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일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5
모리 오가이 지음, 권태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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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의 작품 경향은 독일 유학에서 체득한 근대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작품의 테마를 설정한다. 주체적 자아로서의 개인의 발견과 당대 사회 관습과의 갈등 내지 충돌, 그리고 근대적 자아의 좌절. 수백 년간 봉건지배체제 아래서 철저한 신분제와 사무라이 정신의 억압 아래 외면되고 억눌려왔던 개인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남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그는 당대 일본이 얼마나 구체제에 함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문필 활동을 통해 환기와 각성에 진력한다.

 

<무희>의 엘리스와 <기러기>의 오타마는 이십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여성형과 전통적 여성형, 또는 서구적 여성형과 일본적 여성형을 대변한다. 엘리스는 화자인 나, 오타와의 사랑에 적극적이다. 화자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노모와 작별을 각오하면서까지 화자를 따라 이역만리인 일본으로 따라갈 각오마저 한다. 화자의 배신에 극도의 분노로 제정신을 상실하게 된 것은 서구여인다운 엘리스의 자아 표출임은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진다.

 

한편 오타마는 스스로 스에조의 첩으로 들어가지만, 마음에 없는 결혼 생활과 첩의 지위에 대한 세간의 경시는 오타마의 심중을 불편하게 한다. 서서히 오카다에 쏠리는 그녀의 마음은 다소 일방적이라고 하겠다. 오카다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반면 오타마의 감정은 애정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오카다를 유혹하고 고백할 결심마저 품도록 한다. 오카다의 출국을 뒤늦게 안 오타마는 슬프고 씁쓸함을 느꼈을 테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내면으로 삭이고 평상시의 삶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전형적인 일본의 전통적 여인상이므로. 오카다에게 오타마는 “불행한 기러기”(P.209)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기러기에게 돌을 던졌는데 맞아 죽은 것과 같이 오카다는 오타마에게 별다른 감정 없이 그저 호감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무희>의 비극적 러브스토리는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낯선 타국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 유학생과 서양여성과의 사랑 이야기는 당대 독자에게 이국적 소회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밑바탕으로 하여 유학시절의 모습이 회고담 형식으로 잘 드러난다. <기러기>는 자신이 공부하였던 도교대학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삼는다. 역시 회고담 형식을 취하는데, 중편 분량에 대학시절, 시노바즈 연못에 이르기까지의 당대 거리 풍경과 인물을 꼼꼼하게 재현하고 있다. 더욱이 고리대금업자 스에조의 치부(致富)와 축첩(蓄妾) 과정, 본처와의 갈등, 오타마 아버지의 삶 등을 통해 당대 사회 풍속의 단면도 치밀하게 보여준다.

 

모리 오가이는 1912년을 계기로 작품세계에 다소간의 변화를 겪는다. 1912년은 메이지 천황이 죽고 당시 육군대장이 순사한 해다. 이때 이후로 그는 일본의 역사에서 작품 제재를 구하고 주제의식도 보다 일본적인 것에 치우친다. 일본의 전통에서 현대에도 드러낼만한 미덕을 탐사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진보에서 보수 성향으로 바뀌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

 

<아베 일족>은 일본 무사도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인 순사(殉死)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무사도 정신은 철저한 상명하복(上命下服)을 근간으로 하며, 무사의 명예를 목숨보다 중시한다. 명예를 무시당하거나 상실한 무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무릅써야 한다.

 

다다토시가 아이치에몬에게 순사를 허락하였으면 이후의 사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이치에몬은 순사 허락을 받지 못한 후 스스로의 의지로 순사를 감행하나 자신은 물론 일족에게도 순사의 명예는 남기지 못하였다. 순사가 무시당하고 일족의 명예가 위태로워진 시점에서 아베 일족의 선택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새 주군인 다다토시의 아들 미쓰히사에게 죽음을 각오하면서 저항하는 길 밖에 달리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만도 못한 치욕만이 그들을 감쌀 것이므로.

 

군주나 영주든 절대지배체제의 지배자는 만인이 자신에게 절대 복종하기를 바란다. 일체의 딴생각 없이 오로지 충성과 명령 이행만을 기대한다. 누구라도 부하가 개별성을 지니고 독자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적으로는 설사 신임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항상 의심과 꺼림이 존재한다. 다다토시가 야베 아이치에몬을 바라보는 심경이 그러하였다. 한비자가 말했듯이 유세만이 아니라 처세도 또한 어려운 법이다.

