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연세대에서 [푸코와 철학자들] 북콘서트가 있었습니다.
금요일 저녁 행사였는데도 아주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 행사 머리말로 작성한 간단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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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오늘 이 자리에 서니 몇 가지 감정이 듭니다.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많은 애를 써준 김은주 선생님과 민음사 신새벽 차장님 덕분에 오늘 북토크 모임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석에서도 말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엮은이의 한 사람으로서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공동 필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은 한국의 푸코 수용사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책이라고 보이고, 특히 철학자 푸코에 관한 연구로는 앞으로 빠른 시간 내에 이 책을 뛰어넘을 만한 책을 내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이것은 모두 외국에서 출판된 푸코 연구에 견줘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 높은 글을 만들어준 필자 선생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금요일 저녁의 귀한 시간에 열리는 모임인데도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의 독서와 비평, 새로운 연구로만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오신 독자 분들은 이 책의 공동 저자로서의 자격과 책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그 다음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이 듭니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은 대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인데, 제가 그 역할을 맡게 되니 새삼 나이를 몇 살은 더 먹은 기분입니다. 저 아직 젊습니다. ㅠㅠ
마지막으로 푸코 전공자인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특별히 전하고 싶습니다. 어찌 하다 보니 푸코 전공자도 아닌 김은주 선생과 제가 이 책의 엮은이가 돼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 연구의 능력으로 보나 전문성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허경 선생님과 도승연 선생님 또는 심세광 선생님께 이 책의 공로가 돌아가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흔쾌히 좋은 원고를 써주시고 이 자리에까지 함께 해주신 두 분 선생님께, 그리고 미처 참석하지 못한 심세광 선생님께 특별히 엮은이로서 사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푸코와 철학의 관계에 관해 엮은이로서의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소개의 말로 대신할까 합니다.
제가 방금 “푸코와 철학의 관계”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사실 푸코와 철학의 관계는 마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는 아닙니다. 오히려 긴장과 갈등, 역설과 아포리아를 품고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1) 프랑스 철학
먼저 우리가 푸코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는 ‘프랑스 철학’ 또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푸코는 데리다, 들뢰즈 등과 더불어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를 통틀어 보더라도 몇 손가락에 꼽을 만한 철학자로서의 위상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요컨대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 등과 같은 반열에 놓이는 것이죠.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출판사 중 하나인 갈리마르(Gallimard)에서는 “플레이야드”(Pléiade) 총서가 출간되는데, 저명한 사상가나 작가의 전집을, 사전 종이 같은 얇은 종이를 사용하여 한 권 내지 몇 권 안에 집약해서 펴내는 총서죠. 그런데 20세기 후반 철학자들 가운데는 푸코 전집(푸코가 생전에 출판한 저작들 전집)이 유일하게 이 총서로 간행되었습니다. 이는 철학자로서 푸코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이미 사용했듯이, 우리가 흔히 프랑스철학 또는 독일철학 아니면 영미철학 등에 관해 말하지만, 여기에는 얼마간 역설이나 모순이 함축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영미철학 같은 표현들은 철학이 프랑스나 독일, 영국이나 미국 같은 네이션 스테이트, 곧 국민국가의 문화적 틀에 제약받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철학 또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대표자 푸코”와 같은 표현을 우리가 사용할 때, 우리는 “프랑스” 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 “철학자”로서의 푸코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일까요? 요컨대 푸코는 프랑스적인 것 때문에 위대한 철학자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프랑스적인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얼마간 작위적일 수도 있는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잘 드러나듯 푸코는 프랑스 철학자들(데카르트, 캉길렘, 알튀세르, 데리다 등)에게 영향을 받고 그들과 대결하면서 동시에 그 바깥의 철학자들, 요컨대 칸트, 니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받고 또한 그들과 대결했다는 사실, 그리고 말년에는 고대 그리스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푸코의 철학을 ‘프랑스철학’으로, ‘현대 프랑스철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우리가 프랑스철학이나 독일철학 등으로 부르는 것은 결코 순수하게 프랑스적인 것이나 독일적인 것(프랑스의 정신, 독일의 정신 같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미 타자들과의 교류, 그것들의 수용 및 변용, 재창조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푸코의 철학이 위대한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푸코가 국민적인 것의 경계를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현대 철학의 제도적ㆍ인프라적ㆍ상징적 조건이라는 문제, 철학이 지금까지 스스로 문제화하지 않았던 그 문제를 수행적으로 다루는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2) 정전이 된 철학자 푸코
