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
박태균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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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내게 다가왔다.

흑백 TV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실내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주사선을 줄여야 했다.토요일 오전,10시. TV에서 애국가가 끝나면 나는 미국으로 초대되었다.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미국 만화들.한국 TV가 주말의 웃음을 제조하기 위해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시간,AFKN은 심심해할 미 8군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을 위해 만화를 융단폭격했다.영어를 알아 듣지 못한 것은 답답했지만 그다지 큰 장애는 아니었다.미국 만화가 끝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나올 때 까지 TV를 붙들고 있었다.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듣기 좋았다.축축 처지는 애국가보다 행진곡 풍의 멜로디가 흥겨웠고 노래 아래 깔린 그림들은 더욱 멋졌다.미국 독립전쟁 그림,탱크와 비행기의 행진 장면,자유의 여신상,러시모아 국립공원의 큰 바위 대통령얼굴,달에 착륙한 암스트롱....  나중에는 피아노 건반으로 그 멜로디를 누를 수도 있었다. "솔미도미 솔 도.. "

<우방과 제국,한미관계의 두 신화>를 읽다가 문득 미국과 나의 첫번째 조우가 떠올랐다.이 책은 <한국전쟁>에서 대중적이며 균형감 있는 접근법을 선보였던 박태균 교수의 한미관계사책이다.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한미 관계를 바라보는 지향점을 명백히 보여준다.우리 사회는 미국을 둘러싼 두 가지 '신화'가 있다.하나는 미국을 동맹을 넘어 '혈맹'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을 '제국주의 식민 모국'으로 보는 신화이다.전자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다.후자는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에서도 시각차가 존재했을 정도로 주요주제였으나 지금은 그런 식의 도그마화된 규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물론 아직도 실제로 그렇게 믿지도 그렇게 분석하지도 않으면서 '미제'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그저 레토닉이나 배설의 언표 정도로 받아 들이는 편이다.

저자는 한미 관계를 '동태적'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미국의 세계 전략이라는 '작용'과 한국의 대응이라는 '반작용'의 틀 속에서 상호관계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박태균 교수는 한미 관계가 정상적인 두 국가 사이의 외교 관계를 넘는 '특수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이러한 '비정상성'의 외부적 요인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을 한반도에 강요한 것이다.내부적으로는 역대 정권의 '비정통성'을 들고 있다.정권의 창출의 정통성 부재와 정권 내부의 불안정성을 외부의 힘에 의존해서 풀어나가는 방식들이 역사적으로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만들어 내게 된 필요충분조건이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한미관계를 시대순으로 기존 몇 가지 모델로 언급한다.먼저 미군정시기의 한미 관계는 제국과 식민지 관계로 규정한다.50년대는 보호자-피보호자,60년대는 중심국-주변국 관계이다.70년대는 규정하기 모호할 만큼 사안별로 다양화된다.물론 박태균 교수의 입장은 한미관계사가 기존의 이론들을 포괄하는 역동적 모델임을 상정하고 있다.

대학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자.내가 대학들어가서 현대사를 공부하며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 까지의 시기였다.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안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과 너무 달라서 충격적이었다.고등학교때는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찬탁' 으로 배웠다.물론 이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체적 의도와 신탁통치안의 현실성에 대해 일방적으로 앞뒤 꼬리떼어낸 것이긴 하다..당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특종보도했다.그리고 한국 언론사에 길이 빛날 왜곡보도를 한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고 기사를 작성한다.이어서 12월 28일 조선일보는 박스기사를 통해 '독립전쟁을 시작하자'라고 선동한다.

미군정의 견제로 뒤늦게 입국한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정은 '반탁'의 정점에 있었다..남한 내에서 좌익과 중도세력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미국은 신탁통치에 긍정적이었다.우선 한국인의 자치 능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또한 중국 국민당이 우세한 45년 상황에서 미소영중이 신탁통치를 하면 자유주의 세력이 숫자적 우위를 구성하고 한반도 내에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미국은 남한 사회내에서 우익 세력을 양성하고 좌익 세력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다.그러나 신탁통치 안에 대한 우익의 절대반대는 미국을 난처하게 만든다.힘을 실어야 하는 우익에서 미국의 전략에 반대하고 나섰고 뺨때리고 싶은 좌익계가 미국의 의도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기때문이다.결과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를 얻기 힘들었으며 남북이 각각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박태균 교수는 이 사건을 미군정이 한반도내의 내부적 정치 역동성에 전략을 바꾸게 된 첫번째 사안으로 꼽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필두로 한미 관계는 끊임없이 갈등한다.갈등은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미국의 대외전략변화에 따라 수시로 증폭된다.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한반도 개입이었다.일본이 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50년대 중반 이후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역할론이 또 하나의 중심전략이 된다.이는 미 행정부가 받고 있던 재정부담과도 관련이 있다.4.19 당시 미국의 태도는 미국의 남한내의 정치 상황에 대한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즉 미국은 제 3세계 정책을 펼때 민주주의와 반공독재 사이에서 고민한다.미국은 이 두마리 토끼를 쫓지만 국민들의 반대로 더이상 독재정부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들때 미국은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주게 되지만 그 전까지 한국의 독재체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된다.

6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은 로스토우에 빚지고 있다.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로스토우의 논리는 경제성장을 통해 체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도 양보될 수 있다고 본다.(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세대들의 일관된 정서와 같다.)특히 로스토우의 논리중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저개발국가에서 과도기적 단계를 효율적으로 거치기 위해 군대를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마치 5.16 군사 쿠데타를 예견하는 듯 보이는 이론이다.

