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 5 - 아, 한산대첩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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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5권에서 이순신은 한산도대첩을 거쳐 부산포해전을 통하여 왜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부산포 일대에 묶어두는데 성공한다. 한산도해전에서 선보인 학익진이라는 절묘한 진법의 사용은 이순신이 얼마나 창조적인 연구자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순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던가를.

이순신은 기록에 따르면 평생에 걸쳐 전장에서 세 번의 큰 부상을 입는다. 처음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전투 중에 다리에 화살을 맞는다. 그리고 사천해전(?)에서 조총을 맞아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친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목숨을 앗아간 노량해전에서의 흉탄(일부에서는 그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장수가 전쟁에서 부상당하는 게 무슨 그리 큰 일인가 쉽게 넘겨버린다. 여차하면 수백, 수만 명의 병사와 백성들이 몰살당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하지만 남의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내게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느낌이 남다르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크건 작건 부상을 당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인큐베이터 속에서 곱디 곱게 자라지 않은 이상. 교통사고 같은 대형 사고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다리를 삐끗하기도 하고 팔이나 다리가 부러지기도 한다. 더 작게 들어가 보면 칼에 손을 베기도 했고, 남들과 다투다가 주먹다짐을 하여 눈자위가 퍼렇게 되거나 코피가 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각종 경험의 순간에 우리들이 느낀 아픔을 어떠했는지 상기하고 싶다.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으며, 이 부상이 상처가 영영 치료되지 않아 평생을 불구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공포에 질려 벌벌 떨었던 적도 있다. 아픈 몸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절망하게 되고 만사를 포기한다. 즉 자포자기하는 것이다. 나를 믿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엄마'와 '아빠'를 애닯게 외친다.

오늘날 질병과 부상이 과거에 비해 줄어들지는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 병마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현대의학은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 우리 조상들을 그렇게 괴롭혔던 천연두와 소아마비 등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외과수술을 통해 웬만한 부상과 상처는 흔적도 없이 완치가 가능해졌다.

영화나 TV 등의 대중매체를 통하여 우리는 폭력에 너무 둔감해졌다. 조폭들이 난무하고 칼에 찔리는 것은 예사이며, 총격전을 재미 삼아 벌인다. 영화 한 편에서 수백 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400여 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자. 만일 내가 당신이 칼에 찔리거나 화살에 맞았다고 할 때, 어떻게 치료를 하였을까를 되새겨보자. 당시 마취제가 있었을까. 병균이 옮지 못하도록 철저한 방균,무균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을까. 그렇지 못하리라. 상처중 아니면 수술중에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한 수혈도 제대로 없었다. 이때의 수술은 그야말로 생살을 찢는 고통, 뼛속을 저미는 괴로움 그 자체이리라.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기절도 했다. 요행히 그럭저럭 수술이 성공하였다손 치더라도 수술전 몸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제대로 팔에 힘이 들어가지 못한 경우도 있다. 또 후유증 때문에 궂은 날 상처자리가 움찔거리고 삭신이 쑤신다. 

우리들이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만약에 한 번이라도 겪었다면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다. 왜! 그것이 얼마만한 아픔과 괴로움을 수반하는지 충분히 체득하였으므로.

병상에 누우면 철저한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내 아픔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아무리 옆에서 울며불며 하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아픔일 뿐, 내 자신의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이때는 확연한 남이다. 나와 나 아닌 존재, 병마와 부상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는 실존의 순간이다. 그것은 절대고독의 자리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은 자주 앓아 누웠다. 그의 몸은 강건한 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그의 몸이 골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과시험에 급제하지도 못했을 테니. 그렇다면 그의 건강은 잇따른 부상을 통해 급격하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부상과 불완전한 치료, 후유증, 그리고 이것의 반복. 한가로이 요양하면서 약해진 몸을 추스를 시간적, 심적 여유가 그에게는 없다. 눈앞에서 강산을 침범하고 백성을 절멸시키는 왜적을 몰아내는 일, 그것이 무엇보다도 그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순신과 같은 자리에 있더라면 똑같은 길을 걸었을까? 쉽사리 답변을 하는 자는 둘 중의 하나다. 진정 위인이거나 아니면 위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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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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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4 - 조선의 칼, 조선의 방패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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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에 이르러서 드디어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 이순신의 위업이 시작된다. 옥포해전에서 한산도대첩 직전까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왜냐하면 작가의 목적은 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벌이고 이순신의 뛰어난 업적을 화려하게 드러내는데 있지 않다.

작가가 누누이 드러내고 싶어하는 이순신의 강점이 바로 '패배의 가능성을 말끔히 제하는 일'이다. 이순신은 섯불리 왜적에게 덤벼들다가는 몰살당하고 말며, 그러면 조선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있다. 따라서 같은 편이 보기에도 때로는 비겁해 보일 정도로 안전하고 조심스럽게 모험을 회피한다.

