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7년 1~2월 - 통권 92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녹색평론> 을 보다가 아는  이름을 발견했다.지난해 말 부산에 있는 '공간초록'에서  ' 생명의 대안은 없다'  제 3차 전국토론회가 있었다.국제신문의 환경전문기자인 이해창 기자가 그날 모임을 정리한 글을 썻다.('자연의 법 인간의 법') 내용 중에 토론자로 참가한 선배의 이름을 보고 오랜만에 전화를 돌렸다.여차 저차 해서 그래서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하니 무척 반가와했다.일상적인 안부 전화였음에도 전화를 하게된 루트가 <녹색평론>때문이었음이 그에게도 신선했던 듯 하다. 각자 사는 공간에서 지킬 건 지키며 살자는 덕담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번호에서 나의 무심한 뒷통수를 한대 내리친 것은 김곰치의 "나는 아프다" 라는 글이다.르포타주 형식의 글이었다.작가는 부산에 있는 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에 발을 들여놓으며 겪은 일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원폭피해자 노인은 자신의 이름이 어느 지면에도 등장하면 안된다고 여러번 당부했다고 한다.현재 일본 정부가 그에 대한 보상여부를 조사하고 있는데 괜히 여기저기 이름올려서 그들에게 않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피해자가 오히려 소심한 상황이 논리적으로 보면 어불성설이다.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모습은 너무나 현실정합적이다.작가가 원폭피해자 협회를 찾은 것은 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2005년 5월 세상을 떠난  원폭피해 2세 김형율이 바로 그 사람이다.김형율의 아버지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 1세대이다.김형율은 태어나면서 부터 온갖 병치레에 시달렸다.처음에는 그것이 그저 몸이 약해서 그런 것이겠거나 생각했다.그러다 몇 년전부터 자신의 병치레가 원폭피해와 관련이 있다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원폭2세 피해자들을 수소문하고 원폭 피해를 알리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고 가면서 일했다.그러다가 2005년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만다.김곰치는 그의 죽음을 따라가면서 원폭 피해자 1세와 원폭 피해자 2세 사이의 내부적 갈등이 있음을 공개한다.현재 일본에서도 원폭 피해 2세대의 유전적 질환문제는 공식적으로 인정된바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물론 정황증거와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는 있지만 말이다.원폭 1세대와 그의 자녀들은 김형율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듯 하다.현재 1세대들도 제대로 치료받고 보상해주니 마니 하고 실강이를 하고 있는 마당에 확실치도 않은 2세대 문제를 가지고 너무 나댄다는 입장이었다.정상적 생활을 하는 원폭 1세대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원폭 1세대와 원폭 2세대의 갈등,그리고  아프지 않은 원폭 2세대들이 피폭자 가정임을 숨기는 현실....

김형율의 주장을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에 대한,생명에 대한,전쟁과 평화에 대한 인식의 차,무엇보다 절박감의 차이.중요한 것은 '원폭1세,2세'가 아니라 '1세 환우,2세 환우'여야 한다고 김형율 씨는 언제나 고집했었다."

김형율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현재 원폭문제를 둘러싼 한국내의 갈등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왜 그렇게 된 것일까? 일본정부의 보상을 놓고 왜 모든 피해자들이 서로 서로 견제하고 눈치주고 입을 틀어막게 된 것일까?

대한적십자사의 백옥숙씨는 말한다.

"한국 정부가 우리 돈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원폭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해야 가장 바르고 이상적임은 틀림없다......그게 되지 않으니까 피폭자들이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거고,피폭자 보인 스스로가 그러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고 서글픈 현실이에요."...작가가 덧붙인다...서글픈 구걸이라고 한다면 ,가른 누구도 아닌 한국정부가 구걸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2005년 부산에 나는 살고 있었고 '나는 아프다'라고 외로운 외침을 부르짖던 김형율은 평생 아프기만 하다가 죽었다.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다.나는 그의 죽음을 이제서야 알았고 그의 목소리를 이제서야 들었다.나는 또 부채감을 느낀다.

이외에도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영남대 이승렬교수의 <근대문학의 종언,그후 또는 그 이전에 대하여>,인천 도시생태한경연구소장 박병삼의 <내일을 살처분하는 획일주의> ,변혜진의 <한미 FTA 의약품 협상,이윤이냐 생명이냐>등을 즐겁게 읽었다.

우석훈은 <부동산 파동과 노무현레짐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에서는  개발주의-지역토호-건설업체의 삼두체제가 지역과 농업을 말살하고 '국토생태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리고 있다.

책 첫머리에 있는 박승옥의 <왜 자립경제인가-박현채를 다시 읽으며>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난제들이 숨어져있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저자는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을 기본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그의 대척점으로 원시농업공동체의 가치를 제시한다.이런 극명한 선/악 구도와 강한 어법은 생태주의를 종교적 도그마에 빠뜨릴 듯 하다.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자면 '생태주의의 파시즘' 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절박하게 자립경제를 추구해야 한다.우리 자신과 자식들을 굶겨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농업사회,자립과 자치의 농업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모든 사람이 농민이 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지금은 농민이 '멸종 직전'이기에 먼저 깨어있는 사람들부터 농민으로 전환하는 일이야말로 자립경제와 자치공동체 복원의 지름길인 것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메트릭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한다. "인간과 바이러스만이 다른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존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또 한가지 덧붙여 생각해보게 된다.워쇼스키형제가 만든 영화<매트릭스>의 내러티브의 틀이 성경과 신화의 담론을 기본 축으로 한다는 것...그리고 질문한다.

