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음악과 대중 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0
최유준 지음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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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 전일이다.전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인 이강숙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의 주제가 무었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지금 남아 있는 이야기는 두가지.

 하나는 그분이 처음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된 사건이다.중학교 시절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첫 마디를 들었단다.그게 쳐보고 싶어서 학교 음악실에서 그냥 한음 한음 눌러가며 그 첫소리를 내었단다.자신이 만들어낸 '월광'의 '단단다 단단다...'하는 소리에 감동을 먹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인연이 결국 음악학자가 되게 만든 첫 사건이었다.

두번째 기억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 우리가 대개 듣는 클래식이란거.사실 인류역사와 함께 시작한 음악의 역사에 견주어 볼때 아주 한정된 지역,한정된 시대에 나온 음악인 겁니다. 대개 클래식 듣는 사람들이 바하부터 쇼스타코비치,스트라빈스키...뭐 이정도까지 듣는데.그게 유럽을 중심으로 한 300여년 정도의 음악아니겠어요.근데 음악은 인류가 생겼을 때 부터 북치고 장구치고 했으니 그 시간의 광대함에 비추어 보면 세발의 피죠." 이런 류의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관습적으로 수용되어 온 음악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여기서 말하는 관습적 수용은 음악을 이분화 시킨 것을 말한다.즉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서구 중심적인 예술음악계가 음악의 헤게모니를 쥐고 제도권 교육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우선 클래식을 전공한 엘리트들의 대중음악에 대한 망상적 자의식과 대중음악계의 뿌리깊은 콤플렉스가 원인이 된다.이미 구조화된 음악의 위계는 서로의 배타성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이는 음악종사자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일반인들의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클래식'은 예술적이고 좀 있어보이고 좀 졸린 음악.'대중음악'은 멋지고 느낌이 확 오지만 클래식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지는 음악.이러한 무의식적 음악위계는  상호 소통불가를 통해 더욱 공고화 되어간다.

저자는 현재 한국에서 왜곡된 음악적 위계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기득권인 '예술음악'계에 혐의를 두는 듯하다. 우선 저자는 동시대의 음악,즉 대중음악이 버려진 자식에서 제 위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짜르트와 비틀즈음악 사이의 이질성과 모짜르트와 쇤베르크의 이질성 중 어떤게 더 큰가?" (단언컨대 쇤베르크와의 이질성이 크다.청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대중음악을 복원하기 위해 '음악의 합리화'란 개념을 도입한다.즉 근대음악의 역사적 흐름은 단순화,수학화 라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데카르트와 바하가 수학이란  도구를 가지고 합리성의 이름으로 만나게 된다.호모포니와 평균율은 음악 역시 '근대 프로젝트'에 대응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이것이 대량생산과 복제라는 테크롤로지를 만나며 20세기 대중음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대음악계는 이 과정을 불연속적으로 파악한다.저자는 이 역사가 연속성을 띠고 있으므로 음악계에서 등한시되어온 20세기 대중음악의 가치 인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음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이 가져온 몰이해를 해소하기 위해 새판을 짜는 개념을 동원한다.'실용음악'과 '자율음악'이란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음악을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하기'라는 관계성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우선 이러한 시도가 음악에 대한 사회적 접근과 범주의 개혁을 통한 소통이란 측면에서는 솔깃한 내용이다.하지만 의문도 생긴다.

