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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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는 키가 컷다.190센티미터에 조금 모자랐다.얼굴도 조금 길고 눈두덩이도 보통사람보다 튀어나왔다.얼굴 빛은 조금 검은 편이고 눈과 댓구를 이룬 눈썹 역시 순악질표 일자 눈썹이었다.그는 내 군대 바로 밑 쫄따구였다. 군생활 초기 가장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고참도 아니고 인사계도 아니었다.가장 큰 문제는 그의 '왕발' 이었다.용수는 그때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발이 큰 아이였다.그의 왕발은 '300밀리에서 305밀리'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하지만 그 당시 보급대에서 그가 지급받았던 가장 큰 군화는 290밀리였다.(군대는 '문'이라는 치수를 쓰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더 큰게 있었는데 재고가 없었는지 아니면 그게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나오는 가장 큰 사이즈인지 나로서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점호를 받거나 구보를 할 때 그는 약간씩 절뚝거리곤 했다.선임하사가 채근하면 그는 "네 알겠습니다.근데...발이 아파서..." 라고 말끝을 흐렸다.선임하사는 늘 "야..이xx 봐라...군대가 백화점이냐...그런말 몰라 '군대에 오면 옷에 몸을 맞추라'는 말 말야.이 xx 군기가 빠져서..." 내무반에서 본 그의 새끼 발가락과 복숭아뼈는 작은 군화에 혹독히 치여있었다. 결국 인사계는 용수에게 이태원 가서 사오든 미군부대서 훔쳐오든 그의 능력껏 알아서 군화를 바꿔 신으라고 나름대로 인자한(?) 해결책을 제시 했다.용수가 이태원에서 자기 발에 맡은 군화를 구하는데도 그 후 약 3달이 필요했다.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는 군화에 발을 맞추어야 하는 그리고 그것에 크게 저항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디서 출발하는지 주목하고 있다.이 책에서 박노자 교수는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한국 근대의 폭력성'이란 주제를 물고 늘어진다.과거 몇몇 책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역사학자로서 박노자는 한국 근대 형성기로 볼 수 있는 개화기의 우리 역사에서 근대적 폭력의 씨앗을 찾아낸다. 책은 주로 그동안 우리에게 '개화 선각자'로만 비춰진 개화기 지식인들의 행적과 그들의 사상을 따라간다.그들이 가진 가치관을 통해 이후 전개된 우리 역사의 근대적 폭력이 어떻게 파종되었나가 소상하게 펼쳐져 간다. 미리 밝히자면 이러한 계보학적인 접근은 원론적 비판에 곧바로 맞딱드리게 된다.현실 상황의 모순들의 근원을 계보학적으로 쫓아가다보면  사실이 가진 근원적 문제들과 역사적 관계들을 파악할 수는 있다.하지만 환원론적이라는 비판이 늘 따를 수 밖에 없다.비유하자면 '사상의 연좌제'라는 덫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또한 탈근대적 접근을 위해 당시 역사의 절박성이 지나치게 후대의 잣대로 재단되었다는 비판도 면하기 힘들것이다.역사라는 것이 해석의 문제이며 또한 한 역사가 가진 한계들을 지적하는 것 역시 후대 역사가의 몫이다.하지만 근대라는 거대한 광풍이 조선 반도를 밀어부치고 있던 시기에 그 구성원들에겐 역사적 도전에 대해 마땅한 응전을 찾는 것이 일차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폭풍전야의 시기에도 역사적 보편성과 인류애의 원칙을 잊지 않은 선각자들도 있겠지만 진정 소수중의 소수였을 것이다.박노자는 개화파에 대한 사회적 통념-즉 선각자라는-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그들은 그저 보수적 근대 지배계급이었을 뿐이라고 적고 있다.개화파들의 성향이 대개 귀족층이었으므로 계급문제를 들이대면 이것는 너무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소리가 되어버린다.물론 박노자의 지적처럼 개화가를 선각자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어떤면에서는 그의 비판이 시의적절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또한 근대 초기 개화파들이 가진 문제를 그들이 접해보지도 못했던 '탈근대'로 '포스트모던'으로 들이미는 것에 -그 비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한국적 근대만들기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는 '근대적 폭력성'이다.이 폭력성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것을 박노자는 '사회진화론'에 두고 있다.개화기 지식인들 대부분이 부국강병이란 모토아래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바라봤다는 것이다.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조선 민중 하나하나가 강인한 체력과 깨인 머리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즉 개인의식은 부재했으며 사회유기체의 한 구성으로 개인을 부속화 시키는 폭력이 이때부터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이다.량치차오의 '무명영웅론' 이란 것이 결국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진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개화파들은 개인들의 덕성의 최고 모델을 근대적 군인에게서 찾았다.우리가 당연시 알고 있는 '징병제'에가 개화파와 구한말 조정에서는 가장 이루고 싶은 꿈중에 하나였다.하지만 일제의 군대해산은 징병제의 꿈을 산산히 깨드렸다.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계보상으로 100여 년 전 개화파의 징병제 실시의 좌절된 꿈,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징병제 구국론'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의식은 박정희,전두환의 병영국가 시대에 더욱더 강화돼 오늘의 징병제에 대한 보편적인 집녑으로 이어진 셈이다.

진보적인 인사조차도 '징병제폐지'에 선뜻 손을 들지 못하는 이유를 박노자는 계보학적으로 개화기의 부서진 꿈에서부터 찾고 있다.하지만 한국전쟁의 직접적 전쟁 기억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조금 이상한 면이 있다.반공주의와 징병제에 대한 신념등의 가장 직접적인 바탕은 한국전쟁에 개인들이 겪었던 경험의 역할이 크지 않을까 싶다.