생태주의가 '복음 전파'가 되지 않으려면 어떤 고민이 이어져야 할 것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2-26 22:46   좋아요 0 | URL
지금의 여수참사도 그러하고, 유해물질을 다루는 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본국에 돌아간 뒤 발병을 하거나, 그 2세들이 또다른 고통을 겪을 것이 예상될 때, 지금 한국정부는 뭘 준비하고 있는 걸까. 한국사람들은 늘상 일본사람들이 전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자기 나라 경제발전 얘기하면서 그 경제발전과정에서 착취당하고 피해를 본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돈 벌고 갔으니, 돈 벌 기회를 가졌으니 더 잘 된 거 아니냐고 하는게, 꼭 위안부 할머니나 징용당한 이들에게 일본 극우파들이 하는 말과 무엇 다른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드팀전 2007-02-27 09:53   좋아요 0 | URL
궁극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주의'에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기때문이겠지요.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는 시절인 듯 합니다.사람은 단지 투입되는 노동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계의 한 부품처럼 취급되는 듯 합니다.자본가들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자본가도 아니고 그냥 저냥 붙어먹고 사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에 익숙해져있다는게 가끔 벽처럼 느껴집니다...자기들이 생각을 멈춰버리는 순간 세상은 최악으로 향해간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자성이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적 가치 - 세계의 지식인 16인과 하버드생의 대화
브라이언 파머 지음, 신기섭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오늘의 세계적 가치>는- 한국 어머니들의 꿈-하버드 대학의 '개인의 선택과 전 지구적 변화'라는 강좌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책의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강의는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그렇기 때문에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뷰형식'의 사회과학서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진보적 지식인으로 국내에도 유명한 노엄 촘스키,하워드 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종교와 윤리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면 하비 콕스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클린턴 행정부를 떠난 로버트 라이시도 얼핏 떠오른다.그 외에도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경제학자 줄리엣 쇼어,법학자 라니 구니어,외교관 스와니 헌트,의사인 제니퍼 리닝과 폴 파머.16명의 등장인물 면면이 한약방 약재만큼이나 다양하다.책을 꾸리는 과정에서 적절한 배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런 안배 덕택에 독자는 세상이라는 '코끼리'를 비록 어두운 눈이지만 더듬거리며 다양한 각도에서 만져 볼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16명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또 몇 몇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는 약간 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그럼에도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이다.또 한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들이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면서도 구체적인 현실세계에 산다.결코 들뢰즈니 푸코니 지첵이니 하면서 '책 세상의 군주'로 살지 않는다.(아마 그들의 공부가 그런 철학에 미치치 못했거나 ,배움의 극에 다다르지도 못했는데도  성급하게 나서서 그럴 것이다.그러나 나는  발효를 기다리다 관뚜껑 열어야 확인할 수 있는 지식보다 이런 '못미침'-그런데 과연 누가 그들을 어느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랴?-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나 역시 공부가 부족해서....)

<오늘의 세계적 가치>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다양하다.미국의 이라크 침공,코소보 등 국제 분쟁지역에서 미국의 역할과 문제점,신자유주의,소비자본주의의 폐해,페미니즘의 성과...등등.여러 다양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 강의의 핵심을 한 줄로 설명한다.

"우리의 풍요를 보장해주는 불평등한 대우에 주목하자."

다양한 주제에 대한 좋은 질문과 답변이 많아서 한 두가지만 이야기 하긴 아쉽다.신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도 그중 하나이다.<세속도시>로 유명해진 종교학자 하비콕스는 이렇게 답변한다.

저는 시장이 단지 은유로서 신이라고 제시하는게 아닙니다.시장이 이 세상 많은 곳에서 믿음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현상학적으로 그동안 종교가 가장 흔하게 하던 걸 지금 시장이 하고 있습니다.(시장은)종교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그러니 사실은 종교들 사이의 다툼인 겁니다.이건 신들의 전투입니다.

하비 콕스는 자신이 반시장주의자가 아님을 말한다.

시장은 어떤 문화 또는 사회에도 필수적인 제도입니다.여기서 제가 비판하는 건,시장이 전체 사회의 우월적인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는 기구,곧 신으로서의 시장으로 부상하는 것입니다...대체로 종교적 제도들은 그저 이 거대한 세력을 따라가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 삶과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지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그렇다.기업화 되어가는 한국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별로 말을 해주지 않는다.그들이 이미 '종교자본'으로 코묻은 돈 꼬박 꼬박 일요일마다 걷고 있으니 할 말도 없을 게다.불교도 마찬가지다.이미 딴 세상가신 선사들의 글은 모두 물질화된 삶을 버려라..라고 이야기하는데 어제도 오늘도 불전함에는 돈이 수북이 쌓인다.절에 가면 '기와불사'하라고 꼬시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은지...최소한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친자본주의적이고 최소한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일반 사회보다 종교가 먼저 자본의 신을 받아들인 듯 하다.

<과로하는 미국인>이라는 책을 쓴 경제학자 줄리엣 쇼어,그녀는 실증적인 조사를 통해 2차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노동시간이 점증적으로 늘어났음을 입증했다.(아무리 그래봐야 한국인들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줄리엣 쇼어는 '일과 지출'모형을 통해 노동과 여가 그리고 소비의 상관관계를 파악한다.

돈과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도는 그들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노동)에 맞춰져간다는 겁니다...체제는 여가시간을 주지 않고 대신 돈을 줬습니다.사람들은 돈을 쓰고 이런 지출에 길들여졌습니다.

새로운 소비주의 시대...돈이 점점 더 사람들의 기초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쪽에서 사치재 소비와 사회적 지위 유지를 위한 소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소비를 선호한다는 표준적인 주장을 뒤집어 엎은 것이다.쇼어의 말을 정리하면 결국 여가대신 돈을 주고 그 돈으로 소비를 가속하시켜 기업을 움직인다는 것이다.그녀는 이 과정에 TV와 매체들의 광고가 이를 부추기는 성장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말은 이어진다.

텔레비전과 그 밖의 매체를 더 많이 접할 수록 더 소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이 아이들은) 돈과 물건,유명 상표에 더 많이 신경 쓸 소지가 크고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이 얼마나 더 소유하고 있는지 신경쓸 가능성도 큽니다.

쇼어는 이런 질문에 대해..