얼마전에 며칠동안 남도를 돌아다니며 문득 느낀 바가 있다. 말로만 듣고 화면으로만 보던 조수간만의 차가 빚어내는 엄청난 넓이의 갯벌. 그것은 단지 물이 빠진 공간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한 그 곳. 경운기로 오가야 할 정도의 광막한 공간이 바로 갯벌이었다. 자칫 해전을 벌이다가 까딱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 함선은 갯벌에 주저앉고 만다. 이순신은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시각까지도 절묘하게 계산하여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시야를 가릴 것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해전과 남도처럼 해안선이 들쭉날쭉하고 크고 작은 섬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곳에서의 해전은 방법론이 동일할 수 없다. 전자에서라면 오로지 힘과 힘의 대결이 가능할 것이다. 군사들의 사기를 추스리고 용맹을 발휘하여 적선을 깨뜨릴 수 있는 측이 승리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후자라면 사정이 다르다. 대책없이 돌진하다가는 순식간에 후면과 측면에서 복병을 맞이하고 포위당하기 십상이다. 더우기 섬을 끼고 빙 돌아서 후방이 공격당할 위험도 있다. 그래서 이순신은 꼼꼼하게 적이 있을 만한 곳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부수고 전진한다.

며칠전 서점에서 신간들을 들치다가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남천우, 미다스북스)를 약간 훑어볼 기회가 있었다. 과학자인 저자답게 논리적 근거로 이순신과 거북선에 관한 통념을 비판하고 있어 참신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조선군의 판옥선과 왜선의 크기 비교에 관한 것이다. 흔히 판옥선이 크고 단단하여 상대적으로 작은 왜선을 돌진하여 깨는데 유리하였다고 사서나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왜선의 크기가 더 크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왜선은 대양항해를 견딜 만큼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확실히 난중일기 등을 보면 왜선의 대선에는 삼층 누각이 놓여진 경우도 있다고 하니 단순히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선 한 척에 수백명에서 천명 가까이 탑승했다고 하며, 따라서 이순신이 해전을 통해 몰살시킨 왜군의 숫자는 이십만에 가까우리라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확실히 이 정도의 전사자가 발생했다면 왜군에게는 치명타일 것이며, 부산포에만 웅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왜군이 서해로 돌아서 직접 의주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전라도를 지킨 공적외에 왜군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궤멸시켜 전투력을 급격하게 줄인 공로도 엄청나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국영웅의 이순신이라는 고정관념에 익숙해 있다. 나또한 어릴적부터 '성웅' 이순신을 존경해 왔다. 그것은 목숨을 희생하며 나라를 구한 위인에 대한 상투적 존경심이었다. 이순신의 무엇이 위대하며 전쟁에 임하는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쫓겨났을때 그 슬픔과 괴로움과 분노가 어떠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김탁환의 이 작품은 사실과 가능성 여부를 떠나 새삼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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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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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3 - 폭풍 전야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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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8권 중 제3권에서는 드디어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패주하는 것으로 일단락한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에서 순식간에 몇등급을 거쳐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인사발령이다. 기업의 경우라면 대리에서 일약 이사로 승진한 셈일까. 류성룡은 이순신이 너무나 필요했다. 그래서 반대파를 무릅쓰고 강수를 둔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실패하면 류성룡도 정치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조선시대에서도 피추천자의 과오는 추천자에게도 책임을 묻는 관행이 있었다.

발탁인사에는 의례 불만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조직일수록 더욱. 그런 점에서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장수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반발한다. 타부서의 하급자가 자신의 상급자로 영전오니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따라서 이순신이 어떻게 전라좌수영을 장악하고 강군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순신하면 곧 거북선이 연상된다. 이제 왠만한 사람이라면 거북선이 이순신이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혼자서 거북선을 고안하고 제작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도 조선은 엄청나게 규모가 크며 기술과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따라서 거북선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우리는 이를 간과하고는 한다.

이상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나는 이순신이 정말로 위대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류성룡의 말처럼 勇將은 여럿 있다. 원균, 이일, 신립 등. 하지만 치밀한 계책과 만반의 준비 없는 용맹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이순신은 바로 智將 이었던 것이다. 국민병법서인 손자병법에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라고 하였듯이 이순신은 적을 알고자 노력했고 위태롭지 않은 싸움을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뇌하였다.

선조의 일본정복 야망은 한마디로 생뚱맞다. 바로 '나를 알지'도 못하는 한심한 형편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華夷觀에 물들어서 군자를 구하는 조선에게 어찌 오랑캐 왜놈 따위가 상대가 되느냐는 일갈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성인군자는 총칼도 비껴가는 모양이다.

허구인 소설에 지나친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하겠지만, 역사소설은 史實을 뼈대로 구성된다. 따라서 허구에서 상사하고 유추하여 역사를 재평가하고 이해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讀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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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불멸의 이순신 2 - 활을 든 사림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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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은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장수로서 북방 육진에서 영욕을 겪다가 전라좌수사가 되기 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순신은 생애 백의종군을 2번 당했다. 그 처음이 녹둔도 전투의 실패였다. 전투의 자세한 부분은 1권 맨처음 장면에 등장한다.