 

“야이치에몬은 스스로의 의지로 주군에게 충성을 다했다. 처음 다다토시는 그저 그에게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는 미워졌다.” (P.30-31)

 

순사(殉死)라는 전근대적인 관행이 일본에서 존재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사도 정신에 기인한 순수한 충성과 헌신의 표현이 외면적 포장이라면, 기실은 치열한 정치역학이 숨어있음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순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결의가 있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당연히 순사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순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P.17)

 

전대 영주가 세상을 떠나면 총신과 충신들은 상당수가 순사를 택한다. 응당 순사가 마땅한 인물이 순사를 하지 않으면 그는 명예를 상실하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새 영주의 입장에서도 연배로나 경력으로나 아저씨뻘 되는 노 가신들이 좌우에서 간섭을 하게 되는 경우는 무척 싫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호가 여기에도 유효하다. 순사를 하게 되면 명예가 보존되고 유족들에게도 사회적, 경제적 혜택이 보전된다. 순사를 하지 않으면 명예도 잃고 결국 나중에는 유족들도 불이익을 받게 된다. 순사는 꺼려서도 안 되며 꺼릴 수도 없게 된다.

 

<다카세부네>는 매우 짧고 내용도 간결하며 나타내고자 하는 바도 명료하다. 동생의 자결을 목도한 형이 편히 숨을 끊도록 도와주다가 살인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소위 안락사(安樂死)의 사안이다. 귀양 가는 형 기스케는 마음이 평온하다. 그의 내심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던 그는 귀양살이하는 죄인에게 주는 엽전 200문에 기뻐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던 호송관리 쇼베에처럼 독자는 기스케의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 놀라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동생의 목숨을 끊어준 그를 동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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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오가이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모리 오가이 지음, 손순옥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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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무희 (舞姬)
2. 마리 이야기 [허무한 이야기]
3. 아씨의 편지 [편지 배달부]
4. 인신매매 산쇼 다유 [산쇼 대부]
5. 최후의 한마디

 

모리 오가이는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일본 근대문학의 제일인자로 인정받는다. 그의 이력을 보면 당대 여타 작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 군의관 자격으로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으며 군의총감이라는 최고직위까지 역임하였다. 그의 작품이(특히 초기작의 경우) 독일을 무대로 배경을 삼고 있는 것이 이에 연유한다. 게다가 공직에 바쁜 그가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다섯 편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젊은 여성, 십대 후반의 아가씨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데 있다. 다만 시기적으로 첫 세 작품은 초기에, 나중 두 작품은 후기에 씌어졌고, 공간적 배경도 독일과 과거 일본이라는 차이점을 보인다. 작가가 젊은 여성을 주된 인물로 설정한 것은 우선 자신이 아직 이십대인 만큼 사랑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쏠렸다고 이해된다. 봉건적이고 전제적 지배 체제 아래 놓여 있는 일본의 여성들에 비해서 서양 여인들의 처지와 자각 정도는 상대적으로 낫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삼부작에서 여주인공들은 독립적 정신의 소유자다. 그들은 가부장적 체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줄 안다.

 

오가이의 초기 단편들이 인기를 끈 요인 중 하나는 이국정서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었을까. 근대화와 서구화를 시작한 일본이지만 서양 본토까지 유학을 하는 사례는 일반적이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서구인과 서구문화에 낯설다. 이때 누군가가 문학적으로 아름다우며 깔끔하게 정돈하여 그네들의 사회와 문화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스스럼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여인들과 사랑까지도 속삭일 수 있다면 대중의 흥미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삼부작을 통해 오가이의 초기 문학적 특질을 알게 된다. 단정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문장.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말미. 예스러운 멋조차 느껴지는 낭만주의적 분위기, 은연중 배어나오는 따스한 휴머니즘과 봉건질서에 대한 거부감. 그러면서도 기성체제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체념과 순응의 심적 태도.

 

삼부작은 일본적 특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보편성을 체현하였다. 작중 인물만 우리 것으로 바꾸면 국내 작가의 작품이라고 소개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모리 오가이가 서구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입장에서 아직 일본 고유의 독자적 개성을 발견하지 못한 시기인 듯하다. 이런 면에서 나중 두 작품은 삼십 년이 지난 후 쓰여진 만큼 초기작과는 완연히 다른 색채를 띤다.

