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시옷 -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손문상.오영진.유승하.이애림.장차현실.정훈이.최규석.홍윤표 지음 / 창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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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만화를 좋아했다. <소년중앙>과 <보물섬>이 나오는 날을 월급쟁이 봉급날 기다리 듯 기다렸다.독고탁,봉구,꺼벙이,찌빠,둘리,까치 등등....  이들이 펼치는 웃음과 울음에 본 만화를 또 보고 봐도 질 리지 않았다.연습장에는 전부 만화만 그려놨다고 선생님께 꿀밤 먹은 기억도 난다.고등학교 때까지 라면집에서 틈틈이 만화를 즐겨봤는데 언제 부터인가 만화와는 거리가 멀어졌다.굳이 만화를 싫어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요즘도 스포츠 신문에 나는 만화는 별 관심 없으면서도 본다,<씨네21>이 있으면에 정훈이의 만화도 잊지 않는다.00일보에 실리는 손문상의 한컷 짜리 그림은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에 본 만화다.(손문상의 그 한 컷 짜리 스케치를 만화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만화가 멀어진 건 만화 자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세상에 만화말고도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위안해 본다.

만화집<사이시옷>은 <십시일반>의 후속편이다.국가 인권 위원회가 기획했다.만화가들이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사이시옷>에는 비정규직,성차별,미혼모,빈부격차에 의한 교육차별,군내의 폭력 문제등이 다루어 지고 있다.언젠가 당대비평의 특별호로 나온 <탈영자들의 기념비>라는 책이 생각났다. 한국 사회 소수자 문제와 국가 파시즘의 문제를 여러 필자들이 나누어 집필한 것이다.<십시일반> 역시 똑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좀 더 대중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다.

최근에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손문상은 비정규직 문제를 그렸다.통근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버스가 도착했다.몇 몇은 버스를 타고 간 듯 하다.남겨진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어떤이는 분노에 찬 얼굴,어떤 이는 황당한 표정,어떤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난감해 한다.버스안내표지에는 이렇게 써있다. '통근버스...정규직외 탑승금지'....   한 사무실 청소부 아주머니가 걸레 카트를 밀고 화장실로 들어간다.화장실 문을 여니 그곳은 아주머니들의 휴게실이며 탈의실이다.옷들도 걸려있고 심지어 전기밥솥도 있다.아주머니는 좌변기 위에 밥상을 얹어 놓고 웃는다.'어서와...'

우리 여자 화장실도 청소아주머니들의 카페다.여자 화장실이라 볼 수는 없지만 지나가며 들어보면 아주머니들이 바닥에 앉으셔서 커피드시며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걸 알 수 있다.가끔 어떤 여직원이 '왜 여기 계세요..."하며 딱한 소리를 하기도 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노동계가 풀어야 할 가장 큰 현안이다.양대 노총도 어떻게 든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결코 쉽사리 풀리지가 않는다.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은 결국 인간의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다.하지만 경영의 논리, 자본의 논리 앞에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그들에게는 최소 비용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비정규직 문제를 접근하는 보수 언론들도 같은 방식이다.비정규직이 시위를 하고 시끄럽게 하면 결국 대한민국 경제 다 말아먹는 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한 편에서는 비정규직의 서러운 삶에 대해 휴먼기사를 쓰기도 한다.면피를 위한 양다리 걸치기다.경영진을 압박하는 것도 중요하고 정규직의 양보를 강요하는 것도 필요하다.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해 자기 권리를 보장 받으며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서는 눈감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새 자본가의 논리,경영자의 논리에 슬근 묻어가려는 것일까?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작가 손문상은  비정규직의 차별을 보여주기 위해 정규직의 모습을 반대 급부로 보여준다. 이 부분은 또 한번 곱씹어 봐야한다.정규직들에게 비겁하고 소시민적인 모습이 만연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규직 내지는 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기존 노조와의 관계도 고려해야한다.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결코 적대적 모순 관계가 아니다.그들은 어떻게 보면 자본에 의해 끌려다니는 사람들이다.한 쪽이 손목을 묶여 끌려다닌 다면 한 쪽은 목줄이 묶여 있는(물론 이 차이도 엄청나지만)것이다.결국 정부 정책으로 비정규 문제를 풀어내기 전에는 개별 노조와 회사별 투쟁이 진행돼어야 한다.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와 공감은 필수적이다.손문상은 물론 정규직의 동참을 바라는 마음,또 정규직의 비겁함을 질책하는 차원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모습을 적대적 관계처럼 그렸을 것이다.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에 대한 정부와 회사의 편애가 만든 것은 아니다.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고민은 어려웠던 것일까? 물론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나의 노동자로써의 위치가 정규직 사원을 적대시해서는 곤란하다는 논리로 나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내 주위에서 봐 온 소시민적 노동조합원들은 비정규직 문제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한다.그러나 이러한 차별의 적시를 위한 적대에는 또 감정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 만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실린 군내 내 폭력문제를 다룬 <창>이다. 주인공 병장 정철민은 군대 속어로 FM(음..뭐 모범적이다 뭐 이런 뜻이다.여자분들을 위해..)이다.나름대로 군대 역시 사회의 한 영역이라 생각하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동료애도 높고 맡은 바 소임도 끝까지 다한다.군대 상사로 부터도 인정을 받는다.우리가 흔히 대학이나 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성실한 보통 젊은이이다.그의 분대에 고문관 신병 홍영수가 온다.병장 정철민은 홍영수의 교육을 담당한다.어느 정도 군인 하나 만들었다 생각햇을 즈음 훈련 중 사단장의 검열,신병 홍영수의 군장에서는 깔깔이 두 벌과 건빵,그리고 비닐 봉지가 나온다.(주:군장 무게를 줄여 편해보려는 잔꾀로 대개 말년 병장들이 쓰곤 하는 방법,물론 걸리면 죽는다)...평범하고 성실한 정철민과 분대원은 단체로 뺑뺑이를 돈다.평범하고 성실한 병장 정철민은 열받아서 어떻게 했을까?... 몇 대 때리고 밟았다.....신병 홍영수는 화장실에서 자살 미수를 한다.