박노자 교수는 우리 사회를 '병영의식'이 만연한 사회로 보고 있다.그 점은 남과 북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 우리는 '잃어버린 민족 동질성'을 자주 아쉬워하지만 결국 예비역과 그들의 특수한 가치관을 골간으로 하는 군사화된 사회의 형성과정은 남쪽과 북쪽이에 오히려 동질적 요소를 내포했다." 병영의식의 근저에는 무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이 있다. 상무정신이 부각된 데에는 권력관계와 개화파들의 서구중심주의가 숨어있다고 그는 말한다.

"전통문화를 고수하려는 보수적 유림층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탈취하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목적이었기에 '허약한 동양인''나약한 유교문화'와 같은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의 편견과 고정관견들이 여과 없이 받아들여져 이용됐다." "동양이 유교화 이전의 낭만화된 상무적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계몽주의의 역사관이었다"

박노자의 문제의식은 이제 테러리즘을 향한다.그는 테러리즘에 대해 한국 좌파가 서구 좌파에 비해 비교적 관대하다고 파악한다.그 근원에는 '의살'(의롭고 죄가 되지 않는 살인)이란 개념이 있다.거기에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더해진다.우리는 일제 강점기 무장독립투쟁 의사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을 전부 테러리스트라고 매도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그런 현재적 이유로 인해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박노자가 제국주의적 폭력에 대해 우선 비난하고 근원적 도덕성 결여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지는 않는다.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의 끝을 거기서 놓아버리지는 않는다.박노자는 개인의 폭력적 응징이 제국주의의 폭력에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거시적으로 제국주의의 파시스트적 폭력에 대항하는 세계인의 연대이다. 조금 막연하고 이상적으로 보인다.이 대안 제시라는 부분에서 그가 피상적이며 이상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피억압 국민들에게 -예를 들어 이라크 민중들에게-박노자식 이상주의 해법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다고 주장해보자. 당장의 선결과제 앞에 그들이 어떠한 대응을 할 것인가? 공간적 외부자로 한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또한 마찬가지로 시간적 외부자로 지난 시대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박노자에 의하면 한국 근대 태동기를 파악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국가'이다.교육,스포츠,군대,종교등이 각기 다른 외피를 쓰고있었지만 '강한 국가'를 위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개화파들은 '국가는 인격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박노자는 전근대 유교사회에서 어느정도 자율성이 있었던 개인에게 계몽의 잣대가 개인을 국가에 귀속 시켜 버렸다고 본다.근대의 관리체제가 '개인의 특성''개인의 성격'등을 무시하고 규격화,합리화 시켜 버린 것이다.박노자는 이것이 비단 우리 개화파들만의 잘못이라고 보지는 않는다.이미 근대적 '개인'이라는 가치 자체가 신화화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그 신화가 목표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틀안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한정적인 것이었다.


"근대 유럽의 '개인 자유의 영역'은 자본주의 국가가 공인하여 규격화시킨 한 사회 특권층의 법률적,문화적인 '사적공간'일 뿐이었지 만인의 '자아의 자유로운 실천'을 담보한 '개인주의 가치의 실현'이 결코 아니었다..... 또한 근대적 '개인'을 생산하고 규정한 주체가 바로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였던 만큼,개인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영역은 결코 국가적 폭력과 같은 '성역'을 침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가로 소급되어 버리고만 개인 대한 그의 시각에는 완전히 동의 할 수 있다.하지만 근대적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전근대시대의 개인관을 미화하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근대적인 개체와 전체의 관계논리는 어떤 경우에는 개체에게 근대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그가 예를 든 것은 2000년전 인도승려들에게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율권이 있었는데 근대의 한국 불교신자는 그런 자유가 없다라는 것이다.개인에 대한 사회의 통제가 근대에 들어들며 합리화되고 수치화된 것은 사실이다.당연히 감시라는 측면에서 전근대의 허술함보다 근대가 치밀한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그런 사실을 가지고 전근대적 개체가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 받았다라고 보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박노자교수는 결론에서 '국가물신화'현상에 대한 자각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 스포츠 스타,황우석같은 과학자,한류열풍의 주역인 연예인등등이 다 '애국''애족'의 이름하에 움직이는 흐름에 반기를 들자는 것이다.이 생각의 밑바닥에는 '사회진화론'이 있고 거기서 승자가 되는 우리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그것은 강자의 논리이며 세상을 정글로 파악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글을 맺고 있다.


