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선배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 특히 록이나 블루스, 재즈 이런 음악에 아주 미쳤는데, 어느 때부턴가는 전혀 이런 류의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기특한 사고의 전환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90년대 이후 대학가에 불어닥친 록음악 바람에 좀 심드렁한 기분이었고, 그것을 <진보>와 연관시키려는 심사도 잘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최근에는 또 재즈가 문화적인 아우라를 띠고 유행을 타는 것 같더군요. 아도르노처럼 독하게 비판할 만한 능력도, 생각도 없지만, 김규항 선배 글에는 얼마간 공감이 가서 퍼왔습니다.

 

 

한국 록에 관한 사적인 기억들

(며칠 전 컴퓨터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글. 2년 쯤 전에 지큐에 쓴 글인데 아직 날짜를 확인하지 못했다. 제목 그대로 기억나는 록 뮤지션들을 짤막짤막하게 메모한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내가 이렇게 생각했나?' 싶은 부분도 있다. 가슴 편집장 박준흠 씨가"재미있게 읽었다."는 소감을 준 걸 보면 못봐줄 정도는 아닌 듯.)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이른바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대해 말이다. 한국에서 록은 대개 저항적이긴 커녕 저항적인 청년문화를 굳이 비껴가고 딴지 놓는 어떤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록이 본격적으로 출발하는 70년대 말은 유신 정권의 말기다. 그 세상에서 그 록들이 내뿜는 낭만성은 참으로 한심하다. 민주화의 기대를 짓밟은 군부 파시스트들이 광주에서 양민을 도살하고 10여 년 동안 손수 한국을 통치하는 동안 대체 록이 무슨 놈의 저항을 했던가. 90년대 들어 대중문화 영역에 대거 투신한 일군의 인텔리들이 지껄여 대기 시작한 "록은 저항적인 음악"이라는 말엔, 록의 영토를 '구라'로 지배하려는 그들의 음험한 욕망과, 자신의 활동 구역에 모종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들의 비린 허세가 담겨 있다. 록은 어떤 신령한 저항성이 담겨져 있는 음악이 아니라 단지 불량한 음악이며 그 불량함은 저항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장르의 대중음악이 그 사회적 함의가 거세된 채 수입되는(포크에서 이 즈음의 흑인음악들까지) 한국적 문화전통은 유구하고, 한국에서 록이 어떤 정신을 확보하는가는 두고 볼 문제이자 애써 볼 문제다.

좌파라는 이가 '록을 기억'한다 해서 모종의 비장한 록담론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일찌감치 다른 기사로 넘어가시는 편이 낫겠다. 이 글은 이 글의 제목 그대로 산울림에서부터 근래 발견한 몇몇 인디밴드들까지, 25년 여에 걸친 한국 록에 관한 내 사적인 기억들이다. 록의 불량함은 모든 불량한 이로 하여금 록에 대해 말하게 한다. 아유레디!

산울림 : 1977년 그들은 책이나 좋아하는 중학 3학년이던 나를 습격했다. 산울림은 내가 이른바 그룹사운드(이 시골이발소 풍의 이름은 이제 밴드로 개명되었다)에 이끌리게 된 계기였다. 카세트 테입 속 해설지엔, 그 앨범을 낸 음반사 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데모 테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소감을 "AFKN에서나 들을 수 있는 사운드"라 적고 있었다. 배호 정도는 되어야 가수라 생각하는 기성 세대는 산울림을 '음치'라고 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산울림은 분명히 음치였다. 하여튼 산울림은 완전한 새로움이었다. 나는 드럼이라는 악기에 본능적으로 이끌렸으며 산울림은 내게 드럼 선생이기도 했다. 두팔과 다리가 따로 노는 일은 처음엔 차력의 일종처럼 보였으나 이내 드럼 세트의 각 부분이 따로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의 기나긴 베이스 독주나 '불꽃놀이'의 장타령 풍 리듬이 매일 밤 나를 매혹했다. 막 배운 마스터베이션과 함께.

사랑과 평화 : 산울림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밴드였다. 최이철 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사랑과 평화는 요즘 말로 하면 전문 세션맨들의 밴드였다. 산울림이 캠퍼스적 아마추어리즘(제1회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은 '나 어떡해' 는 산울림의 곡이다)을 바탕으로 했다면, 사랑과 평화는 원숙한 테크닉의 밴드였다. '장미'에서 보여주는 연주의 조직력과 드럼 필인은 지금 들어도 훌륭하다. 곧 도래한 디스코 시대에 그들의 펑키한 리듬감은 뇌가 없는 댄스곡처럼 밋밋해지고, 오늘 '최장수 밴드'로 지루하게 남았다. 2집(1979)의 '얘기할 수 없어요'는 김현식의 노래들과 함께 내 불변의 십팔번이다. 듣는 것보다는 불러야 맛이 나는 곡.

활주로(송골매) : 바야흐로 밴드의 시대였다. 산울림과 사랑과 평화 같은 밴드의 성공은 대학 밴드들의 활황과 맞물렸다. 그러나 밴드 체제로 유행가가 아닌 록을 하는 밴드는 항공대 밴드 활주로가 유일했다.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 '세상모르고 살았노라'로 대학가요제에서 '탈춤'으로 입상한 활주로는 나원주/이응수라는 저작자와 배철수라는 텁텁한 보컬리스트의 조합으로 한국 록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한국적인 록을 구사했다. 활주로는 송골매라는 이름으로 계속되는데 구창모가 보컬로 들어올 무렵 원래의 색깔을 잃는다. 신중현과 산울림을 재조명한 인탤리들이 이 밴드를 소흘히 넘어간 건 건 그들의 한심한 안목 덕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는 활주로의 '세상만사'로 출발한다.