이 만화를 보면서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이유는 병장 정철민이 지극히 평범한 보통 청년이라는 것.또한 그가 가한 폭력이 '저 정도면 어휴 나같아도..' 하는 이런 상황이라는 것.그리고 그가 행한 폭력이 내가 군대에서 또는 사회에서 겪는 폭력에 비하며 그다지 대단치 않다는 것.이러한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약간 혼란스러웠다.그러다 곧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만화를 보면서 군대 문화에 나도 모르게 감정동화가 돼어 버린 것이다. 대개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군대 경험이 금방 만화 속 내무반으로 나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그러면서 '햐..우리 때도...'"나같아도' 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나 역시 폭력적인 군대문화 속에서  군대 폭력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군대에는 어디나 고문관 하나 둘 있다.나 역시 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어깨를 다독이며 돌봐주지도 않았다.대개 비웃거나 무시하거나 아님 '아휴..이 빙신..됐어.널 어떻게 믿겠냐 ..꺼져' '담에도 이러면 진짜 죽는다'  이런 언어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아무래도  자기를 통제하는 법,타인에 대한 고려,폭력에 대한 생각 등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변명해 본다. 

이 만화의 진짜 압권은 이렇게 평범함 속에 있는 폭력,피해자보다는 가해자 쪽에 동화돼는 다수의 마음 속에 있는 폭력,그리고 평범함이 폭력의 가해자가 돼게끔 만드는 구조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병장 정철민은 영창을 나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죗값을 치르고 돌아온 나를 새로 생긴 작은 창이 비웃듯 맞아 주었다."

폭력을 만든 것은 나와 당신이며 또한 키운 것 역시 침묵한 나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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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2 16: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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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7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현대송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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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헤어스타일이 죽인다.도쿄 어딘가에 있는 효자동  이발소 도쿄지점에서 하시는 머리인 듯 하다.그 헤어 웨이브는 소싯적 김완선 올챙이 춤의 라인을 떠올리게 한다.아무래도 일본의 자랑 코끼리표 고데기를 쓰시나 보다.그래도 가끔은 고이즈미 선생도 거울을 보며 스트레이트 퍼머에 대한 욕망을 느끼곤 하 실 것 같다.혹시 모른다.집에서 약사가지고 발라 봤을 지도.. 고이즈미 총리의 멋있는 점 중에 하나는 그의 당당한 걸음이다.그는 참 씩씩하게 걷는다.걸음의 속도는 '알레그로 모데라토' ,보폭은 김기수 쭉쭉 춤의 3분의 1,걸음의 무게는 비단 겉 이불 펼칠 듯 날렵하다.

은발을 휘날리며 고이즈미가 간다.즐겨입는 회색양복 사이로 비치는 하얀 와이셔츠가 그의 머리 색과 참으로 어울린다.고이즈미가 간다.날렵하게 삭삭삭.....바람을 가르는 닌자도 고이즈미의 움직임을 상찬했을 것이다. 검은 칠을 한 일본 절 집 사이로,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고이즈미가 간다.

TV에서 본 고이즈미는 날렵한 일본도처럼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카메라 후레쉬가 터지고 일본 통신원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돼어 있다.  '이번의 방문은 사실 예정이 돼어 있던... 그동안 일본 우익은... 중국과 한국정부는 강력하게....도쿄에서 ...이 아무개였습니다"

