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년 전일이다.전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인 이강숙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의 주제가 무었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지금 남아 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하나는 그분이 처음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다.중학교 시절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첫 마디를 들었단다.그게 쳐보고 싶어서 학교 음악실에서 그냥 한음 한음 눌러가며 그 첫소리를 내었단다.자신이 만들어낸 '월광'의 '단단다 단단다...'하는 소리에 감동을 먹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인연이 결국 음악학자가 되게 만든 첫 사건이었다.
두번째 기억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 우리가 대개 듣는 클래식이란거.사실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한 음악의 역사에 견주어 볼때 아주 한정된 지역,한정된 시대에 나온 음악인 겁니다. 대개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바하부터 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뭐 이정도까지 듣는데.그게 유럽을 중심으로 한 300여년 정도의 음악아니겠어요.근데 음악은 인류가 생겼을 때 부터 북치고 장구치고 했으니 그 시간의 광대함에 비추어 보면 세발의 피죠."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관습적으로 수용되어 온 음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여기서 말하는 관습적 수용은 음악을 이분화 시킨 것을 말한다.즉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서구 중심적인 예술음악계가 음악의 헤게모니를 쥐고 제도권 교육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우선 클래식을 전공한 엘리트들의 대중음악에 대한 망상적 자의식과 대중음악계의 뿌리깊은 콤플렉스가 원인이 된다.이미 구조화된 음악의 위계는 서로의 배타성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이는 음악종사자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일반인들의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클래식'은 예술적이고 좀 있어보이고 좀 졸린 음악.'대중음악'은 멋지고 느낌이 확 오지만 클래식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지는 음악.이러한 무의식적 음악위계는 상호 소통불가를 통해 더욱 공고화 되어간다.
저자는 현재 한국에서 왜곡된 음악적 위계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기득권인 '예술음악'계에 혐의를 두는 듯하다. 우선 저자는 동시대의 음악,즉 대중음악이 버려진 자식에서 제 위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짜르트와 비틀즈음악 사이의 이질성과 모짜르트와 쇤베르크의 이질성 중 어떤게 더 큰가?" (단언컨대 쇤베르크와의 이질성이 크다.청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대중음악을 복원하기 위해 '음악의 합리화'란 개념을 도입한다.즉 근대음악의 역사적 흐름은 단순화,수학화 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데카르트와 바하가 수학이란 도구를 가지고 합리성의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호모포니와 평균율은 음악 역시 '근대 프로젝트'에 대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이것이 대량생산과 복제라는 테크롤로지를 만나며 20세기 대중음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음악계는 이 과정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한다.저자는 이 역사가 연속성을 띠고 있으므로 음악계에서 등한시되어온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치 인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음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이 가져온 몰이해를 해소하기 위해 새판을 짜는 개념을 동원한다.'실용음악'과 '자율음악'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음악을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하기'라는 관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우선 이러한 시도가 음악에 대한 사회적 접근과 범주의 개혁을 통한 소통이란 측면에서는 솔깃한 내용이다.하지만 의문도 생긴다.
우선 '실용음악=대중음악' 이란 것이 잘못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다.맞는 말이다.저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 클래식이란 음악들이 미사곡이나 장송곡,자장가등 실용적 목적에서 쓰였다고 말한다.이것 역시 맞는 말이다.결국 "모든 음악은 실용음악이다" 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된다.이것은 범주의 오류를 잡기위해 환원론의 오류로 빠져드는 것 처럼 보인다. 음악뿐 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필요때문이다. 성당의 벽화,초상화,도자기,각종 제례악 등등...이 모든 걸 다 '실용예술'이다 해버리면 그만이다.그렇다면 인류가 발전시키고 쌓아온 예술적 업적과 성과가 도매급으로 넘어가버린다.또 한가지가 있다.실용-자율의 구분이 대중음악의 범위를 넓히고 무시되온 대중음악의 위상을 제대로 하는데는 기여할 수 있지만 결국 이것 역시 음악을 이분화 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음악하기'라는 말을 통해 장르적 유연성을 확보한다고 믿는 듯 하다.하지만 이것 역시 음악을 도구화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있다.아름다운 벽에 걸어놓으면 국보급 작품이다.하지만 종이없을 때 화장실 벽에 걸려있으면 휴지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세한도>의 심미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는 전적으로 환경과 관계성속에서만 지배받는다.이것은 '예술은 무예술이다.' 라는 결론까지 이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의 세대는 예술-대중음악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상대적으로 편견이 없다.' 라고 희망적 입장를 밝힌다.뭐 차츰 나아지겠지 하는 소망이랄까? 일견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여기서 말하는 젊은 세대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허나 이들이 클래식에 대해 덜 주눅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아마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성숙도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들 역시 예술음악에 대한 장벽은 그대로 갖고 있다. 편견없는 그 세대들 역시 저자가 그토록 원하던 소통을 위한 준비는 조금도 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100명쯤 정원인 대학교 아무 학과에 가서 물어보라. "가장 흔한 클래식.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끝까지 다 들어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라고 .... 100명중 10명 이상이면 내가 한말을 취소할 수 있다. 예술음악이 소외받는 현상을 예술 음악자체의 한계에서만 찾는다면 현 대중음악 소비자들의 자본주의적 음악소비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