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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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평집이다.서평에 대해 서평을 쓰려니고 하니 녹녹치 않다.저자가 읽은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인지 아님 저자의 접근에 대해 뜯어볼껀지 마구 헛갈린다.우선 <인물과 사상>을 즐겨 읽었던 사람들은  이 책을 따로 구입해서 볼 필요가 없다.<인물과 사상>에 이미 연재되었던 글들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나처럼 <인물과 사상>에 시큰둥 해진 사람이라면 문제될 거 없다. 이 책은 두가지 점에서 유용하다.하나는 우리사회를 바로보는 시각에 대한 쟁점거리를 제시하는 책으로 또 하나는 최근에 나온 읽을 만한 인문사회과학 책들에 대한 안내서로 아주 훌륭하다.저자의 글쓰기도 아주 일목요연하다.덕분에 읽기 쉽다.지은이는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뒤에 말하겠지만)각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다.지나친 현학과 학문적 용어들도 가급적 자제한다.적당한 직접 인용과 또 적절한 자기시각. 책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접근과 긍정적 평가의 밸런스.대중적인 인문학 리뷰로써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한 글도 쉽게 찾아지진 않을 성싶다.대게 그냥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나의 리뷰와는 천지차이다.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과 내 꼴리는 데로 쓰는 리뷰가 다르기는 할 터.물론 나도 이처럼-최소한 인용과 서술은 구분하도록-써볼까 생각했었다.근데 그러려니 의외로 귀찮다.알라딘의 어떤 님들은 직업적 윤리의식으로 인해 인용문들을 찾아가면서 쓰시던데 그 정성이 대단한다. 직장에서 글쓰면서 책꺼내놓고 밑줄찾아가며 쓰기란 쉽지 않다. 나의 경우 앞으로도 위와 같은 태도는  지향해야하는 목표로만 남겨놓고 나의 현실에 충실한,숨어서 글쓰기를 당분간은 계속하련다.

기억을 더듬어... 지은이가 이 서평집을 묶을 때 큰 틀로 잡은 것들을 생각해본다.1장은 민족,민족주의와 탈민족족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2장은 근대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책들을 다룬다.3장은 현실정치와 연결을 찾는듯 한데 사실 1,2장에 비해 하나로 묶기 난해한 글들이다.저자가 서평작업을 한 개별 책들은 읽어 보고 싶은 욕심이 들게하는 매력적인 책들이다.물론 읽다가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을 만나면 '그 책에서 그랬었나...기억이 나는 듯 하네' 하면서 되새김질과 기억력상실의 아픔을 스스로 달랬다.앞으로 이 책에 소개된 몇몇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하나씩 읽기로 하고 저자의 책읽기의 큰 잣대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우선 '민족주의'문제다. 저자는 '민족은 가상의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서구적 보편성을 거부하고 개별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탈민족주의자들의 '민족=근대화산물'이라는 것은 한때 유행처럼 일컫어졌다.서중석 교수의 글을 빌어 지은이가 주장하는 바는 한민족이 가진 민족형성 근거가 서구의 봉건제 해체후 발생한 가상의 공동체와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즉 한민족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언어,생활,역사를 공유하는 실체로서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물론 이러한 공동체가 근대적 민족은 아니라는 것도 인용한다.민족의 개별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탈민족주의의 도발적 문제제기에 안정감을 주긴 한다.이문제는 서구중심주의와도 맥을 같이한다.저자가 보기에 학계를 시끄럽게 했던 탈근대론,탈민족론등은 서구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데 기인한다.저자가 인용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 김용옥의 탈서구중심논의는 학계의 서구중심적 학문관에 대한 대척점이다.물론 저자 역시 김용옥의 논의가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저자의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에 일단 동의한다.서구와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거친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단계론적 역사관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많다.또한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민족,탈근대 논쟁이 과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하지만 늘 그렇듯이 햇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다.70년대 독재정권은 조국 근대화란 이름으로 사회을 일사분란한 병영체제로 만들어왔다.80년대 역시 그 여운이 남아있었다.하지만 민주화의 흐름을 거부할수는 없는 법.80년대는 그 대항세력이 나름대로 자리를잡고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이루어내었다.거의 50년에 걸친 거대담론들은 주로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봉사였다.독재도 민족과 국가를 내세웠고 그 반대세력도 민족과 국가를 내세웠다.90년대의 탈민족 탈근대화론이 과잉되었다고는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의 과도한 눌림에 비하면 그다지 큰 영향을 아니었을 것이다.저자는 탈근대론을 자주 현실적 토대를 외면한 논의라고 말한다.특히 개혁세력에게 비판의 포문을 열고 극우세력에 야합한다고 비난한다.하지만 저자의 접근법은 지나치게 직선적이다.임지현을 필두로 '당대비평'세력이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고 그들의 논의가 가진 현실적합성까지 무시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 싶다.이런 식의 접근은 전선을 명확히하지만 또 이문열같은 사람에게 '너희들은 이분법적이다'라는 비난을 받기에도 딱 좋은 듯 하다.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것은 아니지만 ... 가끔 저자의 논의에는 탈근대론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탈근대론자들의 정치적 행태를 비난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갈때가 있다.

