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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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덥썩 물었다.한입 삼키면서 부터 '이거 봐라.이거 계속 먹어도 되는거야' 라고 되뇌였다.하지만 내 소화기의 자존심은 이까잇 녀석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내비췄다.그렇다면 가는 거지....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물에 빠지지 않는 묘기를 보여주셨다.이론상 아주 간명하다.한발 빠지기 전에 다른 발 딛으면 된다.영화 <동막골>에보면 바보 강혜정이 이런다 .'나 참 이상해요.팔이 이렇게 마...악 빨라지면,발도 마...악 빨라지고..." 예수님도 왼팔 오른팔 열나 빨리 움직여서 발이 따라오게 했을 것이다.그래서 물에 빠지지 않았겠지.나 역시 이까잇 <일본야구>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손에다가 침바르고 열나게 빨리 넘겼다.다 넘겼다.

패잔병처럼 마루 한편에 쭈그러져 있는 <일본야구>를 보고 찍..한소리 했다.

까잇거....니가..까잇거..나를 ..까잇거....가지고...까잇거...거시기 할려는것 같은데...까잇거.. 머리에 왠 파리가 윙윙 도냐?

덥썩 물었던 <일본야구>와 나와의 한판은 나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났다.'까잇거'와 '산만한 정신'으로 무장한 나를 '우아나 떨고 감상이나 떠는'<일본야구>가 이길 수는 없는 것은 명약관화하다.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22층 아파트를 다 내려와서 화장실 물안내리고 온게 생각날때 드는 기분이다.베이지색 변기 수영장에 동동 자유형에 배형까지 자제로 동동...에이 자꾸 눈 앞에 파리가 윙윙 돈다.

이 책을 덥썩 문것은 일부 알라디너들의 지대한(?)관심때문이다. 책 제목은 영화제목처럼 흔하다. 한번도 듣지 않았어도 어디선 가 들었던 것 같은 친숙함을 준다.그래서 이 책에 대한 알라디너들의 관심을 목격했을 때 나역시 부하뇌동했다.거기에 한동안 절판이었다는 것은 신비주의적 후광을 발휘하는 덕목이었다.내게 이 책을 클릭하게 만들었던 알라디너들은 단 한명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았다.신중한 분들이라 말을 아끼고 있으리라.이런때는 돌쇠가 나서서 '까잇거...다 덤벼 보드라고....다 죽어불자..잉' 이렇게 나와야 한다.나는 트팀전에서 돌쇠로 서재명을 바꿀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일본야구>의 스토리는 알 필요없다.그렇다고 스토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단 스토리가 미친 언니 치맛자락 처럼 마구 날리고 있어서 촛점 맞추기 어려울 뿐이다.거기에 작가의 말장난과 독자를 향한 새디스트적 상상력은 줄거리를 '거시기' 하게 만든다. (주: '거시기'는 작가를 겨냥한 나의 복수다.) 줄거리를 애써 맞추려는 논리적인 사람들은 펜과 노트를 준비해서 앞뒤를 맞추어 볼 수 도 있다.다부지게 마음 먹고 달려들면 인물들의 관계와 줄거리의 맥락을 '거시기'해 버릴 수 있다.근데 '나의 게으름'은 그러길 거부했다.그러면서도 논리에 대한 교육받은 의식은 사건을 정리하고자 한다.준비없이 암산만으로 정리하려니 자꾸 눈앞에 파리가 윙윙돈다.앗..바로 이것이 <일본야구>가 나를 향해 준비한 공격패턴이군.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줄거리 따위는 대충 '거시기'해버린다.

소위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더냐?  나의 생활의식은 모더니즘에 극히 구속되어 있다.하지만 90년대를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포스트모던'은 내 의식의 범위를 약간 확대해놓았다.모든 영역에 그대로 대입하긴 어렵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포스트 모던은 모던의 극복이나 모던 이후의 무었이 아니였다.지배적 양식인 '모던'에 대한 비주류적 실험이요 반성적 성찰이었다.이러한 심플한 정리는 주로 사회학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예술에서의 모던/포스트모던은 각 장르별 특성에 따라 소재의 변주에 따라 백화제방을 이룬다.소설의 포스트모던에 대해 내가 그다지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하지만 대개 포스트모던 소설이라는 것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소설 구조와 형식,문체를 휴지통에 처넣는다.전통적 소설에 익숙해져 있는 것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성찰하게 한다.(이것 봐라 아는게 없으니 늘 모더니즘적 관점일 수 밖에 없다.괜찮다.내가 문학론 석사냐 박사냐...) 특히 언어에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언어해체와 커뮤니케이션 연속성에 대한 부정등이 빈번히 등장한다.언어해체라는 것은 결국 언어가 가지고 있는 자기완결성에 대해 '그까잇게 뭔데'라고 찔러보는 것이다.대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한다.'말을 논리적으로 하란 말이야..뭔뜻인지 알겠어?....그렇게 말하면 잘모르겠잖아...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이 모든 것들은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여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목적에 두고 있다.하지만 언어/커뮤니케이션이 그러한 목적에 종속된다는 것이 싫었나 보다.결국 언어/커뮤니케이션을 가지고 지랄발광을 한다. 비비꼬고 뱅뱅 돌린다.벽보고 이야기하고 때론 벽을 파고 이야기한다.문제는 이러한 놀이에 독자들이 '뭐 어쩌자고'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이다.물론 평론가들은 신난다. 원고요청이 많아지고 술자리 안주 한판 늘어나니까.

