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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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에서는 욕망의 냄새가 풍긴다. 심리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성과 감성으로 걸러지고 정제된 욕구와는 다른 의미다. 보다 원초적이고 본능과 맞닿아 있으며 육체적이다. 그것의 일단은 말초신경인 반면 다른 일단은 생명의 본질로 연결된다.

 

욕망은 물과 같아야 한다. 맑고 투명해야 하며 언제나 흘러서 고이거나 막힘이 없어야 한다. 욕망은 생명체에 내재적인 것이기에 충족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무슨 연유로 욕망의 충족이 방해를 받아서 좌절되거나 억압될 때 인간의 심리적, 신체적 반응도 왜곡되고 만다. 즉 정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천운영의 글에서 맡을 수 있는 욕망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은 좌절된 욕망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장면과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표제가 낯익은데 확인해 보니 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내용을 읽다 보니 확실히 기억이 새롭다. 당시에 적은 촌평을 보니 작가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조감하지 못하고 단지 단편 하나만으로 섣부른 예단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명확하게 노정된다. 사진사인 그와 아내의 관계는 순탄치 못하다. 노쇠해지는 자신을 절감하는 그. 젊음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아내의 행동을 보면서 그는 젊음을 시기하고 질투한다. 늙음은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언젠가 닥쳐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정하지 못한다. 문제는 아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에게 있다. 여자의 벗은 몸에 아무런 감동도 없이 냉소적인 그의 열등감과 패패주의. 그래서 후반에 녀석과 노파의 누드 사진 장면을 보면서 늙음이 더 이상 안쓰럽고 추악한 것이 아님을 발견하는 그의 변화는 놀랍기만 하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의 관계도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모녀와 허구한 날 눈물로 하소연하는 부자. 낳자마자 곧 죽게 된 미숙아 동생의 넋이 가족 간 문제의 출발로 외견상 인식되지만 실상 이는 구실에 불과하다. 어긋난 세상과 단절된 가족이 눈물을 빼앗아갔다. 눈물을 감정의 늪으로, 굴복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는 그녀. 그녀는 눈물 대신 차라리 오줌을 싼다. 눈물과 오줌은 모두 생리적 측면에서 동일한 배설작용이다. 그럼에도 양자는 분명한 차이를 지닌다. 오줌은 순전한 신체적 반응이지만 눈물은 정서적 반응이다. 눈물은 감정의 지각과 교환의 의미를 지닌다. 작품에서 천도제의 효과는 죽은 넋을 달래어 돌려보냄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막혔던 감정의 교류를 트이게 해주고 있다.

 

<알리의 줄넘기>의 주인공 소녀 알리는 건강한 인물이다. 흑인 혼혈아라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회적 치부를 슬그머니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언론에서 계속 다문화를 외치지만 우리네는 여전히 단일민족의 신화에 익숙하다. 하다못해 혼혈이라도 백인이라면 대접이 다르다. 알리의 할머니 제니는 슬픈 역사의 당사자이며, 알리의 사라진 아버지는 피해자이다. 흑인 혼혈아가 갈 수 있는 길은 다양하지도 넓지도 않다. 여기서 작가는 편견과 선입견에 젖은 우리네들이 그들을 어떻게 얼마나 좌절시키는지 깨닫게 한다. 그럼에도 알리는 움츠러들거나 옆길로 새지 않는다. 그녀는 의연하고 당당하게 내일을 꿈꾸고 대비한다.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면서.

 

<내가 데려다줄게>는 신화적이다. 여제자를 성폭행했다고 비난받고 쫓겨난 남자 교수. 그는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가 눈을 뜬 후 맞이하게 된 사람들과 장소는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시간은 문제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계획 따위는 필요 없었다”.(P.118) 그곳에서 그는 노파와 계집애, 그리고 여자와 함께 자연스러운 일상을 누린다. 그곳의 생활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 명확하지 않다. 노인의 말처럼 그들이 끔찍한 여자들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그러하다. 이는 그의 진실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지막까지 고민한 결백은 뱀의 실체일까 아니면 허물에 불과한 것인가. 오랜 기러기 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견딜 수 없는 욕정의 발현이 힘과 권력과 지위를 전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일까? 스스로 옷을 벗도록 사내가 종용한 것은 아니었을까?”(P.131) 이제 사내의 진실은 늪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품위 있지만 내적으로는 속물적 욕망으로 가득 찬 위선적 여성. 최고급푸드스타일리스트답게 화려하고 풍성한 테이블 세팅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작가의 현장 조사의 충실성을 떠올리게 한다. 백조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수면을 떠다닌다. 반면 수면 아래에서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고 한다. 여자에게 있어 삶은 유사하다. “화려하고 완벽한 식탁은......좀더 아름다운 화면을 선사할 스토리이며 연기일 뿐이었다.”(P.203) 그래서 여자는 혈통 좋은 비숑 프리제와 잡종견의 달콤한 신혼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네 마리의 새끼라니. 소설이 여자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비극과 비참으로 종결됨은 당연하다. 삶은 연기가 아니다.