이 책에 나오는 5.16 군사 쿠데타 부분은 마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 진지하다.쿠데타를 제압하겠다는 유엔군 사령관과 미국 대사,'올것이 왔다'이를 계기로 정계 개편을 꿈꾸는 윤보선 대통령,쿠데타 상황에 대처해야함에도 숨어버린 장면 총리, 윤보선을 권좌에 계속 두면서 쿠데타정권의 도덕적 정당성문제를 넘어가려한 미 국무부.박태균 교수는 3,500명으로 성공한 쿠데타의 뒤에 미국의 역할보다 한국 정치인들의 무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중반이후  한미관계의 중심은 '베트남전 파병'이었다.60년대초 권력 기반이 아직 불안했던 박정희는 쿠데타 주체세력과 미국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절대권력의 위치에 오른다.박정희가 전투병 파병을 강행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하면 첫째 한일협정 체결로 인한 국내여론 악화의 돌파구였다는 점,둘째 64년 주한미군과 한국군 감축계획에 대한 반대,셋째 베트남 특수를 통한 경제활성화 등이다..미국은 베트남전이 장기화되어가면서 국내여론과 재정압박에 고민하게 된다.결국 한국군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면에서도 또 아시아국가의 참여라는 홍보용으로도 적당했다고 본 것이다.박정희는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임을 더욱 부각하고 싶어했다.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중요성 수준으로 한국의 입지를 확인 받고 싶어했던 것이다.그러나 박태균 교수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마지노선을 넘는 무리한 요구를 시작한다.요즘말로 하면 오바하기 시작한 것이다.이 오바는 결국 대미 관계의 전략의 부재와 한미관계에서의 학습효과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미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다.박정희는 대북 보복공격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한다.또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해결을 위한 미북간 비밀협상에 배제된 것에 분노를 표한다.한국이 베트남을 빌미로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파악한 미국은 '너희들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면 우리도 남한에서 미군을 빼내겠다.'라는 상황까지 이르게된다.당시 미국은 북한을 통제하는 것보다 남한을 통제하는데 훨씬 많은 공을 들인 형태가 되었다.박태균 교수는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정부의 전략이 오판이었음을 지적한다.

한국 전쟁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주한 미군 감축 전략을 취한다.70년대 닉슨독트린과 지미 카터의 데탕트 시대에 수면에 떠오른 미군 철수론은 파장이 컸다.박정희는 또 한번 '벼랑끝 전술'을 쓴다.핵을 보유하겠다고 선언하고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맛이 간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점을 한국의 위상을 당당히 보인 것이라고 아직도 그리워한다.한때 신문광고 해대던 <무궁화꽃...>인지 뭔지도 그런 내용 아닌가 싶다.최근에 북핵이 문제되니까 김정일을 감금하고 밥굷기는 소설도 하나썻다고 한다.소련과 군축도 논의되고 개입전략보다는 현상유지전략을 택한 미국이 이걸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그러고 보니 30년정도의 시차를 두고 미국은 남한핵문제와 북한핵문제를 다루고 있다.핵을 둘러싼 아이러니다.이 책을 보면 현재 미군 재배치와 상시기동군 운영 전략이 그다지 새롭거나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아주 오랜 시점부터 연구되어 온 것이고 미국은 세계전략 변화에 따라 차근 차근 진행하고 있던 것이다.

<우방과 제국>을 보면 보수 언론이 즐겨쓰는 '한미동맹강화'라는 것이 지난 역사에서 그렇게 순탄치 않았음을 그리고 또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한미관계는 출렁이는 바다처럼 단 한번도 평온했던 적이없다.그럼에도 마치 한미관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지상과제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저자는 한미관계의 갈등원인이 미국측에 있음을 우선 밝힌다.무리한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제국이 가진 한계이다.또한 한국정부의 부적절한 대응도 지적된다.일부에서 이 부적절한 대응을 '민족주의'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결코 민족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그 때 그 때 정권차원의 안보가 중심이었던 것일뿐이다.마지막으로 한국민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신화가 지적된다.한국 사회의구성원들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당연히 받아들인다.거기에는 '사회진화론'이 자리잡고 있다.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우리가 이라크에 젊은 이들을 보낼때도 파병론자들의 논리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파병에서 어떤 특수를 얻을 수 있을까? 못해도 미국과의 관계가 좋아질 테니 떡고물은 있겠지? 그걸 현실론으로 받아들이고 그 토대 위에 논리의 탑을 쌓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그리고 그 논리의 현실적 이득과 그 논리의 기계적인 정합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어떤 이득이고 어떤 평화이고 어떤 국가인지가 중요한 것 아닌가? 논리의 토대가 인류애와 평화에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삼단논법과 통계수치,미래 예측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스로 억압하는 또는 억압받는 민중임을 알고 그 땅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걸 잊고 멋진 이론과 논리와 통계로 무장한 자신을 엘리트라고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우방과 제국,한미 관계의 두 신화>는 정치외교 영역에서 한국에 늘 존재하는 미국을 보여준다.이것과 함께 우리의 일상성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유행하는 말로 우리의 '아비투스'속에 존재하는 미국은 또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게된다.

P.S) 이 책은 대중적 역사서를 지향한다.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마치 <제3공화국><제5공화국>하는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책에는 8.15부터 5.18까지 한미관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80년대 부분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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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2-08 10:39   좋아요 0 | URL
^^.... 미국은 5분거리에 있었는데 미군은 차타고 15분쯤 가면 있어요.하야리야 부대라고..얘들도 곧 이사가요.그런데 왜 이렇게 길게 썻대,나는.
재미있게 읽었으면 압축해서 써야하는데 머리쓰기 싫어서..^^ 반성

kleinsusun 2007-02-11 21:19   좋아요 0 | URL
와우.....정말 긴 리뷰~ ㅋㅋ
정말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맞죠? 보관함에 넣었어요.^^

드팀전 2007-02-11 22:34   좋아요 0 | URL
제가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또 현대사는 재미있어 하다보니...
어쨋거나 재미있고 유익한 책은 맞습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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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라는 작게 만들고 백성의 수는 줄이며 필요한 물건은 십여가지로만 한다......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중 80장 <소국과민> 중에서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를 읽으며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이 책은  <녹색평론>사가 표방하는 '인문학적  생태주의'의 고향과도 같은 책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주류 환경운동의 철학과 다르다.거칠게 말하자면 주류 환경운동이 산업사회라는 토대를 인정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산업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를 철학의 기반으로 한다.즉 산업주의에 대한 부정적 성찰이 생태주의의 출발점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를 견인하는 철학은 노장사상,간디의 비폭력 자치주의,아나키즘적 공동체주의,북미 인디언들의 자연주의 등이다.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단적으로 현재 <녹색평론>식 생태주의의  성찰의 계보적 근원에 속한다.간디는 단순한 인도 독립의 아버지가 아니다.그의 적은 조국 인도를 강점하고 있는 제국주의였다.그러나 근원적인 적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그의 진정한 적은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산업사회'였다.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반자연성과 반생명성을 특징으로 한다.간디의 이상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명을 착취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현 시스템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간디는 이러한 정치적 이상주의의 맹아를 '마을'이라는 전통사회의 작은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인도의 70만 마을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간디의 마을 공동체론은 누가보더라고 이상주의적이다.간디가 살아있던 시점에도 그는 이런 비판에 직면했다.이에 대한 간디의 답변은 소박하지만 인간 간디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수긍이 간다.그는 말한다.