작은거인 : 밴드의 이름은 바로 밴드의 리더 김수철이다. 1979년, 작은 체구에 지미 핸드릭스처럼 기타줄을 물어뜯는 김수철의 '일곱색깔 무지개'는 한국 최초의 하드록 사운드였다. 작은거인 역시 대학 밴드(광운대)였지만, 노인들에게서도 '잘 논다'는 동의를 얻을 만큼 음악적 설득력이 뛰어났다. 김수철의 재능에 대한 사회적 공인은 이 유니크한 로커로 하여금 록의 검약한 본성(록은 독특한 것이어서 편성이 간략할수록 강력하기도 하다. 작은 거인은 산울림처럼 3인조였다.)를 망각하고 교향악단을 사용하는 대작을 좇거나 민족음악에의 어설픈 경도를 낳게 했다. 아시안게임 음악은 김수철에게 어떤 만족을 남겼을까.

신중현 : '미인'이 실린 앨범 신중현과엽전들(1974)은 분명 한국록의 명반이지만, 70년대 말에 대마초(한국에 연성마약을 허하라!) 복용 혐의로 활동 중지 상태였던 신중현은 록의 선배라기 보다는 잘나가던 가요 작곡가로 여겨지곤 했다. 어쨌거나 그는 1980년 신중현과 뮤직파워로 복귀했다. 엽전들이 3인조였음을 생각한다면 세명의 관악 파트에 두명의 여성 보컬을 포함 자그만치 9명으로 조직된 대편성 밴드인 뮤직파워는 신중현의 달라진 음악적 지향을 드러낸다. 신중현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들은 대개 맞거나 좋은 말이지만, '아름다운 강산'이 한국록 불후의 명곡이라는 주장과 '록의 아버지'가 된 90년대 이후 신중현 음악에 대한 아첨에는 동의를 못하겠다. 내 생각에 '아름다운 강산'은 그저 '불후의 대곡'일 뿐이며, 그의 근래 음악들은 '록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봐주기 민망한 것들이다.

마그마 : 1980년, 대학가요제 생방송을 보며 대체 그룹사운드는 언제 나오나 기다릴 때 마그마가 나왔다. "어둠 속에 묻혀있는 고운 해야. 아침을 기다리는 애띤 얼굴.." 여리고 느린 앞부분에 낙심하는 순간, 귀를 의심케 할 만한 강력한 사운드가 폭발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회자는 "세명이서 어떻게 저런 사운드를 만들어내는지 신기하다"고 감격했다. 마그마의 사운드는 80년대 중반 시나위에 가서나 등장할 헤비메탈 사운드를 구현한 선구적인 것이었다.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리더 조하문은 곱상한 얼굴을 들이민 채 '이밤을 다시 한번'을 애원하게 된다.

들국화 : 라이브만 하는 대단한 밴드가 등장했다는 풍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같은 곡도 물론 좋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는 곡자체로나 연주면에서나 가히 명곡이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들국화만큼 보편적인 지지를 받은 밴드가 있었던가. 들국화는 재결합하여 새로운 히트곡이 없음에도 여전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다. 들국화에 대한 이런저런 피력들은 오히려 상투적일 뿐이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시나위 : 1986년 내가 입대하던 해 시나위가 등장했다. 아버지 신중현에게서 "테크닉 면에선 나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던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밴드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강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리프와 솔로, 무겁고 단순한 드러밍이라는 헤비메탈 사운드의 전형이다. 헤비메탈이 록의 분방함을 벗어난 지나치게 양식화된 음악으로 보는 편인 나는, 나중에 김바다가 보컬을 맡던 시절 리메이크 된 '크게 라디오를 켜고'를 더 좋아한다. 열린 하이해트 심벌이 촬촬거리는 소리는,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기분을 낳는다. 시나위는 말 그대로 한국 헤비메탈/하드록의 산 역사이며 근래 8집도 여전히 훌륭하다.

부활 : 내가 80년대의 대학생이거나 80년대의 청년이던 80년대 내내 나는 록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주의 매판문화의 일환이었다. 나에게 3년 동안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원치 않던(난 평범한 군대 생활을 바랬다) 드러머 노릇을 하게 되면서다. 어느 날, 리드 기타를 치던 고참이 휴가길에 사온 테이프를 틀어놓곤 "기타가 죽이잖냐. 방위새낀데 존나게 노래 잘하지." 했다. 김태원의 둔중하면서 몽환적인 기타와 이승철의 끈적이는 보컬에 빠져드는 순간, 조인트를 세게 채였다. "개새끼가 고참 말에 대답도 안해."

한대수 :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히피 한대수는 감옥 같은 조국을 떠난다. 그가 1989년 14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앨범 무한대는 록이었다. 리메이크된 '하루 아침'의 가사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한 문명비판적 음악가의 세계관을 되새기게 한다. "좋아 좋아 기분이 좋아"하는 보컬에 이은 어쿠스틱 기타, 그 다음 "베이스 들오고" "기타 쫌 울고" "장구우 때려" 하는 한대수의 명령어에 베이스와 기타와 드럼이 차례로 들어오는 '고무신'은 한대수의 음악가로서의 위엄을 한껏 표현한다. 내 다섯 살짜리 아들 김건은 이 곡을 무척 좋아하는데, '고무신'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장구때려'라 하면 얼른 알아듣는다. 그에게 한대수는 '장구때려 아저씨'다.

