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누엘 레비나스 - 타자를 향한 욕망
콜린 데이비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다산글방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레비나스는 외국에서의 명성에 비하면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저서 중 두 권, 그것도 대표적인 저서로 보기는 어려운 저서들만 국역되어 있고, 국내 연구자의 저서 한 권과 몇 편의 연구 논문들이 국내의 레비나스 연구의 현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일반 독자들이 레비나스의 사상의 전체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후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려는 레비나스의 초기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해서 [전체와 무한](1961)에서 제시된 타자론이 [존재와 다른 것](1974)에서 윤리, 정치적인 영역으로 심화, 확장되는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요령있게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은 레비나스의 사상이 다른 철학자들, 특히 데리다와의 논쟁 또는 토론을 통해 변모되어가는 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잘 제시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의 복잡하고 난해한 사상을 일반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로 전달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성공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자의 공들인 번역도 칭찬할 만하다. 몇군데 가벼운 오역이 눈에 띄긴 하지만, 유려한 우리말 문장으로 내용을 정확하게 잘 전달해주고 있다. 레비나스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직접 레비나스의 저작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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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이종영씨는 국내에 바디우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을 번역하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경로로 바디우를 알리기 위해 노력해온 학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윤리학]의 번역은 좀 실망스럽다. 동문선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번역들에 비하면 비교적 나은 편에 속하고, 바디우에 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이 번역서는 여러가지 세부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어서 학문적으로는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사례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책에는 identification/identifier라는 단어가 여러번 사용되고 있는데, 이종영씨는 이를 어떤 경우에는 <정체화>(16-17쪽)로, 어떤 경우에는 <식별>(18쪽)로, 어떤 경우에는 <일체화>(20쪽)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의 같은 단어를 이처럼 상이하게 번역할 경우에는 이 다양한 번역어가 원문의 같은 단어를 가리킨다는 점을 표시해두는 게 당연할 것이다. 더 나아가 16-17쪽의 <정체화>라는 번역은 라캉이 쓰는 의미에서 identification, 즉 상상적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개념(30쪽에 나오는)을 염두에 둔 번역이지만, 16-17쪽의 맥락에서 이는 그저 <동일시>나 <일체화>를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아직 너무 '사소'한 문제다. 이 번역의 또다른 문제는 reconnaitre/reconnassance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역시 어떤 때는 <인정>(18)으로, 어떤 때는 <파악>(18)으로, 또 어떤 때는 <식별>(21)로 번역하고 있고, 그리하여 독자가 <식별>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 단어가 identification을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reconnassance를 번역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다. 이런 경우 바디우의 논의가 담고 있는 학문적인 엄밀성이 살아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번역에는 다수의 오역들도 엿보인다. 예컨대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이라는 번역은 <형식적으로 표상될>이라고 번역해야 칸트 윤리학의 고유한 형식주의가 드러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6쪽의 <성찰적 주체>와 <결정하는 판단>이라는 번역은 칸트 철학의 고유한 주제 중 하나인 reflessiant과 determinant의 대비, 즉 <반성성>과 <규정성>의 대비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또한 30쪽의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식에 대해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되는 거리를-둔-나-자신>이라는 번역은 <-나를 하나의 안정된 소여처럼, 그 외재성 속에서 주어진 내면성처럼 구성하는->이라고 번역해야 왜 identification이 <정체화>, 즉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인지 이해가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31쪽의 <그 유한성 속에서 나에게 드러나는 대로의 타자는, 그 넘어섬이 고유한 윤리적 경험일 순수하게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은 <유한자 안에서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의 대타자는 고유하게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이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다>로 번역해야 바디우의 진의가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식의 오역과 부주의한 번역은 이 책 도처에 나타나고 있는데(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부주의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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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4-09-13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글도요.
정확히 어디에 문서가 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이 윤리학책번역이 이종영씨의 의도대로 출판이 안되고 출판사 자의로 출판되어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종영씨 글중에서 읽은 기억인데 많은 부분 출판사 맘대로 뺄건빼고 출판된것으로 말하더군요.
하여간 많은 리뷰글 부탁하고 마이리스트보니 사두어야 될 책들을 알게되어 정말 고맙습니다.

