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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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책의 역자가 첫 머리에 쓴 글이다.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우리들이 처음 사람을 만나면 상투적이고 진부할 지라도 별다른 도리 없이 '호구조사'하는 것 처럼 말이다.지젝은 슬로베니아라고 하는 서구 변방의 철학자다.그럼에도 '21세기형 사상가,MTV형 철학자' 라고 불린다.그의 글쓰기는 '종횡무진' 미스 신답다.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4강에 올렸던 그 컨셉이 그에게도 적용된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며 그라운드를 장악하는 빨빨이 '멀티 플레이어'. 지젝은 확실히 '멀티 플레이어'다.그는 호수를 가로지르며 물살을 일으키는 바나나 보트처럼 철학,정치학,정신분석학.. 등등을 가로지른다.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가 이 어려운 장르를 꿰매는 실력에 감탄하곤 한다.일명 '지젝식 테피스트리'라고 불린다.

지젝의 책을 좀 즐겁게 읽기 위해 이런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털북숭이 중년의 아저씨가 벽난로옆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퀼트를 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가끔 까딱 까딱 조는 그의 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좋아..그렇다면 지젝이 그의 양탄자를 만들기 위해 들고 있는,곰발바닥 같은 손에 쥐여져 있는 은빛 바늘에 주목해보자.어떤 바늘로 코를 뜨고 있는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의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간단 명료하게 지젝이 사용하는 세 개의 바늘브랜드를 알려준다.입문서에서는 이런 단호함이 오히려 좋다.헤겔,마르크스,라캉표 바늘이 그것이다.방법론적으로 지젝은 라캉의 개념들을 자주 이용한다.지젝을 읽기 위해 그의 라캉을 이해해야 하는게 그래서이다.문제는 지젝이 아무리 쉬운 영화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에크리>의 그 위대한 왕따 라캉의 독해가 녹녹치 않다는 것이다.지젝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전도사 역할을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도구에 가깝다.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사상적으로는 독일 관념론의 거두라고 알려진 헤겔의 재조명과 정치혁명의 희망지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외연확장이다.즉 정치적인 라캉을 발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결여한 주체 모델을 제공하여 '자기 대상'을 변형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지젝은 냇물처럼 흘러가고 있다.그의 출발점을 계보학적으로 따져 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지젝을 그대로 보여주진 못할 것이다.저자는 결론에서 지젝의 작업이 소급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이는 지젝의 시대 정합성에 대한,그 비범함에 대한 칭찬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음번 그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미지수X 로 남겨 놓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지젝이 걸쳐 놓은 분야가 광범위 하다 보니 그의 사상을 몇 장으로 구획하여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여기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이 책은 이런 한계를 받아들이며 지젝의 문어발을 지젝식으로 과감하게 '소거'하고(^^ ;) 오징어 몸통 중심으로 몇 가지 개념들을 설명한다.이 책을 읽고 지젝에 더 관심이 가는 자들은 '따라 갈테면'... 더 따라가면 된다.책 말미에 지젝의 저서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해 놓았다.예를 들어 '지젝의 책 중 딱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데올로기라는숭고한 대상>이 좋다.가장 대중적으로 읽히지만 라캉의 개념에 대한 선지식이 없으면 힘들지도 모른다는 <삐딱하게 보기>' 라는 식으로 말이다.(이 정도면 '친절한 기획.. 씨' 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나는 아니라고 했다' ^^) 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주체'.,'탈근대성','이데올로기','환상','인종주의' 등 이다.물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캉의 '세가지 계','대타자'등의 개념과 지젝이 주목하는 실재계와의 상호작용 등은 약방의 감초처럼 수시로 등장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젝에게 관심을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주체' 문제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그의 철학이 '정치'라는 쪽으로 더듬이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주체'라는 것은 워낙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라서 줄기차게 이것만 물고 늘어질 수 없음이 안타깝긴 하다.그래도 '내가 누구인가'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주체' 문제는 틈만 나면 열어 보고 싶은 장독대에 묵혀둔 곶감 같은 것 아니겠는가?

'주체' 문제를 다루는데 늘 그 분이 있다. 교부재처럼 태글 걸리셔 절룩거리시는 그 분.바로 교과서에서 배워서-중요한 것은 그래서 지금까지 믿고 사는- '나는 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데카르트 선생님이다.좀 넓게 말하면 탈주체론,탈구조주의자들은 '주체는 외부의 영역에 지배받는다.' 라고 주장한다.푸코는 권력이라는 것을 상정했고 또 거기서 빠져나올 가능성의 주체에 대해 연구하다가 돌아가셨다.어쨋거나 이 주장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하는 것은 주체가 데카르트처럼 '내부적인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과 주체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것이 쉽게 부정된다는 점이다.(내 개인적으로는 '자기 동일성'의 부정에 대해 열광(?)하는 편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태종태세문단.속...요즘의 트랜드는 분열된 주체,꼭두각시 역할의 주체라면 지젝은 슬며시 거기에 딴죽을 건다.즉 '코키토'의 옹호를 주장하는 것이다.와우! 지젝처럼 최첨단이 '고기토'를 옹호했기 때문에 지젝 옹호자들은 잠깐 머뭇거렸다고들 한다.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지젝의 '코기토'는 데카르트적 주체 (좀 웃자고 이야기하면 '싸가지 없는 주체')는 아니다.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데카르트의 주관적,자이완전형의 주체와 객관성의 과잉인 탈구조주의적 주체와는 또 다른 주체이다.그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주체의 토대로 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주체가 철회되는 지점,세계가 절대적 부정성으로 경험된 지점,모든 것이 부정된 텅 빈 장소 속에 주체를 위치시킨다는 것이다.'주체는 공백이다' 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듯 하다. 지젝은 프레드릭 제임스의 <사라지는 매개자> 개념을 응용하여 자연과 문화 속에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를 상정한다.(대략 이해가 갈 듯 하지만...또 쉽게 설명하긴 어려운 개념인 듯...그래도 자꾸 보면 이해가 될 때도 있다 ^^ 책 말이다.)

