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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
루이 알튀세르 지음, 서관모 옮김 / 후마니타스 / 2017년 1월
평점 :
1.13 금요일치 한겨레신문에 실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평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째 번역되는 셈인데,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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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위하여>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루이 알튀세르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자크 라캉의 <에크리>,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현대 프랑스 사상의 걸작이다. 이번이 3번째 번역인데, 지난 두 차례의 번역본보다 더 정확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알튀세르를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1965년 처음 간행되자마자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알튀세르가 같은 해에 그의 제자들과 공저로 출간한 <자본을 읽자>와 더불어 프랑스 사상계를 뒤흔들고 곧바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학계, 그리고 저 멀리 라틴아메리카에도 급속히 번역ㆍ소개되어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는다. 이는 특히 이 책의 세 가지 핵심 논점 덕분이었다.
첫째, 청년 마르크스와 성숙한 마르크스 사이에는 엄밀한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시된다. 당시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래 불어닥친 반(反)스탈린주의의 흐름 속에서 초기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청년 마르크스는 아직 자신의 이론적 핵심을 발견하지 못한 채 헤겔과 포이어바흐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주장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생산양식, 이데올로기 같은 개념들을 발견하게 되며, <자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하지만 알튀세르는 <자본>의 마르크스 역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이러한 이론적 미완성과 공백은 현실 정치의 실천적인 오류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를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가 되며, 무엇보다 헤겔 변증법과 구별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독창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과잉결정 개념이 도출된다.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사이의 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경제적 모순은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기본 모순이지만, 이러한 모순은 늘 상부구조에 의해, 이데올로기에 의해 과잉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혁을 위해서는, 레닌이나 마오가 했듯이 경제적 모순과 상부구조의 모순,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집적된 약한 고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셋째, 하지만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며,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에도 이데올로기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나 기만, 조작된 표상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세계 자체, 상상적 관계 그 자체를 뜻한다. 간단히 말하면 개개인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계급이나 국민, 민족 같은 집단의 정체성 역시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며,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을 살아간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핵심 기능은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지배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면서 또한 역설적이게도 해방 투쟁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우리는 반공주의에 의해, 민족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지만, 또한 주권자로서의 국민으로 호명되며, 갑질에 고통받고 분노하는 을들로서도, 여성 혐오에 맞서는 메갈리안으로서도 호명된다.
1980년 알튀세르가 부인을 목졸라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유폐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는 영원히 망각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같이 그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던 제자들에 의해, 또한 미국 학계의 슬라보예 지젝이나 주디스 버틀러 등에 의해 알튀세르는 21세기 사상의 젖줄임이 입증되었다.
실로 신자유주의 체제의 예속적 주체화 메커니즘에 맞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알튀세르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상가는 보기드물다. ‘을의 민주주의’를 위해 알튀세르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