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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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푸르트뱅글러의 베토벤CD를  플레이어에 올려놓는다.베를린 필을 지휘한 1943년 전시녹음이다.열악한 음질을 보상하는 주술적 마력이 있는 연주다.눈을 감고 당시의 시대상황과 연주회장의 모습을 그려본다.세상은 묵시록적 예언처럼 지옥의 한장면을 옮겨놓았다. 전쟁터의 살육,민간인들에 대한 폭격,홀로코스트의 굴뚝에서 새어나오는 인간의 냄새를 담고 있는 연기. 가스실의 비명과 절망감.....유대인들이 가스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연주회장을 때리고 있는 베토벤 소리가 겹쳐진다..연주회장에는 기득권층들이 앉아있다.대부분은 나치독일의 동조자,아니면 관망자들이다.포디엄 위에선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처럼.그날도 그의 휘날리는 손짓에 따라 강렬한 음이 창조되 듯이 지도자를 외치는 공포스런 집단의 구령소리에 인류의 가장 혐오스러운 작품이 만드어지고 있었다. 

팩스턴의 <파시즘>은 500페이지쯤 되는 두꺼운 책이다.내 경우 이런 두꺼운 책을 처음 잡으면 마치 먼길을 나서는 사람 처럼 비장해진다.마치 여행가기전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 듯 쉬이 지치지 않기 위해 마음가짐을 새로 잡는다.하지만 노련한 안내인 팩스턴을 따라 파시즘으로 여행하는 길은 결코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다.누구든 몇 장의 책장만 넘기면 오히려 처음에 단단히 먹었던 마음이 머쓱해진다.그리고 남은 파시즘 여행에 근거를 알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된다. 팩스턴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그것은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단 하나의 짧은 질문으로 요약된다. 이것 저것 주변 학문을 끌고 들어와서 파시즘을 설명하지도 않는다.20세기 초반 유럽을 휩쓸었던 그 광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파시즘"이란 단 하나의 목표를 두고 정공법 택한다.나처럼 앎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겐 이러한 직구위주의 단순한 구질이 책에서 말하고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이 노련한 투수는 직구 위주로 승부하는 대신에 만 상대타자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또 함께하고 이다.정통파 투수 팩스턴은 그 첫 투구로 파시즘의 시조가 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탄생부터 분석을 시작한다.

저자는 우선 파시즘의 탄생,정치제도 안에 뿌리내리기,권력장악,권력행사,파시즘의 급진화나 정상화 라는 다섯가지의 연대기적 구분을 통해 파시즘의 정체를 파악하자고 권한다. '파시즘 따라잡기' 를 위해 저자는 책전반에 걸쳐 독자들이 가진 몇가지 오해에 대한 정정을 요구한다.그가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저자는 우선 대중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파시즘 이미지,즉 파시즘 지도자에게로 집중되어온 "이미지로서의 파시즘" 과의 작별을 요구한다.지도자 중심 시각은 파시즘 논쟁에서 '의도주의'(즉 지도자의 의도에 의한 정치력행사)로 볼 수 있다.그 반대는 '구조조의'(파시스트정당 구성원들의 공통집약된 정치력 행사)라는 것이다.반인들은 영화의 이미지때문인지 파시즘을 일탈적인 지도자의 과대망상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이는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유동성에 대해 외면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저자는 파시즘이 고정된 하나의 정형화된 정치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파시즘 내부에서도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다양한 정치스펙트럼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한다.각 국가별로 파시즘이 발현단계에서 유사하고 그들의 문화적 장치가 유사하다.하지만 내부로 눈을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전쟁에 대한태도,기존 보수,귀족층과의 관계성 등에서 천차만별이다.저자는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중의 동의와 보수세력의 옹호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차레 강조한다. '일상적 파시즘'에서는 '대중동의'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발견인 양 행세하지만 이미 파시즘이란 요소 안에 대중동의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동물원에 동물이 기본 요소인것 처럼 파시즘에서 대중동의는 필수적이다.동물원에서 동물을 봤다고 호들갑 떨수는 없는 것이다.물론 이런 비유는 또 이런 공격을 가져올수 있다. 결국 동물원보다 동물이 핵심아니냐는 말로 말이다.즉 '파시즘이라 정치양상보다 그 안에서 동의를 해준 구성원들의 문제다'라고 주장 할 수도 있다.그렇다면 스스로 '모든게 다 사람의 일이지'라고 해버리는 것과 같다.미리 결론을 언급하자면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제기는 의미있으나 결코 <고전적 파시즘>과 용어의 혼동을 유발하는 '파시즘'이란 말을 사용해야 하나에 의문이 생긴다.