지젝은 탈근대성에 대해서도 똥침을 한번 먹인다.탈근대성이란 것은 간단히 말해 '대타자'라는 것이 붕괴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탈근대론자들은 그 붕괴가 발생 시킨 자유에 대해 룰루랄라 하지만 실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지젝은 이를 '재귀성'(반성성) 이라고 말한다.저자는 환경을 지키기 위해 또 다시 과학에 의존하는 주류환경론을 그런 예로 들고 있다.'대타자의 붕괴'는 지젝이 말하는 상징적 효력의 치명적 손상을 뜻한다.(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닭대가리 인간'의 예가 제시된다.) 또 다시 어쨋거나 저쨋거나 ..태종태세 문단..속... 하여 '대타자'가 붕괴되어 버리니까 좋을지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는 것이 핵심이다.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고하고 나니까 인간들이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효력'의 상실은 인간을 선택의 주체로 만들어 버렸다.이 겁많고 소심한 인간들은 결국 어디로 가느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한용운 스님의 시를 오역하여 '나는 복종하련다'로 간다는 것이다.이건 경제적인 선택이기도 하다.편의점에 가면 한 상품에 대해 서너가지 브랜드만 전시한다.너무 많이 전시하면 실제 구매가 떨어진다.왜냐하면 백 종류의 비누 중에 하나 고르는 것은 너무 큰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비경제적 행위이기 때문이다.'선택의 주체'로 홀로 남겨진 인간이 노예적 복종에 종속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또한 그와 유사하게 과도한 믿음이 주는 편집증이나 나르시즘의로 향하기도 한다.지젝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행위'하라고 주문한다.행위는 구체적인 행동과는 다른 개념이다.이는 주체의 소거를 포함하는 재창조를 포함하는 부정의 양식이다.(이게 뭔지 구체적 행동 지침을 지젝이 이야기하지 않는다.지젝은 거의 행동지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그게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행동지침을 주길 바라는 것이 또한 얼마나 편리성에 근거한 노예적 근성인가...)

지젝은 탈근대의 상황을 논의하면서 다시 '이데올로기'에 대해 걸고 넘어진다.세계의 변화보다 세계의 종말을 꿈꾸기 쉬운 시대에 왠 '이데올로기'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후쿠야마인가 하는 분은 오래전에 '역사의 종언'이라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셨고, 벨이라는 분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까지 언급하셨었다. 또 레닌 동상이 무너지자 '그럼 그렇지'라고 '이데올로기'를 극적으로 축소화 시킨 오역을 행하신 분들도 많았다.즉 그들이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양국이 주도한 냉전이라는 시대의 한 축이,한가지의 정치적 사상만을 뜻하는 것이었다.이데올로기가 그것일까? 냉전이 나오기 전부터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있었는데...과연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자본주의''공산주의''양키''빨갱이'하는 것만을 의미할까? ....지젝이 타인의 환상을 깨지 말라고 했으니 깨지 않겠다.안그러면 하이스미스의 <검은집>의 젊은 청년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대학들어가서 처음 배운 것이 알튀세르의 '상부구조/하부구조' 와 '이데올로기 장치'들이었다.범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를 거칠게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일곱말씀 중 하나와 거의 유사하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이다.

지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슬로터다익의 냉소적 주체를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설명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가 그것이다.이것은 과거 이데올로기 비판이 신비화를 밝혀내는 것이 있는 차원과 현격히 다른 인식지평을 보여준다.이는 인종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과거 이데올로기 비판의 논리적 함의를 따르면 만약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허위의식이 허위의식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광명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이었다.그런데 '이건 아니다' 라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 참신한 점이다.주체들은 다 알고도 하지 않을 뿐이다.냉소적이게도.지젝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앎의 차원에서 행동의 차원으로 이동시킨것이다.지젝은 티벳의 회전통 기도문의 예를 들면서 믿음의 물질화와 자동화된 신념에 대해 말한다.그러면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갖는 내적 문제들(즉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믿음을 생산하는지)과 이분법적 구조를 비판한다.지젝은 상징계 내부의 틈을 은폐하는 장치로서,상장계에 통합될수 없는 적대로서,유령같은 보충물로서,또다른 층위가 있음을 주장하며 이데올로기 삼원구조층을 제시한다.

지젝은 우리가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세상에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그리고 이와 함께 상징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환상이라는 프레임에 의존한다고 말한다.지젝은 언제나 사회는 분열되어 있었다는 말로 '적대'와 '당파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즉 우리가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하나뿐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없다'라고 하는 것 보다 최소한 사리판단에 맞는 것일 게다.지젝은 '환상'을 타인의 환상에 침범하지 말라고 말한다.그러면서 실재적으로는 '정부'의 환상에 대한 조절을 말한다.이 지점은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즉 권력의 헤게모니를 움켜진 주체들의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지는지? 또한 같은 방식으로 왜곡된 주체들이 행사하는 조절능력에 어떤 당파적 환상이 존치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기때문이다.이와 더불어 지젝이 라캉을 이용하여 언급하고 있는 '욕망'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긴다.'타자의 욕망'으로 수동화된 욕망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했다는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지젝에게 이해가 될 런지 궁금하기 때문이다.어쨋거나 지지배배....지지배배다..

생긴 것과 사뭇 다르게 쿨한(?) 슬라보예 지젝.이런 사람들은 미움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다.나는 아직 지젝을 잘 모른다.또한 그의 철학이 부정적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어찌 되었건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이 없으면 '관념'의 장난으로 치부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나 당장의 현실적 부정에 칼을 드는 것이 아니면 '사변'으로 취급하는 경박하고 과도민중화된 '유물론'적 접근에서나 말이다.문제적 철학자 지젝은 떨어져버린 페이퍼 뒷 장 취급받는 마르크스와 왕따 라캉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내고 있다.그는 실천적 과제와 구체적 투쟁 지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앞에도 이야기했지만 '과제'와 '지침'에 너무 목말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담임 선생님의 금주의 실천사항에 익숙해있더라도,인사계의 금주 작업 목표가 그리워져도,총학생 투쟁위의 투쟁지침이 가끔 그립더라도..지젝은 그런 것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지젝은 이 말 처럼 행위를 하는 장소를 규명하는데 공을 쏟고 있다.이를 통해 행위의 가능성을 창출해내고 싶은 것이 지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낚시 바늘을 만드는 사람에게 낚시 방법과 낚시의 포인트를 묻지는 말자.그것은 지젝을 독해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행위하는 우리의 몫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친절한 입문서이다.그리고 지젝에 대해서는 역시 알라딘의 로쟈님 페이퍼가 많은 도움이 된다.따라가기 힘들지만..쿨럭 쿨럭...가르마같은 논길을...쿨럭 쿨럭...다리를 절며 걸어보자.뭐가 되긴 되겠지.봄이라도 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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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1-14 14:03   좋아요 0 | URL
읽어보지도 못한 주제에 책 제목만 보고도 '저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쿨럭.

드팀전 2008-01-14 14:14   좋아요 0 | URL
쿨럭..다들 쿨럭..