야스쿠니....  지난 해 일본 연수 중 어떤 일본인 강사가 그런 이야길 했다. "뭐 별로 갈 때 없으면 야스쿠니 신사도 그리 멀지 않은데..왜 요즘 TV에 많이 나오는데 궁금하진 않으실까 해서.."  일본인 강사가 무슨 민족주의적 사명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그냥 연수생들이 시간 남을 때 뭐하나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슈가 돼는 곳이니 직접 한 번 보는 건 어떠냐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한 것이다.연수생들의 반응은 그냥 시큰둥 했다.말해 놓은 강사가 무안할 정도로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나 역시 뭐 딱히 할 말도 없고 해서  "아...야스쿠니는 TV에서 많이 봐서 별로 새롭지가 않네요.그냥 TV로 보는 것에 만족하죠."라고 말했다.그러자 강사가 "하이...소우데까.....", 우리가 역시 '하이 소우데스"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노니 장판 뜯는 다고 그 강사의 말을 들어볼 걸 하고 뉘우친다.그랫으면 이 책<야스쿠니 문제>를 보면서 조금 더 실감났을 것 같다.사실 야스쿠니에 A급 전범 14명이 봉안돼어 있는 것은 누구나 안다.또한 야스쿠니 신사가 침략전쟁의 상징이라는 곳도 누구나 안다. 그곳을 웨이브 머리 일본 총리가 방문한 다는 것이 역사에 대한 뉘우침이 결여된 행동이란 것도 전부 안다.뉴스에서 뭐 대개 그정도 이야기 해주니까 말이다.그리고 끝이다. 나 역시 야스쿠니 문제가 나오면 '재네들 또 저러네." "어디 한 두번이냐""국내 우익들의 힘을 모으려고 잔머리는.." "저러다가 주변국에서 난리치면 또 조용했다가 다시 몇년 지나면 또 그러겠지 "....이 정도 생각했다.다른 말로 뉴스에서 주는 정보 이외엔 별로 생각 안해봤다는게 사실이다.그래서 이 책 <야스쿠니문제>를 읽으며 나의 무관심에 머리를 쳤다.띠용...띠용.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신앙의 상징이며 국가교의 보루이다.1911년 나온 가와카미 하지메의 <일본의 독특한 국가주의> 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은 신국이다.나라는 곧 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 일반의 신앙이다.이 신앙은 명백히 의식되지는 않지만 추론해보면 일본인 일반이 반드시 수긍하는 것이다.일본인의 신은 국가다.그리하여 천황은 이 신인 국체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른바 추상적인 국가신을 구현하는 자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대외전쟁을 치룬다.전쟁을 위해서는 국민동원이 필수다.마지못해 끌려가는 동원은 부족하다.병사들 뿐 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까지 전부 국가를 위한 죽음을 아름답다고 믿어야 제국은 승리할 수 있다.국민 동원의 이데올로기 상징으로 야스쿠니가 등장한다.야스쿠니는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국가를 위해 산화한 신으로 모신다.촌로들에게는 평생가여 한번 친견하기도 불가능한 천황-그도 곧 신이다-이 죽은 이들을 위한 제주가 된다.유족들은 전사한 아이의 슬픔보다 그들이 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 올바르게 쓰였다는 것에 감사한다.전사자의 유족은 만족감은 느낀다.유족의 비애를 그 상태로 계속 두면 제국의 팽창에는 마이너스이다.전국의 유족들이 매일 울어대기만 해봐라 누가 자기 자식을 전쟁터로 내 보내겠는가.전사자는 신으로 유족은 가장 명예로운 사람들로 국가의 영예를 돌리는 것이다.1895년 시사신보에 실린 <전사자의 대제전을 거행해야 한다>라는 사설은 야스쿠니의 목적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전사자가 현창되어 유족이 그것을 기뻐함으로써 다른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희망하게 되는 것...

히시키 마사하루는 <정토진종의 전쟁책임>이라는 책에서 야스쿠니 본질의 세가지 요소를 이렇게 말한다.오랫동안 자국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하는 '성전교의', 전사한 장병을 나라를 위해 죽은 존재로서 영웅화하는 '영령교의', 국민에게 영령을 본받으라고 호소하는 '현창교의'

사실 모든 근대 국가가 전쟁 사망자에 대해 국가적 예후를 아끼지 않는다.그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야스쿠니 신사가 운영되는 원리와 유사하다.국가라는 이름으로 죽은 자들은 호명된다.그 호명은 다분히 현세적이며 또한 정치적이고 선별적이다.일단 그렇게 국가의 이름으로 호명된 망자는 전부 호국의 영령이되며 야스쿠니에서는 신이 된다.하지만 야스쿠니와 대개 근대국가가 설치하고 운영하는 국립묘지와는 차이가 있다.가장 큰 차이는 '추도'와 '현창'의 차이이다.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유족회단체의 어떤 사람들은 아무때나 수구의 깃발을 휘날리는데 동원돼기도 한다.그러면서 하는 말은 "피로 지킨 대한민국 빨갱이가 왠 말이냐?" 하는 식이다.국가가 망자를 호국영령으로 만들어 준 것 까지는 이해를 한다.하지만 국가를 지켜온것이 유족회나 상이군인만은 아니다.또한 아무때나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수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은 볼성 사납다.호국영령이 지키 이 나라가 잘 돼는게 과연 그 길인가는 언제 생각할 것 인지 모르겠다.

야스쿠니가 일본의 독특한 문화적 한 형태라고 하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이러한 문화주의적 주장은 사람을 가끔 헷가리게 한다.우리나라에서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도 그러는데 지들도 뭐 전쟁에서 죽은 군인들이 지들 입장에서 보면 애국자겠지...지들 입장에서 보면 이해는가"... 그럴싸 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 순수한 마음은 무식하기 때문에 나온 설사형 휴머니즘다.마치 자신이 폭넓은 사람인 양 하지만 결국 아시아의 모든 일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를 돌아보지 않은 모자란 말이다.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다원주의나 문화상대주의에 기대어 A급 전범을 용서하고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과거를 물에 흘려보내는 일본문화의 권리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 책 <야스쿠니 문제>에서 가장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A급 전범 처리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야스쿠니는 2차대전 A급 전범만 합사돼어 있는게 아니다.하지만 한국과 중국 정부는 정치적 타협을 고려하여 늘 A급 전범 합사문제만을 부각한다.야스쿠니에는 B,C급 전범도 있고 끌려간 조선인 군인도 있고 야스쿠니에 들어가기 싫은 기독교인도 있다. 나카소네 일본 수상 재임시절 주일 중국대사 창슈는 "A급 전범 합사문제만 올바로 해결된다면 야스쿠니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라고 했다.하지만 주건영 동양학원대학교수는 "B.C급 이하의 전범을 문제삼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결착을 꾀하는 방법"이라고 비난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니네도 전쟁사망자 애도는 해야되니까 야스쿠니가 필요하겠지.그렇지만 A급 전범까지 하는 건 곤란해.A급 전범을 분사하면 우리 나라에서도 더는 뭐라하기 그렇지 않겠니? "