.파시 즘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정서적 상황에서 발생한 과격한 정치현상이었다.특정한 시기라는 것은 1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화에 영향을 받은 20세기 초 유럽을 말한다.특정한 사회,정서적 요이니란것은 두려움에 근거를 둔다.사회주의의 세력확정에 대한 보수층과 중간계급의 두려움,전후 정치경제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의 무력함 등이 그것이다. 이 특정한 정치현상은 또 모순적이게도 당시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였다.저자는 국가사회주의나 국가생디칼리즘이 유럽 각 국에서 탄생했던 과정을 설명한다.저마다 다른 상황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 공통된 파시즘의 정서를 이들은 공유햇다.집단우월주의,배제적폭력,사회진화론,강한 카리스마에 대한 동경,자신의 집단이 희생자가 되었다는 믿음등이다.성공한 파시스트정당들은 새롭게 떠오르는 대중정치의 시대를 간파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동원하는 포퓰리즘을 택한다. 유럽에 만연한 파시즘적 공통 정서에도 불구하고 어떤 국가는 파시즘이 정치전면으로 부각되지 못했다.저자가 파시즘의 기원만을  가지고 파시즘 일반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초기 파시즘의 형태는 당시 어디에나 있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왜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세계공황과 기존 정치체제의 무능함에 대한 반동이 가장 먼저 지적된다.자유주의 체제의 허약함을 비집고 들어온 파시즘정당들은 대중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게 된다.무솔리니의 경우 사회주의 정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농촌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혀간다.물론 여기에는 자경단 형태의  폭력단체가 중심이된다. 지역의 파시스트 우두머리들을 통합해내며 무솔리니는 전국구로 자리를 잡게된다.우선 좌파를 적으로 상정하고 기존보수세력과 종교세력의 힘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사용한 연극적인 제스처나 웅변등 대중선동의 능력 역시 중요하게 작용한다.

권력을 장악하는 단계에서 파시즘은 다른 세력들의 도움을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무솔리니나 히틀러 모두 직접적인 쿠테타로 정권을 쟁취하지 않는다.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박과 대규모 집회를 통한 압력을 통해 기존 체제에서 권력중심부로 옮겨가게 된다.당시 보수세력들은 풋내기 대중선동가들의 정치능력에 대해 경시했기 때문에 그들이 권력 핵심에 오더라도 자신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을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동형조직"이라는 파시스트정당의 독특한 이중 정치구조를 통해서 자신들의 영역을 정상영역 안으로 확장해간다.동형조직이란 것은 당과 정부기구가 2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흔히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나치친위대같은 것은 경찰조직이며 정부기구가 아니라 당조직이다.나중에는 나치가 유일당이 되므로 그 권한은 더욱 막강해진다.물론 파시즘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와 독일도 같은 행태를 보인것은 아니다.또 파시즘 지도자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난후 당내 급진파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권력의 정상화단계에 이르게 된다.