이 책이  엄청난 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라이프니치가 등장하고 뭐가 뭐가 패러디대고 하지만 '그까잇거'같고 포스트모던의 우화속에 담긴 심오한 철학 이라는 둥 하면 퇴니스의 '1차집단''2차집단'만 가지고도 심오한 소설 수백권은 써내려 갈 수도 있다.1차집단의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2차집단내의 부적응..엽기적 살인사건..... 

 열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구현하기 위해 한신타이거즈 팀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우승했다는 객관적 사실도 부정된다.일본 야구의 구현을 위해 도서관에 다니고 정신병원에서 열변을 토하고 코푼 화장지를 뒤적여 자료를 정리한다.<일본야구>란 어떤 의미인가? 우아하고 감상적이어야 하는 그 일본 야구가 의미하는 바가 아직 명료치않다.의미를 찾으려는 것 자체를 보면 작가가 또 비웃을 지 모른다.'그렇게 당하고도 의미와 해석의 망령속에 있냐?' 그냥 일본야구나 구현하라구!친구야' ...이렇게 잘난 척하는 작가에게 일년내 좋은 햇살과 좋은 땅의 양분을 먹고 자란 고구마를 만났을 때 쩌쪽..남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참 거시기 해부네"

'거시기'하나로 살아온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ㄳ....내 이 싸가지 없이 가벼운 이 책을 읽고 난후 황순원 선생의 단편소설집을 또 덥썩 또 집어들었다.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내가 중학교때 배운 그 <소나기>,TV문학관에서 재탕삼탕 하며 1시간여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던 그 <소나기> 그 불후의 명작이...고작 7장이었다.에이 까잇거....고작 7장이었나...7장이었다는 거 늘 알고 계셨던 분? 나만 몰랐군.까잇거...이래서 무식하면 하나씩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 좋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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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8-22 15:59   좋아요 1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리뷰 중 최고의 리뷰입니다. 이런 리뷰를 쓸 수 있는 사람과 저는 많은 간격이 있는 거구, 그 간격을 좁히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가 되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저는 발전이 없는 걸까요...

드팀전 2005-08-23 07:36   좋아요 1 | URL
지나친 겸손은 삐리리에요.ㅋㅋ
이런 것도 리뷰인가? 별로 파악된게 없고 리뷰 한칸은 채우고 싶고...그 사이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죠.내가 어디 보고서 내는 것도 아닌데...리뷰에 페이퍼를 쓰던 페이퍼에 리뷰를 쓰던 자동차가 두바키(퀴의 오타..근데 바키도 괜찮은데..)로 가던 뱀이 땅꾼을 잡던...아무런 신경쓰지 않아서 좋은 알라딘 세상!! ㅋㅋㅋ 좋다.가는거야....

