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프로코피우스 지음, 곽동훈 옮김 / 들메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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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세계사 수업 시간에 주목받는 인물이다. 황제로서 업적이 뛰어나기에 특별히 대제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니. 그는 일시적이지만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내해로 만들었고, 서양 3대 법전으로 손꼽히는 로마법 대전을 편찬하였고, 성소피아 성당 같은 불멸의 건축물을 남겼다. 그는 로마제국의 영광을 마지막으로 재건하였고, 그의 사후 동로마는 결코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불세출의 영웅이자 제왕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그런데 프로코피우스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사>에서 은밀히 밝힌다. 이 책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동시대 인물로서 <전쟁사><건축론>으로 황제와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찬미했던 공식 역사가가 남긴 일종의 비망록이다. 원래 이런 유형의 기록이라면 공식 역사서로는 남기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드러낼 수 없던 진실과 숨겨진 일화를 기대하기에 흥미진진함과 아울러 상당한 사실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책에서 황제와 황후, 장군에게 무자비한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정복 사업을 진두지휘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완전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로 부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주변 사람 모두를 포기할 정도의 바보라고 밝힌다. 부인이 그 정도의 사랑과 헌신을 받을 만하다면 아무 문제 없지만, 그 부인은 외도를 서슴지 않는 파렴치한 인물임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장군의 형편없음을 더욱 부각한다.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은 이 인간의 진면목을 알아채고 웃음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 대고 멍청이라고 모욕했으니, 이제야 벨리사리우스의 어리석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P.96)

 

프로코피우스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비서로 일하였다고 하니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준 셈이다. 황제와 황후에 대해서는 비난의 정도가 심하여 그들을 차라리 악마로 묘사할 정도니까 말이다. 두 사람은 로마제국을 파멸시키고 사람들을 망치기 위해 작정한 극악무도한 악한들이라고 기술한다. 테오도라 황후의 경우 한술 더 떠 그녀의 출신을 들어 세상에서 가장 불결하고 타락하며, 잔혹한 여성으로 폄하를 아끼지 않는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번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어머니가 친구에게 고백하기를, 그가 남편인 사바티우스의 아들도 아니고, 실은 어떤 남자의 아들도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P.143)

 

그녀는 이렇게 태어나고 자랐다. 그녀의 이름은 모든 남자들의 입에서 일반적인 음란의 차원을 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P.124)

 

맹목적일 정도로 과도한 인신공격은 이 책의 진실성을 때로 의심케 할 정도이다. 저자가 이들에게 지독한 개인적 원한을 품은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무자비한 비난을 퍼붓는다는 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비난의 외피를 거두고 나면 동로마제국 전성기의 어두운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거창한 정복 사업에 따른 재정 부족은 과다한 징세로 이어져 백성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 등의 자연재해 빈발과, 치명적인 전염병의 유행은 인명과 재산의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다. 황제 부부는 백성들의 어려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쓸데없이 화려한 건축물을 계속 짓고, 야만인들에게 재물을 아낌없이 퍼주고 국고를 고갈시켰다. 이것이 프로코피우스가 지적하는 당대의 큰 문제이자 현실이었다.

 

그의 지적은 상당한 적확성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 덕분에 마냥 성공적이고 화려하기만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가 사실은 장기적 쇠퇴의 조짐을 내포하고 있음을 후대에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절이 빛 좋은 개살구였을까? 이 점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프로코피우스의 지적대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가 어마어마한 폭정의 시기였다면 그의 사후 동로마제국은 곧바로 멸망으로 이어졌을 테지만, 누구나 알듯이 이후 천년 가까이 더 존속하였다. 그의 후세 황제 중에서 대단한 성군이 나왔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저자가 지나치게 침소봉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복 사업을 옹호하자면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고토 회복을 포기한다는 건 황제로서의 소임을 방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훗날 이슬람 세력의 발흥 등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충분히 시도해 볼 만 사업이며, 어쨌든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확보한 영토를 계속 유지하였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은 것도 이러한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으로 봐야 한다.