"저항의 정신적 원천에는 바로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의식이 깔려 있어야 한다.... '힘의 숭배'는 생명 파괴의 길이요,죽임의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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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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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루하다는데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몇자 안되는 글의 함축성이 좋았다.그 깊이를 다 알수는 없으나 넘겨짚은 이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거기에 어디가서 몇자 읊어주면 그럴싸 하게 보였다.대학들어가면서 당연히 그쪽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그래봤자 결국 교양수업 몇개 일 뿐이니 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가  남들 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는 없다. 대학가서 웃겼던 건 비슷한 고전강독을 서너차례들었다는 것이다.지금 그 강의 명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대개 <동양 사상의 이해> <동양문화사><중국 정치의 이해> 뭐 이런 것들이었다.그런데 이 강의가 전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수업들이었다.<동양사상의 이해>야 그렇다 치자.이름이 그럴싸 해서 들었던 <동양문화사>강의. 첫 시간 교수님은 "동양문화의 핵심은 중국이다.그리고 중국 사상의 근원이 형성된 곳은 춘추전국 시대 즉 제자백가의 시대이다."이런 말로 한 학기 강의의 개괄을 하셨다.그리고 한한기 동안 신영복 교수 <강의>의 목차와 유사한 수업이 진행되었다.더 웃긴건 <중국 정치의 이해>였다.나는 처음에 문화대혁명,모택동,주은래,등소평 ...뭐 이런 거 나오는지 알고 수업신청했다.그런데 왠 걸.또 첫 수업시간에 강사는 "이 강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텍스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학기 동안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만 한참 했다.당연히 논어,맹자,한비자 이야기가 빠질리 없다.중간 고사는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자 많이 쓰여있는 <사기 열전> 독후감이었다.결국 비슷 비슷한 강의를 세차례나 들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과 땡땡이가 많았다는 것.제대로 배웠다면 훨씬 좋은 리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을.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개인적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품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분이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뿌연 안개같은 실타래를 시퍼런 칼로 두동강 내는 느낌이었다.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또한 다시금 풀무질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글이다. 이 책 <강의>에서도 신영복 교수의 선명함은 드러난다.실천을 가장 우선시 하는 그의 현실적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 돋보인다.그는 단순한 어구풀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동양 고전을 우리의 현실과 새로 만들어야 할 세계에 이입 시킨다.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고전,바로 이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 하나 따로 짚어 말할 바는 아닌 듯 하다. 동양 고전을 읽는 신영복 교수의 독법에 대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이 책은 단순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서문에서 신영복 교수는 분명히 자신의 독법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관계론'이다. 신 교수는 유가,도가,법가등 이곳에 등장하는 사상의 한 구절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관계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존재론'이다.신영복 교수는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에 있다고 밝힌다.즉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고 그 개별 존재들이 사회안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합리와 이성에 기댄다는 것이다.반면 동양 사상의 근원은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고전들은 공통되게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나와 타인,나와 자연,나와 사회라는 관계망을 대전제로 하는 철학인것이다.주역의 효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주역 이외에도 저자는 논어,맹자,노자 그리고 불교의 연기론까지 거론하며 모든 것이 '망'이라는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계론'에 대해 저자가 중요시하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가장 큰 문제 제기는 상품자본주의 사회에 있다고 하겠다.대개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비해 저자는 상품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이 상품 자본주의는 서구식 근대화를 의미한다.저자는 '관계론'이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의 폐해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리뷰어들과 서평들이 신영복 교수의 글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고 있다.글의 내용과 그의 알려진 인품을 고려하면 쉽사리 딴지걸기가 쉽지 않다.나 역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비판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사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는게 나을성 싶다.

 

우선 언제가도 한번 말했지만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관계론'강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우리사회는 관계의 그물망이  지나치게 촘촘하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신교수가 말하는 관계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그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거시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그것이 속도와 소비로 집약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관계성의 회복을 통한 소외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하지만 문제는 그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또한 땅에서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의식적인 면에서 전근대적 양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굳이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단 전근대적 보수성이 관계망의 형태를 띠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신영복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개인들이 분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맞는 말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가장 분자화 되어있다고 보는 젊은 층을 예로 들어보자.그들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대개는 보수적 가부장제 하에 종속화 되어 있다.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식의 전근대성은 여전하다.가족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가 그들 분자화되어 있는 개인에게도 내재화 되어있다.또한 사회를 나가보자.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방대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좋아도 대기업 사장되기 힘들다.여러가지 기회의 차별도 있겠으나 우선 학연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그 학연이라는 것은 무었인가.관계망이다.부정적인 관계망이며 망국의 네트워크이다.그런데 그 내부에서는 상호이익이라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앞서서도 말했지만 신영복 교수의 관계망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늘 낙관적인 미래를 말하고 희망을 전파하기에 이러한 변질은 나의 우려이자 노파심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은 약하고 집단은 힘이 세다.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개인은 혼자 있으면 다 바보가 된다.그러다가도 몇몇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우리 몇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 된다.통속적인 예는 길거리에서도 볼수 있다.조금 확대하면 이는 집단주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된다.신교수의 네트워크가 늘 낙관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폐쇄적 집단주의 성향을 띤 관계망으로 발전되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자의 예를 들어보자.이 책에서 묵가는 겸애와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거기에 계급적으로도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기에 괜히 민중적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묵가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묵가의 진보적 속성이 현재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이슈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몇몇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다.