'A급 전범 분사론'이다. 얼핏 보면 그럴싸 해보인다.일단 분사론은 야스쿠니신사와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돼었다고 한다.정교분리문제에 있어서 일본정부가 야스쿠니에 강압할 수 도 없는 문제다.하지만 A급 분사론은 역사인식을 방해한다. 전쟁 책임을 축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은폐한다.전후 도쿄재판은 전쟁책임을 천황을 제외한 A급 전범에게 집중시켰다.그렇게 됨으로써 천황과 국민적 동의를 보냈던 다수의 일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일본의 역사 인식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전후 역사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독일은 나치와 나치에 동의 했던 과거 독일에 대해 철처히 그리고 수시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있다.A급전범이 야스쿠니에 있던 없던 야스쿠니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에 일본국의 총리나 천황이 가서 참배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뉘우침이 없다는 것의 반증이다.

저자는 철저한 정교분리,국가기관으로서의 야스쿠니 폐지,야스쿠니신사에 대한 신앙 자유보장,근대 일본의 대외전쟁에 대해 긍정하는 역사관의 극복을 결론적으로 주장한다.또한 마지막으로 평화헌법 9조에 언급돼어 있는 '비전,평화주의'국가로의 방향설정을 제안한다.

이 책<야스쿠니문제>는  야스쿠니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감정의 문제,역사인식의 문제,종교의 문제등 5가지 섹터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논리적이며 설명 또한 명확하다.여러모로 우리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는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좋은 안내서이다.TV 뉴스에서 보는 정도로만 야스쿠니를 알고 있는 모든 분들께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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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6-02-12 23:06   좋아요 0 | URL
일본의 국가주의종교에 가장 직접적 세례를 받은 <천황의 은총 국가> 한국도 자연스럽게 국가주의 종교, 애국교에 물들고 말았겠지요.
읽어보고 싶던 책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06-02-13 09:28   좋아요 0 | URL
네...식민지 시대의 내적 식민화 경향과 한국전쟁후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가를 절대시 하면 자기 행동의 윤리적 기준에 돼게끔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데요.앞으로도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행은 계속 될 듯 합니다.그런면에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시는데도 좋을 듯 하네요.우리 아이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극단적 생각 역시 반성케 하시면 더욱 좋을 듯.....

산그늘 2006-08-17 14:56   좋아요 0 | URL
그러는 사이에 고이즈미 써글놈이 또 갔군요. 다카하시는 또다시 강도높은 비난...한국인들도 뉴스 100번 보는 것보다 이 책 한 권 읽는게 나을텐데요...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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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에는 '청승' 이 없다.생각난 김에 인터넷 검색란에 '청승'이란 단어를 검색했다

청승(명사): 궁기가 끼어 있어 애틋한 상태,또는 궁상스럽고 처량한 듯한 태도.

(속담)청승은 늘어가고 팔자는 오그라진다 :나이들어 살림이 구차하여지면 궁상을 떨게 되며 그렇게 되면 좋은 날은 다 산 셈이라는 말.

동명 단편에서 주인공은 말한다.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 80년 생 작가는 수 많은 부재와 결핍 속에서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태어나면서 한 번 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놀이 공원에 나를 놔 두고 실종된 아버지,TV만 보다 소리 소문없이 사라진 아버지... 교통사고로 치마가 훌렁 뒤집혀 죽은 여고생,포스트 잇으로 의사소통하는 여자들... 작가는 '부재'와 '소통 단절'에 대해 무언가 말하지만 결코 '청승'떨지 않는다.8,90년대 작가들은 이런 심각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남의 일' 보듯 쓰지는 못햇을 것이다.하지만 아직 10대의 얼굴이 묻어 있는 김애란은 그냥 TV 베스트 극장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 인 양 스스럼 없이 결핍과 단절에 대해 말한다.아마 이 소설 <달려라 아비>가 문단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과거 소설의 '무거움'에 대한 안티테제로 '가벼움'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함'을 밀어넣기 때문일 듯 하다. 단편<사랑의 인사>의 주인공은 버림받은 아이이다.그는 네시호의 미확인 괴물이 천지에도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자기에게 인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다.그는 대형 수족관에 취직한다.거기서 그는  말한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수족관 유리를 주먹으로 쳤다.그것은 물고기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 중에 하나였다.나는 아이들이 (간혹 어른들도 있었다) 왜 유리벽을 두드리는지 알고 있었다.물고기가 자기를 알은척 하지 않았어였다......나는 물고기의 무심함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내가 수조 안에서 물고기와 마주쳤을 때 난감했던 것도 그들의 시건이었다." .... 단편 <사랑의 인사> 중에서

소설집<달려라 아비>의 주인공들은 어린 시절 '정신적 외상'-즉 트라우마 를 경험한다.이 외상에 대한 자기방어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 '무심함'이다.내가 간혹 쓰는 말투로 하자면 '그래..그런데...그래서' 식 무심함이다.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어떤 친구가 가족 이야기던지 애인과 헤어진 이야기던지 개인적으로는 가슴 사무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뭐 이런 건 어떨까..아버지가 한 너댓명 되는 사람,자신이 입양된 아이인지를 고2때 처음 안 사람....자살 횟수가 손목에 남아 있는 사람...대충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다.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람들은 두 부류이다.하나는 '야..너무 힘들었겠구나..얼마나 가슴 아팠어.괜찮아' ..눈물까지 조금 글썽여주며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사람이다.또 다른 사람은 진지하게 다 듣고 나서 '그래...살 다 보면 상상 조차 못하는 일들이 생겨나지...근데 그래서' (차마 이런 말까진 안하지만...그래 니가 죽을 고생했다 치자.그런데 그 다음은..)  후자의 경우 정나미 떨어진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하지만 그게 낫다.그건 '무심함'이지 '냉혈함'이 아니다.그리고 말하는 사람 역시 그 '무심함'에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곧 '무심'해 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이던지.감정의 설사를 더해주는오버나 쥐뿔도 모르면서 이성적입네하며 정신적 위기를 탈출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말하는 것들은 그냥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게 낫다.