저자는 학계를 장악했던 탈근대,탈민족론의 열풍을 마치 일반 사회에서도 열풍이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불행하게도 일반인들의 역사관이나 의식 상태는 근대프로젝트와 민족의식에 똘똘 뭉쳐져있다.그 밖으로 벗어나면 천길 낭떠러지가 있거나 매국노 반민족자가 되는 지 아는 사람이 훨씬 많다.물론 학계에서야 탈민족,탈근대가 훨씬 기를 펴고 있겠지만.자 그렇다면 똘똘뭉쳐진 근대와 근대적 사회에 돌을 한번 던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학계에서 너무 과잉논의되었다고 욕을 먹어도 일반 사회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밖에 안된것 아닌가 싶다.아무리 일상적 파시즘이니 뭐니 외쳐대도 그게 왜 폭력인지 이해를 못하는게 근대화의 기억에 똘똘뭉쳐진 일반의 의식이다. 탈근대론이 현실에 등을 걸치고 있지 못한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현실에 약간 발을 떼고도 짚어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저자의 시각중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박노자가 지적했던 '분단환원론''정치환원론'이다.저자는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분단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거기까진 이해한다만 마치 분단이 해결되면 다 될 것 같은 태도는 80년대 대학동아리에서만 들어보던 이야기이다.통일문제에서 상대적진보성을 가진 국민의 정부 이후 대북관계의 헤게모니는 관 주도로 돌아가고 있다.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는 커졌지만 통일에 대한 환상 역시 멀어졌다.통일의 과정이란 것이 이렇듯 하나 하나 이루어져 간다는 것에 대해 안것이다.그런상황인데 '통일이 민족과제다 '라고 열나게 외쳐봐야 아무도 듣지 않는다.왜? 그런 수십년간 수없이 들어왔기때문에.통일문제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차분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저자처럼 민족과제,근대성의 완성등으로 봐바도 별로 반응없을 성 싶다.차라리 거리에서 비정규직 철폐문제를 물어봐라?사람들이 더 많은 의견을 낼 것이다.이게 더 현실적인 거 아닌가? 저자가 그토록 발 붙여야한다고 강변한 현실.이 삐딱한 우문을 계급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무엇이 더  실생활적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일뿐이다.또한 이 책에 간간히 등장하는 예술관련 책들에 대한 서평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저자는 진짜 80년대 동아리 수준으로 이야기한다.정치적으로 옳바른 예술...뭐 이런식의 예술이 진짜다.맞다.가장 핵심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그렇다.하지만 이미 각 영역은 영역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비축하며 역사를 쌓아왔다.거기에다 대고 결국 '정치야'라고 하면 이건 순진한건가 아직 80년대의 혁명기치를 놓치지 못한 미력함인가 모르겠다.사람도 따지고 보면 세포다.그래..그래서.세폰지 안다.그걸 밝혀서 칭찬해달라는 건가? 그 다음에는....  세포인지 밝혀서 자랑스러워하면 그 다음부터 '환원주의자'라는 이야길 듣는거다.맑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경제....그래 원인이 경제인지 밝혀줘서 고맙다.맑스.거기서 끝이다.그걸 붙들고 여기 저기에 다 '경제,경제,경제'하면 바보소리 듣는 거고 단선주의적이란 소릴 듣는 거다.저자처럼 많이 배운자가 그럴리야 없겠지마 문득 문득 그런 느낌이 들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몇몇 책들에서는 비판과 긍정의 밸런스를 잘 조절한다.하지만 어떤 책에서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물론 외면이라기 보다는 그 긍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예를 들어 신영복의 <강의>같은 책이다.지은이 정도의 저자라면 신영복 교수가 가진 실천성과 용기,지적 건강성들을 알고 있기때문에 큰 비판을 꺼내긴 힘들 것이다.아니 대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신영복교수에 대해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감동이 여전하기에 그 아우라에 손대기 ’n하다.<강의>를 말하며 신교수가 주장하는 동양철학의 <관계성>에 대해 높은 평가를 저자는 매긴다.그 관계성이라는 것은 과연 문제가 없을까? 우리사회처럼 관계의 네트워크가 촘촘한 사회가 없다.이게 또 저자가 지속적으로 내려앉아야한 다고 말한 현실아니던가? 학연,지연,혈연.....이건 관계의 네트워크가 아닌가? 물론 고전에서 말하는 긍정의 네트워크는 이런 왜곡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하지만 동양의 인간관계중심은 우리사회에 배운자든 배우지 않은 자든 체험적으로 내화해서 생활에 반영한다.그러면 관계성의 회복을 외치는 게 현실적인가 개인주의의 부활을 외치는게 현실적인가? 내가 좀 오바하는 부분이 있지만 난 우리사회의 인적 네트워크가 좀 지겹다.아니 많이 지겹다.혼자서는 다들 바보다.사회시스템 역시 개인과 룰이 지배하는게 아니고 인적 네트워크가 지배한다.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러한 관계성에 좀 파탄을 내고 싶다.그런면에서 내개 더 깊은 울림을 울려주는 것은 개인주의의 부활이며 관계성의 비판적 단절이다.다행히 학연,지연,혈연이 보잘것 없어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저자는 동양의 관계성이 가진 긍정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앞에서 말했듯 서평집으로서 많은 매력을 갖고 있다.비록 나의 입장이 저자보다는 조금 더 탈근대론의 긍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가진 큰 틀에는 동의를 한다.탈근대론자들이 가진 좌파 상업주의도 무척이나 맘에 안든다..ㅆㅆ 다음은 저자가 쓴 서평중 맘에 끄는 몇권의 책을 읽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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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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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지기의 한옥 짓는 이야기
정민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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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집이 아니다."