 

<내가 쓴 것>의 주인공은 <백조의 호수>과 다소간 유사하다. 소설 속 소설 형식을 차용하여 작가이자 교수인 여성의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리고 있다. 1부에서 화자인 나는 여교수를 노련한 창녀로 표현한다. 마치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것처럼. 2부에서 여교수는 젊은 애인과의 이별을 수용하지 못한다. 남자의 집에 숨어들어가 그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지만 결국 얻게 되는 젊은 애인과 새 여자친구 간의 대화에서 듣게 된 모멸감 뿐. 3부는 여교수의 외도를 알게 된 남편의 자살 이야기다. 재밌는 것은 작가 후기다. 여기서 작가는 스스로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여교수임을 밝힌다. 그리고 소설쓰기란 죄의식을 갖고 빚을 갖는 행위임을 역설한다.

 

<후에>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세계다. 자매의 교차적 진술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참다운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자성해 보게 한다. 이혼 및 사별로 인한 결손 가정은 구성원에 상당한 나쁜 영향을 끼친다. 사랑하고픈 욕망과 사랑받고픈 욕망이 정상적으로 실현되지 못하여 감정 교류에도 지장을 준다. 어쨌든 작중에서 애비가 떠난 이후 엄마와 자매는 나름대로 낙원의 삶을 살았다. 불결한 위생이 원인이 되어 방송의 집중 조명을 받은 이후 가족의 삶은 분리된다. 외부의 개입에 반응하는 각자의 대처는 모두 다르다. 현재의 구질구질함을 각성하고 걸림돌로 전락한 가정을 버리고 밖으로 날아가 버린 엄마, 현상에 순응하고 열심히 청소하는 언니, 그리고 과거의 지저분하지만 안온한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동생. 행복의 잣대에 대한 동생의 논평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작중과 같이 하나의 관점에서만 평가받는 것에 대한 부당성의 제기. 한편 그네들의 행복하였다고 느낀 나날이 진정 행복하였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

 

말미의 해설에서 평론가는 작가 천운영의 작품세계의 변화를 욕망에서 사랑으로라는 표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노래하는 꽃마차>이다. 이것은 소외와 상실, 그로 인한 상처는 물론 나아가 상처의 이해와 보듬음이 잘 나타나 있다. 거인가족의 찬양사역단에서 작은 아이는 환영받지 못한다. 오빠에게 신체를 유린당한 계집아이. 몸과 영혼이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를 갖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게 된 그. 작품은 그녀와 그의 이야기가 역시 교차 진행한다. 부재한 부모의 사랑과 좌절된 사랑의 욕망은 그녀의 육신에 봄이 오면 꽃을 피게 만들었다. 그는 비로소 그녀를 알게 된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간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득 이 단편의 묘미는 내용보다도 표현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유랑극단의 변사를 연상시키는 낭송 스타일의 운율적 대사체. 삶의 슬픔도 고난도 모두 별것 아닌 양 설렁설렁하게 넘어가는 어조에서 사랑조차도 노래하는 꽃마차마냥 진정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 사랑은 시기상조인 듯.

 

이 책은 천운영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장편소설도 한 편 있다. 작가의 이전 작품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섣부른 단언은 금물이다. 하지만 적어도 욕망이라는 어휘가 수록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이것이 전작들과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 변화의 모색 도상에 있는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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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잡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365
민주면 지음, 장창은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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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잡기는 1669(현종 10) 경주부윤으로 있던 민주면이 향중 인사인 이채, 김건준 등과 함께 편찬, 간행한 경주부 읍지다. [해설에서]

 

책의 성격이 고을의 공식적 현황 보고서이므로 서술은 간략하고 평이하며 건조하다. 따라서 이 책을 흥미 차원에서 접근하면 매우 실망감이 크다. 학술적 목적의 가진 이들에게 그나마 부합할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은 원본의 약 20% 정도를 발췌한 것이다. 따라서 원본에 대한 전반적 조망을 하기에도 사실 미흡하다.