"나는 그 일이 인도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만일 누가 하나의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 수 있다면,그는 온 나라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온 세계를 위한 모범을 제공한 것이 될 것이다.구도자는 이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답변 또한 이상주의의 외피를 벗진 못했다.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간디의 소박한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거시 기획'을 가지고 '미시 기획'을 비판하는 것 역시 '미시 기획'을 가지고 '거시 기획'이 가능하다고 믿는 관념성 만큼이나 폭력적이기 때문이다.<간디의 물레>에서 김종철 교수 역시 자신의 작업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치 않는다고 했다.타이타닉형 산업주의 시스템에서 생태주의가 구성원들의 자성과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생태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 도상에 있다.)

간디의 마을 공동체를 움직이는 정신은 '비폭력 자급자족'이다.간디의 물레는 자치와 자립,비폭력 사상의 상징이다.물레에 대한 간디의 강한 믿음은 책 곳곳이 등장한다.

실잣는 물레는 상업적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상업적 평화의 상징이다....실잣는 물레를 건전한 마을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기초로 만들것이다.나는 물레 바퀴를 모든 활동의 중심으로 만들 것이다...비폭력을 이상으로 추구하려면 물레를 그 진정한 형상이며 상징으로 인정하고 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나는 비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물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잣는 물레는 미국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그것이 핵폭탄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미국과 전세계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나는 인도와 세계를 구하는 길이 물레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간디는 기본적으로 농촌 공동체의 전통사회를 반산업주의의 한 형태로 염두에 둔다.이 공동체의 경제적 토대는 수공예이다.대표적으로 물레가 그 상징이다.실 잣는 작업을 통해 개인과 마을은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다.또한 기계가 말살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복원한다.간디가 고립된 자치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그러나 과도한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에 긍정적이지도 않다.그렇게 된다면 산업사회의 방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간디의 기본철학은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최소한의 의복,최소한의 재산만을 허한다.더 많은 풍요로움과 소비를 위해 인간과 세계를 피폐화 시키는 산업사회 철학에 대척점에 서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인상적인 것은 간디의 철학과 실천이 무척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간디는 공동체 마을을 구성하는 방식,자연치료에 대한 임상 경험,마을 교육에 대한 방식,마을 일꾼들의 선발에 대한 기준,지주들의 재산에 대한 처분 방식등에 대해 말한다.이상주의적 철학을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해 낼 것인가가 간디의 가장 치열한 고민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간디의 철학은 이상적이나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내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것이다.자신의 물적 토대가 가져다 주는 한가로움을 관념을 통해 풀어내는 현대 도시인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부분이 이 지점이 아닌가 싶다.간디는 '몸'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수십번을 강조한다.지적 노동이라는 것 역시 육체 노동의 하위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지적 노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결국 진정한 노동은 자기의 손과 발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 존엄성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간디가 가진 반자본주의적 정신,반산업적 정신,공동체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이웃에 대한 희생'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간디는 말한다.

"당신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당신이 제일 하기 쉬운일을 처음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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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9 19:58   좋아요 0 | URL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 희생심... 생각할 수 있는 과제와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물레 앞에 앉아 실을 잣는 간디 사진을 떠올립니다.
실천의 진정성!

달팽이 2007-01-29 21:05   좋아요 0 | URL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내가 제일 하기 쉬운 일을 처음에 하라"라고 들립니다.
책꽃이에 꽃혀 있는데...손짓합니다. 들어달라고..

드팀전 2007-01-30 09:23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결국 손발이 중심이다..그런 말이지요.누군가 그랬다더군요.세상에서 가장 먼길이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길이라고...그런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먼길은 머리부터 손까지의 길이지요.
달팽이님>간디의 이야기가 그거죠...^^ 재미있군요.저는 애써 '서술어'(동사는 영문법이랍니다.^^생각해보니 그렇네요.^^)에 밑줄을 그었는데 님은 애써 '주어'에 밑줄을 그으시는군요.^^ 간디 역시 개인의 각성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깁니다.간디의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으로 각성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개인이 무엇보다 핵심이니까요.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사람을 바꾸는게 가장 우선이고 근본이지요.(하지만 이걸 사회적 대안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 근본적이거나 너무 소박하거나 또는 너무 원대하거나 너무 안이한게 아닐까 싶습니다.그 꿈은 그 꿈대로 또 다른 꿈은 또 다른 꿈으로)

글샘 2007-01-30 04:42   좋아요 0 | URL
음, 읽고 싶은 책이 또 한 권, 생겼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이 리뷰의 백미는... 사모님,의 명언이네요. 맨 위의 말. ㅋㅋ
그래서 '백수 - 일하지 않아 하얀 손'가 욕이 되나 봅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대가리나 키운... 박지원의 허생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지.'... 가분수는 화근일 따름입니다. 손발이 뛰어야죠.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잖아요. ^^
그리고, 드팀전님. 주어-동사는 영문법이고, 우리말에선 주어-서술어가 옳다고 봅니다.^^

드팀전 2007-01-30 09:22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바로 수정합니다.
 