특히 나처럼 아파트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딱맞는 말이다.총각시절 원룸(따지고 보면 이것도 아파트다.)생활까지 포함하여 나의 아파트살이 구력도 어언 20년에 이른다.그 시간동안 아파트는 집도 아니고 집이 아닌것도 아닌 모호한 상황의 주거공간이였다. 우리집은 어디어디 아파트 몇동 몇호....이 말이 주는 공허감.그 감정을 따라가면 두고온 '빨강 지붕의 양옥집' 에 대한 아쉬움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는 빨강 양옥집에 살았다.6살때 부터 15살까지 였을 것이다.아버지는 그집을 산 첫날 내 집이 생겼다는 설레는 마음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우리집에는 꽤 큰 화단이 있었다. 목련나무,홍매화 나무,산수유 나무,덩쿨장미,그 외 크고 작은 화초들...봄이 되면 크게 자란 장미꽃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갔다. 인근 공장에 다니던 누나들이 지나가다 가끔 대문까지 들어와서 꽃을 꺽어가기도 했다.그 집에서 꽤 살았다.그러다가 중3때인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되었다.내가 기억하는 거의 첫번째 이사인듯 하다.짐을 실었던 마지막 트럭과 함께 그 집과 작별을 해야했다.돌아보는 집이 외로와 보였다.뭔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죄책감이 들었다.나는 이미 이사 가기 며칠전 부터 그 집을 이루고 것들과 작별식을 했다.가끔 쥐가 출몰해서 혼비백산하게 했던 부엌,가끔 올라가서 먼지를 뒤적이면 흥미로운 것들이 발견되었던 다락,목련꽃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옥상,겨울철 얼어붙어서 아버지와 뜨거운물 부어대던 옥외수돗가.나는 그 모든 것들에 한번씩 눈길을 주고 인사를 했었다.하지만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바라본 퇴색한 지붕의 양옥집은 지친 거인처럼 쓸쓸해보였고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아파트에 오래 살면서도 나는 집 하면 그 양옥집을 생각한다.아파트처럼 텅빈 공간이 없는 꽉찬 집으로써의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집이 유일하다.

한옥짓고 사는 이 책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우리식구들의 정든 주거공간이요,남편에게는 가장 소중한 애장품이다.'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집이 가장 소중한 애장품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게 한옥이든 양옥이든 자신의 의지에 맞게 설계하고 돌 하나하나 쌓아 지은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멋진 말이다.그런 집이 진짜 집이라는 생각이든다.

한옥을 짓는 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다.이 책을 보면 한번더 확인할 수 있다.지은이는 일단 저지르면 다 한다라고 격려한다.하지만 저자도 이미 지어본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주변에 좋은 지인들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운 나같은 사람이 마음 먹는다고 쉽게 달려들 수 있는 일은 아니다.지은이가 몸담고 있는 아름지기란 재단은 일반인들의 한옥짓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단체이다.일단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안것 만으로도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수확이 아닐까 한다.항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맨땅에 해딩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있겠는가.