H2O : 내 기억으론, H2O는 재미교포 젊은이 몇몇이 만든 밴드였다. 멤버가 대부분 바뀐 H2O 3집(1993)은 음악평론 하는 후배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말에 뒤늦게 들었다. 강기영 김민기 박현준의 연주야 당연히 훌륭하고 마크 코브린인가 하는 엔지니어까지 부른 사운드는 거의 완벽하다. '나를 돌아보게 해'는 가사도 깊고 반복해서 듣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이 앨범은 대중적으론 철저하게 실패했고 기억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크래쉬 : 나는 바하를 좋아하는 이유(구성의 명료함)와 같은 이유로 스래시 메탈을 좋아한다. 크래쉬는 대개 영어로 노래한다. 영어만이 메탈적이라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지만(덜 메탈적이더라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는 편이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크래쉬의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식적 완성에 있고 나 역시 그런 차원에 한정해서 이 밴드를 존중한다.

노이즈 가든 : "저 친구 기타 정말 잘 치는군." 1996년, 노이즈 가든이 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그들의 라이브를 구경했다. 기타리스트 윤병주는 블루스(알다시피 블루스는 록의 뿌리다)의 필을 짙게 깔면서도 강력한 사운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젊은 장인이었다. 레인보우의 대곡 '스타게이저'도 연주했는데 리치 블랙모어 정도는 오래 전에 구어 먹은 솜씨라 나는 얼마나 흐뭇했던가.

델리 스파이스 : 델리 스파이스의 보컬은 참으로 록답지 못하다.(물론 이런 말은 정당하지 않다) 특히 나는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음악의 보컬리스트라면 일단 걸걸한 목소리여야 한다는 입장이다.(물론 이건 심각한 편견이다) 그런 내가 델리 스파이스의 연주에, 이를테면 '챠우챠우' 후반부에 어느덧 빠져드는 걸 보면 델리 스파이스는 만만치 않다.

허클베리핀 : 대중음악에서 지적 능력을 표현하는 결정적인 수단은 가사이며, 허클베리핀은 지적이다. 이 밴드의 특징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중성적 매력이다. 남상아(3호선 버터플라이으로 옮긴)가 그랬고 현재 이소영도 그렇다.얼마 전 나온 2집 '나를 닮은 사내'는 세련되었고 내가 운전할 때 가장 많이 듣고 다니는 음반이다.

풀린개 : 라이브를 한번 보고 나중에 가사를 얻어 본 풀린개는 말하자면 한국의 RATM이다. 이런 밴드가 있다는 건 단순한 문화적 다양성의 의미를 넘어 안도감을 준다. 음악이 아니라 메시지가 목표일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혁명 너희가 원하는 것은 시나리오/ 바꾸기를 원하는가 정말 원하는가/우리가 바랬는가 세상 뒤집는가/시나리오를 원하는가 개소리 떨지마라/그런 것 따윈 없어 너부터 바꿔봐라"

모든 록이 이런 식이라면 더도 덜도 아닌 스탈린의 세상이겠지만, 이런 록이 이렇게 없는 세상은 더욱 문제다. 세상이 불량하다는 사실엔 모두들 동의하면서, 불량한 음악 록은 왜 세상보다 덜 불량한 것일까.

Posted by gyuhang at 2004.05.23 12: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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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만나뵈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연세는 더 많으신데 외모는 더 젊어보이셨습니다(아마 젊은 사람들하고 자주 어울리신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그 날 식사 자리에는 제가 아는 다른 선배분하고 또 다른 젊은 철학도가 한분 더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두 분 다 참석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57학번이시니까 우리 나이로 하면 67세이신데, 철학과를 졸업했고 조선일보 정치부에 근무하다가 75년에 해직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뒤 다시 언론계로 복직하지 않고 거의 30여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으로 지내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한겨레 신문] 창간될 때 복직하지 않으셨냐고 여쭤보니까, 빙그레 웃으시면서 두려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느낀 두려움은, 간단히 말하자면, 기자로서, 지식인으로서 글을 쓰는 것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언론 통제가 극심하게 이루어지던 당시에 기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순응하면서,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렵고 교묘한 언어들로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맞서 저항하는 길, 신문사를 그만 두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권력의 통제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에게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이 이 마지막 길을 실행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 때문에, [한겨레 신문]으로부터 끈질긴 동참 요청을 받았지만 결국 입사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그 날 대화의 초점 중 하나가 이 세번째 길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길과 관련하여 세 가지 사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중국의 백화문의 사례이고, 둘째는 리영희 선생(선생님은 당시의 언론인들 중에서는 리영희 선생만이 유일하게 이 세번째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지젝, [Self-Interview](The Metastases of Enjoyment)에서 지젝이 말한 "말의 윤리"라는 사례였습니다(선생님은 올해 나온 지젝의 Organes without Bodies를 벌써 구해 읽으셨을 만큼, 지젝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이 세 가지 사례들 모두는 지식인들이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의 빼어난 사례들이라는 것이지요.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여 대중들이 원하는 진실한 내용을 전달하되, 그 때문에 전해야 할 내용의 함량이 줄어들거나 또 하나의 권력이나 관행으로 고착되지 않게 하기. 선생님은 [한겨레 신문]이 이런 일을 해줄 수 있을지, 또 당신이 새로 신문기자가 되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래서 결국 [한겨레 신문]에 입사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 [한겨레 신문]이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한겨레 신문]은 결국 “문민 정부”의 한계, “50년만의 정권 교체”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선생님의 예견을 입증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결국 그 선택(들)로 인해 해직 이후부터 따지면 30여년 가까운 세월을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하신 셈인데, 당신께서는 “돈 별로 안들이고 시간 잘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그 세월의 고독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겪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헤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이러한 “선택”은 당신의 헤겔 해석과도 맞물려 있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은 헤겔 철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헤겔 저작만이 아니라 헤겔 연구서들까지 폭넓게 섭렵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헤겔의 문제, 헤겔이 청년기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심했던 문제를 “어떻게 하면 법의 실정성을 극복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집약하셨습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법은, 법의 실정성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 요소이지만, 또 그 법이 단지 법으로, 실정적인 법으로만 남아 있게 되면, 그 법을 처음 정립했던 힘, 원칙은 퇴락하고 전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상적인 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따른다면, “어떻게 법을 흐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헤겔에게는 근본적인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헤겔의 이런 문제의식은 단지 헤겔의 문제의식일 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 근대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알튀세르에 관해, 문화혁명에 관해, 노무현 대통령에 관해 하시는 이런저런 말씀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독일의 저명한 헤겔 연구가인 디이터 헨리히(Dieter Henrich, 1927-)가 발굴해낸 “반성의 논리Logik der Reflexion”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시는 게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이 문제를 한번 연구해보라고 권하기도 하셨는데, 사실 전부터 얼마간 막연하게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였던 터라, 선생님의 권유를 받자 매우 반가웠습니다. 