우선 '실용음악=대중음악' 이란 것이 잘못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다.맞는 말이다.저자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 클래식이란 음악들이 미사곡이나 장송곡,자장가등 실용적 목적에서 쓰였다고 말한다.이것 역시 맞는 말이다.결국 "모든 음악은 실용음악이다" 라는 결론까지 도달하게 된다.이것은 범주의 오류를 잡기위해 환원론의 오류로 빠져드는 것 처럼 보인다. 음악뿐 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필요때문이다. 성당의 벽화,초상화,도자기,각종 제례악 등등...이 모든 걸 다 '실용예술'이다 해버리면 그만이다.그렇다면 인류가 발전시키고 쌓아온 예술적 업적과 성과가 도매급으로 넘어가버린다.또 한가지가 있다.실용-자율의 구분이 대중음악의 범위를 넓히고 무시되온 대중음악의 위상을 제대로 하는데는 기여할 수 있지만 결국 이것 역시 음악을 이분화 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음악하기'라는 말을 통해 장르적 유연성을 확보한다고 믿는 듯 하다.하지만 이것 역시 음악을 도구화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있다.아름다운 벽에 걸어놓으면 국보급 작품이다.하지만 종이없을 때 화장실 벽에 걸려있으면 휴지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세한도>의 심미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는 전적으로 환경과 관계성속에서만 지배받는다.이것은 '예술은 무예술이다.' 라는 결론까지 이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의 세대는 예술-대중음악의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에 상대적으로 편견이 없다.' 라고 희망적 입장를 밝힌다.뭐 차츰 나아지겠지 하는 소망이랄까? 일견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여기서 말하는 젊은 세대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허나 이들이 클래식에 대해 덜 주눅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아마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성숙도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들 역시 예술음악에 대한 장벽은 그대로 갖고 있다. 편견없는 그 세대들 역시 저자가 그토록 원하던 소통을 위한 준비는 조금도 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100명쯤 정원인 대학교 아무 학과에 가서 물어보라. "가장 흔한 클래식.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끝까지 다 들어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라고 ....  100명중 10명 이상이면 내가 한말을 취소할 수 있다. 예술음악이 소외받는 현상을 예술 음악자체의 한계에서만 찾는다면 현 대중음악 소비자들의 자본주의적 음악소비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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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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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읽었다.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사건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실거린다.또 사건의 흐름은 상하좌우에서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미친 봄바람같다.작가는 질퍽거리는 내면여행 타령에는 시간을 쓸 틈이 없어보인다. 숨이 벅차다.그나마 친철한 작가는 스스로 변사 역할을 맡아 헐떡거리는 독자들을 잠시 쉬어가게끔 해준다. 등장인물들은 신체변형을 이루어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다.마치 조엘 피터 위트킨의 <머이브리지의 대역>이란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그러면서도 소설속 주인공들은 현실에 비릿한 숨결을 내뱉고 있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 속에 있지만 신화나 전설속에서나 나옴직한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모두 '욕망'이란  공통된 상징으로 수렴된다. 인물 자체가 가진 외형적 특징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 그다지 만나 본적 없는 설정이라 독특한 즐거움이 있다.

 .... 뱀같이 작은 눈에 쥐의 형상을 한 노파,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편이 도련님,살이 방바닥을 덮어버린 걱정,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해버리는 금복,둘이면서 하나인 쌍둥이 써커스단 자매,수백킬로를 넘는 벙어리 춘희...그외에도 또 있다.죽을 때까지 비린내를 버리지 못하는 생선장수,얼굴의 반을 잃고 파괴를 정체성으로 삼는 철가면,수만마리의 벌꿀을 몰고다니는 야수같은 노파의 딸....

