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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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은 골칫덩어리다.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웃집 성질 나쁜 반장아저씨같다.과거에는 먹고 살려고 아부도 좀 하고 큰 형님 대접도 해줬다.일부 세력들은 그 와중에 반장아저씨네 편에 딱 붙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또 여론조작을 통해 미국은 자유와 민주의 수호천사라고 떠벌여주었다.마치 조선시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듯이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반장아저씨 미국을 대한민국의 상국으로 모셔놨다.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에는 한국민임에도 스스로 미국의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계,재계,종교계,인터넷계에 만연한다.대통령이 비슷한 말 한번 했다가  욕을 바가지 바가지로 먹었다.미국은 그들에게 우상이다.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예전에 잘가던 술집 주인할아버지는 "X도 미국놈 X는 약이다"라고 늘상 말했다.한국전쟁 당시 초코렛얻어먹던 습성 때문인가.그 아저씨가 그런 말을 내뱉고 있을때 거리에서 성조기는 '훨..훨 ...' 불 타고 있었다.'양키 고우 홈' '반미반제' ....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두가지 극단적 시각에 제동을 건다.둘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일면적인 요소가 있다.친미 세력들의 빅보스에 대한 과도한 충성은 더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 언급을 하지 않겠다.미국에 대한 비판적 세력의 대미인식이 지나치게 레토닉 중심이었다는 것은 자기비판을 해봐야한다.거리에서 선전선동의 구호로 반미를 외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거리에서 길게 설명해가면서 이야기할 것인가.짧고 굵게 운율에 맞춰서...거리에서야 그렇다.그런데 반미의 의식 역시 그렇게 짧고 굵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간다.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에도 미국에 대한 반대의식은 감정수준이 주류를 이룬다.신문에서 인용한 몇가지 논리에 감정을 확 싣어서 광화문에도 가고 인터넷 도배질도 한다.

"이라크 침공은 무조건 석유때문이다.부시는 한반도에 불리하다 미국 민주당 캐리가 대통령이 되야한다." 이런 단순논리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에 대한 멋진 변명 역할을 한다.저자는 책 말미에서 미국의 대외적책이 결코 바뀐적이 없다고 말한다.오히려 미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때문에 일희일비하는 대미이중성이 발생한다고 본다.미국은 독립전쟁이후 줄곧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작은 차이에 환호하고 실망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피상적 대미인식이 가져다주는 또다른 의식적 의존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미국의 시각에서 파악하길 권하다.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집단무의식으로 볼 수도 있다.저자는 우선 미국이 예외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미국이 인류사의 보편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때문에 정치,역사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그 예로 미국은 봉건제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단일한,합의된 이념에 따라 움직여왔다는 것,또 계급갈등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없었다는 점들을 들고 있다. 이 예외주의는 미국을 합의된 정치이념으로 움직이는 '합의주의 신화'라는 강박증을 만들어낸다.

이 합의주의 신화에 바탕이 되는 것이 '자유주의합의이론''공화주의 합의이론'이다.쉽게 말해 건국초기부터 미국 역사를 이끌어온 중추 사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구분이다.자유주의 합의이론에서는 로크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인의 사적자유,공화주의 합의이론에서는 고대공화,마키아벨리로 이어지는 공민의식을 중심에 둔다.여기에 저자는 미국의 지배적 정신인 프로테스탄티즘,그중에서도 캘빈주의를 더한다.이 세가지가 저자가 말하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의 구성요인이된다.저자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을 독자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즉 '미국의 보수주의''미국적 보수주의'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명시한다.앞서 말한 두 용어는 '자유주의'의 상대개념으로 하위가치를 지닌 반면 '보수적 아메리카즘'은 자유주의,공화주의,캘빈주의가 상호협력하여 융화되면서 발생하는 미국 정치의 내적 보수성을 밝히는 개념인 것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문명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으로 보는 건국 초기와 연방헌법 제정시기에 촛점을 맞추어 미국의 정치문명을 조망한다.첫번째 자유주의는 영국의 로크에 힘입은 바 크다.혁명기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중시 되었으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아담스미스의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더해진다.하지만 이 자유주의에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있었는데 그것은 도덕주의이다.이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개입축소를 지향하지만 궁극적으로 덕성의 역할 역시 중요한 것으로 본것이다.이러한 점은 공민주의적 입장을 가진 공화주의와의 결합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미국 공화주의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 영국의 타락한 정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된다.미국 정치의 근원적 회귀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공화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고대 공화주의의재현을 꿈꾼다.반평등적인 평등주의 하에서 대통령(왕)/상원(귀족)/하원(대중)의 권력분립을 추구한다.또 공민적 실천을 위해 재산권-특히 토지과 무기소유 보장을 연방헌법에 담는다.인적구성면에서 보면 연방파-코트(상업세력)-자유주의를 한축으로 하고 반연방파-컨츄리-공화주의를 한 축으로 한다.하지만 이 두가지 근본이념이 갈등만을 한 것은 아니다.포칵의 말을 인용하면 '마케아벨리적 긴장'이라고 하는 덕성과 상업,덕성과 타락,사익과 공익의 대치 속에서 인식의 절충을 이루어낸다.공화주의적 틀내에서 자유주의의 사익추구나 상업이데올로기를 용인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가지 미국 정치이념의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이 캘빈주의이다.캘빈주의 역시 공화주의적 불평등성에 정서적 가치를 제공해준다.또한 자유주의의 사익 추구를 선으로 규정함으로서 이 양자간의 조화를 가능케해준다.캘빈주의는 특히 미국인들이 가진 우월주의와 소명의식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미국은 기본적으로 '반대를 통한 정체성'확보를 특징으로 한다.캘빈주의는 반프로테스탄트,반이민을 넘어서 반미국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하는 정서적 토양을 만들어준다.캘빈주의에 바탕을 둔 천년왕국론이나 소명론은 미국을 예외적인 국가로 인정케하고 미국의 대외팽창 및 대내팽창의 도덕적 안전핀 역할을 해준다.거기에 미국의 강박적인 도덕주의 역시 과격한 배타주의 성향을 보이며 미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한몫을 한다.미국의 부시가 툭하면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 미국을 선으로 기타 반미국가를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미국인들이 가진 캘빈주의의 선악관의 투영이다.