 

대략적 구성은 조선 후기의 경주를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 인물 등으로 구분하여 총 49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역사와 인물에 대한 비중이 높은 편이다. 특히 진한기(辰韓記)와 신라기(新羅記)는 다른 읍지에 비해 독창적이라고 한다. 단지 단순히 요약 개괄에 그치고 있어 동시대는 물론 전후의 역사서에 비하면 너무 소략한 느낌이다.

 

경주의 지형과 산천경계가 어떠하며, 창고와 학교의 위치가 어디며, 호구와 전결(田結)의 현황 등에 대해서 쭉 열거하고 있다. 17세기 경주의 개괄과 현황과 통계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무척이나 지루하며,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통독을 하기 보다는 필요할 때 참조하는 용도에 적합할 것이다. 물론 참아낸 성과는 있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금오(金鰲)가 경주의 금오산을 가리키며, 오늘날의 경주 남산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김시습이 유랑길에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 경주였단다.

 

그나마 흥미로웠던 대목은 효행과 우애와 충의와 정렬(貞烈) 등 경주를 빛낸 인물에 대한 소개 부분이다. 익히 알려진 인물은 물론 노비와 계집종까지 언급하고 있어 이채로우며 다소간의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에 관하여 해설에 따르면 병자호란 이후 읍지가 향촌 사회에 성리학 윤리를 보급하는 수단으로 편찬되었으며 따라서 풍속과 인물 관련 항목이 강조되었다고 하니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하겠다.

 

아무튼 단순히 옛날 서책의 내용에 관심이 있다거나 또는 경주 지방에 대한 과거의 사실이 궁금하다면 일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평범한 독자라면 굳이 볼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참고로 옮긴이에 따르면 <동경잡기>의 완역본이 존재한다. 다른 책들과 함께 엮어서 이석호 번역으로 <조선세시기>(동문선, 1991)라는 표제로 시중에 나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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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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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의 작가의 말이 이 작품의 전반적 성격을 대변한다.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이렇게 어이없는 소개로 시작하는 작가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소설은 내내 어이없는 행태와 사고와 존재 양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작품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이러한 안티적 글쓰기에 대한 낯선 시도가 첫 번째 사유일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전형적 소설적 글쓰기를 작위적으로 버리고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 체류기 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여행기로서의 인상이 언뜻 스치나 실제 내용상은 전혀 이와 무관하여 작가의 말마따나 표류기에 가깝다. 번듯한 인물도 등장하지 않으며, 작가 자신으로 추정되는 작중 화자의 진술이 작품 전체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뚜렷한 사건 또는 갈등의 양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LA에서 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겪게 되는 삶 또는 사고의 단편적 양상이 반복된다. 여기에 공상이 사실인 것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는 글머리 이외에도 중간 중간 등장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한결같이 이 소설의 무의미성과 어이없음, 그리고 비소설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나의 소심함과 자질구레함이 잘 드러나는 이러한 궁상맞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는 이 소설에 부합되기 때문이지만, 자질구레함을 넘어 거의 구차하게 여겨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 내가 어떻게 하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P.139)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P.167~168)

 

나는 이 마지막 장은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결국에는 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도, 이 소설 전체도 사실은 구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과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P.270)

 

이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체에 있다. 일견 말장난에 가까운 언어적 유희를 식상할 정도로 시종여일하게 자주 써먹는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주장대로 이 작품의 무용성을 배가하여 강조하고자 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말장난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한다. 소설도 궁극에는 말장난이겠지만 그럴듯하고 뭔가 감흥을 주는 말장난이 아닌 무용하고 허황한 말장난을 환영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모래 위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우는 짓 따위는 다시는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 짓은 살면서 한 번 한 것으로 족한 것처럼 여겨졌다. 아니,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자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짓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앞으로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하지 않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 할 수는 있지만 막상 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런 일을 한 후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한 뒤 또다시 하게 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P.67)

 