그 다음, 요즘 인문학 분야에서는 철학이나 사상 또는 문학의 고전적인 작품 그리고 그 저자를 가리켜 “정전”(can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같은 것,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나 헤겔의 철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겠죠. 그리고 푸코는 앞서 말했듯이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서양철학의 정전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푸코 철학은 이점에서 다시 역설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이 책의 「서론」에서 김은주 선생이 잘 지적하듯이 푸코는 이전의 서양철학에서 철학의 주제로 간주되지 않았던 대상들을 다룸으로써 정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광기나 감옥, (호모) 섹슈얼리티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죠. 이것들은 푸코 이전에는 누구도 철학적인 주제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데, 푸코는 이 대상들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현대 사회의 심층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철학 및 그 합리성의 한계도 드러냈죠. 더욱이 푸코는 그러한 한계를 드러낼 때 기존의 철학적 방법과 다른 방법, 예컨대 고고학이나 계보학 같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대상이나 주제, 그리고 방법은 푸코 당시에는 아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지만, 푸코가 정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제는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주제이자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푸코는 이 책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의 반열에 이미 올라 있는 다른 철학자들과의 비교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푸코를 정전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사실 푸코적인 것을 얼마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더 첨예하게 말하자면, “고전 철학자 푸코”는, 정상화되고 길들여진 푸코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알튀세르가 유고로 출간된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에서 말한 바 있듯이, 서양 철학의 근본 특성은 바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모든 것, 단지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근거를 부여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것이 지배적인 철학의 특징이었습니다. 반면 역시 알튀세르에 따르면, 기성의 지배적인 철학에 맞서는 진정한 유물론 철학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철학의 충만한 공간 안에 공백을 만드는 것, 철학의 총체성의 바깥을 찾아내는 것을 추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는 아마도 탁월한 유물론 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푸코를 정전으로 만듦으로써, 그를 다시 한 번 철학의 지배권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아닐까요? 푸코와 같은 도발적인 철학자, 철학의 바깥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바깥의 철학을 추구했던 철학자에게 이것은 불가피한 역설일까요?
3) 푸코에 관한 연구에서 푸코적인 연구로
이것은 마지막 세 번째 질문과 연결됩니다. 10여 년 전에 제 한국의 푸코 연구에 관한 주제서평을 쓰면서 글의 제목으로 삼았던 문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저는 푸코를 연구하는 이들이 푸코에 관한 연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한 것이 위와 같은 역설에서 벗어나는 가장 생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마찬가지이지만, 꼭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또는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아마도 오늘날 푸코가 살아 있다면 추구했을 법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방법일 겁니다. 예컨대 오늘날 푸코라면 인공지능의 문제라든가 인류세의 문제, 또는 신냉전과 신권위주의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 그라면, 이 문제들을 어떤 관점에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접근했을까요?
또는 푸코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했던 대상이나 주제를 탐구하는 방법도 있겠죠. 당장 떠오르는 주제는 ‘생명권력’ 같은 것이 있네요.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같은 강의록이나 성의 역사 1권 마지막 장에서 이 주제를 잠깐 다뤘지만, 그 자체로 주제화하지는 않았죠. 또는 대항품행 같은 주제들은 어떨까요? 그것도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탐구해볼 만한 문제가 될 겁니다.
아니면 푸코의 모순이나 비일관성 또는 한계를 밝히는 작업, 더 나아가 푸코를 다르게 사유하는 작업도 위의 방식 못지않게 훌륭한 푸코적인 연구가 될 것입니다. 푸코는 아시다시피 평생 다르게 존재하는 것, 다르게 사유하는 것을 추구해왔던 사람이었던 만큼, 푸코를 다르게 읽고 사유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푸코적인 연구로 불릴 만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푸코와 철학자들은 푸코적인 연구의 의미 있는 사례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자평해봅니다. 푸코의 철학에 대해, 푸코가 다른 철학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 국내의 연구든 해외의 연구든 간에, 지금까지의 연구들과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려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이 책의 공동 필자들만이 아니라 독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또 다른 푸코적인 연구의 길에 나서야 할 겁니다. 그 길에서 이 책이 믿을 만한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