kleinsusun 2005-08-23 10:30   좋아요 1 | URL
드팀전님, 리뷰 넘 재미있어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절판되었을 때 사려고 웅진에 전화도 하고 그랬었는데 새로 나왔네요. 저도 주문했어요.ㅋㅋ
근데...소나기가 7장이었는지 저도 몰랐네요.
7장 텍스트로 그렇게 많은 TV 문학관 및 청소년 상영물을 만들었군요.호홋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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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루하다는데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몇자 안되는 글의 함축성이 좋았다.그 깊이를 다 알수는 없으나 넘겨짚은 이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거기에 어디가서 몇자 읊어주면 그럴싸 하게 보였다.대학들어가면서 당연히 그쪽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그래봤자 결국 교양수업 몇개 일 뿐이니 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가  남들 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는 없다. 대학가서 웃겼던 건 비슷한 고전강독을 서너차례들었다는 것이다.지금 그 강의 명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대개 <동양 사상의 이해> <동양문화사><중국 정치의 이해> 뭐 이런 것들이었다.그런데 이 강의가 전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수업들이었다.<동양사상의 이해>야 그렇다 치자.이름이 그럴싸 해서 들었던 <동양문화사>강의. 첫 시간 교수님은 "동양문화의 핵심은 중국이다.그리고 중국 사상의 근원이 형성된 곳은 춘추전국 시대 즉 제자백가의 시대이다."이런 말로 한 학기 강의의 개괄을 하셨다.그리고 한한기 동안 신영복 교수 <강의>의 목차와 유사한 수업이 진행되었다.더 웃긴건 <중국 정치의 이해>였다.나는 처음에 문화대혁명,모택동,주은래,등소평 ...뭐 이런 거 나오는지 알고 수업신청했다.그런데 왠 걸.또 첫 수업시간에 강사는 "이 강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텍스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학기 동안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만 한참 했다.당연히 논어,맹자,한비자 이야기가 빠질리 없다.중간 고사는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자 많이 쓰여있는 <사기 열전> 독후감이었다.결국 비슷 비슷한 강의를 세차례나 들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과 땡땡이가 많았다는 것.제대로 배웠다면 훨씬 좋은 리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을.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개인적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품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분이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뿌연 안개같은 실타래를 시퍼런 칼로 두동강 내는 느낌이었다.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또한 다시금 풀무질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글이다. 이 책 <강의>에서도 신영복 교수의 선명함은 드러난다.실천을 가장 우선시 하는 그의 현실적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 돋보인다.그는 단순한 어구풀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동양 고전을 우리의 현실과 새로 만들어야 할 세계에 이입 시킨다.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고전,바로 이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 하나 따로 짚어 말할 바는 아닌 듯 하다. 동양 고전을 읽는 신영복 교수의 독법에 대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이 책은 단순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서문에서 신영복 교수는 분명히 자신의 독법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관계론'이다. 신 교수는 유가,도가,법가등 이곳에 등장하는 사상의 한 구절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관계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존재론'이다.신영복 교수는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에 있다고 밝힌다.즉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고 그 개별 존재들이 사회안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합리와 이성에 기댄다는 것이다.반면 동양 사상의 근원은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고전들은 공통되게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나와 타인,나와 자연,나와 사회라는 관계망을 대전제로 하는 철학인것이다.주역의 효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주역 이외에도 저자는 논어,맹자,노자 그리고 불교의 연기론까지 거론하며 모든 것이 '망'이라는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계론'에 대해 저자가 중요시하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가장 큰 문제 제기는 상품자본주의 사회에 있다고 하겠다.대개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비해 저자는 상품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이 상품 자본주의는 서구식 근대화를 의미한다.저자는 '관계론'이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의 폐해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리뷰어들과 서평들이 신영복 교수의 글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고 있다.글의 내용과 그의 알려진 인품을 고려하면 쉽사리 딴지걸기가 쉽지 않다.나 역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비판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사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는게 나을성 싶다.

 

우선 언제가도 한번 말했지만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관계론'강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우리사회는 관계의 그물망이  지나치게 촘촘하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신교수가 말하는 관계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그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거시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그것이 속도와 소비로 집약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관계성의 회복을 통한 소외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하지만 문제는 그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또한 땅에서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의식적인 면에서 전근대적 양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굳이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단 전근대적 보수성이 관계망의 형태를 띠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신영복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개인들이 분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맞는 말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가장 분자화 되어있다고 보는 젊은 층을 예로 들어보자.그들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대개는 보수적 가부장제 하에 종속화 되어 있다.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식의 전근대성은 여전하다.가족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가 그들 분자화되어 있는 개인에게도 내재화 되어있다.또한 사회를 나가보자.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방대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좋아도 대기업 사장되기 힘들다.여러가지 기회의 차별도 있겠으나 우선 학연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그 학연이라는 것은 무었인가.관계망이다.부정적인 관계망이며 망국의 네트워크이다.그런데 그 내부에서는 상호이익이라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앞서서도 말했지만 신영복 교수의 관계망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늘 낙관적인 미래를 말하고 희망을 전파하기에 이러한 변질은 나의 우려이자 노파심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은 약하고 집단은 힘이 세다.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개인은 혼자 있으면 다 바보가 된다.그러다가도 몇몇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우리 몇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 된다.통속적인 예는 길거리에서도 볼수 있다.조금 확대하면 이는 집단주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된다.신교수의 네트워크가 늘 낙관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폐쇄적 집단주의 성향을 띤 관계망으로 발전되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자의 예를 들어보자.이 책에서 묵가는 겸애와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거기에 계급적으로도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기에 괜히 민중적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묵가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묵가의 진보적 속성이 현재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이슈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몇몇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다.