 

백성들을 쥐어짜서 야만인들에게 펑펑 베푼다는 비난도, 격변기에 군사적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와 슬라브에게 협상을 통한 평화를 구한 정책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에 가깝다. 황제는 고토 수복을 위하여 서쪽으로 진군해야 하는데, 동쪽과 북쪽에서 적국이 쳐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력으로 침입해 온다면 그 피해는 협상 경비의 수준으로는 감당 못 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 테오도라 황후의 출신에 대한 맹공은 오늘날 관점에서 지나치게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야 한다. 배우, 즉 매춘부 출신이 분명한 테오도라의 진면모를 알아차리고 결혼한 황제의 안목과, 이후 공동 통치자로서 역량을 발휘한 테오도라의 능력을 오히려 높이 상찬해야 한다. 귀족 출신인 프로코피우스로서는 그런 테오도라 황후가 결코 마뜩잖았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편견과 그릇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볼만 하고 흥미로운 점이 많다. 가뜩이나 사료가 부족한 동로마제국 초창기 시절, 그것도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유스티니아누스 시기의 궁중 비사를 그득 담고 있다. 아울러 당대의 종교 갈등과 청색파와 녹색파 간 파당 분쟁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동시대인의 시각에서 묘사한 당대 현실이므로 어떤 것에 비할 바 없는 생생함을 지니고 있어 당대의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일차 사료의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만 옮긴이의 말대로 미신적인 믿음에 기초한 일부 사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을 믿는 건 다소 위험한 견해다.

 

이 책은 프로코피우스의 원서를 1926년 리처드 앳워터가 번역한 영역본을 저본으로 한 중역본이다. 중역본이라고 해도 원전 번역이 없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동로마제국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롭게 일독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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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 한글개정신판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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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봉 스님의 금강경 강설은 흥미롭지만, 분명히 한계도 있다. 동봉 스님의 사고와 해석에 참신하고 독창적인 대목은 있더라도 불교 사제로서 불교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나와 같은 비신도 관점에서 금강경 이해를 도모하는 사람이 반드시 불교적 이해에만 종속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도올 선생의 책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게 되었다.

 

구판은 나온 지 오래되었고, 한자 표기가 많아서 읽기 불편하다고들 하는데, 개정 신판은 한글 표기를 대폭 늘려서 가독성이 매우 좋다. 도올은 자신의 금강경 강해를 자부하는데, 가장 완전한 고려대장경 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역본이라는 점이다. 요즘은 대장경 판본을 사용한 책들이 몇 권 나왔지만, 초판이 나온 1999년을 염두에 두면 자부할 만하리라.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도올은 거의 일백 면에 달하는 서론을 풀어놓는다. <들어가는 말>, <금강경에 대하여>, <금강경의 의미>,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가 그러하다.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소개글에 해당하여, 금강경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독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본문을 마친 후에는 <경후설>이라는 후기, <감사의 말><아름다운 우리말 금강경을 독송합시다>라고 하여 한글 번역문을 따로 싣고 있다.

 

도올판 금강경의 특징은 각 분, 즉 장 전체를 한꺼번에 싣지 않고, 절로 나누어 강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 몇 장 몇 절 하듯이. 각 절은 한문 원문을 소개하고 한글 독음을 달고 있어 원문을 읽는 데 편의를 제공한다. 이어서 원문 해석, 즉 한글 번역문이 나오고, 강해가 이어지는 구조이다.

 

육조가 여시아문의 아()를 추상화시켜 [......] 라고 해()한 것은 참으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원의의 소박한 뜻에 위배하여 애써 현묘해지려고 노력하는 소치는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P.105)

 

우리가 도올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보다 시원시원함이다. 그는 기존 해석의 안일함에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아무리 옛날의 권위 있는 고승이라고 할지라도 신랄한 비판에 주저함이 없다. 주희가 집주한 논어 등 고전에 내가 학을 떼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성리학과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춘추전국시대의 고전에 성리학의 교조주의적 해석을 잔뜩 넣어 읽는 이를 질리게 만든 것과 같이.

