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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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관계의 본질은 사랑과 섹스 중 어디에 가까울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문(愚問)인 줄은 익히 알지만, 사랑과 섹스를 굳이 분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우다왕과 류롄의 만남은 자연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류롄은 우다왕의 젊은 육체에 성적 흥미를 가졌다. 우다왕은 류롄의 권력과 위협에 마지못해 굴복하였다. 일개 병사가 사단장의 부인의 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자신과 가족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있는데.

 

우다왕의 내심에 시골 아내와는 차원이 다른 희고 매끄러운 여체에 대한 미련이 잠복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니 차라리 순전한 육욕과 일탈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야 우다왕의 무지개가 설명되고 이후 류롄에 대한 우다왕의 헌신적 봉사와 태도가 이해된다.

 

“내심 깊은 곳에서 울리는 요란한 굉음과 함께 그의 눈앞에 섬광처럼 한 줄기 무지개가 스쳐 지나갔다.” (P.32)
“그는 단지 그녀를 한 번 힐끗 곁눈질로 쳐다봤을 뿐인데 눈앞에 무지개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더니 눈알에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P.34)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서로를 알고 사랑을 하게 된 후 섹스로 이어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시에 정상적이다. 또한 누구나가 이상적이라고 상찬해 마지않는다, 최소한 예술이라는 장르에서는.

 

두 주인공의 경우는 반대의 수순을 거친다. 섹스를 통해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이 배제된 순전한 육체적 쾌락을 목적한 성교의 지속성의 결과로서. 물론 인정한다. 일회성 유희가 아닌 반복적, 계속적 유희는 양자 간의 거리를 좁히고 알몸 그대로의 교류는 허식과 위선의 탈을 벗기고 적나라한 본연의 모습을 비쳐준다는 점 말이다.

 

사랑이 항상 현실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남녀 관계에서 비극의 단초다. 우다왕과 류렌의 결혼 생활은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사랑이 결핍된 상태였다. 사랑을 막는 장벽은 사회 현실에 존재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마오쩌뚱 시절의 중국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공산당원과 비당원, 도시와 농촌 거주민 사이에. 그들은 생존을 위해 또는 신분상승을 위해 수단과 처지를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작가는 우다왕과 아내 자오어즈, 우다왕과 류롄의 성(性)을 이렇게 비교한다.
“전자는 성이 실질적인 목적을 위한 육체적 포상이었던 반면, 후자는 아무런 목적없는, 그저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반응에 대한 응답이었다. 전자는 본능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지만 후자는 영혼의 회귀이자 승화였다.” (P.197)

 

마오쩌둥의 금언 ‘爲人民服務’는 여기서 이중적 의미를 지니면서 작품 전개에 방향타 구실을 하게 된다. 당대 중국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을 드러내면서 아울러 그것이 인간의 본연을 얼마나 저해하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이 금언을 깨뜨리는 방편으로서 류롄과 우다왕의 정사를 택하면서 섹스 욕구를 전달하는 우스꽝스럽기 이를 데 없는 수단으로 전락한 팻말을 통해 금언, 나아가 시대적 지배적 가치관에 조롱을 퍼붓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작가는 결말 처리에 고심한 듯 보인다. 두 사람의 금단적 사랑은 시한부에 불과하다. 사랑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각자 이혼하고 밑바닥에서 새로이 출발할 것인가. 사랑과 현실을 분리하고 감정을 수습하여 각자 현실을 영위할 것인가.

 

우다왕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모범사병이었다. 복무할 인민을 상실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후 십오 년의 삶은 무의미한 “망연한 공백상태”(P.246)일 뿐이다. 그는 마지막 용기를 낸다. 항상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던 팻말을 이제 처음으로 류롄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진정한 삶을 되찾고자 하는 마지막 발로. 결과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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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생각나무 ART 7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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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에 가볍게 읽을거리가 없나 하고 서가를 뒤적거리다가 오래전에 사놓은 이 책을 꺼내게 되었다. 본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완전한 까막눈이다. 그저 동서양의 세계적 명화를 보면 ‘좋은’ 그림인가 보다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좋은’ 그림의 객관적 기준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따지자면 천만 사람이 명화라고 칭송하더라도 그것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좋은’ 그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는 만큼 가깝게 된다. 친숙해지면 단지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이름 없는 현상에 불과하였던 존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점과 미덕을 홀연히 깨닫게 된다. 예전에 탈무드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유대인들의 언어에서 알다와 사랑하다는 같은 어휘라고 한다. 미술 감상에서도 이것은 참이다.

