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 53호 - 2006.겨울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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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작은 계획을 잡았다.담배는 끊은지 오래되었으니 계획이 될 수 없었다.운동은 아이때문에 1년간은 힘들 듯 하다.책읽기 역시 물리적 시간의 한계가 있어서 양적으로는 더 늘릴 수도 없고 또 굳이 계획을 짜서 늘리고 싶은 마음도 없다.대신 한동안 접었던 계간지는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올해부터 꾸준히 볼 계간지는 두 개다.<녹색평론>과 <황해문화>... 이 두가지는 현재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둘 다 새로운 사회,더 나은 세상을 위한 담론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갖는다.그러나 둘이 가르키고 있는 손가락 끝의 대상은 조금 차이가 있다.지향점으로 보자면 <녹색평론>조금 더 이상적이다.그러나 <녹색평론>의 글들을 읽어보면 굳이 이상적 지향만을 외치는 것들은 아니다.현실의 토대 위에 있는 <황해문화>의 학술적인 글보다 직접적인 글들도 많이 있다.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평론>은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모토로 한다.이상적이며 실천에 있어서는 미시적이다.<황해문화>는 현실정치 위에 있다.근원적인 변화보다  현실토대 위에서의 변화를 중심에 두고 있다.이념적 지향으로 본다면 최소한 우파적이지는 않다.

나는 이 둘이 한 개인 내에서 조화로와야 된다고 믿는 쪽이다.두 책 창간 이념적을 유추해보면 변별성이 분명이 있겠으나 지면을 채우는 글들은 서로 공유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연대의 부분이 많다..생태주의로 대표되는 <녹색평론>의 모토였던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는 것이 <황해문화>의 내지 제호 밑에도 씌여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이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중의적이기도 하다.

황해문화 겨울호는 좋은 인연을 통해 얻게 되었다.올해 부터는 내 돈주고 사서 봐야겠다.(친환경 농사꾼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이 상황에 딱 맞다.친환경 농산물이 조금 비싸다는 말에 대해 ...'제대로 지은 농산물 제대로 된 가격에 사주면 우리농촌이 다 산다.' 라고 한다.별것 아닌 말 인 듯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황해문화 2006년 겨울호의 특집은 시기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87년 혁명 그 후 20년' ...곧 나오게될 2007년 봄호에 특집 2편이 실린다.

올해는 87년 6월 항쟁의 20주년 되는 해이다.며칠전 박종철 열사의 20주년 추도식이 그의 모교인 부산 혜광고와 그가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대공분실에서 있었다.발빠른 신문은 '민주화 세대 20년'을 정리했고 몇 몇 방송에서도 올 6월쯤 되면 다큐멘터리등을 선보일게 뻔하다.대통령도 20주년을 기념해서인지 개헌론을 툭하고 던져서 정국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대통령의 개헌은 다른 말로 하면 '87년 시스템'을 이제 정리하자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지난 몇 년간 '민주화 세대'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참여정부'의 무능이 부각되면서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개혁 정치에 대한 피로함을 드러내고 있다.과연 지난 20년전의 열정은 사상 누각이 었으며 공허한 메아리였는가? 민주화세대는 어떻게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며 주저앉고 말았는가? 결국 민주주의라는게 해봐야 그게 그거인 것인가? <황해문화>는 질곡의 20년을 돌아보며 민주화세대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먼저 김선혁 교수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87년의 민주화를 '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규정한다.그리고 87년 시스템이 대단히 불완전하고 협소하며 취약한 민주주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절차적 민주주의의 부분적 성취 정도로 파악한다.왜 혁명적 상황 속에서 개밥의 토토리만큼만의 성취를 얻어냈을까? 김교수는 87년 6월 항쟁이후 변혁의 불길이 3중위임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그러들고 말았다고 말한다.첫번째 위임은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가 정치사회에게 주도권을 준 것이다.두번째 위임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성장한 계급운동이 90년대 들어서면서 힘을 잃고 시민운동에게 밀려나게 된 것이다.세번째 위임은 조금 더 일반적인 형태이다.오도넬이 말한 '위임 민주주의'의 보편적 특징이 한국에도 적용된 것이다.아무런 견제 장치도 없이 대통령과 정치엘리트들에게 정치를 위임한 것이 그것이다.3중의 위임구조하에서 잊혀져가던 87년의 기억을 다시 수면위로 떠올린 것은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었다.국민들은 2002년 개혁을 원했고 당선이 불가능해보였던 노무현을 권좌에 앉혔다.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그 염원과 반대방향으로 향했다.노 정권은 외부요인론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의 가속 페달을 밝았고 강력한 속도로 '보수혁명'을 추진했다.최장집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정서적 급진주의와 정책적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상태가 이어졌다.비정규직의 증가,사회양극화의 심화,잦은 정책 실패,보수언론의 맹공 등등의 이유로 참여정부의 지지율은 급락했다.이는 노무현 정권으로 상징되던 '진보세력의 위기론'으로 돌아왔다.(노무현이 과연 진보세력의 좌장이었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다.그러나 많은 국민들은 진보=노무현/열우당 이런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 집권 386들 역시 위임과정을 통해 정치권에 '젊은 피'로 수혈 되었다.(그람시가 말한데로..)이런 포섭 다음에는 또다른 차용이 있었다.정책 능력이 부족했던 집권386은 관료세력들을 안을 수 밖에 없게 된다.이런 거래를 통해 개혁과 보수적 관료가 기묘한 동거에 들어간다.그 결과는 현재 보이는 바와 같다.

민주화 세대 20년을 돌아보며 각 필자들은 회고와 반성,그리고 대안을 제시한다.조금씩 차이를 두고 있지만 '새로운 정당정치의 출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박상훈 교수는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한다.대부분의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화 이후 공통적으로 불평등의 심화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은 정당을 통해 대중의 힘을 조직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정당은 배제되고 대통령 개인 위주로 구성되는 권력의 문제는 현 노무현 정권의 한 특징처럼 보이기도 한다.특히 임기말에 이르러 대통령은 정책을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을 취한다.개헌론에 이어 신년 연설,그리고 신년 기자회견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TV를 통해 직접 국민들을 만나고 있다.이는 다른 말로 보면 정당정치의 붕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지금의 여당이 사분오열되어 있어서 그런 현상일 수도 있지만 대통령은 집권초기 부터 대중주의적 여론 동원 방식을 택했다.정당이 붕괴된 것은 사회현상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와 주장들을 조직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강한 정당의 부재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축소시키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는 로이와 긴스버그의 지적이 귀에 들어온다.

물론 새로운 정당의 출현과는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는 필자들도 있다.홍석만의 경우는 노동운동의 재정비와 계급적 통일에 기초한 전국적인 투쟁질서의 확립을 주장한다.홍석만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지난 20년간의 노동자 정치운동/노동자 정당 운동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결과이다.민주노총에 바탕을 둔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저자는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안으로 노동운동 문제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또한 민주노동당이 가진 내적 분열과 인적 구성의 편향성등은 반자본주의적 대안을 추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김정한은 80년대의 NL,PD론과 구분되는 민중주의적 시각의 복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전통사회의 도덕경제 모델에 바탕을 둔 민중주의는 대안모델의 부재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김정한은 새로운 시민권 확보 차원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운동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흔히들 386세대라고 불리는 민주화세대는 이제 기득권층에 올라섰다.젊은 날 그들의 열정은 시간과 제도의 틀 안에서 퇴색되어 갔다.'87년 혁명 20주년'은 이제는 중년이된 민주화세대,그리고 청년으로 성장한 한국민주주의에 있어 새로운 성장을 위한 결절점이 되야한다.지난 시간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통해 이제는 또다른 권토중래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그렇지 않고 수구정당의 집권을 막자며 낮은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공포의 정치'에 기대어 '여론몰이'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성찰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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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25 14:1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늘 선거때마다 고민하는 문제인 당은 노동당, 인물은 반한나라당...ㅋㅋ

박종철은 알고보니 본교(영남중)출신이었더군요..
기억하는 선생님의 얘기를 좀 들으니
아주 착한 심성에 반듯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고 하더군요..
그때 교사했던 분들이 다 퇴직하고 거의 안계서서 방송국서 그때 학교왔다가 뭐 별로 얻을게 없어서 그냥 갔다는...