 

도올의 해석은 거침없다. 금강경이 후대에 이렇게 높이 평가되는 까닭은 소승불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대승불교의 문을 연 기념비적 저작이어서다. 대승의 보살은 소승의 아라한을 부정하는 개념이다. 아라한은 선택된 출가자만이 가능하지만, 보살은 출가 여부와 무관하다. 아라한과 부처는 다른 계층이지만, 보살은 깨달음을 통해 부처에 이를 수 있다. 사상(四相)에 집착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묘하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불법(佛法)은 불법이 아닐 때 진정한 불법이라고 말한다. 여래는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P.338, 17-7)일 뿐이다. 그래서 도올은 이렇게 선언한다.

 

불교의 종지는 무아(無我), 대승의 종착은 무아(無我), 보살의 종국은 무아(無我). (P.344)

 

이런 인식으로 종교계를 바라볼 때 도올의 눈에 영 마뜩잖을 수밖에 없다. 강해 중간에 현재 불교와 기독교의 세태를 향한 적나라한 비판이 곳곳에 나타나게 되는 이유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 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P.94)

 

그렇게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는 것이 다 소승 기독교의 폐해다. 한국의 목사님들이시여! 그대들의 신도들을 참으로 대승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사이다. 매일 매일 십일조내라구 쫄린 주머니 털어 공해뿐일 건물 짓는데 우리민족의 신앙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사이다. (P.252)

 

도올의 해석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라는 철학의 틀을 넘어서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강해에서 부처와 예수를 나란히 비교하고, 한자와 영어, 산스크리트어 의미까지 대조하여 설명하는 폭 넓음은 도올에게서만 가능하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P.65)

 

금강경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대동소이하다. 전체 32분에 이르기까지 핵심 문구는 몇 개로 압축할 수 있다. 후반부를 사족으로, 단순한 부연이자 반복으로 깎아내리는 이도 있다. 금강경은 애초부터 독해용 경전이 아니다. 암송용 경전이라면 단순과 반복이 매우 중요하다. 간단한 주제일수록 확실한 각인을 위해 반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다. 여기서 변주가 발생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금강경의 구성을 향한 비판적 인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

 

기대했던 것처럼 무척 흥미롭게 도올의 <금강경 강해>를 읽었다. 서론을 통해 금강경과 대승불교의 의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고, 금강경이 우연히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된 게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란 게 특정한 하나의 깨달음이 아니라는 점, 지식의 습득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정신적 수행이 중요하다는 점,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기에 부처가 될 가능성은 중생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 등. 향후 일 년에 한 편 정도는 다른 불교 경전도 읽어보고 싶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최초의 운동이면서 최후의 말미적 가능성을 포섭하는 포괄적인 내용의 위대한 경전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 전사의 알파요 오메가다.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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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반야바라밀경 조계종 표준본은 소략하여 친절하지 못하다. 경전의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상세한 설명이 있는 책을 찾다가 문득 서가에 이 책이 있는 걸 기억하였다. 이 책은 동봉 스님이 역해한 것인데, 약력을 보면 일찍부터 집필과 방송활동을 꾸준히 하였고 아프리카 사역 활동에도 매진한 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상의 특징은 한글 번역이 선행하고 한자 원문 수록이 뒤따르며, 이어 해설이 나온다. 한글 번역은 4.4조에 4행 구성 형식을 취하는데, 독송에 용이하도록 역자가 의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경 독경은 대개 한자 원문을 읽게 마련인데, 아무 뜻도 모르는 한자보다는 한글이 훨씬 낫다고 본다. 그래서 이 책은 한자 원문에 한글 독음을 달지 않아 원문을 보여주는 데 의미를 두는 듯하다.