그 거지를 잠시 바라보며 있자, 거지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누구나 쉽게 거지가 되지는 못하는 거고, 거지가 꿈이었고 거지가 되려고 노력한 끝에 꿈을 이뤄 거지가 된 거지는 거의 없고 세상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그렇게 해서 거지가 된 거지도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는 데에는 거지로 사는 것만 한 것도 없어 보여, 거지가 되기로 해 거지가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 , 거지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끝에 거지가 되었고, 완전한 거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거지가 되기까지 어떤 노력으로 볼 수도 있는 뭔가가, 쉽지 않은 어떤 노력이 기울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할 바를 다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P.221~222)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실적 공상의 전면적 부정이다. 작가는 이야기의 끈을 쭉 연결해 나가면서 사고와 흥미를 한창 극도에 치닫게 한 후 불쑥 내뱉는다. 아니, 이는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며 상상일 뿐이라고. 방귀뀌기에 대한 상상, 금문교에서 과일을 떨어뜨리는 상상, 그리고 머리에 새똥을 맞는 상상 등에서 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열렬히 동참한 독자들을 한순간에 허무에 빠뜨린다. 마치 독자여, 내 소설은 어이없고 허황됨을 잊지 말라. 정통적인 소설과 문학에 익숙해져 있다면 그래서 내게도 그러한 유의 것을 기대한다며 일찌감치 꿈을 거두시게라고 말하듯이. 이러한 작가가 극도의 무용성의 예증으로 제시하는 게 삶은 옥수수 알갱이 세기다.

 

신문 기사를 보면 작가는 등단 후 제법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한 번도 그럴듯한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계도 소설 인세 수입이 아니라 번역고료로 연명했다고 하니 딱할 지경이다. 섣부른 예단이 아니라면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회의와 모색의 기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던 것이다.

 

내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어떤 정서적 장애를 겪으며, 사실상 다른 인물과 관계를 갖지 못하며, 자신만의 난감한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현실 속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나 자신이 세상의 누구와도 더 이상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관계가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P.188)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P.190)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복수”(P.242)를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꽤나 중요한 발언인데, 확실히 정통적 소설 작법에 대한 거부와 반항, 그것이 이 소설에 모래알처럼 박혀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이론서가 아닌 이상, 즉 문학의 외피를 지니고 있는 이상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한 셈이다.

 

자못 지루한 사상의 나열과 무의미한 나날의 연속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탈피하게 만드는 것은 화자의 젠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어조에 있다. 시종일관 진지한 고담준론을 읊조리는 화자, 하지만 실제적 행위와 생활의 모습은 근엄하고 단호함과 거리가 멀다. 모래사장에 쓰인 이름을 지우는 어이없는 행동은 물론 어슬렁거리며 호보(과연 거지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여전히 의아하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호간에 어이없어 하는 장면 등은 절로 실소를 자아낸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제법 현학적이고 철학적 냄새가 풍기고, 게다가 속도감이 나지 않음에도 그다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독서를 마칠 수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작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으며 그럴 의향도 없다. 진기명기는 어쩌다가 한 번 나오는 것이다. 이 소설과 같은 유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안다. 작가가 후속작에서 어떠한 변신을 할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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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아롬옛글밭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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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광풍이 독일을 본격적으로 휘감기 시작한 1934년, 슈테판 츠바이크는 불현 듯 에라스무스의 평전을 발표한다. 이윽고 그는 히틀러를 피해 돌아오지 못할 망명길에 접어든다. 츠바이크는 이미 1939년을 예감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온 사회가 광신에 빠져들면 평화는 유린되기 마련이며 이성 대신 오로지 피와 힘에 의한 대결로 치닫게 됨을 그는 역사에서 드러내었다. 그것이 에라스무스의 삶이자 그의 비극이다.
 

세계사에 나오는 <우신 예찬>의 저자 정도로만 인식되던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위상은 실로 대단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그는 당대 지성 세계의 제왕이었다. 학문과 종교에 관한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자체로 군주와 교황도 무시 못 할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평생 방랑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 고향은 자신이 한동안 머무를 수 있는 고장을 지칭한다. 일찍부터 고전에 경도된 그의 평생 언어는 라틴어였으며,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그리스 로마 고전을 전범으로 하는 인문주의 세계관이 그의 것이었다.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 그래서 모든 갈등과 대립도 대화와 타협으로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계가 그가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그래서 그는 광신을 철저히 외면하였다. 광신은 항상 독단과 아집으로 귀결되어 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내가 이겨야 하는 게 바로 광신의 법칙이다.
 

