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대산세계문학총서 170
에두아르트 뫼리케 지음, 윤도중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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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 뫼리케는 슈만과 볼프의 독일 가곡으로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과 작가로서 뫼리케의 본령은 생소하고 의외로 다가온다. 이 책에 실린 노벨레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와 동화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는 뫼리케를 알기 위한 매우 적절한 선택이다.

 

1.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클래식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로서 영화 <아마데우스>의 이미지가 굉장히 각인되어 있다. 살리에리와의 대결 관계는 이 소설에서도 불구대천지원수등의 표현으로 강조된다. 대중으로서는 모차르트의 때 이른 죽음과, 음모론을 연계하고 싶은 유혹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듯하다.

 

각설하고 같은 천재라도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다르다고 한다. 베토벤의 자필 원고를 보면 무수히 수정과 삭제, 퇴고를 반복한 자취가 있는 반면 모차르트의 그것은 마치 베껴 쓴 듯 깔끔하다고 하니. 그러한 음악이 오늘날 아름답기 그지없는 최고의 명곡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확실히 뮤즈의 영감을 전수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라는 음악사상 전대미문의 현상을 그의 삶과 음악을 연관 지어 이해하려는 문학적 시도다. 빈에서 프라하로 연주 여행을 가는 여정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모차르트라는 다채로운 인물의 불후의 음악과 필멸의 삶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흘러넘칠 듯한 풍요로운 음과 선율로 특징 지어지는 것처럼 그의 삶도 일체의 유보 없는 현세 지향적임을 보여준다. 고도의 초인간적인 영감을 끌어내는 작업에 몰두하는 건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음을 잦은 우울증의 발현으로 암시하면서.

 

제기랄, 나는 사람들이 놓치고 뒤로 미루고 내버려두는 걸 생각해서는 안 되오. 신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얘기하는 게 아니오. 온전한 향유, 매일 우리 발아래 놓인 소박하고 순수한 즐거움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오. (P.14)

 

작가는 모차르트 최후의 대작 오페라 <돈 조반니>와 관련한 설정을 집어넣으면서 시골 혼례식 장면의 사실성을 확보하고, 마지막 석상 장면의 무시무시함을 처음 공개하면서 청중을 충격에 빠뜨리는 동시에 오이게니로 하여금 모차르트의 임박한 슬픈 장래를 예감케 한다. 백작 가문의 여러 사람 중 모차르트를 진실로 이해하는 오직 오이게니 혼자뿐이다.

 

이 사람이 빠르게 그리고 막을 수 없이 자기 자신의 불꽃으로 생명을 불태운다는 것, 그가 발산하는 지나친 불꽃을 실제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지구상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확실, 아주 확실해졌다. (P.95)

 

작가는 이야기를 흐름에 따라 순탄하게 그려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 된 계기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목, 오렌지 나무와 관련한 백작 가문의 오랜 추억 이야기, 모차르트 부인이 털어놓는 소위 여행 가방 안 보물 이야기 등이 삽입되면서 흐름을 방해하는데, 산만하게 보이는 구성은 결국 작가가 의도적으로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다면성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임을 깨닫게 된다.

 

2.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동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 길고 난삽하고 비비 꼬인 줄거리에, 굉장히 긴 삽입 이야기의 반복적 등장 등으로 한마디로 어수선함을 안겨준다. 아마도 동화라는 분류는 이것이 도깨비와 인어, 마법 구두 따위의 비현실적 존재의 등장, 남녀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 등으로 일반적 소설 문학보다는 환상적 요소가 강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작품을 이끌어가는 남주는 기능공 제페이며, 중간에 잠시 여주 브로네의 이야기가 나오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밧줄 타기에서 결합한다. 전체적으로는 제페의 여정이 작품의 동인이 되는데, 고향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여러 지방을 방랑하다가 다시금 고향으로 복귀하는 지역적 배경을 지닌다.