 

저자는 서문에 말한다.
“이 글들이 미술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오히려 변방에서 들리는 소식에 가깝지만 미술과 가깝게 지내려면 이 정도의 소식도 보탬이 될 날이 있을 것이다.” (P.9)

 

병법에서 강력한 적군을 상대할 경우 때로는 정공법보다도 우회전술이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고 한다. 인간이란 일화, 에피소드 등 말랑말랑한 내용이 더 솔깃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서양미술, 특히 회화사에서는 사진의 발명이 시대적 구분의 기준이 된다. 자연과 사물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하는 미술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다. 객관적 재생이 소멸하고 주관적 재현이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관성의 극단은 추상표현으로 나아가지만, 사실을 배제한 주관은 사상누각이다. 예술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사실을 둘러싼 상상과 감정이다. 저자가 꿈을 버린 쿠르베를 반쪽 진실로 평가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과 꿈이 한 겹을 이룰 때 회화의 진실은 유통된다.” (P.58)

 

난 여전히 현대미술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도,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도 거리감을 느낀다. 백번 양보해서 미술사적으로는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항상 새로움에 목말라 있으니. 소비자로 하여금 신제품을 구입하도록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광고는 산업적 관점에서 필수적이다. 예술 산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질문. 새로움이 곧 예술적 가치를 담보하는가? 그것이 ‘좋은’ 그림에 대한 보증서는 아닐 것이다. 나만의 감식안 계발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지 고루한 묵수(墨守)적 태도가 아니다. 여러 미술적 지식을 축적하고 많은 미술작품 감상을 통해 수준이 높은 작품과 아닌 것을 판별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별하는 안목, 그것이 평범한 미술애호가로서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비단 전통적 명작과 대가의 작품만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대개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가이다. 모사품으로 대치할 수도 있으나, 존 러스킨의 <예술경제론>에 따르면 이는 미술계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몰지각한 행위다. 결국 우리네 뭇사람들은 무명화가나 대가의 저평가된 작품 중에서 ‘좋은’ 그림을 발굴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가까이는 감성과 정서를 풍부히 하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혹시 아는가? 훗날 불세출의 대가로 추앙받아 의외의 재테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훌륭한 예술작품(음악, 미술 등을 포괄하여)은 깊은 정신적 함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굳건히 믿었다. 내재된 예술가의 고뇌와 정신성의 깊이가 작품에 불멸의 의의를 더해준다고 생각하였다. 헨델, 텔레만, 비발디 보다는 바흐가 위대하고, 베토벤이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연주자와 그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동양화에서 사군자(四君子)는 단순한 그림의 소재 이상의 지위를 지닌다. 문인 화가들은 여기에 소위 정신성을 혼신을 다해 불어넣었다. 추사의 세한도를 비롯한 그림들을 보면 솔직히 아마추어적이다. 대강 붓으로 몇 번 쓱쓱 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빈 여백을 메꾸는 역할은 평론가들의 몫이다. 나는 그저 스산함과 처연함이 좋다. 몇 잎에 불과한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여기에 이론과 기법의 분석이 개재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름다움(美)의 의미와 효용은 무엇일까? 예술은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가? 피카소는 “새소리가 아무 의미 없이 아름답듯이 미술의 아름다움도 마찬가지”(P.331)라고 반문하였다. 그림은 그저 좋으면 그뿐이다. 사랑이 그러하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외모와 학력과 가정형편 등을 일일이 재고 분석한 후 사랑의 념(念)을 품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체가 모든 것이 단박에 가슴에 와 닿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최소한 그림에 대해서라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그것이 이 책을 덮는 내 소박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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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올더스 헉슬리 지음, 송의석 옮김 / 청년정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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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우선 헉슬리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이다. 40여년에 걸친 그의 창작 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소설이니 그것만으로도 관심을 끈다. 게다가 유명한 <멋진 신세계>와 대칭을 이루는 유토피아 계열 작품이라면 호기심은 증폭된다.

 

이러함에도 전작만큼 대중적 명망에서 현저한 약세에 처하는 것은 곧 이 작품의 성격과 한계에 연원한다. 헉슬리는 전작에서 역설적 표현을 통해 과학기술의 맹신과 진보가 가져오는 참담한 미래사회의 모습을 디스토피아적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당대에 경각의 종을 크게 울린 것이었다.