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 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김수영 <눈>....쿨럭..

길게 썻다고 절 미워하진 마세요.지난 번 대충쓴 리뷰에 대한 헛발질이거나 쿨럭이니까..
옹옹옹....쿨럭이 유행어가 될 듯.

로쟈 2008-01-29 13:29   좋아요 0 | URL
길게 썼음에도(!) 당첨되셨군요.^^

드팀전 2008-01-29 18:11   좋아요 0 | URL
요즘 트렌드인가봐요...멜기세덱님도 길어요.
양적 축적의 질적 변화를 꿰해볼때도 되었는데..(양과 질이 그렇게 잘 넘어 다니는지도 좀 의문이긴 합니다) anyway ...지젝은 순전히 로쟈님에게 잘보이려고(?) 읽고 있으니 잘 봐주세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글쓰기이자 사람이어서 다른 책들도 쌓여 있는데..최근에 나온 책은 보관함에 있구요.요즘 너무 바빠서 소설 한 권을 가지고 1주일째 붙들고 있습니다.

마늘빵 2008-01-29 15:11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저도 같이 올라갔네요.

드팀전 2008-01-29 18:12   좋아요 0 | URL
이런 걸 동반우승이라고 합니다.ㅍㅍ
축하드려요...근데 이런걸 나눠먹기라고 비난하지는 않으려는지..
"과전불납리"하라고 햇는데..ㅋㅋ

멜기세덱 2008-01-29 15:34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드팀전님!! 지젝이로군요.ㅎㅎ
지젝이로군요. 로쟈님 덕에 몇 권 사놓긴했는데,영 엄두가 안나서리....ㅋㅋ
드팀전님 덕에라도 걍 한 번 도전해봐야겠네요..ㅎㅎㅎ

드팀전 2008-01-29 18:13   좋아요 0 | URL
^^ 길게 쓰면 다 되나봐요.자로 재봤는데 멜기님이 더 길게 썻어요..you win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나는 왜 리뷰상을 받지 못했을까? 그게 이것보다 나앗는데...

이매지 2008-01-29 20:00   좋아요 0 | URL
제가 제일 짧게썼군요 ㅎㅎㅎ
이거 뭐 다른 분들 리뷰 보러 다니니 -_-
어떻게 그런 리뷰로 뽑혔을까 x팔리는군요 ㅠ_ㅠ
라캉은 정말 녹록치 않아요.
언제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듯.
지젝도 미워하지는 않지만 가까이하기엔 살짝 먼 당신이랄까 ㅎㅎ

드팀전 2008-01-30 08:30   좋아요 0 | URL
제일 짧게 씌셨으면 산업적으로 보자면 가장 효율성이 높은거네요^^
투자대비 산출 ..^^ 님이 최고에요.^^
라캉은 전공자들로 어려워하던데요..

마노아 2008-01-30 01:42   좋아요 0 | URL
이번 주에는 제가 아는 사람 중 네분이나 이주의 마이 리뷰 당선되었어요. 축하합니당^^

드팀전 2008-01-30 08:3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는 분이 많더군요.^^
사진은 마노아 님인가요....
이렇게 말하면 숙녀분께 실례가 되겠지만
하고픈 말은 안하면 배가 고파서 ㅋㅋ
"귀엽게 생겼어요."
 
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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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날도 아닌데 아지랑이가 보인다.올해 처음 읽었던 책 때문이다.라캉과 그의 친구로 인해 겨울 날, 책 장 속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때문에 눈 앞이 희뿌였다.무자년에는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읽어보려고 생각했다.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을 접해보지 않았다.그래서 지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 다음해의 독서계획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내년에는 지젝을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처음으로 만만해보이는 <how to>시리즈를 골랐다.지젝의 별명은 '라캉의 전도사'이다.결국 라캉을 알아야 지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이 시리즈의 라캉은 공교롭게도 지젝이 썻다.그러니가 화투로 치면 '일타이피'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런데 잘못하면 일타이피 하려다가 확싸버려서 남 좋은 일 시켜 줄 수도 있는 법이다.)그러나 역시 욕심이다.이 책은 결코 라캉에 대한 친철한 개론서가 아니었다.

이 책은 <how to>시리즈 답게 가벼운 분량이다.그런데 왠걸 이 책을 읽으며 한 챕터를 서너번 읽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대중문화를 이용한 지젝의 비유는 그럴싸 했지만 결국 라캉의 개념형들을 살펴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읽기 만만한 책은 아니었다.라캉의 욕망의 삼각형 같은 것을 그리는 수준으로는 지젝이 설명하는 지젝식 라캉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그래서 읽던 책과 동시에 10여년 전에 개론 수준에서 봤던 권택영 교수의 <대중문화로 라캉읽기>라는 글을 다시 꺼내 읽었다.결국 두 가지 글을 동시에 본 셈이 되어버렸다.결과적으로 이 책으로만 한정하자면 결코 기획의도처럼 친철한 가이드 북이 되지 못한 셈이다.

재미있었던 것은 내가 오래전에 지젝의 입김을 맛봤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는 것이다.권택영 교수의 글 아래 작은 주석에서 지젝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십 여년전에 라캉을 읽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 뿐,아래 있는 작은 주석까지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그리고 설령 보았다 하더라고 한참 뜨기 시작하는 지젝이라는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진 못햇을 것이다.권택영 교수는 자신의 글이 최근 라캉의 해석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지젝의 접근을 많이 참고 했다고 발혔다.그러니까 두리뭉실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미 십 여년 전에 지젝의 글을 한번쯤은 접했던 셈이다.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라캉이 만만치 않기는 피차 일반이다.그나마 다행이라면 좀 어렵고 확실히 와 닿지 않아도 계속 읽어볼 동력이 충분하고 그만큼 엉덩이가 무거워졌다는 것 뿐이다.물론 더 직접적인 것은 예전만큼 나를 재미있는 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영화 <색.계>를 라캉식으로 분석하는 글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아직 찾아 읽어보진 못했다.)또한 영화를 둘러싼 영화 외적인 현상까지 말이다.영화 <색.계>는 사실 섹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데도 파격적인 섹스씬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그리고 그 결과 낮시간 대에 중장년층 아줌마 관객들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흥행몰이를 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영화를 보고 나서 커피숍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호들갑 떨며 "그런 자세가 가능이나해?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들 한다.영화 <색.계>에서 충돌되던 감정들과 욕망들,사건의 전개방식에서 응용되는 테마들은 라캉의 개념들로 분석하기 용이해보인다.물론 이미 많은 평론가들이 했겠지만...