파시즘의 절정은 전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대외전쟁을 통해 파시스트들은 국민의 의도적 통합을 이루어낸다. 파시즘의 정서가 반개인주의 반 자유주의의 정서였기때문에 전쟁은 무었보다 좋은 통합의 문화적기제인 셈이다.그리고 전쟁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추방,격리 시켰던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이루어진다.대량학살 역시 동부전선을 중심으로 행하여지는데 대개가 현지의 친위대나 군인들에 의해 자행된다.히틀러가 이를 직접 지시한 명령서는 어디서도 발견된 적이 없으나 비선에서 이를 동의했다는 것은 자명해보니다.총살에 의한 대량학살은 가스실이란 도구를  창안해내며 정정을 향해 치닫는다. 파시스트들은 애초부터 비정상적 영역에 대한 배제에 익숙해있었다.외국인이나 유태인들에 대한 혐오가 그것이다.아리안족의 우수성이란 이름하게 모인 인종적 민족주의도 그 예이다. 바로 나치 우생학이란 희안한 생물학도 그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파시스트들의 반인륜적이고 배타적인 폭력성은 결국 자신들을 인류 역사의 최악의 가해자로 낙인찍게된다.결국 타인을 향했던 폭력의 칼날은 자신을 향하게 되고 자기파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저자는 결론에서 고전적 파시즘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린다.그리고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파시즘이란 용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한다.지금도 학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일상적 파시즘>이란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저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일상적 파시즘은 파시즘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집단주의,군사주의문화,가부장제,인종차별주의등이 그에 해당한다.이것은 반세기 전도 그렇고 현재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어느곳에서나 존재하는 요소이다.또 한가지 지적되는 것이 파시즘에 대한 '대중합의'의 문제이다.우선 파시스트 정권은 적의 개념을 명확히했다.좌파와 유대인,그리고 일부 파시스트 급진파들이다.일반인들의 경우 파시스트 폭력에 스스로 무관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여기에 패전국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식을 자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수렴할때 비판적 시각을 결여한 일반인들의 경우 파시스트들의 선동에 쉽게 동의를 보낼수 있을 것이다.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을 불러일으켜 국민여론을 강력하게 모으기 전까지 파시스트정당의 독일내 지지는 40% 대였다고 한다.결코 작은 수는 아니다.하지만 전폭적 지지와는 거리가 있다.파시즘 정당이 정권을 잡은후 자유주의의 비판적 영역은 제도적으로 봉쇄당한다.요즘 처럼 정보네트워크가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조작과 통제의 헤게모니는 전적으로 파시스트들에게 있었다.대부분 독재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이후 지지율은 올라갔을 것이라 유추해도 별 문제가 없다.그리고 만약 파시스트 정당이 정상화를 이루어내고 장기집권 체제로 들어갔다면 내부적인 비판과 체제전복의 여론도 있었을 것이다.그러기에 파시스트 정당은 자멸이란 형식으로 단명하고 말았지만 말이다.이러한 요소를 무시하고 대중성이 갖는 몰개성성,중우함을 파시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왠지 모난 구석이 생긴다.저자 역시 이것을 파시즘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더 중요한 것은 1차적 요소들이 정치적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본다.자유민주주의의 선두라고 하는 프랑스,미국등지에서도 이러한 파시즘의 1차요인들은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파시스트국가라고 하지 않는다.그리고 파시스트 국가가 되지도 않았다.물론 일상적 파시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파시즘의 해결만으로 파시스트적 속성의 문제가 전부해결되지 않는다라고 본다.즉 상부구조의 해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자칫 도덕주의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지만 나름대로 일리도 있는 말이다. 사실 그렇게 본다면 일상적파시즘은오히려 대중의 문화와 심리학에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물론 문화와 심리라는 것도 사회정치적 한계에 직접적 영향을 받긴한다. 앞으로도 많은 논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만약 일상적파시즘의 상상력과 사회응용력에 매력을 느껴 파시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파시즘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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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4-15 13:20   좋아요 0 | URL
'파시즘이란 정치양상보다 그 안에서 동의를 해준 구성원들의 문제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리뷰 잘 봤습니다^^

드팀전 2005-04-16 09:39   좋아요 0 | URL
시아님>고맙습니다.유명한 그림이네요.
부용님><일상적파시즘>에서 주장하는 이야기인데..이 책의 저자는 그부분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개인적으로 '대중동의'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무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말이죠.어쨋거나 탱큐...
 