* 병아리 모이만큼 찔끔찔끔 글을 써서 죄송합니다만(-_-;;;;), 아무래도 오늘도 여기에서 글을 줄여야 할 듯합니다. 글을 쓸 시간을 내기가 영 쉽지 않군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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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페이퍼] 쓰기가 뜸했는데, 당분간 다른 일 때문에 [리뷰]나 [페이퍼]를 쓰기가 어려울 것 같아, 틈새를 메우는 의미에서 지난 주에 만나뵌 독자분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한달 전쯤 어느 독자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로 짐작컨대 60대 정도인 이 독자분은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얻었다고 하시면서, 성함을 밝히신 뒤 먼저 좋은 책([헤겔 또는 스피노자])을 번역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헤겔 또는 스피노자] 독자 중에 60이 넘은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그랬고, 처음 들어보는 성함이어서 더 그랬습니다. 철학계에 몸담고 계시는 분 중에 그 연세에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만한 분이라면,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그 분의 성함은 제가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제 당혹감을 눈치채셨는지, 곧이어 당신께서는 아마추어 독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번역에 관해 몇 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게 또 놀랄 만한 일인데, 그 분이 지적해 주신 것은 헤겔 인용문 중 독일어 원문의 쪽수가 두 어군데 잘못된 게 있다는 것이었고, 제가 독일어 원문 쪽수를 표시하면서 몇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해놓은 게 유감스럽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헤겔 또는 스피노자]를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헤겔 저작의 독일어본 쪽수 표시 중에서 몇 군데는 <독어본 누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일인데, 이렇게 표기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곧 제가 책머리의 [일러두기]에 표시해둔 것처럼, 마슈레가 사용한 헤겔 저작의 불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과, 제가 갖고 있는 헤겔 저작집(Suhrkamp 출판사에서 펴낸 20권짜리 저작집), 그리고 임석진 교수의 국역본이 참조하고 있는 독어본 전집(Felix Meiner)이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전집의 경우 이전의 헤겔 저작 편집본에 수록되어 있던 내용들이 재편집되고 상당히 첨삭되어 있어서, 인용문의 쪽수를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교정 작업은 지난 해 1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1월 초로 예정된 출판사의 인쇄 날짜에 맞춰 책을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상당히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갖고 있는 주어캄프 판본 위주로 독일어 원문의 쪽수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했고, 주어캄프 본에 빠져 있는 독일어 원문은 일단 <독어본 누락>이라고 표시해놓은 뒤, 나중에 재판을 내면 다른 판본에서 원문을 찾아 빠진 쪽수를 채워 넣자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에 쫒기던 그 때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도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까 이 문제가 줄곧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분께 이 문제를 지적당하고 보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원문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책을 읽으신 것을 볼 때,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 분이 (헤겔) 철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애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문제점을 더 지적당하지나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면서,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으니, 책을 다 읽은 뒤에 식사를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망신은 그래도 면했구나 안도하면서, 식사 초대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는데, 그 뒤 3주 정도 지난 뒤에(그러니까 지지난 주) 이 독자분께서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책을 잘 읽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피에르 마슈레의 철학적 능력을 칭찬하고 번역의 노고도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번역과 관련하여 두 어 군데 미심쩍은 점을 물어보시고, 지난 번에 약속했던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공짜로 저녁을 얻어먹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고,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시간과 약속 장소를 정하고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만나뵙고 식사를 했습니다.

* 이것도 글이라고 쓰기 힘들어서(-_-;;) 2부는 내일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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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5-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We still have such a reader!..

balmas 2004-05-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헤겔 또는 스피노자]의 번역료로 지금까지 받은 돈이 대략 150만원 가량 됩니다. 들인 노력에 비하면 많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이 책을 번역해서 이런 독자분을 만날 수 있었으니 돈 몇푼으로 따지기 힘든 보답을 받은 셈입니다.
나이 어린 독자들도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 욕심이 과한가요?^^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번역을 마다 않는 건 결국 이런 독자들(과의 소통)에 대한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포월 2004-05-2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나이가 어릴테니(?) 과한 욕심이 채워지는 셈입니다. ^^;

balmas 2004-05-2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렇게 영계(^^)란 말입니까? 제가 말한 나이 어린 독자는 20대 초반의 독자를 가리키는데 ... ^^ 그나저나 3편은 언제 올리나? -_-;;;
 