(묵가는) 실천의지를 추동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와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방어전을 펴기 위해 축성을 하고 방성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에 부적을 써서 그걸 가지고 적을 이길 수도 있다고 믿었다.귀신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묵가를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이것은 당대에도 비주류였고 유가전통에서도 어긋나기 때문에 후대가 탈색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부적이니 귀신이니 하는게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동학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가 있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개인의 의지는 철저히 배재된 집단자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살길이 있었으나 거자의 신념을 위해 묵가의 민중들은 생사여탈권 마저 넘긴 상태가 된 것이다.옛날에는 의를 지키기 위해 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지금보다 신념과 가치가 존중받았던 시대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즉 이러한 비판도 현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한 개인의 생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묵가의 사상은 분명이 현대에 돌아봐야할 여러 가치들을 제공해준다.하지만 묵가의 이러한 사교적 모습,또는 작은 병영사회적인 모습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알려주지 않는다.묵가라는 집단 관계망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희생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존재론=상품자본주의=부정의 대상/ 동양=관계론=화동의 사회=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각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읽으면서 생겼던 몇 몇의 의문과 주관적인 감상을 옮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는 관계론이라는 틀(당파성)을 가지고 읽어낸 한 가지의 길일뿐이다.고전의 바다는 넓고도 넓다.퍼담아도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도 한다.나 역시 한바가지 쯤 퍼 담고 싶은 바람은 있다.하지만 아직은 형편없이 부족하다.스스로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날은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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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8-14 12:39   좋아요 0 | URL
아...<동양문화사> 아픈 기억이 떠오르네요. 저희 학교에 결석 초과하면 F주는 FA라는게 있었거든요.1학년 과목인 <동양문화사>를 FA맞고, 4학년 때 재수강한 생각이 나네요. 뭘 배웠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저도 동양고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데.....드팀전님, 멋져요!
 
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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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다수의 소수자는 여성이다.하지만 그녀들은 소수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대다수의 그녀들은 오히려 다수자의 논리(남성가부장제)를 강화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한다.그녀들은 고착화된 역할행동 모델에 따라 세상이 편안하게 돌아가는데 '아내''어머니'로써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라고 믿는다.그녀들의 시각은 가정에만 머물러 있다.인식의 지평은 가족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녀들은 가족전체의 부동자산을 높이기 위해 부녀회를 중심으로 아파트값 담합에 나선다.또한 옆집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들락거린다. 그녀들을 한국에서는 '아줌마'라고 한다.

이 책<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한다.무대는 한국 중공업의 메카 울산광역시,시대적 배경은 IMF를 넘어선 2000년대 초반,주요등장인물은 노동자 남편,노조 전임자와 그들의 아내....등이다,저자는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권력관계와 가부장제의 역사적,구조적 맥락등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담는다.현장 노동자의 아내로 살고 있는 저자의 경력은 참여방법이 가능케 하는 주요 열쇠가 되었다.먼저 저자는 책 서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족신화'에 대해 비판적 접근이 필요함을 말한다.

사랑과 친밀감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당위적 이상과 달리 현실의 가족은 문제투성이다.누구든 가족의 문제를 '비밀'로서 타인들에게 극구 숨기고 언제나 자기 가족이 '단란'한 것 처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족신화'에 대한 핵심적 용어로 등장하는 '가정중심성'은 이를 보편적언어로 풀어 놓은 개념이다.

가정중심성은 '사회와 분리된 영원한 사적인 안식처로서의 가정'이라는 환상과 '차이에 입각한 남녀간의 평등'이란 허위적 껍데기를 두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는 가부장제의 한 형태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이 '가정중심성'은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의 일상과 그들의 문화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저 가정중심성이 작동하기 위해선 남녀간의 가정내 역할모델이 엄격하게 구분되어야한다.남자=일터/여자=가정이라는 도식이 나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의 경제적 토대가 갖추어져야한다.울산의 현대 자동차는  '1가족 1인생계부양자' 라는 문화가 거부감없이 고착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상대적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다.우선 유니언 노조의 특성상 인원과 결집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강한 교섭력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를 지속적으로 상승시켜왔다.비교적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 가족은 중간계급에 가까운 정서적 경제적 안정감을 누린다.하지만 보통 말하는 중간계급과의 차이가 엄연히 발생한다.저자는 컨베이어벨트로 표현되는 포디즘적 생산 양식의 비인간성에 대한 지적을 빼먹지 않는다.사무직 노동자들과 달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고임금에는 특근과 야근이라는 비인간적 노동력 착취가 담보되고 있기때문이다.주간근무와 야간근무의 맞교대 방식은 노동자 가족의 삶의 패턴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다.저자는 노동자 아내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들이 야간근무를 한 남편을 배려하기 위해 낮시간 집을 비우는 일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들은 대기업 공돌이들과 결혼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주인공들의 계급적,환경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그녀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사꾼집안의 딸들이었다.남존여비가 강했던 부모들은 그녀들에게 적당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그녀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생계유지자가 되기 위해 생산현장으로 뛰어야했다.그것도 전문직을 얻을 수는 없었기에 공장시다, 판매원,경리등이 고작이었다.그녀들에게는 가족의 짐으로부터 탈출이 무었보다 필요했고 그게 바로 결혼이었다.현대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결혼이 무슨 장식품처럼 필요했다.저자는 근무형태의 특이성과 기혼자 중심의 조직문화 때문으로 파악한다.결국 탈출과 조직문화내의 필요는 빠른 산화작용을 불러일으킨다.대부분 인터뷰이들은 몇번의 만남으로 결혼에 골인한다.대기업 직원이라는 말은 그만큼 그녀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럿고 탈출 후의 안정성에 대한 불안감까지 막아주었다.