드팀전 2007-01-26 07:58   좋아요 0 | URL
달팽이님>대선에서도 아마 '수구 집권 막자 ' 또는 '한편만 거대하면 안된다.견제할 수 있는 힘을 다오' 이러면서 여권의 표집결 논리가 나오리라 봅니다.지난번에는 민노당에 대해 유시민이 그런 발언을 했지요. '어차피 안된다.노후부에 힘모아줘라.'...
진보세력(?)이 집권해서 실패하고 그 반동으로 보수세력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민주주의입니다.할 수 없습니다.저열하게 살아남으려하지말고 깨끗이 죽고 다시 사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구두님>그 댓글이 정말 그렇네요...모르척 하기도 아는 척 하기도...
어쨋거나 시의적절한 시점의 책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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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제학도로서 그리고 비즈니스계에 있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 읽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이 책이 별 셋인 이유는 내게 힘들었기 때문이지 책의 내용이 부족해서는 아니다)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중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 일까 책장을 넘기면서도 갸웃 갸웃 거렸다.물론<국가의 역할>에서 장하준 교수가 하고자 했던 바....그걸 몇 줄로 정리하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무슨 잠언서도 아니고 대략적으로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만 주워담기 위해 이 책을 보는 건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기본적으로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경제학에 대한 사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야 한다. 옛 강의실 기억을 떠올려 봤자 '경제학 개론'이거나 '경제사' 정도인 나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좀 고생해야한다.피구의 후생경제학이나 사무엘슨의 공공재 이론등을 떠올리기 위해서 일본의 경제신문사에서 나왔던 <경제학의 선구자>니 하는 류의 책을 뒤적여 보아야 했다.책이라는게 나아가는 맛이 있어야 된다.그런데 아파트앞 안전턱처럼 속도를 줄여가는게 반복 되다보면 결국 '책읽기의 악순환구조'가 발생하게 된다.저효율이 고짜증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경제학적 지식의 일천함을 안타까와하며 또 이 책을 술술 읽어 내실 분들의 지식을 부러워하며 읽기는 읽었다.

<국가의 역할>에서 장하준교수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론을 편다.그의 국가개입론은 제도주의적 관점에서의 개입이다.이 제도주의적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 장하준 교수는 후생경제학,신자유주의,제도주의를 비교하여 설명한다.요약하자면 제도주의적 관점에서 장하준 교수가 바라보는 시장에 대한 관점은 다양한 사회제도 중 하나일뿐 이라는 것이다.이념적으로 시장의 절대적 가지,시장이라는 유일 신을 섬기는  자유방임적 신자유주의자들과 비교하면 시장은 그리스의 올림프스간 구성원중 하나일 뿐이라는 관점이다.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시장의 실패를 세계의 실패가 아니다.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실패하면 인류는 대재앙을 겪을 것이라고 위협한다.그러나 제도주의적 관점에서는 다양한 제도들간의 상호작용으로 시장의 실패는 보완될 수 도 있다.

장하준 교수가 싸우는 대상은 명확하다.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신자유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신화들이다.특히 국가문제와 관련해서 신자유주의자들의 반개입론은 이 책을 통해 철저히 비판당하고 있다.경제학사를 살펴볼때 대공황 이후 국가 개입주의는 너무나 보편적인 사상이었다.케인즈로 대표되는 개입주의는 70년대를 거치면서 역습을 받는다.통화주의자들의 공격이다.오스트리아 학파와 시카고 학파로 대표되는 통화주의자들은 '최소정부'를 주장하며 시장의 유연성을 도모한다.90년대를 들어서면서 초국적 기업과 투기자본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그 바톤을 이어받고 있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경제학계에 끼친 긍정적인 부분도 잊지 않는다.정보의 경제적 역할,경쟁의 중요성,국가 영역 밖에 있는 시장의 중요성 등이 그런 부분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개입 여부가 역사적,지리적,환경적 요인등에 따라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신자유주의는 개별 국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국민경제를 무한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탈정치화를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산업 정책(우리에게는 익숙하며 당연한 듯 보이는)같은 것들은 일소해야할 독버섯이다.특히 이 문제는 저개발국가가 과거 선호하는 방식이며 그 효과가 현재에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산업정책 논쟁은 현재성을 갖는다.장하준 교수는 '선별적 산업정책'이라는 것으로 산업 정책을 정의한다.