balmas 2004-09-1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그런 이야기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종영 선생이 번역한 다른 책들도 [윤리학]과 대동소이한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걸 보면, 꼭 번역의 문제점이 거기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종영 선생은 자신의 번역본(이나 저술)이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수긍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 같더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좀더 꼼꼼하게, 좀더 정성을 들여서 번역하면 될 텐데 ...

balmas 2006-03-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태원 씨,

첫째로,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의 출판과정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그 책은 제가 교정을 한 차례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을 한 뒤 저에게 연락도 취하지 않고 출판된 책입니다. 저는 교보문고에서 그 책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책을 사서 내용을 훓어본 후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부분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곧장 출판사로 가서 책의 폐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밤을 새서 원래의 원고대로 책을 고쳐놓은 후(교정을 보았다기보다는) 출판사에게 새롭게 인쇄할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새로운 판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당시의 출판저널에도 실려 있고, 제가 이와 관련하여 교수신문에 '책의 자본주의적 운명'이란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폐기된 책을 가지고 저의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진태원 씨가 지적한 번역문제에 대해 말해봅시다.

1) identification을 여러 용어로 번역했다고, 그래서 문제라고 하셨는데, 원래 identification은 여러 용법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s'identifier라고 할 때는 정체화이겠지만, identifier는 식별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진태원 씨는 reconnaissance가 식별일 수 있다고 했지만, reconnaissance는 훨씬 가볍고 부정확한 의미로 쓰입니다. 한 용어의 쓰임을 그 용법에 따라 정확하게 파악해 주는 것이 번역자의 할 일이겠지요.

2) 15쪽의 "명확하게 표명될"에 대해서는 저처럼 번역해야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리라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formel'이란 단어의 불어 용법에 대해 진태원 씨가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진태원씨께서 다니시는 서울대의 김상환 선생님께 여쭤보시기 보랍니다.

3) 16쪽의 맥락에서 "열정적 또는 성찰하는 주체", "능동적이거나 결정하는 판단"에서 '성찰'을 '반성'으로, '결정'을 '규정'으로 번역하면 맥락에 잘 맞지 않겠지요. 한국에서 철학을 하면서 특정한 번역어를 중심으로 사고를 하셨겠지만, 불어로 사고를 할 때는 특정 저자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는 '헤플레시상', '데테르미낭' 그대로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태원 씨께 전달이 될런지요? 불어 단어를 볼 때 진태원 씨 머리 속에 굳어진 국내 번역어에 자꾸 집착하시지 말란 것입니다.

4) 30쪽의 정체화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처럼 번역해야 자기가 설정한 대상에 대한 상상적 정체화가 더욱 잘 드러나겠지요. 제가 역점을 두었던 것은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를 대상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5) 31쪽의 번역에 대해서, '넘어섬'을 말하는 것이 '바디우의 진의'일 것임은 명확하겠지요. 진태원 씨께서도 좁은 지면에 길게 말씀하실 수는 없었겠지만, '바디우의 진의'를 진태원 씨가 어떻게 파악하셨는지 알 수 없군요.

셋째로, 진태원 씨가 알라딘 리뷰에 쓴 글의 의도에 대해 말해보고 싶습니다. 불어에 대해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불어단어들을 열거하시면서 스스로가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을 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런 얘기는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것이 좋겠지요. 서로 서로를 고쳐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불어를 알지도 못하는, 아무런 판단능력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봐라,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분히 선동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태원 씨의 리뷰가 저에 대한 사적 감정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불어를 잘 아는 번역자들끼리 모일 기회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책임질 수 있는 글을 쓰시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권력을 좋아하지 않고 진리만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진태원 씨께서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를 갖는 학자로 성장하시길 바랍니다.

이종영 드림.


balmas 2006-03-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2002년 9월에 바디우의 [윤리학] 번역본에 대해 알라딘에

서평을 하나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책의 역자인 이종영 씨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제 서평에 대해 이견이 있다고 말을 하더군요. 처음에는 알라딘에 답글을

달려고 했는데, 회원 가입 절차가 번거롭고 개인 정보가 유출될까 미심쩍기도 해서,

전화로 이야기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길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래, 차라리

메일로 반론을 적어 보내면 내가 답글로 올리겠다고 했더니, 메일을 한통 보냈습니다.

위에 올린 글은 이종영씨가 저에게 보낸 메일 그대로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걸 강조하는 이유는 처음에 제가 메일로 보낼 것을 제안했더니, 저를 어떻게

믿냐고 반문해서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시면 될 것이니까 긴 이야기는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종영 씨가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글이라고 봅니다.