이 인물들이 서로 촘촘한 관계를 맺고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기묘한 이야기이다.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뭔가 속고 있다는 혐의가 내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런데 다시금 양보하고 생각해봐도 허용의 범위 안에서 속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원래 소설이란게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니 이런 속임을 당한 듯한 느낌은 소설의 미덕에 대한 칭찬일 수 도 있다.하지만 또하나의 혐의가 있다.평론가들도 뒤에서 말한 장르의 혼성모방이다.작가 스스로도 수많은 장르의 수혜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결코 나의 피해의식이 허황된 것 만은 아니다.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안정효의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떠올려 보자.주인공의 친구 임병석 말이다.어린 시절 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한다.주인공에게 영화적 헤게모니를 빼앗기지도 않는다.폐인이 다 된 그가 건넨 시나리오.각종 평단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추켜세운다.주인공은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한 감정을 없앨 수 없다.결국 찾아낸것은 임병석이 어린시절 보았던 여러 영화들을 조금씩 짜집기를 했다는 것이다.'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뭐 어쩔것인가'가 대량복제 시대의 예술이 가진 자족적 한계이고 감상자의 슬픈 운명이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먼저 기묘한 인물들의 설정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로테스크한 일본영화를 보는 듯하다.평론가들은 전설과 신화속 인물을 거론한다.하지만 작가가 영화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는 사람임을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영화 속의 신체변형적 인물들에 혐의를 두고 싶다. 노파와 딸의 원색적인 야생성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속 마을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원한이 원초적 욕망과 결함되어 마치 귀혼이 들린 듯한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해낸다.책 말미에 어떤 평론가는 인물을 시대 상징으로 읽는다.읽는 거야 서로 지마음이니까 뭐라 할 건 없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전근대(노파)-근대(금복)-탈근대(춘희)로 구획짓는 것은 진짜 선무당 사람잡는 짜?是甄?작가 역시 어느 정도 인정은 하면서도 특유의 웃음으로 '그럼 재미없지 않나요..'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답한 것 같다. 쌍둥이 자매는 어떠한가.둘 이면서도 하나인 캐릭터는 정신분석학에서 뭐라는 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스릴러 영화의 주요소재이다.쌍둥이는 아니지만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싸이코>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와 정체성을 공유한다.쌍둥이 자매 역시 책 말미로 오면서 언니가 동생이고 동생이 언니이고 또 언니가 언니이고 동생이 동생인 상태로 평생을 살아 왔음이 밝혀진다.그렇다고 무슨 엽기적 행각을 펼친건 아니니 이상한 시선으로 볼 필요야 없다. 주인공 춘희는 조엘 피트 위트킨의 사진속 주인공보다는 훨씬 근육질의 통뼈였을 것이나 작가가 말한 '거대한 것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정서적 동일성을 같는다.영화 <빅 피쉬>에서 주인공이 동굴에서 끌어낸 거인의 뒷 모습.평생 주인공의 친구가 되준 그 거대하면서 슬픈 표정은 춘희의 얼굴과 오버랩된다.춘희의 영원한 친구인 코끼리까지 더불어 생각해본다.우리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지체아-아마 문소리가 연기했던-의 상상속에 코끼리가 등장한다.그러다 보니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까지 생각이 미친다.선천적 기형으로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거대한덩치로 인해 코끼라라 불리우는 사람.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짧은 지식을 이것 저것 섞어놓은 가당치 않은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이 또 빚지고 있는 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다.먼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대-남발안을 떠올려본다.근대화의 공간으로 수많은 욕망이 서로 교차한다.또 현실과 신화.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현실에 있는 공간인지 현실 속에 고립된 신화의 공간인지 알 수 없다.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중심무대인 마콘도가 그러했다.새롭게 철길이 들어서고 근대적 욕망들이 모여들지만 그곳은 전설과 미신이 공존한다.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에 힘을 작용하여 변화를 주도한다.후안 롤포의 <빼드로 파라모>의 공간 꼬말라는 어떠한가.아예 산자와 죽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이다. 이 소설 속 평대라는 공간은 남미 소설의 공간에 비해 신화성은 떨어진다.그렇기때문에 현실 속 인물들의 실제적 갈등과 욕망의 충돌이 실제감있게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작가의 시나리오 작가 경험은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의 합에 주도면밀하다.이 소설의 구성 역시 드라마나 시나리오의 구성에서 혜택을 입었다.어느 한 사람 헛되이 등장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딱 아귀가 맞는다.잘 만든 영화가 그렇듯이.이걸 구성의 힘이라고 한다.소설이 이런 드라마적 아귀맞춤에 순응해야 하는 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오히려 작위적이고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이런 딱떨어지는 맞춤이 가진 매력을 모른채 하긴 어렵다.

작가는 소설<고래>가 '거대한 것의 슬픔'이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했다고 한다.우연히 마주친 덩치 큰 여고생이 준 이미지였다고 한다.언젠가 나 역시 거대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작아 보이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소설 속 고래는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 나와 자신의 내장까지 바닥에 흩어내며 놓여있다.주인공 금복이 그렇게 거부하고자 했던 죽음의 이미지이다.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의지는 욕망이란 형태로 현실에서 구현된다.구전 소설에서 나옴직한 성공과 몰락,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삶. 개망초로 상징되는 죽음은 춘희라는 순수를 통해 정화된다.그녀가 쌓아 놓았던 석양을 머금은 붉은 벽돌 처럼말이다.