사람의 향기
송기원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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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동네에 바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다.푸코의 예리한 지적처럼 '비정상'이 관리되었기 때문이다.이제 그들은 무슨 무슨 재활원,말썽많은 기도원 등등에서 산다. 정부에서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라는 프로파간다로 질러대지만 실제 상황은 유리벽을 만들고 그들이 그 안에서만 있기를 바란다.'아무 죄도 없다'는 대명사로 불리워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 역시 공범자이다.행여 장애인을 위한 건물이 자신의 주거공간 인근으로 온다고 하면 데모에 데짜도 싫어하던 이들도 빨간 두건둘러 맨다. "사람사는 동네에 혐오시설 왠말이냐" "혐오시설 결사반대 생존권을 보장하라"  ...결국 집값떨어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TV인터뷰도 하더라. " 아이들이 오고가면서 그런걸 보면 교육적으로 좋겠어요.당신 자식이라면 그렇게 내두겠어요." 

근대프로젝트의 구획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소위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은 함께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마을에 바보 형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름은 국이었다.아마 이름의 마지막 자일게다.나이는 나보도 10살정도 많았을 것이다.사실 바보는 나이가 중요치 않다.그 바보 국이는 내 친구의 형이었는데 어린시절 항상 데리고 놀았다. 늘 같은 츄리닝에 빡빡머리,그리고 코밑을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콧물,머리에 가끔씩 땜방자국이 있었다.수술 자국이라고도 했던 것 같구 어리버리 하다 어디 부딪혀서 그런거라고도 했다.어찌되었거나 내 어린시절 기억엔 그 국이 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바보 국이 형이 살아있다면 아마 40대 중반이 되었을테데.....

송기원의 소설<사람의 향기>는 내게 잊혀졌던 바보 국이를 떠오르게 했다.그의 단편 바보 유생이는 거의 직접적으로 바보 국이를 연상시켰다. 송기원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내 추측에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거의 전부 논픽션인거 같다.픽션부분은 성장한 후 우연히 고향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쪽에 몰려있을 성 싶다.실제로 만났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작가의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이 창작력의 구름을 만나 형상화된 듯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또는 그의 동네 지인들이 주연과 조연을 맡고 있다.소설의 배치상 맨 마지막에 놓인 <양순이 누님>은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작가의 가족사가 중심이 된 이 이야기들이 가지를 치면서 연작 소설<사람의 향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작가의 누님의 다난한 삶과 그의 화해를 다룬 <양순이누님>에서 양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따로 작가의 시각에서 본 양부 이야기는 <사촌아버지>라는 단편에서 다루어진다. 맨처음 나온 소설 <끝순이 누님>에서 양순이 누님의 시집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소설 마지막 <양순이누님>에서는 양순이누님의 어처구니 없어보이는 결혼이야기도 여러장면에 걸쳐 나온다. 소설 속 사람들의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뿌리가 되었던 유년시절과 고향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설 속에 송기원은 대운이란 이름의 작가로 나온다. 그의 삶의 다사다난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참 복잡하고 어려운 가족사다.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싶다. 작가는 고인이된 이문구선생과 친했다고 한다.둘 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문구 선생이 뼈대있는 양반집 출신인 반면 송기원 선생은 저자거리 장돌뱅이의 사생아였다. 이문구 선생의 가족이 역사적 비극에 의해 참담한 가족를 겪게 되는 반면 송기원 선생은 조금더 가족사 내부의 문제에 기인하다.아마 이 두분의 글 속에서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겪었던 유년기의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분은 아픈 그 기억들을 속으로 화해하고 승화하는 방법을 깨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런 분들의 글에 대해서 뭐라 논평할 자격이 없다. 내가 문학평론가라면 학문적 척도에서 뭐라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만한 위치도 아니고 그럴 학식도 내겐 없다.그냥 한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을 읽었다. 그것에 어떤 평을 달 수 있을까?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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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4-05 00:27   좋아요 0 | URL
아....국민학교 때, 같은 학년에 바보라 불리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한 학년 아래인 그애 동생은 참 공부도 잘하고 똑 소리났었는데,
그 동생이 바보라 불리던 아이를 무시하고 창피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어린 마음에...참 보기 안 좋았었거든요.
드팀전님의 글을 읽으니 그 친구가 생각나네요. 지금쯤 어데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드팀전 2005-04-05 14:57   좋아요 0 | URL
제가 어린 시절 생각하다 또 떠올랐던 사람이 "독침 할아버지"입니다. 매일 담벼락에서 해바라기 하신 할아버지셨는데 마고자를 입고 말이죠.아이들 사이에서 그 할아버지가 독침을 놓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늘 조심조심 두려움에 떨었지요.어떨때는 해바라기 하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돌아오는 내기를 하기도 했었습니다.뭐 서로의 용기를 자랑하기 위한 동네아이들의 장난이죠.할아버지 근처에 뭐 하나 던져놓고 누가 가서 주워오나...뭐 이런 거였어요.앞으로 나아가다가도 할아버지가 꿈틀하면 걸음아 날살려가 도망갔었는데...
제가 어려서 처음 본 꽃상여길이 그 독침 할아버지의 상여길 이었습니다.영화에서 본 상여길과 거의 똑같습니다.바로 상여꾼들 바로 밑에서 논길을 따라 동네 아이들과 따라 갔던 기억이 납니다.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신기했어요....
참 오래전 일인데 ....