김애란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비 부재의 트라우마'를 '무심함'으로 건너가려한다.하지만 트라우마는 트라우마.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물 밑에 반쯤 가라앉아 언제든 뛰쳐나올 수 있는 불안과 긴장이 내재해 있다.소설 속 주인공들이 때론 수면을 위한 숫자를 세며 때론 잠수복에 머리를 처박고 울며 불며 그 '부재의 강' 건너려 한다.하지만 내 생각에 이들은 그 강을 완전히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청승'속에 살지도 않을 것이다.그건 어린 시절 가슴에 입은 화상 자국과 비슷 하다. 사는데 불편함이 없다.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프지도 않다.남들도 잘 모른다.본인  역시 일상을 살다보면 잊고 지낸다.그저 가끔 수영장이나 목욕탕을 가서 옷을 벗을 때 한번씩 떠오르게 돼는 것일 뿐이다.

김애란의 소설은  개인적 경험이 깊숙히 반영된 듯 하다..신인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은 결국 자기 이야기다.그녀가 다루는 아버지의 이야기들 역시 그녀의 개인적 우화에 상상력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소설 속 공간이나 소설 속 가족 관계,일상의 영역등이 작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단편 <노크하는 집>같은 경우  다가구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소통에 대한 희망과 소통의 불편함에 대한 모순된 감정.....어차피 아무런 교류도 없다.하지만 5개의 방 중 5개가 전부 차있는 저녁 시간의 심리적 불편함,일요일 낮 서너 방이 비어 있는 시간의 자유로움과 홀가분함.화장실 소리에 따라 서로의 동선을 피하는 어색한 배려,일상의 작은 불편에 대한 상호간의 불만. 단편<나는 편의점에 간다> 역시 이러한 소통의 불편함과 소통부재의 두려움을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 아니어도 집 앞 단골 편의점을 이용할 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통과 관련된 우화들이다.

책의 주제는 사무치는 것들이지만 김애란은 적당히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사무침을 희화한다.정작 가장 코믹스러운 부분은 책 뒤에 딸려온 서평이었다.어차피 텍스트에 대한 분석은 자기가 아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어떤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볼 것이고 어떤 사람은 더 세부적인 것을 볼 것이다.또 어떤 이는 직관을 통해 작가의 마음과 닿을 수도 있다.평론이란 작업은 아무래도 지적인 활동은 활동인가 보다.단편 <스카이 콩콩>의 결말 부분에 대해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김애란의 우주적 상상력에는 니체적인 영원회귀와 베르그송적인 생명의 도약이 겹쳐져 있다.' 

그가 느끼는 우주적 상상력의 내용은 이렇다.아버지의 성기로 부터 퍼져나가던 불꽃들의 이미지,수족관 안에서 유리벽을 두르리던 손바닥,한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선글라스를 씌워주며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상상력..  이 모든 것들이 니체와 베르르송의 회귀와 생명도약이다.

나..원...이렇게도 말하겠다. "버스바퀴는 각진 세상을 떠받치는  둥근 원불교의 상징이며 선인장의 가시는 일상공간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선사의 계송이다."

평론가의 말 중에서 이 책의 서있는 좌표를 정확히 짚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좋은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김애란의 소설은 세계와의 소통부재나 소통단절과는 무관하다.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애매성으로 가득한 세상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김애란 소설의 주인공들은 삶을 번역하며 살아간다.달리 말하면 사회적인 것이 내면화될 때 생겨나는 갈등과 주관적인 의도가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의 장애를 그들은 고스란히 경험한다.

이 말을 평범하게 받아 들이면 이 책<달려가 아비>는 성장소설이다.특히 20대 청춘의 성장 소설이다.주인공들도 다 그렇고 그들이 사는 공간도 그러하며 그들이 겪는 고민들도 다 술자리에서 나옴직한 이야기들이다.

결론적으로 ...난 이 책이 쉽게 읽혔으나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다.이미 그 시기를 지나서인가?  아니면 작가의 개인적 삶의 투영을 너무 의식해서인가?   "너 아빠 없니? 그래.. 그런데...뭐.. " 이게 내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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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에코의 즐거운 상상 2
움베르코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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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에코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의 익살과 풍자이다.<철학의 위안> 에 있는 에세이 도서관을 보면 가장 좋지 못한 도서관의 예 19가지를 정리한다.신청과 대출 사이가 길어야 한다.도서관에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없어야한다.화장실이 없어야 한다.신간 안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전시돼어야 한다.이렇게 하면 아무도 도서관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에코식 글쓰기의 특징은 이러한 반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에코에 의해 비틀리고 돌려치기된 세상과 사물들은 고정관념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함초롬한 모양새를 드러낸다.독자들이 에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이렇듯 세상을 한번 털어내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에코읽기' 는 지적 유머를 동반하기에 분명히 책 읽는 즐거움을 준다.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에코읽기'는 산을 올라가는 것 만큼 고역이기도 하다.물론 히말라야 준봉을 가을 소풍다니 듯 오르내리는 독자들에겐 에코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주말에 동네 뒷산 오르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같은 독자에게 '에코'라는 산은 뒷산 너머 아스라히 보이는 어느 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철학의 위안>을 읽으며 몇 번을 그냥 접고 내려갈까 망설였다.90년대 이후 불었던 에코 열풍이 과연 진짜 열풍이었나 회의하면서 말이다.에코에 열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에코식 글쓰기를 이해했을까? 또 에코의 지적 유희에 어느정도 공감하면서 손을 흔들었을까? 에코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데 왜 나는 에코를 읽으며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가? 에코로 인해 책읽기의 자괴감마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여간 이런 저런 부정적 생각을 하면서도 책장은 계속 넘어갔다.산 정상이 바로 저기 앞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는 심정으로말이다.