김탁환이 하필이면 녹둔도 패전으로 이 소설을 출발했는지 궁금하다. 그 점이 TV 드라마와의 차이점(노량해전으로 시작)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익히 잘 모르는 이순신의 실패를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순신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는다는 진부한 격언처럼 이순신이 그 뼈아픈 패전에서 감내하는 굴욕과 뼈저린 각오를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의 벼슬살이는 원칙과 소신에 대한 세류와의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부침을 거듭한다. 승진 청탁을 거절했기에 외직으로 쫓겨났고, 오동나무를 베지 않았던 탓에 빌미가 되어 실직을 당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시속에 맞출줄 알았다면 그렇게 험난한 삶을 꾸려나가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 마저 든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림'이다.

소설 속에서 한 여인이 스러지고 다른 여인이 나타난다. 이순신과 여인, 정사와 난중일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도 당당한 일개 남성이기에 여인을 배제할 수는 없으리라. 또한 딱딱한 전쟁역사물에서 여인의 등장은 삭막함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을테니 작가가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박미진'이라는 인물이 소설적 구성에서 어떠한 필연성을 갖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녀는 이순신 주변에서 언뜻 모습을 비치는 듯하다가 곧 세상과 작별한다. 굳이 연관성을 들자면 어린 박초희와의 만남이라고 할까.

이 작품은 장편소설치고는 엄청난 분량인 총 8권짜리다. 이순신의 불멸성을 감동적으로 표출하기 위하여 방대함이 요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이나 너무 많은 요소들을 그리기 위하여 무리한 인물 설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하소설도 아닌데.

이렇게 생각이 들자 계속해서 작품 전개의 느슨성이 마음에 걸린다. 조금만 더 아껴두었으면 어떠하였을까.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면 상상력을 방해한다. 약간 감추어 두었을때 갖는 아름다움이 '여백의 미'가 아닐까.

김탁환의 신작 소설이 나왔다고 한다. '부여현감 귀신체포기'라고. 그의 작품 이력을 보건대, 김탁환은 스토리 텔링에 큰 관심을 지닌 듯 하다. 소설의 스토리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 어쩌면 그것은 섣부른 사상 투입보다도 더 가치가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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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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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1 - 의협의 나날
김탁환 지음 / 황금가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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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지만,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사극을 방영한다고 할때, 굉장히 게시판이 시끄러웠다. 골자는 원작을 통해 보건대 원균을 띄우는 것은 참겠지만, 악의적으로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왜곡하는 내용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작가가 얼마나 사실(史實)을 의도적으로 곡해했는지에 대하여 모 교수가 비판한 글도 널리 회자되곤 하였다.

나 또한 맹렬한 비판자 대열에 동참하였다. 역사란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해 볼 자유가 있고, 그럴 가치도 있지만 빨래를 짜듯 억지로 비틀어서는 안된다. 비록 군사정권에 의하여 지나치게 우상시되는 바람에 역풍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런 영웅을 무참히 짓밟다니.

TV를 외면하다가 요즘 이따금씩 문제의 사극을 보았다. 드라마와 원작이 항상 동일한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듯하다. 너무 과장하지만 않는다면 허균에 대한 재평가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사와 야사간에 때로는 괴리가 심하다는 것을 알며, 대개는 야사가 옳다는 것도 안다. 그런 의미에서 불현듯 원작 소설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김탁환은 누구이며, 원작 '불멸의 이순신'은 과연 이순신 죽이기를 의도한 쓰레기 같은 글에 지나지 않는가. 그것이 내가 책을 펼쳐들게 된 계기였다.

이제 1권을 갓 끝낸 마당에 섯부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엄연한 소설이지 역사서가 아니다. 1권에서 이순신은 아직 무과에 급제하지도 않은 상태다. 이순신에 관한 많은 기록들은 무관이 된 이후 부터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관한 사료는 전무하다시피 할 정도인데, 여기서 작가는 수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 간극을 메우려고 한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패망하는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져 내려져온 천상의 존재가 아니다. 천재적 영감에 의하여 거북선을 만들고 왜침에 대비하였던 것이 아니다. 장년기 이후의 그를 형성한 기본 골격을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김탁환이 1권에서 힘써 그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확실히 종래의 소설과 비교할 때, 원균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그와 이순신은 가는 길이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원균은 '무인'이지만, 이순신은 '칼을 든 사림'이다.

소설적 구성 측면에서 볼 때, 1권의 약점은 먼저 이순신이 활을 쏘아 죽인 왜인의 복수로 금오산 일대가 쑥밭이 된 것을 보고 다시금 왜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 부분이 지나치게 작위성이 강하여 스토리 전개의 자연스러움을 크게 해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순신의 기나긴 방황의 사유가 조부와 뜻을 같이한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라는 단 한가지라는 점. 어릴때부터 품어온 분노를 서른살때까지 그대로 가슴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너무 평면적이어서 이야기 전개의 심층적 구성을 저해하고 있다.

역사성에도 주목하겠지만, 소설의 첫째 기준은 작품성이다. 사실을 뒤로 보고 때로는 거꾸러 흔들어서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망과 상상력을 가져올 수 있다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김탁환이라는 작가가 그저 선정성을 노린 뜨내기가 아니라 '방각본 살인사건' 등 이미 여러 역사소설을 집필한 작가임을 믿고 싶은 것이 현재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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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11-1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5.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