저자는 다음으로 그녀들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전업주부로 많이 남아 있는 이유를 살핀다.먼저 도시의 특성이 지적된다.울산이란 도시가 중공업이나 화학중심의 '남성중심적'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여성들의 일자리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또한 노동자 남편들이 그녀들의 취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에도 경제적 이유가 있다.특근 한두번이면 커버될 돈을 벌기 위해 아내가 집안을 비우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가난한 노동자계층이 어쩔수 없이 아내의 노동을 허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비하면 사뭇 다른 태도이다.여기에는 주말특근과 야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마초적 자신감도 묻어있다.또한가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아내의 취업에 부정적인데는 노동자들 자체가 쳐놓은 남성중심문화에 스스로 갖힌 자승자박이 한 이유가 된다고 한다.현대자동차 노동자 집단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남성중심 문화가 공고한 곳이다.마치 군대처럼 이러한 집단문화는 여성을 성의 대상화하는 성향이 있다.노래방의 아줌마 도우미같은 것도 울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 노동자는 회고한다.이들 노동자는 그런 아줌마들과 함께 논다.어느 노동자의 아내일 수도 있고 옆동네 아줌마일 수도 있다.밤새 그렇데 논 노동자들에게 역시 야근이란게 돌아온다.야근은 자기 아내들의 비슷한 부정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다.결국 막연한 불안감은 아내들을 집안으로 들여놓게 되고 좋은 아내 어머니로써의 역할만을 강요한다.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들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이 신념을 강화한다.대개 중산층여성들의 경우 자녀출산후 정체성의 혼란으로 우울해진다고 한다.하지만 울산의 그녀들에게 정체성의 혼동은 없다.우선 동질화된 문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된다.울산이라는 특수공간은 두자녀를 기본으로 한다.한자녀를 갖고 있는 경우 주변의 집단문화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마치 비정상적인 양 느끼게 한다.저자는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와 현대자동차의 기업복지전략이 육아와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그녀와 남편들은 최고의투자를 아끼지 않을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아이는 기름“Q을 먹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때문이다.그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두려움에 대해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특이한 것은 자녀 교육 문제에 있어서 남편들의 참여이다.가정은 여자의 일이란 공식을 부담없이 실천하여 가사노동에 손을땐 것이 이들 노동자들이다.하지만 육아노동에는 적극참여한다.저자는 이것 역시 역할의 분화보다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전통적 수법으로 파악한다.즉 자신의 대를 이을 자녀들을 아내보다 큰 비중을 두고 보는 것이다.거기에 남편들의 육아간섭은 반대급부로 여성들의 '완전한 어머니'에 대한 역할 모델을 강요하는 효과를 갖고 있기때문에 여성들의 부담을 가중된다고 본다.

저자는 가정중심성의 문제를 노동시장과 경제구조와의 밀접한 관련에서 찾는다.

안식처로서의 가정에 관한 신화가 존재하는 것은 안식처가 될 수 없는 가정 바깥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산업화,근대화 이후 성별분업이 강화된것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가정 내 책임을 공유할 수 없도록 장시간 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직업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선 가부장적 특권을 유지시키는 장시간 노동,그리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인 교대제 근무가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급제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자들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남성들이 기존에 가정에서 누려오던 가부장적 혜택도 포기되어야 한다.

이 책은 살아 있는 페미니즘 책이다.책의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흐름도 자연스럽다.물론 가끔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해석이 자의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하지만 객관성의 틀에서 그다지 벗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모든 해석상의 다양함을 다 펼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기때문이다.매일 매일 비슷 비슷한 집단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살펴봐야한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기 쉽다.노동자의 일상과 그들의 힘든 삶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이다.노동자는 사회변혁의 한 주체이긴 하지만 무오류 집단은 아니다.'살아움직이며 실철하는 진짜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무한한 각성과 변혁 필요하다.이 책은 그런 실천을 위한 첫단추를 끼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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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8-01 15:36   좋아요 0 | URL
매, 매우 어려워 보이는 책입니다...가부장적 혜택, 포기하겠습니다...

2005-08-01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5-08-02 11:0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ㅋㅋ 님은 아직 결혼도 안하셨잖아요.물론 일반 관계에서도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작용하겠지만...좀도 미시화하면...가정아니겠어요.님은 부인을 만들어야 포기든 수용이든 할 수 있습니다.경기장도 없으면서 무슨 볼을 차시겠다고.ㅋㅋ....(근데 결혼 안한거 맞죠? 매일 미녀들과 술판을 벌리시니까 ㅋㅋㅋ)
근데 이 책 읽기 아주 쉽습니다.현장 인터뷰가 중심이라서 그것도 사투리 그대로 써놓아서...제 주위사람들이 늘 사투리를 쓰니까 그사람들이 귀에서 뭐라 이야기하는 듯 어투까지 느껴지던데....
**** 님> 탱큐...어디서 주워들은 글동냥을 요리조리 모아놓은거죠.뭐 짜달시리(이건 부산 사투리입니다.저도 부산와서 배운..) 특별하게 잘 아는게 있어야지..ㅉ,ㅉ,
휴가기간인데 어디 바...다라도 한번 가보심이 어떨까요.거기서 미인들과 함께 람....바다를 배우는 거에요.구....설수는 걱정마시고.휴가 끝나면 두....문불출하면 되잖아용.ㅋㅋ **** 님 즐짐풀기.