뭔가 정리된 리뷰를 좀 써보려했는데 능력 밖이기도 하고 지금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두기로 했다.올해 지젝을 읽다보면 지젝처럼 한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고 LP시리즈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를 보고 있는데 역시나 이 책에 나왔던 지젝의 인용과 예들이 여러번 재탕되고 있다.이 뿐 만이 아니라 그의 주요저서들에서도 그렇다고 한다.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반복학습의 효과로 뭔가 하나쯤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니 말이다.책 장을 한 장 넘길 때 마다 고민해봐야 하는 수많은 정보들로 인해 피곤하기는 하다.너무 많은 정보가 결국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이 좋았는지는 사실 내 영역 밖이다.어려우면 내용이 어려워서인지 안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그럼에도 약간 뻑뻑한 부분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지젝의 말 중에서 한 두마디를 적어보면서... 오늘은 여기까징..

"라캉의 주체는 언제나 탈중심화 되어 있다.그의 요점은 내 주관적 경험이 자기 경험 외부에서 내 통제를 넘어서는 객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매커니즘으로 조종된다는 것이 아니라,훨씬 전복적인 것이다.즉 나는 내 가장 내밀한 주관적 체험,사물이 '실제로 나에게 보이는'노습,내 존재의 핵심을 구성하고 보증하는 근원적 환상을 빼앗기게 된다.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것을 의식적으로 경험하지도,확신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진실한 활동,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 준다."

"라캉에게 궁극적인 윤리적 과제는 진정한 깨어남이다.단지 수면으로부터의 각성이 아니라,깨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지배하는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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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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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마지막 책을 고를 때는 망설이게 된다.마치 어물전에서 놓인 고등어를 고르며 이것 저것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 처럼.올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들 속에서 머뭇 머뭇 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책들이 아우성이었다.마지막 구명정에 타려는 것 처럼 제 각각 자기가 승선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시끄러워.' 귀를 막고 소리들을 떨쳐냈다.결국 삼 천년 가까이 묵직하게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있었을 <일리아스>를 마지막 구조자 명단에 올렸다.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득의만만하게 킬킬 거렸다.

 올 연말은 무척이나 방학이 그립다.생각해보니 흔히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들을 본 것은 주로 방학 때였다.<삼국지>,<수호지>,<사기>,<플루타크 영웅전>,<그리스 로마 신화>. 내가 처음으로 <일리아드/오딧세이>를 본 것도 겨울 방학 때였다.긴 시간이 지나 천병희 교수의 두꺼운 <일리아스>를 펼쳐드니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었던 방학 때가 사무치게 그립다.쉬는 시간 학교 휴게실에서 사먹던 야채 호빵에 대한 그리움처럼 말이다.방학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방학 때도 결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내게는 엄살로 보인다.'우리 것만 좋은' 게 아니라 방학은 직장인들의 영원한 로망이다.법적으로 주어진 휴가도 눈치보며 써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말이다.

 그리스 서사시는 결국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다.사실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에 가깝다.신들이 두는 체스판의 말들처럼 영웅들이 울다 웃다 한다.그렇다고 인간이 아무런 숭고함이나 자유의지도 없이 목줄 매단 강어지 마냥 종속된 존재들만은 아니다.그들은 때로 신을 위협하기도 하고 운명에 초연하기도 하다.초연함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의 모순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 아니던가.여기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상투적 모습이다.조금 좋게 말하자면 부여된 역할에 대한 완전성이다.물론 이들도 실수를 하고 질투와 미망에 사로잡힌다.그거야 신들도 마찬가지다.그러나 필멸의 인간임에도 영웅들은 끝까지 영웅성이라는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주인공 아킬레우스만 보자.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이 인간은 오만방자 천하무적이다.그리스인이든 트로이인이든 그가 최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인간은 아가멤논의 모욕에 완전히 삐쳐서 동족들의 죽음은 나몰라 한다.결국 불끈하고 창을 들고 일어서는 것도 파트로클로스라는 친구이자 시종의 부고를 듣고 난 다음이다. 아킬레우스의 사적 분노는 또 오바의 극치를 이루어 신들로 부터도 경계를 받는다.뛰어나지만 막무가내 같은 이 인간은 야수와 인간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이를 인간이 가진 다양성을 총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아킬레우스의 극단적 성향은 또 하나의 인간에 대한 전범이 되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를 비롯해서 <일리아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영웅들은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 자체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아폴론에게 속은 감이 있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헥토르 역시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이들에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그것이 예정에 따라 집행되길 기원할 뿐이다.때로는 운명의 여신은 선택지를 준다.예를 들어 아킬레우스는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편안한 길 보다는 짧고 길이 남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결국 그것도 다 예정된 제 팔자일지 모른다.재미있는 것은 영웅들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는 것이 신들 조차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데 있다.신들의 초월성을 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영웅들은 그 초월성 앞에서 운명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김상봉 교수는 정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에 닿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사실 대개의 모든 영웅신화들과 최근의 영웅스토리 영화들까지 이와 유사한 정서를 담고 있다. <일리아스>는 모든 그것들의 원형이 되며 수 천년 전 그리스인들이 지향했던 신과 다르지 않은 인간 정신의 고고함을 담아내고 있다.

 <일리아스>의 가장 명장면은 사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도 아니고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기사도 정신도 아니다.마지막에 있는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간 장면이 첫 손에 꼽힐 만하다.