저자는 미국의 대외관을 끝으로 책을 정리한다.미국 대외관의 근본은 사회진화론과 캘빈주의적 선악관이다.현재 미국이 다자주의라든가 고립,개입주의라든가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미국 외교의 방향을 밝히는데 이것은 전부 옮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수사조각으로 본다.미국은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확산한다는 의미에서 팽창주의를 펼쳐왔다는 것이다.즉 부시가 되었던 클린턴이 되었던 미국 외교원칙은 '팽창'이란 원칙은 불변이었다고 본다.욕먹는 부시 경우 이러한 것을 위장하는데 훨씬 미숙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미에서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틀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자기비판을 했다.기본적으로 합의주의의 융합을 통해 문제에 접근했기때문이다.개별 합의주의가 가진 환원론의 성격을 융합시켜놓았더라도 결국 합의주의 패러다임의 환원적 성격은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 책에서 모든 미국의 정치 외교의 핵심원리를 찾으려 했다면 그것 자체도 모순일 수 있다.이미 저자는 책 서두에 이 책의 방법론적 접근에 대해 밝혔고 그 안에서 충실했다고 본다.이런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미국을 움직이는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이 개별 사안에서 또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아는 것은 독자가 연구해야할 몫이다.서점에 가보면 헌팅턴부터 촘스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국관련 서적이 즐비할테니 말이다.

% 이 책은 지금 잠시 잠수하고 계신 바람구두님의 강력추천 덕에 읽었습니다.땡큐!! ..그나저나 언제복귀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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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황홀 - 윤광준의 오디오이야기
윤광준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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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처음 오디오란게 생긴 건 중학교2학년때 이다.거의 1년을 '오디오 오디오' 타령을 했다.부모님들은 늘 그렇듯이 얄팍한 조건을 -당신들은 동기유발이라 믿겠지만-달면서 오디오를 부상으로 내거셨다.조건이란건 누구가 알다시피 시험 성적이다.결과가 좋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이 가기 전에 내방엔 나만의 오디오가 생겼다.당시에 우리 반에서 자기방에 오디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 귀했다.(잘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그럴 수 도 있겠지만..) 한 30만원 돈 되는 인켈 오디오였다.내 방 한쪽 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했다.그 당시 오디오는 기술발전의 혜택을 덜 누려서 그런지 성능에 비해 좀 비대했다. 동가격대의 요즘 나오는 것들에 비하면 훨씬 많은 면적을 차지했다. 작은 내 방은 새로 들어온 오디오의 존재 하나로 꽉찬 느낌을 주었다. 그날 이후 주구장창 음악을 듣고 음반을 사모으기 시작했다.아마 내가 처음 산 LP음반이 'WHAM','들국화 1집' 이었던 것 같다.