잠깐만요.사람들이 소비를 줄이면 어떻게 건강한 경제를 유지하죠?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내일 신용카드를 모두 잘라버리고 더 온건한 소비지출을 하면서 살기로 결심하면....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거라고 보는건 비현실적입니다.....(결국) 노동시간을 점차 줄이고 노동시장에서 속도를 낮추게 되면 실제로 혼란이나 실업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다른 형태의 경제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훨씬 거대한 경제체제 자체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일종의 '일자리 나누기' 프로그램같은 형태로 보인다.우리나라 기업의 경우 노동시간이 줄어든다고 걱정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지는 않는다.비용이 많이 발생하니까...(물론 정규직의 경우 줄어드는 노동시간에 대한 임금 희생도 어느정도 감안해야한다)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그녀 덕분에 앞으로는 '세계화' 또는 '반세계화' 라는 말을 쓰지 않을 듯 하다.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규격을 모두에 적용하는 과자 절단기 모형입니다....신자유주의 또는 프랑스인들이 부르는 대로 하면 '야만적인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운동에서 세계화라는 단어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의도적인 행위입니다.이는 전 세계적인 경제정책에 대응하는 것이지 세계화에 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문제는 세계적이라는 사실이 아니고 정책입니다.그리고 이 정책을 전 세계에 강요한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라니 구니어는 인종,계급,빈부 차이가 사회적 계급재생산과 어떻게 관련있는지 30년이 넘는 대학 입학생 성적 분석과 사회진출 동향을 조사한다.그녀는 피터 색스의 볼보효과를 입증하는데 ..결국 '어떤 학생의 점수를 안다면 그 학생의 대학 1학년 성적을 예측하는 것보다는 그 학생 부모의 재산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부가 교육으로 재생산 되는 과정을 입증하는 것이다.라니 구니아는 오스틴 텍사스 대학의 '10% 입학제도'를 긍정적으로 본다.쉽게 말하면 고교간 학력 격차를 무시하는 것이다.대신 각 학교의 상위10%에게 입학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계층,빈부차는 출발 선에서의 차이를 만들기 때문이다.우리나라에서 암암리에 적용하는 고교등급화와는 다른 방향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갖기도 한다.발칸 분쟁에 대한 미국의 폭격에 대해 하워드 진 같은 인물은 인도주의 개입을 인정하지만 미국은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는 현실을 드러 비판적이다.반면 통제불가능한 국제 분쟁에 인도주의적 개입을 지지하느 사람도 있다.법학자 마시 미노,외교관 스와니 헌트 같은 경우이다.노동문제와 관련에 미국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즉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도 로버트 라이시와 줄리엣 쇼어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라이시는 현실적으로 그것이 노동자들 간의 불평등을 해소해주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해 쓰면서 꼭 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현장에 서 느끼는 실패감 또는 환멸등에 대한 이야기였다.이건 진보의 실패라며 부둥켜 안은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또는 인간이 이기적 동물이며 경제문제에 국가가 관여하면 북한된다고 믿는 '시장신'을 섬기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노암촘스키(언어학자)>60년대를 회상해보세요.무엇이 없었는가.여성운동이 없었습니다.환경운동도 그렇고요.사실상 반전 운동도 없었습니다.이 모두가 전쟁을 여러번 겪은 끝에 60년대 말에 나타납니다.제 3세계 연대운동도 지구적 정의실현운동도 없었습니다.우리 삶의 일부인 이 모든게 그냥 없었습니다.이런 변화는 지난 40년 동안 나타났는데,사람들이 환멸에 빠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난 포기했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때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는게 확실합니다.

로버트 라이시(정치학자)>..미시경제학이 생략한 것은,우리는 머릿속에 공통 선을 향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소망만 지닌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해 바람직한 것,세계를 위해 바람직한 것에 관한 이상도 지니고 있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언론인)> 문제가 너무나 거대해서 그냥 집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봐야겠다는 느낌에 압도당할 때 사람들은 시급성을 잃게 됩니다.그래서 작은 것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개인적으로 시작하는 거죠.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이런 거대한 쟁점들과 이 모든 사적인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그치는 건 아닙니다.이걸 입구로 이용해야하고 이어서 이런 부정행위가 가능하게 해주는 정책과 권력 체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제니퍼 리닝(의사)>여러분의 모든 상호작용 속에 불편함을 날카롭게 품는 것이 제가 보이엔 지금 이 세상 내 존재의 핵심입니다......(하버드생)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을 위해 치른 모든 희생과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 그동안 한 모든 일은,이 자리에 오는게 그리고 여기서 성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그 노력을 깊이 존경합니다만,인생의 마지막에 여러분이 "이 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폴파머(의사)> 제가 불가향력에 압도당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하던가요?저는 완전히 압도당했음을 알게 됐습니다....그러나 우리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이 일은 중단 될 수 없습니다...아무리 상상을 해보아도 저는 홀로 일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우리 가운데 한 명이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느낄 때,그렇게 느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팀 내부에 있게 마련입니다.제 동료들과 저는 서로를 이렇게 상기시킵니다...당신이 압도당했다고 느낄 때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 말입니다.그리고 당신이 봉사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결코 압도당했다고 느끼거나 절망에 빠지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 다는 것 깨닫는 것 말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7-02-19 23:50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저도 그 책을 찾아봤습니다.나온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절판이더군요.

드팀전 2007-02-20 09:13   좋아요 0 | URL
아...이 양반이 아침 부터 염장을 지르시네... 잘 나가다가...끝에가서 놀리고 있는거죠...당장 내놓으시오.^^ (아님 구할 방법을 제시하시오)
 
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중국집에 가면 언제나 깊은 고민에 빠진다.자장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이미 자장을 주문해 놓고도 잠시 후 마음을 바꿔 '아줌마..자장 대신 짬뽕으로..'를 외친다.블루오션을 개척한 일부 중국집은 그래서 짬짜면을 내놓았다.내게 진중권의 책은 짬짜면(짬뽕+자짱)이다.진중권은 시차를 두고 두 개의 면을 만든다.하나는 전공을 살린 '미학' 요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정치평론' 요리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책들이 <미학 오디세이><춤추는 죽음><현대 미학 강의>등이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폭력과 상서로움><시칠리아의 암소>등이 후자에 해당한다.'중권반점'의 강점은 자장이든 짬뽕이든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만든다는 것이다.(미학과 관련된 책들이 사전 학습이 조금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