이 책은 첫단추부터 하나씩 설명한다.물론 전문적인 수준까지 이야기하진 않는다.'대략 이런 식이면 가능하지 않겠나' 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목재를 구하는 방법,목수를 구하는 방법,도배를 하는 방법,한옥에 어울리는 인테리어방법등등...지은이의 공사보고서가 갖는 강점은 실제 집주인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묻어있다는 것이다.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에어컨을 숨기는 방법이란든지 화장실의 수챗구멍을 없앤다던지 하는 것들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노하우이다.집을 잘 짓는 대목이라 할 지라도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저자는 집이 사람의 성품을 바꾼다고 말한다.지은이는 집 지으며 인내를 배웠다고 한다.또한 한옥이 자연친화적 삶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고 한다.한옥에 들어서는 사람들 역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만지고 걸음도 신중해진다고 한다.굳이 양옥에 비해 한옥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한옥을 나름대로 현대화시킨다 하더라도 편의성면에서 양옥이 가진 장점을 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수많은 가구들을 전부 벽장에 넣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다.결국 어떤 삶의 형태를 선택하는 가의 문제일 것이다.조금의 불편을 감내하더라도 깊이있고 여운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그런 선택은 또 결과에 서로 영향을 주어 삶과 자연의 일치감을 높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언제가 한옥을 한 채 짓고 싶다.설마 꿈으로 끝날 수 도 있지만 집에 들어서면서 기둥의 소나무향을 맡고 싶다.

이 책 말미에 함양의 '한옥 문화체험관'이 소개되었다. 작은 사진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공사전에 한번 가 본적이 있었던 집 같다.함양 근처에 사는 천연염색하는 분과 함께 였다. 그 집 마당에서 천연염색을 했고 안채에 있는 마당에 바지랑대를 걸고 널었다. 고색창연한 고택에 형형색색의 천들이 바람에 날렸다. 아름다왔다.그곳이 한옥체험관이 되어 한옥살이를 경험해볼 수 있게 해주나보다.언젠가 또 기회가 닿으면 한번 들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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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 브루노 발터가 만난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지음, 김병화 옮김 / 마티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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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클래식 듣기 힘든 계절이다.아무래도 날씨도 덥고 습도도 높고 하니 오랜 시간 음악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이런 패턴은 뜨거운 바람에 살짝 냉기가 묻기 시작하면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하지만 올 여름 초입은 말러 덕분에  오랜 습관에 예외가 생겼다.장마기간 내내 말러 음악을 주구장창 들었다.주빈메타의 훌륭한 <부활>연주 덕분이다.교향곡 2번의 그 장대함에 감동먹으며 예전에 들었던 아바도,래틀의 연주도 다시 꺼내 듣게 되었다.또 내친김에 뛰어난 균형감으로 기억되는 클리블랜드와 도흐나니의 1번 <타이탄> 조금 심심하지만 명연으로 알려진 쿠벨릭,불꽃같이 활활 타오르는 텐슈테트의 5,6번 연주에 이어 쨍쨍한 불레즈의 연주까지....물론 번스타인을 빼놓을 수도 없다.

말러는 생전에 '머지 않아 나의 시대가 온다'라는 말로 시대의 몰이해와 자기 예술에 대한 확신성을 표현했다.말러 사후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말은 사실로 입증되었다.전 세계적으로 콘서트홀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 바흐도 베토벤도 아닌 말러라고 한다.지휘자들 역시 '말러 치클루스'를 한 번 정도 해야 메이저에서 인정받는다.그렇다면 왜 수십년 전 부터 말러 열풍이 불고 있을까?  브루노 발터는 이렇게 말한다.

"...말러의 작품이 가진 최고의 가치는 모험적이고 과감하며 개척자적이거나 기괴한 것이라는 진기함 때문이 아닙니다.그보다는 이 진기함이 아름답고 영감에 가득하고 심오한 음악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그것이 고도로 창조적인 예술성과 의미 깊은 인간성이라는 영속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p177)

브루노 발터가 지금으로 부터 50여년전에 썼던 이 책은 천재적이며 문제적 인간 말러와 그의 예술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입문서이다.먼저 좀 생소할 수 있는 저자 브루노 발터부터 이야기 하자.그는 20세기 초반에 활약 했던 세계적인 지휘자-멩겔베르크,토스카니니,푸르트뱅글러,클렘페르 등 과 같은 반열에 있는 훌륭한 연주가이다.그가 연주한 모짜르트,베토벤,말러등은 아직도 명연으로 사랑받고 있다.그의 베토벤 <전원>교향곡과 초연자의 자부심도 있음직한 말러의 <대지의 노래>등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뛰어넘는 연주가 쉽게 나오지 않고 있다.그의 연주는 그의 알려진 성품처럼 온화하고 인간적인 피가 돈다.과도한 자기표현이나 현학적 자세등은 찾아볼 수 없다.오래된 한옥의 소나무 기둥에서 느낄 수 있는 깊고 편안한 울림,물굽이 마을의 휘도는 강물을 바라볼때 느끼는 유려함.... 초기 스트레오로 녹음된 말년의 발터 연주에서는 이런 느낌이 든다. 브루노 발터가 음악계에 발을 들여 놓았던 청년기에 그는 위대한 말러를 만난다.발터는 이때의 강렬함과 이후 그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한다. 발터가 이 책에서 말러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은 그래서 객관적이지 않다. 객관적으로 공과 실을 따지는 책을 그는 쓸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발터는 그가 가까이서 보고 경험한 말러,그리고 그의 삶과 철학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교향곡들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이 글을 쓴 것이다.말러의 성격이 그다지 온화하진 못했다고 한다.괴팍함과 독설로 동시대에 많은 적들도 만들었다.발터 역시 그의 비사회적 성격에 대해 어느정도는 인정한다.하지만 여기에도 애정이 묻어있다. 예술가들의 기벽이나 괴팍성은 오히려 긍정적 캐릭터로 그려지기도 한다.베토벤도 그랬고 슈만,리스트,바그너 등등....