좋은 소리는 한번 들으면 그 감흥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예전에 가끔 시내 나가서 오디오 전시장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소리를 듣곤 한 적이 있다. 이게 '후천 개벽'하는 소리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쿵쾅거린다.그리고 저걸 집에서도 듣고 싶다는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하지만 가격대를 알아보곤 맘을 접는다.눈으로는 아쉬움을 귀로는 감동의 여운을 남긴채 샵을 나가야만 했다.그러면서 다짐만 한다. '다음에 이사가면...다음에....'  결국 나에게는 하이앤드는 공간과 가격이라는 벽때문에 늘 미루어온 욕심이다.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면 매니아라는 중독성 명사에 대한 나의 회피때문이다.무슨 이유 때문인지 나는 매니아가 좋게 들리지 않는다.사람들은 매니아를 한 분야에 자신의 열정을 토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묘사한다.저자 역시 오디오 매니아로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애정을 느끼고 스스로도 프라이드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물론 매니아들에 대한 곱지 않는 시선도 있다. 대게 매니아들이 열광하는 대상에 대한 의구심때문인 듯 하다.그 기준은 무색무취한 일반인의 시각이다.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른이 다돼서 인형옷이나 입고 다니고 징그러운 거미를 집에서 키우고 세상의 온갖 나이키운동화를 모으고 하는 것들이 정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보인다.

내가 매니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매니아들이 갖는 자기영역의 구획화와 자기 전문성에 대한 스스로의 맹신때문이다.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하지만 매니아임을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분야말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자신이 취미든 전공이든 얻게된 지식이 다른 모든 것과 유기적 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결국 한우물만 열심히 파서 우물안에 개구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또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겸손은 밥먹듯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예를 들어 인라인 동호회라고 치자.거기에는 자주참가하는 주도세력이 있고 또 가끔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또 이제 갓 시작을 한사람도 있을 것이다.갓 시작한 사람이 들어오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아는가? 관심과 애정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에 대한 설이 대부분이다.이럴때 이렇게 해라 저럴땐 저렇게 해라....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어떤 잘난 이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마치 자신이 갑자기 아이가 되어버린 듯 하다.경험과 지식이 스스로를 너무 당당하게 만들어버린다.매니아들은 그러한 함정에 늘 노출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오디오에 관심이 있는 예비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쓴 듯하다.그렇다면 나는 적절한 수혜자인 셈이다.이 책을 보는 동안 좋은 기기들에 마음을 빼앗겼고 또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스스로 상상하며 즐거웠다.기계적인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수 있다.여기에 등장하는 오디오기기들은 디자인적으로도 아주 훌륭하다.그래서 많진 않지만 사진보는 즐거움도 크다.린의 턴테이블,탄노이 킹덤,골드문트 아폴로그,소누스 파베르의 과르네리오마주 스피커등등. 그냥 내부 기기들을 모두 빼버리고 장식용으로 설치해 놓아도 인테리어의 수준을 높여줄 만한 탐나는 디자인들이다.저자는 좋은 오디오가 기술적 발전 하나만 가지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오디오라는 것은 인간의 예술적감각,인문학적 감성들과 직접적 소통이 이루어진다.제작사가 이러한 점에 대한 소신있는 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이점때문에 하이앤드오디오가 일반 가전제품과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한마디로 장인정신이 없다면 오디오도 없는 셈이라는 것이다.그런 의미라면 오디오기기들은 제품이라기 보다는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다.

장인의 기가 배어있는 작품이 하이앤드의 세계이다 보니 역시 가격은 어마어마하다.저자가 이 책에 소개한 기기들,보기에 아름답고 좋아보여 하나 살까 생각하는 분들은 인터넷 한번 뒤져보시면 생각이 좀 바뀔 것이다.강남의 부자들이 선호했다는 탄노이같은 경우 대략 프론트스피커만 2천만원 수준이다.예쁘장하게 생긴 윌슨베니쉬의 서클턴테이블은 4백만원대이다.(모양진짜 예쁘다)골드문트의 풀에필로그는 2억원대의 가격이다.물론 한 브렌드에서도 가격대비 천차만별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조금 한다 하면 집전세값은 거져날릴 정도의 가격이니 취미치고는 상당히 돈이 많이 들아가는 취미이다.내가 오디오계에 아직 발을 못붙이고 있는 것도 더 좋은 소리를 찾아헤매다 거지될까봐서이다.저자는 말한다.진짜 오디오파일중 넉넉한 사람들은 없다고 다들 적금깨고 부인몰래 카드 할부하고... 나름대로 좋은소리에 대한 집념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카드 할부에 적대적인 나는 그런게 영맘에 들지 않는다.없으면 없는 선에서 멈출지 알아야하는데 소리 욕심에 삶이 부대끼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따지고 보면 그러한 소리 욕심의 대부분은 르네지라르가 예기한 '타인의 욕망''매개된 욕망'일수 있을 텐데 말이다.그러한 욕망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도 말하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진짜 맘에 안드는 얄팍함에 대해 지적하자.

