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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김효신 번역의 페트라르카 산문선 세 권 중 마지막에 이르렀다. 앞서 읽은 <고독한 생활>이 페트라르카 개인과 종교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반면, <종교적 여가>는 순전히 기독교적 사유를 다루고 있다. <나의 비밀>은 오롯이 페트라르카의 개인적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책의 원제는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갈등에 대하여>라고 한다. 하지만 통상 <나의 비밀>로 불리는데, 이는 페트라르카 자신이 용인한 바다.
그러니, 나의 작은 책이여! 너 또한 너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사람들의 모임을 피해서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 소망일 터이다. 사실 너는 ‘나의 비밀’이며 또 그렇게 불릴 것이다. (P.16, <서문>)
이 산문집은 특이하게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자는 페트라르카 자신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한 페트라르카는 자기 작품 곳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주 인용한다. 페트라르카 사상의 두 축은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진리의 여신이 곁에서 이를 지켜본다고 하는 설정. 두 사람은 사흘에 걸친 진지한 대화를 교환한다. 대화의 주제는 프란체스코가 그즈음 겪고 있는 정신적 위기 진단과 이의 극복 방안이다. 대화를 주도하여 이끄는 존재는 단연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에 비해 프란체스코의 역할은 소극적이며 방어적이다.
<인간의 비참함과 구원에 대한 첫 번째 대화>
이 대목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이 명쾌하고 단호하게 펼쳐진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 자신이 불행과 비참에서 벗어나려고 열렬히 원하지 않아서라는 것.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인간 자신의 선택으로 악덕을 행하고 스스로 불행에 빠진다. 누구라도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한마디로 뜨거운 소망이 아니라 미지근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소망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단번에 통박 당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그 무엇보다 가장 뜨겁게 소망하고 있지 않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이 열망은 오직 다른 소망을 모조리 없애 버린 사람에게만 온전히 생길 수 있네. 말할 필요도 없이 인생에는 소망의 대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지만, 최고 행복의 욕구로까지 높아지려면 먼저 다른 대상들을 모두 무시해야 하네. (P.39)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대다수 인간의 비참함은 그들 영혼이 이것저것에 많이 사로잡혀 있어서 정작 중요한 자기 영혼의 구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헌신과 전념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는 주장이다. 중병에 걸린 환자는 오직 병이 낫기만을 바랄 뿐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혼의 병에 대한 두 번째 대화>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영혼의 병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짚어나간다. 여기에 등장하는 병은 교만, 시기와 탐욕, 야심, 대식, 분노, 정욕, 우울병으로 기독교의 소위 일곱 가지 대죄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이 이처럼 많은 적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음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 지식의 외연 확장보다도 내면에 대한 이해와 각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하늘과 땅의 크기, 바다의 넓이, 천체의 운행, 풀과 나무나 돌의 일, 자연의 비밀 등을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면, 그래서 무엇 하겠나? (P.66)
이러한 의견은 방투산 등반기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세속의 부와 명예를 갈망한 나머지 사후의 영원한 부를 도외시한다고 비판한다. 프란체스코가 이러한 모든 죄악에 다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며 대식과 분노는 가볍게 넘어가지만, 탐욕과 야심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논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네는 세상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버렸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경멸했다는 그 야심을 샛길에서 노리고 있어. 자네의 여가, 고독, 세상일에서의 도피, 그리고 연구 활동이 마찬가지로 야심에 이끌리고 있네. 자네의 연구 활동의 목적도 지금까지 쭉 명예였던 것이야. (P.91)
요는 이상의 모든 속된 욕망을 탈피해야 진정한 미덕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만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속의 끈을 놓지 못하는 페트라르카로서는 머리는 알지만 몸은 쉽게 따르기 어려운 요구라고 하겠다.
<사랑과 명예욕에 대한 세 번째 대화>
여기서는 특히 사랑과 명예욕을 집중하여 다룬다. 이는 특히 페트라르카 개인과 관련하여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해서이다. 당연히 프란체스코는 강력하게 반발한다. 여태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에 고분고분하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반항이다. 명예욕은 물론, 특히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 옹호는 절절하게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자신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으며, 그녀로 인하여 자신이 세속의 유혹을 벗어나서 영혼을 고양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랑도 절대자를 향한 사랑을 앞설 수 없으며, 비등한 수준까지 가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 현재 자네가 그녀 덕택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러나 그녀가 현재의 자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진실을 말하고 있네. (P.143-144)
나아가 그는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함을 파헤친다. 개인적으로 <칸초니에레>를 몇 권 읽으면서 의아하였던 게 한 여인에 대한 젊은이의 사랑이 평생에 걸치도록 절절한 감정을 촉발하는 게 가능할까였다. 사랑에 흠뻑 빠져 있던 시기는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수십 년 동안을 절대적 미의 화신으로 라우라를 찬양하는 건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며, 아마도 라우라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단호하게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실제로 자네는 그녀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도 이름에 더욱 매료되어 그 이름과 똑같이 발음되는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허영심으로 우러러보기에 이르렀네. (P.156)
페트라르카가 여인의 이름 Laura를 라틴어 Laurea와 자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는 점, 그가 계관시인으로 추대받은 사실을 대단한 명예로 여겼다는 점을 보면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은 곧 시인으로서 자신의 승리를 뜻한다고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에서 역자가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시인 페트라르카에게 연인 라우라가 진실로 탄생한 순간은 아비뇽의 생 클레어 성당에서 아름다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라우레아라는 말이 시인 안에서 자라나 그녀와 일체화되었을 때이리라. (P.228, <옮긴이 해제>)
이쯤에서 페트라르카가 생전에 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을 유추할 수 있다. 너무나도 솔직한 내면의 고백이기에 차마 이를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랑의 연가로 명성이 자자한 칸초니에레도 흠이 갈 수 있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에게 사랑과 명예욕을 버리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욕망을 알고 있기에, 다만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숭고함을 지향하려는 영혼의 미덕을 성취함에 있어 저해되지 않도록 조절하라는 정도이다. 매우 온건한 요구이기에 프란체스코가 충분히 따를 만한 수준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고 토로한다. 결국 사흘에 걸쳐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진리의 여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면 다시 처음의 논쟁으로 돌아가게 되네. 자네는 의지가 약하다고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탁하세. 자네가 아직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도 하느님께서 걸음을 인도하시고 안전한 곳에 다다르게 해 주시도록 말일세. (P.217)
결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글자 그대로만 보면, 정신적 위기에 빠져 있던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커다란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페트라르카는 여생을 계속해서 방황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명백한 해법을 프란체스코가 스스로 거부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가 가장 중시한 감정인 사랑과 명예욕을 후순위로 놓는 삶을 고르기보다는 정신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끝내 붙잡고 가리라는 의지. 그것은 종교인이 아닌 세속신의 삶, 나아가 결국 그가 성직자가 아닌 시인의 길을 선택한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