이런 류의 치기어린 답변에 제가 굳이 답글을 달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종영 씨는 마치 제가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판본을 가지고 서평을 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제가 서평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종영 씨가 항의한 이후에 새롭게 출판된 판본입니다. 이 점은 이종영 씨에게

전화상으로도 이야기했고, 동의를 얻은 것이니까 확실히 지적을 해두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왜 이종영 씨가 굳이 메일에 이 내용을

다시 써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


2008-06-21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가진 5년 2012-02-06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 처럼 해야 맞겠지요",
잘못된 지적에 대해 지적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힌다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밖에 없군.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공부는 한 만큼 했으면서 이렇게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 할까.
좋아 스스로를 제대로 처다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
"나처럼 해야 맞겠지요"
어디다 이런 엉성한 답글로 사기를 치려고 해.

손용탁 2012-08-12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 선생님위 글중 '데테르미낭'이란 무엇을 뜻하는겁니까..
예문 ....
중국 논문을 번역한 조선족(교포분)이 이러한 문구를 적어 놓았습니다,
"블러드마그네티즘 치료법으로 자신의 병을 오게하는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화학 합성 반응을 가속하여...."
란 글귀에서..... '데테르미냥을 제거하고' 란 무엇을 뜻하는지요
선생님의 고견을 .. 꼭 부탁드립니다

balmas 2012-08-13 19:58   좋아요 0 | URL
맥락을 잘 몰라서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댓글의 인용문에서 "데테르미낭"은 "결정 요인"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용탁 2012-08-15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의 고견에 감사드림니다.

Lomain 2017-12-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쪽 번역에서, ‘무한한 타자에의 거리의 현시여야만 한다’는 번역이 타자와 갖는 거리의 무한을 언급하고 있는 거라면, 재번역된 ‘무한한 타자와의 거리의 현현이어야 하며, 이 거리를 넘어섬 원초적인 윤리적 경험’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무한한 거리마저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 또는 거리를 좁힌다는 걸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후술된 ‘그리스적 용법에서 벗어나서 일반성 속에서 포착’이라는 건 타자의 무한성의 일반성이 아닌 그 무한성을 넘어선? 또는 좁힌 일반성을 말하는 것인지요.

balmas 2017-12-15 23:56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답변을 당장 드리기가 어렵겠네요.
도서관에서 확인을 해보고 나중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마키아벨리의 가면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정한 외 옮김 / 이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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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알튀세르의 외전(外傳)의 핵심을 이루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을 집약해놓은 책이다. 사후에 유고집(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Stock/IMEC, 1995)에 미간행 원고 상태로 발표되었지만, 알튀세르 자신은 생전에 이를 하나의 저서로 출간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고, 알튀세르 특유의 섬세한 글쓰기와 사고를 담고 있다.

문제는 국역본에 이런 섬세함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국역본이 영역본을 대상으로 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책의 역자들이 알튀세르의 사상, 특히 그의 유고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60년대 말-70년년대 초의 알튀세르의 복잡다단한 사상의 변화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하는 문제다.

한 마디로 이 번역본은 숱한 오역과 알튀세르의 개념들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을 담고 있어, 국내 독자들이 알튀세르 사상의 진수 중 한 부분을 이해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 예컨대 번역본 26쪽의 '그것은 그에 앞서서는 다른 어떤 것이었지만, 이제는 조금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라는 문장은 '이것[시작하는 것] 이전에 이와 다른 것이 존재했지만, 이것과 관련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로 번역되어야 의미가 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27쪽의 '나에게는 사물을 현실적 진리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가상적으로 표상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진다'는 문장은 '내가 보기에는 사물에 대한 상상보다는 사물의 실제 진리로 나아가는 게 더 적합하다'로 번역되어야 왜 바로 다음 문장에서 알튀세르가 '이 정식은 사물의 실제 진리, 따라서 객관적 인식과 주관적이고 상상적인 표상을 대립시키고 있다'고 논평하는지 이해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저작권이 국내 출판계의 상업성을 한층 더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위 좌파 서적 전문 출판사가 알튀세르의 중요한 저서를 이런 식으로 번역해서 내놓는 것은 단지 학문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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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자크 데리다 지음, 김보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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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약 5-6년 전에 읽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렇게 형편없는 번역본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판사나 역자, 독자, 또는 데리다를 위해서라도 이런 책은 이제 절판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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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0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짧은 서평에 발마스님의 분노가 마구마구 묻어나는군요!