저자는 오디오와 음악을 통해 삶을 배웠다고 한다.이러한 표현은 사실 매니아들의 상투적 표현방식이다.정말 그랬을 것이다.독재반대투쟁에 사람들이 실려갈때도 저자는 고개를 파묻고 음반만 돌려다고 스스로 부끄러워한다.세상모든 사람이 다 돌들고 병들고 할 필요는 없다.그냥 부끄럽다 하면 아무도 뭐라 안한다.그런데 저자는 그 부끄러움을 음악에 돌렸다. '나는 숨죽여 흐느끼며 존바에즈의 '우리승리하리라' 밥딜런의 '블로잉인더 윈드'를 들었다,나는 위대한 아티스트들로부터 자유와 희망,절망과 고독을 하나씩 배워갔다.' 이게 무슨 풀뜯어먹는 백해무익한 변명이란 말인가.내가 답답한부분은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사후 피난처로 음악을 끌고 들어가는 태도때문이다.흔히들 예술가들이나 예술가인 척 하는 사람들인 정치적 변동기에 자주 취하는 방식이다.아닌가? "세상이 혼란할때 음악과 미술의 한차원 높은 세계에 계시다 세상이 안정되면 그때 나는 다른세계에 잠시 가있어서 ...잘 모르고...좀 미안하기도 하구...그러네. 이거 아닌가?"  내가 무슨 극렬행동가는 아니다.단 매니아들이 -특히 예술적 매니아-이 예술을 등에 없고 둘러내는 변명에 자다가 뺨맞는 예술이 불쌍해서 그런 소리한번 해본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예술을 등에 없은 저자의 얇팍한 상상력은 이런 형태의 글을 남긴다.좋은 CD플레이어가 들어왔다는 가게주인의 이야기에 오디오가게로 가면서 하는 말이다.

"오디오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착잡하다.아니 즐겁다.조금 후면 성공한 뉴욕의 여피족들이 사용한다는 '와디아'CD플레이어가 내 것이 된다.영화에서 보았던, 마천루의 야경이 창 밖에 비치는 푸른 색조의 세련되 거실에 놓여 있던 바로 그 기종이다.갑자기 내가 그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선 기분이 든다."

좋으셨을 것 같다.그 훌륭하신 뉴욕의 여피님들과 어렵사리 같은 반열에 오르셨으니.!!  생각은 저정도 수준의 경박함이나 오디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저자다. 나는 매니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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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7-19 18:05   좋아요 0 | URL
아, 드팀전님... 제가 어찌 당신의 손을 들어드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보르헤스 2006-06-10 16:03   좋아요 0 | URL
역시 드팀전님! 기대를 져버리시지 않는군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하더군요. 오디오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던가요? 그의 오디오 찬양엔 음악의 자리는 없더군요. 음향만이 있을 뿐이지. 하이엔드 오디오에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돈을 쓰느니 차라리 연주회나 음악회에 한번이라도 더 가는게 나을듯 합니다. 그가 그렇게나 추구하려는 진정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말이죠 ^^
 
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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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혼자 길을 걷다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름하여 '도인'들....  연인이나 친구들 처럼 우루루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겐 잘 접근하지 않는다.좀 어수룩해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보이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   "도에 관심있으세요?"...  대개는 무시하면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끔 은근과 끈기가 힘인 사람들이 있다.이런 사람들은 몇 십미터를 졸졸 따라다닌다.언젠가 그런 사람을 한 번 만났다. 어떻게 떨칠까 고민하다 내가 꺼낸 말..."저 맑시스트거든요.아시죠..빨갱이?"  .... 그 영업사원인지 도인인지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나 역시 '이거 효과가 생각보다 대단한데..'라고 느끼며 내 잔머리의 영특함을 스스로 대견해 했다.그리고 내린 결론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호환마마,불법 포르노 보다 더 무서운건 빨갱이구나.. 도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군."

나는 옛글을 좋아하는 편이다.노자의 도덕경이란 걸 처음 읽었던 것이 대학교 1학년때였다.사실 뭐 잘 알고 본 것은 아니다.그후에도 논어니 맹자,채근담같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가끔 한시도 뒤적이면서 앞뒤로 오고가며 해석도 해봤다.나름대로 재미있었다.일단 옛 글은 압축적인 멋이 있다.또 나름대로 사리에도 맞는 말들이고...거기에 속물적인 정서도 하나 작용했다.어디가서 그런데 나온 글 하나 외워서 이야기하면 좌중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그걸써먹는 나도 유치하지만 또 거기에 "와...." 하는 인간들도 다 똑같다.