2005-04-19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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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로 한일간에 감정이 날카롭다. 행여 일본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했다가는 돌맞기 딱 좋은 정서가 가득하다. 이런 마당에 삐딱선을 타며 일본학자의 책을 읽었다.그는 일본내 진보적 소수를 대표하는 학자이다.이 책에 실린 내용은 멀게는 1960년대부터 가깝게 90년대까지의 일본정치사와 사회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을 담고 있다. 후지따선생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일본적인 것이다.하지만 선생의 해석범위가 닿는 곳은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6,70년대라는 일본 상황을 토대로 현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와 문화적 정체,소비사회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의 무감각한 감성에 대해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비판의  칼날을 던진다. 특히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일본 사회시스템과 닮아있는 한국에서 그의 비판은 직접적으로 유효하다.

우선 책 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그의 표현은 '안락에의 예속'이다. 현대인들은 불쾌감이란 단어에 극단적인 혐오를 갖는다.이를 회피하기 위해 그들은 사물과의 상호관계를 거부하고 호의적인 것들만 받아들이다.이 안락에 대한 강박증적 추구와 안락의 파괴에 대한 우려감은 사물에 대한 돌발변수제거라는 형태를 추구한다.이는 소유라는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또 안락을 유지하기 위한 이익보호자,즉 조직에 기대게된다.이는 결국 정신의 궁핍화를 일으키고 생활속에서 안락의 전체주의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인간이 자본이나 조직에 노예가 되었다는 명제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후지따 선생이 그 원인으로 든것은 다분히 심리적인 요인이다.이 '안락에의 예속'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물론 저자 역시 안락이란 감정 상태를 나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문제는 그 요소에 대한 추구가 일방적인 것이고 무의식적이지만 광적인 추구가 되는 상태인 것이다.

대학다닐때 친구들과 미팅에 갔었다.어느 여대 교육학과 친구들이었다.무슨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진전 이야기가 나왔다.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사진전이었다.나는 그 안의 리얼리티와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내 혈압을 올리는 말을 했다. " 전 그런 사진들 별로에요.그런 사진보면 왠지 우울해지고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제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들 본 적도 거의 없구.어쨋건 전 그런 칙칙한 사진보다 좀 밝고 예쁜 사진이 좋아요."

당시에 나는 무지 열받았다.지금 다시 생각해도 좀 답답한 감은 있다.어쨋거나 그녀의 그말...물론 단순히 어린친구의 순진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요즘은 뭐가 달라졌을까?  절대 아니다. 정치적 이슈로 가지 않고 좀더 만만한 문화적 아이템으로 들어와도 된다.영화나 책,음악 등등등 진짜 대량소비되는 시대이다.다들 가장 좋아하는게 무었일까?  쉽고 편안하고 무언가 고민하게 하지 않고 인지부조화를 만들지 않고 가급적 해피앤딩이면 좋고... 한마디로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오히려 가끔 컬트나 좀 쉽지 않은 작품을 보면 옆에서 그런다 "그런걸 왜보세요.머리만 아프게" ....문화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안락에의 예속"이다. 이렇게 후지따 선생의 말처럼 '생활속의 안락이 전체주의화'되어 간다.