에코의 글쓰는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다.매스미디어,대중문화,스포츠,희극,도서관,토마스 아퀴나스...아무래도 그의 글들이 지적인 대중지나 계간지등에 실렸던 글들이다 보니 그런 듯 하다.이 다양한 주제를 구워삶는 에코의 요리술은 화려하다.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주 재료로 수많은 도서관식 자료를 부 재료로한다.거기에 에코식 풍자와 익살이라는 양념비법이 버무려진다.우선 에코읽기에 어려움을 느낄 때는 에코가 말하는 텍스트에 대해 나의 사전 정보가 부족할 때이다.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중세 철학의 거두라는게 전부이다.에코가 아퀴나스를 가지고 이리저리 굽고 삶고 하는데 정작 독자인 나는 에코가 굽는게 돼지고기인지 쇠고지인지 모르고 있는 꼴이다.이 책 전반부에서 부터 가장 많이 언급되는 텍스트는 마샬 맥루한이라는 미디어 학자이다.마샬 맥루한....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내게 무척이나 친근한 이름이다.나의 대학 교수 중 어떤 분은 대학 4년 내내 맥루한의 <핫미디어><쿨미디어>만 이야기하고 다녔다.그는 에코식 표현을 빌자면 미디어 낙관론자인 셈이다.하지만 신문방송학이나 사회학 전공자들이 아니면 얼마나 마샬 맥루한에 대해 알 고 있을까?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계에서  전통의 어떤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 뒤를 이어 어떤 학문적 계파를 이룬것도 아니다.어떻게 보면 미디어 학계에서도 혜성처럼 등장했던 사람이다.물론 그가 만든 개념들이 미디어에서 차용하기에 너무나 섹시하여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가 다른 미디어학계의 고전들을 제치고 현대 사회과학 고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코를 읽음에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중에 하나는 역시 그가 인용하는 자료들에 대한 몰이해이다.에코를 탓이 아니라 배움이 부족한 나같은 독자의 무식이 원인이긴 하다.그럼에도 에코의 방대한 인용-자기만 알고 있는-이 면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그러한 예는 책 중간 중간 너무 너무 많다. 에코를 읽었던 무식이 배짱인 일반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그래도 서운하니 예를 들어보자.물론 이런 부분은 읽다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그렇다고 에코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훼손돼지 않는다.단지 훼손되는 것은 이 책을 버겁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고자 했던 생각 정도일 것이다.

이런 예는 어떤가?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의 라틴어 속에도 돌연 조야하고 천방비안과 빈정돼는 목소리가 난무해서 마치 마르크스가 스첼리가 씨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이다.( 도대체 스첼리가는 누구인가? 마르크스가 신성가족에서 스첼리가를 뭐라고 질책했는데?)

우리는 이처럼 뻔한 수법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오늘날 가브리오 롬바르디와 같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장난질도 이와 하등 다를 바 없다.(가브리오 롬바르디가 뭐하는 사람인데?)

무수히 등장하는 인용과 재해석과 낯선 이름들과 그들의 주장....에코의 지적 넓이가 보여지면 질 수 록 책읽는 속도는 반비례로 감속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철학의 위안>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매스미디어와 대중이다.에코는 현 시대에서 매스미디어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장치라는데 동의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미디어에 의한 지배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하나는 종말론적 입장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간형의 탄생을 기대하는 낙관론적 입장이다.에코는 이 두 입장이 가진 논리적 과장과 논리 없음을 지적한다.그 칼날에 걸린 대표적인 희생양이 마샬 맥루한이다.맥루한의 그 섹시한 개념들은 에코에 의해 섹시하나 내용없음으로 규정된다.'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문구는 코기토 인터룹투스-즉 논리적 연관성 없음-라고 선언한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가 그냥 한가지 섹시한 개념에 중복에 중복을 더해 '나는 치마를 입고 그리고 스커트를 입었다'는 동어반복만 일삼는다고 비평한다.에코는 메시지의 내용분석 즉 약호의 해석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이러한 약호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에코의 관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효과적 대응전략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민중이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게릴라적 대응이다.그것이 미디어에 의해 유포되고 강화된 방식이든 국가기관에의해 직접적으로 강화된 방식이든 메시지 해석의 자의성과 다양성은 개인적이고 점조직화된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제시한다.푸코가 이야기한 권력이 분화되어 있는 것 처럼 저항의 방식 역시 분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에코의 지적처럼 사실 미디어계에서도  수용자 연구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수용자 연구는 미디어 수용자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영하는 가에 대해 촛점을 맞춘다.20세기 초반 등장했던 미디어 강효과 이론, 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디어 약효과이론에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는 수용자 해석의 다의성을 존중하는 중효과 이론으로 대세가 바뀌었다.에코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게릴라전을 이야기 했듯이 이미 세상은 인터넷이란-에코가 글쓸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던-대안 매체의 등장과 더불어 수많은 사이버 게릴라가 등장하였다.이들은 권력이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가상의 공간 속에서 다양한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인터넷이란 민주적 매체가 만든 저항의 한 양식일 것이다.