 

<산쇼 다유>에서 안주는 강제적 노비의 삶을 탈피한 방법은 탈출 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동생 즈시오의 도주를 돕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목숨을 던진 과감성과 결단력은 여느 성인 남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강인한 행동이다. <최후의 한마디>는 더욱 두드러진다. 참수형에 처하게 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수령에게 탄원서를 올리고, 차가운 어조로 최후의 진술을 담담하게 내뱉는 사사는 더 이상 연약한 어린 소녀라고 하기 어렵다. 조정은 틀림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며, 그렇지 못한 조정은 올바르지 않으므로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단호한 결의가 한마디에 내포되어 있다.

 

“안주는 오늘 아침도 부처님이 사방으로 내뿜는 듯한 밝은 빛의 기쁨을 이마에 띠고 큰 눈을 빛내고 있다.” (P.135)
이것은 동생 즈시오와 영원한 작별을 목전에 둔 안주를 묘사한 대목이다.

 

“......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눈은 차가웠고, 그 말은 차분했다.......앞서와 같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는데,” (P.170)
관원의 취조와 고문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진술하는 사사의 모습이다.

 

안주와 사사에게 닥친 운명의 타격은 심대하기 그지없다. 그저 절망과 비탄에 빠져 어찌할 줄 모른 채 소리 높여 울부짖더라도 일견 자연스러울 정도다. 도리어 그네들은 절제된 항상심을 갖추고 거칠고 잔인한 외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또는 침착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일본의 여성들도 주체성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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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층탑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8
고다 로한 지음, 이상경 옮김 / 소화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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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근대문학이 서구의 모방과 추종에서 비롯되었음은 분명 사실이다. 외국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여 개방한 일본으로서는 앞서가는 서구를 뒤쫓는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다 로한의 이 작품은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여주는 점에서 유독 두드러진다. 전통적 소재를 다루며 고유 가치의 미덕을 드러내 보이는데 주력한다.

 

소설의 도입부도 인상적이다. 작중 화자는 작가도, 작중 두 주요 인물인 겐타와 주베도 아니다. 겐타의 아내 오키치, 주테의 아내 오나미의 독백으로 작중 현실과 인물의 상황이 소개된다. 분량이 많지 않은 만큼 비교적 간단한 플롯에서 사건과 인물간 갈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겐타와 주베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겐타는 큰형님으로 불리며 목수 집단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로서 실력과 인품 면에서 뛰어난 인물임을 작중 내내 볼 수 있다. 간노지의 중건을 지휘하였으며, 오층탑의 견적도 받았으니만치 그가 탑을 세워도 훌륭하게 해냈을 것이다. 주베는 같은 목수지만 남들로부터 느림보라고 멸시받는 처지다. 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않은데다 일할 때는 느려서 기한을 놓치기 일쑤다. 그런 그가 로엔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가 탑 건립을 맡고 싶다고 의사를 밝힌다.

 

주베는 정말로 변변치 못한 인물인가? 주베의 아내는 이렇게 한탄한다. “어떻게든 우리 남편 솜씨를 반만이라도 남들이 알아주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을 텐데.” (P.17)
주베 자신의 말이다. “이 주베는 끌과 손자귀를 쥐면 겐타 님이나 누구라도, 먹줄을 잘못 치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주베는 만에 하나라도 뒤지는 일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P.30)
겐타도 인정한다. “자네가 솜씨가 있으면서도 불행히 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네. 자네가 평소에 박복한 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울고 있는지도 알고 있네.” (P.59)

 

주베가 주변 사람들의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층탑 건립공사를 맡고 싶어 하는 까닭은 목수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바램이다. 자신이 결코 실력 없는 하찮은 느림보 녀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로엔 큰스님은 탑 모형을 보는 순간 이를 깨닫는다.