(묵가는) 실천의지를 추동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와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방어전을 펴기 위해 축성을 하고 방성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에 부적을 써서 그걸 가지고 적을 이길 수도 있다고 믿었다.귀신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묵가를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이것은 당대에도 비주류였고 유가전통에서도 어긋나기 때문에 후대가 탈색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부적이니 귀신이니 하는게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동학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가 있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개인의 의지는 철저히 배재된 집단자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살길이 있었으나 거자의 신념을 위해 묵가의 민중들은 생사여탈권 마저 넘긴 상태가 된 것이다.옛날에는 의를 지키기 위해 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지금보다 신념과 가치가 존중받았던 시대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즉 이러한 비판도 현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한 개인의 생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묵가의 사상은 분명이 현대에 돌아봐야할 여러 가치들을 제공해준다.하지만 묵가의 이러한 사교적 모습,또는 작은 병영사회적인 모습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알려주지 않는다.묵가라는 집단 관계망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희생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존재론=상품자본주의=부정의 대상/ 동양=관계론=화동의 사회=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각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읽으면서 생겼던 몇 몇의 의문과 주관적인 감상을 옮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는 관계론이라는 틀(당파성)을 가지고 읽어낸 한 가지의 길일뿐이다.고전의 바다는 넓고도 넓다.퍼담아도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도 한다.나 역시 한바가지 쯤 퍼 담고 싶은 바람은 있다.하지만 아직은 형편없이 부족하다.스스로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날은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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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8-14 12:39   좋아요 0 | URL
아...<동양문화사> 아픈 기억이 떠오르네요. 저희 학교에 결석 초과하면 F주는 FA라는게 있었거든요.1학년 과목인 <동양문화사>를 FA맞고, 4학년 때 재수강한 생각이 나네요. 뭘 배웠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저도 동양고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데.....드팀전님, 멋져요!
 
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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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다수의 소수자는 여성이다.하지만 그녀들은 소수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대다수의 그녀들은 오히려 다수자의 논리(남성가부장제)를 강화하고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한다.그녀들은 고착화된 역할행동 모델에 따라 세상이 편안하게 돌아가는데 '아내''어머니'로써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라고 믿는다.그녀들의 시각은 가정에만 머물러 있다.인식의 지평은 가족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녀들은 가족전체의 부동자산을 높이기 위해 부녀회를 중심으로 아파트값 담합에 나선다.또한 옆집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들락거린다. 그녀들을 한국에서는 '아줌마'라고 한다.

이 책<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한다.무대는 한국 중공업의 메카 울산광역시,시대적 배경은 IMF를 넘어선 2000년대 초반,주요등장인물은 노동자 남편,노조 전임자와 그들의 아내....등이다,저자는 노동자 계급의 일상을 통해 그 안에 숨어 있는 권력관계와 가부장제의 역사적,구조적 맥락등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담는다.현장 노동자의 아내로 살고 있는 저자의 경력은 참여방법이 가능케 하는 주요 열쇠가 되었다.먼저 저자는 책 서두에서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족신화'에 대해 비판적 접근이 필요함을 말한다.

사랑과 친밀감으로 가득해야 한다는 당위적 이상과 달리 현실의 가족은 문제투성이다.누구든 가족의 문제를 '비밀'로서 타인들에게 극구 숨기고 언제나 자기 가족이 '단란'한 것 처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가족신화'에 대한 핵심적 용어로 등장하는 '가정중심성'은 이를 보편적언어로 풀어 놓은 개념이다.

가정중심성은 '사회와 분리된 영원한 사적인 안식처로서의 가정'이라는 환상과 '차이에 입각한 남녀간의 평등'이란 허위적 껍데기를 두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은폐하는 가부장제의 한 형태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이 '가정중심성'은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의 일상과 그들의 문화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다.

먼저 가정중심성이 작동하기 위해선 남녀간의 가정내 역할모델이 엄격하게 구분되어야한다.남자=일터/여자=가정이라는 도식이 나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의 경제적 토대가 갖추어져야한다.울산의 현대 자동차는  '1가족 1인생계부양자' 라는 문화가 거부감없이 고착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현대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상대적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된 토대를 갖고 있다.우선 유니언 노조의 특성상 인원과 결집력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강한 교섭력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를 지속적으로 상승시켜왔다.비교적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 가족은 중간계급에 가까운 정서적 경제적 안정감을 누린다.하지만 보통 말하는 중간계급과의 차이가 엄연히 발생한다.저자는 컨베이어벨트로 표현되는 포디즘적 생산 양식의 비인간성에 대한 지적을 빼먹지 않는다.사무직 노동자들과 달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고임금에는 특근과 야근이라는 비인간적 노동력 착취가 담보되고 있기때문이다.주간근무와 야간근무의 맞교대 방식은 노동자 가족의 삶의 패턴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다.저자는 노동자 아내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녀들이 야간근무를 한 남편을 배려하기 위해 낮시간 집을 비우는 일등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들은 대기업 공돌이들과 결혼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주인공들의 계급적,환경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그녀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사꾼집안의 딸들이었다.남존여비가 강했던 부모들은 그녀들에게 적당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그녀들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 곧바로 생계유지자가 되기 위해 생산현장으로 뛰어야했다.그것도 전문직을 얻을 수는 없었기에 공장시다, 판매원,경리등이 고작이었다.그녀들에게는 가족의 짐으로부터 탈출이 무었보다 필요했고 그게 바로 결혼이었다.현대자동차 노동자들 역시 결혼이 무슨 장식품처럼 필요했다.저자는 근무형태의 특이성과 기혼자 중심의 조직문화 때문으로 파악한다.결국 탈출과 조직문화내의 필요는 빠른 산화작용을 불러일으킨다.대부분 인터뷰이들은 몇번의 만남으로 결혼에 골인한다.대기업 직원이라는 말은 그만큼 그녀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럿고 탈출 후의 안정성에 대한 불안감까지 막아주었다.