관련 글: 로쟈,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까,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 한 가지 생각이 납니다. 한 대학신문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데리다의 [불량배들] 번역에 관한 서평을 읽고 기사를 쓰려고 한다면서, 국내 철학서들의 오역 문제에 관해 이런저런 걸 묻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일을 공개적으로 말해서 역자와 출판사의 명예에 피해를 입힌 것 같다고 하더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이런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할 경우 독자들이 입을 피해를 생각해봤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도 역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출판사도 이 책을 개역할 생각을 하지 않는 마당에, 개인적으로 조용히 문제를 처리했을 경우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겠느냐고요. 그리고 오역으로 점철된 책을 비싼 돈주고 사고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지적 능력만 한탄할 독자들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주느냐고요.
그 기자는 정말 그렇겠다고 수긍을 했지만, 정말 문제를 제대로 인식해서 수긍을 한 건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고, 또 그 기자에게 그런 식의 "점잖은 해결 방안"을 제안했던 사람들이 과연 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미국이나 프랑스, 또는 독일 같은 나라에서 어떤 역자나 출판사가 그런 식으로 책을 출판했을 경우, 그 역자나 출판사가 학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것과, 번역의 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 사이에는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역에 대한, 독자들에 대한 역자나 출판사의 책임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로쟈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스꽝스러워지는 건, 다른 연구자들이나 신문, 잡지들이나 모두 쉬쉬하고 넘어가는 문제를, 굳이 애써서 파헤치고 밝혀내어, 아까운 시간과 정력 소비하고 덤으로 모진 놈 소리까지 듣는, 로쟈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peeker님의 고언은 그런 우스꽝스러워짐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러쿵저러쿵 덕담이나 해가면서 점잖게 살 수 없는 팔자라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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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04.05.03(월) 21:12

 

시민의 사법참여 어떻게


△ 한인섭·서울대 법대 부학장, 봉욱·대검찰청 검찰연구관(왼쪽부터)

배심제·참심제 도입 논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과 국민주권주의 실현을 위해 ‘시민의 사법참여’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만들어진 사법개혁위원회는 사법개혁이라는 큰 틀 아래 시민의 사법참여의 구체적인 안에 대해 논의를 벌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법조계와 학계, 시민단체는 참·배심제 도입을 두고 뜨거운 논쟁 중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부학장과 봉욱 대검찰청 검찰연구관이 지난달 27일 서울대에서 만나 시민의 사법참여와 참·배심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인섭 교수는 “‘국민을 위한 사법’을 위해서는 ‘국민에 의한 사법’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며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시민의 적극적인 사법참여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봉욱 검사는 “검찰도 폐쇄적·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노력이 검찰에서도 제기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인섭=시민의 사법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영남대 박홍규 교수의 책을 보면 자신이 배심·참심제 도입을 주장해왔지만 ‘황야의 외침’이고 ‘사막의 절규’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상황이었죠. 2000년까지 학술논문을 보면 그냥 외국의 제도만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렀지만, 2001년부터는 학계와 실무 쪽에서도 논문이 급속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아 행정부를 만들고 국회의원을 뽑지만,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임명해서 사법부가 정당성을 갖는 것입니다만 그것은 한걸음 물러난 정당성이죠. 법관을 뽑는데 있어서도 국민의 참여가 보장돼야 하고, 재판 내용에서도 시민적 관점과 변화하는 가치관이 적시에 투입돼야 하는데 우리나라 법관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관생활만 하고 상당히 법조, 법원의 폐쇄성에 갇혀서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니 문제가 있습니다. 시민의 정의와 법원의 정의는 시차가 있는 듯 한 거죠. 이로 인한 불만은 국민들의 사법불신으로 쌓이게 됩니다. 변화하는 가치관이 사법 결정과정에서 바로바로 투입되고, 직업 법관과 일반시민의 교류를 통한 질높은 판단, 그래서 쉽게 수용될 수 있는 판단이 행해질 때가 됐습니다.

봉욱=사법부도 그렇지만 검찰도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고, 운용시스템 자체가 상당히 닫혀있는 상태에서 이뤄졌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됐고 국민이 요구하는 공무원 수준과 참여요구 등을 우리도 상당히 깊이있게 느끼고 있습니다. 검찰만 해도 최근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국민에게 어떻게 가깝게 다가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국민의 눈 높이에서 정의를 판단하려는 입장에서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표는 안됐지만, 시범적으로 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항고심사회 제도라고 해서 항고심사를 할 때 외부인사들, 교수, 변호사 등이 참여해서 같이 결정하도록 하는 획기적 제도를 시범 제도로 하고 있고, 시민 옴부즈만 제도도 시범 운영하고 있습니다. 큰 드라이브인 특별수사 등의 경우 예전에 검사들끼리 결정했다면 요즘은 특별수사 모니터링 제도라해서 일반 시민 등을 위촉해서 실제 의견을 종합해 절차화하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습니다. 검찰도 개방적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시민 참여를 바라보려는 입장들이 있습니다.

한=현재의 형사재판 수사의 구조로 피의자·피고인의 인권보장이 제대로 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제도적 문제부터 건드려야 합니다. 우리 헌법과 법률은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하다고 보고 있지만, 저는 검사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 과정에 변호사의 참여가 보장이 안되죠. 99년에 경찰이 변호인 참여를 보장한다고 문을 먼저 열었고, 법무부에서는 지난해부터 열었죠. 하지만 실적을 보면 몇백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봉/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
영미법·대륙법 계통의 차이에서 발생

봉=변호사가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여건이기 때문에 그렇죠.