제가 가장 분노했던 번역은 존 쿨리의 '추악한 전쟁'이었습니다. 성전(holy war)를 비꼬기 위해 'unholy war'라고 제목을 붙인 것을, 웃기는 번역자(라기보다는 독서방해자)가 '추악한 전쟁'이라고 해놨더군요. 추악한전쟁이라고 하면, 명백히 다른 개념인 '더러운 전쟁' 즉 dirty war를 연상케하는데, 번역자가 과연 그런 정도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었는지는 회의적입니다만. 이 책 읽다가 너무 열받아서 무려 출판사에 항의전화를 하기까지 했답니다. 그 뒤에 알라딘에 보니깐 다른분들도 모두 번역에 열받아서 한마디씩 올리셨더군요.

이 책 못잖게 황당했던 것은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었는데요, 이거 번역하신 분은 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는 분인데 참 좋은 분이세요. 친절하시고, 소박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성격'으로 번역의 오점을 만회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 여러 복잡다단한 지역이 포함돼있긴 하지만 통틀어 '중동학계'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하는데, 이 동네에서 저 책 번역자가 거의 매장될 분위기였다고 하더군요. 결국 출판사는 저 책 절판&재번역 결정을 내렸고요. 알려질대로 알려진 촘스키 저술을 저따위로 번역하는 것은 범죄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촘스키 책 중에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엔 너무 전문적인 저 책이, 9.11 직후에 붐을 타고 꽤나 팔렸다는 겁니다.

balmas 2004-11-09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 이것도 그냥 댓글로 묻어두기는 아까운 말씀이네요.

제가 페이퍼로 정리해놓을까요???


이 때까지만 해도 제가 좀 점잖았답니다.
지금은 완전히 '악동'이 됐지만 ...;;;

Chopin 2006-10-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웃깁니다.

기인 2009-03-1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발마스님. 한국에 Differance(1968 1. 27 강연ㅎ)라는 에세이가 번역된 것이 이 책외에는 없나요?
Differance 읽어봐야되는데, 역시 한국어본을 옆에 두고 읽어야 마음이 안정되는 -_-;
어쩔수 없는 국문학도라서요.. 혹시 다른 '곶'ㅋ 에도 이 글이 번역되어 실린 것이 있는지
여쭈어봅니다 :)
68때 발표들 흥미로운 것 같아요. 푸코는 What is an Author도 68에 발표더라고요. ㅎ

rei 2021-01-1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이가 없는 번역이네요 ㅋㅋㅋ
 

* 생각난 김에 [법의 힘] 역자 해제를 올립니다. 아직 마지막 최종교정이 한번 남아있어서 완성된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용상의 큰 수정이 없을 것 같으니까 실질적인 최종본이라고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준비하던 글은 좀 분량이 많은 글이었는데,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이 글로 대체하게 됐습니다. 원래 해제에 넣으려고 생각했던 글은 독립된 논문의 형태로 발표를 할 생각인데, 글이 완성되면 여기에도 한번 올려서 좋은 논평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법의 힘』 역자 해제

