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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 연대기
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24년 8월
평점 :
라시드 앗 딘의 <집사> 최초 3부작을 구입해 놓고 호기롭게 <부족지>에 도전하였다가 뜨거운 맛을 본 후로는 서가에 잘 비치해 놓고 오랫동안 다시 펼쳐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 방대함과 난삽함에 느낀 당혹감에 비례하여 일반독자 수준에서 이해가 잘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책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역자도 마찬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싶다.
몽골제국사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는 <집사>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이번에 한 권으로 된 <몽골제국 연대기>를 내놓게 되었다. (P.9, 서문)
<집사> 전 5권을 완역한 김호동 교수가 원전의 내용을 압축 요약하여 몽골제국 역사를 연대기 형식으로 출간한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북펀딩에 참여하였다. 남들 누구 못지않게 역사를 애호하는 내 마음에 그만큼 <집사>는 커다란 빚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출간 기념 오프라인 북토크에도 참석하였고, 몽골제국에 앞서 유목 제국의 기초 개념을 정리하기 위해 흉노 제국 관련서를 예습 차원에서 읽었다.
이 책은 몽골제국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말은 곧 <집사> 전 5권 가운데, <칭기스 칸기>와 <칸의 후예들>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이며, <일 칸들의 역사>와 <이슬람의 제왕>은 필요한 범위 내에서 일부만 취급한다. 다만 <부족지>는 대체로 빼놓았는데, 일단 여기를 건들게 되면 늪에 빠질 위험성 때문이리라.
칭기스 칸의 일생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고,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는지에 관한 개략적 역사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몽골인들 자신의 관점과 목소리로 그들의 찬란한 역사와 건국의 시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데 있다. 14세기 초, 광대한 몽골제국의 뼈대는 아직 굳건하게 남아 있고,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도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몽골제국은 세계사의 중심이었다. 분명한 한계도 보이는데, 일 칸국의 후기에 편찬된 까닭에 종교적으로 이슬람교에 치우친 관점을 보이며 아무래도 자신들의 조상인 훌레구 및 후손들에 다소간 우호적인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의 군대가 몰고 온 파괴가 이슬람권 각 지방에 미치자 창조주께서는 그 같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파괴를 가져온 바로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 완벽한 위력과 명령을 분명히 드러내신 것이다. (P.57-58)
대제국의 시조와 영웅의 탄생과 관련하여 신화적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여기서도 보게 되는데, 알란 코아가 한 줄기 빛으로 임신하였다는 내용은 우리네 고대 신화와도 유사성을 보여 흥미롭다. 칭기스 칸의 출생에서도 상서로운 징표가 나타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칭기스 칸은 생전 몽골 초원의 통일에 매진하였다. 여러 부족과의 전투 중에서 특히 옹 칸과의 경쟁을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그만큼 옹 칸이 최대의 적수였음과 더불어 칭기스 칸의 부친과 옹 칸이 의형제 관계였음에 더욱 그러하다. 칭기스 칸이 옹 칸에게 적시한 일곱 가지 은혜의 내용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칭기스 칸은 초원 제국의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는 몽골의 이웃한 적국인 금, 서하 및 카라 키타이를 확실히 제압하고, 특히 금에 대해서는 조공 관계를 맺고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가 정주국가인 금을 정복한다거나 멀리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멸망시킬 계획은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음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음은 흥미롭다. 사실상 세계 제국으로의 야망은 호라즘 정복에서 비롯하였다고 해야 한다.
이제 내가 가까운 변경의 적들을 일소하고 모두 복속시켰으니, 우리는 이웃이 되어 지혜와 용기에 근거하여 협력의 길을 걷도록 합시다. 그래서 세상의 번영을 가져다주는 상인들이 마음 놓고 오고 갈 수 있도록 합시다. (P.134)
종래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칭기스 칸 사후, 크게 중국의 원 제국과 네 개의 칸국으로 사실상 분열되었다고 배웠다. 편역자는 이 책에서 전혀 다르게 설명하는데, 그들이 비록 다툼과 갈등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하나의 가계임을 결코 잊지 않았고, 대칸국의 적통성을 존중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쿠릴타이가 개최되면 제국 각지에서 왕족들이 대칸국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제국이 네 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 (P.289)
편역자는 울루스 개념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칸국을 울루스로 대체한다. 킵차크 칸국은 주치 울루스로, 차가다이 칸국은 차가다이 울루스로, 일 칸국은 훌레구 울루스, 대칸국은 카안 울루스로 각기 명명한다. 주치와 차가다이 울루스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른 것이므로 정통성을 지니는데, 훌레구의 경우 자신이 무력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타 울루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훌레구 울루스의 역대 칸들은 카안 울루스의 승인을 매우 중시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헷갈리는 개념인 칸과 카안의 차이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칸은 왕을, 카안은 황제에 해당하는 것. 칭기스 칸도 처음에는 칸이었고 추후에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 칭기스 칸의 후계자인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는 모두 카안이며, 차가다이, 훌레구, 가잔 등은 모두 칸이다.