한=미국은 변호사가 수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엔 현재 변호사는 피의자의 뒷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실질적인 조력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없죠. 미국 판사는 이를 두고 변호인 참여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봉=영미식과 대륙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수사가 어디까지 이뤄져야 하느냐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형사재판에서 시민들이 느끼는 불만은 피의자 단계에서부터 검사가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증거에 있어서도 피의자 심문조서의 영향력이 80~90% 되는 것 아닙니까. 형사재판에서 실제로 판사들이 편견없이 임하고 있기야 하겠지만 검사가 수사해왔던 것을 대체로 존중하는 경우가 많죠. 무죄 판결의 비율이 낮은 통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죄 판결이 나왔을 때 미국은 그걸로 끝인데, 한국은 검찰이 거의 반사적으로 항소를 하고 있습니다.

봉=항소율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한=피의자와 피고인에게 대단히 불리한 구조인 것은 사실 아닙니까

봉=무죄율에 대해서는 말이죠, 미국의 학자들이 가장 의아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독일은 어떻게 그렇게 무죄율이 낮을 수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무죄율은 0.73% 입니다. 미국은 10~20% 정도 되죠. 대륙법 체제는 재판에 넘기기 전에 진실 여부를 한번 가리고, 유죄가 틀림없다 하는 부분만 재판하도록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사건이 100%라면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하는 비율이 43.6% 거든요. 영미법 체계에서는 사전에 걸러지지 않고 재판정에서 이 문제를 가리자는 쪽입니다. 그래서 무죄율이 더 높은 겁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이점을 비판하죠. 무죄 나올 사안은 아예 재판정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인데 제대로 수사를 안해서 변호사 비용 등의 부담까지도 국민한테 지우는 것은 형사사법의 실패 아니냐는 비판이 크거든요. 사법개혁위원회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입장에서 사법제도를 고칠 부분은 첫번째가 폐쇄적인 재판제도, 둘째가 비싼 변호사 수임료, 세번째가 부실한 사법서비스이고 다음이 전관예우 등 법조비리 등 입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실제 국민이 불안한 것은 재판이 폐쇄적이고 나의 재판결과가 어떻게될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것이 거든요. 기준의 불명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실무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가 구속될지, 구속되면 석방될지 안될지, 재판 과정에서는 실형이 선고 될지 감옥에 가게 될지 어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변호사를 사서 유무죄를 다투지만, 우리는 오히려, 실제 전관예우는 대개 선처를 요구할 때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치유하기 위해 국민의 사법참여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할 부분은, 이런 기준을 정하는데 국민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피고인들이 수사단계에서 자기 자신의 진술로서 만들어진 증거와 또 재판과정에서 각각의 증거를 효율적으로 판별하고 입증하기 위해서는 변호인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데 형사사법에서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요, 폐쇄적 재판도 법관과 검사가 많은 역할을 하게 됨으로 그렇게 된 것이죠. 재판 결과에 대해 불만이 많은 것은 높은 상고율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의 근원적 치료 방법이 시민의 사법참여라고 생각합니다. 배심제나 참심제를 도입하면 폐쇄적 재판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재판관인 배심인, 참심인으로 인해 검사와 변호인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법조인들끼리의 암묵적 존중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거죠.

봉 검사는 배심이 도입될 경우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비용과 시간 뿐 아니라 현실적인 제도 적용에서 적잖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한국식 배심제를 도입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봉=배심이 도입되더라도 배심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연간 1천여건에서 많이 잡아 3천여건의 사건에 대해서는 폐쇄성이 극복되는데, 나머지 230만건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미국 교수들은 배심재판에 소요되는 인력과 비용이 커서 나머지 사건에서는 오히려 더 상황이 열악해진다고 비판합니다. 배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간이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사법시스템이 운영되지 않거든요. 1%의 배심사건은 그나마 폐쇄성을 극복하게 되겠지만 나머지 99%는 어떻게 될까요 일반국민들의 사건은 사각지대가 될 수 있는 것이죠.

한=미국도 2~3%의 사건만 배심으로 이뤄집니다. 그 2~3%의 사건은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진실규명의 필요성이 아주 큰 사건이며, 결과의 신뢰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배심에 회부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비배심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배심은 민·형사 사건에서 시민의 일부가 시민재판관으로 뽑혀, 사실판단과 유·무죄에 필요한 사실판단을 하는 것인데요. 단순사실 판단과 유죄냐 무죄냐의 최종판단을 배심원이 한다는 것이죠. 검사와 변호인의 주장 등을 청취하고 직업재판관인 재판장의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설시와 지도를 받으면서 하게 됩니다. 유죄가 되면 양형은 직업법관에 다시 맡기고요. 배심제는 영국에서 출발해 미국에서 꽃피우고 세계 50개국 내외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 참심제는 독일이 대표적이죠.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을 모두 시민재판원이 직업재판관과 함께 합니다. 양형판단과 손해배상 액수 결정에 이르기까지 시민재판원이 직업법관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봉/미국식 배심제가 성공하려면
관련 제도들 함께 도입돼야
한/몽땅 고쳐야 한다고 생각 안해
밈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