저자는 일본의 국가적 무비판성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한다. 무비판의 대상이었던 천황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천황제 논의의 저열함을 짚으며 메스를 들이댄다.또 일본인들의 조직에 대한 맹종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한다.자기비판이 가장 부족한 국민이 일본인이다 라고 까지 하면서 일본인들의 무비판능력을 공격한다.이것이 일본이 경제동물이란 칭호를 듣게되는 원인이고 패권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이웃국가 한국은 어떠한가? 그의 말중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면 그대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일본이 터무니없이도 독도를 우리땅이라 우긴다. 이에 대응하여 마산의회는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한다. 뭐가 다른지 내 기준으로선 이해가 안된다.방송에선 일부 일본 진보학자들이 역사적사죄의 뜻을 비쳤다는 것을 보도한다.사람들은 '그래도 일본놈 들 중에도 괜찮은 놈들도 있네' 한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연 괜찮은 한국인일 수 있을까?  인류의 위대한 이상인 보편적 가치보다 자신이 속한 가족,직장,조직,국가의 가치가-거기에 승리주의의 가치가- 우선시 된다는 점에 대해서 과연 이 책속에 나온 일본,일본인과 한국,한국인이 차이점이 생기는 것일까?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탈출구는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저자는 "보편적 이가치,보편적 이성"이란 것을 들고 있다.러셀이 자주 인용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결국 사고의 괘적은 다를지라도 몰락의 방향으로 가는 현대사회를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 가치에의 희망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후지따선생의 생각인 듯하다.그렇게 하기 위해선 타자의 것,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 것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이고 또 아나키즘에 기댄 저자의 도덕적 호소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족같지만 이 책에 알라딘 리뷰는 모두 별5개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 왈가왈부 할 수는 없다.하지만 내 경우 별5을 주기 망설여졌다. 우선 만연체의 문장이 거슬렸다.저자의 글쓰기 형태인지 아님 번역가의 능력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한 문장이 10줄이 넘어가고 중문의 형태를 띠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또 책의 어떤부분들은 지극히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글들이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동시대에 살던 일본 학자들의 언행에 대해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이 별다섯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후지따선생의 칼날같은 정신에서 나온 사회의식때문이다.하지만 본인도 인정하듯이 그의 주장은 도덕주의적 관점이 너무 많이 배어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에서 후지따선생은 관점에서 좀 멀어진듯한 인상을 많이 준다.

물론 이 책에서는 보편주의의 시각하에서  한일양국의 부정적 공통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하지만 참신성은 지금와서는 빛이 좀 바란듯하다.이 책이 동시대적 상황에 반응하는 책이라면 6,70년대에 나왔어야했다.너무 늦게 우리에게 소개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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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30 17:09   좋아요 0 | URL
'안락의 예속',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오르네요..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라고 하던데...참 쉬운 일은 아니죠^^;;

딸기 2005-09-21 23:02   좋아요 0 | URL
뒤늦게 읽었지만, 서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
 
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한때 국내 S그룹에서 1등주의를 내세운 캠페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그 광고의 부당성을 말했다.요즘처럼 인터넷 패러디가 유행했다면 당연히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이 보편화 되지 않았나 보다.스콧의 일대기는 국내 굴지의 그 잘난 그룹의 1등주의에 딴지를 거는 가장 좋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그때 광고가 뭐 그랫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스콧은 <남극일기>를 통해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 아문센보다 유명세를 탔다.

스콧과 아문센에 대한  평가는 세상을 보는 두가지 가치의 압축판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두 가치는 다른 이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그래도 가장 보편적인 시각은 '결과중심주의'와 '과정중심주의'라는 것이다.본인이 원한바는 아니지만 아문센은 결과중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저자가 간략한 브리핑을 통해 밝혔 듯이 <남극일기>가 발견된 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는 아문센보다는 스콧에게 œP아졌다.극한 상황에서 보여준 인간정신의 강인함은 남극점에 깃발 하나 꽂고 돌아온것 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아문센 입장에서는 진짜 억울한 일이다.스콧에게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정당한 방법으로 남극점 최초의 정복자가 되었음에도 폄하되었으니 말이다. 스콧이 일단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그와 그의 팀이 보여준 초인적인 인간의 모습때문이다.동료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줄 아는 대의정신,죽음앞에서도 책임을 잊지 않던 의연함,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활발한 활동들...