요즘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세상사로 인해 감정이 울렁울렁 대면 옛글을 하나 찾아 읽곤한다.주로 법구경이나 숫파니파타를 본다.이 책 <장자> 역시 앞으로 그 목록에 들어갈 것 같다. <장자>의 내용이 선불교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진리가 서로 닿아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히 유사했다. 우선 <장자>의 첫구절은 동물이야기로 시작한다.그 유명한 물고기 곤과 새 붕에 대한 이야기이다.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 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세상사의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로만 이해된다만 정말 아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는 물고기와 새의 변화로 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우화와 풍자,반어를 통해 현실의 한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우리가 이것 밖에 없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이 '우물 속 세상'이므로 마음을 수련하여 대양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 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라"는 것이다.<장자>제 2편 남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것이다. 본문에는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고 하고 있다.여기서 자신이라는 것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기타 모든 환경까지 포함되는 듯하다.즉 나와 나를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도는 버리는 것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일게다.서양 철학에서 근대의 자아론이  탈자아론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꿰하는데 <장자>에서는 이미 그것을 오래전에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니체,가깝게는 들뢰즈 이런 사람들의 말 속에 가끔 씩 선불교와 노장의 사상이 묻어나는것도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 서있는 듯하다.광고에서도 자주 들려지는 말들은 자아정체에 대한 확실한 각인이다.흔히들 하는 '나는 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뭐 결국 소비주체로 당당히 서서 열심히 사서 쓰란 이야기인데도 괜히 그럴싸해보인다.특히 에고가 강한 젊은층에게 이런 메시지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장자>는 "내가 과연 나일까"하는 비판적 넘어섬을 또 넘어서라고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일 것이다.자아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역시 결국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일 뿐 진정한 넘어섬은 '오상아'-즉 나를 잃어버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한뿌리에서 나옴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다.<장자>에서는 마음 굶기기-즉 심재-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라고 일갈한다.비교종교학자 답게 역자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다."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것이나 마음을 굶기는 것이나 같은 말일 게다.여기서 말하는 이분법이란 것이 '너는 여당 나는 야당'하는 것이 아니다.남과 여,기쁨과 슬픔,삶과 죽음 ....등등등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요인들의 흐름을 분별하여 보는 것을 삼가하라는 뜻이다.선악미추 생사 고락이 모두 평등한 가치가 된다.선불교에서 역시 인간의식과 감각의 위계를 없애라라고 말한다.어디서 주워들은 말 중에 "양단" 이란 말이 있다.양쪽을 모두 자르라..라는 그런 말이다.여기서 양쪽이란 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뜻한다.<장자>의 유명한 우화중 하나는 장자의 아내 장례식 대목이다.장례식에서 북치고 장구친 장자이야기이다.삶과 죽음을 같은 가치  equal value로 본다면 사실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굳이 논리적으로도 어긋남이 없다.몇년전 책이 소개되어 큰 감동을 주었던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이들은 이러면 무슨 삶의 재미가 있을 것이냐고 반문한다.나 역시 한편으로 그말에 동의 하기도 하지만 장자가 말한바는 그런 1차원적인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세상사의 즐거움을 알고 관계의 유용함도 깨닫고 충만한 삶을 누리되 거기에 연연하여 큰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 중 큰 오해를 받는 것중 하나는 정치사상이다.장자의 사상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니 연연해 하지말라는 것으로 파악했다.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은 있는대로....즉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이런 무식한 말을 하신분들은 내가 대학다닐때 열심히 운동하시던 선배들이다.그들 역시 뭐 알고 말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고 몇몇 책들에서 주워들은 걸 게다.20대초반의 어리숙함을 지금와서 욕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는가.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경솔한 제단은 아니었나 싶다.장자의 사상은 다 소용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니다.유가의 가르침에 비해 적극성이 떨어지는 (특히 맹자)것은 사실이나 장자는 정치의 다른 차원을 지적하고 있다.큰 틀에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 안으로의 혁명을 주창한다.장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수신에 우선을 둔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다스림으로 본다. 이런 말이 나온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겟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없애는 것 그것뿐입니다."

무위의 정치이며 작은 정치이고 보이지 않는 정치이다.쉬워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위대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었다.한자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아니니 더욱 용이했다.내용중 일부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그중 일부는 이미 나의 세계관의 한장을 구성하고 잇는 것도 있다.하지만 나는 책을 읽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것과 같다.내가 읽고 느낀것은 글이지 <장자>의 세계가 아니다.내가 만약 열심히 닦아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정도쯤 된다면 그때쯤 <장자> 한번쯤 읽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몇가지 잡념이 떠올라서 마지막에 쓴다.