'산업정책은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일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저개발 국가가 산업정책을 펴는 이유는 간단하다.대기업을 키워서 정치자금 받겠다는 것보다는 국민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국가는 직접 자원의 배분에 관여하여 특정 산업을 육성한다.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이 책에서도 여러번 등장하는 대표적인 산업정책의 예이다.이론적인 측면에서 강력한 정부의 금융통제를 통한 자원배분과 산업육성방식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장하준 교수는  산업정책을 통해 기업이 가진 미래 정보의 불확실성과 불충분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다.실제 저개발국들은-현재 선진국이 되어 잇는 나라들 역시- 고유의 산업정책을 통해 국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산업 정책론에 갖는 반감은 이상화된 완전경쟁 시장에 대해 갖는 환상때문이라고 말한다.물론 산업정책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하는 바는 아니다.산업정책 역시 비용과 수익의 관계가 발생한다.결국 제도적 다양성과 기술 변동,그리고 경제 이론의 발전등을 고려한 조절 메커니즘으로서의 산업정책은 효율적인 정책 수단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바로 '탈규제'다.이건 다른 말로 하면 정부의 간섭을 없애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장하준 교수는 규제와 탈규제를 구분하는 기준의 모호성에 대해 언급한다.또한 탈규제가 경제 영역에서 정부의 완전철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힌다.시장의 효율성과 존립 자체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규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또한 개발도상국이나 체제 전환국의 경우에는 시장 규제 정도가 아니라 시장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또한 규제개혁을 통해 발생하는 분배의 형태도 고민거리로 남겨두어야한다.규제 개혁과 관련해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공기업의 효율성문제이다.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널리 퍼뜨린-또는 경험상으로 익힌-공기업은 비효율적이며 실적이 저조하다라는 상식에 도전한다.특히 대만과 한국같은 신흥공업국의 경우 공기업의 성공은 주요했다고 평가한다.민영화론자들은 공기업의 이기적 대리인모델,징계 메커니즘의 부재,수익성을 기준으로 한 비효율성등을 예로 들며 공기업을 공격한다.흔히들 알고 있는 '무사안일 공기업인'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장하준교수는 민영화가 된다고 주인-대리인 모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단지 국가의 자리에 대기업이나 대주주가 자리바꿈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또한 '퇴거론'에 근거한 -즉 무기력한 기업은 소비자가 퇴출 시킨다는 식의-징계 메커니즘 역시 민영화도입으로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한다.경험적으로 볼 때 공기업도 도산이라는 절차를 받게 되며 또한 반드시 지켜야하는 기업,주주 이익이 극대화된 기업조차  민영화로 그 퇴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결국 퇴거에 의한 징계는 기업의 효율성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기업 규모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수익성에 따른 공기업의 비효욜성도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즉 공기업은 단순한 수익성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수익성을 측정해야 한다면 공기업이 지향하는 '공익목표'라는 목표지향성을 포함한 수치로 재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치 중 좀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이 있다.장하준 교수는 <국가의 역할>이 씌여진 시점은 2003년이다.세계화와 함께 등장한 초국적 기업의 증가와 외국인 직접 투자를 보여주기 위한 표에 문제가 있다.저자는 외국인 직접 투자가 대부분 선진국에서 발생했고 개도국은 극히 미미했다고 말한다.그러면서 1983년부터 94년까지의 투자 비중을 보여준다.국내 자본형성에서 외국인 직접투자비율을 나타내는 표에 의하면 한국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상당히 낮은 국가로 평가된다.물론 한국은 차관이라는 형태의 투자방식을 과거에 고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다.91-93년 수치를 보면 0.6%로 일본의 0.1%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낮은 편에 해당한다.그런데 문제는 이 수치가 지나치게 과거의 것에 의존해있다는 것이다.한국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 투자규제 문턱이 낮아지기 시작한다.그리고 99년에 이르면 외국인 직접투자가 대폭증가한다.99년 4월 외환자유화 1단계 계획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탈정부화한 금융시스템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약화,자본시장의 변화등은 기업부문의 자금조달구조를 변화시켰다.결국 98년부터 2000년 사이 외국인 직접투자 유입액은 1965년-1997년 사이의 총 유입액과 유사해진다.장하준교수가 93년 이전의 외국인 투자액을 제기한 것은 초국적 기업의 진출과 투자라는 것이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세계적인 현상은 아니다라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였다.하지만 그 시점이 책이 써진 시점에서 10년전 자료에 근거하다보니 아무래도 현재성을 확보하기 어렵지 않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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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1-23 22:00   좋아요 0 | URL
억지 춘향꼴로 책을 끝까지 읽었을 님생각을 하니 슬며시 웃음이 이는군요..
뭐 그래도 고집은 있어 끝까지 다 읽고 서평까지 올렸네요..
난, 모르는 책 들면 읽기는 해도 서평까지 쓸 엄두는 못내는데
그런 면에서 나보다 낫군요
우선 원론적으로 한마디 거들면...
고전파 경제학(시장자유주의)과 케인지안 경제학은 현실 경제의 변화에 따라
문제점이 커지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라
현실 인식이 그 관건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뭐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라
물 불 가리지 않고 다국적기업활동이 유리하도록 규제완화나 관세 및 비관세장벽 철폐를 주장하는데...
사실 국내적으로는 기업과 재벌들 처음엔 국민들 혈세로 기업일으켜 온갖 특혜에 부패로 덩지불려서 이젠 그 정부가 각종 규제니 해서 귀찮으니까 작은 정부를 만들어라고 하는데.. 좀 역설이지요.. 물론 세계시장에서 보면 국내 기업들도 완전경쟁 비슷한 시장에 놓여있어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연구개발비나 각종 수출 관련 특혜를 엄청 누리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요구를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일이라 생각되죠.
세계경제에서는 저자의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 보면 영국이 패권을 쥐고 있을 당시처럼 자국의 산업이 경쟁력이 있을 때에는 자유주의를 주창하고 국내산업의 보호가 필요한 대륙국가에선 보호무역주의로 맞서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꼴은 선진국들이 경쟁력있는 산업을 바탕으로 자유무역협상을 맺어 후발국이 선진국의 진입을 막으려는 사다리 걷어차기식의 정책을 편다고 비판하죠..
장교수님은 말그대로 전도유망한 젊은층의 중도우파교수라 지적 객관성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지만
존경했던 정운영 교수는 지금의 상황에서 더욱 국가개입을 늘여서 사회보장제도와 노사관계의 재정립을 통한 인간적인 경제체제를 꿈꾸셨죠..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란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그 뜻을 대표하는 정책입안자 정치자들의 마음 속에 인간(짐승같은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고서)의 마음을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나저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는 언제 다시 찾을 건가요?

드팀전 2007-01-23 23:45   좋아요 0 | URL
한국은 독특한 발전국가모델로 성장해온 나라지요.피터 에반스 교수는 동아시아 발전 모델에서 기업과 사회세력간의 밀접한 관계를 '연계된 자율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박정희식 발전모델이 한국경제를 견이해온것은 사실입니다.(사회적 기회비용을 배제한다면.)한국의 경제는 '자본통제'가 핵심이었지요.국가가 금융기관을 통해 자본의 배분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이며 장교수가 말하는 '산업전략'이라는 것을 통해 '수출주도형'산업을 적극 육성하게 되지요.이 과정에서 재벌 기업의 특혜나 특정 기업에 대한 정치적 성격의 지원도 벌어지게 됩니다.어쟀거나 한국의 국가주도형 산업구조는 6,70년대 한국경제를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오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한국의 경제 발전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정책과 달리 다양한 각도의 국가개입을 통해 이루어졌지요.자본통제와 수입보호 정책이 대표적이지요.거기에 내부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로 국민동원이 용이했던 점도 있겠구요.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밀월 관계에 있던 정부-기업간 관계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 변하기 시작합니다.자본 시장이 변화하며 기업들은 해외자본 유치에 열을 올리게 되고 정부의 금융통제정책은 빛을 읽게 되지요.흔히 말하는 금융시장 자유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이지요.덩치가 커진 재벌들은 효율성을 잃어버리고 중복투자,차입경영,재벌 총수에 대한 일방적 의존,문어발식 다각화 등으로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변해갑니다.
대부분의 신고전경제학에서는 한국경제의위기를 동아시아 발전 모델의 위기로 진단하고 발전모델의 종언을 선고합니다.정부의비효율성,재벌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등이 지적되고 정설로 받아들여져왔습니다.장하준 교수가 지적하는 부분은 그런 주류경제학의 진단이 과연 '상식'처럼 그런가 하는데 있는 듯 합니다.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상식'처럼 되어버린 주장에 '이론적' 댓글을 달고 있습니다.
장교수는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의 국가 개입을 주장하고 있습니다.그의 접근법에 노동경제문제는 빠져있지요.전체적으로 거시경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신자유주의가 우파이데올로기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에 장교수의 '개입주의'를 우파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신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 즉 거칠게 말해서 시장만능 주의와 국가개입주의를 놓고 보면 장교수는 후자에 속합니다.물론 신고전학파와 케인즈학파들도 맑스 경제학에서 보면 결국 우파이긴 하겠지만요.경제학에서는 그런 좌우구분보다는 학파중심의 구분이 일반적인 듯 합니다.장교수의 다른 책을 보지 않아서 모르겠으나 베블렌,갈브레이스등의 영향을 받은 제도학파적 속성이 강하지 않나 싶더군요.
그리고...^^ '정치인 또는 사람들 개개인의 대오각성'을 통한 변화는 너무 낭만적인 접근입니다.도덕적이며 좀 더 확장하면 종교적인 접근이지요.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무슨 법률과 제도가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근원적인 주장은 현실 사회 관계속에서는 그다지 유의미하지 못합니다.실천의 구체성을 담보할 수 있는 주장이어야 현실 관계에 정합적입니다.개개인의 덕성 문제는 그것과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사회정치적 함의들을 개개인의 덕성으로 치환하는 '탈정치화'에 제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개개인의 덕성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미시적 기획과 거시적 기획의 차이를 분명히 하셔야 할 듯 합니다.
유리구두는 앞으도 계속 신어야 할 듯.....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글샘 2007-01-24 10:57   좋아요 0 | URL
정답 :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탈을 쓴 세계화만이 있을 뿐. ㅋㅋ 좀 비극적인가요?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은 <글로벌>이 아닌 <로컬>에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글로벌>이란 개념이 특히 경제적으로 적용되면 제국주의와 착취 이외의 현상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로컬>을 강조하는 지방자치나 무정부주의적 활동들이 <강력한 국가>를 통해 권력과 돈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비해 돈이 없어도 어차피 사는 건 마찬가지 아닐까 합니다.
한국이 경제 발전이 빚어낸 양달도 따스하지만, 그 음달은 여전하거든요.
아파트에서 문 꼭 걸어 잠그고 겨울에도 런닝차림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수십 미터 허공중에 떠 있는 생각을 하면 이게 잘 살게 된 건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같으면 드팀전 아우님 사랑방에 불러서 동치미 떠놓고 막걸리 한잔 하고 있으면, 시퍼런 칼날같은 그믐달이 떠오를 무렵에서야 달팽이님이 슬그머니 합석할 만도 했을텐데요... ㅋㅋ
유리구두는 무효입니다. 열두시까지는 버텨 줘야 유리구두지, 그건 사기구두라고 봐요.