츠바이크는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철저한 공감을 표시한다. 저자가 살고 있던 20세기 초의 현실에 있어 매우 시의적절하며, 혼란의 시기에 결여되어 있는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반면 에라스무스에게서 그는 암운에 뒤덮인 유럽의 미래를 내다본다. 정신적 우월성과 고상함만을 가지고는 세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교육과 감화를 통하여 정신적으로 승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며 지극히 이상론에 치우쳐 있다. 이상론은 언제나 힘을 지닌 현실론자에 의해 패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결정적 시기에 언제나 행동으로써 참여하기를 회피한 그에게 츠바이크는 반복적으로 장중한 애석과 탄식을 토로하는 것이리라.
 

당시 종교개혁의 바람은 필연적이었다. 대항해시대와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견의 성과는 영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계의 억압과 부패에 대하여 더 이상 무조건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겨났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다. 그가 <우신예찬>을 비롯한 여러 글들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타락한 가톨릭에 대한 따가운 비판이다.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는 출발을 같이 하였지만 점점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였다. 전자는 가톨릭의 자정(自淨)과 개선을 희망하였으나, 후자는 가톨릭의 파괴와 대체를 요구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에서 낭자한 유혈을 본능적으로 예감하였다. 그래서 양 세력 간의 중재에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려운 것이 중도이며 중용이다. 극단은 선명성을 얻기 용이하다. 중용은 기회주의자, 회색분자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날짐승과 들짐승 간의 싸움에 낀 박쥐처럼.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을 소리 높여 외친 루터에 동조하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광신의 냄새를 맡았던데 연유한다.

“광신은 단지 자기 체제와 자기 진실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이 원한 다양한 현상 내의 다른 모든 현상을 억압하기 위해 폭력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P.125)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를 이렇게 평한다.

“에라스무스의 진실된 실체는 단지 투명성이었다. 에라스무스는 깊은 사상가, 심오한 사상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비범하게 넓은 정신의 소유자였으며......올바른 사상가, 총명한 사상가, 자유 사상가였고 고상한 단어로 말하자면 모범적인 이해자, 그리고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는 자, 계몽자였다.(P.61)

“그의 정신의 모습을 보며, 그처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 작은 사내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갖는 천성적인 난폭한 힘 한가운데서 대중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적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P.78)
 

계몽자에게 투사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것이 그와 루터와의 본질적 차이점이다. 보름스 제국의회와 훗날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그는 자신의 천부적 소심성으로 마지막 화합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에라스무스와 마르틴 루터는 상호간에 있어 필생의 숙적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역사는 루터를 승자로 만들었다. 츠바이크가 두 사람을 비교한 문장을 읽어보면 지독한 대비성을 알 수 있다.

“온건 대 광신, 이성 대 격정, 문화 대 원초의 힘, 세계시민 대 민족주의, 진화 대 혁명, 이것이 그들이 보여주는 대비이다.”(P.141)

“에라스무스적인 모든 것들은 결국 정신의 평온과 평화를 목표로 하고, 루터적인 모든 것들은 고도의 긴장과 감정의 동요를 목표로 한다.”(P.146)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정직하고 단련된 의지를 통해 더 숭고한 도덕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는 그처럼 경직된, 거의 이슬람교적인 광신에 철저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다.”(P.212)
 

이 책의 압권은 제9장 <루터와의 위대한 논쟁>이다. 서로 직접적 공격을 자제하면서 타협의 길을 모색하던 두 인물이 드디어 상대방을 겨냥하면서 펜으로 벌인 무혈의 전투이다. 각각 <자유 의지론>과 <부자유 의지론>, 그리고 <히페라스피스테스>로 이어지는 논쟁은 단순한 신학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규정지으면, 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철학의 문제이다.
 

에라스무스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저자의 찬사를 살펴보자.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편적 인간과 결합시키면서, 의식적으로 단순한 교회 법규로부터 분리하고자 한다.”(P.101)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유럽은 하나의 도덕적 이념으로서, 철저히 비이기주의적이고 정신적인 요구로 나타난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공동 문화와 문명 속에 통일된 유럽 국가라는 요구는 에라스무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P.118)
 

물론 에라스무스도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라스무스에게서 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의 선구자를 본다는 것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을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민중,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 미성년자에게 최소의 권리라도 부여할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P.130)
 

세상이 흐린데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하였을 때 홀로 깨어있던 사람, 그이가 바로 에라스무스였다.