 언젠가 집에 갔을 때 아버지와 케이블 TV에서 하는 영화<트로이>를 보게 되었다.영화를 보시던 아버지가 그 장면에서 "야..저 왕이 진짜 멋있구만.."이라고 짧게 말씀하셨다.아마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영화<트로이>에서는 명배우 피터 오툴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을 겪은 프리아모스 왕 역 맡았다.이 장면은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짧게 그려진다.그러나 <일리아스>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장면에서 거대한 슬픔에 울부짖는 프리아모스의 모습이 묘사된다.그의 울음과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책에서는 헤르메스의 도움과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 여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다.물론 영화<트로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영화 <트로이>와 <일리아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의 존재'와 '신의 부재'의 차이이다.영화에서의 '신의 부재'를 좋게 봐준다면 -또한 일리아스를 읽는 한 독법으로도 가능한-신의 존재가 인간들에게 내재된 것으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신은 분명히 인간성의 한 측면으로서 읽힐 수 있기때문에 무리한 해석은 아닐것이다.단지 생태와 북어의 차이 같이 영화<트로이>와 서사시<일리아스>가 차이가 있다.(북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생태의 싱싱함이 늘상 한 수 위다.)어쨋거나 트로이를 두고 양편으로 갈라서서 싸우는 신들의 모습을 만날 수 없으니 영화로서는 포기해야 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그런데 사실 내게 영화 <트로이>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각의 독재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책을 읽다가 아킬레우스가 나오면 왜 금발의 브레드 피트가 떠오르고 파리스가 나오면 왜 올란도 볼룸이 들판을 뛰어다니냐 말이다.그 허튼 영상이 식탁 위를 찾아다니는 파리때처럼 잦아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프리아모스의 슬픔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움직인다.우리는 삶의 여러 부문을 두고 갈등할 수 있으며 또한 폭력과 반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나는 '위선적인 공감' 보다는 '위악적인 갈등'이 훨씬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가 무난하게 묻어가는 무임승차를 도모하는 반면 후자는 요즘은 부정되기도 하지만 변증법적인 결과물들을 낳아서 세상을 움직인다.'갈등'을 한센병 환자처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또한 늘상 통합과 화해를 강조할 필요도 없다.세상에는 함께 있을 수는 있으나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이를 '관용'과 '화해'의 정신으로 억지로 묶어 놓으려는 갸륵한 마음은 때로는 진실을 허위로 덮거나 폭력이 될 수 있다.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공감과도 같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측은지심'이다.서로 적이 될 지언정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는 야수가 아닌 '인간'의 마음 말이다.실제 있었던 이야기였는지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우화가 생각난다.

학도병으로 아들을 보낸 어머니가 있었다.어느 춥고 무서운 밤, 집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어머니가 두려워 하며 문틈으로 보니 거기에는 거지꼴을 하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북한군이 서있었다.그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낙오한 소년병이었다.어머니는 그를 두려워 하지 않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그리고 다음 날 그들을 쫓아온 군인들도 돌려보냈다.며칠을 쉰 다음 그 소년병은 본대를 찾아서 북으로 올라갔다.그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자신의 아들의 적일 수도 있는 나를 살려주고 진짜 어머니처럼 잘 대접해 주었느냐고 물었다.어머니는 처음에 무섭기도 하고 내 아들을 해코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있다 그 마음을 풀게 되었다고 말했다.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행여 자네처럼 북쪽 어딘가에서 낙오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내가 이렇게 자네에게 해준 것 처럼 자네의 부모나 또 아니면 그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네를 돌봤다네...조심해서 올라가게나" 라고 말이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 아닌가? 다음 날 '적을 숨겨준 부역자' 라고 어머니를 끌고가서 고문하는 것은 무엇이될까?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북한' 좋게 말한다고 하실 분이 있으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밝힌다.) 전쟁이기때문에 반인륜적인 학살도 명령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 인간인가 저항권을 주장하며 불복하는것이 인간인가? 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선택이 늘 같은 과정과 결과를 낳을 수는 없다.하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 수 천 년 동안 수 억 만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일리아스>를 읽으며 먹고 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추신> 한 해 동안 여러분 감사했습니다.제 날카로움에 베이신 분들께도 사과와 감사를 드리구요.좋은 글로 저를 1센티씩 키워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또한 제가 물렁 물렁 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제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회적,역사적 상황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강철이 단련되는 것은 모루 위에서라는 말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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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2-25 01:39   좋아요 0 | URL
올 한해 참 우울한 한해였던것 같네요. 특히나 그 피날레가...
하지만 절망은 희망을 위해 반드시 거칠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기도 하죠.
올 한해 정리 잘 하시고 내년에 희망을 가지며 우리 만나요.
(근데 방학이 나름 힘들다고 하는건 엄살 맞아요. ㅎㅎ 제게는 책을 그래도 맘껏 읽을 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고 아이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낼수도 있는 황금같은 날인걸요. 이번 겨울에는 책 말고도 공부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아 연수도 두가지나 신청해놓았는걸요. 우리나라 불화의 이해 하고 미술상담치료법 하고... 만만치는 않지만 이렇게 뭔가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는것도 방학이니 방학이 있어 행복한거죠. 대한민국이 이런 인간다운 생활과 인간다움의 재충전을 위한 휴가라는 개념이 생기는 날이 오기는 할까요? 대한민국 모든 노동자가 최소 일년에 한달정도의 휴가는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그날이 올때까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싸워야죠... )

드팀전 2007-12-25 10:53   좋아요 0 | URL
대선때문에 그렇게 우울해할 필요까지야...오래전 부터 예상했던 거 잖아요.전 최소한 최장집 교수 말처럼 그것도 민주정치 체제하에서는 나올 수 있는 카드라고 생각해요.오히려 그걸 막겟다고 무리하게 달려들다가 더 민주적 가치들을 손상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여당은 야당이 되어서 이제 견제의 정치를 잘 하시고 의석수 유지도 힘들어보이는 민노당은 절차탁마하면서 한국 정치가 돌이킬 수 없는 선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겠지요.
방학 잘 보내세요.

ghwngo 2008-01-30 08:43   좋아요 0 | URL
리뷰보다 추신이 더 멋있군요. 1센티의 성장 부분이요. ^^* 책 따라 처음 들어와본 블로그인데, 정말 읽을거리가 풍성해서 너무 좋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다른 세상의 아이들 - 세계화 시대의 야만, 어린이 노동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저 아이의 이름은 '루빠' 이다.내가 이 아이를 본 것은 지하철에서다.옆에 앉은 사람의 신문을 훔쳐보다  아이와 시선이 마주 쳤다.내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조선일보' 였다.신문에서는 이 아이를 '돌깨는 아이 루빠'라고 소개했다.

조선일보에서는 몇 달 전에 our asia 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아시아 아동 노동의 현장을 촬영하고 이를 지역 민방과 기타 다른 매체를 통해 방송한 것이다.방송학계에서는 신문기업의 방송 진출의도가 드러난 시도로 보았다.나는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보지는 못했다.신문과 방송을 통해 이 시리즈가 나가고 국내에 후원금이 꽤 모였다고 한다.내가 지하철에서 본 신문의 기사는 캠페인 이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난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후일담 기사였다.