드팀전 2007-01-24 11:45   좋아요 0 | URL
생태주의의 모토가 그거지요.전지구적인 사고와 지역적인 행동....
실천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논지에서 봐도...맞는 말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외부유인론으로 설명하는게 옳은데 이 거대담론에 <로컬>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 개인의 실천 윤리와 실험으로써는 의미가 있으나 -저 역시 개인의 실천윤리로 이부분을 선호하고 좋아합니다,또한 먼저 선실험하시는 분들에 존경도 표합니다.-거대담론에 대한 대응논리로는 이상적일 뿐입니다... 이런 예를 들지요.
대의정치하에서 양심적인고 도덕적인 정치인,제대로된 인간들이 정치를 하는것이 전근대 정치윤리(공자 맹자님도 말씀하시던)에서도 지향했던 긍정적인 방식입니다.그렇게 만들기 위해 장기적 노력도 필요하겠지요.그런면에서 교육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저질 정치판을 순화하는 실천적 움직임이 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있는 둥 없는 둥 한 '국민소환제'를 현실화하도록 움직이는 일이 구체적입니다.(국민소환제라도 물론 문제가 많이 발생하겠지만..) 적절한 예였는지는 모르지만...제 논지는 이상적인 상황은 다들 알고 있다는 겁니다.존레논의 '이매진'에 나오는 그런 상황말이지요...하늘에서 세상을 관망하고 정리해주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그다지 잃어버릴게 없습니다.나름대로 폼도 나잖아요.^^ 영혼의 위안을 주는 몫이라면이야 그다지 불만이 없습니다.(20대 초반에는 그것도 결국 반동적이라고 본 시절도 있었지요.아...옛날이네.)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그 논리를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글샘님의 상황도 그러리라고 생각해요.제가 님의 글을 좋아하고 또 총체적인 진정성을 믿는 이유도 그렇습니다.님의 실천은 구체적이고 그 실천을 위한 논리들은 이성적입니다.또한 즐겨읽으시는 내면의 수양을 위한 책들은 또 그 나름대로의 바탕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제 개인적으로도 그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열두시 넘기면 와이프가 외박으로 칩니다.^^ 설 연휴 즈음해서 와이프가 친정갈 텐데 그때 소규모로 한 잔 하지요.싼거는 제가 한번 막아보겠습니다.

달팽이 2007-01-24 17:2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고 또 배웁니다.
전공이 아닌데도...정리를 참 잘 하셨네요..
난 사실 경제학 대학원 다녔어도...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음에 보게되면 소주도 한잔 합시다. 지발...

글샘 2007-01-24 17:48   좋아요 0 | URL
이거 번개 후유증이 크군요. 이제 리뷰보다 긴 댓글들 읽기도 힘듭니다. 헥~~헥.컥,
요즘은 생태운동도 글로벌리가 아니라 씽크 로컬리, 액트 로컬리로 간다더군요.
제가 젤 좋아하는 노래가 이매진입니다. ㅋㅋ 다음번에 노래방가면 함 불러봅시다.
저도 소주는 좋아하는데... 소주먹고나면 기억이 실종되는 <상실이 병>에 걸려서리... ㅋㅋ

드팀전 2007-01-24 18:28   좋아요 0 | URL
^6^ 안그래도 저도 그런생각을 했습니다.왜 이렇게 댓글을 길게 썻지라고...달팽이님이 길게 써서 나도 길게..^^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소주는 시원!! ...서울출신이지만 소주는 시원이 역쉬!!
희안한 일인데 와이프 고향이 청주잖아요.그런데 시원이 나오는데가 부산이랑 청주더라구요...주례를 대선 사장님을 모셨으면 평생 소주이용권이런거 주시지 않았을까??^^ㅜ

그리고 달팽이님..제가 이 책을 읽다가 뒤적인 책들이 몇 권돼서 나름정리를 좀 했습니다..메모의 힘!!
 
미국민중사 세트 (2권 세트)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두 죽음이 있었다.선거로 뽑히지 않은 유일한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1913-2006.12.26)가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전 미국인의 애도 속에 그의 장례가 치뤄질 것이다.미국 증권시장도 그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새해 첫 장을 일찍 마감하기로 했다.한 해를 넘기기 전 또 다른 죽음,후세인(1937-2006.12.30)전 이라크 대통령의 죽음이다.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상당히 빨리 형이 집행되었다.바그다드에 있는 과거 그의 정보부 건물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다른 양상의 두 죽음은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떠나서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복잡한 심정을 갖게 한다.후세인이 이라크 민중들에게 행한 반인권적 행동은 결코 그의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식이 과연 정당했는가는 마음 속에 큰 질문으로 남는다.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닉슨을 대신에서 권좌에 오른 포드,사자에 대한 예의인지 언론은 그의 업적을 미화하기에 여념없다.중동평화를 앞당기고 소련과의 핵협상을 통해 핵불안을 줄였다는 식으로 말이다.그러나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에는 그런 이야기 말고 숨겨진 진실들이 빼곡하다..

제럴드 포드는 1972년 이미 승산이 없다고 판단이 난 베트남전에 미련을 계속 남겼다. 1975년 4월 포드는 이렇게 말했다."만약 의회가 내가 요청하는 시간에 맞춰 7억 2200만 달러의 군사 원조를 가용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남베트남이 오늘날 베트남의 군사적 상황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는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메이어게스호 선원 납치 사건을 빌미로 캄보디어 본토를 폭격한다.선원 39명은 중국측의 중재로 풀려나기로 되어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감행되었다.엄청난 인명사상이 발생했다.이 많은 무고한 사상자에 대해 포드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일까? 종로에서 뺌맞고 한강에 화풀이라도 해야지 베트남에서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의 폭격이다.또한  포드는 취임 한달 만에 닉슨에 대해 면책특권을 준다.<르몽드>지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한 중요한 발언을 했다. '닉슨을 제거함으로써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낳은 모든 구조와 그릇된 가치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하워드 진은 말한다.이것이 미국 주류가 정치를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정치,기업,군부가 유지하는 기성 체제는 형태를 바꾸고 공격에 대처하면서 기존 질서를 더욱 교묘한 형태로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당파성을 인식하라고 주문한다.<미국 민중사>를 이끄는 역사의 주인공들은 흑인,장애인,여자,노동자,인디언,그리고 피학살자 들이다.하워드 진은 자신이 당파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이 책은 일정한 방향으로 치우친 편향된 설명을 할 수 밖에 없다.그러나 나는 이런 편향에 얽매이지 않는데,왜냐하면 산더미처럼 쌓인 역사책들이 우리 모두를 다른 방향으로 크게 치우치게 만든 나머지-정부나 정치인들을 전율할 정도로 존중하게 만들고 민중들의 운동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만든 나머지-우리로서 굴종 상태로 속절없이 내몰리지 않기 위해 반대의 경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중도' '중립'에 우호적이다.스스로 '중도,중립' 적인 인물로 이미지 메이킹함으로써 현명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게끔 노력한다.(아무리 그래봐야 -미안하게도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하워드 진은 이런 '합리적'인 사람들이 '구세주'에 의존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즉 위기의 시대를 탈출시켜줄 그런 사람말이다.그들은 4년에 한번씩 투표소에 가서 두 명의 부유한 앵글로 색슨계 백인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구세주를 뽑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하워드 진은 이런 '구세주'라는 관념이 정치의 영역을 넘어서 문화 전반에 구축되어 왔다고 말한다.