내 생각에 결국<장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결국 "행"의 문제가 아닐까한다.장자가 실행의 문제를 딱히 지적한 바는 없다.하지만 모든 철학이나 사상의 중심은 행동이다.수많은 좋은 지혜와 세상을 꾀는 깨달음을 얻어도 자신의 손발이 그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또 한가지 생각은 이런류의 책에 감화 감동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요즘<장자>류의 책이나선불교,명상론,인도기행등의 책이 인기있다.하지만 이는 대중소비적인 '선사상''무위사상'이다. 여전히 자신의 삶은 분별과 자신의 이기로 가득차 있으면서 퇴근후에 도장에서 명상하고 마음을 비운다고 무었이 비워질 지 모른다.물론 아예 생각한번 해보지 않는 것보다야 훌륭하지만 취미가 되어버린 '도'라는 것이 과연 선인들이 찾던 그 '선'이고 '도'인지 모르겠다.그리고 가끔 만날 수 있는 어설픈 범우주적 세계관 역시 삽질한다고 생각한다.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는 별 말 못하고 또는 개입을 하려하지 않으며,늘 자신은 한차원 위를 바라본다는 듯 한 범우주론적 세계인들은 우습다.그런 고매한 분들에게 지상의 어설픈 시인 김수영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했다.스스로의 비겁을 형이상학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은 고귀한 가르침으로 곡학아세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분들이 뭔가 알고 있다해도 실제 아는 게 없을 수도 있다.불교에서는 스님들이 화두를 앉고 몇년수행 하다보면 어떤 스님들은 큰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큰 스님을 찾아온다고 한다.이제 다 알았으니 내려가겠다고.본인들은 진짜라고 믿지만 그게 아닌가보다.몇년 절간수행도 그러한데 그까짓  책 몇권보고 마치 세상사 부질없다고 하는 위인들도 경계해야한다. 전부 키치다.키치적 작가들에 대한 키치적 만족이며 키치적 취미에 대한 키치적 낭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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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5-05-16 17:19   좋아요 0 | URL
신영복 님이 쓰신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 " 읽고 있는데..동양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물이 샘솟는 깊고 맑은 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 속이 시원해 지거든요. 장자도 읽고 싶었는데 ... 드팀전님 리뷰를 보니 더더욱 간절해 지네요.