1

         이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을 완역하고, 이와 관련된 두 편의 글을 부록으로 함께 묶은 것이다. 부록 중 하나는 데리다가 『법의 힘』 2부에서 다루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데리다가 1976년에 버지니아 대학에서 강연했던 [독립선언들]이라는 글이다(이 글들의 출전은 각각의 글머리에 표시해 두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이전에 이성원 교수에 의해 [폭력의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는데(『외국문학』, 1986년 겨울호), 데리다가 이 책에서 이 글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다가 새롭게 번역,소개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서 다시 번역해서 수록했다. 그리고 [독립선언들]은 『법의 힘』의 논의를 보완하는 의미도 있을 뿐 아니라, 짧은 글이긴 하지만 정치철학에 관한 데리다의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글 중 하나에 속한다고 생각되어 함께 수록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글을 국내에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 ).   
        데리다의 『법의 힘』은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의 책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책에 속한다. 실제로 『법의 힘』은 『기록학에 관하여De la grammatologie』(1967)나 『기록과 차이L'écriture et la différence』(1967), 『철학의 여백Marges de la philosophie』(1972)이나 『조종Glas』(1974), 또는 최근의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1993) 같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들에 못지 않을 만큼 철학이나 인문사회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르도조 법학지Cardozo Law Review』가 이 책에 관해 두 차례의 특집호를 낸 것이라든가, 영미권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어권에서도 이 책에 관한 연구서 및 논문들이 수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로 이는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Politiques de l'amitié』(1994) 같은 저작들과 내용상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저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또는 전에 외국어 판본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량도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살펴봐도 이 책이 왜 그렇게 높게 평가되고 많이 논의되는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을 처음 대할 때 받는 인상 중 하나는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두 부분 사이의 기묘한 비대칭성이다. 1부에서 데리다는 다분히 수사학적인 어법을 동원하여 해체가 정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하면서, 몽테뉴와 파스칼의 단편, 그리고 “정의, 곧 타인과의 관계”라는 레비나스의 명제를 원용하여 법(따라서 정치 일반)에 함축되어 있는 수행적 아포리아를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1부는 상대적으로 많은 논의들을 담고 있음에도, 이것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해명하기보다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문제들에 담긴 함의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어서 독자들은 좀 산만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반면 2부에서는 오히려 ‘고전적인’ 해체적 독법에 따라 발터 벤야민의 논문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관해 매우 상세하고 치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1부를 읽으면서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이 2부에서 좀더 분명하게 해명되기를 기대한 독자들은 2부에서 전개되는 벤야민에 관한 상세한 해체적 논의가 다소 의아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이 책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어온 독자들로서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높게 평가받는 데는 몇가지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이 책의 중요성은 바로 그 시의성(時宜性), 또는 데리다가 자주 쓰는 표현을 사용하면 ‘때맞지 않음intempestif’으로서의 시의성에 있다. 데리다가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강연이 발표된 시기는 1989-1990년이었는데, 이 때는 이 책과 관련하여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먼저 이 시기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하던 시기, 곧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으로 규정되는 20세기가 종언을 고하고, 따라서 정치적 근대성(전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일부)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때는 법과 정치에 관한 기존의 사고들의 한계를 검토하고 새로운 문제 설정의 모색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더 나아가 이 시기에는 1987년 빅토르 파리아스Victor Farias의 유명한 『하이데거와 나치즘』[Victor Farias, Heidegger et le nazisme, Verdier, 1987]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미권 등에서 하이데거의 나치즘 연루에 관해 일대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데리다는 60년대부터 하이데거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들을 발표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중요성을 다른 구조주의 철학자들에 비해 좀더 강조해왔기 때문에, 자연히 하이데거의 프랑스식 후계자라는 혐의를 받으면서 이 논쟁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데리다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데리다는 파리아스의 책이 출간되던 같은 해에, 하이데거의 저작에 나타나는 ‘정신Geist’ 개념을 실마리 삼아 하이데거 철학의 형이상학적, 정치적 한계를 다루고 있는 『정신에 대하여. 하이데거와 질문De l'esprit. Heidegger et la question』, Galilée, 1987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데리다가 정치에 관한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제시하고 있는 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정세 속에서 발표된 이 책(또는 이 책의 원형을 이루는 [법의 힘]이라는 논문)은 곧바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때까지 데리다에게 가해졌던 니힐리즘이라든가 공적인 책임 의식 없는 사적 유희라는 식의 비판들을 일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본문에서 그 자신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데리다는 1960년대부터 줄곧 프랑스(및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물론 데리다는 자신이 처음부터 이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고 역설하고 있고 또 이는 분명 사실이지만, 『법의 힘』 이전까지 정치적,윤리적 문제들에 관한 데리다의 논의는 부차적이거나 암묵적이고 우회적인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법의 힘』 이후 정치적,윤리적 문제는 데리다 작업의 중심적인 주제로 부각되었으며,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우정의 정치들』에서부터 최근의 『불량배들』[ Voyous: Deux essais sur la raison, Galilée, 2003. 이 책은 2003년에 국역본이 출간되었지만, 심각한 번역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및 『9월 11일이라는 개념』[ Le concept du 11 septembre: Dialogues à New York (octobre-décembre 2001) avec Giovanna Borradori, Galilée, 2004. 이 책은 2003년 영어로 먼저 출간되었는데, 세계무역센터 테러에 관해 하버마스와 함께 대담한 책이라는 점 때문에 출간 이전부터 큰 화제가 되었다]에 이르기까지 매우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산출하고 있다(이 때문에 데리다 자신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데리다 사상에 윤리적 또는 정치적 전회가 일어났다는 평가가 자주 제시된다).