이 책 <호모 코레아니쿠스>도 진중권이 과거에 보여준 한국사회의 분석방향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다.이 책에서 진중권이 분석대상인 한국인의  '하비투스',(아비투스) 즉 한국인의 습속이라는 것도 이미 다양한 학자들의 글을 통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결코 신선하지 않다.(이 '신선하지 않다'..는 평가는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다른 이들에겐 바다에서 막 건져낸 도다리처럼 아주 신선할 수도 있다.) 진중권은 편의상 세 개의 장으로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나눈다.근대화,전근대성,미래주의가 그 세가지 구분이다.현재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진중권의 입장은 세 시기가 혼재해 있다는 것이다.(별로 새삼스럽지 않다.)흔히들 말하는 '압축근대'가 가장 큰 원인이다.전근대성과 근대성이 발효의 시간을 갖기도 전에 뒤늦은 근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조숙한 '탈근대'가 믹서기에 든 과일마냥 쾌속으로 섞여 버린 것이다.진중권은 다른 책에서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에 반대한다고 밝혔다.(이 주장은 우리 사회의 취약한 근대성 성취를 우선하는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대로 읽힌다.) '전근대성'을 계몽하며 '근대' 산업 사회가 파생시킨 해악들과 '탈근대'가 가져다준 소수자문제,개인성의 성취문제등이 동시에 처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중권이 애써 전근대/근대/탈근대를 나누어 놓았지만 그 역시 이 세 시기 구분이 인위적인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어떤 사회나 -아무리 선진화된 사회일지라도- 이 역사적 시간은 동시대에 존재한다.진중권은 한국이 조금 더 압축된 시간 속에서-식민주의,군사주의,천민형 자본주의에 의해- '이성의 합리성'이 존재할 공간이 줄어들었음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분석한다.

<호모 코레아니쿠스>를 읽으신 분들 중 다수가 진중권의 분석이 서구의 시각,또는 외국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둔 오리엔탈리즘적 성격이 있다고 지적한다.(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진중권에게 근대성은 문명화 과정이다.전근대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사회의 변화를 분석하는 준거틀은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다.한국은 궁정적 합리성이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없었다.또한 의무교육을 통한 사회 하층 계급으로의 문명화가 정체되었다.우리가 '에티켓'이라고 부르는 '문명화'가 더딘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설명된다.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그런데 좀 의문이 남는 것도 있다.일단 비교 대상의 범주에서 조금 혼란이 있다.진중권이 말하는것은 서구의 문명화 전체이다.사실 서구라는 것이 어디까지 인지 잘 알수가 없다.미국도 서구이고 프랑스도 서구이다.스페인의 문명화 단계와 핀란드의 그것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을까? 그는 문명화를 이야기하면서 '서구의 일반성'을 적용한다.그러나 그에 대한 비교대상은 '한국의 특수성'이다.이런 비교를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다.그러나 이 비교방식은 왠지 마음에 찝찝함으로 남는다.

미래주의에 가면 진중권의 분석틀은 월토 옹의 <문자문화와 구술문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가 된다.진중권은 한국 사회를 구술문화권으로 보고 있다.구술문화가 가진 감성주의,이야기성,공동체성이 한국사회의 특징이다.그는 한국의 습속이 구술성을 디지털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한다.인터넷 게임왕국이나 토론문화에 대한 진중권의 지적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또한 진중권은 세대간의 단절 문제 역시 매체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신체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미디어가 의식을 재구조화 한다는 명제를 이용한다.여기서 세대간 갈등은 '문자문화 대 영상문화'의 갈등이다.(약간의 혼동이 있다.여기서 말하는 문자문화는 서양/한국을 나누는 근거가된 문자문화와는 다르다.) 구세대들은 시각에 고정된 문자문화인이다.반면 신세대인들은 촉각과 공감각이 활용되는 영상세대이다.맥루한이 말한 TV의 '재종족화'라는 개념이 응용된 듯 하다.'인문학의 위기'를 바라보는 진중권의 시각은 '미디어적'이다.그는 '인문학의 위기'란 다름 아닌 '디지털 실어증'이라고 말한다.사회가 문자문화에서 영상문화로 이행하는 시점에 당연히 등장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그러나 진중권은 문자문화의 중요성을 외면하지 않는다.아무리 신세대가 그림과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더라도 결국 문자를 통한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그가 우려하는 점은  신세대의 의식이 문자문화의 역사적 성취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이다.진중권은 '대학의 시장화'를 우려하고 있다.

진중권이 제안하는 한국인의 새로운 습속은 '기술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미학적 신체'이다.그의 기술문명에 대한 접근이 퇴행적이지 않다는 뜻이다.그는 엔지니어의 기술성,디자이너의 예술성,인문학자의 문자성이 하나가 된 새로운 조직이 한 사회의 산업구조를 이끌어갈 것으로 본다.이는 단지 기업조직문화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다.진중권이 말하는 새롭게 디자인된 개인이라는 것은 결국 '놀이'로 상징되는 상상력에 바탕을 둔 자율적 주체인 셈이다.

....................지루한 리뷰가 끝이 났다. 이후는 페이퍼이며 또 리뷰 후반전이기도 하다.

언젠가 같이 일하던 친구가 내게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했다.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어리둥절했다.처음 들어본 말이어서 꽤 지났는데도 아직 기억한다.아메리카(미국)에 그닥 애정을 갖지 않고 있는 나로서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결국 그 친구의 평가는 내가 '한국의 때거리'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걸 가지고 자꾸 딴지건다는 거로 정리할 수 있다.그 친구가 말한 나의 특징이란 것은 '조직보다 개인중심', '직장보다 가족중심' 그런 특징들이다.또 한가지 첨부하자면 어울렁 더울렁 노느니 혼자 노는게 낫다는 개인주의-요즘은 그걸 글루미족 이라고 하더군-... 그것이 나를 '아메리칸 스타일'로 규정한 근거다.이러한 요소를 아메리칸 스타일로 정의내릴 수 밖에 없는 너무나 '토종 한국인'인 그 친구의 어휘능력과 표현력이 아쉬울 따름이다.차라리 '유러피안 스타일'이 낫지 않았나? 그거나 그거나 매 한가지인가?

진중권의 책을 읽을 때 가장 즐거운 것은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 칠 수 있는 대목이 많다는 것이다.때때로 '대리배설'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위계를 위한 예법>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위계를 짓는 데 사용되는 원칙 중의 하나가 연령이다.....수평적 예의는 수직적 무례로 간주되고 수직적 예의는 수평적 무례를 낳는다."

술자리에 가면 흔히들 잔을 돌린다.나는 개념이 없어서 인지 술자리에 가도 그냥 옆에 있는 사람부터 따라준다.그리고 후배가 먼저 잔을 받아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그런데 회사 회식 자리가면 술잔 돌리는게 위계확인하는 장소가 된다.마치 원숭이들이 서열 정하듯이.병권을 쥔 사람이 먼저 본부장을 따라 준다.그리고 그 밑에 부장...그리고 차장...그 다음은 선배....이제 내 차례다.아..그런데 문제가 생겼다.동기가 세명이다.^^어떻게 할까?  때에 따라 다른데...주로 이런다. "야..생일 누가 빨라? ""야..사원증 입사번호 누가 빨라?" ..그 때까지 다들 술들고 기다린다.다 받으면 그 때 본부장 한 말씀 하시고 원샷...