 

경전 해설은 본문에 비하면 이런저런 말을 필수적으로 덧붙이게 마련이다. 그래야 소략한 내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하여 이해를 높일 수 있고, 여러 가지 예시를 제공하여 뜬구름 같고 추상적인 내용을 독자의 눈높이까지 끌어내릴 수 있어서다. 역자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과학의 시각으로 경전에 접근한다. 종교와 과학이 배치되는 존재인 듯 간주하지만, 역자는 현대과학이야말로 경전의 진리를 이해하고 접근하는데 유용하다고 평하며, 이로써 불교의 종지가 과학적 토대 위에 기반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교는 매우 과학적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도구로 하여 불교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P.348)

 

그리고 원문이 한문이다 보니, 역자는 한자 뜻풀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한자를 파자하고 세부 글자의 뜻을 재구성하여 원 의미를 강조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살아있음은 두드림입니다. 사람[]은 한결[]같이 맥박이 뛰고[] 있는 목숨[]’입니다. (P.76)

 

이러한 두 방식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에 비해 참신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특히 불교 교리가 전통과학이 아닌 현대과학의 맥락과 닮아있다는 의견은 흥미롭다. 다만 과학 용어와 이론으로 종교를 설명하려 든다면, 불교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아전인수로 비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또한 한자 구성원리를 활용한 뜻풀이의 경우, 금강경의 이차 원전이 한문이니만치 나름 타당성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일차 원전은 산스크리트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조건 한자에 갇혀 이해 접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그 외 자신만의 독자적인 소수설 개진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어 다수설 또는 통설과는 해석의 방향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독자의 이해와 흥미를 제고하기 위한 차원인지 또는 역자 자신의 감흥을 억누르기 어려워서인지 해설 중간에 운문 표현이 간혹 나온다는 점도 이채롭다.

 

금강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왈가왈부하기 어렵다. 이 경전은 고도의 종교적, 철학적, 사유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을 비교적 평이한 어휘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언뜻 이해되는 것도 같으면서도, 서로 모순되는 논의를 전개하는 듯하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도대체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가 헷갈릴 수도 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부처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대강 헤아릴 수 있는데, 문장은 간단하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해야겠다.

 

금강경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대상과 한계가 없다. 보살은 물론 부처 자신도 여기에 해당하고, 부처가 가르치는 최고의 설법 자체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부정하고, 긍정과 부정 자체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스스로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을 접하는 기쁨입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여래라 하여 예외일 수 없으며, 외형의 추구에서도 여래이기 때문에 예외일 수 없다는 말씀은 참으로 우리가 부처님 만난 것을 기쁨 중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P.362)

 

경전 내용만 보면 부처는 물질보다는 정신을 더 높이 평가한다. 어마어마한 물질적 보시보다도 경전 사구게를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설하는 공덕이 더 크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그럼 부처는 물질경시주의자인가 의문이 들 테지만, 역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물질은 누구나 추구하고 귀하게 여기지만, 여기에 매몰되면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기에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금강경>이 가난을 가르친다면 나는 솔직히 불자님들에게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청빈이 아니라 청부淸富를 가르칩니다. 깨끗한 부자가 되길 권하십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게 가난하다면 가능한가요? (P.269)

 

여하튼 금강경은 흥미롭다. 대승불교의 출발에 가깝다는 불교사의 맥락에서 깊이 헤아려보지 않고, 또한 우리나라 조계종의 의고경전이라는 높은 지위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경전 자체 의 분량이 길지 않고, 용어가 평이하여 읽기와 기본 이해가 어렵지 않다.

