하기inscrire라는 개념은 원래 어원(in-scribere)이 말해주듯 (종이나 파피루스, 널빤지 등과 같은) 물질적 매체에 무언가를 '새겨넣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새겨넣는 행위는 어떤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또는 어떤 것을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친구나 자손, 또는 후세 같은)에게 손상 없이 전달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는 일차적인 어떤 것, 곧 서로 대면하고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또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직접 수행하는 행위을 보조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 머릿 속에 떠올린 생각이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은 말, 누구와 한 약속 등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기입이나 기록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처럼 상식적인(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상식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기입되고 강제되어온 생각이다) 생각을 전도시켜, 기입이나 기록이야말로 주체가 자기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 또는 주체가 다른 주체와 맺고 있는 상호 주관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경험적인 기록과 일종의 유사-초월론적인quasi-transcendental 기록(데리다가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원-기록archi- criture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를 구분한다면 이 주장의 의미를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데리다가 espacement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잠깐 살펴보자. 이 단어는 원래 인쇄술에서 유래한 용어다. 인쇄술에서 이 용어는 인쇄면에서 여백칸을 어느 정도로 하고 본문의 크기를 얼마로 잡을 것인지 정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간격을 얼마나 두고, 줄 간격은 어떻게 하고 하는 등의 작업을 가리킨다. 이는 학문적인 논의나 심지어 언어 활동에서 매우 부차적이고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글자 크기나 여백, 글자 간격 등의 문제에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생각해보면 이는 생각만큼 그렇게 부차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런 의미의 espacement은 우리의 언어 활동 전반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따르는 문법적인 규칙(예컨대 주어와 술어, 목적어의 순서 따위)이나 다양한 어법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를 연결해 주는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가 일차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간격두기, 곧 espacement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는 단지 단어와 단어, 말과 말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결합, 기표와 기의의 결합 같은 일체의 모든 언어적 관계에서도 성립하는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espacement은 관계 맺기, 구분하기로서의 언어 활동에 전제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기호는 어떤 실정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와의 관계,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이는 이후 구조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inscrption이나  criture, 또는 espacement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지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관계가 자연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따라서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지 않지만 차이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데리다가 말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로고스 중심주의는 이런 기술적 조건들을 자연적 조건들로 전위시키고 은폐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렇게 본다면 데리다가 기입이나 기록의 작용이 주체의 자기 관계나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 주관적 관계의 (유사 초월론적) 조건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그다지 허튼 소리는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분석에서 데리다는 이러한 기록의 문제 설정을 정치의 문제에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문제에 적용될 때 기록의 문제 설정은 순수한 정초와 순수한 보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준다. 정립이나 정초, 창설은 항상 자체 내에 보존과 재생산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역으로 보존과 재생산은 그 활동 자체 내에 이미 정초와 창설의 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록으로 수록된 [독립 선언들]에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데리다가 본문에서 하이데거를 염두에 두면서 "되풀이 (불)가능성은 순수하고 위대한 정초자, 창시자, 입법가(이러한 정초자들의 숙명적 희생과 관련된 유비적인 도식에 따라 하이데거가 1935년에 말하게 될 의미에서, '위대한' 시인과 사상가, 또는 정치가)가 존재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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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힘]이 왜 아직 출간되지 않고 있는지 의아해하실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실은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에서, 역주에 집어넣은 내용들 중 상당수를 <용어 해설>로 따로 묶자는 제안을 했고, 저도 내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역주들 중 용어와 관련된 내용들을 <용어 해설>로 묶고, 또 몇 가지 용어들을 새로 추가하고 하느라고,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까지는 원고를 넘길 생각인데, 그 전에(또는 그 이후라도 관계 없습니다. 이 원고를 넘겨도 아직 최종 교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수정할 시간은 남아 있습니다) 논평을 받고 싶어서 <용어 해설>에 들어갈 항목 중 하나를 올립니다.  좋은 제안이 있다면 최대한 내용에 반영할 생각이니,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공짜로?^^).

 

대체 보충supplément

우리가 ‘대체 보충’이라고 번역한 supplément은 데리다의 초기 작업, 특히 『기록학에 관하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개념이다. 이것은 원래 루소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에서 문자 기록écriture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언어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소 목소리를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루소는 이 최초의 언어는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고, 조음적articulé이라기보다는 음량과 강세, 억양이 중시되는 소리였을 것이고, 자음보다는 모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목소리가 단조로워지면서 자음이 증가하고, 강세와 음량이 줄어들면서 조음이 증가하게 되고, 감정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전달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언어가 바뀌어가게 된다. 조음적인 언어가 등장하고 의사 소통이 언어의 주요한 기능이 되면서 사용된 것이 바로 문자 기록인데, 루소는 이 문자 기록을 ‘위험한 대체 보충물dangereux supplément’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원래 문자 기록은 목소리에 기초한 고유한 의미의 언어를 보조하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이 문자 기록은 점차 고유한 언어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의 이 개념은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드러나는 루소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플라톤에서 루소, 후설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어온 서양의 현전의 형이상학 또는 음성 중심주의의 맹점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곧 데리다가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idros』나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및 『구조 인류학』에 대한 분석에서 밝혀주고 있듯이, 서양의 철학자나 이론가들은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목소리나 말 또는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는 대화를 진정한 언어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문자 기록을 폄훼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문자 기록의 존재를 완전히 말소하거나 배제하지 못하며, 이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러한 양면적 태도는 사실은 서양의 형이상학에 내재하는 아포리아의 징표라고 말한다. 곧 순수하고 충만한 현전이나 기원(목소리, 말, 대화, 로고스 등)을 인정할 경우 이를 보충해야 할 도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으며(왜냐하면 보충은 결함을 지닌 것에게만 필요하기 때문에), 반대로 보충의 필요성을 인정할 경우에는 결국 현전과 기원의 불완전성, 결핍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가 문자 기록의 위험성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 supplément이라는 단어는 데리다에게는 존재나 구조, 또는 언어나 기타 다른 모든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보여주는 개념이 된다. 요컨대 우리가 현전, 기원, 중심 등으로 부르는 것은 사실은 무한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으로부터 사후에 파생된 것이며, 이러한 차이와 대체의 작용은 결국 기록의 경제(이는 곧 차이(差移)의 경제이기도 하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supplément 개념은 기원의 결핍과 (문자) 기록의 근원성을 보여주는 핵심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supplément은 국내에서는 ‘대리적 보충’이나 ‘보환’ 등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개념이 담고 있는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해서 ‘대체 보충’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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