나도 조직의 술문화에 좀 익숙해져서 따라한다.그러나 내가 대장일 때는 아무렇게나 마신다.그냥 알아서 따라먹기도 하고 일부러 무시하고 옆에 있는 후배부터 준다.그럼 그 때 그 후배들이 뭐라하느냐? " 저..00선배부터 주시지요." .."싫다.내 맘이다.그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준다.왜? " ...

술자리문화가 별개 아닌 듯 보이지만  진중권의 말처럼 수직적 위계의 강조는 수평적 무례를 낳는다.그리고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잊혀졌다 생각난 기억... 

"한국의 기업들은 말로는 창의적인 인재를 원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의 군사문화를 실천한다....한화그룹회장은 그룹의 핵심 임직원 220명에게 도보행군을 주문했다.200킬로 미터에 이르는 강행군이다....은행들의 신입 행원 연수 프로그램은 철야 행군에서부터 100킬로산악행군,해병대 극기 훈련..."

내가 대기업 다니는 회사원이 되지 않기로 마음 먹었던게 초등학교 6학년때다.뭘 알고 그런게 아니다.TV에서 신입사원 연수식을 봤는데 정말 정나미 딱 떨어졌다.똑같은 체육복 입고 펄쩍 펄쩍 뛰어 다니고 쪼그려 뛰기하고.....그럼에도 '연수를 마치고 동료애가 생기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생겨납니다.' 라고 말하는 인터뷰..초등학교 6학년 짜리 눈에도 굴종적으로 보였다.내 대학 친구 중에 하나는 S그룹에 들어갔다.그런데 나흘만에 뛰쳐 나왔다.그룹 연수 가서 뛰어다니다가 .."에이 지랄..." 이렇게 외치고 나와 버린 것이다.그 뒤 고생 좀 했지만 그래도 별로 후회하진 않았다.물론 이것도 다 경기 좋을 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요즘처럼 경기 어려울 때 그런 생각이 어디있냐고...맞는 말이가도 하다.

진중권은 뒤에 '공포'에 의존하는 한국 사회를 말한다.이 말은 박수 열번 받을 만하다.한국 사회의 첫번째 공포는 적색공포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그에 얼마나 효율적이든-이제까지 자신의 생존방식을 보장해줬던 방식을 고집하게 마련이다.....(시청앞 군복 시위대를 보고) 군복을 입은 신체는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몇십년전의 동작을 반복한다.그들의 머릿속도 몇십년전 부터 똑같은 생각을 반복할 뿐이다.....공포는 판단력을 마비시킨다.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이다......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국가의 폭력에 시달리던 그들은 이제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없는 생존의 정글이세 무차별한 시장의 폭력에 내맡겨졌다.기분 혹은 무드는 인식에 앞서는 원초적 체험.때문에 너무 강렬한 경우 그것은 이성의 작동을 연기시킬 수 있다...."

엄마들이 남들 욕하면서도 아이들을 무리하게 영어조기 교육시키고 유학보내는 이유,적성이고 뭐고를 떠나 공무원 임용시험에 지방생들을 위한 특별열차가 동원되는 이유...등등.. 모두 안전망 없는 사회의 추락에 대한 공포때문이다.

진중권의 책은 이제 약간 진부하게 느껴진다.그러나 강점은 사라지지 않는다.시원 시원한 글쓰기와 삐딱함이 주는 쾌감.그리고 조금만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자신이 겪은 체험과의 대입의 편의성....^^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7-02-12 19:07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별3개 딱 적절한 것 같습니다. :)

바람돌이 2007-02-12 20:35   좋아요 0 | URL
평소 진중권의 말에서 대리배설의 쾌감으로 전율하는 저로서는 별3개가 적은 듯 보이지만 아직 책을 안읽었으니 뭐.... ㅎㅎ 재밌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조만간 보게 될 책일것 같네요. ^^

마늘빵 2007-02-12 23:19   좋아요 0 | URL
저는 네개와 다섯개 사이에서 갈등했는데, 아마 제가 다섯개를 줬더랬죠.
진중권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시원함과 날카로움이 있죠. 거기에 점수를 많이 줬더랬습니다.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새로울 것이 없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진부함'에는 '별반'의 고민을 했어요.

드팀전 2007-02-12 23:39   좋아요 0 | URL
기인님>네..별셋.보통이란 이야기죠.
바람돌이님>진중권의 가장 큰 장점은 대중적인 글쓰기에 강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그의 강의 역시 그러하다면 즐겁게 들을 수 도 있겠다 싶네요.
아프락사스님>음 그러셨군요.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특유의 시원함과 날카로움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되겠지요.거기에만 점수를 후하게 주면 계속 별 다섯인데..^^ 그것도 나쁠 건 없지요.그의 글이 진부하다는 것은 그가 제기하는 문제가 진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지요...다만 다작의 작가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진중권에게도 적용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과거에 소설가 윤대녕이 그랬습니다.그럼에도 이번에 나온 윤대녕 책을 또 사고 말았지만요.(오랜만에 나왔으니까.^^)

글샘 2007-02-20 12:47   좋아요 0 | URL
공공성이 원천적으로 없었던 국가에서 '사적인 관계의 중요성'만이 강조되는 풍토가 한국 사회의 술자리 문화, 수직적 문화를 고착화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진중권처럼 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부한 것은 정상이 아닐까요? 민중 미학을 선도해나가는 예술가가 아닌 한...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 8.15에서 5.18까지
박태균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이 내게 다가왔다.