저자는 다음으로 그녀들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전업주부로 많이 남아 있는 이유를 살핀다.먼저 도시의 특성이 지적된다.울산이란 도시가 중공업이나 화학중심의 '남성중심적'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여성들의 일자리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또한 노동자 남편들이 그녀들의 취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에도 경제적 이유가 있다.특근 한두번이면 커버될 돈을 벌기 위해 아내가 집안을 비우는 것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대부분의 가난한 노동자계층이 어쩔수 없이 아내의 노동을 허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비하면 사뭇 다른 태도이다.여기에는 주말특근과 야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마초적 자신감도 묻어있다.또한가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아내의 취업에 부정적인데는 노동자들 자체가 쳐놓은 남성중심문화에 스스로 갖힌 자승자박이 한 이유가 된다고 한다.현대자동차 노동자 집단은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남성중심 문화가 공고한 곳이다.마치 군대처럼 이러한 집단문화는 여성을 성의 대상화하는 성향이 있다.노래방의 아줌마 도우미같은 것도 울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 노동자는 회고한다.이들 노동자는 그런 아줌마들과 함께 논다.어느 노동자의 아내일 수도 있고 옆동네 아줌마일 수도 있다.밤새 그렇데 논 노동자들에게 역시 야근이란게 돌아온다.야근은 자기 아내들의 비슷한 부정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다.결국 막연한 불안감은 아내들을 집안으로 들여놓게 되고 좋은 아내 어머니로써의 역할만을 강요한다.

집안으로 들어온 그녀들은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이 신념을 강화한다.대개 중산층여성들의 경우 자녀출산후 정체성의 혼란으로 우울해진다고 한다.하지만 울산의 그녀들에게 정체성의 혼동은 없다.우선 동질화된 문화가 가장 큰 이유가 된다.울산이라는 특수공간은 두자녀를 기본으로 한다.한자녀를 갖고 있는 경우 주변의 집단문화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마치 비정상적인 양 느끼게 한다.저자는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와 현대자동차의 기업복지전략이 육아와 교육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그녀와 남편들은 최고의투자를 아끼지 않을 마음이 갖추어져 있다.아이는 기름“Q을 먹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때문이다.그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두려움에 대해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특이한 것은 자녀 교육 문제에 있어서 남편들의 참여이다.가정은 여자의 일이란 공식을 부담없이 실천하여 가사노동에 손을땐 것이 이들 노동자들이다.하지만 육아노동에는 적극참여한다.저자는 이것 역시 역할의 분화보다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전통적 수법으로 파악한다.즉 자신의 대를 이을 자녀들을 아내보다 큰 비중을 두고 보는 것이다.거기에 남편들의 육아간섭은 반대급부로 여성들의 '완전한 어머니'에 대한 역할 모델을 강요하는 효과를 갖고 있기때문에 여성들의 부담을 가중된다고 본다.

저자는 가정중심성의 문제를 노동시장과 경제구조와의 밀접한 관련에서 찾는다.

안식처로서의 가정에 관한 신화가 존재하는 것은 안식처가 될 수 없는 가정 바깥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산업화,근대화 이후 성별분업이 강화된것은 가부장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가정 내 책임을 공유할 수 없도록 장시간 노동을 특징으로 하는 직업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선 가부장적 특권을 유지시키는 장시간 노동,그리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인 교대제 근무가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급제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자들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남성들이 기존에 가정에서 누려오던 가부장적 혜택도 포기되어야 한다.

이 책은 살아 있는 페미니즘 책이다.책의 내용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흐름도 자연스럽다.물론 가끔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해석이 자의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하지만 객관성의 틀에서 그다지 벗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모든 해석상의 다양함을 다 펼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기때문이다.매일 매일 비슷 비슷한 집단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살펴봐야한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기 쉽다.노동자의 일상과 그들의 힘든 삶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이다.노동자는 사회변혁의 한 주체이긴 하지만 무오류 집단은 아니다.'살아움직이며 실철하는 진짜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도 무한한 각성과 변혁 필요하다.이 책은 그런 실천을 위한 첫단추를 끼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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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8-01 15:36   좋아요 0 | URL
매, 매우 어려워 보이는 책입니다...가부장적 혜택, 포기하겠습니다...

2005-08-01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5-08-02 11:03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ㅋㅋ 님은 아직 결혼도 안하셨잖아요.물론 일반 관계에서도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작용하겠지만...좀도 미시화하면...가정아니겠어요.님은 부인을 만들어야 포기든 수용이든 할 수 있습니다.경기장도 없으면서 무슨 볼을 차시겠다고.ㅋㅋ....(근데 결혼 안한거 맞죠? 매일 미녀들과 술판을 벌리시니까 ㅋㅋㅋ)
근데 이 책 읽기 아주 쉽습니다.현장 인터뷰가 중심이라서 그것도 사투리 그대로 써놓아서...제 주위사람들이 늘 사투리를 쓰니까 그사람들이 귀에서 뭐라 이야기하는 듯 어투까지 느껴지던데....
**** 님> 탱큐...어디서 주워들은 글동냥을 요리조리 모아놓은거죠.뭐 짜달시리(이건 부산 사투리입니다.저도 부산와서 배운..) 특별하게 잘 아는게 있어야지..ㅉ,ㅉ,
휴가기간인데 어디 바...다라도 한번 가보심이 어떨까요.거기서 미인들과 함께 람....바다를 배우는 거에요.구....설수는 걱정마시고.휴가 끝나면 두....문불출하면 되잖아용.ㅋㅋ **** 님 즐짐풀기.