 

너희가 밧줄 위에서 혼인을 약속했다고? 그래, 모든 성인에게 맹세코, 그 바보 같은 짓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 일은 우리 슈바벤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장한 젊은이들아, 행운을 빈다.” (P.221)

 

백작 영주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슈투트가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슈바벤 지방의 향토적, 문화적 색채를 담뿍 담고 있는 일종의 지방주의 문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동화에서 주인공들에게 도움을 주고 끝내 결합시키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탱해 나가는 존재는 난쟁이 도깨비다. 인간에게 분탕질과 해악을 끼치는 유형이 아니라는 점, 이상한 힘을 지닌 측연을 얻기 위해 인간과 거래하는 도깨비는 분명 이채로우면서 흥미 있는 캐릭터라고 하겠다.

 

이 작품 역시 흐름 자체는 매끄럽고 유려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작품 전개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지닌 다채로운 삽화와 회상 등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여기에 작가가 친애하는 독자여하며 직접적으로 작중에 개입하여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늘어놓고 서사 전개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찌 보면 제페의 인생 여행담은 부차적이며, 슈투트가르트 지방의 전반적인 문화와 풍속을 보여주는 게 주안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중 이야기로는 제페가 장인 부인에게 들려주는 파일란트 박사 이야기,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시장 인형극, 슈투트가르트 축제 가장행렬의 흥겨운 장면 등이 나온다. 무엇보다 웬만한 단편 분량으로 들어 있는 아름다운 요정 라우의 이야기가 핵심적인데, 민음사 출간본에서는 이 이야기만 단독으로 실려 있다. 라우, 도깨비, 제페 모두가 측연이라는 물건을 통해 통시대적으로 연결되어 문화적 정체성을 특징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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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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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 번역의 페트라르카 산문선 세 권 중 마지막에 이르렀다. 앞서 읽은 <고독한 생활>이 페트라르카 개인과 종교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반면, <종교적 여가>는 순전히 기독교적 사유를 다루고 있다. <나의 비밀>은 오롯이 페트라르카의 개인적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책의 원제는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갈등에 대하여>라고 한다. 하지만 통상 <나의 비밀>로 불리는데, 이는 페트라르카 자신이 용인한 바다.

 

그러니, 나의 작은 책이여! 너 또한 너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사람들의 모임을 피해서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 소망일 터이다. 사실 너는 나의 비밀이며 또 그렇게 불릴 것이다. (P.16, <서문>)

 

이 산문집은 특이하게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자는 페트라르카 자신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한 페트라르카는 자기 작품 곳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주 인용한다. 페트라르카 사상의 두 축은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진리의 여신이 곁에서 이를 지켜본다고 하는 설정. 두 사람은 사흘에 걸친 진지한 대화를 교환한다. 대화의 주제는 프란체스코가 그즈음 겪고 있는 정신적 위기 진단과 이의 극복 방안이다. 대화를 주도하여 이끄는 존재는 단연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에 비해 프란체스코의 역할은 소극적이며 방어적이다.

 

<인간의 비참함과 구원에 대한 첫 번째 대화>

 

이 대목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이 명쾌하고 단호하게 펼쳐진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 자신이 불행과 비참에서 벗어나려고 열렬히 원하지 않아서라는 것.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인간 자신의 선택으로 악덕을 행하고 스스로 불행에 빠진다. 누구라도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한마디로 뜨거운 소망이 아니라 미지근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소망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단번에 통박 당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그 무엇보다 가장 뜨겁게 소망하고 있지 않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이 열망은 오직 다른 소망을 모조리 없애 버린 사람에게만 온전히 생길 수 있네. 말할 필요도 없이 인생에는 소망의 대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지만, 최고 행복의 욕구로까지 높아지려면 먼저 다른 대상들을 모두 무시해야 하네. (P.39)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대다수 인간의 비참함은 그들 영혼이 이것저것에 많이 사로잡혀 있어서 정작 중요한 자기 영혼의 구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헌신과 전념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는 주장이다. 중병에 걸린 환자는 오직 병이 낫기만을 바랄 뿐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혼의 병에 대한 두 번째 대화>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영혼의 병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짚어나간다. 여기에 등장하는 병은 교만, 시기와 탐욕, 야심, 대식, 분노, 정욕, 우울병으로 기독교의 소위 일곱 가지 대죄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이 이처럼 많은 적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음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 지식의 외연 확장보다도 내면에 대한 이해와 각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하늘과 땅의 크기, 바다의 넓이, 천체의 운행, 풀과 나무나 돌의 일, 자연의 비밀 등을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면, 그래서 무엇 하겠나? (P.66)