 

이제 그는 유토피아를 그린다. 과학과 문명을 적합한 한도 내에서 최소한만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육체와 내면의 수양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이상향. 자고로 이상향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존재를 시도하더라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현재적으로 영속할 수 없는 유토피아는 따라서 디스토피아다.

 

빽빽한 활자와 조판으로 450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헉슬리는 전작과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작가의 의욕은 소설에 문학적 요소를 위축시킨다. 전작은 비교적 생생한 인물 창조에 성공하였다. 마르크스와 레니나 및 헬름홀츠는 물론이고 야만인 존과 그의 모친, 소장에 이르기까지 비중의 경중을 막론하고 나름 자기 목소리를 개성껏 표현했다.

 

여기서는 그러하지 못하다. 기자이자 석유회사의 에이전트인 윌이 금지된 섬 팔라에 진입하여 문자 그대로 보고 듣고 경험한 팔라의 모든 것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때로는 지리하고 현학적인 해설을 곁들여서. 작중 인물은 모두 전형적이다. 윌은 전달자에 불과하다. 한쪽에는 무르간과 모친 라니, 그리고 이웃 랜당의 독재자 디파 장군이 위치한다. 이들은 팔라에 풍부히 매장된 석유자원을 개발하고 과학기술과 현대문명을 도입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현재의 팔라를 뒤엎을 의도를 품고 있다. 반대편에는 닥터 로버트와 수쉴라로 대변되는 팔라의 가치를 지키려는 이들이 자리한다.

 

헉슬리는 박학과 다식을 겸비한 지적인 작가답게 다채로운 지식을 쏟아놓는다. 그의 지적 편력은 공간적 양의 동서를 포괄하며, 시대적으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횡적으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든다.

 

가상의 섬 팔라는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비정된다. 종교적으로 힌두교와 불교, 무슬림 등이 언급되는 것을 봐서는 말레이나 인도네시아 어디가 해당될 듯싶다. 팔라의 미래는 예견된다. 자유와 행복으로 충만한 작은 섬은 전적으로 오만이자 다른 인류에 대한 고의적인 모욕이므로. (P.93)

 

헉슬리의 태도는 지극히 반서구적이다. 그의 방대한 논설의 요지는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 영혼의 토대에 내재된 허위를 비판하는 데 있다. 맹목적 과학과 기술의 숭배로 타락하는 현대인에 대한 냉소가 바닥에 깔려 있다. 한낱 물질문명의 우위가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한 문명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기여하고 이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릇된 본성을 바로잡고 영혼의 본원적 신비를 발견하고 순수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전작에서 많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그의 지나치게 앞선 주장들은 여전하다. 팔라에서는 가족 제도가 엄격하지 않다. 가정은 확대되고 선택될 수 있으며, 부모의 독점권은 인정받지 못한다. 남녀 간의 자유로운 성적 유희는 여전히 권장된다. 인공수정을 통한 출산으로 생물학적 우량 형질의 개선을 도모한다. 앞서의 환각제 소마는 여기서 모크샤라는 명칭을 지니고 다른 효과를 발휘한다. 정신적 쾌락을 얻으려는 용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체험하고 여행하여 영혼의 순수한 본성을 깨닫고 발견하는 구도적 도구로 승격된 것이다. 신의 존재는 독자성을 상실한다. 신은 인간의 내재적인 존재로서 이해된다.

 