흑백 TV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실내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렸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주사선을 줄여야 했다.토요일 오전,10시. TV에서 애국가가 끝나면 나는 미국으로 초대되었다.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미국 만화들.한국 TV가 주말의 웃음을 제조하기 위해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시간,AFKN은 심심해할 미 8군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을 위해 만화를 융단폭격했다.영어를 알아 듣지 못한 것은 답답했지만 그다지 큰 장애는 아니었다.미국 만화가 끝나고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나올 때 까지 TV를 붙들고 있었다.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듣기 좋았다.축축 처지는 애국가보다 행진곡 풍의 멜로디가 흥겨웠고 노래 아래 깔린 그림들은 더욱 멋졌다.미국 독립전쟁 그림,탱크와 비행기의 행진 장면,자유의 여신상,러시모아 국립공원의 큰 바위 대통령얼굴,달에 착륙한 암스트롱....  나중에는 피아노 건반으로 그 멜로디를 누를 수도 있었다. "솔미도미 솔 도.. "

<우방과 제국,한미관계의 두 신화>를 읽다가 문득 미국과 나의 첫번째 조우가 떠올랐다.이 책은 <한국전쟁>에서 대중적이며 균형감 있는 접근법을 선보였던 박태균 교수의 한미관계사책이다.이 책의 제목은 저자가 한미 관계를 바라보는 지향점을 명백히 보여준다.우리 사회는 미국을 둘러싼 두 가지 '신화'가 있다.하나는 미국을 동맹을 넘어 '혈맹'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을 '제국주의 식민 모국'으로 보는 신화이다.전자는 수구보수 세력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다.후자는 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에서도 시각차가 존재했을 정도로 주요주제였으나 지금은 그런 식의 도그마화된 규정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물론 아직도 실제로 그렇게 믿지도 그렇게 분석하지도 않으면서 '미제'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그저 레토닉이나 배설의 언표 정도로 받아 들이는 편이다.

저자는 한미 관계를 '동태적'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미국의 세계 전략이라는 '작용'과 한국의 대응이라는 '반작용'의 틀 속에서 상호관계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박태균 교수는 한미 관계가 정상적인 두 국가 사이의 외교 관계를 넘는 '특수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이러한 '비정상성'의 외부적 요인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을 한반도에 강요한 것이다.내부적으로는 역대 정권의 '비정통성'을 들고 있다.정권의 창출의 정통성 부재와 정권 내부의 불안정성을 외부의 힘에 의존해서 풀어나가는 방식들이 역사적으로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만들어 내게 된 필요충분조건이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한미관계를 시대순으로 기존 몇 가지 모델로 언급한다.먼저 미군정시기의 한미 관계는 제국과 식민지 관계로 규정한다.50년대는 보호자-피보호자,60년대는 중심국-주변국 관계이다.70년대는 규정하기 모호할 만큼 사안별로 다양화된다.물론 박태균 교수의 입장은 한미관계사가 기존의 이론들을 포괄하는 역동적 모델임을 상정하고 있다.

대학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자.내가 대학들어가서 현대사를 공부하며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미군정기부터 한국전쟁 까지의 시기였다.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안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과 너무 달라서 충격적이었다.고등학교때는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찬탁' 으로 배웠다.물론 이말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스크바 3상회의의 전체적 의도와 신탁통치안의 현실성에 대해 일방적으로 앞뒤 꼬리떼어낸 것이긴 하다..당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특종보도했다.그리고 한국 언론사에 길이 빛날 왜곡보도를 한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고 기사를 작성한다.이어서 12월 28일 조선일보는 박스기사를 통해 '독립전쟁을 시작하자'라고 선동한다.

미군정의 견제로 뒤늦게 입국한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임정은 '반탁'의 정점에 있었다..남한 내에서 좌익과 중도세력이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미국은 신탁통치에 긍정적이었다.우선 한국인의 자치 능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또한 중국 국민당이 우세한 45년 상황에서 미소영중이 신탁통치를 하면 자유주의 세력이 숫자적 우위를 구성하고 한반도 내에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미국은 남한 사회내에서 우익 세력을 양성하고 좌익 세력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다.그러나 신탁통치 안에 대한 우익의 절대반대는 미국을 난처하게 만든다.힘을 실어야 하는 우익에서 미국의 전략에 반대하고 나섰고 뺨때리고 싶은 좌익계가 미국의 의도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기때문이다.결과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를 얻기 힘들었으며 남북이 각각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박태균 교수는 이 사건을 미군정이 한반도내의 내부적 정치 역동성에 전략을 바꾸게 된 첫번째 사안으로 꼽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필두로 한미 관계는 끊임없이 갈등한다.갈등은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미국의 대외전략변화에 따라 수시로 증폭된다.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한반도 개입이었다.일본이 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50년대 중반 이후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역할론이 또 하나의 중심전략이 된다.이는 미 행정부가 받고 있던 재정부담과도 관련이 있다.4.19 당시 미국의 태도는 미국의 남한내의 정치 상황에 대한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즉 미국은 제 3세계 정책을 펼때 민주주의와 반공독재 사이에서 고민한다.미국은 이 두마리 토끼를 쫓지만 국민들의 반대로 더이상 독재정부가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들때 미국은 민주주의의 손을 들어주게 되지만 그 전까지 한국의 독재체제는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된다.

6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은 로스토우에 빚지고 있다.근대화론으로 대표되는 로스토우의 논리는 경제성장을 통해 체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도 양보될 수 있다고 본다.(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세대들의 일관된 정서와 같다.)특히 로스토우의 논리중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저개발국가에서 과도기적 단계를 효율적으로 거치기 위해 군대를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마치 5.16 군사 쿠데타를 예견하는 듯 보이는 이론이다.

