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길
레이너 윈 지음, 우진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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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걷는다. 그럼에도 마음먹고 걷는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러닝족에게 러너스 하이가 있다면, 워킹족에게는 워커스 하이가 있다고나 할까. 그것은 전자의 쾌감과는 결을 달리한다. 오히려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어지럽던 머리가 가뿐해지며, 들뜬 감정이 차분해지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제주올레길 완주, 국토대장정 같은 장거리 걷기가 나름 지지층을 얻고 있으며 해외로 눈을 돌리면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오래전에 읽은 <나는 걷는다>(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실크로드 대장정, 수년 전 읽은 <와일드>(셰릴 스트레이드)가 다룬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그리고 여기 이 책의 주인공이 걷는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 등. 이러한 길이 걷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줌에도 꿋꿋이 존재하고 있음은 단지 완주했다는 정복욕만은 아닐 것이다.

 

영국 남서부의 해안을 따라 걷는 1,000km의 코스. 젊고 건강한 때, 별다른 삶의 고민이 없을 때 걸었다면 비록 육신은 힘들더라도 더할 나위 없는 흥미롭고 즐거운 트레일이었을 것이다. 레이너와 모스 부부는 그렇지 않다. 설상가상이란 표현은 이런 상황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용어이리라. 경제적 파산과 모스의 불치병이 동시에 닥쳤고, 몇 푼만 손에 지닌 채 살던 집과 농장에서 쫓겨난 50대 부부.

 

그리고 이제 저 문밖을 나서게 되면 모든 것이 다 과거의 일로 남게 될 터였다. 그동안 가꿔온 삶이, 인생이 다 끝나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P.17)

 

이들에게 떠난다는 것, 즉 무작정 걷는 행위는 불가항력이자 유일한 선택지다. 머무른 채 노숙자가 되고 모스의 죽음을 속절없이 지켜볼 게 아니라면, 그들은 떠나야 한다. 어디론가?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모스와 더불어 레이너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또 다른 노숙의 길을 떠난다.

 

아무리 미친 짓이라고 해도 우리는 해내야만 했다. 만일 이 길을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저 이번 여름을 넘어 계속해서 펼쳐질 미래와 그 미래에 있을 모든 일을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스도 나도 그런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P.66)

 

이 책의 미덕은 우선 대다수 독자에게 생소한 영국의 SWCP를 전면적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마인헤드에서 랜즈엔드를 거쳐 풀까지 이르는 영국 지도상 남서부 끝자락 해안 길을 걷는 코스. 마인헤드에서 랜즈엔드까지 해안이 높고 날카로운 절벽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대서양의 맹렬한 바람과 파도가 절벽을 때려서 생긴 수많은 코브(cove). 랜즈엔드에서 풀까지, 특히 풀에 가까워질수록 흰색의 토양이 우세해 백악기라는 명칭을 낳게 되었다는 사실도. 랜즈엔드는 우리네 땅끝마을과 같은 의미인 게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하다.

 

SWCP가 지나는 길에 있는 영국 남서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의 독특한 매력도 흥미롭다. 우리는 영국이라고 하면 런던을 우선으로 떠올리게 된다.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으면 데번과 콘월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 지명인지 모를 정도다. 이렇게 영국 지방과 소도시의 존재와 특색에 대한 정보도 유익하다.

 

모스 부부는 팔자 좋게 배낭여행을 떠난 게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지급되는 보조금에 의지하여 음식과 물품을 구비해야 하기에 누가 봐도 궁핍하고 초라한 여행자의 외양이다. 세탁과 목욕을 자주 하기 어려우니 꾀죄죄한 행색에 냄새마저 풀풀 풍기는 그야말로 노숙자다. 여정에서 부닥치는 사람들 가운데 친절한 사람도 있는 반면 이들에게 거리를 두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해야겠다. 중산층에서 일순간에 하층민으로 몰락한 모스 부부는 이러한 처지를 더더욱 뼈저리게 절감한다. 노숙자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과 허술한 정책, 노숙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일반 대중의 인식 등.