 

다만 이 책 하나만으로 금강경을 끝내기에는 못내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은 불교 관점에서 스님이 쓴 책이므로 불교의 틀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금강경의 이해가 불교 차원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비불교도의 중생 처지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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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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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관련 또 하나의 책이다. 이 책은 판형이 289*279mm로 먼저 읽은 재원 출판사의 대형 판형보다도 더 크다. 가장 큰 장점은 수록된 작품 도판이 시원시원하다는 점이다. 재원 출판사의 것이 맛보기 정도라면 이 책은 훨씬 많은 수의 그림을, 보다 생생한 채색으로, 고품질의 용지에 담고 있어 전시회 도록과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부는 무하의 삶과 작품으로 무하의 생애를 죽 훑어보고 주요 작품 경향을 다룬다. 무하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1부만으로 전체적 삶과 작품세계를 전망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무하 작품 인생의 후반부는 <슬라브 서사시>로 대표되는 순수 회화이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의 무하 관련 책은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며, 도판 수록도 매우 취약하다. 그 점은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확실히 무하는 후반에 슬라브 문화를 그림에 담아내는 데 집중하였음을 그 외 여러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체코 당국은 <슬라브 서사시>를 위한 박물관 건립을 약속했지만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무하의 기념비는 모두가 무하 스타일을 인정하는 그의 고국의 도시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P.87)

 

여기서 저자는 체코 당국에 쓴소리를 남기고 있으니, 무하에 대한 정당한 인정과 예우를 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것이다. 오늘날 무하 예술의 보존과 홍보를 위한 노력은 그의 자녀가 세운 무하 재단의 공이 크다. 한편 이 책은 비교적 편집이 꼼꼼하고 교정이 잘 되어 있어 신뢰감이 드는데, 딱 한 군데 오기가 있어 아쉽다. ‘성 비누스 대성당’(P.85)성 비투스 대성당이 올바르다.

 

2부는 무하 스타일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무하 예술의 전형은 누가 뭐래도 무하 스타일로 대변되는 상업적인 아르누보 장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무하는 그런 평을 원치 않았겠지만, 1893년에서 1903년 사이에 창작된 포스터, 장식 패널, 광고 디자인 등으로 무하는 당대에 명성을 누렸고 지금도 여전히 추앙받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2부에서 연도별 순서대로 창작된 작품을 소개하고 해당 작품의 내용과 특징을 짤막하게나마 분석한다. 단순히 그림명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작품의 창작 배경과, 작품의 세부 사항과 정확한 이해에 실제적 도움이 되는 유용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무하의 작품 스타일은 분명 개성적이지만, 그가 고립무원에서 창작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점도 유익하다. 19세기 후반기에 무하의 앞선 시기와 동시대 화가들의 창작 경향을 통해 무하의 상업 포스터가 등장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였다.

 

1890년대 프랑스 광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선형 예술은 1860년대초 파리에서 발전되기 시작했다. 에두아르 마네는 1863년 자신의 작품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평면적 색채를 사용하고 명암 표현을 생략했으며 세부 묘사를 단순화해 화면의 2차원적 평면성을 두드러지게 했다. (P.91)

 

무하의 상업예술 작품에서 익숙한 화려한 패턴의 배경을 논외로 하더라도 무하의 인물 표현은 평면적이어서 이전 시기의 인물화와 풍경화 등에서 보이던 주류 회화의 사조와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이 점을 명확히 짚어낸다.

 

무하의 작품세계가 독보적인 까닭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벌였다는 점과, 회화에만 안주하지 않고, 포스터, 광고, 삽화, 조각, 공예, 상품디자인, 의상, 무대장치 등 조형예술의 전반을 두루 섭렵했다는 점에서 다른 미술가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법을 후학도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으니, <장식 자료집><인물 자료집> 등의 책자가 대표적이다.