윌이 모크샤를 복용한 후 체험하는 영적 신비와 합일의 느낌은 마지막 장에 기술되어 있다. 흡사 법열, 열반, 종교적 황홀경 등의 경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각성과 해탈을 하게 되면 인간사와 세상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련의 유토피아 문학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이상사회의 외양과 물질적 요건뿐만 아니라 자유와 행복의 달성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동시에 인간 스스로의 내면적 순수성 회복의 불가결성을 작가는 주장한다. 이상사회론으로서는 매우 흥미롭고 뜻 깊다. 반면 문학작품으로서는 아쉬움이 많다. 많은 작가들이 빠지는 함정이기도 한데, 이상사회를 소개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문학적 감동이라는 소설의, 예술의 기본적 미덕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헉슬리 또한 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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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0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C. E. 브록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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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드릭 이야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처럼. 대신 소공자(小公子)’라고 하면 달라진다.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이 물밀 듯 다가온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은 소공자는 의외로 여전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소년시절의 생생한 감명을 되새기고자 읽은 책들이 오히려 생경함과 실망감을 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작품의 어떠한 점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아 그래, 무엇보다도 신데렐라 이야기다. 여기에 소위 출생의 비밀까지 맞물려 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상투적이고 진부함에도 반복하여 끌어오는 제재,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심금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게다가 주인공 세드릭의 천연스러운 순진무구함이라니. 그의 엄마 에롤 부인과 더불어 한켠에는 지극히 선한 사람들이 자리 잡고 반대편에는 도린코트 백작의 완고하고 나쁘다고 할 만한 유형이 상호 대조를 이룬다. 해피엔딩의 결말은 모든 독자를 흐뭇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 작품은 이야기 성격에 충실하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반복적인 도덕적 훈계는 자칫 동화의 재미에 저해를 가져올 수 있다. 버넷의 뛰어남은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전개에 몰입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특히 도린코트 백작이 세드릭과의 만남을 통해서 서서히 내면적 변화를 거치며 선한 인간형으로 변모하는 대목은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면서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세드릭의 미덕은 다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곁에 살면서 항상 착한 생각만 하고 남을 배려하라고 배운 덕분이었다. 아주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이런 것이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법이다......세드릭은 꾸밈없고 순수하고 애정어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P.258)

 

이 작품은 다른 측면에서도 소소한 흥미를 제공한다. 미국과 영국이라는 다른 문화권의 비교와 대조다. 신분제도가 없는 미국과, 여전히 귀족과 왕이 존재하는 영국. 미국 독자들에게는 낯선 문화가 이채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기에 부유한 백작으로 대변되는 소위 상류층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점도 무시하지 못한다.

 

동화는 동화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동화는 시대적 속성과 작가의 개성에 종속되며 결코 한계를 초월하지 못한다. 비단 동화뿐만 아니라 어떠한 예술 및 문학 작품도 그러하지 못하다. 동화에 섣부른 비판의 화살을 겨누기보다 한 세기 이상 고전으로서 자리 잡은 그 가치에 주목하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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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판 세계문학전집 41

 

원제는 Point Counter Point .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음표 대 음표라는 의미를 지닌다. 음악용어인 대위법(counterpoint)의 어원이기도 하다. 대위법은 단선율의 화성적 전개가 아니라 독립적 다성부의 병행과 결합의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다성부의 독자성을 인정하되 그것이 개별로 이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조화를 지향한다.

 

헉슬리는 음악기법을 문학작품에 직접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하였다. 단일의 주인공에 의한 단일의 사건 전개를 가진 작품이 아니다. 거의 대등한 비중을 갖는 복수의 인물들이 각자 자신들의 삶과 사고를 드러내며 병행하거나 교차하며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보편적인 표제의 번역어인 연애 대위법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청춘남녀들의 연애와 사랑을 그린 소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딱 좋은, 작품 성격과 방향과는 천양지차다. 물론 사랑이 중요한 화두이기는 하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다. 따라서 굳이 번역하자면 삶의 대위법내지 인생 대위법이 적합하달까?

 

작품의 배경은 1920년대다. 미증유의 제1차 세계대전은 종전 후에도 여전히 유럽 각국의 사회와 정신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 후 확고한 평화가 정착된 것도 아닌데다가 사회의 혼란과 모순에 대한 다양한 사고와 해석들이 소용돌이처럼 휘감아 돌고 있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있다. 지난 세기에 바탕을 둔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안정적 근원을 두고 싶지만 이는 무너지고 말았다. 새로운 세기의 정체는 아직 명확한 실체를 알 수 없다. 정치면에서는 급진적 전체주의가 신흥세력으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자본주의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빈부 격차라는 회피할 수 없는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이상 일부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구조적 요인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들은 갈 곳을 모른다. 그들은 방황한다. 필립 쿼얼즈는 정신과 이성의 영역에서 허우적거린다. 그것이 그의 아내를 절망케 하고 반대되는 인간형인 에버라아드 웨블리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월터 비들레이크는 유부녀 마아저리를 꾀어내지만 여성적 매력이 빈약한 그녀에게 곧 멀어지고 섹시하고 육감적인 루우시 탠터마운트에게 이끌린다. 차라리 루우시는 현대적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남성을 지배하길 원하며 남성에게 매달리기를 싫어한다. 사랑과 무관한 육체관계 및 찰나의 쾌락에 몰두하는 정경은 현대인들의 초상과도 흡사하다.