 

이러한 의견은 방투산 등반기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세속의 부와 명예를 갈망한 나머지 사후의 영원한 부를 도외시한다고 비판한다. 프란체스코가 이러한 모든 죄악에 다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며 대식과 분노는 가볍게 넘어가지만, 탐욕과 야심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논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네는 세상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버렸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경멸했다는 그 야심을 샛길에서 노리고 있어. 자네의 여가, 고독, 세상일에서의 도피, 그리고 연구 활동이 마찬가지로 야심에 이끌리고 있네. 자네의 연구 활동의 목적도 지금까지 쭉 명예였던 것이야. (P.91)

 

요는 이상의 모든 속된 욕망을 탈피해야 진정한 미덕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만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속의 끈을 놓지 못하는 페트라르카로서는 머리는 알지만 몸은 쉽게 따르기 어려운 요구라고 하겠다.

 

<사랑과 명예욕에 대한 세 번째 대화>

 

여기서는 특히 사랑과 명예욕을 집중하여 다룬다. 이는 특히 페트라르카 개인과 관련하여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해서이다. 당연히 프란체스코는 강력하게 반발한다. 여태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에 고분고분하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반항이다. 명예욕은 물론, 특히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 옹호는 절절하게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자신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으며, 그녀로 인하여 자신이 세속의 유혹을 벗어나서 영혼을 고양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랑도 절대자를 향한 사랑을 앞설 수 없으며, 비등한 수준까지 가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 현재 자네가 그녀 덕택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러나 그녀가 현재의 자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진실을 말하고 있네. (P.143-144)

 

나아가 그는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함을 파헤친다. 개인적으로 <칸초니에레>를 몇 권 읽으면서 의아하였던 게 한 여인에 대한 젊은이의 사랑이 평생에 걸치도록 절절한 감정을 촉발하는 게 가능할까였다. 사랑에 흠뻑 빠져 있던 시기는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수십 년 동안을 절대적 미의 화신으로 라우라를 찬양하는 건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며, 아마도 라우라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단호하게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실제로 자네는 그녀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도 이름에 더욱 매료되어 그 이름과 똑같이 발음되는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허영심으로 우러러보기에 이르렀네. (P.156)

 

페트라르카가 여인의 이름 Laura를 라틴어 Laurea와 자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는 점, 그가 계관시인으로 추대받은 사실을 대단한 명예로 여겼다는 점을 보면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은 곧 시인으로서 자신의 승리를 뜻한다고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에서 역자가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시인 페트라르카에게 연인 라우라가 진실로 탄생한 순간은 아비뇽의 생 클레어 성당에서 아름다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라우레아라는 말이 시인 안에서 자라나 그녀와 일체화되었을 때이리라. (P.228, <옮긴이 해제>)

 

이쯤에서 페트라르카가 생전에 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을 유추할 수 있다. 너무나도 솔직한 내면의 고백이기에 차마 이를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랑의 연가로 명성이 자자한 칸초니에레도 흠이 갈 수 있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에게 사랑과 명예욕을 버리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욕망을 알고 있기에, 다만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숭고함을 지향하려는 영혼의 미덕을 성취함에 있어 저해되지 않도록 조절하라는 정도이다. 매우 온건한 요구이기에 프란체스코가 충분히 따를 만한 수준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고 토로한다. 결국 사흘에 걸쳐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진리의 여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면 다시 처음의 논쟁으로 돌아가게 되네. 자네는 의지가 약하다고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탁하세. 자네가 아직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도 하느님께서 걸음을 인도하시고 안전한 곳에 다다르게 해 주시도록 말일세. (P.217)

 