불멸의 목소리 2 - 여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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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모섹슈얼이다.이 무슨 충격적인 커밍 아웃이란 말인가? 드디어 드팀전도 청소년기부터 숨겨왔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렇다 이 자리는 솔직히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리다.(기자들 다 불러모아..)나는 음악적으로 분명히 호모섹슈얼이다.내 CD 장을 뒤지고 학창 시절 듣던 LP음반을 찾아봐도 여자가수 이름 찾기 힘들다.아이들이 마돈나,신디 로퍼에 열광할 때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얼굴 예쁜 올리비아 뉴튼 존도 콧방귀를 꼇다.하물며 김완선이니 하수빈이니 하는 댄스하는 인형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나의 음악적 정체성은 분명 '남성애호증'이다.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그냥 예전 부터 여자가수보다는 남자가수들의 다이나믹함,호소력들이 마음에 들었다.특히 학창시절 나의 고향인 '락'계는 '마초'들의 천국이었다.머리는 산발을 하고 온몸에 그림도 그리고 무대 위에선 괴성과 폭력이 난무했다.한마디로 그 세계에서는 '기집애'같은 가수는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내 고향이 음악시 락구 여서 그랬는지 그 이후 꽤 어른이 될 때까지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열광해본 적이 없었다.물론 지금이야 예전처럼 나의 성 정체성이 편벽된 것은 아니다.그러나 결론만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 가수들보다 남자 가수들의 목소리를 훨씬 좋아한다.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던 내게도 정말 혹하게 하는 가수가 몇 명은 있다.'내 마음대로 뽑은 3명의 디바'라고나 할까? '빌리 홀리데이-메르세데스 소사-마리아 칼라스' 이렇게 세 여인이다. 음악 외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굴곡 심한 인생이 비슷할 것이다.홀리데이는 창녀 출신에 흑백차별이 심한 시대의 여성흑인이었다.칼라스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성공,세기의 스캔들과 비참한 몰락,소사는 정치적 이유로 오랜 시간 외국 망명객의 신세였다.음악적으로는 다른 장르에 있었으면서도 공통점이 있다.이들의 목소리는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엘라피츠제랄드의 날아갈 듯 한 스캣에 비하면 막걸리통 흔드는 소리다.마리아 칼라스는 가끔 듣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한 느낌을 준다.대신 이들의 강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악적 호소력'이다.자신의 곡을 부른 가수들보다 훨씬 더 곡의 느낌을 살려주는 메르세데스 소사.Gracias a la vida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은 원곡자인 비올레타 파라보다 깊이 숙성된 맛을 준다.그녀가 불렀던 유팡키의 노래곡집들도  숲에 들어가 초록을 부풀리고온 바람처럼 풍요롭다.이 세명의 가수들 중에서 음반이라는 매체적 제약으로 인해 가장 손해보는 사람은 사실 마리아 칼라스이다.그녀가 종사했던 장르가 오페라이다 보니 그녀를 무대에서 분리해서는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물론 홀리데이나 소사 같은 경우도 무대 위의 매력이 대단했을 것이다.손바닥만한 음반은 가늠키 어려운 라이브의 가치가 그것이다.이는 굳이 위의 가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길게 논하지 않겠다.

<불멸의 목소리2>는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로부터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까지 20세기 활약했던 여성 성악 25명을 다루고 있다.마리아 칼라스는 이중 활약시기로는 중간쯤에 해당한다.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현역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 배제했기 때문에 최근 가수들의 행보를 만날 수는 없다.그나마 각 장의 끝부분에 안나 네트레브코,마리아 굴레기나,체칠리아 바르톨리 등을 언급하고 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음색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다.시원하고 매끄럽게 뽑아주는 가수들의 소리를 듣다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조안 서덜랜드의 리릭 콜로라투라를 듣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선다.(그녀의 딕션은 뭉게지지만..) 젊은 시절 레나타 스코트의 <라트라비아타>음반을 듣다보면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시원하게 노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리아 칼라스보다 어떨 때는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몽세라 카바예는 어떤가? 그녀의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메차 보체는 황홀하다.정말 작은 새와 같은 리자 델라 카사,루치아노 폽등의 가벼운 노래를 듣다보면 마리아 칼라스의 뻑뻑함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만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녀의 진가를 알려면 음반 하나를 통째로 들어봐야 한다.실연에서는 엄청 났을 카리스마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 아쉬울 뿐이나 음반 전체를 듣다보면 그녀가 각 캐릭터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마리아 칼라스말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단연 몽세라 카바예이다.뚱뚱한 오페라 가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쓰리 테너 중 한 사람인 호세 카레라스와 동향이다.카바예가 끌어주지 않았다면 호세 카레라스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름을 높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물론 그의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눈에 들었겠지만 말이다.) 몽세라 카바예의 음반 중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아이다>음반은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아이다 음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리카르도 무티의 음반이 나오기 전에 최고의 음반이었던 카라얀반과 비교하면 흥미롭다.카라얀-레나타 테발디-카를로스 베르곤치-줄리에타 시묘나토-코닐 맥닐/무티-몽세라 카바예-플라시도 도밍고-피오렌차 코소토-피에로 카푸칠리. 진짜 오페라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총동원된 캐스팅이다.마치 매직 존슨이 이끄는 80년대 NBA 올스타팀과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90년대 NBA 올스타팀을 보는 듯 하다.개인적으로는 몽세라 카바예-피오렌차 코소토 라인업이 훨씬 예리하다고 생각한다.(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같다.)

여성 성악가들을 살펴보다가 요즘 오페라계가 '대형가수'들은 사라지고 '비디오형 가수'들의 전성시대라는 류의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아무래도 DVD라는 매체가 확산되다보니 산업변동에 따른 극장계의 변화가 아닌가 싶다.대형 가수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비디오형 가수들이 등장하는 것에 그닥 큰 불만은 없다.오페라 팬들도 뚱뚱하고 나이든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보다는 안젤라 게오르규같은 예쁜 비올레타를 볼 권리(?)가 있으니까 말이다.예전 만큼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디오형 가수라는 오페라가수들이 실력이 유난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아직 보수적인 클래식계가 예쁘다고 다 봐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는 않아보인다.전방위적인 대중문화의 공세 속에서 오페라를 뒤적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생각해본다.그리고 좀 예쁘고 잘생인 오페라가수들이 나와서 인기를 얻고 오페라에 대한 관심도 좀 높여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여자 오페라 가수중 예쁜 3인방 뽑으면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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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28 19:02   좋아요 0 | URL
예술적 불륜의 짜릿한 일탈이군요. ㅋㅋ
님의 음악 리뷰를 읽노라면 음악의 세계에 빠지는 일도 아름다운 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일 듯 합니다.^^

kleinsusun 2007-01-28 19:55   좋아요 0 | URL
음하하...예전에 <카르멘> 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쉴 때 마다 드레스가 터질 것 같은 뚱뚱한 여자가 카르멘을 연기하는 건 내용에 넘 안 어울리지 않나... ㅋㅋ

드팀전 2007-01-28 23:22   좋아요 0 | URL
글샘님>음악이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했을까요...대중가요든 오페라든..
수선님>아무래도 그런 경우 극적 몰입이 떨어지긴 하겠지요.^^ 그래서 어떨때는 음반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시각은 청각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어서 상상할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지 않으니까요.

2007-01-29 0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해문화 53호 - 2006.겨울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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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작은 계획을 잡았다.담배는 끊은지 오래되었으니 계획이 될 수 없었다.운동은 아이때문에 1년간은 힘들 듯 하다.책읽기 역시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어서 양적으로는 더 늘릴 수도 없고 또 굳이 계획을 짜서 늘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대신 한동안 접었던 계간지는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올해부터 꾸준히 볼 계간지는 두 개다.<녹색평론>과 <황해문화>... 이 두가지는 현재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둘 다 새로운 사회,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담론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갖는다.그러나 둘이 가르키고 있는 손가락 끝의 대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지향점으로 보자면 <녹색평론>조금 더 이상적이다.그러나 <녹색평론>의 글들을 읽어보면 굳이 이상적 지향만을 외치는 것들은 아니다.현실의 토대 위에 있는 <황해문화>의 학술적인 글보다 직접적인 글들도 많이 있다.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평론>은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모토로 한다.이상적이며 실천에 있어서는 미시적이다.<황해문화>는 현실정치 위에 있다.근원적인 변화보다  현실토대 위에서의 변화를 중심에 두고 있다.이념적 지향으로 본다면 최소한 우파적이지는 않다.