좋은 소설이면서도 무언가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이다.기묘한 여운이 작품과 작가에게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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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5 11:10   좋아요 0 | URL
와~굉장하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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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월령가'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시기별 농사일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노래이다. "정월이라....어쩌구 저쩌구...달도 밝고...어쩌구..."   뭐 그렇다. 10년도 훨씬 지난일이니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탓 하지는 마시라. 분필 맞아가며 배웠던 추억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다 하시는 그런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 손가락 쫙악 펴서 인터넷 검색창에 '농가 월령가' 를 치세요."

"달싸쵸"(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불렀다. 똑똑한 친구같으니..) 이 책의 형식은 '농가월령가'를 그대도 빼어박았다. 머리가 유달리 비상한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아...12장으로 구성되었군" 하신다. 그럼에도 꼭 확인하고 싶으시다. (원래 포커판에서도 지는 패를 들고도 꼭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책을 사서 펴 보면된다. 그리고 펼친 김에 읽으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니 이 아니 좋을 쏘냐. '농가월령가'가 반복되는 세시풍속을 1년 12달로 나누었다면 '달싸쵸'는 한 사람의 출생, 성장, 죽음의 기록을 12단락으로 나눈다. 거기에 각 장은 맛있는 요리로 시작된다.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레서피... 주인공 티타의 가문에 전수되어 온 멕시코 전통 요리가 주재료이다.티타 가문의 이야기가 얇게 저린 부재료로 쓰인다. 이 두 이야기가 때론 강한 불에 때론 옅은 훈제 연기에 데워져서 '달싸쵸'라는 멋진 요리 하나가 완성된다. 물론 남미 특유의 에로틱한 정서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향긋한 향신료로 미식가를 감동시킨다.

앞 문단을 다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한 공식: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멕시코 요리 + 티타가문의 가족사 + 티타의 사랑+ 섹스+ 마술적 리얼리즘+페미니즘 + x(x= 읽는 독자가 마음껏 추가해도 되는 미지수)

이 소설은 원래 영화를 만들려고 기획되었다고 한다. 결국 작가의 남편을 통해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 선입견때문인지 소설의 줄거리와 형식이 헐리우드 영화구조를 닮아 있다. 선악의 구조가  명확하다. 마마 엘레나를 중심으로 한 전통가치를 수호하는 세력과 티타와 그녀의 큰 언니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 세계의 대립이 간단명료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불행하게도 마마 엘레나는 이사벨 아엔데의 <영원의 집>에 나오는 가부장적 아버지처럼 살아 생전 가치체계의 변화를 겪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딸 로사우라를 통해 그 가치가 이어져 간다.오히려 현실성이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세대의 가치관은 죽음이란 형태로 소멸해 간다. 이 과정이 현실적이긴 하지만 조금은 판에 박힌 듯 하다. 물론 믿음직한 남미의 딸 답게 저자는 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들 삶의 변화를 형상화한다. 로사우라의 희안한 신체왜곡,마마 엘레나의 죽음과 그 영혼의 재생,죽은 나차의 영혼의 등장 등등.결론 역시 에브리 바디 해피로 끝난다.물론 이게 맘에 안드는 건 아니다.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한 것 처럼 깔끔하게 떨어진다.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뭔가 덜 닥고 나온 것같은 것 보다야 낫다. 마치 비데하고 뜨뜻한 바람으로 엉덩이 드라이 한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음식과 성의 결합이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처음 봤을때 " 음식과 성의 결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진 않았다. 식욕과 성욕이 둘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금 통속적 용어를 써서 "먹는다"(이거 아주 귀에 거슬리지만 ..이런 말들을 남자 애들이 ›?때문에 리얼리티를 위해 쓴다) 는 말이 주는 반페미니즘적 공통어 외엔 떠오르는게 없었다.사실 아직도 음식과 성이 어떠한 알레고리로 결합되는지 잘 이해하고 있진 못하다.오히려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어떤 향기가 최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그게 어떠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지 알 수는 없으나.내 상상력 부족인지 아니면 인문학적 지식의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 음식은 음식이고 성은 성이다.^^ (뭔가 좀 더 아시는 분은 멋지게 설명해달라.) 또 한가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난 전혀 관심이 없다.이유는 무슨 요리인지 본적도 없고 재료를 소개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으니 좀 답답할 뿐이다.물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다.별개의 음식들이 모여서 제3의 맛을 만들어내다니.거기에 그럴싸한 장식까지 갖추어지면 요리는 눈과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아트가된다.드라마 대장금을 봐도 이영애 만큼 멋지게 나오는게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들 아니던가.내가 남미 요리를 한 번도 먹어본적 없다는게 아쉬운 뿐이다.