표현이 '구세주'여서 괜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구세주'를 찾는 사람들은 '내가 뭐 그리 큰 걸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그가 그렇게 완벽하리라고 생각한건 아닌데..' 라며 의회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고개를 돌릴 빌미를 줄 것 같다. 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글을 읽어 보라는 말 이외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우리 나라의 경우만 들어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인데... 지난 대선 때- 그리고 실패가 드러나고 있는 - 현직 대통령에게 보낸 열광은 하워드 진의 입장에서 보자면 '구세주'관념에 다른 말이 아니다. 다른 접근의 정치적 지평을 이야기해도 그들은 늘 '현실'을 이야기 했으며  임기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선 크게 실망을 하여 이젠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져버렸다.(실망의 늪에  빠진 그분들에게 광명의 빛이 다시 비춰지길..)

하워드 진은 이 힘빠진 분들에게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이 책을 썻음직하다?

 ".....이런 역사(민중의 역사)를 들춰내는 것은 자기 자신이 인간임을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인간적 충동을 발견하기 위함이다.이것은 더 없이 깊은 비관주의의 시대에 조차 놀라운 가능성을 버리지 않기 위한 것이다."  (아멘!)

하워드진의 관점에서 사회의 부를 독점하는 1%를 제외하면 나머지 99%는 민중이다.그들 중 하층 계급을 빼고는 대개 체제의 간수 역할을 한다.자본주의가 가장 잘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바로 이 중간계급층이다.이들은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의 완충지대가 된다.그리고 체제가 스스로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양보해주는 특권들에 스스로 만족하며 상층계급으로 의식적으로 편입한다.하워드 진은 체제가 만들어 놓은 이 완충지대-중간계급-이 변혁을 위한 열쇠라고 믿는다.이 체제의 간수들이 만약 시스템에서 이탈하기 시작한다면 변혁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것이다. 하워드 진은 변혁 운동이 이 '중간계급의 불만을 조직'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물론 중간계급을 하나의 층으로보는 일원화된 관점이 있다.또한 그들의 헤게모니를 분석하고 재전유하는 방식은 말하지 않는다.)신자유주의의 시대에는 이러한 외부의 상황 변화가 급격하게 만들어지고 있다.하층 계급으로 수많은 중간층이 편입되어 가는 추세다.

하워드 진은 이렇게 말한다.

"99%가운데 자기 자신을 똑같이 궁핍한 계층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체제의 간수들과 죄수들 가운데 그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깨닫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기존 체제는 점점 더 고립되고 무력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수많은 사람들이 굳게 결심한다면 엘리트들의 무기와 돈과 정보수단의 통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천 페이지가 넘는 <미국 민중사>의 수많은 학살과 봉기,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를 전부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우리는 알고 있다.기존의 교과서도 이 정도는 가르친다. 현재의 사회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 속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 지를.물론 교과서의 수치만 잘 외워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생각 바른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하지만 행간을 읽고 그 행간의 의미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알고 있다.우리의 일상적인 평화는 사실 핏덩어리 위에 구축된 것이라는 걸 말이다.사실 인류의 기원은 폭력과 희생아니던가..문명인이라고 하면서도 그 태곳적 카인의 기억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지금 무슨 무장봉기를 하자는 말은 아니다.다만 우리의 역사가 그런 지평위에 있었다는 것을 왜 외면하냐고 묻는 것이다.또한 아무런 일도 없어보이는 일상 바깥에는  이 책에 넘쳐나는 갈라진 목소리와 핏덩어리들이 사방에 흩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아....알고 있다고...TV에서 봤다고...그렇다면 내년에는 지나가다 그 현장에 한번이라도 끼여서 그들의 고민을 좀 들어보자.모니터 안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내 안방의 온도만큼이나 따뜻하다.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미국 민중사>에 나오는 현실도 차갑기만 하다.지금 길바닥에서 터져나오는 역사도 차갑다.그 차가운 바람 한번쯤 맞아보자.차가운 바람 한번 맞아보지 않으면서 사무실에서 교실에서 작업실에서 '정치는 허무해' '이제는 한국사회가 정말 염증나'라고 말하지는 말자.

일나 애버나시의 시의 한 구절

"나는 당신의 양심 긁는 소리, 나를 받아들여라"

<미국 민중사>를 올해 마지막으로 읽었다.한 줌의 지배세력의 욕심과 비인간적 자본주의와 전쟁이라는 장난질에 의해 죽어간 수 천 수 만 명의 이름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한 해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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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12-31 18:31   좋아요 0 | URL
엄두를 못내고 있는 책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또 읽어보고 싶어지는.
결국 해를 넘기네요
리뷰를 읽고 나니 더욱 읽어야 할것 같네요 ^^

클리오 2006-12-31 22:54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정말 봐야 되는데.. 언제 진지하게 도전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치만, 별 다섯 리뷰의 도움을 받아, 꼭꼭 도전하렵니다!!! 뜬금없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드팀전 2007-01-01 10:08   좋아요 0 | URL
네...몽님도 클리오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저는 조금 전에 해운대에서 해뜨는 것 보고 회사로 들어왔습니다.이제 곧 집으로 들어가야죠.^^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로테 퀸 지음, 조경수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교사 혐오자의 책>, 이 책의 독어판 제목이다.국내에서 이런 제목으로 책이 나오기 힘들었을 듯 하다.한국 사회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 중에 하나가 '특정 직능 단체'또는 '특정 종교단체'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사 혐오자의 책>이라고 출판했다면 분명 무슨 무슨 가처분 신청,무슨 무슨 변경 신청의 소를 당했음직하다.출판사는- 대외적으로만 존재하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의 정서를 알고 있기에 제목을 순화했을 것 같다.물론 짐작이다.

이 책을 읽을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선생님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는 공감할 지라도 한국과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사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점은 미리 머릿속에 넣고 들어가야된다.저자인 로테 퀸은 독일의 자율적 교육제도에 부정적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올바른 방식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말이다.저자가 바라보는 독일 자율교육제도의 문제점은 초등학생들에게 그 나이 때 맞는 학업성취를 독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2000년 피사에서 독일이 하위권에 머물렀다는 점이 그 주장의 근거다.로테 퀸은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육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 독일 초등교육 수준 저하의 원인이라고 파악한다.학년에 맞는 학업 성취로 독려하지 않는 학교,그리고 그걸 악용하여 방임과 가정으로 책임전가로 일관하는 선생님들.초등학교 까지는 열린 교육을 하다가 김나지움으로 넘어가면 달라지는 교육 형편 등등...독일이나 한국이나 교육에 대한 관심은 피차 마찬가지일테니 독일 여론이 쉽게 공감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초등교육은 그동안의 주입식 교육제도에 대한 반성으로 열린 교육방식을 지향하고 있다.(물론 지향은 지향일 뿐이다만)비록 독일 수준에는 미치치 못하겠지만 교육적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최소한 초등학교에서는 말이다.로테 퀸은 그와 반대 상황에 있다.독일의 자율식 교육의 폐해를 지적하며 조금 더 아이들을 책상에 붙여 놓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독일과 한국 교육의 역사적,사회적 차이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이 책을 접해야 교사 문제에 대해 좀 더 맞장구를 칠 수 있게 된다.