 

디자인에 대한 유일무이한 작품집으로 자리 잡은 <장식 자료집>은 유럽 곳곳에서 팔렸고,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P.186)

 

이 책은 알폰스 무하의 삶과 작품세계를 충실히 개괄할뿐더러 그의 실제 작품을 훌륭한 도판으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다. 아르누보 예술가로서 무하 스타일을 낳았던 그의 전성기 시절 예술을 이처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다. 다만 이 책의 상대적 단점은 순수예술가로서 알폰스 무하의 다른 일면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책만의 약점은 아니다. 대중들의 관심은 화려한 무하 스타일에 여전히 매혹당한 채 있어 그 너머를 아직 볼 수 없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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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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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빗방울처럼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시민의 삶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시장과 자본의 신성성은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고, 경제적 여유의 수준은 인간적, 사회적 가치판단의 척도로 자리매김하였다. 더더구나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소시민이 재산 증식을 극적으로 도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 수단이 되었다.

 

세상사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를 경제적 이해관계가 차지함에 따라 재산의 많고 적음, 그리고 부동산, 특히 아파트의 소유 여부에 따라 사회계층이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친척과 친구의 부동산 무용담에 이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부러움과 시기심을 품을뿐더러 왠지 모를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사회의 경제적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 루저로서의 낭패감이랄까.

 

김애란 작가는 등단 때부터 유달리 소시민의 삶에 천착하였는데, 그것은 삶의 어둡고 괴로움을 묘사하면서도 한줄기 유머로서 빛을 잃지 않았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터일지 김애란의 작풍은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에서 밝음과 유머는 찾기 어려워졌다. 중견 작가인 그는 이제 세상과 삶의 파고에 지치고 싫증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현실을 그 자체로서 냉엄하게 인식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좋은 이웃><빗방울처럼>은 내 집 마련의 사회적 파장을 다룬다. 내 집, 나아가서 빌라보다는 아파트, 아파트도 구축이 아니라 신축으로 경제적 가치를 범접할 수 없는 계급으로 나뉘는 우리네 현실에서 내 집은 단순한 자가의 의미가 아니다.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상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았을 뿐인데, 남에게 뒤처지는 패배감과 열등감. 게다가 나만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사람이 일거에 의기양양하는 장면. 그것은 삶에 대한 자기반성으로 나아간다.

 

시기니 질투니 하는 말도 모욕적이었지만, 무지니 게으름이니 하는 말도 부당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건 어쩌면 잘못은 정말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P.120, <좋은 이웃>)

 

젊은 윗집 부부와 시우 어머니를 향한 화자의 양가적 감정은 전세 사기로 일순간 풍비박산 난 가정으로 전락한 지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빌라 전세 후 아파트 청약 당첨으로 희망찬 내일을 꿈꾸던 찰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남편 수호는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난다. 지수와 수호 부부가 성실하지 못하였던가, 그들이 무모한 꿈을 꾸었던가.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데, 외국인 도배 여자의 어눌한 한마디가 모국인보다 살갑게 다가온 건 차라리 웃픈 현실이다.

 

평범한 소시민의 패배감은 <이물감>에서도 여전하다.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연령대이지만, 기태는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헤어진 희주를 놓지 못해 그녀의 SNS를 뒤적거리며 잠재적 연인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분별없는 우쭐감을 내보인다. 파트너 지수와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다가 멀어진다. 그의 되새김질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실패한 소시민의 전형으로서 기태의 처지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그것은 신체적 병증이 아니라 마음의 나아가 삶 자체의 증상일 것이다.

 

<레몬케이크> 속 기진은 엄마 선주와 다른 삶을 선택한다. 굳이 장사가 잘될 리 없는 책방을 개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암시한다. 손님도 들지 않는 책방에서 무시했던 돈과 노후는 그녀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돈은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없고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치사한 존재다. 기진의 꿈과 낭만은 현실 앞에서 좌초 지경이다. 돌파구가 될 것으로 믿었던 유명 여행 작가의 행사마저 어처구니없이 취소되자 무력감에 빠진 기진의 눈에 세상사가 전혀 다른 결로 다가온다.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P.214, <레몬케이크>)

 