나는 이 둘이 한 개인 내에서 조화로와야 된다고 믿는 쪽이다.두 책 창간 이념적을 유추해보면 변별성이 분명이 있겠으나 지면을 채우는 글들은 서로 공유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연대의 부분이 많다..생태주의로 대표되는 <녹색평론>의 모토였던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는 것이 <황해문화>의 내지 제호 밑에도 씌여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이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중의적이기도 하다.

황해문화 겨울호는 좋은 인연을 통해 얻게 되었다.올해 부터는 내 돈주고 사서 봐야겠다.(친환경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이 상황에 딱 맞다.친환경 농산물이 조금 비싸다는 말에 대해 ...'제대로 지은 농산물 제대로 된 가격에 사주면 우리농촌이 다 산다.' 라고 한다.별것 아닌 말 인 듯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황해문화 2006년 겨울호의 특집은 시기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87년 혁명 그 후 20년' ...곧 나오게될 2007년 봄호에 특집 2편이 실린다.

올해는 87년 6월 항쟁의 20주년 되는 해이다.며칠전 박종철 열사의 20주년 추도식이 그의 모교인 부산 혜광고와 그가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대공분실에서 있었다.발빠른 신문은 '민주화 세대 20년'을 정리했고 몇 몇 방송에서도 올 6월쯤 되면 다큐멘터리등을 선보일게 뻔하다.대통령도 20주년을 기념해서인지 개헌론을 툭하고 던져서 정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대통령의 개헌은 다른 말로 하면 '87년 시스템'을 이제 정리하자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민주화 세대'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참여정부'의 무능이 부각되면서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개혁 정치에 대한 피로함을 드러내고 있다.과연 지난 20년전의 열정은 사상 누각이 었으며 공허한 메아리였는가? 민주화세대는 어떻게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며 주저앉고 말았는가? 결국 민주주의라는게 해봐야 그게 그거인 것인가? <황해문화>는 질곡의 20년을 돌아보며 민주화세대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김선혁 교수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87년의 민주화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규정한다.그리고 87년 시스템이 대단히 불완전하고 협소하며 취약한 민주주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절차적 민주주의의 부분적 성취 정도로 파악한다.왜 혁명적 상황 속에서 개밥의 토토리만큼만의 성취를 얻어냈을까? 김교수는 87년 6월 항쟁이후 변혁의 불길이 3중위임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그러들고 말았다고 말한다.첫번째 위임은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가 정치사회에게 주도권을 준 것이다.두번째 위임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성장한 계급운동이 90년대 들어서면서 힘을 잃고 시민운동에게 밀려나게 된 것이다.세번째 위임은 조금 더 일반적인 형태이다.오도넬이 말한 '위임 민주주의'의 보편적 특징이 한국에도 적용된 것이다.아무런 견제 장치도 없이 대통령과 정치엘리트들에게 정치를 위임한 것이 그것이다.3중의 위임구조하에서 잊혀져가던 87년의 기억을 다시 수면위로 떠올린 것은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었다.국민들은 2002년 개혁을 원했고 당선이 불가능해보였던 노무현을 권좌에 앉혔다.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그 염원과 반대방향으로 향했다.노 정권은 외부요인론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의 가속 페달을 밝았고 강력한 속도로 '보수혁명'을 추진했다.최장집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정서적 급진주의와 정책적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상태가 이어졌다.비정규직의 증가,사회양극화의 심화,잦은 정책 실패,보수언론의 맹공 등등의 이유로 참여정부의 지지율은 급락했다.이는 노무현 정권으로 상징되던 '진보세력의 위기론'으로 돌아왔다.(노무현이 과연 진보세력의 좌장이었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진보=노무현/열우당 이런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집권 386들 역시 위임과정을 통해 정치권에 '젊은 피'로 수혈 되었다.(그람시가 말한데로..)이런 포섭 다음에는 또다른 차용이 있었다.정책 능력이 부족했던 집권386은 관료세력들을 안을 수 밖에 없게 된다.이런 거래를 통해 개혁과 보수적 관료가 기묘한 동거에 들어간다.그 결과는 현재 보이는 바와 같다.

민주화 세대 20년을 돌아보며 각 필자들은 회고와 반성,그리고 대안을 제시한다.조금씩 차이를 두고 있지만 '새로운 정당정치의 출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박상훈 교수는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한다.대부분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화 이후 공통적으로 불평등의 심화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은 정당을 통해 대중의 힘을 조직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정당은 배제되고 대통령 개인 위주로 구성되는 권력의 문제는 현 노무현 정권의 한 특징처럼 보이기도 한다.특히 임기말에 이르러 대통령은 정책을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을 취한다.개헌론에 이어 신년 연설,그리고 신년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TV를 통해 직접 국민들을 만나고 있다.이는 다른 말로 보면 정당정치의 붕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지금의 여당이 사분오열되어 있어서 그런 현상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은 집권초기 부터 대중주의적 여론 동원 방식을 택했다.정당이 붕괴된 것은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와 주장들을 조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강한 정당의 부재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축소시키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는 로이와 긴스버그의 지적이 귀에 들어온다.

물론 새로운 정당의 출현과는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는 필자들도 있다.홍석만의 경우는 노동운동의 재정비와 계급적 통일에 기초한 전국적인 투쟁질서의 확립을 주장한다.홍석만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노동자 정치운동/노동자 정당 운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결과이다.민주노총에 바탕을 둔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저자는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안으로 노동운동 문제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또한 민주노동당이 가진 내적 분열과 인적 구성의 편향성등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추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김정한은 80년대의 NL,PD론과 구분되는 민중주의적 시각의 복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전통사회의 도덕경제 모델에 바탕을 둔 민중주의는 대안모델의 부재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김정한은 새로운 시민권 확보 차원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운동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흔히들 386세대라고 불리는 민주화세대는 이제 기득권층에 올라섰다.젊은 날 그들의 열정은 시간과 제도의 틀 안에서 퇴색되어 갔다.'87년 혁명 20주년'은 이제는 중년이된 민주화세대,그리고 청년으로 성장한 한국민주주의에 있어 새로운 성장을 위한 결절점이 되야한다.지난 시간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이제는 또다른 권토중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그렇지 않고 수구정당의 집권을 막자며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공포의 정치'에 기대어 '여론몰이'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성찰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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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25 14:1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늘 선거때마다 고민하는 문제인 당은 노동당, 인물은 반한나라당...ㅋㅋ

박종철은 알고보니 본교(영남중)출신이었더군요..
기억하는 선생님의 얘기를 좀 들으니
아주 착한 심성에 반듯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때 교사했던 분들이 다 퇴직하고 거의 안계서서 방송국서 그때 학교왔다가 뭐 별로 얻을게 없어서 그냥 갔다는...