남미 소설들을 그다지 많이 봤다고 할 수는 없다.하지만 이름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한두편 쯤은 본 것같다.(보르헤스는 아직 노려보고만 있다.아직 내 내공으로는) 아직 까지 남미 작가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그들의 소설에는 삶에 묻어 있는 역사가 있다.또 산자와 죽은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이 있다.이 책에는 거기에 더하여 향긋한 요리의 향기와 한 숨 놓게 하는 행복한 결말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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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2 19:03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네요^^
 
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
콜린 워드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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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니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조교누나가 있었다.타과 출신이었지만 학회일 때문에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했던 관계로 가까와 지게 되었다. 어느날 술먹는 자리, 그 누님 왈 "너 취향도 맘에 들고 우리 리틀 아나키 클럽에 들어와라?"  ".... .... ... "  . 내가 아나키란 말을 나름대로 고민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누님이 말한 '리틀 아나키'가 존재했었는지도 사실 모르겠다.내 생각에 그저 마음 맞는 몇몇사람들의 술자리 모임을 낭만적으로 펌프질한게 아닌가 싶다.행여 그 구성원이 있다손 치더라도 실제 아나키스트들은 그닥 많지 않았을 것이다.추측컨대 나름대로 사회의식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하지만 조직적 운동세력으로 편입하기 싫은 자유주의자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두가지 오해를 받고 있다.하나는 '이상주의적 폭력주의자' 라는 것(요즘도 이런 사람이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또 하나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특히 이런 오해에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도저도 아닌 자유주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오해를 가중시킨다.솔직히 이도 저도 아닌 자유주의자는 좋게 말하면 상식적 시민주의자이거나 비판적 기성체제 옹호자이다. 하지만 고전적 아나키즘이건 이 책에서 말하는 현대적 아나키즘이건 아나키즘의 혁명적인 기치와는 함께 갈 수 없다.

이 책<아나키즘 대안의 상상력>은 70년대 영국의 상황에 바탕을 둔 비교적 현대적 아나키즘 이야기이다.이 책은 아나키즘의 역사와 이론을 밝히지는 않는다.대신 전반적으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바탕을 두고 사회 각 영역에서 아니키즘의 적용을 살펴본다.이를 통해 저자는 아나키즘이 우리사회에서 어떠한 식으로 조직되고 활용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또  아나키즘이 도전하고 있는 영역과 목표로 삼고 있는 부분을 밝힘으로써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의 일면을 살필 수 있게 도와준다.저자가 밝히고 있는 아니키즘은 인간조직을 대하는 한 형태-즉 라이프스타일로써의 아나키즘-이다. 즉 나 자신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기존 시스템에 대해 도전해야하고 DIY해야 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이 인간성의 회복과 행복한 삶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반권위주의를 모토로한다. 아나키즘에서 국가는 최고의 악마이다. 대개의 아나키즘 이론가에게 공통으로 파악되는 것이 국가의 해체이다.국가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교육받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발을 양보해도 '미워도 우리 나라 아니인가.' 지난 광복절, 좌우파(?) 대규모 시위에서도 양쪽이 전부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우국충정을 불사르는데 이 싸가지없는(?) 아나키즘은 국가를 없애잖다.이러니 아니키즘이 미움을 받을 수 밖에 ...국가가 아니면 도대체 워쩌자는 것인가?  저자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지역공동체의 네트워크를 주장한다.책말미에 인용된 '피라미드보다 네트워크를' 이란 말은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반권위주의와 프르동의 동맹개념에 대한 좋은 비유이다.어쨋든 이 책에서는 스위스의 자치주들의 연대를 예로 들며 어렵기는 하지만 자치연대가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치 연대를 위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자발적 질서이다.저자가 예를 드는 것은 60년대의 유럽의 사회운동이다.반권위주의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연대가 있었던 그 기간이 네트워크의 가능성과 조직의 자율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다고 말한다.