선생님....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다들 너무 많다.좋은 기억보다는 않좋은 기억이 더 많다.지금 선생님을 하고 계신 분들도 돌이켜 보면 과거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많을 것이다.물론 현재의 교사들은 '우리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라며  교사로서 자신의 선량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거기에 더하여 요즘은 학생이 선생알기를 뭐 알 듯 하기에 선생이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모든 교사들이 마귀할멈의 세번 째 아들 같지는 않다.세상 어디에나 부처도 있고 마귀도 있듯이 선생님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그런데 왜 아이들은 천국의 기억보다 지옥같은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까? 아이들이 잘 해주는 걸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사실 학교 생활 편안하게 한 편이다.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초등학교 때 부터 그 후광을 입었다.공부도 잘하는 편이었고 모범적이었으니 선생님과 큰 갈등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다.그렇다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정말 '올 한 해가 어떻게 가나?'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볶인 적이 있다.결정적으로 선생님께 세게 대들었는데 그 여파가 한 학기 이상 갔다.1학기 성적표에는 6년동안 처음 받아 보는 성적도 기록되어 있었다.그러나 이런 일은 쉽게 잊게 된다.정작 오래 기억되는 것은 다른 일이다.저자의 말을 먼저 인용하면 이런 류의 것들이다.

교사들은 종종 학생들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우하고 자신이 재능이 없다고 믿게 하고 외모와 성격과 출신 배경을 가지고 창피를 준다.심지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남들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기 까지 하면서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는데 그런 압력은 교실 안에서 전염병처럼 증가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숙제로 무슨 초대장 같은 걸 써오는게 있었다.담임 선생님은 나보고 나와서 읽어보라고 했다...'몇 월 몇 일 내 생일인데...친구들와 와서 배불리 먹자..' 뭐 이런 내용이었다.마지막 문장이 문제였다.아이들 어휘에 '배불리 먹자'가 뭐 크게 이상한 건 아닌 듯 했다.그런데 선생님은 뒤로 넘어갔다.교실이 떠나갈 듯 크게 웃으며 그게 뭐냐는 식으로 빈정거렸다.가만히 있던 반 아이들도 왕개구리 따라 웃던 동네 개구리 마냥 책상을 치면서 넘어갔다.진짜 무지하게 쪽팔렸다.너무 쑥스러워서 얼굴이 완전 홍당무가 되었다.나는 그 길로 복도 끝으로 달려가 쓰레기 통에 그 숙제를 던져버렸다.....나의 돌발적인 행동은 또다른 보복을 불러왔다.흔히 말하는 싸대기 몇 대 맞으며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냐'는 날카로운 충고까지 들었다.다음 날 부모님 소환....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맞았던게 문제가 아니라 쪽팔렸던게 문제였다.왜 선생님은 '어..잘썻다.그런데 '배불리 먹자'는 좀 예쁜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허튼 소리,얕보는 제스처,무시하는 시선과 바보 같은 농담은 과거 학생들을 길들이는 수단이었던 꿀밤먹이기나 회초리질보다 고통이 덜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부당하고 만성적으로 악의적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준다.

사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공감가는 부분은 교사들의 이상한 권리에 대한 부분이었다.저자의 말을 먼저 보자.

부모형제,친구들,교사들의 도움으로 삶의 평가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지에 대한 철학을 세우는 시기인 6-10세 사이에,아이들은 자기들과 똑같이 분별없고 미숙하게 떠들어대고 자신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자각이 결여된 교사들을 만나게 된다.교사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러는 것인가?

폐쇄된 학교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노력 없이 과거에 배운 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만 반복했다.신문도 안 보면서,동료교사끼리 동네 아줌마 수준링?못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다.(책 후기에 나오는 명예 퇴직한 한국의 선생님 회고담 인용)

초등학교 때 일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중학교 때 국사 선생님은 예뻣다.27살쯤 되었는데 짖궂은 놈들은 그녀의 치마 속을 늘 궁금해 했다.하여간 예쁘고 인기 많았다.그런데 그녀는 내게 안좋은 쪽으로 기억되고 있다.국사 수업 중 생긴 일 때문이다.수업하다 말고 그녀가 니체와 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다.어쨋든 젊고 예쁜 그녀가 한 말은 정확히 기억난다. "니체 알지? 유명한 철학자면서 '초인'이라는 걸 이야기 했던 사람이야.일종의 천재지.그 사람이 말이지.'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했어.이게 무슨 오만한 말이니? 천재면 뭐해.그런 천재도 자기 잘난 맛에 '신은 죽었다'는 헛소리나 하고.아마 지금쯤 지옥에서 벌벌 떨고 있겠지....또 너네들 석가모니 부처 알지? 그 사람도 오만해.갓 태어나서 처음 한 말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그러니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낫다.다른 것들은 나 내 발 아래다.'이런 말이야.어떻게 간난아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놔두더라도 ..얼마나 오만하냐 인간인 주제에..'

예쁜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다.내가 니체를 아는 것도 부처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저건 아닌 것 같은데..'신은 죽었다''천상천하유아독존'에 저런  뜻 말고 다른 깊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아...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여쁜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그건 상관없다치자. 예쁘고 인기많은 그녀의 철학적 빈곤함과 편협함이라니.....지금 만나면 머리통을 받아 버리고 싶다.'이 무식한 선생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오래 전 기억인데 아직 생생한건 그 선생의 거지같은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햇던 상황 때문일 것이다.내가 만약 '선생님 그건 아닌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뻔하다.'니가 선생이야.니가 그렇게 잘났어.공부 좀 하다고 선생을 우습게 아네.' 그리고 싸대기...인신공격적인 모욕과 조롱,이어서 담임에게 보고...담임에게 보복....학교에서 누가 감히 선생에게 대든단 말인가? 대들 수 있다.대들면 열나 두드려 맞고 찍혀서 두고 두고 씹히고 부모님 소환당할 각오는 해야된다.선생에게 게기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이유는 단 한가지.' 내 아이가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삼전도의 굴욕인가? 청나라에 볼모 보내게.) 괜히 시끄럽게 해서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봐 보고도 못 본척하고 미워도 돈찔러주고 싫어도 오냐오냐 한다.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그러셨을 것이고 또 이 땅의 수 백 만명의 부모들이 그럴 것이다.

선생님 이야기를 하다보니..뭐가 그리 떠오르는게 많은지 좀 두서가 없어진다.기억들이 서로 앞다투어 자기 이야기를 쓰라고 머릿 속에서 쟁쟁거린다.

마지막은 좀 통쾌한 이야기로 막을 내리자.

아기가 태어나고 한 달간 도우미 아줌마를 두었다.그런데 이 아줌마 또 -좋은 의미에서 -독특하다.작지만 뭔가 포스가 느껴지는 분이었다.이 아줌마가 애가 세명이다.그러니 초등학교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봤다는 건 미루어 알 수 있다.

둘째 딸이 어느 날 학교에서 방석인가 뭔가를 들고 왔다.세탁해서 학교 가져오라는 것이었다.그런데 다음날 아기가 내피를 길에서 잃어 버린 것이다.선생님은 그 때 부터 아이를 채근했다.'칠칠치 못하게 그런 것도 못챙기냐'는 식이다.한 번 그러고 말면될 걸..수업 시간에 아이가 좀 버벅 거리면 또 그 이야기를 꺼내서 아이를 주눅들게 했다.아줌마가 학부모회의에 갔다.아줌마 모시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지고 가셨다.다른 학부모들이 흘깃 흘깃 아줌자를 쳐다봤다.회의가 끝나고 담임 선생이랑 면담을 했다.

아줌마)(침착하게)얘가 칠칠 맞아서 선생님이 고생하지지요. 선생)아니에요..**이 공부도 잘하고 착실해요.

아줌마)지난 번에 방석도 흘리고 다녀서 선생님 속 썩여드렸을텐데..선생)아니에요.아이들이 그맘 때는 다 그렇죠뭐,

아줌마)그 방석 어떤 걸로 원하세요.더 큰 크고 세걸로 제가 다시 사놓을께요...선생)그럴실 필요 없어요.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구요...

아줌마)..예..그래요.(싸늘하게)그럼 선생님 저랑 약속한가지해요. 선생) 예?.....       