2005-08-0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홍달 2005-08-05 16:3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슴돠^^ 이 책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리뷰는 못쓰고 있네요^^:;
 
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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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낀 도시는 새로운 세상이다..안개는 사물들의 공간배치를 낯설게 한다.바로 앞에 있는 사람만 겨우 식별할 수 있다.저 멀리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번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처음엔 검은 그림자일뿐이다.점점 윤곽이 짙어진다.수채화를 그리는 붓터치처럼 시간과 공간이 중첩시켜놓은 막을 뚫고 대상은 선명해진다.얼굴,눈,코,입....안개가 만든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은 과거에 알던 사람이 아니다.주변을 지워버린 공간이 대상의 느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마치 흰색 도화지 속에 그와 내가 갇혀 있는 듯 하다.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안개같은 것.인생은 구름같이 모호한 것이다."

.<안개>의 스토리는 가랑비가 오는 어느날,아우구스토가 거리에서 에우헤니아를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그녀는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피아노강사이다.한눈에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그녀의 고모를 통해 그녀를 쟁취하려한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우리시오라는 게으른 애인이 있다.관념적인 사랑을 하고 있던 아우구스토는 세탁소 직원인 로사리오에게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해소한다.주인공은 관념속에서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운다.자신이 가지지 못한 열정과 선명함을 보상심리와도 같다.그의 관념속에서 커가는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은 모든 여성적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TV단막극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하다.물론 그 사이사이 아우구스토의 독백이라든가 친구 빅토르와의 대화등은 의미심장하다.책의 3분의 2가 넘을때까지 신파같은 스토리는 존재론적 질문과 어우러져 이어진다.그리고 25장 말미.갑자기 우나무노가 등장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아우구스토와 빅토르가 이러한 소셜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독자 여러분이 손에 들고 읽고 있는 이 소셜의 작가인 나는, 나의 소셜적인 인물들이 나를 변호하고 나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가련한 두 소셜적 존재에게는 악마의 신이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후반부에서 말러 음악의 '개파'(전복적 파괴)'처럼 흥미진지함의 가속페달을 밟는다.배신과 질투,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실패로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염두에 둔다.그는 저자 우나무노를 만나러 간다.피조물과 창조주의 대화,인간과 클론의 대화,원본과 이미지의 대화이다.이 직접적 만남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디즈니 만화의 도널드 덕이 월트 디즈니를 찾아간 것같다.실사와 합성한 그 만화에서 도널드 덕은 디즈니에게 '자신이 왜 미키마우스에게 에이스자리를 뺏겨야 하는지..왜 미키는 선하고 자기는 주인공임에도 괴팍한지...' 등을 목소리 높이며 따진다. 주인공 아우구스토와 저자 우나무노의 토론은 아우구스토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그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자신은 시뮬라르크요 환영일 뿐임이 확인되었다. 우나무노는 친구 빅토르의 입을 통해,또 아우구스토의 독백을 통해 이미 그에게 그가 환영임을 알렸다.빅토르와의 대화에서 아우구스토는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나를 삼킨다.나를 삼킨다.빅토르,나는 그림자로써 허구로써 시작했어......안개 속의 인형처럼 유령처럼 방황했어."

이런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토는 자신을 삼키는 방법으로 자살을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우나무노는 주인공의 자살이 불가하다고 말한다.그의 언명은 아우구스토에게 마지막 남은 주체적 선택마저 앗아가고 스스로 피조물이자 이미지일 뿐임을 각인시킨다.우나무노는 아우구스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살할 수가 없어.왜나하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야.너는 살아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야.왜나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우구스토는 장자의 호접몽을 이야기하며 패러다임 바깥에서 공격을 시작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꿈을 꿀때 무엇이 더 존재하는 겁니까?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입니까?아니면 그의 꿈입니까?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이미지의 전복.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아우구스토가  질문한다.결국 저자 우나무노는 흥분하고 아우구스토의 사망선고를 하고 만다.피조물과 이야기하다 화가난 창조주.이미지와 이야기하다 이성을 잃은 본체,또 다른 말로 하면 자기안의 또다른 자아와 이야기하다 벽에 부딪힌 우나무노.

아우구스토는 죽는다.자살인가 타살인가? 알 수 없다.하지만 아우구스토는 저자 우나무노에게 당신 역시 피조물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저주를 남기고 죽는다.모든 인간과 이미지의 한계상황,절대상황.