“지나치게 흥분한 모든 사람들 한 가운데서 홀로 밝은 이성을 구현해야 하는 일, 그리고 펜으로만 무장한 채 유럽의 통일, 교회의 통일, 인류애와 세계 시민의 통일을 붕괴와 파괴로부터 지켜 내는 일이 그의 과제인 것이다.”(P.167~168)
 

에라스무스의 역사적 패배와 더불어 고상한 이념과 지성은 자취를 감추고 분열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등장하였다. 그 후의 세계사가 과연 평화와 진보라는 측면에서 어떠했는지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극심한 사례가 이 평전을 쓴 츠바이크가 예감했던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겠는가. 그는 에라스무스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빌어 자신이 살던 시대에 오버랩 시켰을 뿐이다.
 

에라스무스는 위대한 패배자다. 그는 잊혀지는 듯했지만 다시 부활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유럽에서 새삼 그의 이름이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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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1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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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2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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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아동교육론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라스무스는 교육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신과 광신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항상 인문주의 정신을 회복하고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중세적 사고의 질곡에 갇혀 있는 동시대인들에 대해 계몽 정신의 선구자인 그로서는 깨우침의 자극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것은 곧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는 <우신예찬> 이외에 후반부에 <기독교 군주의 교육><아동교육론>을 각각 저술하였다. 이 중 후자가 비록 영어 번역본에 의한 중역이지만 국내에 출간되어 기본적 윤곽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무려 5백년 전의 인물임에도 그가 이 얄팍한 책에서 쏟아내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역설은 전혀 시간의 간극을 느낄 수 없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에라스무스는 기본적으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어릴 적에 나쁜 물이 들기 전에 서둘러 소양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자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히 함을 개탄한다. 말이나 개 등의 훈련에는 최고의 열성으로 우수한 전문가를 아낌없이 초빙함에도 오히려 자식을 방치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아들의 마음이 아직 악에 물들지 않고 산만함에서 자유로울 때, 가장 발달 가능하고 감수성이 예민할 때, 그리고 그의 정신이 모든 영향에 개방적이며 동시에 모든 것에 최고의 기억력을 발휘할 때 지체 없이 자유 교육과 첫 만남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21)

 

그는 인간은 올바른 교육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훌륭한 인물로 자라날 수 없다고 말한다. 동물이 본능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동물조차도 새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요령을 학습시키려고 노력하니 이성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본성과 도덕과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개탄한다.

 

이성의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간 성장의 과업을 교육이라는 것을 통해 성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행복의 시작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그 전체의 합이 훌륭한 양육과 교육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P.30)

 

아이가 태어나면 (귀족의 경우) 유모에게 맡겨진다. 따라서 유모야말로 아이의 첫 번째 교사인 셈이다. 좀 자라나면 가정교사를 들여 교육을 맡긴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자질과 능력은 아동교육에 있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깊은 성찰 없이 또는 단순한 비용 고려만을 통해 자질이 속되고 형편없으며 미신에 물들고 사악하기 조차한 사람에게 아이를 내맡기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고 에라스무스는 비판한다.

 

가정교사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만은 당신은 진실로 아르고스의 눈을 필요로 합니다. 전장에서 두 번의 실수는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P.72)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참된 본성은 이성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며, 이성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해로운 것은 무지(P.52)라고 말한다. 그는 본성은 방법에 의해 계발되어야 하고, 방법은 실천을 통해 완성으로 나아가야행복한 삶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본다. 방법은 곧 학습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의의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학교다. 불행히도 저자에 따르면 당대의 학교는 그러하지 못하다. 남을 교육시킬 수 있으려면 교육자가 피교육자보다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교사가 지적으로 열악하고 정신이 저열하며, 품성이 야수적이라면 어떨까?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학교란 곳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반교육적인 곳인지 여실히 고발한다. 습관적 가혹행위와 구타가 난무하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그는 참다운 학교의 장면을 그린다. 온화함과 우아함이 지배하는 곳. 제아무리 지겨운 공부라도 능력 있고 뛰어난 교사의 솜씨로 재미있는 놀이처럼 아이에게 받아들여져 유용함이 즐거움과, 완전함이 쾌활함과 함께 추구(P.100)되는 곳, 그곳이 진정한 학교의 모습이다.

 

에라스무스의 교육론이 오늘날 교육학계에서 어느 정도 인식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시대적 한계도 일정 부분 내포하고 있을 것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아동교육에 대한 선구적 혜안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는 자신의 체험과 관찰과 진지한 사색의 결과일 것이다. 실상 그 자신이야말로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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