20세기 초반,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의 시대,단순한 자연의 정복을 넘어서는 강인한 이성의 대표적 아이콘이 스콧이었을 것이다.거기에 정치적인 힘이 작용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제국주의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영국이 한낫 바이킹의 후예에 밀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콧 대원들의 장렬한 최후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최고의 명약이 된 셈이다.

아문센과 스콧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콧 일행이 보여준 드라마는 인간정신의 구현이란 점에서는 최고의 드라마상을 받을 만하다. 내가 특히 관심이 갖던 것은 스콧 팀의 공동체 구현이다. 스콧은 자율성을 인정하는 열린 리더로 비춰진다.그는 각 대원들의 특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들의 능력을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각 대원들은 자신의 해외경험이나 전공분야에 대해 동료들에게 강의를 한다.이 강의와 토론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아나키즘에서 말하는 자발적 공동체의 전형이 되는 것이다.아문센의 기록은 아직 살펴보지 못해서 무어라 말할 수 없으나 스콧처럼 인간적인 공동체를 구현해 내지는 못했을 듯 싶다.

이만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통나무집 하나에 모든나라와 모든 지방의 경험이 다 들어있다. 잡다한 지식의 집합소가 따로 없을 정도다.

겨울의 정점을 자축하던 밤 내가 선물로 받은 것은 체리그래드의 <남극타임즈 1호>였다.그것은 데이가 제본한 조그만 책자였는데 표지가 매력적이었다.

스콧의 일대기를 무시하려는 처사는 아니다.그의 이야기는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책 <남극일기>에서 이를 찾으려는 사람은 한번쯤 고민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스콧이 직접쓴 보고서 형식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며 쓴 생생한 경험의 글이라는 측면에서는 감동적이다.하지만 드라마적 구성은 결코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 책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이라고 할 만한 오츠의 죽음 역시 간략하게 그려질 뿐이다.그렇다면 책의 대부분 내용은 무었일까? '하루 몇킬로를 갔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다.'가 주를 이룬다. 스콧이  이 글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쓴게 아니니 당연하다. 하루 하루의 일과를 간략한게 보고하다 보니 좀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은 진짜 맘에 안든다.주술관계가 안맞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여러게 발견된다.안그래도 이 책에 등장하는 남극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데 한 술 더 떠주는 셈이다.

결과는 원래의 쟁점을 정당화 시켰지만 나는 판단의 착오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 충분한 증거없이 추정되는 안전감에 의존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불신감이 남극의 종잡을 수 없는 기후가 제법 오래 떨어져 있던 동료들에게 여러가지 형태의 재난으로 타격을 입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스콧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기대해서였을까. 그가 사선에서  쓴 <남극일기>는 기대에 미치치 못했다.좀더 신중한 번역이 필요했다.또 남극의 상황과 용어들에 낯선 일반독자들을 위해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제공되었어야한다. 그래야만 스콧이 처했던 상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감동이 커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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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3-15 12:46   좋아요 0 | URL
아문센과 스콧, 다른 책에서 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성공해서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아문센이 준비 면에서 더 완벽했다고 들었는데, 남극일기 발견 후 역전이 되었다더군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극일기도 남극일기지만 대영제국의 힘과 매스컴 플레이가 더 주효한 게 아닌가 싶네요.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물론 TV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에서 이다.내게 남은 흑백화면의 잔상은 그가 무언가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장면이다.그는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민족문제가 žg혀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은 공포의 감정으로 먼저 다가온다. 학습되어온 우리의 과거 경험은 그의 극우적 주장이 현실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준다. 그런 개인의 단호한 비장미가 특정사건과 결합될 때 발생하게 될 전체주의라는 망령에 대한 경계심이다.