이 책에는 '안개'로 대표되는 모호함,부정확성,혼동에 대한 고무적 서술이 여러차레 등장한다.데카르트적 존재론은 중언부언인 언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근대적 자아론을 해체하고 나의 자아조차 타인의 자아와 혼동시키는 전략.이러한 안개같은 혼동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었이었을까? 결국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인가? 아니면 존재 이전의 본질인가? 신파극같은 내러티브와 중층적 구조,소설이란 장르에서 일탈하여 만든 소셜.언어의 파편성에 대한 비난...우나무노는 근대적 인간과 자아론의 틈새를 가로지르고 있다.인생은 안개고 안개 속에선 무엇도 선명해지지 않는다.전략은 혼동이다.꿈과 현실이 혼동되고 허구와 환영이 혼동된다.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혼동된다.그리고 나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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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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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대학교때 고구마 팔아서 유럽여행 다녀올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친구다.몇달 전에 그 친구를 만났다.오랜만에 맥주 한잔 하며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들었다.그 친구는 중국인들의 게으름과 비합리적 사고에 대해 맥주 거품보다 더 큰 거품을 뿜어댔다.워낙 말을 재미있게 하는 친구라 우리들은 깔깔 거리며 또 공감하며 들었다.그 친구가 작은 공장을 지을 때 일이다.

지난 해 초의 일이다.우선 공장을 수주하고 건설업체와 하청업체를 선정했다.최초에 공장은 5월까지 완성이 된다고 했다.그러나 4월이 다 가는 시점에서 공장의 완성도가 6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여러번 감독관을 채근하고 나무랐지만 중국인 공사담당자는 느긋했다고 한다.가끔은 그의 지나친 채근에 "이거 우리가 가난하다고 무시하는거냐?" 는 식으로 나왔단다.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친구는 담당자를 살살달래기로 했다.술도 먹이고 밥도 먹이고 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들자.' 딱 까놓고 이야기하자'고 했단다.

친구:'진짜...늦어도 괜찮으니까...진짜로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언제까지 다 마칠 수 있나?"

중국공사담당관 :"글쎄...뭐 7월이나 8월쯤"

친구: "아니..그렇게 이야기 하지말고...니네들이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넉넉한 시간을 대라."

중국공사담당관: "음....8월 중순"

친구: '좋다.그럼.내가 8월 15일까지 기다린다.대신 계약서 하나쓰자.니네들이 여유있다고 정한 시점인 8월15일까지 다 못끝내면 그날 부터 나도 손해가 있으니까..하루 연기될때 마다 위약금은 00달러 씩 내라"

중국공사담당관: "..... ... . 좋아,그렇게 하지요.8월 15일,그런데 궁금한게 하나 있소이다.우리가 만약 8월 15일 보다 먼저끝내면 빨리 끝낸 날 마다 계산해서 00달러씩 주는거죠?"

친구: "(허걱)..야 그게 말이되냐.니네들 원래 5월까지 하기로 한건데.거기다가.....야 통역. 말도 안된다고 전해"

조선족 통역: "이사님....근데 저 사람 말이 맞는데요.늦으면 벌금내고 빨리하면 보너스주는게 당연한거아니에요. 난 이해가 안되네요 이사님이...."

우리의 기준으로는 답답하고 말이 안통하는 이야기다.하지만 중국에선 당연스러운 일인가보다.류진운의 <닭털같은 나날>에는 중국의 현재와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세편의 이야기가 있다. 동명소설인 <닭털같은 나날>,그리고 <관리들 만세>는 자본주의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특히 급격한 자본주의화에 따른 소시민들의 의식과 일상의 변화에 작가의 시선은 고정된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이 단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만이 아님에 공감한다.전통의 가치가 무너지고 '황금만능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잡는 사회가 가진 보편성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중국보다 자본주의 이행이 앞선던 우리의 옛 모습도 이 보편성의 틀 안에 있다.'압축 근대'라는 이름으로 설명되는 한국의 단기간 자본축적 과정은 우리들 일상의 모습도 소설의 그것처럼 바꾸어 놓았던게 사실이다;이 소설이 한국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고민과 행동들이 우리 과거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기때문이다.즉 독자와의 공감에 일단 성공하기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소설<닭털같은 나날들> 장점이다.또한 가지 큰 매력은 소설이 가진 유머이다.소설의 소재들은 충분히 어둡게 그릴 수 도 있고 신세한탄이 사회구조의 모순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외칠 수 도 있다.하지만 작가는 그 둘을 벗어나서 밝고 경쾌하게 이 문제의 여러가지 단면을 보여준다.문득 학교 다닐때 학과에서 기획하고 공연했던 몇몇 사실주의 연극이 떠오른다.나도 물론 관여했었다.이 소설과 비교해 보게 된다.학생들이 만든 극의 한계도 있었겟지만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만들었던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극들은 직선적이었다. 가난한 신문배달 청년이 힘겹게 울고 불고.... 어떤 계기로 불끈 일어나...각성하고.... 노동자로서 부활하고..... 이 소설의 유머스러운 접근과 비교하니 왜 그렇게 촌스러웠느지 알 수가 없다.