아줌마)다시는 아이에게 그 방석 가지고 왈가왈부 하지 마세요. 선생) .....

이 아줌자의 지론은 그렇다.선생과 싸우지 않고 피해가려면 처음부터 그?해달라는데로 해라.그게 아니라 도저히 이대로는 안돼겠다 싶어 싸우기로 했으면 반드시 이겨라.

아줌마의 첫째딸 선생은 아이가 반장이어서 은근히 뭔가를 요구했다고 한다.'옆반 반장은 교감 선생이랑 해서 회식을 했다는군요.이번 달에 소풍이 있는데.... 옆반에서는...우리도 그렇게 해야하는데 등등' 그런데 아줌마가 그닥 반응하지 않았나 보다.아이에게 은근한 압박이 들어왔다.아줌마 분노하여 학교로 향했다.선생왈 '아이 서울대 보내려면 이래 저래 학부모님들이 많이 지원해주고 그러셔야해요.' 선생님 상대를 잘못만난거다. 아줌마가 그랬다. '아...고작 서울대에요.그정도 하면 우리 아이 하버드정도는 보내 주실지 알았는데..그런거 하면서까지 아이를 서울대 보내고 싶지 않네요.아이야...당장 자퇴를 시켜도 돼고 검정고시를 준비시켜도 돼요.공부 잘해봐야 다들 별것 없더군요.전 공부에만 연연해 하지 않아요....제가 아이를 자퇴시킬까요? 대신 우리 아이 자퇴시키면 선생님은 편안하게 남은 교직생활 하실꺼 같으세요? "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도우미 아줌마를 만나도 한 성질하는- 나같은- 사람을 만난다.^^

내가 아는 어떤 동료 와이프는 이렇게 말한다.'말 안듣고 속만 썩이는 지 자식들 맡아주는데 당연히 1년에 한 두번 얼굴 디밀고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이 언니 나이가 나보다 어리다.) 무슨 교육 철학이 있어서 선생하는 것 같지 않다.요즘 임용고시 보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교육적 가치보다 '철밥통'때문에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생님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말 안듣는 놈들과 하루 왠종일 붙어 있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아마 마약 수사하려고 일주일씩 거지처럼 잠복하는 형사들보다 힘들꺼 같고 농사지어도 손해만 봐서 가슴이 시커먼 농부들보다 힘들것 같다.그런 선생님들께는 '사직'이라는 좋은 제도가 열려 있다....선생님들 고생하시는 것 안다....그런데 나이가 들면 세상에 쉬운 일 없다는 것 정도도 알아야 한다.

보복이 두려운 사족) 직능단체 전체를 도매급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야죠.일부 교사들 이야기고 제가 기억하는 나쁜 교사들 이야깁니다.알라딘에도 교사분들이 많으니 그 분들을 적으로 삼겠다는게 아닌 것도 밝혀야죠.전 그분들을 사랑해요.!! ......(제길 알라딘을 다시 접어야하나..이런 내면의 사전검열을 하고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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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14 16:36   좋아요 0 | URL
말없이 추천누르고 가시는 분들이 님의 마음을 알아주십니다. 잘 보았어요. 그 도우미 아주머니 한 카리스마 하십니다. 멋져요!

호랑녀 2006-11-14 22:44   좋아요 0 | URL
오늘 글들은... 댓글수보다 추천 수가 엄청 많군요 ^^
도우미 아주머니 정말 멋지네요.

드팀전 2006-11-16 09:3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안녕하세요.수능일 아침이라 춥네요.회사 나와서 점퍼를 하나 더 입었습니다.마치 눈사람 같습니다.제가 그닥 추위를 타는 편은 아닌데 11월의 이런 사르르한 추위는 좀 약합니다.몸살 올 때 느끼는 그런 차가움이에요.
호랑녀님>5개 넘으면 추천수 많은거죠.제 기분으로도 ^^ 좀 분석적이고 논리적이고 얍쌀한 리뷰를 써야돼는데 안타깝군요.그냥 그 때 그 때 달라요..락 가수가 트로트도 불러줘야 재미있잖아요.제 리뷰처럼 제 필체도 사실 여러가지랍니다.자판으로 치는 건 늘 똑같지만.어떨 때는 제가 다중인격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요즘은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지요. 김원장님이 다시 부를까봐 겁나서 ^^

코마개 2006-11-21 17:32   좋아요 0 | URL
속이 후련하려고 합니다. 저는 '선생님'소리만 들으면 갑자기 속에서 뭔가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어 오릅니다.

글샘 2006-11-23 10:23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교사 혐오자입니다. 그래서 교사가 된 것이고요. 저런 인간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게만 할 순 없다는 오기가 저를 사범대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저도 크게 다르지 않게 되더군요. 그것이 저의 문제, 교사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족이 없었으면 ㅋㅋ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어요.
강쥐님... 저도 고딩때 샘들 보기 싫어서 홈커밍데이같을 때 안 간답니다.
교사도 철밥통일 시절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곧 계약직으로 바뀌고, 방학때 월급 없고, 맨날 평가 받고, 세빠지게 일해야 할 시절이 오겠지요. 교육 시장이 개방되고 나면 공교육은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무너질 테니까요...

별빛수 2007-02-27 19:19   좋아요 0 | URL
학교독서모임 도서로 읽기로 한 책입니다. 더러는 반성하며 더러는 분노할 것이 뻔하지만...오늘보다 나은 교육하기를 찾는 교사들이 현장에 있음을 기억해 주시길...대통령을 비판하듯 정부를 비판하듯...어쩌다 온통 비판뿐인 세상...서로 의지하며 살아도 힘든데...때론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 마음 편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를 넘어선 인정하기가 되기 위해...저도 되도록 학부모의 입장이 되어 책을 읽어볼까 합니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내가 겪은 6.25 전쟁
김원일 외 글, 박도 사진편집 / 눈빛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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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언제나 대규모의 학살을 동반한다.<나를 울린 한국 전쟁 100장면>에서 눈에 밟히는 사진들도 학살의 장면을 담은 것과 영문도 모르는 채  전쟁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사진이다.

1950년 7월 대전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는 학살 직전의 한 장의 사진.삶과 죽음이 종잇장 한 장 사이였던 아비규환의 시대를 보여 준다.사진은 사선 구도를 하고 있다.사진의 배경이 되는 위쪽에는 폭 2m 를 넘어 보이는 구덩이가 있다.그리고 그 안에는 몸의 온기도 빠져 나가지 않았을 주검들이 빼곡히 누워있다.다리가 서로 얽혀 있기도 하고 주검들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있기도 하다.그리고 불과 몇 초 후 자신의 모습이 될 그 장면들을 바라보고 있는사람들이 구덩이 위에 있다. 배를 바닥에 대고 서로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굴비처럼 엮여있다.사진에는 4명의 사형수가 보인다.머릴를 짧게 잘라서인지 어려보인다.20살을 조금 넘었음직하다.죽음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사형수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그는 엷은 미소를 띄고 있는 것 같다.아니면 죽음 앞에서도 끊을 수 없었던 순간적인 호기심일지도 모른다.그의 얼굴에는 살려달라는 마지막 염원이 담겨있다.그 젊은이는 그렇게 세상에 마지막 모습을 남겼다.그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50년 전의 한국전쟁에서 죽음의 사자는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했다.그가 펼친 죽음의 망토는 한반도 전역을 뒤덮었다.어느 때 보다도 잔혹하게 그의 칼날은 대지를 갈랐으며 그 때 마다 이 땅에서는 수 천 수 만의 울음이 핏물처럼 터져나왔다.죽음의 사자는 여러 모습으로 다가왔다.미국의 폭격으로,국군의 소총소리로,북한군의 탱크소리로, 또는 완장을 찬 이웃 아저씨의 모습으로.... 소설가 전상국은 그의 글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던 죽음의 공포를 이렇게 표현한다 .