이 책에 나오는 5.16 군사 쿠데타 부분은 마치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 진지하다.쿠데타를 제압하겠다는 유엔군 사령관과 미국 대사,'올것이 왔다'이를 계기로 정계 개편을 꿈꾸는 윤보선 대통령,쿠데타 상황에 대처해야함에도 숨어버린 장면 총리, 윤보선을 권좌에 계속 두면서 쿠데타정권의 도덕적 정당성문제를 넘어가려한 미 국무부.박태균 교수는 3,500명으로 성공한 쿠데타의 뒤에 미국의 역할보다 한국 정치인들의 무능이 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중반이후  한미관계의 중심은 '베트남전 파병'이었다.60년대초 권력 기반이 아직 불안했던 박정희는 쿠데타 주체세력과 미국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절대권력의 위치에 오른다.박정희가 전투병 파병을 강행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 정리하면 첫째 한일협정 체결로 인한 국내여론 악화의 돌파구였다는 점,둘째 64년 주한미군과 한국군 감축계획에 대한 반대,셋째 베트남 특수를 통한 경제활성화 등이다..미국은 베트남전이 장기화되어가면서 국내여론과 재정압박에 고민하게 된다.결국 한국군을 이용하는 것이 비용면에서도 또 아시아국가의 참여라는 홍보용으로도 적당했다고 본 것이다.박정희는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임을 더욱 부각하고 싶어했다.일본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중요성 수준으로 한국의 입지를 확인 받고 싶어했던 것이다.그러나 박태균 교수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마지노선을 넘는 무리한 요구를 시작한다.요즘말로 하면 오바하기 시작한 것이다.이 오바는 결국 대미 관계의 전략의 부재와 한미관계에서의 학습효과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68년 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미관계를 급격히 냉각시켰다.박정희는 대북 보복공격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한다.또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해결을 위한 미북간 비밀협상에 배제된 것에 분노를 표한다.한국이 베트남을 빌미로 '벼랑끝 전술'을 쓰고 있다고 파악한 미국은 '너희들이 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면 우리도 남한에서 미군을 빼내겠다.'라는 상황까지 이르게된다.당시 미국은 북한을 통제하는 것보다 남한을 통제하는데 훨씬 많은 공을 들인 형태가 되었다.박태균 교수는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우리정부의 전략이 오판이었음을 지적한다.

한국 전쟁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주한 미군 감축 전략을 취한다.70년대 닉슨독트린과 지미 카터의 데탕트 시대에 수면에 떠오른 미군 철수론은 파장이 컸다.박정희는 또 한번 '벼랑끝 전술'을 쓴다.핵을 보유하겠다고 선언하고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맛이 간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점을 한국의 위상을 당당히 보인 것이라고 아직도 그리워한다.한때 신문광고 해대던 <무궁화꽃...>인지 뭔지도 그런 내용 아닌가 싶다.최근에 북핵이 문제되니까 김정일을 감금하고 밥굷기는 소설도 하나썻다고 한다.소련과 군축도 논의되고 개입전략보다는 현상유지전략을 택한 미국이 이걸 받아 들일 수는 없었다.그러고 보니 30년정도의 시차를 두고 미국은 남한핵문제와 북한핵문제를 다루고 있다.핵을 둘러싼 아이러니다.이 책을 보면 현재 미군 재배치와 상시기동군 운영 전략이 그다지 새롭거나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아주 오랜 시점부터 연구되어 온 것이고 미국은 세계전략 변화에 따라 차근 차근 진행하고 있던 것이다.

<우방과 제국>을 보면 보수 언론이 즐겨쓰는 '한미동맹강화'라는 것이 지난 역사에서 그렇게 순탄치 않았음을 그리고 또 보편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한미관계는 출렁이는 바다처럼 단 한번도 평온했던 적이없다.그럼에도 마치 한미관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지상과제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저자는 한미관계의 갈등원인이 미국측에 있음을 우선 밝힌다.무리한 세계전략을 추진하는 제국이 가진 한계이다.또한 한국정부의 부적절한 대응도 지적된다.일부에서 이 부적절한 대응을 '민족주의'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결코 민족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그 때 그 때 정권차원의 안보가 중심이었던 것일뿐이다.마지막으로 한국민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신화가 지적된다.한국 사회의구성원들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당연히 받아들인다.거기에는 '사회진화론'이 자리잡고 있다.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우리가 이라크에 젊은 이들을 보낼때도 파병론자들의 논리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파병에서 어떤 특수를 얻을 수 있을까? 못해도 미국과의 관계가 좋아질 테니 떡고물은 있겠지? 그걸 현실론으로 받아들이고 그 토대 위에 논리의 탑을 쌓는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그리고 그 논리의 현실적 이득과 그 논리의 기계적인 정합성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경우도 많이 봐왔다.어떤 이득이고 어떤 평화이고 어떤 국가인지가 중요한 것 아닌가? 논리의 토대가 인류애와 평화에 있지 않다면 그 많은 삼단논법과 통계수치,미래 예측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스스로 억압하는 또는 억압받는 민중임을 알고 그 땅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걸 잊고 멋진 이론과 논리와 통계로 무장한 자신을 엘리트라고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우방과 제국,한미 관계의 두 신화>는 정치외교 영역에서 한국에 늘 존재하는 미국을 보여준다.이것과 함께 우리의 일상성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유행하는 말로 우리의 '아비투스'속에 존재하는 미국은 또 어떤 것인지 고민해보게된다.

P.S) 이 책은 대중적 역사서를 지향한다.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마치 <제3공화국><제5공화국>하는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책에는 8.15부터 5.18까지 한미관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80년대 부분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7-02-08 10:39   좋아요 0 | URL
^^.... 미국은 5분거리에 있었는데 미군은 차타고 15분쯤 가면 있어요.하야리야 부대라고..얘들도 곧 이사가요.그런데 왜 이렇게 길게 썻대,나는.
재미있게 읽었으면 압축해서 써야하는데 머리쓰기 싫어서..^^ 반성

kleinsusun 2007-02-11 21:19   좋아요 0 | URL
와우.....정말 긴 리뷰~ ㅋㅋ
정말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맞죠? 보관함에 넣었어요.^^

드팀전 2007-02-11 22:34   좋아요 0 | URL
제가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또 현대사는 재미있어 하다보니...
어쨋거나 재미있고 유익한 책은 맞습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마하트마 K. 간디 지음, 김태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라는 작게 만들고 백성의 수는 줄이며 필요한 물건은 십여가지로만 한다......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사람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중 80장 <소국과민> 중에서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를 읽으며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이 책은  <녹색평론>사가 표방하는 '인문학적  생태주의'의 고향과도 같은 책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주류 환경운동의 철학과 다르다.거칠게 말하자면 주류 환경운동이 산업사회라는 토대를 인정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녹색평론>의 생태주의는 산업사회에 대한 안티테제를 철학의 기반으로 한다.즉 산업주의에 대한 부정적 성찰이 생태주의의 출발점이다.<녹색평론>의 생태주의를 견인하는 철학은 노장사상,간디의 비폭력 자치주의,아나키즘적 공동체주의,북미 인디언들의 자연주의 등이다.