 

무엇보다 모스 부부를 괴롭힌 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이다. 날이 갈수록 처지는 모스의 건강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 모스의 향후 부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레이너의 근심. SWCP를 완주할 수 있을지, 완주하고 나면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한 심정. 여정 내내 레이너를 괴롭히는 건 육신의 고통보다는 이러한 심적 번민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인생의 주인이었고 우리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등에 배낭을 짊어지자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우리는 다시 걷기로 결심했다. 그 선택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유를 붙들기로 한 것이다. (P.354-355)

 

<와일드>와 마찬가지로 결국 이 책도 모스 부부의 눈부신 미래를 보여주지 않지만, 적어도 시커먼 어둠과 잿빛의 어슴푸레함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모스는 의사의 예상과는 달리 육체적으로 강인해졌고, 미래 설계를 위한 생의 의지를 표명하고 선택한다. 추운 겨울을 피해서 걷기를 중단하고, 레이너가 친구의 농장에서 수개월간 더부살이를 하면서 양털 깎기 노동을 통해 번 돈은 미래를 향한 종잣돈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선택은 일견 무모하였지만 걷기를 통해 무너지지 않는 삶의 태도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낙담한 채 그대로 주저앉았더라면 모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며, 이 책도 당연히 세상에 나오지 못하였을 터이므로.

 

내 안의 정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길을 한 걸음씩 지나갈 때마다 내 안에서는 뭔가가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P.383)

 

이 책 역시 온라인 마켓에서 새책 같은 헌책을 고르면서 싼 맛에 장바구니에 추가하였던 책이다. 원체 이런 유형의 책을 좋아하였기에 적어도 실망해서 집어던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5백 면이 넘는 두툼한 분량임에도 어려움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 부부가 지나는 패스의 여정을, 구글맵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하여 뒤따를 수 있어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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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신지혜 피아노 독주회 - Hommage Series Ⅱ: "Schumann loves Chopin"

일시 : 2026년 4월 24일(금)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신지혜 (피아노)

프로그램

  - 쇼팽, 야상곡 Op.15 No.1 

  - 쇼팽, 야상곡 Op.15 No.2

  - 슈만, 쇼팽 야상곡 Op.15 No.3에 의한 변주곡

  - 쇼팽, 발라드 1번 Op.23

  - 쇼팽, 발라드 2번 Op.38

  - 슈만,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


* 세줄평

쇼팽과 슈만이 단순히 교분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서로 작품 헌정을 주고 받고, 슈만은 변주곡을 쓸 정도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강한 낭만성과 과격한 정념의 표출보다는 정서와 구조, 표현의 정확성을 더 잘 알게 해주는 연주다. 역시 <크라이슬레리아나>가 들려주는 슈만 특유의 양식과 상념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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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 들메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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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세계사 수업 시간에 주목받는 인물이다. 황제로서 업적이 뛰어나기에 특별히 대제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니. 그는 일시적이지만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내해로 만들었고, 서양 3대 법전으로 손꼽히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였고, 성소피아 성당 같은 불멸의 건축물을 남겼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마지막으로 재건하였고, 그의 사후 동로마는 결코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불세출의 영웅이자 제왕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그런데 프로코피우스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사>에서 은밀히 밝힌다. 이 책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동시대 인물로서 <전쟁사><건축론>으로 황제와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찬미했던 공식 역사가가 남긴 일종의 비망록이다. 원래 이런 유형의 기록이라면 공식 역사서로는 남기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드러낼 수 없던 진실과 숨겨진 일화를 기대하기에 흥미진진함과 아울러 상당한 사실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책에서 황제와 황후, 장군에게 무자비한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정복 사업을 진두지휘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완전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로 부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주변 사람 모두를 포기할 정도의 바보라고 밝힌다. 부인이 그 정도의 사랑과 헌신을 받을 만하다면 아무 문제 없지만, 그 부인은 외도를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인물임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장군의 형편없음을 더욱 부각한다.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은 이 인간의 진면목을 알아채고 웃음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 대고 멍청이라고 모욕했으니, 이제야 벨리사리우스의 어리석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P.96)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비서로 일하였다고 하니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준 셈이다. 황제와 황후에 대해서는 비난의 정도가 심하여 그들을 차라리 악마로 묘사할 정도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로마제국을 파멸시키고 사람들을 망치기 위해 작정한 극악무도한 악한들이라고 기술한다. 테오도라 황후의 경우 한술 더 떠 그녀의 출신을 들어 세상에서 가장 불결하고 타락하며, 잔혹한 여성으로 폄하를 아끼지 않는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번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고백하기를, 그가 남편인 사바티우스의 아들도 아니고, 실은 어떤 남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P.143)

 

그녀는 이렇게 태어나고 자랐다. 그녀의 이름은 모든 남자들의 입에서 일반적인 음란의 차원을 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P.124)