이 책은 구성면에서도 아주 읽기 용이하다.첫장에서는 브루노 발터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말러의 삶을 그리고 있다.말러와의 첫만남부터 함께 일했던 기억들,그리고 서신 교환을 통한 관계등등...발터가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바라본 이야기들이 중간중간 일화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가까이서 바라본 말러를  그는 '부글 부글 끓어오르는 나일강 중류'에 비유한다.즉 '변덕스러움'에 대한 발터 나름대로의 비유이다.말러음악을 들으며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이러한 변덕스러움이 음악에 반영되기 때문일 것이다.말러의 변덕은 그냥 변덕이 아니다.베토벤의 교향곡적 전통,베를리오즈의 악마적 낭만성,슈베르트,브루크너의 멜로디,민요의 전통,어린시절 유모따라가서 매일 들었다는 오스트리아 행진곡의 영향...이 모든 것이 교향곡 전통의  확대발전의 틀 속에서 변덕을 부린다.

다음으로 지휘자로서의 말러에 대해 이야기한다.말러가 빈에 들어가서 자신의 창작력을 펼치고 싶어했던 욕심,그리고 빈 단원들과의 불화,빈에서의 막강한 카리스마등이 이 장에 나온다.말러가 오페라 개혁에 앞장섰다는 것은 처음 듣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아무래도 지휘자 말러를 본적이 없이 작곡자 말러의 음악만을 들었던 시대적 갭이 아닐까 싶다.그는 오페라 감독으로 박수부대를 없애고 지각하는 관객들의 출입도 막았다고 한다.신인 가수들을 기용하여 기존의 자만심만 높은 가수들을 퇴출시켰다.빈 오페라단의 히딩크였던 셈이다.또 말러가 지휘자로서 연극,드라마의 요소를 강조했다는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다.요즘이야 일반화된 사실이겠지만 그는 '오페라의 일체성'이란 목적을 위해 빈에서의 10년을 분주하게 보냈다.오페라의 일체성이란 것은 종합예술로써 오페라가 갖는 음악,드라마,무대,조명,의상 등에 대해 총체적 완결성을 높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말러의 개혁드라이브는 풍요와 낭만의 빈  전통과 갈등을 빚게 된다.결과적으로 빈 필과의 계약은 종결된다.이후 빈필이 상임을 두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그 전통이 말러와의 결별 이후라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일화이다.

발터는 작곡자로서의 말러에 대해 가장 비중있게 다룬다.말러 음악이 가진 다양성의 토양,말러 음악이 가진 시기별 구분,또 그에 따른 작곡가의 인식 변화등을 지휘자이자 말러전문가로써 차분하게 설명한다. 말러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발터는 1-4번,5-8번,<대지의 노래>와 9번의 세 시기로 나누어 각곡들이 가진 의미와 말러 내부의 인식 변화를 밝히고 있다. 예를 들어 교향곡 1번<타이탄>을 발터는 말러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비유한다.말러의 음악에 영향을 준 괴테의 독일정신을 고려한다면 가장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1번 교향곡의 1악장은 새소리를 연상시키듯 참신하게 시작한다.스케르초 악장은 전혀 뜻밖의 행진곡풍의 음악이 전개된다.장송곡 풍의 행진곡을 통해 시니컬하면서도 모순적인 감정을 표현한다.이 모순은  마지막 악장의 대반전을 준비한다.마지막 악장에서는 이모든 관계들로 부터의 해방을 위학 위협적이라 할 만한 폭발이 기다리고 있다.발터는 2번 교향곡은 삶에 대한 비가,3번은 환희의 지혜 4번은 동화,5,6,7번은 순음악적 변화,8번은 삶에 대한 긍정....<대지의 노래>,9번 교향곡은 눈앞에 있는 죽음에 대한 숭고한 변형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본다.