<철학의 위안>을 묵묵히 때론 짜증섞어가며 읽었다.에코식 글쓰기의 미덕은 분명하다.난삽하지 않고 날리지 않는다.한번 씩 비틀어주며 날을 세운다.'이성적 논리'에 대한 그의 존중 역시 개도 소도 포스트모던 이름 하에 숨는 세태에 회초리가 될 만하다.개인적으로 한가지 바람이 있다. 에코의 책을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지적 능력에 대한 배고픔..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만 배고픈게 아니다.아..점심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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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2-01 12:51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섹시한 마샬 맥루한께서 백치미의 금발 여인 취급을 당한게로군요. ㅋㅋ
아, 그리고 오자 하나.. 에로사항 -> 애로사항.. 이 아닐까요? 섹시함이란 단어가 아주 예뻐서.. 정신이 팔려 제가 잘못 읽었나 했는데.. 음.. ^^

에코는 그냥 덥석 집어들어 슥슥 읽어내려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고로 지적 배고픔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은 메모하여 찾아서 알아보고.. 하며 읽는 독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방대한 에코의 지적인 유희에 독자를 조금더 수월하게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친절한 각주가 따라붙어줘야겠죠. 물론 한계야 있겠습니다만..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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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배정을 받고 어머니와 교과서를 수령하러 갔다.요즘은 전부 새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70년대에는 조금 달랐다.일부는 새책이고 일부는 선배들이 쓰던 책을 모아서 학교에서 임의분배 해주었다.내 기억에 나는 대부분 새 책을 받아던 것 같다.아무래도 엄마의 발이 빨랐나보다 아니면 강력한 항의가 한 몫을 했으리라.국민학교 저학년때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다.국어,산수..뭐 이런 기본과목에 '바른 생활'이 있었다.도덕이라고 그랬는지 '바른생활'이라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아마 국민학교 고학년쯤 교과명 변경이 있어서 기억에 혼동을 주고 있는게 분명하다.학교가 달라져 가도 바른생활-도덕-국민윤리로 이어지는 만만한 과목은 계속 돼었다.왜 만만한 과목인가 의아해하는 분.. 아마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으신 분일게다.'도덕' '국민윤리'는 공부 잘 하는 친구나 못하는 친구나 시험보면 점수가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과목이었다.수학이나 영어의 반평균이 60점-70점 대였다면 국민윤리의 반평균은 80점 이상을 넘어섰다.개인의 성적으로 보자면 잘해도 표 안나고 못해도 그저 그정도 못하는 가장 만만한 과목이 바로 '국민윤리'였다.

'도덕'시험에서 점수 따기란 정말 쉽다.그냥 답안의 내용이 나의 신념이든 가치이든 하는 것은 상관없이 가장 그럴싸하고 또 가장 기계적 중용을 지키는 답에 동그라미치면 대개 평균이상 나온다.물론 고등학교 시간에 철학사가 조금 나오니 약간 외울 것도 있긴 했다.까짓거 그거 귀찮으면 찍고 나머지 옳은 소리에 동그라미쳐도 80점은 나온다.너무 극단적인 것들 배제하고  또 너무 이상적인 것 배제하면 사지선다 중에 대개 두개는 애시당초 답에서 배제된다.거기에 체제의 이념과 관련된 내용들은 공부안해도 그냥 답을 찾을 수 있다.그냥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쁘다에 동그라미치면 된다.물론 거기서도 기계적 중용이 적용은 된다.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내용중 잘못된 것은 ..뭐 이런 질문에 '자본주의는 완전무결한 시스템이다.'같은 것들은 정답이다.기계적 중용은 도덕 교과서의 미덕이기 때문이다.슬쩍 자본주의와 교과서 검정시스템의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는 도덕 교과서의 센스다.

김상봉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우리가 일주일에 두시간 이상씩 12년 동안 배워온 도덕과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요구한다.도덕 교과서의 내용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가장 먼저 부정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흔히 일상에서 '인생이 도덕교과서 같은 줄 아니?" 하는 말을 듣는다.평범한 말인데 잘새겨보면 도덕교과서의 경직성과 현실부적합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또 너무 고지식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보면 '걸어다니는 도덕교과서네 그려" 라고 비꼬기도 한다.일상적인 언표가 지엽적이기는 하다.하지만 도덕 교육에 대한 현실적 거리감에 대한 한 우화정도는 될 것이다.사실 우리의 의식은 도덕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그냥 교과서 안에서 완성된 진실정도로 여긴다.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도덕,윤리 교육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전략을 써왔지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갖진 못했다.도덕,윤리 교육이 사회에 갖는 무게와 12년동안 지속된 교과과정의 양에 비하면 우리는 도덕,윤리교욱을 졸업하자마자  너무 감상적으로 폐기처분한 것이 사실이다.