2005-08-02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홍달 2005-08-05 16:3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슴돠^^ 이 책 읽은 지 한참 되었는데 아직 리뷰는 못쓰고 있네요^^:;
 
지식의 발견 -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고명섭 지음 / 그린비 / 200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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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평집이다.서평에 대해 서평을 쓰려니고 하니 녹녹치 않다.저자가 읽은 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인지 아님 저자의 접근에 대해 뜯어볼껀지 마구 헛갈린다.우선 <인물과 사상>을 즐겨 읽었던 사람들은  이 책을 따로 구입해서 볼 필요가 없다.<인물과 사상>에 이미 연재되었던 글들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나처럼 <인물과 사상>에 시큰둥 해진 사람이라면 문제될 거 없다. 이 책은 두가지 점에서 유용하다.하나는 우리사회를 바로보는 시각에 대한 쟁점거리를 제시하는 책으로 또 하나는 최근에 나온 읽을 만한 인문사회과학 책들에 대한 안내서로 아주 훌륭하다.저자의 글쓰기도 아주 일목요연하다.덕분에 읽기 쉽다.지은이는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뒤에 말하겠지만)각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다.지나친 현학과 학문적 용어들도 가급적 자제한다.적당한 직접 인용과 또 적절한 자기시각. 책의 내용에 대해 비판적 접근과 긍정적 평가의 밸런스.대중적인 인문학 리뷰로써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한 글도 쉽게 찾아지진 않을 성싶다.대게 그냥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나의 리뷰와는 천지차이다.아무래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과 내 꼴리는 데로 쓰는 리뷰가 다르기는 할 터.물론 나도 이처럼-최소한 인용과 서술은 구분하도록-써볼까 생각했었다.근데 그러려니 의외로 귀찮다.알라딘의 어떤 님들은 직업적 윤리의식으로 인해 인용문들을 찾아가면서 쓰시던데 그 정성이 대단한다. 직장에서 글쓰면서 책꺼내놓고 밑줄찾아가며 쓰기란 쉽지 않다. 나의 경우 앞으로도 위와 같은 태도는  지향해야하는 목표로만 남겨놓고 나의 현실에 충실한,숨어서 글쓰기를 당분간은 계속하련다.

기억을 더듬어... 지은이가 이 서평집을 묶을 때 큰 틀로 잡은 것들을 생각해본다.1장은 민족,민족주의와 탈민족족의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2장은 근대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책들을 다룬다.3장은 현실정치와 연결을 찾는듯 한데 사실 1,2장에 비해 하나로 묶기 난해한 글들이다.저자가 서평작업을 한 개별 책들은 읽어 보고 싶은 욕심이 들게하는 매력적인 책들이다.물론 읽다가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을 만나면 '그 책에서 그랬었나...기억이 나는 듯 하네' 하면서 되새김질과 기억력상실의 아픔을 스스로 달랬다.앞으로 이 책에 소개된 몇몇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하나씩 읽기로 하고 저자의 책읽기의 큰 잣대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우선 '민족주의'문제다. 저자는 '민족은 가상의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서구적 보편성을 거부하고 개별성에 더 큰 비중을 둔다.탈민족주의자들의 '민족=근대화산물'이라는 것은 한때 유행처럼 일컫어졌다.서중석 교수의 글을 빌어 지은이가 주장하는 바는 한민족이 가진 민족형성 근거가 서구의 봉건제 해체후 발생한 가상의 공동체와는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즉 한민족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언어,생활,역사를 공유하는 실체로서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물론 이러한 공동체가 근대적 민족은 아니라는 것도 인용한다.민족의 개별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탈민족주의의 도발적 문제제기에 안정감을 주긴 한다.이문제는 서구중심주의와도 맥을 같이한다.저자가 보기에 학계를 시끄럽게 했던 탈근대론,탈민족론등은 서구이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데 기인한다.저자가 인용하고 비판적으로 고찰한 김용옥의 탈서구중심논의는 학계의 서구중심적 학문관에 대한 대척점이다.물론 저자 역시 김용옥의 논의가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지적한다.저자의 민족문제에 대한 접근에 일단 동의한다.서구와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거친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단계론적 역사관을 그대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많다.또한 90년대부터 시작된 탈민족,탈근대 논쟁이 과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하지만 늘 그렇듯이 햇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짙다.70년대 독재정권은 조국 근대화란 이름으로 사회을 일사분란한 병영체제로 만들어왔다.80년대 역시 그 여운이 남아있었다.하지만 민주화의 흐름을 거부할수는 없는 법.80년대는 그 대항세력이 나름대로 자리를잡고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이루어내었다.거의 50년에 걸친 거대담론들은 주로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봉사였다.독재도 민족과 국가를 내세웠고 그 반대세력도 민족과 국가를 내세웠다.90년대의 탈민족 탈근대화론이 과잉되었다고는 하지만 지난 50년 동안의 과도한 눌림에 비하면 그다지 큰 영향을 아니었을 것이다.저자는 탈근대론을 자주 현실적 토대를 외면한 논의라고 말한다.특히 개혁세력에게 비판의 포문을 열고 극우세력에 야합한다고 비난한다.하지만 저자의 접근법은 지나치게 직선적이다.임지현을 필두로 '당대비평'세력이 '조선일보'에 글을 쓴다고 그들의 논의가 가진 현실적합성까지 무시해버리는 것은 너무하다 싶다.이런 식의 접근은 전선을 명확히하지만 또 이문열같은 사람에게 '너희들은 이분법적이다'라는 비난을 받기에도 딱 좋은 듯 하다.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것은 아니지만 ... 가끔 저자의 논의에는 탈근대론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탈근대론자들의 정치적 행태를 비난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갈때가 있다.