저자가 아나키즘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눈을 돌리는 분야는 도시,교육,가족,복지이다.각 상황마다 진행역사가 다르겠지만 단순화 시켜보자면 정부를 중심으로한 중앙집권형 계획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도시계획이라는 것은 도시빈민을 도시의 바깥으로 몰아내어 도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제도 교육이란것 역시 체제의 순응적인 과목과 교육방식을 통해 제도의 영속화를 추진하는 것이다.결국 저자는 공교육의 폐지를 주장한다.이점은 70년대의 영국상황과 현재의 한국의 왜곡된 사교육시장을 감안하다면 금방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좀 더 원론적인 이해가 오히려 간섭효과를 줄여준다.복지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인데 격리라는 형식을 통해 비인간화만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이 모든 것에 대한 답 역시 분권과 자율화,공동체의 연대로 드러난다.저자는 시스템의 문제점을 헤집고 들어간 아나키스트적 대안에 대한 구체적 실험과 예를 들어 독자의 시각 교정을 유도한다.하지만 저자 역시 아나키즘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답을 제시하진 못한다.몇번쯤은 반대자들의 문제제기를 들먹이지만 부수적인 예를 들어 질문을 피해간다.사실 이 책에서 언급된 몇번의 문제제기는 아나키즘의 고전적인 논쟁에 해당한다.

흔히들 말하는 아나키즘과 볼세비키의 논쟁은 책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자와 아나키즘의 시각차,생산과 분배문제에 있어서 대규모의 생산양식하에서 자급자족적 아나키즘의 문제점,인간성향에 대한 규정문제,연대조직내의 권위화 등등...

아나키즘이 분명히 근대국가의 여러제반 문제에 대한 돌파구로써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위대한 이상주의의 깃발 아래서 인간의 삶을 개선하려는 방향성 역시 옳다고 본다.하지만 의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물론 머릿속으로 또는 글장난으로 거대한 사회주의 개혁을 하는 것보다 -어차피 그것도 요원하긴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작은 공동체에 힘을 싣는게 훨씬 실천적이다.하지만 목표는 너무 멀고 실천은 과거의 태도에 대한 절연을 전제로 한다면 대중성을 확보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결국 아나키즘은 영원한 소수자이고 끊이지 않는 비판의 샘물이고 마르지 않는 이상주의의 보고가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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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2-15 16:18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좋은 책이 나와 있었네요. 책 구입하게 되면 땡스 투도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burningham 2007-04-08 17:24   좋아요 0 | URL
좋은 리뷰네요 담아갈게요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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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라니까 근방에 있는 환자(?)들이 무슨 신앙 간증서인지 안다. 나 원 참..행복하신 분들...이런 착각을 하는 분들께 표지의 담배 꼬나문 친구가 답을 한다.'메롱' 이라고. (특정 종교에 누가 되는 말을 하면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되긴 힘들다.^^; 그래도 ^^)

젊은 작가 이기호는 소설 읽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메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작가는 기존의 소설이 가진 서사나 영혼의 울림을 위한 모종의 심각함,인위적으로 영롱한 표현을 위한 작가의 뼈빠지는 노력에 고개를 돌린다.마치 역사의 광풍 중 고갱이만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듯 술자리에서 후배세대들에게 자기 과시와 자기위안을 동시에 부풀려대는 투쟁가 세대의 '침튀김'도 이 작가에겐 없다.물론 과거로 부터 유산을 많이 수혜받지 않았다고 늘 신선한 것은 아니다.단절은 새로운 건축이 바탕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법이다.작가는 각 단편마다 새로운 문체나 전달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작가의 도래를 알린다.

우선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장점은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이 책은 1년가야 책 한두권 안 읽는 책 알레르기 환자들에게도 그냥 툭 건네주기에 부담없을 정도다.책 보는데 습관을 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읽는 행위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그러므로 장편보다는 단편,복잡하고 관념적인 서사보다는 사건이나 에피소드중심,우울한 정서보다는 밝고 딱 떨어지는 경쾌함을 선호한다.물론 이건 내 개인적으로 책 안보는 사람에게 책선물할 때 기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시비를 걸면 할 말은 없다. 이 책의 문학성을 폄훼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는 단편은 위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흔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사람을 '이야기꾼'이라고 한다.우리 소설가중에서 가장 대표적 이야기꾼이라 하면 성석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최순덕 성령충만기>로 작가 이기호 역시 이야기꾼의 그룹에 명함을 하나 파게 되었다.그러니 당연히 기존의 맹주들과 비교되는 것은 수순일 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비교는 역시 성석제와의 비교일 것이다.내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아니니 딱 잡아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개인적인 느낌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성 싶다.