김상봉 교수가 말하는 윤리교육의 핵심은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실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현 할 수 있는 자유의 확보가 우선 필요하다.'도덕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표현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하지만 개인의 존재확장만 가지고는 완전할 수 없다.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존재가 실현되어야 한다.저자의 말을 빌자면 '홀로주체'가 아닌 '서로주체'속에서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우리 윤리 교육은 능동적 인간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근대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우리 윤리 교육은 선이라는 보편적 가치 추구에 대해서는 피상적 접근 태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억압하며 국민통합이란는 목표를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이 과정을 저자는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윤리교육의 몇가지 특징을 말한다. 타자지향성,불의에 대한 침묵,타율적 당위성 강요,국가주의,국수주의,법과 질서에 대한 맹목적 순종 등이 그것이다.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이 불의에 대한 침묵이란 점이다.우리 도덕교과서는 개인이 사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하지만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악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것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저자는 예절의 강요가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위계를 고착화하고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우리가 배운 예절이란 것은 상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만 있지 윗사람의 예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없는 것은 잘못된 교육이란 것이다.이것은 사회적으로 확대해서 볼 수도 있다.즉 군대 내에서 폭력문제,직장 내에서의 언어폭력문제,학교에서의 선후배 간의 폭력문제등이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방적 교육의 잘못된 단편들이다.불의에 대한 침묵이 비도덕이라는 것이 교육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과 질서에 대한 획일적 절대화는 당연한 수순이다.우리 교과서와 보수 언론이 가장 꺼려하는 말이 바로 '갈등'이다.노사갈등,빈부갈등,도농갈등,수도권과 지방의 갈등....등등. 도덕 교과서는 사회안정이라는 미명하에 '갈등'을 죄악시한다.그나마 조금 세련되게 말해서 "갈등도 사회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하지만.." 정도로 비켜가고 있다.그러면서 그 대안으로 말하는 것이 대화와 타협 그리고 기계적 중용이다.도덕교과서 점수 따기 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런 기계적 중용 중심 도덕 교과서를 잘 배운 사람들은 사회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대화가 돼는 사람으로 통하기쉽다.물론 그들의 성향이 온건하고 타협을 중시여기는 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하지만 '중용'은 '기계적 중용'을 뜻하지 않는다.김수용 시인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말했다.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도 기계적 중요의 합리성 사이로 숨어버리는 중산층의 용기없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일 게다.오히려 '기계적 중용'의 보신주의로 떨어지는 것 보다는 '세계는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전선을 긋는 것이 비겁은 면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하지만 우리 도덕 교과서는 자신들이 강요하는 도덕이 기계적인 중용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하게 만들지 않는다.갈등이 사회발전의 강력한 동인이 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당파성은 조선시대 사색당파로 인한 망국을 빗대며 전부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다.그리고 그 끝을 장식하는 멋진말은 소크라테스가 명예훼손을 걸만한 '악법도 법이다'이다.

학교가 국가주의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주입한다는 것은 이미 여기저기 수많은 책들에서 언급된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다.도덕 가치에 있어서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국가라는 언급은 생각해볼 만 하다.특히 이념적으로 폐쇄된 나라에서 한쪽 방향만을 진리라고 강요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성찰해 봐야만 하는 질문이다.한쪽 눈만 커다랗게 툭 발달해 놓고 주변에 같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전부 같은 모습이라고 자기들이 정상이다라고 외치는 꼴이다.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경우 국가가 선과 악을 정하는 대표적인 예이다.군대를 가면 최고 애국은 안돼도 정상적인 사람이고 신념에 의해 그걸 거부하면 매국에 비정상 빨갱이 동조자가 된다.실제적으로 대체복무가 없는 상황에서 구속되어 감방가고 빨간줄 그어진다.이 양심범들은 국가가 정한 선에 대해 부정했기 때문에 악의 한 축으로 규정되어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받는 것이다.그들에게 선과 악을 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이다.

김상봉 교수는 우리 윤리교육의 문제점 조목 조목 지적하면서 윤리교육의 중요성과 윤리교육 내의 철학교육 강화를 그 대안으로 내세운다.왜 철학 교육인가 라는 질문에 저자는 철학이야 말로 학문과 삶의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전적으로 동의한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과거 국민윤리시간에 배웠던 관념론중심의 서양철학사를 의미하지 않는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을 쉽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능동적으로 정립하고 입법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이를 통해 주체의 자기실현이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의 절대적 서로주체성 속에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윤리교육의 목표가 돼어야 한다.조금 더 쉽게 말해서 스스로 성찰하는 인간이 정의감을 바탕으로 인류애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노예 도덕을 배운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단점도 지적해야만 할 것 같다.우선 책의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흥미가 떨어져간다.이유는 읽는이의 철학적 깊이의 부재때문 이기도 하지만 윤리학의 당위론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하다는것도 한 몫을 한다.저자 역시 도덕을 설명하면 어쩔 수 없이 당위를 언급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뒷부분으로 갈 수 록 책읽기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어떻게 보면 정말 도덕교과서의 어떤 한 부분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래야 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 책은 12년간 매주 2시간 이상 씩 받아오던 만만한 도덕 교육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회를 만들 수 밖에 없다.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못하고 불의가 정의를 타고 넘는 사회,개인의 자유는 책 안에만 존재하고 사회에선 늘 조직과 국가가 우선시 돼어야하는 사회,이런 사회는 발전불가능한 갈등만 양산하며 사회에 근저에 있는 암적인 바이러스-예를 들면 파시즘같은-만을 배양할 뿐이다.그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가 뿌리부터 깊은 단단한 사회가 되려면 저자가 강조한 철학하는 사회가 돼어야 한다 저자의 말에 동의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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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31 23:05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보셨군요. ^^ 현장에 있는 이로서 3월부터 또 어찌 가르쳐야할지 막막합니다. 나의 신념과 정신에 위배되는 내용들을 또 가르치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