저자는 학계를 장악했던 탈근대,탈민족론의 열풍을 마치 일반 사회에서도 열풍이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불행하게도 일반인들의 역사관이나 의식 상태는 근대프로젝트와 민족의식에 똘똘 뭉쳐져있다.그 밖으로 벗어나면 천길 낭떠러지가 있거나 매국노 반민족자가 되는 지 아는 사람이 훨씬 많다.물론 학계에서야 탈민족,탈근대가 훨씬 기를 펴고 있겠지만.자 그렇다면 똘똘뭉쳐진 근대와 근대적 사회에 돌을 한번 던져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학계에서 너무 과잉논의되었다고 욕을 먹어도 일반 사회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밖에 안된것 아닌가 싶다.아무리 일상적 파시즘이니 뭐니 외쳐대도 그게 왜 폭력인지 이해를 못하는게 근대화의 기억에 똘똘뭉쳐진 일반의 의식이다. 탈근대론이 현실에 등을 걸치고 있지 못한부분도 분명히 있지만 현실에 약간 발을 떼고도 짚어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저자의 시각중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은 박노자가 지적했던 '분단환원론''정치환원론'이다.저자는 우리민족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분단문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거기까진 이해한다만 마치 분단이 해결되면 다 될 것 같은 태도는 80년대 대학동아리에서만 들어보던 이야기이다.통일문제에서 상대적진보성을 가진 국민의 정부 이후 대북관계의 헤게모니는 관 주도로 돌아가고 있다.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는 커졌지만 통일에 대한 환상 역시 멀어졌다.통일의 과정이란 것이 이렇듯 하나 하나 이루어져 간다는 것에 대해 안것이다.그런상황인데 '통일이 민족과제다 '라고 열나게 외쳐봐야 아무도 듣지 않는다.왜? 그런 수십년간 수없이 들어왔기때문에.통일문제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차분한 단계를 거치고 있다.저자처럼 민족과제,근대성의 완성등으로 봐바도 별로 반응없을 성 싶다.차라리 거리에서 비정규직 철폐문제를 물어봐라?사람들이 더 많은 의견을 낼 것이다.이게 더 현실적인 거 아닌가? 저자가 그토록 발 붙여야한다고 강변한 현실.이 삐딱한 우문을 계급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무엇이 더  실생활적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일뿐이다.또한 이 책에 간간히 등장하는 예술관련 책들에 대한 서평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저자는 진짜 80년대 동아리 수준으로 이야기한다.정치적으로 옳바른 예술...뭐 이런식의 예술이 진짜다.맞다.가장 핵심으로 들어가면 충분히 그렇다.하지만 이미 각 영역은 영역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비축하며 역사를 쌓아왔다.거기에다 대고 결국 '정치야'라고 하면 이건 순진한건가 아직 80년대의 혁명기치를 놓치지 못한 미력함인가 모르겠다.사람도 따지고 보면 세포다.그래..그래서.세폰지 안다.그걸 밝혀서 칭찬해달라는 건가? 그 다음에는....  세포인지 밝혀서 자랑스러워하면 그 다음부터 '환원주의자'라는 이야길 듣는거다.맑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경제....그래 원인이 경제인지 밝혀줘서 고맙다.맑스.거기서 끝이다.그걸 붙들고 여기 저기에 다 '경제,경제,경제'하면 바보소리 듣는 거고 단선주의적이란 소릴 듣는 거다.저자처럼 많이 배운자가 그럴리야 없겠지마 문득 문득 그런 느낌이 들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몇몇 책들에서는 비판과 긍정의 밸런스를 잘 조절한다.하지만 어떤 책에서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물론 외면이라기 보다는 그 긍정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예를 들어 신영복의 <강의>같은 책이다.지은이 정도의 저자라면 신영복 교수가 가진 실천성과 용기,지적 건강성들을 알고 있기때문에 큰 비판을 꺼내긴 힘들 것이다.아니 대개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신영복교수에 대해 긍정적일 수 밖에 없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감동이 여전하기에 그 아우라에 손대기 ’n하다.<강의>를 말하며 신교수가 주장하는 동양철학의 <관계성>에 대해 높은 평가를 저자는 매긴다.그 관계성이라는 것은 과연 문제가 없을까? 우리사회처럼 관계의 네트워크가 촘촘한 사회가 없다.이게 또 저자가 지속적으로 내려앉아야한 다고 말한 현실아니던가? 학연,지연,혈연.....이건 관계의 네트워크가 아닌가? 물론 고전에서 말하는 긍정의 네트워크는 이런 왜곡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하지만 동양의 인간관계중심은 우리사회에 배운자든 배우지 않은 자든 체험적으로 내화해서 생활에 반영한다.그러면 관계성의 회복을 외치는 게 현실적인가 개인주의의 부활을 외치는게 현실적인가? 내가 좀 오바하는 부분이 있지만 난 우리사회의 인적 네트워크가 좀 지겹다.아니 많이 지겹다.혼자서는 다들 바보다.사회시스템 역시 개인과 룰이 지배하는게 아니고 인적 네트워크가 지배한다.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러한 관계성에 좀 파탄을 내고 싶다.그런면에서 내개 더 깊은 울림을 울려주는 것은 개인주의의 부활이며 관계성의 비판적 단절이다.다행히 학연,지연,혈연이 보잘것 없어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저자는 동양의 관계성이 가진 긍정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앞에서 말했듯 서평집으로서 많은 매력을 갖고 있다.비록 나의 입장이 저자보다는 조금 더 탈근대론의 긍정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저자가 가진 큰 틀에는 동의를 한다.탈근대론자들이 가진 좌파 상업주의도 무척이나 맘에 안든다..ㅆㅆ 다음은 저자가 쓴 서평중 맘에 끄는 몇권의 책을 읽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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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9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지기의 한옥 짓는 이야기
정민자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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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집은 집이 아니다."