결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글자 그대로만 보면, 정신적 위기에 빠져 있던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커다란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페트라르카는 여생을 계속해서 방황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명백한 해법을 프란체스코가 스스로 거부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가 가장 중시한 감정인 사랑과 명예욕을 후순위로 놓는 삶을 고르기보다는 정신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끝내 붙잡고 가리라는 의지. 그것은 종교인이 아닌 세속신의 삶, 나아가 결국 그가 성직자가 아닌 시인의 길을 선택한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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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탐사 김성수 - 밝은 길을 찾아가다
이진강.황호택 지음 / 나남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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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설립, 캠퍼스 내 인촌 동상과 인촌기념관, 그리고 친일파 논란.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개략적 수준이다. 명색이 모교의 실질적 설립자인데도. 지인으로부터 넘겨받은 이 책을 의무감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채 읽어나간다, 너무 지루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저자는 인촌의 삶을 6부로 구분하고, 각 부에 길로 이어지는 부제를 붙인다. 희망의 길, 성장의 길, 역사의 길, 가슴 뛰는 길, 공선사후의 길, 이별의 길. 이렇게 길을 제재로 삼은 까닭은 발간사에도 나와 있듯이 전기류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함이며, 역사 여행 하듯이 탐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다.

 

어떻게 보면 인촌이 거둔 성과는 거개가 그의 출신에 기반한다. 전라도 대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금수저 집안이기에 그가 노력했던 교육, 기업, 언론 사업은 자본의 뒷받침 없이는 출발 자체가 어려웠던 만큼 성과가 폄하될 수 있다. 다만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집안의 경제적 부와 개인의 존경받는 삶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인촌도 자칫 비뚤어지고 타락한 삶에 빠지기 쉬웠지만, 선각자였던 두 부친과 장인의 덕택으로 민족의식과 개화사상을 담뿍 흡수하게 된다. 부모의 뜻을 어기고 상투를 자른 채 과감하게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젊은 인촌에게는 모종의 단호함도 엿보인다.

 

인촌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경성방직, 동아일보, 그리고 고려대학교로 대표된다. 중앙학교를 인수하면서 교육사업을 시작한 게 불과 20대라는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다. 인촌은 항일독립투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일체의 일제 저항운동과 연계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이 지향한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겉보기 행적만 보고 그의 소극성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제하 모든 한국인이 투사가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인촌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 이들도 이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며, 전시체제의 강압기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해방 후 정치활동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른 견해도 있겠다. 한국민주당의 성격과 단독정부 수립 주장 등은 토지개혁 정책의 성과 판단과 함께 분명 논쟁적이다. 다만 이승만 정부가 독재로 치닫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부통령직을 사임하는 행동이라든지 조봉암을 끌어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는 정치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준다. 여기서 현실 인식과 역사적 평가의 어려움이 상존한다. 특히 장문의 부통령 사임이유서는 그로서는 드물게 격렬한 감정과 돋보이는 혜안을 표출하고 있다. 더불어 인촌이 진단하는 이승만 정권의 행보와 현 시국의 유사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랬더니 그는 돌연 비상계엄의 조건이 하등 구비되어 있지 아니한 임시수도 부산에 불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소위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하여 계엄하에서도 체포할 수 없는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P.335)

 