우선 둘 다 소재를 잡고 해학적으로 상황과 인물을 연출하는데는 탁월하다고 생각한다.이 두 작가 모두 소설의 소재를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 낮은 곳에서 엉뚱함을 발휘하는 사람들로 선정한다.그리고 이 들의 행위와 주변 관계를 통해 인간들이 가진 가식과 욕망의 추리함,세태의 허무맹랑함을 해학적으로 풀이한다. 차이가 있다면 성석제의 인물들이 조금더 현실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이기호의 인물들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둔 듯하다.하지만 그의 글이 갖는 비현실적 상황 설정(<머리칼전언><백미러사나이>)과 허구임을,즉 소설임을-드러내는 문체(<버니><최순덕성령충만기><햄릿포에버>로 인해 주인공이 갖는 현실과의 붙박이성이 조금 떨어져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소설의 형식면에서는 많은 작품집을 낸 성석제와 이기호를 비교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성 싶다.하지만 보편적 시각으로 봤을 때 성석제가 보수적인 형태를 띤다고 보인다.이기호의 경우 특히 이 첫작품집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첫 작품<버니>는 랩 체라고 해야 할 것 같다.랩의 라임을 구사하 듯이 보도방 삼촌이 된 주인공과 보도방 출신 가수 순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한 장이 넘어 갈 때마다 랩의 후렴구 처럼 동일한 대사가 반복된다. 랩의 라임을 만드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것이 단어의 운율이다.대개 동일 음운의 반복을 기본으로 친다.그렇다 보니 <버니>를 읽는 사람들은 랩을 하듯이 리듬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버니>의 경우는 음악만 붙인다면 장편의 노래 가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랩의 정서와 랩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라임의 구성이 훌륭하다.<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과거 영한판 성경책처럼 이단 구분 형식과 각절명 넘버링을 하고 있다.이런 형식은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라는 소설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듯 하다.거기에 문체 역시 성경에서 쓰는 의고체를 쓰고 있어서 복음서의 패러디 인상을 강하게 한다.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총8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단편들은 성격상 크게 둘로 나뉜다.문체적 실험과 해학성을 높인 글과 마치 박상우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환상/그로테스크가 살아 있는 소설들이다.(<햄릭><머리칼전언><발밑으로...>) 둘 다 매력이 넘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이미지가 선명하여 후자쪽이 눌리는 듯 하다.허나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면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소설의 영역과 주제의 범위가 한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단편은<버니><햄릿포에버><백미러사나이>등이다.요즘 시의성으로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과 연계성이 있는 <백미러사나이>가 인상적이다.박대통령 장례기간에 생긴 상처가 박대통령의 눈이된다.주인공은 박대통령의 힘으로 평탄한 인생을 누려간다.하지만 결국 자신의 눈을 침범하려는 과거의 눈과 대결하게 된다.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밝힌 그의 편벽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작가는 주인공의 얼치기 운동권 참여를 통해 당시 운동권 내부의 얕음에 대해 비웃음고 있다.하지만 중심적인 풍자는 결국 아직도 자신의 눈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뒤통수에 달린눈에 의지해 역사를 과거로 돌리려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써 통렬한 풍자의 칼날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박대통령에게 자신의 눈을 맡겨버린 뒤로 뛰는 주인공 이시봉을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뒤로 뛰는 노인들에 빗댓건은 중의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결론적으로 사족하나 덧붙이자.오랜만에 즐거운 소설,한 번에 쭈욱 읽어버릴 수 있는 소설을 만났다.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신인으로서의 신선함 감각과 풍자정신에 조금 더 깊은 내공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뛰어난 감각만으로도 물론 성공적인 작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멋진 해학과 풍자정신이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부조리함을 흩고 올라온다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군에 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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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2-12 17:47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오랫만이예요.
리뷰 제목이 넘 재미있어요."담배 꼬나문 표지 폼하고는..."
정말 "메롱"하고 있는 것 같네요.ㅋㅋ
Thanks to 하고 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