"무서웠다.밤은 밤대로,낮은 낮대로,낯선 사람은 낯설어서,아는 사람은 알기 때문에 무서웠다."

한국 전쟁의 공포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거대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된다.이 정신적 외상은 '자기와 직계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낳게 한다.이 공포의 '원기억'은 전쟁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사회적으로는 우리 사회를 '가족 국가' 로 만들어 버려서 '시민사회'의 공간을 앗아가 버린다.또한 사람들 마음 속의 증오와 생존본능은 치환되어 '사람들 사이의 정글'을 만들어 버렸다.

1951년 4월 대구에서 찍었던 석장의 사진은 학살 장면의 슬라이드다. 북한군 부역자들에 대한 국군의 처형 장면을 담고 있다. 10명이 안되는 시골 농사꾼 같은 사람들이 서 있다.그 한쪽 옆에 책임자인 듯 한 사람이 철모를 쓰고 웃고 있다.아마 자신의 업적으로 남게될 기념 촬영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반면 옆에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침울하다.자신들이 어떻게 될 까 하는 염려와 '설마' 하는 감정이 뒤섞여 있다.그 들 손에는 삽이 들려져 있다.그들은 구덩이를 팠다.그들 중 대다수는 이 구덩이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또는 본능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음 사진은 그들이 빼곡히 구덩이에 들어가 있다.고개를 땅에 묻고 있다.뒤에는 죽음의 사신들이 준비를 끝냈다.대장인 듯 한 사람이 구덩이 쪽을 바라보면서 뭐라고 손짓을 한다.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너희들은 빨갱이를 도와서 부역을 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판 무덤에서 죽는다.우리를 원망하지는 말아라.빨갱이들에게는 총알도 아깝지만...너희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거다."....그리고 다음 장면은 서양 회화의 가장 유명한 학살 그림의 구도와 닮았다.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이나 게르니카의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 속 사람들이 서있던 반면 실제의 피학살자들은 구덩이에 처박혀 있다.그래서 더욱 처참하다.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내가 저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피학살자였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상상해봤다.뒤에서는 대장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한다.내 옆에는 함께 농사짓고 밥 나누어 먹도 이웃 친구가 나와 같은 모습을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내 눈 앞에는 내가 파 놓은 구덩이의 흙더미 벽이 있다.한 30초 쯤 지나면 총탄의 괴성과 고통이 이 구덩이를 덮을 것이다.만약 내가 그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어떤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까? 비록 나는 상상이지만 이 땅에서는 50년전에 그런 기억을 담고 사라져간 영혼들이 수백만이다.아니 어떤 이들은 자신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음의 사자가 날린 칼날에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학살의 장면들은 주로 국가 권력에 의한 학살 사진들이다.물론 어떤 사진들은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원래 전통적 의미의 학살은 국가 권력이나 권력에 힘입은 자들이 비전투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살해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 전쟁 당시의 학살은 나치와 같이 조직화된 유대인학살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전쟁에서의 학살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그중 가장 잔인한 것이 '보복성 학살'이다.특히 국가 권력의 부실성으로 인해 민간에서의 학살이 쉽게 자행된 한국 전쟁의 경우 그 잔인성과 피해 범위가 대단히 컸다.남한과 북한은 어찌되었건 전쟁을 통해 국가 건설은 완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념 유지에 방해가 되거나 또는 부정적 결과를 미칠 요소들은 모두 제거되길 원했다.결국 국가 권력은 학살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물론 권력의 개입보다 양 국민들 사이의 사적 보복심에 의해 자행된 경우가 훨씬 많지만 그러한 학살 양상을 방기한 것은 국가 권력이다.

김동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시의 학살은 국가 탄생의 비밀이다.국가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려 한다.그러나 출생은 대체로 일생을 지배한다.학살은 과거의 일이지만 학살을 저지른 국가는 그 이후의 정치 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더듬는 사진들 중에서도 나는 아기들 사진에 눈이 머문다.아빠가 되고 나서 생긴 변화중에 하나이다.길거리를 가다가 미아찾기 사진이 보이면 한번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신문에서 어른들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기사를 보면 눈물이 핑돈다.좀 더 밝은 쪽으로도 마찬가지다.인터넷을 오고가며 만나는 예쁜 아기 사진도 예전보다 훨씬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다.태어난 지 백일 조금 지난 우리 아기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이다.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에서도 나는 아기들 사진을 더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인천의 어떤 판자집 건물 앞에서 울고 있는 두세살쯤 된 단발머리 여자아이.판자로된 건물의 황량함이 울음의 배경이 되고 있어 더욱 처연하다.아이는 하얀 무명저고리를 입고 있다.아랫도리는 어디다 잃어버렸나 보다.아이는 길 밖의 먼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 아이의 입을 보면 울면서도 엄마를 부르고 있는게 분명하다. 사진을 보면서 자꾸 아이의 울음소리와 환청이 들려서 사진을 오래처다보기 힘들었다.그 옆에 있는 사진 역시 마찬가지였다.돌을 겨우 지난 아이같아 보인다.발가벗고 길바닥에 앉아서 울고 있다.말라버린 강변에 앉아 있는 듯 하다.빈 밥그릇에 수저가 외롭다. 이 두 사진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아기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마치 연말에 받는 크리스마스 음악 카드처럼 책을 펼치면 울음소리가 진동한다.배고파서 힘이 쭉빠진 서럽고 긴 울음 소리다.그 다음 장에는 폭격을 맞아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아기의 사진과 아기를 살펴 달라고 군인들을 붙잡아 세운 아버지의 사진이 있다.나는 내 아기가 저 들것에 누워 있는 아기라면...하는 생각을 하며 몸서리 쳤다.다음 사진은 찢어질 듯 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폭격으로 엄마가 죽었다.폭격을 피해 길가의 덩쿨 속으로 피했지만 목숨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다.누나인 듯 한 아이는 엄마의 죽음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돌 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전쟁을 갈라 버릴 듯 날카롭게 울고 있다. 주검이 된 엄마의 버선 신은 발이 덩쿨 속에서 보인다.버선 위로 드러난 발목은 아직 아기들을 두고 가기 힘들다고 말하는 듯 하다.엄마는 죽기 직전까지 이 아이를 죽음의 사신들로 부터 지키기 위해 몸으로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슬프다.

 북핵문제로 한반도가 시끄럽다.조금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모습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북핵 초기에 어떤 신문들은 국민들의 불안을 더욱 부추겼다.국민들은 오히려 관망하는 태도인데 비해 수탉이 홰치듯이 여기저시 전쟁의 불안감을 조성했다.마치 '여차 하면 한번 붙을 수 도 있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전쟁은 어쩔수 없이 죽음이 발생하는 공간일 뿐이다.어차피 누군가는 죽는 것이 전쟁이기 때문에 조금 죽어나가도 할 수 없다는 식이다.모르겠다.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지하 벙커로 피할 능력도 있고 미국으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인지...나는- 그리고 나같은 많은 사람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나와 내 가족은 모든 폭력과 죽음을 우리들의 몸으로 받아 낼수 밖에 없다.50여년 전에 사진이 실렸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랬듯이.그래서 나는 어떤 이유로든- 크라우비츠의 말을 인용하며 정치의 연장 어쩌구 하는 것도 내겐 개소리다-전쟁에 반대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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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04 08: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 제게는 이른 아침부터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님의 마음이 너무 잘 와 닿네요. 전쟁에 대한 주제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야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

마늘빵 2006-11-04 08:45   좋아요 0 | URL
한 표 행사하고 갑니다.

마노아 2006-11-04 08:47   좋아요 0 | URL
책, 그 이상의 리뷰였어요. 잘 보았습니다. ^^

달팽이 2006-11-04 22:03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