<닭털같은 나날들>들은 일상의 욕망과 치졸함이 빠른속도로 연쇄충돌한다.주인공은 아내의 직장문제로 촌지도 주고 또 공무원이란 이유로 촌지도 받는다.촌지가 거절 당했을 때의 황망함.또한 촌지란걸 처음 받고 처음엔 어색해하다.하지만 이네 그 달콤함에 즐거워하는 모습들.물고 물리는 얄팍한 일상의 고단함이 그 안에 있다.그 고단함이 삶의 치열함이라고 애써 위로해본다.소설의 끝장면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주인공의 미안함을 느낀다.그렇게 잘해주신 선생님이었는데......하지만 여기서 또 일상....... 주인공은 잠시 미안함을 느끼다가 다시 즐겁고 지겹기도한 일상으로 금방 복귀한다.나는 이 대목이 가장 마음에들고 또 안쓰럽고 썸뜩하다. 마음의 가책도 서글픔도 오래 간직 하게 하지 못하는 일상의 무거움이 나를 짓누르는 대목이다.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지만  무섭고 위험한 모습은 아니다.일상은 평화롭고 또 달콤한 형상을 하고 있다.규칙적인 항상상이 존재하며 나락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안전핀이다.이 보이지 않고 모순적인 존재,일상이란 녀석은 주인공의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며 '주체'를 잠식해 간다.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주체를 상실해야하는 주객전도.이러한 모순이 무서운 것은 이것이 소설 속에서만 살아있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옆집 똘이 엄마네가 판교옆에 땅사서 부자가 되고 있다는데 .... 앞집 순이가 외가쪽 친척덕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강남 00유치원에 들어갔다는데..... 뒷집 철이네는 최근에 큰 차로 업그레이드 해서 뻐기고 다니는데.......너는 뭐냐? 그게 다 좋은거 아니냐? 세상 사는게 뭐 별일 있냐? 적당히 비비고 적당히 뻐기면서 사는게 인생인거 아니냐? 아닌척 해봐라...너만 손해지.약게 살아라 그게 성공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이 수많은 언어들이 담고 있는 담론이 원하는 것은 무었일까?  행복한 일상이라는 환영이 무섭기까지하다.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중력의 영'이다.잡아 끌고 평준화시키고....작은 것에만 분노케하는 힘이다.하지만 누가 일상이라는 거대한 자석이 내뿜는 자기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까.지금도 자기장이 우리의 발을 당긴다.

<관리들 만세>는 복지부동 소심증 공무원들의 권력투쟁을 보여준다.회사 생활하면 가끔씩 만나게 되는 인사철의 복잡한 관계와 이야기들이 이 소설 속에서 쟁쟁거린다.평소 대범함을 자랑하던 사람들도 어디 어디서 들은 소식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진다.여기저기 몇몇씩 모여서 자신들이 마치 무슨 정치평론가나 제갈공명이 된 듯 판세를 펼쳤다 접었다 한다.그래봐야 공고붙고 며칠지나면 공고에 붙은 대로 줄을 쫙서서 적응하게 될꺼면서 말이다.이 소설에서는 보여지는 관리들의 모습은 자신의 이익에만 머리를 굴리는 소시민들의 얄팍함을 묘사한다.또한 권력의 행배에 따라 정상적 업무까지 영향을 받는 중국시스템의 부재까지 작가는 비웃고 있다.그러한 면에서 우리 사회는 어떨지 모르겠다.소설로 극화된 중국 공직사회처럼 시스템부재상황은 아닐것이다.하지만 작은 부분 부분에서 끝없 권력투쟁이 있고 이의 행배에 좌지우지 되는 불합리한 체계가 상상외로 많을 것이다.마지막 소설<1942년을 돌아보다>는 42년 대기근에 대한 르포타주형식의 소설이다.앞으 두소설과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좀 차이가 난다. 300만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정치에 얽매여 이를 구제하지 못한 위정자의 모습을 비판한다. 이번에는 작가가 조금더 직접적이고 계몽적인 방법을 사용한다.장개석과 국민당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음에 대한 다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촌로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태로 쓰여져서 영화화한다면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소설이 보여준 블랙유머가 훨씬 매력적이다.

이 소설에서 특별한 상상력이나 구조의 뒤틀림을 기대해서는 안된다.전통적 소설 구조에 혁식을 가하는 소설에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다지 큰 만족을 주긴 어렵다.구조는 단순하며 서술도 평이하다.신사실주의가 가진 현실의 과육과 블랙 유머의 향신료가 편안하고 즐거운 소설읽기를 도와준다.만만하지만 일상의 무게를 돌아보게 하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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