인촌의 삶에서 두드러진 점은 탁월한 인적 네트워크다. 송진우, 장덕수와 어릴 적부터 평생에 걸친 지기. 백관수, 현상윤, 김병로 등과의 막역한 지우. 그것은 그가 단지 부호여서가 아니라 그의 인품이 겸손하고 진실하기에 가능하였으리라. 그는 극단주의를 제외한 폭넓은 이념을 포용하는 아량을 지녔기에 여운형, 조봉암 등의 좌파 세력도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비록 직접적으로 독립 투쟁에 나서지 않았지만, 그의 가족들의 면면을 보면 범상치 않다. 3.1 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여성과의 재혼, 아들과 자부, 조카가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상황. 친일파의 아들과 결혼한 딸과의 의절. 그토록 가까이하였던 이광수가 변절하자 일거에 외면하는 단호함 등. 독립 자금 지원과 관련한 여러 일화는 그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행동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에는 인촌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성과와 비사를 담고 있어 인간 김성수를 다양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친일파 논쟁이 주목을 받다 보니 후대의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를 평가하고 매도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그의 죽음에 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애도하고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정도로 추앙받던 인물의 참모습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 그가 일군 경성방직은 민족자본을 대표하는 선구적 기업-영등포 타임스퀘어가 경성방직의 부지라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이었으며, 동아일보는 일제 치하에서 민족을 대변하는 언론이며, 독재정권에서 직필을 꺼리지 않는 정론지였다. 고려대학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명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인촌의 행적을 친일이냐 아니냐의 흑백논리로 재단하면 그는 명백히 친일 행동을 하였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대법원판결도 이 논리를 따른다. 일제 치하에서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암묵적 친일이다. 인촌은 자기 가족과 집안, 그리고 벌여놓은 사업과 학교, 언론을 유지해야 할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혈혈단신 자기 한 몸만 챙기면 되는 경우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면 안 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도, 좌파에서도 인촌을 친일파라고 판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외형상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해서이다. 이 책에 수록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가와, 주봉환 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평가의 잣대는 엄격한 법적 논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본다. 어쩌면 그의 친일 이슈는 동아일보의 언론 위상의 변화와 맞물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별 기대 없이 펼쳐 든 책이지만 웬걸 의외로 내용과 구성이 좋다. 문장도 매끄러워 글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인촌 김성수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탐사 성격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며, 사실에 충실하고 객관성을 놓지 않는 범위 내에서 흥미적 요소를 양념처럼 넣어 묘미를 살리는 등 흔히 편향적이고 따분한 저작이 되는 위험성을 잘 회피하고 있다.

 

아무래도 저자들은 인촌에 우호적이고 옹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인촌의 삶을 탐사하는 책을 쓸 이유가 없으므로. 그러면 독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얻을 수 있을까? 잊혀져 가는 인촌의 업적과, 친일파로 판정된 인촌의 행적을 그의 일생을 거슬러 훑어보면서 작게는 인촌의 개인사를 이해하고, 크게는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다단한 지형과 곡절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면 뜻깊은 성과라고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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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여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4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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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생활>과 이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여가와 여유를 삶의 중요한 요소로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전작이 직접적으로 종교적 삶을 다루지 않는 반면, 이 작품에서는 종교에 초점을 맞춘다. 집필 계기는 동생 게라르도가 입회한 카르투시오 수도회를 방문하고 수도사들과 나눈 종교적 대화의 연속 및 확장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성격으로 기독교 신자라면 전작보다 한층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반면 그렇지 않으면 과다한 종교성으로 흥미가 저하될 수도 있다.

 

종교적 여가의 이점을 알리는 첫 번째 편지수사들에게 당부하는 두 번째 편지로 저작을 구성하고 있는데,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상 각 편이 하나의 기다란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간을 가지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 (P.21)

 

첫 번째 편지는 위 문장에서 페트라르카가 논의를 끌어내고 있다. 참된 이해를 위해서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즉 세속적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그것이 이 책의 표제인 종교적 여가이다. 그는 수도회가 세상과 문을 닫고 엄격한 금욕적 수도를 하는 행위를 기본적으로 찬양한다. 심신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여가를 가져야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페트라르카는 자기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에서 여러 부분을 계속해서 인용하여 권위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빈번한 성경의 인용은 그의 논의가 시종일관 기독교의 가르침 내에서 근거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수사들에게 주의의 말도 아끼지 않는다. 이처럼 투철하게 수도에 정진하다 보면 그것이 지나쳐 유혹에 빠질 위험도 있다는 것. 결코 안전과 방심에 섣불리 기대하지 말며 항상 조심하며 수도의 원래 소망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라는 점. 그는 이러한 여가를 단단한 여가’(P.121)라고 부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상가들의 이론을 기독교에 꿰어맞추려고 애쓰는 대목이다. 키케로는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조차 하느님이 세상의 근본이라는 종교 교리를 입증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여러분은 편안하고 나태하며 여러분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여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종교적이고 순명적인 여러분의 독특한 특질을 고려하여 단단한 여가가 필요합니다. (P.121)

 

두 번째 편지는 더욱 직접적으로 수사들에게 향하는 조언이다. 구성면에서 명확한 단락이나 내용 구분 없이 쭉 이어 나가는 서술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언뜻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의아할 때가 많다. 부분적으로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고 논리적이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전체적 문맥을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옮긴이 해제의 도움을 빌면 페트라르카는 여기서 악마, 세상, 육체라는 영혼의 3대 적의 함정과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당부의 말을 재삼재사 풀어놓고 있다. 해제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위 세 가지 유혹은 명확하게 구별되는 요인이 아니다. 서로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나름 열심히 구분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페트라르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결국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는 게 용이하다.