아릭 부케는 울었고 카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을 닦으면서 “오, 사랑하는 형제여! 이 반란과 분란에서 우리가 옳았는가, 아니면 자네들이 옳았는가?”라고 물었다. 아릭 부케는 “그때는 우리였지만 오늘은 당신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P.308-309)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욕망은 혈육 간 애정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형제 간 충돌에서 승자는 쿠빌라이 카안이 되었지만 이것은 결과의 사안이지 옳고 그름의 사안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쿠빌라이 카안 시기의 카안 울루스의 번영기를 소개한 후 자신의 지역인 훌레구 울루스로 관심을 돌린다.
무패의 신화를 자랑한 몽골군이 유일하게 참패한 세력이 바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다. 비록 몽골군의 주력군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제법 규모가 있는 군대였으며, 무엇보다 몽골군과 훌레구 울루스의 후대 칸들이 여러 차례 복수를 시도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라시드 앗 딘의 군주였던 가잔 칸도 원정에 실패하였으니 이는 결국 훌레구 울루스의 국세가 강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몽골제국 중에서 훌레구 울루스가 가장 일찍 몰락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셋째_독자적인 왕국인 카울리(高麗)와 ...의 싱. 그곳의 군주를 ‘왕’이라고 부른다. 쿠빌라이 카안은 자기 딸을 그에게 주었다. 그의 아들이 카안의 측근인데 그곳의 왕은 아니다. (P.359-360)
이 책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고려에 대한 기록이다. 카안 울루스에 12개의 지방 행정 단위인 싱이 있다고 하면서 세 번째로 고려를 소개하며, 한편으로는 독자적 왕국이라고 기술한다. 몽골제국에 항복한 고려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커다란 틀에서는 몽골제국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김호동 교수는 일반독자의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편의를 도모한다. 우선 지도다. ‘몽골제국 출현 전야의 세계와 몽골 고원의 주요 부족들’(P.48-49)에서 시작하여 칭기스 칸의 대외 원정, 훌레구의 서방 원정, 몽골의 남방 원정 등 14개의 지도를 제공하여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여러 사건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역사서와 기행문은 지도가 필수라는 생각이다.
가계도도 제공한다. 한창 읽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누구의 자손인지 등 친족 관계가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편역자는 주요 인물의 경우 조상과 후손의 계보도를 제시하고 있어 혈연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무척 유용하다. ‘칭기스 칸 조상의 계보’(P.28), ‘칭기스 칸의 증조부 카불 칸의 일족’(P.56)을 비롯하여 주치 가문의 계보도, 우구데이 카안의 가계도, 차가다이 울루스 칸 계보도, 주치 울루스 칸 계보도, 톨루이-쿠빌라이 카안의 가계도, 카안 울루스 카안 계보도, 훌레구 울루스 칸 계보도 등 상세한 계보도를 확인할 수 있다.
편역자가 공들여서 비록 개괄서로 편집하였지만 원전 자체가 현대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실과 여러 일화가 혼재되어 있어 다소간 어수선함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존 세계사, 특히 중국사가 카안 울루스, 즉 원 제국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계를 극복하여 세계사적 관점에서 몽골제국의 전반적 면모가 특히 잘 그려져 있음은 뛰어난 점이다. 편역자는 각 장의 서두에 자신의 견해를 조금 전개하고 있을 뿐, 어디까지나 원전의 충실한 전달에 방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관통하는 기조는 어디까지나 저자 라시드 앗 딘의 목소리다.
다시 한번 편역자 강호동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책을 밑받침으로 삼아 언젠가 <집사> 전권 완독에 도전해 보겠다는 결심을 새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