 미시마 유키오. 한 시대를 대표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거부받아 마땅한 망상적 극우민족주의 신봉자. 그의 소설은 그래서 한국인에게 선뜻 다가서지 않는다. 비교하자면 지금보다 어렸을 시절 열심히 읽었지만 지금은 손도 대지 않는  국내 모 소설가의 경우와 같다.나는 예술 작품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자기목적성에 대해서도 동의하는 편이다.하지만 인간에게 이성과 다르게 작동하는 정서라는 것이 있다.그런 입장에서 보면,예술과 사회의식을 사과 자르듯 반으로 나우어 한쪽씩 핥아먹을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읽었다.늦은 감이 있지만 어찌할 것인가.책과 사람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인연의 끈이 맞아야 서로 조우하는 것이다. 

소설<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극우적 정치색을 드러내기 전에 씌여진 작품이다. 실제로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그렇다면 몇년전 교토여행에서 본 금각사는 복원된 것이란 말인가? 잘은 모르겠으나 전소되었다면 그럴 확률이 높다.내가 금각사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답이 은근 슬쩍 흘러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에게 금각사는 절대미의 상징이다.그의 행동규범과 의식의 세계는 외면적으로 자율성을 얻고 있으나 내면적으로 절대미에 철저히 억압되고 있다.그가 위악적인 성적 일탈을 감행할 때도 그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절망케 하는 것은 금각사이다.내가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보아지는 부분은 바로 '억압'과 '파괴' 라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 내내 자의식과 환경사이의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물론 이 둘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주인공을 둘러싸며 자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란 것은 철저히 억압적이다. 먼저 주인공을 금각사로 보내는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권력과 권위를 쟁취하라는 손짓으로 이해된다.어머니는 부정한 관계와 이에 대한 천연덕스런 위선의 연출로 모성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공고히 한다.금각사의 주지 역시 온화함으로 가장한 세상의 위선의 세계를 보여준다.거기에 어린 시절 보았던 우이코의 죽음은 억압된 자아의 해결책으로 벚꽃처럼 일회적 파괴의 미학을 꿈꾸게 한다.그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 가시와기 역시 주인공을 혼란으로 억압하는 존재일 뿐이다.가시와기의 미에 대한 인식과 세계 인식은 허무주의적이다.미와 삶에 대한 허무의식은 주인공의 내면에 또 하나의 억압으로 남을 뿐이다.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파괴에 앞서 이 모든 억압의 꼭지점에 서있는 금각사를 대상으로 삼는다. 죽음과 파괴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사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과잉집착에서 출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 방화사건의 주인공과 달리 소설속 주인공은 생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를 표현한다. 소설의 주인공와 자신을 여러방식으로 병치시켜왔던 미시마 유키오 역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 ,즉 강한 일본에대한 의지를 점차 표나간다.

이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의 정점으로 읽힌다.소설의 주제 역시 미에 대한 탐닉과 집착이 주를 이루고 소설의 화려한 문장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유키오가 보여주고 싶었던 미란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든다.추후 그의 개인적 역사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작품에서 타나토노스의 증후를 맡는다. 자기혐오와 세상의 위선에 대해 가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학 예술은 대상의 완벽한 소멸을 상정한 순간적이고 과격한 파괴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우이코의 모습,어두운 새벽 속에서 물처럼 빛을 발하며 내 입을 잠자코 주시하던 그녀의 눈 뒤에서,타인의 세계-즉,우리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자진하여 우리들의 공범이 되며 증인이 되는 타인의 세계-를 본 것이다.타인이 모두 멸망하여야 한다.내가 정말로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들기 위하여는,세계가 멸망하여야 한다.......  <금각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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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08 15:01   좋아요 0 | URL
참 부지런하시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5-09 12:08   좋아요 0 | URL
소설의 거시적 맥락을 조망케하는 좋은 리뷰네요. 파편적 감상을 긁어모은 감상문들을 읽어봤지만 주변부만 어루만지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소설을 이해하는 좋은 힌트 많이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