경제적 승자와 패자의 현실과 인식이 절묘하게 엇갈리는 현장이 <홈 파티>. 홈 파티의 주최자와 참여자는 최고경영자과정 동기 출신 모임이므로 사회적으로 나름 한가락 하는 신분이다. 여기에 가난한 여배우 이연의 참가는 사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등장이다. 젊었던 한때 연극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의 상류층으로 경제력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하는 모습이 이연의 눈에는 역겹고 위선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술의 힘을 빌린 이연의 결연한 한마디로 끝났다면 이 작품의 결말은 매우 밋밋하였으리라. 이연의 행동 실수 하나는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데, 이연의 연기와 오대표의 만족감의 근원은 다르다. 전자는 홈 파티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한 가장된 액션이며, 후자는 루저가 잘난 체해봤자 결국 그럴 뿐이라는 확신의 미소다.

 

오대표의 얼굴에 잔을 잃은 서운함이나 원망 대신 묘한 만족감이라 할까 승리감이 얼핏 스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혀 놀란 기색 없이 마치 오늘 파티에서 얻을 건 다 얻었다는, 이만하면 괜찮은 계산서가 나왔다는 표정을 지은 까닭이었다. (P.41, <홈 파티>)

 

<홈 파티>와 반대되는 상황에 놓인 소시민 부부의 난처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숲속 작은 집>이다. 외국 휴양지에서 한달살이는 하나의 로망이다. 문제는 주택 메이드에게 팁을 주어야 하는지, 준다면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의 사소한 사안으로 불거진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란 화자는 자기 부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엄마와의 관계 설정도 골치 아픈데, 여기서 메이드를 어떻게 대할지도 결코 편하지 않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집안 출신인 남편의 덤덤한 태도와 달리 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메이드를 대하는 화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 양태는 결국 금전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미묘한 영향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화자의 감수성 덕분이라고 하겠다.

 

평소에도 여러 번 들은, 눈 깜짝할 사이 폭삭 늙어버린 엄마가 내게 보낸 고맙다는 문자를 보자, 이상하게 그 말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상대에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P.86, <숲속 작은 집>)

 

우리는 자주 착각한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빛나고 아름다우며 의미 있고 보람찬, 한마디로 행복한 삶이 될 것이라고. 청춘을 지나 중년에 접어들면 우리는 깨닫는다.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내가 제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다람쥐 쳇바퀴 돌게 되고,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엄혹한 현실임을. <안녕이라 그랬어>의 화자도 연하의 애인과 헤어진 후 어머니의 죽음으로 고향집에 주저앉아 나날을 소비한다.

 

삶의 진부한 현상을 돌파하기 위해 원어민 화상영어 수업을 듣는 화자는 화면 속 강사 로버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된 화자에게 있어 로버트와 대화는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가까운 관계보다는 차라리 낯선 타인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다시 보지 못할 존재이므로 마치 나의 내밀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도 덜 창피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화자와 로버트의 대화가 갖는 은근한 따스함은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화자의 앞날을 알지 못한다. 다만 안녕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처럼 그저 평안하길 바랄 뿐이다. 진부한 말이지만 삶이 아무리 곤궁하더라도 그냥 버텨내길 바라면서.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P.249)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작가를 포착한다. 금전적인 부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사회, 윤리, 문화의 모든 영역을 재단하는 오늘날 세태. 기회에 재빨리 편승해서 안락과 우월감을 누리는 계층과 묵묵히 성실하게 자기 앞길만 걸었을 뿐인데 둘러보니 사회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계층의 대비. 소수의 성공자보다는 다수의 실패자가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네 대부분은 실패자, 패배자, 열등한 사람이기 마련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그러한 사회병리 현상을 날카로운 시선과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그려 보인다. 작가는 화자와 독자에게 분명히 이 현상이 잘못임을 말하지만, 섣부른 위로를 더하지 않는다. 안녕이라 말하지만 거기에는 명시적 희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빛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고,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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