나는 부랴 부랴 동영상을 검색해서 보았다.('돌깨는 아이 루빠'로 검색하면 만날 수 있다.이외에도 성매매하는 아이,길에서 꽃을 파는 아이등 많다.) '루빠'는 8살이고 네팔에 산다.네살 때부터 돌을 깻다고 한다.마을사람들은 강가에 천막을 치고 모여 살면서 모두 돌을 깨어 먹고 산다.돌을 깨는 작업은 매우 위험하다.아이들 중에는 망치에 손을 찧어 손가락이 마비된 아이도 있다.또 깨진 돌이 튀어 실명하기도 한다.하루 10시간씩 돌을 깨면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번다.이 마을에 아이들은 4살쯤 되면 강가에 앉아서 돌을 깬다.루빠 역시 그랬다.이 다큐멘터리에 보면 2살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 아이가 돌망치를 들고 돌을 깨면서 논다.태어나면서 본 그 일을 앞으로 그 아이도 평생할 것이다.마을은 온통 돌가루 먼지로 회색이다.아이들은 거기서 일한다.루빠에게는 양팔이 없는 동생이 있다.이 아이는 돌을 깨지 못하니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새처럼 앉아서 미안함을 달랜다.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무의미한 이 작업에 운명을 걸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옥에 빗댄다.8살 짜리 루빠가 그런 말을 한다.

"글도 모르고 가난하니까 돌을 깨야해요 이게 내 운명이에요"

8살 짜리 아이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니...

다큐멘터리는 유엔아동권리 조약을 수시로 비춘다.즉 아이들의 노동을 금지한다는 규약이다.프로그램은 네팔 정부가 이 조약을 지키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끝을 맺는다.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까?

제레미 시브룩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만약 당신이 따뜻한 마음과 동정심으로 충만하여 '아동 노동'을 없애는 것이 '선'의 실천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그리고 또 그런 '정언명령'을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면. 이 책 <다른 세상의 아이들>을 읽어보아야 한다.제레미 시브룩은 19세기 산업태동기의 영국과 20세기 방글라데시 아이들을 교차편집하여 비교한다.19세기 당시 생활상을 묘사한 글들과 오늘날 남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풍경은 놀라울 만큼 유사성이 있다.

저자는 산업 혁명기 전부터 빈민 아동들의 노동이 이용되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산업혁명기에 와서 아동 노동은 노예 노동을 대체하여 높은 수익성을 올리는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말썽많고 통제하기 힘든 노예 대신 순응적인 아동들이 그자리를 대신한 것이다.그리고 그 때 부터 이미 아동 노동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고 말한다.즉 '아동 노동폐지론'과 '아동 노동보호론'이다.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폐지론'이 지극히 서구적 아동관에 바탕을 둔 가치라고 말한다.우리가 상식적으로 믿는 '아동'은 서구 근대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아날학파의 대가 필립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결국 서구 모델은 '노동 없는 유년기'라는 근대적 관념을 창조한다.그련데 대부분 방글라데시 같은 빈국에서 아동 노동이 금지되면 어떻게 될까? 불행히도 이는 한 가족의 '생존권'을 뺏는 결과를 낳는다.온 가족이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먹고사는 마당에 아이들의 일을 전면적으로 금지시킬 수 없다는 점을 상식적인 휴머니즘이 잊고 있다는 것이다.미국 의회에서 아동 노동에 의존한 의류사업을 금지하기 위해 실시한 '하킨 법안'은 아동 노동 금지가 아무리 욕구는 강할지라도 그렇게 무턱대고 실시할 수 없는-훨씬 섬세한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하킨법안'이 강제되면서 빈국에서는 일종의 '풍선효과'가 발생했다.아이들은 의료공장에서 쫓겨나서 더 열악한 공장으로 향하거나 거리로 흘러들어갔다.아이들이 더 비밀스럽고 열악한 곳에 더 대항력없이 스며들게됨에 따라 아동 노동을 금지하겠다는 법안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 노동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역사적인 가난,빈곤한 교육체계,세계화,그리고 소비주의를 꼽고 있다.서구는 이런 문제를 제공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외면하고 서구적 가족 규범을 유엔의 이름으로 강제하고 있다.저자는 많은 서구국가들 역시 전통 사회에서는 가족 경제 내에서 아동 노동을 일정 정도 인정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집단망각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아동들의 도덕적 십자군인양 행사하고 있는 것 뿐이다.우리 나라의 50-60년대만 생각해봐도 이는 분명하다.우리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꼴베고 소 풀먹이는 등 가족 경제에 노동력을 제공했었다.저자는 서구의 양심이 실제로 핵심에서 종종 멀어지며 수혜자들에게 미칠 결과에 대해서도 잘 고려하지 않는다고 우려한다.

이런 논의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답은 성장이다'로 귀결되곤 한다.일정 정도의 성장 없이는 분명히 아동 노동 문제 해결에 답이 없어 보이긴 한다.그렇지만 이런 성장론자들은 주로 서구 성장 모델을 금과옥조로 삼고 그걸 따라하면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그렇다면 서구의 빈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절대 빈곤은 많이 벗어났지만 불행히도 서구와 그를 열심히 따라하는 우리나라에도 여전히 많은 빈곤층이 존재한다.요즘 밥못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었어라고 한다면 인터넷에 우리나라 결식아동 숫자를 검색해보면 된다.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성장에 따른 분배이다.저자는 서구 성장의 역사가 정복과 통제의 역사였음을 잊지말라고 말한다.이런 류의 주장은 가난한 나라에게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는 식민경제 모델을 따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한다.오히려 현재 불고 있는 세계화는 국가의 위치를 축소하고 빈부격차를 벌여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수 밖에 없는 가난한 빈민들에게 더 큰 짐만 안기는 서구와 빈국내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발전방향이라고 비난한다.

또한 사람들은 '교육'의 부재에 대해서도 말한다.교육수준이 높아지면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고 좀 더 나은 작업장에서 일할 것이라고 말이다.맞는 말이다.그런데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받은 일부는 여전히 실업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실제 써먹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저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아동 노동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하지는 않는다.그 안에는 사회적응을 위한 교육기능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도 한다.아동 노동의 문제는 단순히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현재적 문제이다.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에서 많은 부분을 돌아볼 수 있어야한다.

제레미 시브룩은 아동노동 폐지론과 문화적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옹호론 사이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이 균형점에 대해 딱부러진 도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아동노동 옹호론이나 점진주의적 폐지론 (유해 환경하의 고된 노동에서의 해방)등이 아동노동 악용론자들에게 이용될 가능성도 다분하다.그렇지만 서구화된 우리의 시각에 아동 노동에 대한 조금더 균형잡힌 시각을 주는데 이 책은 도움이될 듯 하다.

또한 우리의 따뜻하지만 낭만적인 양심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조선일보가 기획한 our asia는 좋은 프로젝트였지만 결국 그런 상식의 지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그리고 이런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조선일보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으로 나서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거의 승리주의 전도사이다.그런 철학은 전 세계 아동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과는 상반된다.대신 조선일보는 our asia를 통해서 개인의 낭만적 인도주의로 문제를 치환시켜 버렸다.우리는 더 많은 돈을 내거나 더 슬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우리는 이를 통해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기도 한다.사실 이런 작업들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치는 않는다.하지만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섬세함을 읽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자기만족을 위한 '비아그라'일 뿐이지 않을까?