드팀전 2007-01-26 07:58   좋아요 0 | URL
달팽이님>대선에서도 아마 '수구 집권 막자 ' 또는 '한편만 거대하면 안된다.견제할 수 있는 힘을 다오' 이러면서 여권의 표집결 논리가 나오리라 봅니다.지난번에는 민노당에 대해 유시민이 그런 발언을 했지요. '어차피 안된다.노후부에 힘모아줘라.'...
진보세력(?)이 집권해서 실패하고 그 반동으로 보수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민주주의입니다.할 수 없습니다.저열하게 살아남으려하지말고 깨끗이 죽고 다시 사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구두님>그 댓글이 정말 그렇네요...모르척 하기도 아는 척 하기도...
어쨋거나 시의적절한 시점의 책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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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제학도로서 그리고 비즈니스계에 있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 읽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이 책이 별 셋인 이유는 내게 힘들었기 때문이지 책의 내용이 부족해서는 아니다)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중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책장을 넘기면서도 갸웃 갸웃 거렸다.물론<국가의 역할>에서 장하준 교수가 하고자 했던 바....그걸 몇 줄로 정리하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무슨 잠언서도 아니고 대략적으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만 주워담기 위해 이 책을 보는 건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기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경제학에 대한 사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야 한다. 옛 강의실 기억을 떠올려 봤자 '경제학 개론'이거나 '경제사' 정도인 나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좀 고생해야한다.피구의 후생경제학이나 사무엘슨의 공공재 이론등을 떠올리기 위해서 일본의 경제신문사에서 나왔던 <경제학의 선구자>니 하는 류의 책을 뒤적여 보아야 했다.책이라는게 나아가는 맛이 있어야 된다.그런데 아파트앞 안전턱처럼 속도를 줄여가는게 반복 되다보면 결국 '책읽기의 악순환구조'가 발생하게 된다.저효율이 고짜증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경제학적 지식의 일천함을 안타까와하며 또 이 책을 술술 읽어 내실 분들의 지식을 부러워하며 읽기는 읽었다.

<국가의 역할>에서 장하준교수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론을 편다.그의 국가개입론은 제도주의적 관점에서의 개입이다.이 제도주의적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장하준 교수는 후생경제학,신자유주의,제도주의를 비교하여 설명한다.요약하자면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장하준 교수가 바라보는 시장에 대한 관점은 다양한 사회제도 중 하나일뿐 이라는 것이다.이념적으로 시장의 절대적 가지,시장이라는 유일 신을 섬기는  자유방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비교하면 시장은 그리스의 올림프스간 구성원중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이다.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시장의 실패를 세계의 실패가 아니다.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실패하면 인류는 대재앙을 겪을 것이라고 위협한다.그러나 제도주의적 관점에서는 다양한 제도들간의 상호작용으로 시장의 실패는 보완될 수 도 있다.

장하준 교수가 싸우는 대상은 명확하다.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신자유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신화들이다.특히 국가문제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자들의 반개입론은 이 책을 통해 철저히 비판당하고 있다.경제학사를 살펴볼때 대공황 이후 국가 개입주의는 너무나 보편적인 사상이었다.케인즈로 대표되는 개입주의는 70년대를 거치면서 역습을 받는다.통화주의자들의 공격이다.오스트리아 학파와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통화주의자들은 '최소정부'를 주장하며 시장의 유연성을 도모한다.90년대를 들어서면서 초국적 기업과 투기자본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그 바톤을 이어받고 있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경제학계에 끼친 긍정적인 부분도 잊지 않는다.정보의 경제적 역할,경쟁의 중요성,국가 영역 밖에 있는 시장의 중요성 등이 그런 부분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개입 여부가 역사적,지리적,환경적 요인등에 따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신자유주의는 개별 국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국민경제를 무한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탈정치화를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산업 정책(우리에게는 익숙하며 당연한 듯 보이는)같은 것들은 일소해야할 독버섯이다.특히 이 문제는 저개발국가가 과거 선호하는 방식이며 그 효과가 현재에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산업정책 논쟁은 현재성을 갖는다.장하준 교수는 '선별적 산업정책'이라는 것으로 산업 정책을 정의한다.