분홍달 2005-05-17 08:08   좋아요 0 | URL
그 어떤 훌륭한 생각이나 사상도, 행이 따르지 못하면 공허한 일이겠죠...리뷰 잘 봤습니당^^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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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아웃사이더이다.그가 사회학계에서 받는 대접을 봐도 그렇고 그가 연구한 분야를 봐도 그러하다.사회학계의 이단아, 게오르그 짐멜의 이름이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복원된 것은 유명한 <돈의 철학>이라는 책 때문이다.그는 돈을 연구함으로써 일상의 소소한 영역이 어떻게 삶을 구성하는지 총체적으로 알고자 했다.짐멜은 화폐를 인간의 삶이 산출한 삶 이상의 것으로 파악한다.화폐를 통해 인간은 훨씬 넓은 자유를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이외에도 짐멜이 다룬 주제는 유행,여행,식사,편지,장신구등 비사회학적인 것들이다.물론 현재는 이러한 주제들인 문화연구란 이름으로 사회학적,미학적 범주에 포함되어 제법 깊이 있는 연구성과물드이 나오고 있다.하지만 20세기 초반에 시도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기획이었을 것이다.같은해에 나온 프로이트의 <꿈의기원>과 짐멜의 <돈의 철학>은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 양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원지가 된다.물론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책이 가져다준 충격에 짐멜은 자리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한참 뒤에나 관심을 갖게 되자만 말이다.어쨋거나 짐멜과 비교할 때 베버와 맑스로 이어지는 사회학의 전통은 사회의 큰 틀을 제단하는 작업이었다.반면 짐멜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온 일상의 영역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상의 영역이 재발견됨고 동시에 짐멜의 복원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짐멜의 일상성에 대한  선구적 접근이 미시사를 중심으로 현대성을 성찰하는데 그 사상적 기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도시의 삶에 대한 분석을 잠깐 살펴보자.짐멜은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으로 본다.이는 외적 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이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대도시의 삶은 화폐경제와 이성의 지배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화폐가 현상의 개별성에 관심이 없듯이 이성적 관계 역시 객관적으로 평가가능한 관계에만 촛점을 맞출 뿐이다.짐멜은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현상을 '둔감함'과 '속내감추기'라고 말한다.둔감함은 사물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않고 사물 자체를 공허하게 받아들인다.속내감추기 역시 무수한 관계에 대한 내적반응을 피하기 위한 독특한 정서적 양식이다.반면 대도시는 화페 교역의 중심이며 자유의 상징이다.결국 이를 바탕으로 대도시인들은 질적 특수화를 추진한다.개인주의에 대한 선망이다.객관적인 문화보다는 주관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이 대도시인들에게 자리잡는다.이러한 짐멜의 분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물론 미디어의 등장이 문화의 평준화에 일정정도 기여햇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공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특수성과 질적 개인주의의 발현에 대한 지적은 옮바르다.대도시의 문화는 점차 질적 개인주의의 강화로 치닫는다.미디어와 활발한 외국문화와의 교류가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도시인들은 자신을 평등화속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색다른 유행,새다른 음악,색다른 음식....이 모든 것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또 이에 대한 요구가 강한 대도시인들의 개인화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짐멜의 이야기는 식사쪽으로 이어진다.밥은 밥이지 거기 또 무슨 사회학이냐 하시 분도 있지만 재미있는 분석이 많다.우선 식사가 같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혼자 먹으면 성질나빠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시피 식사는 공동행위이다.이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공동 식사의 신화는 같은 것을 먹고 마심으로서 공동의 피와 살을 만든다는 원시적인 표상으로 읽힌다.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식사라는 것이 자기 접시 위의 것만 먹는 이기적 배타행위라는 것이 은폐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식탁공동체에 대한 금지조항들이 역사적으로 등장한다.계급을 구분하고 이방인을 제외시키며 내적 확실성을 다지는 효과를 거둔다.또 공동 식사는 시간의 규칙성,식사 방법의 표준화,개인적 욕구의 자제등의 요소를 부과한다.결국 식사의 미학화는 유기체적 삶의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매우 보편적인 욕구충족의 행동을 양식화시킨다.이는 매개된 사회하를 통해서 먹는 것의 단순한 자연주의가 극복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식사가 뭐이리 복잡할 까 생각할 수 도 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식사 형태가 거의 같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한 사회는 한 가지 형태의 식사양식을 가지고 있다.우리나라는 대개(딴지거는 분들은 매일 포크를 쓰시겟으나) 밥숟가락 하나와 젓가락 한짝이 중심이된다.짐멜도 직적 해듯이 접시들은 대개 좌우대칭 형태를 유지하고 색채는 가급적 단순화한다.그냥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식사 행위에도 오랜시간에 걸친 표준화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에는 이것 외에도 얼굴의 미학적 의미,장신구가 가진 심리학적 요소,스타일의 문제,사회적 신의가 가진 관계성의 문제,비밀이나 감사의 사회학적 접근,우리 오감이 가진 특수성등이 사회학적 시각으로 다루어진다.최근에는 문화연구에서 조금더 실제감있게 다루는 주제들이다.오히려 최근의 연구가 짐멜의 형이상학적 글쓰기에 비해 훨씬 쉽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짐멜이 이 책을 풀어가는 방식은 형식논리에 근거를 두고 대상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촛점을 맞춘다.그리고 그 대상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다.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그리고 르페브르처럼 일상이 자본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식민화되어버린 관계성을 밝히지도 못한다.이 책은 개별 영역에 대한 작은 산문형식이기에 더욱 그렇다.하지만 일상의 영역이 철학의 대상이 되는 시점에서 그 출발점을 알린 위대한 아웃사이더의 글을 보고 싶은 분이라면 한번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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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5-08 15:4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겠는데요. 식사에 대한 고찰.
우리나라 드라마엔 정말 밥먹는 장면 많이 나오쟎아요.
여기에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드팀전 2005-05-10 10:15   좋아요 0 | URL
TT 글쎄요.제 생각에...근대화이후 해체된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생각해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는 식사 시간외에는 없습니다.그것도 장성한 자녀가 있는 경우 한두명은 이러저런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하지만 식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그나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인 듯합니다.드라마 작가가 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그랬든 아니면 상투적으로 그랬던간에 그의 의식 한 구석에 그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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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글렌 굴드에 큰 애정이 없다.그의 연주가 형편없다거나 그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그에 대한 호불의 평가는 지극히 상대적 평가이다.군웅이 할거하는 피아니스트계에는 글렌 굴드 말고도 난다 긴다는 피아니스트들이 수두룩하다.카리스마와 장난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폭풍과 사색의 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변덕와 신비함의 아루트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섬세함과 애절함의 디누 리파티,냉철함과 선명함의 마우리치오 폴리니.....등등. 글렌 굴드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애정은 너무 다극화되어 있다.글렌 굴드가 동시대 선후배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내 눈밖에 있었던 이유는 그의 레퍼토리가 가진 한계성도 한 몫을 했다.글렌 굴드의 레퍼토리는 저자도 말한 가장 비파아노적인 곡들이다.바하,슈트라우스,바그너등 ...물론 그도 브람스도 연주하고 리스트도 연주하였다.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종목은 바하이다.글렌 굴드가 활약하던 시대의 피아니스트들의 레퍼토리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요즘 피아니스트들은 레퍼토리 확장에 아무래도 좀더 신중한 듯 하다.뭐 장단점이 있겠지.어쨋든 과거 마당발 피아니스들은 -예를 들자면빌헬름 켐프,클라우디오 아라우,스비아토 슬라브 리히터- 바하부터 베토벤,쇼팽, 그리고 후기낭만주의 곡들까지 다루었다.글렌 굴드는 피아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고전과 낭만주의 시대곡들을 혐오했다.그러니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훌쩍 건너뛰어 베르크로 넘어온다.내공 있는 멀티플레이어들이 중원에 가득했는데 몇가지 비기로 무장한 글렌 굴드가 내게 주목받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는 너무도 매력적이다.중원의 맹주가 될 수는 없었지만 영향력 있는 봉건영주가 되기엔 충분했다.저자가 호로비츠와 굴드를 비교해 놓은 것을 보면 재미있다.둘은 스타일면에서는 확연이 달랐지만 분명히 공통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원래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저자는 글렌 굴드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다.어쨋든 글렌 굴드의 비기는 다음과 같다.논레가토로 무장한 무념한 음색,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녹음 연주 중에 들리는 흥얼거림.강함만이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글렌굴드도 나름대로 충분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연주자이다다.단 그의 카리스마는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가진 카리스마라기 보다는 신비주의적 종교 지도자가 가진 그것과 비슷하다. 