 

우리가 육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어려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하느님 오직 한 분의 은혜에 의해서입니다. (P.180)

 

기독교의 근본적 태도는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절대자에게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의존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기준에서 키케로를 비판하며, 암브로시우스를 거룩한 사람으로 일컬으며 찬양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키케로는 자존심과 자의식이 지나쳐 오만함에 가까운 사람에 해당해서이다. 악마와 세상의 사탕발림과 겁박에 흔들리며, 육체와 정욕의 희로애락에 오락가락하는 가련한 우리 인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주님의 자비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히에로니무스가 그에게 간청한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 살면서 그것들을 명상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말며, 다른 것은 아무것도 구하지 마십시오.” (P.267-268)

 

마지막으로 페트라르카는 수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종교적 여가 속에서 오로지 절대자에게 귀의하라고. 주변의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눈팔지 말며, 앞으로 계속 나아가라며.

 

<고독한 생활><종교적 여가>를 통해 페트라르카가 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의 정당성이다. 페트라르카야말로 고독한 생활과 여가를 누구보다 누리고 있는데, 기독교 사제로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그는 자기 삶이 최선이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자신이 주창한 삶이 괜찮다면 따라도 좋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일반 대중과 시민 모두에게 해당하지만, <종교적 여가>에서는 아무래도 선택의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수사들은 이미 종교에 헌신하고 매진하기로 선서하였으므로. 그래서 저자는 종교적 기준을 적용하여 종교적 삶에서 여가의 의미를 한층 적극적으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완성되어야 저자가 부르짖는 여가가 세속과 종교에 무관하게 인정받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매우 종교적인 저작이다.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 인용은 물론, 비기독교 고대 철학자의 문장도 오로지 종교적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철저하게 재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특히 성경 문구의 인용은 지나칠 정도로 자주, 그리고 변형적으로 등장하여 비종교인으로서는 읽기가 괴로울 정도다. 처음에는 이러한 각주도 함께 읽어나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경 관련 각주는 외면하게 되었다. 각주를 계속 의식하다 보면 독서 흐름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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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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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P.269, ‘작가의 말’)

 

작가의 말이 작품집 전체의 내용과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의 사고사와 아내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바라보며 섣불리 위로하지 못하는 <입동>의 화자 남편.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반려견의 안락사를 둘러싼 소년 찬성의 망설임(<노찬성과 에반>). 아주 오래되어 사랑의 감정조차 메말라진 연인 도화와 이수의 이야기(<건너편>). <풍경의 쓸모> 속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이선생의 세상사에 물들고 타락하는 모습. 아들의 순수를 믿고자 하는 엄마의 기대를 금 가게 하는 재이의 웃음과 맑은 눈망울(<가리는 손>). 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교사 남편의 죽음으로 방황하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화자 아내. 수록작 중 <침묵의 미래>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여기에 귀결된다.

 

모두가 삶 앞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거나 갈 곳 몰라 표류하는 사람들이다. 삶은 그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외로운 찬성이 우연히 만난 개 에반,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들인 에반 덕분에 찬성은 심적 안정을 되찾는다. 늙은 그를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며 비용을 마련하는 찬성. 여기까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이대로만 계속된다면. 작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에두르지 않고 털어놓는다. 찬성과 에반의 우정이 보여주는 진정의 얄팍함을. 마치 이것이 삶의 실체라는 듯이.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P.81)

 