'산업정책은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일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저개발 국가가 산업정책을 펴는 이유는 간단하다.대기업을 키워서 정치자금 받겠다는 것보다는 국민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국가는 직접 자원의 배분에 관여하여 특정 산업을 육성한다.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 책에서도 여러번 등장하는 대표적인 산업정책의 예이다.이론적인 측면에서 강력한 정부의 금융통제를 통한 자원배분과 산업육성방식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장하준 교수는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이 가진 미래 정보의 불확실성과 불충분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실제 저개발국들은-현재 선진국이 되어 잇는 나라들 역시- 고유의 산업정책을 통해 국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산업 정책론에 갖는 반감은 이상화된 완전경쟁 시장에 대해 갖는 환상때문이라고 말한다.물론 산업정책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하는 바는 아니다.산업정책 역시 비용과 수익의 관계가 발생한다.결국 제도적 다양성과 기술 변동,그리고 경제 이론의 발전등을 고려한 조절 메커니즘으로서의 산업정책은 효율적인 정책 수단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바로 '탈규제'다.이건 다른 말로 하면 정부의 간섭을 없애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장하준 교수는 규제와 탈규제를 구분하는 기준의 모호성에 대해 언급한다.또한 탈규제가 경제 영역에서 정부의 완전철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힌다.시장의 효율성과 존립 자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규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개발도상국이나 체제 전환국의 경우에는 시장 규제 정도가 아니라 시장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또한 규제개혁을 통해 발생하는 분배의 형태도 고민거리로 남겨두어야한다.규제 개혁과 관련해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공기업의 효율성문제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널리 퍼뜨린-또는 경험상으로 익힌-공기업은 비효율적이며 실적이 저조하다라는 상식에 도전한다.특히 대만과 한국같은 신흥공업국의 경우 공기업의 성공은 주요했다고 평가한다.민영화론자들은 공기업의 이기적 대리인모델,징계 메커니즘의 부재,수익성을 기준으로 한 비효율성등을 예로 들며 공기업을 공격한다.흔히들 알고 있는 '무사안일 공기업인'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장하준교수는 민영화가 된다고 주인-대리인 모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단지 국가의 자리에 대기업이나 대주주가 자리바꿈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또한 '퇴거론'에 근거한 -즉 무기력한 기업은 소비자가 퇴출 시킨다는 식의-징계 메커니즘 역시 민영화도입으로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다.경험적으로 볼 때 공기업도 도산이라는 절차를 받게 되며 또한 반드시 지켜야하는 기업,주주 이익이 극대화된 기업조차  민영화로 그 퇴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결국 퇴거에 의한 징계는 기업의 효율성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기업 규모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수익성에 따른 공기업의 비효욜성도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즉 공기업은 단순한 수익성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수익성을 측정해야 한다면 공기업이 지향하는 '공익목표'라는 목표지향성을 포함한 수치로 재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치 중 좀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장하준 교수는 <국가의 역할>이 씌여진 시점은 2003년이다.세계화와 함께 등장한 초국적 기업의 증가와 외국인 직접 투자를 보여주기 위한 표에 문제가 있다.저자는 외국인 직접 투자가 대부분 선진국에서 발생했고 개도국은 극히 미미했다고 말한다.그러면서 1983년부터 94년까지의 투자 비중을 보여준다.국내 자본형성에서 외국인 직접투자비율을 나타내는 표에 의하면 한국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상당히 낮은 국가로 평가된다.물론 한국은 차관이라는 형태의 투자방식을 과거에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다.91-93년 수치를 보면 0.6%로 일본의 0.1%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낮은 편에 해당한다.그런데 문제는 이 수치가 지나치게 과거의 것에 의존해있다는 것이다.한국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 투자규제 문턱이 낮아지기 시작한다.그리고 99년에 이르면 외국인 직접투자가 대폭증가한다.99년 4월 외환자유화 1단계 계획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탈정부화한 금융시스템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약화,자본시장의 변화등은 기업부문의 자금조달구조를 변화시켰다.결국 98년부터 2000년 사이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액은 1965년-1997년 사이의 총 유입액과 유사해진다.장하준교수가 93년 이전의 외국인 투자액을 제기한 것은 초국적 기업의 진출과 투자라는 것이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세계적인 현상은 아니다라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였다.하지만 그 시점이 책이 써진 시점에서 10년전 자료에 근거하다보니 아무래도 현재성을 확보하기 어렵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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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23 22:00   좋아요 0 | URL
억지 춘향꼴로 책을 끝까지 읽었을 님생각을 하니 슬며시 웃음이 이는군요..
뭐 그래도 고집은 있어 끝까지 다 읽고 서평까지 올렸네요..
난, 모르는 책 들면 읽기는 해도 서평까지 쓸 엄두는 못내는데
그런 면에서 나보다 낫군요
우선 원론적으로 한마디 거들면...
고전파 경제학(시장자유주의)과 케인지안 경제학은 현실 경제의 변화에 따라
문제점이 커지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라
현실 인식이 그 관건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뭐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라
물 불 가리지 않고 다국적기업활동이 유리하도록 규제완화나 관세 및 비관세장벽 철폐를 주장하는데...
사실 국내적으로는 기업과 재벌들 처음엔 국민들 혈세로 기업일으켜 온갖 특혜에 부패로 덩지불려서 이젠 그 정부가 각종 규제니 해서 귀찮으니까 작은 정부를 만들어라고 하는데.. 좀 역설이지요.. 물론 세계시장에서 보면 국내 기업들도 완전경쟁 비슷한 시장에 놓여있어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연구개발비나 각종 수출 관련 특혜를 엄청 누리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요구를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일이라 생각되죠.
세계경제에서는 저자의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 보면 영국이 패권을 쥐고 있을 당시처럼 자국의 산업이 경쟁력이 있을 때에는 자유주의를 주창하고 국내산업의 보호가 필요한 대륙국가에선 보호무역주의로 맞서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꼴은 선진국들이 경쟁력있는 산업을 바탕으로 자유무역협상을 맺어 후발국이 선진국의 진입을 막으려는 사다리 걷어차기식의 정책을 편다고 비판하죠..
장교수님은 말그대로 전도유망한 젊은층의 중도우파교수라 지적 객관성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만
존경했던 정운영 교수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국가개입을 늘여서 사회보장제도와 노사관계의 재정립을 통한 인간적인 경제체제를 꿈꾸셨죠..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란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그 뜻을 대표하는 정책입안자 정치자들의 마음 속에 인간(짐승같은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서)의 마음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나저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언제 다시 찾을 건가요?