 말러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부정하는 정신이었다.그는 이상은 그가 온전히 자신을 바친 음악을 통해 세계를 구축하고 인간과 신의 심연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빈에서는 말러에 대한 찬반이 팽팽했다고 한다.인기면에서는 오히려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가 훨씬 많은 사랑을 받았을것이다.하지만 그의 시대가 오리라던 말러의 말처럼 '말러의 시대 20세기'에는 당대의 어느 작곡가도 말러에 필적하지 못했다.말러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년전에 죽었다. 만약 그가 살아서 1차 대전의 수많은 죽음과 폭력을 목격했다면 그의 음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만으로도 그 음악의 무게감에 소름이 돋는다. .... 말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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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5-07-06 19:45   좋아요 0 | URL
한 때 말러에 심하게 경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시들해졌지만 말입니다. 드팀전님의 리뷰를 읽고 다시 한번 말러의 cd를 꺼내들게 되네요.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말러 2번을 꺼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러 만세입니다. ^^

드팀전 2005-07-07 11:54   좋아요 0 | URL
ㅋㅋ..그 음반은 최근 꺼군요.DVD도 나왔다고 하는.... 실황을 언제 한번 들을 기회가 있어야 진짜 좋은 지 알텐데...기회가 좀처럼 없군요.저두 이 책 보다가 이것 저것 꺼내듣게 된 셈입니다.
 
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표지가 도발적이다.그동안 책들고 돌아다니기 무안했다.<플레이보이>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뻔뻔한 사람이란 인상을 줄까봐 지레 조심했다.그래서 항상 책의 뒤편이 바깥을 향하도록 들고 다녔다.하지만 한두번 실수도 있었다.주차장 아저씨 한테 월주차 끊어줄때다.지갑에서 돈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워첼의 '퍽 유'하는 겉표지를 노출하고 말았다. 주차장 아저씨의 표정은 진짜 압권이었다.만화같았으면 '띠윙...퍽'하면서 쌍코피가 조르르 흘렀을 것이다.아저씨는 영수증 끊어줄 때도 내 옆구리에 끼인 책을 흘깃 흘깃 훔쳐봤다.책의 부피와 공사다망함이 겹쳐 거의 이십여일만에 책을 다 읽었다.두가지 이유로 마음이 홀가분하다.숙제를 다 마친 가벼움과 더이상 책 표지를 돌리고 다닐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움으로 부터의 자유때문이다.

책의 들어가는 글이 상당히 길다.초반부터 '이걸 계속 봐야 하나?"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미국 저널리스트 글을 볼 때 느껴지는- 산만함이란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 낯선 접근들 때문이다.흔히 내가 곤란을 겪는 것들은 '변죽때리기'방식이다.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애둘러서 주제의 윤곽을 보여주는 방식은 가끔 혼란을 야기한다.애두르는 방식은 사실 공유된 문화의 점성에 비례하여 효과가 배가된다.타문화권에 있으며 또 번역을 통한-번역가의 자질이 또 개입되는 -이런 상황에서 애두르는 글쓰기가 효과를 발휘하기 보다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들어가는 글부터 워첼은 수많은 영화배우과 문학인,사건사고의 피해,피의자들의 실명을 거론한다.대개 하고자 하는 말은 거론 된 여성들의 왜곡된 삶과 그들을 억압한 마초적 사회의 한심함에 대한 것이다.읽는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그 예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는 얼굴이라도 한번쯤 본 기억이 있다면 재미있을 수 있다.하지만 전혀 그녀들의 삶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체를 갖지 않는 문자외에 별 의미가 없어진다.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독자의 지식수준을 책할 수도 있다.하지만 미국의 명사들에 대해 일반인들이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엘리자베스 테일러,비비안 리,마돈나,쉐어,드류베리모어.....이정도에선 반가와진다.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에이미 피셔,앤 색스턴,실바아 플라스,릭 골드슈타인.... 물론 책을 따라가다 보면 주요인물들의 경우 얼핏 그림이 잡힌다.하지만 무수히 등장하는 유명,저명,인기인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을 수 밖에 없다. 또 한가지 책 번역의 문제도 책읽기를 더디게 하는 일등공신이다.우리 문장에 주어부 다음에 쉽표로 끊어지는 형용사부가 4-5개 들어가고 서술부가 나오는 문장이 어디 있는가? 어떨 때는 서술어를 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이거 주어가 어디지?"하고 주어 찾으러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대여섯줄 올라가서 보면 거기에 주어가 숨어있다. <타임><뉴스위크>등의 에세이를 대학다닐때 공부삼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것이다.이런 류의 에세이에는 쉼표로 문장을 끊어서 수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한국문장에 옮기고 있다.이런 경향은 책 말미로 오면 점점 심해진다.