         이처럼 정치,윤리적 문제에 관한 데리다 작업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더 나아가 데리다 문제 설정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바로 이 저작의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혁명과 개혁, 정초와 보존, 법과 폭력(또는 폭력과 대항 폭력) 같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을 해체하고 전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특히 2부 [벤야민의 이름]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개진된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을 세심하게 검토하면서, 벤야민의 논의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는 궁극적으로 ‘원초적 오염’, 또는 되풀이 (불)가능성의 원리에 대한 벤야민의 맹목에서 유래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데리다의 관점에 따르면 이는 결국 근대 정치 사상에 고유한 맹목과 아포리아이기도 하다.  
         둘째, 이 책의 또다른 핵심 주제는 정치와 시간성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데리다는 근대 정치 사상의 이율배반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간성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초기의 해체 작업을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면서 정의의 가능성이 어떤 점에서 미래futur와 구분되는 장래avenir의 관점과 근원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데리다가 전미래 시제를 활용하는 방식인데, 데리다는 [법의 힘] 및 [독립선언들]에서 불어의 전미래 시제(또는 영어의 미래완료 시제)를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활용함으로써, 앞서 지적한 고전적인 정치철학의 이율배반이 어떻게 시간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는 법의 자기 정초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수행적 폭력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수행적 폭력의 필연성을 억압하고 은폐하려는 메커니즘이 바로 전미래 시제를 통해 표현되며, 이는 결국 위와 같은 이율배반을 낳게 된다.    
         셋째, 이 책은 또한 독특한 타자에 기초한 정의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데, 이는 고전적인 이율배반에 대해 데리다가 제시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론은 법적 보편성과 구분되는, 하지만 항상 법적 보편성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독특한 정의의 문제로 제시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관점은 정의를 ‘타인과의 관계’로 규정하는 레비나스의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를 장래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읽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벤야민 자신의 논의에서도 이러한 문제 설정을 발견할 수 있으며, 벤야민식의 ‘해체’ 작업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들의 논의를 조합하거나 추종하지 않고, 기록학grammatologie과 수행성의 관점에서 이들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변용하고 있다는 데 바로 데리다 정의론의 중요성과 강점이 있다. 
         이러한 데리다의 입장은 이후 여러 저서들을 통해 좀더 구체화되고 확장되고 있다. 특히 데리다는 유럽 공동체와 주권, 국제법의 문제, 이주 노동자와 환대의 문제, 탈식민주의와 보편 종교의 해체 문제, 도래할 민주주의와 인권 개념의 해체 문제 등과 관련된 현실적 쟁점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의 구체적인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전개라는 정세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정치철학 중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벤야민 연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또다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실 데리다가 이 책의 2부인 [벤야민의 이름]을 발표하기 전까지 벤야민은 주로 문예이론이나 매체이론, 또는 유명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을 뿐,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1965년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와 [정치신학 단편]을 묶어 소책자로 펴내면서 마르쿠제가 붙인 [후기](Zur Kritik der Gewalt und andere Aufsätze, Suhrkamp, 1965)나 Günther Figal & H. Folkers eds., Zur Theorie der Gewalt und Gewaltlosigkeit bei Walter Benjamin, Fest, 1979 정도가 주목할 만한 예외다]. 하지만 데리다의 글이 발표된 이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벤야민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 중 하나로 부각되었고[중요한 연구들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Alexander Garcia-Düttmann, “The Violence of Destruction”, in Walter Benjamin: Theoretical Question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Tom Mccall, “Momentary Violence”, in Ibid.; Werner Hamacher, “Afformative Strike”, in Andrew Benjamin & Peter Osborne ed., Walter Benjamin's Philosophy: Destruction and Experience, Routledge, 1994; Beatrice Hanssen, Walter Benjamin's Other History: Of Stones, Animals, Human Beings, and Angel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idem, Critique of Violence: Between Poststructuralism and Critical Theory, Routledge, 2000; Anselm Haverkamp ed., Gewalt und Gerechtigkeit: Derrida-Benjamin, Suhrkamp, 1994;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3; Françoise Prosut, L'histoire à contretemps, Cerf, 1994; Burkhardt Lindner, “Derrida, Benjamin, Holocaust”, in Klaus Garber & Ludger Rehm ed., Global Benjamin: Internationaler Walter-Benjamin-Kongress 1992, vol. III, W. Fink, 1999;  John P. McCormick “Derrida on Law: Or, Poststructuralism Gets Serious”, Political Theory no.3, June 2001; Hent de Vries, Religion and Violenc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 이 글을 비롯한 초기 벤야민의 정치신학적 관점을 20세기 독일 (유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작업들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Pierre Bouretz, Témoins du futur: Philosophie et messianisme, Gallimard, 2003; Eric Jacobson, Metaphysics of the Profane, op. cit.; Michael Löwy, Rédemption et utopie: Le judaïsme libertaire en Europe centrale, PUF, 1988(이 책은 『법의 힘』 이전에 출간되었지만, 중요한 저서이기 때문에 병기해 둔다); Stéphane Mosès, L'ange de l'histoire: Rosenzweig, Benjamin, Scholem, Seuil, 1992; Anson Rabinbach, In the Shadow of Catastrophe: German Intellectuals Between Apocalypse and Enlightenmen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이 책이 이처럼 벤야민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단순히 벤야민의 잊혀진 글 하나를 발굴하는 데 국한하지 않고, 초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벤야민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데리다는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의 핵심 요소를 이루고 있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신화적 폭력과 신성한 폭력, 권력과 정의의 구분 및 메시아주의적 혁명론은 단지 벤야민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20세기 전반기의 좌파 및 우파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20세기의 야만적 사건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벤야민의 사상을 20세기의 사상사 및 현실 역사의 좌표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의의는 데리다 자신의 사상적 전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 등―을 배경으로 전개된 유럽 사상의 흐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개조하려는 강력한 한 가지 시도라는 점에서도 찾아야 할 것이다.  