이 책은 기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전기이다.하지만 그의 외면적 삶에 대한 전기가 아니어서 독특하다.오히려 그의 예술적이고 내면적인 삶에 대한 보고서와 같다.이 책에 등장하는 글렌 굴드의 일대기나 그의 행적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모든 내용이 현재의 글렌 굴드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또는 음악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모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렇듯이 글렌 굴드 역시 어려서부터 남달랐다.어린 글렌 굴드에게 동년배들이 관심을 갖는 유아기적 장난과 성적 호기심들은 다른 나라의 이야기였다.글렌은 항상 그 넘어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소년이었다고 한다.그의 이러한 이미지가 책 전반에 걸쳐 글렌 굴드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를 싫어한 사람,음악가이면서 음악의 뒤를 보려고 했던 사람.그의 기행 속에 가려진 글렌의 내면에 대해 저자는 진지한 애정을 가지고 쫓아간다.글렌 굴드에 대한 시류의 평가는 괴팍하고 기벽이 있는 천재피아니스이다.대외적 관계의 미숙과 결벽증적인 태도는 그를 기인이라는 유리병속에 가두어 놓는다.이는 사실 글렌 굴드가 스스로 원했던 방식이기도 하다.글렌 굴드는 대중과의 소통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그가 30대에 콘서트를 그만 두고 스튜디오에 박혀버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대중들의 이미지속에 글렌 굴드가 '유리병속 피아니스트'가 된 것은 그의 무취색 피아노 음색과 더불어 그의 대중과의 단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대중들은 대게 여기서 생각을 접고 그의 기벽만을 쫓는다.저자가 뛰어난 점은 글렌 굴드의 그러한 행동에 이유를 애정을 가지고 쫓는다는 것이다.

글렌 굴드는 수도자다.대개 피아니스트들이 수도자와 같은 정서상태를 갖는 다고 한다.물론 아르투르루빈슈타인처럼 낙천적인 스타일도 있지만 말이다.어떤 이에게 음악은 신과도 같다.그 아래 종사하는 음악가는 사제가 될 수 밖에 없.그에겐 악보와  피아노,그리고 자신의 예지력외엔 아무런 것도 없다.링위에 오른 권투선수는 외롭다고 한다.링 안에서는 자신의 예감외엔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렌 굴드는 스스로를  세상으로 부터 단절시킴으로써 음악이란 신의 얼굴을 보려고 한다.그의 연주에서는 과도한 액션이나 대중을 현혹시킬 요소들이 들어 있지 않다.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고 어떻게 보면 소박하다.페달을 자제하기 때문에 울림자체도 다른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큰 편이 아니다.리히터나 길레스,호로비츠의 광풍같은 연주는 대중을의 환호를 이끌기 쉽다.하지만 그 폭죽같은 연주의 장쾌함 만이 음악의 길은 아닐 것이다.장쾌함과 호방함에만 현혹되면-물론 위의 연주자들이 이런 미덕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음악의 깊은 세밀함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글렌 굴드는 화려함대신 자신의 유니크한 스타일로 소박함이 가진 한계를 넘어선다.

글렌 굴드가 고립과 차가움을 통한 길을 통해 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최근의 연구는 바흐 건반음악의 연주에 있어 피아노는 바흐미학의 전범을 살릴 수 없다고 한다.정격연주가들은 현대쳄발로의 부박함을 없앤 개량 쳄발로와 복원한 클라브생으로 바흐 음악을 연주한다.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연주보다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음악을 더 좋아한다.한참 바흐 음악에 몰입하고 있는 페라이어나 쉬프의 낭만적인 연주도 좋다.하지만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의 최고봉은 역시 글렌 굴드이다.그가 없었다면 바흐의 건반음악이 얼마나 따분해졌을까....

이 책을 보는 동안 줄 곧 글렌 굴드의 음반을 들었다.골든베르크 변주곡,파르티타,토카타,스카를라티,하이든그리고 편집음반에 있는 브람스의 간주곡과 생소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피아노 소나타....이 책을 놓으며 글렌 굴드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애정이 생겼음을 느꼇다.알면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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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