이제 책 내용을 좀 보자.책의 첫장에서 워첼은 <삼손과 데릴라>의 성경이야기를 시작한다.삼손을 망친 여자 데릴라에 대한 변론이다.그녀의 지적은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성경 이야기의 성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팜프 파탈의 원조가 되어 버린 데릴라는 "한밤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여성에 대한 두려움,여성성으로 인해 야성을 잃어버리는 남성성의 탈취에 대한 우려.이러한 불안감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마녀로 여우로 악마로 규정된다.워첼은 반문한다.'남자들이 한 여자로 인해 붕괴될 만큼 그렇게 허약했는가? 그걸 인정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그녀는 삼손의 예를 들며 파탄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는 것은 남자 자신들의 실책을 덮어두고 무마해버리려는 희생양 정책일 따름이라고 결론 짓는다.워첼의 이야기는 조금더 현대로 올라온다.에이미 피셔라는 10대 소녀의 이야기-피셔는 유부남 애인을 둔 10대소녀로 그의 부인을 죽이려했다-를 통해 언론과 사회가 이 사건의 핵심을 왜곡한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한다.이야기는 남자들의 소녀취향과 이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10대 소녀들의 심리에 대해 말한다.사회심리학자 길리건화 브라운의 <교차로>를 인용한 10대 소녀들의 정서적 아노미상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너무 긴 이야기라 전부 다 쓸 수는 없지만 그 설명이 아주 설득력이 있다. 워첼은 힐러리 클린턴이 아내라는 위치로 자신을 숨기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다.항간에 떠도는 힐러리가 페미니스트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또 수년전 외신 기사의 절반을 차지한 OJ심슨 사건에 대해서도 말한다.피해자인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가족이 살인교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즉 팔아넘기기식 결혼과 아내 폭력에 대한 침묵이 그들 사이의 숨겨진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긴긴 이야기 끝에 엘리자베스 워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돈나의 말속에 있다."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만 제대로 가르친다면 남자에 대해서는 가르칠게 없을 거예요" 워첼은 사회적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경험을 넓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친다.여성이 가진 욕망이나 성적 능력 역시 자신의 한부분임을 인정하고 여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론적 페미니즘서가 아니다.오히려 저널리즘적인 페미니즘책이라고 봐야한다.미디어속 인물들이나 유명인들이 여성문제의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 과연 일반성을 가질 수 있을 지 의문이된다.여성이 공통적으로 받는 억압이란 측면에서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하지만 개별 여성이 받는 질적 억압과 계급적 억압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얻을 수 없다.워첼이 가진 저널리즘적 가벼움과 미국 사회의 실용적 관심이 여기에 한 몫한다.신문에 난 대중문화 기사 읽 듯 즐겁게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래머러스한 -표지를 본다면-저자의 상대적으로 가벼워보이는 문제의식은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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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4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농의 책을 읽다가 대학교 역사 수업시간이 떠올랐다.식민지 해방투쟁과 관련된 수업이었다.첫 시간에 강사는 이 수업의 기본 전제에 대해 말했다.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전선은 크게 두가지이다.하나는 민족개량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혁명론이다.우리 역사는 분단으로 인하여 폭력혁명에 대한 부분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반면 민족 개량주의는 당시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었다.하지만 강사왈...그거 다 뻥이다.그리고 한 학기 수업에서 왜 민족개량론이 뻥일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식민지 현실에서 폭력혁명이 유일한 반제국주의 투쟁방법일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과제는 두가지로 압축된다.반봉건과 반제국주의.반봉건은 유교적 중세성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민권의식을 함양해야하는 내적 과제이다.이와 함께 외세라는 제국주의의 물결에 저항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지켜야하는 외적 문제 역시 해결되어야 했다.이러한 이중억압 구조의 혁파는 지상과제였다.많은 지식인들이 그 대안을 사회주의 혁명에서 찾았다.해방 이후 초기에서 중도좌파계열이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혁명전통의 순수성과 토지분배문제에 대한 민중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었기때문이다.이 책<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서문에서도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혁명이 성공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특징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이다.개인의 자유와 사적 자본축적을 이룩한 한 역사의 주체 부르주아지가 변증법의 틀에서 안티테제에 이르는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노동력만을 유일한 자본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승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사회주의 이상이 건설된다.프란츠 파농은 이 책에서 사적 유물론의 단계론적 세계관을 식민현실을 토대로 부정한다.파농은 저개발국에서 부르주아지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한다.식민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식민 모국의 부르주아지와 자신을 동일사하려는 속성을 보인다.거기에 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을 대표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이들은 또한 식민 모국이 심어준 인종주의적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다.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조선놈들은 게을러서......" 라는 식의 민족 부르주아지의 정서가 피부색을 달리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면 그게 인종주의적 편가름이된다.민족 부르주아지는 점차 자신의 민중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식민 모국,외국자본가들을 지향한다.결국 식민 모국으로 부터 독립이 될 지라도 광범위한 압력을 통해 식민모국은 그 영향력을 직접지배때보다 넓히게 된다.더 간단하게 말하면 식민국가는 신신민지의 형태로 바뀌게되는 것이다.