간디의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단적으로 현재 <녹색평론>식 생태주의의  성찰의 계보적 근원에 속한다.간디는 단순한 인도 독립의 아버지가 아니다.그의 적은 조국 인도를 강점하고 있는 제국주의였다.그러나 근원적인 적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그의 진정한 적은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산업사회'였다.자본주의적 산업사회는 반자연성과 반생명성을 특징으로 한다.간디의 이상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명을 착취하고 인간을 속박하는 현 시스템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간디는 이러한 정치적 이상주의의 맹아를 '마을'이라는 전통사회의 작은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인도의 70만 마을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간디의 마을 공동체론은 누가보더라고 이상주의적이다.간디가 살아있던 시점에도 그는 이런 비판에 직면했다.이에 대한 간디의 답변은 소박하지만 인간 간디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수긍이 간다.그는 말한다.

"나는 그 일이 인도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드는 것 만큼 어렵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만일 누가 하나의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 수 있다면,그는 온 나라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온 세계를 위한 모범을 제공한 것이 될 것이다.구도자는 이 이상의 것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답변 또한 이상주의의 외피를 벗진 못했다.그러나 나는 이 문제에 대한 간디의 소박한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거시 기획'을 가지고 '미시 기획'을 비판하는 것 역시 '미시 기획'을 가지고 '거시 기획'이 가능하다고 믿는 관념성 만큼이나 폭력적이기 때문이다.<간디의 물레>에서 김종철 교수 역시 자신의 작업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치 않는다고 했다.타이타닉형 산업주의 시스템에서 생태주의가 구성원들의 자성과 새로운 대안을 고민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생태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 도상에 있다.)

간디의 마을 공동체를 움직이는 정신은 '비폭력 자급자족'이다.간디의 물레는 자치와 자립,비폭력 사상의 상징이다.물레에 대한 간디의 강한 믿음은 책 곳곳이 등장한다.

실잣는 물레는 상업적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상업적 평화의 상징이다....실잣는 물레를 건전한 마을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기초로 만들것이다.나는 물레 바퀴를 모든 활동의 중심으로 만들 것이다...비폭력을 이상으로 추구하려면 물레를 그 진정한 형상이며 상징으로 인정하고 늘 보이는 곳에 두어야 한다.나는 비폭력을 생각할 때마다 물레의 모습이 떠오른다.

실잣는 물레는 미국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그것이 핵폭탄에 맞서는 무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미국과 전세계를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나는 인도와 세계를 구하는 길이 물레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간디는 기본적으로 농촌 공동체의 전통사회를 반산업주의의 한 형태로 염두에 둔다.이 공동체의 경제적 토대는 수공예이다.대표적으로 물레가 그 상징이다.실 잣는 작업을 통해 개인과 마을은 경제적 자립이 가능하다.또한 기계가 말살하고 있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복원한다.간디가 고립된 자치만을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그러나 과도한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에 긍정적이지도 않다.그렇게 된다면 산업사회의 방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간디의 기본철학은 인간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최소한의 의복,최소한의 재산만을 허한다.더 많은 풍요로움과 소비를 위해 인간과 세계를 피폐화 시키는 산업사회 철학에 대척점에 서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인상적인 것은 간디의 철학과 실천이 무척이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간디는 공동체 마을을 구성하는 방식,자연치료에 대한 임상 경험,마을 교육에 대한 방식,마을 일꾼들의 선발에 대한 기준,지주들의 재산에 대한 처분 방식등에 대해 말한다.이상주의적 철학을 현실에서 어떻게 재현해 낼 것인가가 간디의 가장 치열한 고민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간디의 철학은 이상적이나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내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이것이다.자신의 물적 토대가 가져다 주는 한가로움을 관념을 통해 풀어내는 현대 도시인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부분이 이 지점이 아닌가 싶다.간디는 '몸'과 '노동'의 중요성에 대해 수십번을 강조한다.지적 노동이라는 것 역시 육체 노동의 하위 개념이라고 그는 말한다.지적 노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결국 진정한 노동은 자기의 손과 발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 존엄성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간디가 가진 반자본주의적 정신,반산업적 정신,공동체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간디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이웃에 대한 희생'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간디는 말한다.

"당신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당신이 제일 하기 쉬운일을 처음에 하라"


댓글(5)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1-29 19:58   좋아요 0 | URL
노동의 신성함, 몸의 생명성, 실천의 진정성, 희생심... 생각할 수 있는 과제와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물레 앞에 앉아 실을 잣는 간디 사진을 떠올립니다.
실천의 진정성!

달팽이 2007-01-29 21:05   좋아요 0 | URL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하고 내가 제일 하기 쉬운 일을 처음에 하라"라고 들립니다.
책꽃이에 꽃혀 있는데...손짓합니다. 들어달라고..

드팀전 2007-01-30 09:23   좋아요 0 | URL
배혜경님>결국 손발이 중심이다..그런 말이지요.누군가 그랬다더군요.세상에서 가장 먼길이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길이라고...그런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먼길은 머리부터 손까지의 길이지요.
달팽이님>간디의 이야기가 그거죠...^^ 재미있군요.저는 애써 '서술어'(동사는 영문법이랍니다.^^생각해보니 그렇네요.^^)에 밑줄을 그었는데 님은 애써 '주어'에 밑줄을 그으시는군요.^^ 간디 역시 개인의 각성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깁니다.간디의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도덕적으로 각성하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개인이 무엇보다 핵심이니까요.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사람을 바꾸는게 가장 우선이고 근본이지요.(하지만 이걸 사회적 대안으로 삼는다는 것은 너무 근본적이거나 너무 소박하거나 또는 너무 원대하거나 너무 안이한게 아닐까 싶습니다.그 꿈은 그 꿈대로 또 다른 꿈은 또 다른 꿈으로)

글샘 2007-01-30 04:42   좋아요 0 | URL
음, 읽고 싶은 책이 또 한 권, 생겼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이 리뷰의 백미는... 사모님,의 명언이네요. 맨 위의 말. ㅋㅋ
그래서 '백수 - 일하지 않아 하얀 손'가 욕이 되나 봅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대가리나 키운... 박지원의 허생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글을 아는 자들을 골라 모조리 배에 태우면서, 이 섬에 화근을 없애야지.'... 가분수는 화근일 따름입니다. 손발이 뛰어야죠. 벼는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잖아요. ^^
그리고, 드팀전님. 주어-동사는 영문법이고, 우리말에선 주어-서술어가 옳다고 봅니다.^^

드팀전 2007-01-30 09:22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바로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