드팀전 2007-01-23 23:45   좋아요 0 | URL
한국은 독특한 발전국가모델로 성장해온 나라지요.피터 에반스 교수는 동아시아 발전 모델에서 기업과 사회세력간의 밀접한 관계를 '연계된 자율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박정희식 발전모델이 한국경제를 견이해온것은 사실입니다.(사회적 기회비용을 배제한다면.)한국의 경제는 '자본통제'가 핵심이었지요.국가가 금융기관을 통해 자본의 배분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이며 장교수가 말하는 '산업전략'이라는 것을 통해 '수출주도형'산업을 적극 육성하게 되지요.이 과정에서 재벌 기업의 특혜나 특정 기업에 대한 정치적 성격의 지원도 벌어지게 됩니다.어쟀거나 한국의 국가주도형 산업구조는 6,70년대 한국경제를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한국의 경제 발전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정책과 달리 다양한 각도의 국가개입을 통해 이루어졌지요.자본통제와 수입보호 정책이 대표적이지요.거기에 내부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로 국민동원이 용이했던 점도 있겠구요.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밀월 관계에 있던 정부-기업간 관계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 변하기 시작합니다.자본 시장이 변화하며 기업들은 해외자본 유치에 열을 올리게 되고 정부의 금융통제정책은 빛을 읽게 되지요.흔히 말하는 금융시장 자유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지요.덩치가 커진 재벌들은 효율성을 잃어버리고 중복투자,차입경영,재벌 총수에 대한 일방적 의존,문어발식 다각화 등으로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변해갑니다.
대부분의 신고전경제학에서는 한국경제의위기를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위기로 진단하고 발전모델의 종언을 선고합니다.정부의비효율성,재벌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등이 지적되고 정설로 받아들여져왔습니다.장하준 교수가 지적하는 부분은 그런 주류경제학의 진단이 과연 '상식'처럼 그런가 하는데 있는 듯 합니다.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상식'처럼 되어버린 주장에 '이론적'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장교수는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의 국가 개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그의 접근법에 노동경제문제는 빠져있지요.전체적으로 거시경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신자유주의가 우파이데올로기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장교수의 '개입주의'를 우파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신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 즉 거칠게 말해서 시장만능 주의와 국가개입주의를 놓고 보면 장교수는 후자에 속합니다.물론 신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들도 맑스 경제학에서 보면 결국 우파이긴 하겠지만요.경제학에서는 그런 좌우구분보다는 학파중심의 구분이 일반적인 듯 합니다.장교수의 다른 책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베블렌,갈브레이스등의 영향을 받은 제도학파적 속성이 강하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정치인 또는 사람들 개개인의 대오각성'을 통한 변화는 너무 낭만적인 접근입니다.도덕적이며 좀 더 확장하면 종교적인 접근이지요.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법률과 제도가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근원적인 주장은 현실 사회 관계속에서는 그다지 유의미하지 못합니다.실천의 구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주장이어야 현실 관계에 정합적입니다.개개인의 덕성 문제는 그것과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사회정치적 함의들을 개개인의 덕성으로 치환하는 '탈정치화'에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개개인의 덕성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미시적 기획과 거시적 기획의 차이를 분명히 하셔야 할 듯 합니다.
유리구두는 앞으도 계속 신어야 할 듯.....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글샘 2007-01-24 10:57   좋아요 0 | URL
정답 :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탈을 쓴 세계화만이 있을 뿐. ㅋㅋ 좀 비극적인가요?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은 <글로벌>이 아닌 <로컬>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글로벌>이란 개념이 특히 경제적으로 적용되면 제국주의와 착취 이외의 현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로컬>을 강조하는 지방자치나 무정부주의적 활동들이 <강력한 국가>를 통해 권력과 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이 없어도 어차피 사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한국이 경제 발전이 빚어낸 양달도 따스하지만, 그 음달은 여전하거든요.
아파트에서 문 꼭 걸어 잠그고 겨울에도 런닝차림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수십 미터 허공중에 떠 있는 생각을 하면 이게 잘 살게 된 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같으면 드팀전 아우님 사랑방에 불러서 동치미 떠놓고 막걸리 한잔 하고 있으면, 시퍼런 칼날같은 그믐달이 떠오를 무렵에서야 달팽이님이 슬그머니 합석할 만도 했을텐데요... ㅋㅋ
유리구두는 무효입니다. 열두시까지는 버텨 줘야 유리구두지, 그건 사기구두라고 봐요.

드팀전 2007-01-24 11:45   좋아요 0 | URL
생태주의의 모토가 그거지요.전지구적인 사고와 지역적인 행동....
실천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논지에서 봐도...맞는 말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외부유인론으로 설명하는게 옳은데 이 거대담론에 <로컬>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 개인의 실천 윤리와 실험으로써는 의미가 있으나 -저 역시 개인의 실천윤리로 이부분을 선호하고 좋아합니다,또한 먼저 선실험하시는 분들에 존경도 표합니다.-거대담론에 대한 대응논리로는 이상적일 뿐입니다... 이런 예를 들지요.
대의정치하에서 양심적인고 도덕적인 정치인,제대로된 인간들이 정치를 하는것이 전근대 정치윤리(공자 맹자님도 말씀하시던)에서도 지향했던 긍정적인 방식입니다.그렇게 만들기 위해 장기적 노력도 필요하겠지요.그런면에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저질 정치판을 순화하는 실천적 움직임이 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있는 둥 없는 둥 한 '국민소환제'를 현실화하도록 움직이는 일이 구체적입니다.(국민소환제라도 물론 문제가 많이 발생하겠지만..) 적절한 예였는지는 모르지만...제 논지는 이상적인 상황은 다들 알고 있다는 겁니다.존레논의 '이매진'에 나오는 그런 상황말이지요...하늘에서 세상을 관망하고 정리해주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잃어버릴게 없습니다.나름대로 폼도 나잖아요.^^ 영혼의 위안을 주는 몫이라면이야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20대 초반에는 그것도 결국 반동적이라고 본 시절도 있었지요.아...옛날이네.)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그 논리를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글샘님의 상황도 그러리라고 생각해요.제가 님의 글을 좋아하고 또 총체적인 진정성을 믿는 이유도 그렇습니다.님의 실천은 구체적이고 그 실천을 위한 논리들은 이성적입니다.또한 즐겨읽으시는 내면의 수양을 위한 책들은 또 그 나름대로의 바탕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제 개인적으로도 그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열두시 넘기면 와이프가 외박으로 칩니다.^^ 설 연휴 즈음해서 와이프가 친정갈 텐데 그때 소규모로 한 잔 하지요.싼거는 제가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달팽이 2007-01-24 17:2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고 또 배웁니다.
전공이 아닌데도...정리를 참 잘 하셨네요..
난 사실 경제학 대학원 다녔어도...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음에 보게되면 소주도 한잔 합시다. 지발...

글샘 2007-01-24 17:48   좋아요 0 | URL
이거 번개 후유증이 크군요. 이제 리뷰보다 긴 댓글들 읽기도 힘듭니다. 헥~~헥.컥,
요즘은 생태운동도 글로벌리가 아니라 씽크 로컬리, 액트 로컬리로 간다더군요.
제가 젤 좋아하는 노래가 이매진입니다. ㅋㅋ 다음번에 노래방가면 함 불러봅시다.
저도 소주는 좋아하는데... 소주먹고나면 기억이 실종되는 <상실이 병>에 걸려서리... ㅋㅋ

드팀전 2007-01-24 18:28   좋아요 0 | URL
^6^ 안그래도 저도 그런생각을 했습니다.왜 이렇게 댓글을 길게 썻지라고...달팽이님이 길게 써서 나도 길게..^^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소주는 시원!! ...서울출신이지만 소주는 시원이 역쉬!!
희안한 일인데 와이프 고향이 청주잖아요.그런데 시원이 나오는데가 부산이랑 청주더라구요...주례를 대선 사장님을 모셨으면 평생 소주이용권이런거 주시지 않았을까??^^ㅜ

그리고 달팽이님..제가 이 책을 읽다가 뒤적인 책들이 몇 권돼서 나름정리를 좀 했습니다..메모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