봉=영미식 배심제와 독일식 참심제 외에도 조금씩 변형들이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미국식 배심을 도입하면 수사·재판과 관련된 여러 다른 제도도 함께 다 들여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수사단계보다 재판단계에서 모든 것이 가려지거든요. 문제는 공개된 장소에서 진실을 가린다는 게 어렵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법정에서의 위증이나 수사기관에서의 거짓진술도 사법방해죄로 엄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개 장소인 재판정에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주요 재판이나 청문회에 증인 등이 나오지 않아 공전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배심제를 하려면 법정에서 변호사의 역할도 실제 재판을 이끄는 당사자로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국가변호사제도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증인보호제도와 내부고발제도 뿐 아니라 법관 선발방식도 포괄해서 들여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게 됩니다. 일괄해서 도입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독일식은 아니더라도, 미국식과 독일식을 절충해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미국식 배심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현재 우리 제도 중에서 익숙한 부분을 몽땅 다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집중심리 등 구두변론을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도입해야겠죠. 변호인 조력은 절대적인 것으로 배심제를 안 해도 해야할 것입니다. 미국식 법관선발까지는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요. 두 가지의 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한국형 배심제인데요. 직업법관이 재판공판 과정을 주도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고요, 배심원 숫자를 9명으로 하고 12명까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명 전원일치 평결로 하고, 정 합의가 안될 때는 8대1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일본이 최근 도입키로 한 재판원제도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과반수로 평결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결정은 과반수로 할 수 있지만 사법적 결정은 거의 절대적 진실 추구에 가까우므로 개개인의 특수한 체험은 9명 중 한두명 밖에 안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배심의 최대 장점은 치열한 평의를 통해 서로의 경험과 가치관의 최대치가 드러나게 되고 토론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참심제가 도입될 경우 전문법관 2명과 시민재판원 7명으로 구성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보다는 한국형 배심이 더 낫다고 봅니다.

봉/일본이 1928년 배심제 도입했는데
15년뒤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편입
장점 발휘될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봉=배심제든 참심제든 장점은 도입해야 하나 단점은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교수들의 주장은 주로 재판이 쇼처럼 진행된다는 것이고 진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을 맡았던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는 “가장 훌륭한 변호사는 모든 적법수단을 이용해 총체적 진실을 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비용과 시간도 문제입니다. 제가 미국 연수를 갔을 때 실제로 배심재판에 관여했는데 한 사건에 보통 2주가 걸리고 한달에 2건, 많아야 3건을 하게 됩니다. 우리 재판부에서 사건 처리 건수가 월 90건 정도이고, 2심은 12건 정도거든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결론적으로 진실이 밝혀지느냐에서 효용은 낮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배심원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은 사건이 전문화돼, 중요 경제부패사건의 경우 직업법관도 실체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피고인의 권익 부분은 존중하나 피해자 인권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도 배심제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으나, 80년대 이후 피해자 인권옹호 운동을 계기로 문제의식이 커져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미국식 배심제를 그대로 도입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식 참심제로 갔을 때는, 절충형으로 2+7 혹은 3+9 방식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주로 관심가지는 것은 유무죄가 가려진 이후에 양형부분이고 변호사 선임이유도 유무죄 주장보다는 유리한 양형을 받으려는 것인데 미국식 배심에서는 양형의 투명성이 제고되지 않아 문제가 있습니다. 배심재판이 이뤄지려면 1~2주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리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을 수 있죠. 재판 이전에 진실을 가리는 절차가 짧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는 배심재판에서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항소가 불가능한 것이 원칙이라는 겁니다. 또한 초기 수사단계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기능이 약화돼, 미국처럼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설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우리 국민의 소박한 법감정으로는 죄없는 사람이 재판정에 서면 안되거든요. 배심재판이 배심원 구성 등에서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1928년에 일본이 배심제를 도입해 15년간 운영했는데, 첫해에는 143건이 있었지만, 점점 줄어 10년 뒤에는 결국 없어져버렸습니다.

한=일본의 배심제가 사라진 것은 민주주의 수준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은 전시체제로 국민인권이 억압되던 때죠. 배심제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정치상황이 되지 못했었습니다.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과 돈있는 사람에게 유리해질 수 있다는 점, 비용과 시간의 문제 등이 중요한 논점인 듯 합니다. 미국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배심원을 상대로 쇼처럼 하는데 배심이 각계각층에서 나올 수 있다면 변호사가 쇼할 때 진실을 감추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등 저항감이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쇼에 현혹된다기보다 증거에 의해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법관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제이심슨 사건의 경우,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배심원들이 전원일치의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변호인 쪽이 제기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검사 쪽이 극복하지 못했던 겁니다. 또 많은 수의 유능한 변호인들을 선임해서 진실에 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고들 말하는데, 진실은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퍼즐을 모아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변호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검사의 전제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다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변호사가 최대로 투입된 사건에서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면, 변호사 없는 피고인은 얼마나 불리한 판결이 나오겠습니까.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배심제가 도입되지 않은 현재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잖아요. 시간, 비용과 관련해서도 국민이 배심원이 되는 경우는 평생 1~2번에 불과할 것입니다. 재판관이 되는 체험을 선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많고 군 복무 등의 체험을 통한 국가 의무에도 익숙해 삶의 보람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많죠. 대부분의 형사사건은 1~2주 사이에 끝날 것이고 1년씩 가는 일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한 교수는 일본의 배심제가 실패한 것은 정치적 상황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봉 검사는 배심원 구성 등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해 피고인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 폐지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형 배심제를 주장하는 한 교수와 참심과 배심의 절충형이 옳다는 봉 검사는 적극적인 시민참여가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했다.

봉=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있기 때문에 배심제 도입여부를 떠나 일반사건의 양형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에 시민이 참여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배심원으로 뽑히면 우리 국방의 의무처럼 시민으로서의 의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제 다루는 사건이 살인 사건 등 강력 사건이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여론조사에서는 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조직폭력 사건이 있어 피고인 앞에 있는 상황에서라면 그 부담이라는 것은 참 대단합니다. 절충형 참심은 법관과 부담을 나누지만 배심제는 100% 배심원들이 부담을 다 안게 돼있습니다. 신변 안전의 부담, 실제 생업의 부담까지 고려한다면 절충형으로 가는 게 적합할 듯 합니다.