겉보기에 다문화 가정을 등장시켜 독자의 시선 돌리기에 성공한 <가리는 손>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화자 엄마의 요리 장면이 유독 많은 내용을 차지하는데, 곧 아들 재이에게 향한 화자의 헌신과 진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나쁜 형들한테 보복당할까 겁먹어서 폭력 장면을 목격하고도 거짓말을 하는 재이. 엄마는 재이의 순수성을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마주한 세상 모든 부모는 언제나 그러하다. 마치 학폭 건으로 학교에 가서도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며,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부모처럼. 문득 엄마는 깨닫지만 믿을 수 없다.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P.220)

 

<풍경의 쓸모>는 어떤가. 작가는 성실히 살려고 나름 애쓰는 강사 이선생과 그의 불성실한 아버지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일찍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너무나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인물이라고 하겠다. 이선생에게 아버지는 지향점이 아니라 지양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되묻는다. 가정이라는 영역에서의 도덕성과 올바름이라는 가치 판단을 논외로 한다면 이선생과 아버지 중 누가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교수 임용을 기대하며 교통사고도 대신 뒤집어쓰며 홍삼진액 한 상자를 사 들고 곽교수의 방에 찾아가는 이선생, 그리고 뒤통수를 맞는 이선생. 이선생은 풍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만, 아버지는 풍경의 때를 즐긴다. 그에게조차 씁쓸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늙은 아버지. 이선생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하지만, “더블 폴트”(P.183)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입동>, <건너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공통적으로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 사랑의 설레임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이 핵심이다. <건너편>을 보자. 여기서 도화와 이수는 사랑이 시들어가는 연인의 관계이다. 동거한 지 수년이 경과하고 여전히 구직자 신세인 이수.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자연스레 감정이 그렇게 움직인 것이다. 도화의 마음속엔 일반적인 연인 관계, 함께 앞날을 그려볼 수 있는 남자의 존재가 서서히 떠올랐으리라. 그래서 이수에게 이별을 통지할 때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그녀가 깨달았듯이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P.118)이었다.

 

<입동>에서 상실의 대상은 아이 영우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수년간 근검한 생활을 한 부부에게 기쁨도 잠시 아이의 사망은 존재의 의의를 빼앗아 가버렸다. 억지로 슬픔을 견디고 버티려 애쓸수록 상실의 빈자리는 커져만 가고 부부 사이, 주변과의 관계도 어그러진다. 그들 부부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 있을까, 책임을 지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 벌어진 참극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쨌든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아이의 죽음에도 만사를 내버려 둔 채 그들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P.37)

 

갑작스러운 사랑의 상실은 아이만이 아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화자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일상과 결별한다. 학생을 구하기 위한 교사로서의 책무감, 그것은 훌륭한 자세이지만 아내 처지에서는 의미가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꼭 그랬어야만 했는가, 남편에게 자신은 무엇인가. 사촌언니의 배려로 에든버러에서 마음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게 된 아내. 외견상 아내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 몸의 피부 감기는 실상 그렇지 못함을 보여준다. 허허로움에 불쑥 만난 남자 동창의 몸을 갈구하지만 역시 부질없는 시도. 차라리 몸을 섞었더라면 조금 더 현실 세계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을까. 마지막 대목에서 아내는 남편과의 화해를 조금이나마 시도한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P.266)

 

마지막으로 <침묵의 미래>는 이 작품집에서 이색적인 소설이다.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 언어, , 사회의 관계를 역설적 시각에서 탐구한다. 중앙 정부는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 언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언어 동물원을 세운다. 매우 타당한 조치 같지만, 그 외의 곳에서는 소수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멸종을 막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멸종을 재촉하는 방안인가.

 

소설이란 게, 나아가 문학 자체가 언어를 토대로 하는 예술 형식이다. 언어가 사라지면 비단 문학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소통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 엄격한 통제에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소녀와 소년이 사랑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건 상징적이다. 언어의 본질은 남남 사이에서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무수한 오해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다. 그걸 막거나 피하기 위해 통제한다면 언어의 단절, 소통의 부재로 이어진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P.145)

 

나로서는 작가가 어떤 배경으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 짐작할 수 없다. 인간과 언어의 근본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에서 시작하였는지. 인간사를 관통하는 언어적 소통의 여러 현상에 대응하고자 하는 현실적 이유에서 출발했는지. 여하튼 무척이나 독특하고 기묘하며 쌉싸름한 뒷맛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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