 

한편 그들의 부모인 존 비들레이크와 제네트 비들레이크, 시드니 쿼얼즈와 레이첼 쿼얼즈, 에드워드 탠터마운트와 힐다 탠터마운트도 모두 실패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이 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나마 그것이 사회적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명예와 경제적 관점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위선자 데니스 버얼랩과 비어트리스 길레이, 에델 코베트의 관계 또한 독자적 영역을 차지한다. 고상하고 독실한 체하는 버얼랩이 성적으로 미숙한 비어트리스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대목이 이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게 매우 흥미롭다. 어떤 암시라고 할까?

 

일리지와 스팬드럴, 웨블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동대다. 일리지는 한미한 계급 출신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적대감은 하지만 열등감의 표출이다. 그 또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계급 상승을 꾀할 것이다. 스팬드럴은 작품 내에서 철저한 반()인간형이며, 철저한 음지의 인물이다. 그의 사고는 물론 웃음조차도 반사회적이다. 그가 웨블리를 살해한 것에 대한 명확한 동기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리지라면 모를까. 그가 마지막에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램피언과 벌이는 인간성에 대한 논쟁은 극적인 동시에 눈물겨울 따름이다.

 

작품 내 등장인물은 이처럼 대부분 하자를 지니고 있으며, 작가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인간형들이다. 예외가 있다면 마아크 램피언과 그의 아내 메어리 램피언이다. 헉슬리는 마아크와 메어리가 신분을 달리한 상황에서 만남을 갖게 된 사연을 친절하게 들려준다. 램피언은 뛰어난 소설가이자 화가이다. 그는 순수한 인간성과 자연을 찬미한다. 이성과 영혼에 함몰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 그대로의 몸과 감정을 긍정하는.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연과 순수를 감추고 외면하면서 세상과 사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홀로 존재한다. 그와 필립, 그와 스팬드럴 등과의 논쟁을 통해서 그는 반기계적, 반과학적, 반이성적, 반종교적 가치관을 분명히 한다.

 

헉슬리는 이처럼 다양한 유형과 계층과 사고를 지닌 인물들이 당대 영국 사회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영위하는 삶의 과정을 글자그대로 대위법적으로 노정하면서 진지하게 묻고 있다. 진정한 삶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어떠한가를. 단지 사랑만이 아니다, 에로스적이거나 플라토닉 하거나를 떠나서. 그것이 이 작품을 연애 대위법이라고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엘리너 쿼얼즈가 남편 필립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이 아니다. 이성의 세계에 빠져서 감성의 존재를 상실한 남편에게 실망한 것이다. 그것은 따뜻한 포옹과 몇 마디의 말로써도 충분할 터인데.

 

헉슬리는 과학자 집안 출신답게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음은 곳곳에서 쓰이는 생경한 과학 용어로써 잘 알 수 있다. 그의 독특함은 과학의 한계와 위험성에도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 작품인 <멋진 신세계>에서 확대되는 주제의식이 여기서도 이미 싹을 드러내고 있다.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37장에서 램피언과 스팬드럴이 함께 감상하는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제15번곡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다. <어떤 회복기의 환자가 신에게 바치는 애조곡에 의한 거룩한 감사의 노래>에 대해 스팬드럴은 신의 존재와 예수의 도덕의 우월함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받아들이지만, 램피언은 오히려 천국이고 영혼의 생활이기에 현실에 추출한 가장 완벽한 정신적 추상으로 거부한다. 추상적 영혼이 아닌 일개 인간을 그는 옹호한다. 이어서 후반부 곡조의 기적적 선율에 대해 지나치게 훌륭하여 도리어 비인간적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램피언의 화두이자 작가 헉슬리가 제기하는 질문의 요체다. 이것은 우리네들 모두가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 1984년에 번역 초판이 발행되어 19871228일에 21판이 발행되었으니 당시로서는 꽤나 인기가 좋았던 작품이다. 이제는 신간 번역이 없어서 30년이 지난 헌책만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감각과 충실한 연구 성과를 담은 새 번역본이 나오길 기대한다. 한편 빽빽한 조판으로 500면에 가까운 분량이니 요즘 같은 작고 얄팍한 판형이라면 거뜬히 두 권으로 분책이 가능할 것이다.

 

* 최근에 연애대위법 번역본이 동서문화사에서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쁜 일이다. (201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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