한=판사들과 이야기 해보면, 그들도 배심원들이 누가 봐도 무죄인데 유죄로 결정할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알쏭달쏭한 경우 판사만 판단하면 되느냐의 문제인데, 판사들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복잡다단할 수 있으므로, 일반적 시민들의 지식·경험·상식을 보충받아야 됩니다. 얼마전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태도가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검사가 사전에 억압적인 분위기를 동원해 자백을 받아내고 심문해야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소파에 따라 미국식으로 해야 됐었죠.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법정에 미군 병사를 내놓으면 피고인에게 훨씬 불리한 쪽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미국인 기준에서는 한국 재판이 반쯤은 유죄추정상태에서 되는 것 아니냐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 헌법은 무죄추정원칙을 정하고 있음에도 실제 운영은 피고인에게 상당히 불리한 쪽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이런 문제들을 고치려면 참심형으로는 어렵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봉/재판이 쇼처럼 진행되고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한/현재도 돈많은 사람에게 유리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 있어

봉=미국의 제도가 미국의 문화와 미국민의 법감정, 국민의식에 맞는 제도라면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도입했을 때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겁니다. 배심이 미국의 법감정에 맞지만 우리 국민의 법감정에 맞지 않다고 할 때 바꾸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영미는 절차적 정의의 장점을 갖고 있지만, 대신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사필귀정의 뿌리 깊은 법감정도 존중하면서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한=피해자의 분노와 고통을 해결하려면 일단 검사가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입증해야죠. 피해자를 재판에 참여하게 한다거나 재산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제도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해소해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흉악범이나 조직폭력 사건에 관여하는 부담은 판사나 검사도 큽니다. 알 카포네의 재판을 둘러싼 온갖 영화가 있는데요, 직업 법관들이 타락한 상황에서 매수됐지만 배심을 통해 유죄판결을 받았거든요. 배심원 선정때 검사와 피고인 쪽이 한번 기피절차로 걸러내고, 양쪽이 모두 신뢰하는 배심원을 선정해 신원 노출을 방지하면 문제가 거의 없습니다.

봉=배심원의 신분노출을 방지해야하는 것은 참심이나 배심에서 모두 마찬가지죠. 일본의 재판원제도에서도 배심원을 노출하면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오판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이것이 여러 단계에서 걸러지는 게 좋다면 배심원을 통한 집중심리에서 한번보다는 수사단계에서도 미리 한차례 걸러주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고인의 인권보장은 실질적인 국선변호인 제도의 도입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배심제가 돼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죠. 피해자의 인권부분도 동시에 확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한=시민 개개인에게는 배심원으로 시민재판관으로 참여하는 게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가 참여하지만 전체가 다 공유하겠죠. 전 국민이 잠재적 배심원이 되는 것인데, 시민이 항상 사법의 대상이고 객체이다가, 주체가 되면 법에 대한 지식이 자기의 것으로 되고, 법의 생활화가 이뤄지고 또 시민들이 법적 규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준법정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이를 통해 법 위반자가 줄어든다는 게 아니라, 전문관료들이 만들어갔던 기준들을 시민적 기준으로 바꾸어 나가고 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모세혈관에까지 침투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시민참여에 대해서는 저도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 50년 동안은 아버지 세대가 열심히 노력해 이끌어왔는데, 지금은 여기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해야할 때입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법에 대한 존중과 법치주의, 또 하나는 앞선 글로벌 스탠더드 문화와 제도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배심제든 참심제든 절충형이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합니다.

정리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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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ria 2004-05-06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 씁니다. 최근 저도 '법철학'에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힘'을 목놓아 기다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인지요...
실은 이 얘기를 드리려 했던 건 아니고,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책들(혹은 이들에 대한 이차저작) 중에서 '책임'에 관해 상세히 다룬 글이 어떤 건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참, 그리고 저번에 '그라마톨로지' 번역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떤지요? 아마 말씀이 없으신 거 보면 신통치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balmas 2004-05-0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의 힘] 출간이 좀 늦어지고 있는데, 출판사 얘기로는 마침 [문학과 사회] 편집, 출간 일정과 겹쳐서 지연되고 있다고 하더군요. 6월 초 쯤에는 출간이 되겠지요.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책들 중에서 <책임>에 관한 책들이 어떤 게 있는지 물었는데, [전체와 무한] 이후 레비나스의 저술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다 책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는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내 생각에는 데리다가 레비나스에 관해 쓴 책에서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듯합니다. Adieu to Emmanuel Levinas라는 책인데, 이 책에서는 레비나스의 윤리, 정치사상, 따라서 <환대>와 <책임>의 문제가 중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2차 문헌 가운데 국역본 책으로는 [사랑의 지혜]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알랭 핑켈크로트라고, 프랑스에서 가장 방송을 많이 타고 인기있는 저술가 중 한 사람의 책인데, 제목만 봐서는 흔한 잠언류의 책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사실은 레비나스의 철학에 관한 매우 독창적이고 명쾌한 해설서입니다. 에세이 스타일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어렵지 않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까, 레비나스에서 책임의 문제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사실 레비나스에 관한 연구서 중에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책 중 한 권입니다.
영어로 된 저술 중에서는, Richard Beardsworth, Derrida and the Political(1996)이라는 책을 권하고 싶군요. 이 책은 데리다의 정치철학, 법철학에 관한 제일 좋은 책 중 한 권이고, 특히 마지막 장에서는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철학과 데리다 철학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관련된 논의들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좀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라마톨로지] 번역본은 아직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운데, 조만간 하루 날을 잡아서(^^) 구내 서점에 죽치고 앉아서 검토해볼 생각입니다.

aporia 2004-05-07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큰 도움을 받습니다. 공부하면서 의문드는 점 있으면 종종 질문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