제레미 시브룩은 그들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이라고 칭했다.하지만 제목이 잘못되었다.그들은 우리 세상의 아이들이다.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작은 기부가 그 첫 걸음일 수 있다.하지만 거기서 생각을 멈추지는 말자.그 순간부터 그 작은 기부는 우리의 위선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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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2-07 21: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저는 조선일보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이비 꼴통짓도 물론 계속 하고는 있지만, 요즘의 조선일보 국제뉴스는 과거보다는 확연하게 업그레이드 되었답니다. 차원이 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꼴통이라기보다는 '온정적 보수주의'에 많이 다가섰다고나 할까요. 저는, '구조적 모순'을 짚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푼두푼 돕는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드팀전님의 리뷰는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에도 동의하고요. 실은 이 책 지금 제 책상 위에 있거든요. 세미나 하려고 사놓았는데.. 지적하신 부분들 잘 생각해가며 읽고, 친구들과 토론해보겠습니다. :)

드팀전 2007-12-08 11:24   좋아요 0 | URL
글쎄요...이것 저것 많이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그런 부분들이 하나 하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예전에 나왔던 조선의 북섹션은 무척 좋아라하기도 했습니다.그 작은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그 물들이 흘러서 무엇과 누구를 위한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 바다로 흘러가는지 흐름을 보면된다고 생각합니다...저자가 한푼 두푼 돕는것을 의미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가끔 이런 글들은 그런 식으로 제단되는 것이 석연치 않습니다.또한 구조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말하지도 못합니다.저자가 진짜 이야기하고픈 바는 한푼 두푼의 '인간적감정'으로 보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자는거겠지요....개개인의 인간으로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게 구조라는 것 아니겠습니까..저는 거기에 자칫 그런 활동들이 '양심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따뜻한 위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더하고 싶구요.기부를 하더라도 겸손하게 해야지요.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섬세'하게 말이지요.제레미 시브룩이 '기부'에 대해 말했다면 '섬세한 기부'를 하라고 했들 듯 합니다.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전면개정판) -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조지 리처 지음, 김종덕 옮김 / 시유시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맥도날드는 어디에..

십여년 전 이야기다. 6시간의 비행은 계절을 바꾸어 놓았다. 시드니 공항은 드꺼운 여름의 열기 아래 있었다.나의 양 손은 이미 무거웠다. 거대한 슈트 케이스에 빼았겨 버렸기 때문이다.한국에서 입고 있던 네이비 코트는 어깨에 걸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핀 인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운전한 차를 타고 처음 가는 목적지로 향했다.제대로 영어학원 한 번 다녀본 적이 없었지만 메모해온 주소 덕에 목적지를 알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그러나 낯선 곳에서는 예상에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빌어먹을 택시 기사는 나를 목적지에서 20여 분 떨어진 곳에 떨어뜨려주었다.나는 이국의 폭염 아래서 양손에 슈트케이스를 끌고 코트는 어깨에 두르고 언덕길 즐비한 곳을 헤메기 시작했다.정작 문제는 배고픔이었다.그런데 걱정이 밀려왔다.도대체 어떤 음식을, 어떤 식당에 가서, 어떻게 주문하고 먹어야 할 것인가?  영어로 물어보는 종업원 앞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미리 얼굴이 붉어졌다.그 때 갑자기 택시를 타고 오다가 본 '황금아치'가 생각이 났다.그렇다 나를 이 배고픔과 쪽팔림에서 해방시켜 줄 곳은 '맥아저씨'였다.나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청년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다.

 "where is 맥도날드? "

나는 무려 그 청년에게 5분 여간 설명했으나 그 센스 없는 청년은 알아 듣질 못했다.내가 썻던 단어들....'햄버거.치즈버거...헝그리.코카 콜라".나는 나의 식민지 발음을 탓하며 이리저리 혀를 굴렸지만 그는 감을 못잡았다.결국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고 아무길이나 찾아갔다.그리고 바닷가 근처에서 '황금아치'를 만났다.죽으라는 법은 없는거다.

나는 뒤에 알았다.'맥도날드'가 이곳에서는 3음절이라는 것을...일본 애들은 6음절로 한다.

2.막스 베버와 맥도날드

패스트 푸드점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는 비슷하지만 다른말이다.맥도날드화는 베버가 말하는 '근대적 합리성'과 유사하다.저자인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사회를 비롯해서 세계의 더 많은 부분을 지배하는 과정' 이라고 말한다.맥도날드는 관료제의 원리와 자동차 조립라인의 원리를 결합시켜서 맥도날드화를 이루어낸 대표적인 상징이다.

맥도날화의 특징은 베버의 이론에서 차용된다.즉 베버가 근대적인 합리성의 특징으로 본 효율성,계산가능성,예측가능성,그리고 자동화를 통한 통제가 그것이다.거기에 저자는 맥도날드화가 갖고 있는 내재적 한계를 5번째의 특성이라고 말한다.그것이 '합리성의 불합리성'이다.

그렇지만 맥도날드화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것은 아니다.또한 맥도날드나 포드때문 갑자기 생겨난 것도 아니다.조지 리처는 근대를 규정하는 관료제화,테일러의 과학적 관리,포드식 조립라인 등에서 패스트푸드 체인의 기반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맥도날드의 첫번째 특징 '효율성'은 빨라진 생활 속도와 가장 빈번하게 연결된다.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맥도날드는 메뉴를 간소화하고 주방을 공장으로 만들었다.즉 맥도날드가서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지를 미디엄으로 구워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재료들은 모두 규격화되어서 자동차 공장 부품처럼 하나의 완성된 햄버거를 위한 조립라인을 흘러다닌다.소비자들도 먹는 즐거움 대신 빠른 효율성을 택한다.그 완벽한 부합으로 제시되는 것이 '드라이브인'같은 써비스이다.맥도날드 세계에서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고객에게 일시키는 것도 허용된다.우리가 '셀프 서비스'라고 하는 것들이 모든 자본의 이익을 위한 효율성에만 복무하는 것들이다.맥도날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이라는 듯 말한다.그러나 실제 그 몫이 돌아가는 자들의 말일뿐이다.