 

맹목적일 정도로 과도한 인신공격은 이 책의 진실성을 때로 의심케 할 정도이다. 저자가 이들에게 지독한 개인적 원한을 품은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무자비한 비난을 퍼붓는다는 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난의 외피를 거두고 나면 동로마제국 전성기의 어두운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거창한 정복 사업에 따른 재정 부족은 과다한 징세로 이어져 백성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 등의 자연재해 빈발과, 치명적인 전염병의 유행은 인명과 재산의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황제 부부는 백성들의 어려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쓸데없이 화려한 건축물을 계속 짓고, 야만인들에게 재물을 아낌없이 퍼주고 국고를 고갈시켰다. 이것이 프로코피우스가 지적하는 당대의 큰 문제이자 현실이었다.

 

그의 지적은 상당한 적확성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덕분에 마냥 성공적이고 화려하기만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가 사실은 장기적 쇠퇴의 조짐을 내포하고 있음을 후대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이 빛 좋은 개살구였을까? 이 점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프로코피우스의 지적대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가 어마어마한 폭정의 시기였다면 그의 사후 동로마제국은 곧바로 멸망으로 이어졌을 테지만, 누구나 알듯이 이후 천년 가까이 더 존속하였다. 그의 후세 황제 중에서 대단한 성군이 나왔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저자가 지나치게 침소봉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복 사업을 옹호하자면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고토 회복을 포기한다는 건 황제로서의 소임을 방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훗날 이슬람 세력의 발흥 등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충분히 시도해 볼 만 사업이며, 어쨌든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확보한 영토를 계속 유지하였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은 것도 이러한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한다.

 

백성들을 쥐어짜서 야만인들에게 펑펑 베푼다는 비난도, 격변기에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와 슬라브에게 협상을 통한 평화를 구한 정책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에 가깝다. 황제는 고토 수복을 위하여 서쪽으로 진군해야 하는데, 동쪽과 북쪽에서 적국이 쳐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력으로 침입해 온다면 그 피해는 협상 경비의 수준으로는 감당 못 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 테오도라 황후의 출신에 대한 맹공은 오늘날 관점에서 지나치게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야 한다. 배우, 즉 매춘부 출신이 분명한 테오도라의 진면모를 알아차리고 결혼한 황제의 안목과, 이후 공동 통치자로서 역량을 발휘한 테오도라의 능력을 오히려 높이 상찬해야 한다. 귀족 출신인 프로코피우스로서는 그런 테오도라 황후가 결코 마뜩잖았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편견과 그릇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볼만 하고 흥미로운 점이 많다. 가뜩이나 사료가 부족한 동로마제국 초창기 시절, 그것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의 궁중 비사를 그득 담고 있다. 아울러 당대의 종교 갈등과 청색파와 녹색파 간 파당 분쟁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동시대인의 시각에서 묘사한 당대 현실이므로 어떤 것에 비할 바 없는 생생함을 지니고 있어 당대의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일차 사료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만 옮긴이의 말대로 미신적인 믿음에 기초한 일부 사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을 믿는 건 다소 위험한 견해다.

 

이 책은 프로코피우스의 원서를 1926년 리처드 앳워터가 번역한 영역본을 저본으로 한 중역본이다. 중역본이라고 해도 원전 번역이 없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동로마제국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롭게 일독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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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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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 스님의 금강경 강설은 흥미롭지만, 분명히 한계도 있다. 동봉 스님의 사고와 해석에 참신하고 독창적인 대목은 있더라도 불교 사제로서 불교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비신도 관점에서 금강경 이해를 도모하는 사람이 반드시 불교적 이해에만 종속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 선생의 책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게 되었다.

 

구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한자 표기가 많아서 읽기 불편하다고들 하는데, 개정 신판은 한글 표기를 대폭 늘려서 가독성이 매우 좋다. 도올은 자신의 금강경 강해를 자부하는데, 가장 완전한 고려대장경 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역본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대장경 판본을 사용한 책들이 몇 권 나왔지만, 초판이 나온 1999년을 염두에 두면 자부할 만하리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도올은 거의 일백 면에 달하는 서론을 풀어놓는다. <들어가는 말>, <금강경에 대하여>, <금강경의 의미>,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가 그러하다.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소개글에 해당하여, 금강경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본문을 마친 후에는 <경후설>이라는 후기, <감사의 말><아름다운 우리말 금강경을 독송합시다>라고 하여 한글 번역문을 따로 싣고 있다.