3

         데리다는 번역자들, 특히 상이한 문자 체계를 사용하는 번역자들에게는 매우 힘겨운 도전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글쓰기 자체에서 자신의 주장을 수행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매우 보기드문 문장가여서, 논의 과정에서 중의적인 단어나 구절들을 자주 사용하고 수사학적 어법과 철학적 논증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에 데리다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철학은 제대로 알려지지도 이해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데리다를 우리말로 옮기려는 역자들의 어려움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곧 데리다를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역자들은 그의 다면적이고 섬세한 글쓰기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옮기면서 동시에 그의 철학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독자들에게 미묘한 논의 내용을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야누스적인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옮긴이가 이 과제를 온전하게 완수했다고 자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 두 개의 과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특히 후자의 과제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다소 번거롭다 싶을 만큼 여러 개의 옮긴이 주를 달았고, 그 중 몇 개는 역주로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국내에 데리다의 책들이 제대로 잘 번역되어 있다면, 데리다처럼 미묘한 철학자의 저작은 옮긴이 같은 사람이 이런저런 서툰 주석을 달기보다는 원문의 논의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또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많은 독자들이 잘못 번역된 데리다 책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에 대해 매우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음을, 그동안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따라서 또다른 오해와 그릇된 인식을 낳게 될 위험이 있겠지만, 적어도 데리다 저작의 번역에 관한 한 옮긴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독자들이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덜 수 있고 그의 철학을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식의 번역이 지닐 수밖에 없는 미학적 결함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비롯한 다른 데리다의 저작들을 번역할 경우에도,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계속 이런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물론 번역상의 잘못이나 역주에서 드러나게 될 내용상의 오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역자가 책임을 질 것이며, 기회가 되는 대로 고쳐나갈 생각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비판이 있기를 기대한다.

4

         이 책을 내면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책의 편집과 교정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보잘것 없던 원고를 말끔하게 다듬어주신 문학과 지성사 편집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을 주선해 주고 여러가지 번거로운 일을 맡아 처리해준 (김)재인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김기복, 김문수, 김은주, 목광수, 백주진, 이보경, 이선희, 이재환, 주재형, 한형식 등은 이 책과 관련된 공부 모임에 참여해서 열심히 읽고 토론해주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책을 번역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테니, 그 고마움은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야 마땅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들이 보여준 깊은 관심과 격려 덕분에 옮긴이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이 번역이 그 분들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4. 2. 18.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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