맥도날드 세계의 두번째 특징인 '계산가능성'은 모든 것을 수량화하고 질보다는 양에 대한 강조를 부각하는 것이다.즉 속도,수량,크기가 맥월드의 이념이다.패스트푸드 말고 다른 예를 들어보자.가장 대표적인것이 '패키지 여행'이다.관광의 질은 중요치 않다.방문자 수와 몇 장의 사진을 건지느냐,몇 개국을 돌아다니느냐가 중심고려사항이다.'여행의 맥도날드화'라는 것이다.

'예측가능성'이란 것은 통일성과 표준화를 말한다.내가 글 첫머리에 낯선 곳에서 '황금아치'를 보고 반가왔던 것이 바로 소비자의 '예측가능성' 선호의 좋은 예이다.문제는 사람들의 본능적인 보수성향,안전 지향이 아니다.이것을 상업적인 환경이 이용한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예측가능한' 놀이 동산 같은 것이다.안전요원,안전한 장비 등등의 이름으로 안과 밖을 구분한다.바깥은 범죄와 불안이 난무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안심시킨다.

'통제'는 말 그대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기계로 대체하려는 자동화의 지향을 말한다.닭을 닭으로 키우지 않고 닭고기로 키우는 '공장형 농장' ,아이들을 쇼핑하는 좀비로 만드는 쇼핑몰,들여놓은 의료기계에 점점 종속되어가는 의료진...

조지 리처는 맥도날드화된 세계가 나쁜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또한 이것이 일순간 투쟁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맥도날드의 효율성은 분명 필요한 것이고 또한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그렇지만 이 안에 문제점이 있으니 이것이 '합리성의 불합리성'이다.맥도날드의 예를 들면 일반 식당보다 더 기다려야하는 줄서기 같은 것들이다.사실 맥도날드가 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 만은 아니다.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맥도날드가 심어주는 환상을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저자는 여기서 맥도날드 세계가 소비자들의 '오락에 대한 집착'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또 선도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엔터테인먼튼 사업이나 놀이공원화된 즐거운 먹거리,개인정보를 이용한 거짓 친근감 같은 것들이 예로 제시된다.이런 시뮬라시옹을 통해 맥도날드가 현실에서 없애버린 것은 바로 '마법'이다.마법은 예측불가능성이고 세계의 질적 소중함이었다.맥도날드의 애리한 현미경은 이를 산산히 파괴한다.이것은 세계의 동질화와 비인간화를 초래한다.

3.그 많은 맥도날드는 어디로 가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베버의 합리화론에 기대어 설명하는 장면은 흥미진진하지만 조금 길다.구체적인 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분량이 늘어났다.이것도 맥도날드적 속성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압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개인적으로 책 후반부쪽에 배치된 '변화하는 세계속에서의 맥도날드' 장이 즐거웠다.'맥도날드화가 어떻게 구현되어 왔는가 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맥도날드가 진화 하는지..앞으로 어떻게 될지' 가 더 현실적인 고민거리를 주기때문이다.'고품질화한 패스트푸드' '토착화된 맥도날드'같은 것들이다.조지 리처는 포드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시대에 맥도날드가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떻게 자기 변신과정을 취하는지 보여준다.또한 바뀐 세상에서 맥도날드가 어떻게 될는지도 예상한다.조지 리처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아니면 후기 자본주의 문화>를 인용하여 맥도날드가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즉 모너니티와 포스트 모너니티의 연속성을 강조한다.조지 리처의 경우 조금 더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지난 세기를 주도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근본적 변화가 없다라고 강조한다.개인적으로 이 뒷부분에 대한 분량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지만 한 권의 책에서 모든걸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4.맥도날드는 감옥인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맥도날드에 대한 점진적이고 온건한 대응책들을 제시한다.그중에서 실천적 과제로 나오는 것들은 아주 귀엽기까지 하다."제목 뒤에 숫자 적힌 영화들은 보지 말자" "백화점에서 점원이 깜짝 놀라게 신용카드를 주지말고 현금을 내자" "돔구장이나 인조잔디 야구장에 가지말자.대신 보스턴 팬웨이파크나 시카고 리글리 필드 구장에 가자" (뭔말인가 할 수도 있겠다.이 책을 보지 않았고 미국 메이저 리그를 본 적이 없으면 당연하다.) 저자는 맥도날드화에 대응하는 세가지 형태를 말한다.맥도날드 문화를 즐기는 '벨벳 감옥' ,맥도날드를 디스토피아로 보는 '쇠감옥'그리고 얼마든지 진출입이 가능한 '고무 감옥'이다.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실천 영역 안에서 맥도날드를 접하자는 것이다.맥도날드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는 것과 그것외엔 답이 없다고 패배주의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물론 조지 리처의 현실 설정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 수있다.조지 리처는 현세계를  결국 '감옥'이라고 쓰고 있다.근대성의 대전제가 부정적인 세계로 귀결된다.결국 우리 모두는 맥도날드 매트릭스 안에 있을 수 밖에 없다.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혁명을 팝니다>의 저자들은 일부 좌파와 반소비주의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억압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부정적이다.60년대 이후 서구에서 근대화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된 반문화적 가치가 세계를 부정과 탈출의 대상으로만 파악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그들은 반문화가 사실 사기라는 극언을 취하기도 한다.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극단적 반문화자는 아닐지라도-조지 리처도 그런 세계관의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맥도날드화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그렇지만 그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나 역시 동의할 수 밖에 없다.나는 다행히도 결혼 이후  점점 맥도날드로부터 멀어지고 있다.와이프의 덕분이다.와이프는 이론적이진 않지만 나보다 더 패스트푸드를 못 먹고 나보다 현대 의료 쳬계에 대해 부정적이다.우리는 '아이 출산' 과정에 있어서 맥도날드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또한 언제부터인가 집에서는 제철에 난 것들만 먹고 있다.또한 나름대로 관례화된 업무를 빨리 끝내버리고 글쓰기라는 비합리적인 짓들을 할 시간도 만들고 있다.다행이고 행운이고 감사할 일이다.  저자는 현재 나와 아내가 고민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제안한다."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아이들을 구하라" 아이들을 맥월드로 부터 구하려면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TV 드라마에 눈을 꽂고 있으며 아이에게 TV보지 말고 책보라고 해봐야 먹히지 않는다.

이 책은 사회학의 고전적 이론을 가지고 세계의 숨은 속살을 대중적인 시각으로 드러내 놓았다.책 후반부의 재기도 이 책을 더욱 빛낸다.그리고 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딜런 토마스의 싯구는 여기저기 마구 마구 인용하고 싶어진다.

"그 깊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라.........빛의 소멸에 분노,또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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