 

도올판 금강경의 특징은 각 분, 즉 장 전체를 한꺼번에 싣지 않고, 절로 나누어 강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몇 장 몇 절 하듯이. 각 절은 한문 원문을 소개하고 한글 독음을 달고 있어 원문을 읽는 데 편의를 제공한다. 이어서 원문 해석, 즉 한글 번역문이 나오고, 강해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육조가 여시아문의 아()를 추상화시켜 [......] 라고 해()한 것은 참으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원의의 소박한 뜻에 위배하여 애써 현묘해지려고 노력하는 소치는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P.105)

 

우리가 도올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보다 시원시원함이다. 그는 기존 해석의 안일함에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아무리 옛날의 권위 있는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신랄한 비판에 주저함이 없다. 주희가 집주한 논어 등 고전에 내가 학을 떼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성리학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고전에 성리학의 교조주의적 해석을 잔뜩 넣어 읽는 이를 질리게 만든 것과 같이.

 

도올의 해석은 거침없다. 금강경이 후대에 이렇게 높이 평가되는 까닭은 소승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승불교의 문을 연 기념비적 저작이어서다. 대승의 보살은 소승의 아라한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아라한은 선택된 출가자만이 가능하지만, 보살은 출가 여부와 무관하다. 아라한과 부처는 다른 계층이지만, 보살은 깨달음을 통해 부처에 이를 수 있다. 사상(四相)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묘하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닐 때 진정한 불법이라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P.338, 17-7)일 뿐이다. 그래서 도올은 이렇게 선언한다.

 

불교의 종지는 무아(無我), 대승의 종착은 무아(無我), 보살의 종국은 무아(無我). (P.344)

 

이런 인식으로 종교계를 바라볼 때 도올의 눈에 영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강해 중간에 현재 불교와 기독교의 세태를 향한 적나라한 비판이 곳곳에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 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P.94)

 

그렇게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것이 다 소승 기독교의 폐해다. 한국의 목사님들이시여! 그대들의 신도들을 참으로 대승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사이다. 매일 매일 십일조내라구 쫄린 주머니 털어 공해뿐일 건물 짓는데 우리민족의 신앙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사이다. (P.252)

 

도올의 해석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라는 철학의 틀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강해에서 부처와 예수를 나란히 비교하고, 한자와 영어, 산스크리트어 의미까지 대조하여 설명하는 폭 넓음은 도올에게서만 가능하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65)

 

금강경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대동소이하다. 전체 32분에 이르기까지 핵심 문구는 몇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후반부를 사족으로, 단순한 부연이자 반복으로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 금강경은 애초부터 독해용 경전이 아니다. 암송용 경전이라면 단순과 반복이 매우 중요하다. 간단한 주제일수록 확실한 각인을 위해 반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다. 여기서 변주가 발생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금강경의 구성을 향한 비판적 인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무척 흥미롭게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읽었다. 서론을 통해 금강경과 대승불교의 의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금강경이 우연히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된 게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란 게 특정한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점, 지식의 습득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정신적 수행이 중요하다는 점,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기에 부처가 될 가능성은 중생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 등. 향후 일 년에 한 편 정도는 다른 불교 경전도 읽어보고 싶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최초의 운동이면서 최후의 말미적 가능성을 포섭하는 포괄적인 내용의 위대한 경전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 전사의 알파요 오메가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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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189회 아트엠콘서트 - 브랜든 최 색소폰 리사이틀

일시 : 2026년 4월 16일(목) 19:30

장소 : 신영체임버홀

연주 : 브랜든 최 (색소), Ilya Rashkovskiy (피아노)

진행 :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

프로그램

  - 베토벤, 로망스 2번 F장조 Op.50

  - 베토벤, 먼 곳의 연인에게 Op.98

  - 베토벤, 호른 소나타 F장조 Op.17 중 3악장 론도

  - 라흐마니노프, 엘레지 Eb단조 Op.3 No.1

  -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G단조 Op.19 중 3악장 안단테

  -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 Op.34 No.14



* 세줄평

가요가 아닌 클래식 색소폰 연주는 처음 듣는다. 인지도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가 부족하다 보니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 작품을 편곡하여 연주한다. 곡에 따라 알토, 테너, 바리톤 색소폰을 바꾸어 가며 연주하니 음색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심지 있는 소리는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다채롭게 대응하여 흥미로운 사운드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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