특히 나처럼 아파트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딱맞는 말이다.총각시절 원룸(따지고 보면 이것도 아파트다.)생활까지 포함하여 나의 아파트살이 구력도 어언 20년에 이른다.그 시간동안 아파트는 집도 아니고 집이 아닌것도 아닌 모호한 상황의 주거공간이였다. 우리집은 어디어디 아파트 몇동 몇호....이 말이 주는 공허감.그 감정을 따라가면 두고온 '빨강 지붕의 양옥집' 에 대한 아쉬움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는 빨강 양옥집에 살았다.6살때 부터 15살까지 였을 것이다.아버지는 그집을 산 첫날 내 집이 생겼다는 설레는 마음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우리집에는 꽤 큰 화단이 있었다. 목련나무,홍매화 나무,산수유 나무,덩쿨장미,그 외 크고 작은 화초들...봄이 되면 크게 자란 장미꽃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갔다. 인근 공장에 다니던 누나들이 지나가다 가끔 대문까지 들어와서 꽃을 꺽어가기도 했다.그 집에서 꽤 살았다.그러다가 중3때인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되었다.내가 기억하는 거의 첫번째 이사인듯 하다.짐을 실었던 마지막 트럭과 함께 그 집과 작별을 해야했다.돌아보는 집이 외로와 보였다.뭔가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죄책감이 들었다.나는 이미 이사 가기 며칠전 부터 그 집을 이루고 것들과 작별식을 했다.가끔 쥐가 출몰해서 혼비백산하게 했던 부엌,가끔 올라가서 먼지를 뒤적이면 흥미로운 것들이 발견되었던 다락,목련꽃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옥상,겨울철 얼어붙어서 아버지와 뜨거운물 부어대던 옥외수돗가.나는 그 모든 것들에 한번씩 눈길을 주고 인사를 했었다.하지만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 바라본 퇴색한 지붕의 양옥집은 지친 거인처럼 쓸쓸해보였고 내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아파트에 오래 살면서도 나는 집 하면 그 양옥집을 생각한다.아파트처럼 텅빈 공간이 없는 꽉찬 집으로써의 느낌을 주는 것은 그 집이 유일하다.

한옥짓고 사는 이 책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우리식구들의 정든 주거공간이요,남편에게는 가장 소중한 애장품이다.'  마지막 말이 인상적이다. 집이 가장 소중한 애장품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게 한옥이든 양옥이든 자신의 의지에 맞게 설계하고 돌 하나하나 쌓아 지은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멋진 말이다.그런 집이 진짜 집이라는 생각이든다.

한옥을 짓는 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다.이 책을 보면 한번더 확인할 수 있다.지은이는 일단 저지르면 다 한다라고 격려한다.하지만 저자도 이미 지어본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다.주변에 좋은 지인들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운 나같은 사람이 마음 먹는다고 쉽게 달려들 수 있는 일은 아니다.지은이가 몸담고 있는 아름지기란 재단은 일반인들의 한옥짓기에 도움을 주기 위한 단체이다.일단 이 책을 통해서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안것 만으로도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수확이 아닐까 한다.항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맨땅에 해딩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어디있겠는가.

이 책은 첫단추부터 하나씩 설명한다.물론 전문적인 수준까지 이야기하진 않는다.'대략 이런 식이면 가능하지 않겠나' 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목재를 구하는 방법,목수를 구하는 방법,도배를 하는 방법,한옥에 어울리는 인테리어방법등등...지은이의 공사보고서가 갖는 강점은 실제 집주인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묻어있다는 것이다.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에어컨을 숨기는 방법이란든지 화장실의 수챗구멍을 없앤다던지 하는 것들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노하우이다.집을 잘 짓는 대목이라 할 지라도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 않은가.저자는 집이 사람의 성품을 바꾼다고 말한다.지은이는 집 지으며 인내를 배웠다고 한다.또한 한옥이 자연친화적 삶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고 한다.한옥에 들어서는 사람들 역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만지고 걸음도 신중해진다고 한다.굳이 양옥에 비해 한옥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한옥을 나름대로 현대화시킨다 하더라도 편의성면에서 양옥이 가진 장점을 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수많은 가구들을 전부 벽장에 넣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이다.결국 어떤 삶의 형태를 선택하는 가의 문제일 것이다.조금의 불편을 감내하더라도 깊이있고 여운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그런 선택은 또 결과에 서로 영향을 주어 삶과 자연의 일치감을 높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언제가 한옥을 한 채 짓고 싶다.설마 꿈으로 끝날 수 도 있지만 집에 들어서면서 기둥의 소나무향을 맡고 싶다.

이 책 말미에 함양의 '한옥 문화체험관'이 소개되었다. 작은 사진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공사전에 한번 가 본적이 있었던 집 같다.함양 근처에 사는 천연염색하는 분과 함께 였다. 그 집 마당에서 천연염색을 했고 안채에 있는 마당에 바지랑대를 걸고 널었다. 고색창연한 고택에 형형색색의 천들이 바람에 날렸다. 아름다왔다.그곳이 한옥체험관이 되어 한옥살이를 경험해볼 수 있게 해주나보다.언젠가 또 기회가 닿으면 한번 들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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