파농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중개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파악한다.식민지는 경제적으로 이중의 수탈을 받는다.하나는 자원의 공급시장이요 또 하나는 잉여생산물의 수요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갖는다.민족부루주아지는 이 사이에서 중개라는 형태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다.파농은 해방이후 중개업에 대한 국유화로 자원의 분배형평성과 민족부르주아지의 사적 자본 축적의 통제를 주장한다.

파농이 보기엔 혁명의 주체는 사회주의혁명처럼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파농은 프롤레타리아를 식민지사회에서 나름대로 수혜를 보고 있는 사람들로 본다.이들이 점차적으로 민족 부르주아화 되며 민족정당에 대한 지지를 보이게 된다.식민 모국은 지속적으로 분리정책을 주도한다.결국 프롤레타리아와 식민부르주아가 혼재하는 도시층과 농민과 기타원주민들이 산재한 농촌과의 분리가 이루어진다.파농은 혁명주체로서 후자인 농민을 들고 있다.그는 농민들의 혁명역량과 의식의 건강성에 대해 과하다 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치교육의 강화이다.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현재의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농촌으로 잠입한 투사나 지식인들이 그 단초 역할을 한다.하지만 파농은 그들의 역할에 과다한 짐을 싣지는 않는다.그들 역시 민중속에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배워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탈식민논의의 초석이 된 것은 파농이 심리학자였다는것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식민지의 구조와 경제체제만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들이 갖게 되는 내적 식민화의 부분을 파농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그 원인의 소재를 밝힌다.우선 식민화된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인종주의적 이분법이 내재화된 이주민들은 원주민 통제를 위해 가공한 폭력을 일삼는다.식민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원주민처럼 되길 꿈꾼다.하지만 이러한 꿈은 꿈일뿐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게된다.내적 억압은 같은 억압을 받는 원주민을 향한 폭력으로 발산되는 양상을 보인다.특히 식민지 룸펜 프롤레타이아의 폭력은 주의를 요한다.혁명초기의 룸펜프롤레타리아의 폭력성을 어느방향으로 잡느냐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파농은 기본적으로 식민지체제의 폭력과 원주민의 대항폭력에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식민체제가 폭력적일 수록 대항하는 힘도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파농은 이 에너지가 혁명투쟁으로 전환되기를 꿈꾼다.각성된 민중의,민중을 위한,민중에 의한 무장혁명이다.폭력투쟁은 게릴라전 양상을 띄게 될 것이며 또 식민모국의 유화정책에 교란될 것이다.파농은 단호히 전체의 변화가 아니라면 타협은 없다라고 말한다.또한 식민모국의 이분법적 사고로 내적 식민화된 사람들의 인식 해방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즉 검은 사람보다 더 검은 하얀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 그 반대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요구한다.

파농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탈식민화는 식민상태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입장은 아니다.파농은 말한다.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탈식민화란 쉽게 말해서 어떤 '종의 인간이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과도기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전면적이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대체만 가능하다.파농의 이러한 주장은 현체제에 적용하는것은 과격한 주장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파농의 60년대 알제리와 현재의 시대는 다른다.하지만 억압받는 소수국이 거대한 제국에 저항하며 생존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길이 쉬이 찾아지지는 않는다.물론 개량주의적 타협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우리 민족은 파농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닿는 부분이 생긴다.식민지를 겪었기때문이다.파농이 지적한 내적 탈식민화가 우리사회 제반 부분에 적용되는 것도 식민지 역사라는 토대가 있기때문이다.우리의 의식적 탈식민화는 일본제국주의의 억압대상자로서만 한정되지 않는다.신식민지상황 속에서 미국과 서구문명에 의존적인 역사 역시 내적 탈식민화의 영토가 된다. 또 등떠밀려나갔던 자의적으로 나갔다 미국의 세계전략 일원으로 참가했던 베트남전, 해외시장,국내등지에서 벌어지는에서의 경제적 착취문제등에도 자성해야만 한다.사르트르와 파농은 이렇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법정에 서는 게 두렵다면 자신의 영혼에게라도 말해야 한다."

 "내 몸이여,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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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6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5-06-16 09:26   좋아요 0 | URL
**님께....감솨..감솨....
오타는 찾는데로 수정하겠습니다.제가 서재글을 쓸때 주로 회사에서 눈치봐가며 쓰거든요.아무래도 빨리 치다보니 오타가 있습니다.거기에다가 다시 한번 볼 틈도 없이 바로 등록해버리거든요.이후에 한번씩 보다 오타발견하면 그때 그때 수정하죠.지금도 하나찾았는데...찾아보면 많을거에요.알어서 읽어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