 

이후 과정은 로엔 큰스님의 중재와, 겐타와 주베의 타협과 갈등의 반복이다. 겐타는 대승적 차원에서 윗사람의 관대함으로 탑 건립을 결국 양보한다. 주베는 공동 작업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맡기를 고집한다. 오로지 순전한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탑을 세우기를 고집한다. 소위 쟁이로서의 자존심. 단 한 마디, “아무래도 주베 그렇게 하는 것은 싫습니다.” (P.61)

 

우여곡절 끝에 탑 건립공사를 맡아서 진행하는 와중에 피습으로 부상을 당하는 주베. 며칠 안정을 취하라는 아내의 당부를 뿌리치며 내뱉는 말에서 그의 절박함과 치열함이 배어나온다.
“만에 하나라도 일을 그르쳐서는 큰스님, 텐가 큰형님께 얼굴을 들 수가 있겠는가? 이봐, 살아 있어도 탑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말야, 이 주베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맡은 일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살아있지 않은 거야.” (P.131)

 

이 소설에서는 일본의 과거와 오늘을 지배하는 미덕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가는 장인의 자세. 자신의 일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목숨마저 아끼지 않는 정신적 태도. 대승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며 보다 큰 공동의 선과 가치를 위해 협심하는 마음가짐. 여기에 로엔 큰스님처럼 드러나지 않은 명인과 재주를 발견하고 알아주는 안목의 가치.

 

이러한 미덕은 일견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부도가 나서 회생이 불가능할 때 대표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국내 기업에서 보기는 어렵다. 조그만 음식점을 몇 대째 이어서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후손들과 조금만 맛집으로 소문나면 반짝 대박을 기대하며 무리수를 두거나 자식에게는 고생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우리네 사람들과 비교해 보라. 진정한 장인정신의 차이라고 할 것이다.

 

고다 로한은 이 소설에서 문학적 형상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강조하는 요지가 바로 이것이다. 비록 근대화를 위해서 서구화를 지향하더라도 무분별하게 휩쓸릴 것이 아니다. 불가피하더라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마음을 유지하자. 이것은 편협한 국수주의와 묵수(墨守)적 태도와는 다른 차원이다.

 

작중 인물에 부정적 유형이 없다는 게 또 하나의 특색이다. 겐타 부부와 주베 부부, 성인과도 같은 로엔 큰스님, 물론 간노지의 몇몇 인물들은 일부 아쉬운 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키치조차도 겐타에 대한 존경과 충성의 염(念)을 품고 피습을 저지른 것이지 성품 자체가 악한 인물이 아님은 세키치와 오키치 간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간노지 오층탑 건립이라는 고덕(高德)한 보시를 서로 맡고자 벌이는 긍정적 인물들. 도중에 다툼과 불화가 있었지만 마침내 이루어진 오층탑 앞에서 이루어지는 인물들 간의 화해와 대단원. 인물들을 둘러싸고 사건을 해피엔딩으로 이끄는 고유의 전통적 가치들. 다소 작위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내용과 구성임에도 훈훈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은 역시 작가의 탁월한 솜씨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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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후타바테이 시메이 지음, 이여희 옮김 / 태동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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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사에서 최초[1887년 발표]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먼저 언문일치를 처음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에는 말할 때 쓰는 어투와 글 쓸 때 쓰는 어투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일본어에서 언문일치는 문장을 ~だ 또는 ~です로 끝맺음을 가리킨다. 지금에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불과 백여 년 전에야 주창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 문체에 관한 사안은 원문에서는 명확히 체감할 수 있겠지만 번역문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이니 그렇다고 알고 넘어간다.

 

근대성은 정신 면에서는 서구 합리주의, 물질 면에서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시작한다. 근대성이 문학에서 발현되면 바로 사실주의로 대변된다. 대지에 단단히 두 발을 딛고 두 눈으로 바라본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것이 아름답든 아니면 추하든 창작의 기본 토대로 삼고자 한다.

 

문학사적으로는 그러하다는 뜻이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작품으로 생존하려면 현재의 독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미덕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감동이 되었든 아니면 재미가 되었던지 간에.

 

형식 면에서 두드러지는 특색은 작가가 화자로서 소설 중에 등장하여 작품 전개 방향을 주도하거나 작중 인물에 대한 주관적 감정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렇게 근세의 통속소설인 희작(戱作)의 어조를 차용한 점에 대해서 근대성의 불완전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독자에게 친숙한 어조를 사용하여 흥미를 유도하고 전통의 무조건적 배격 내지 단절이 아니라 부분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화자의 주도적 개입은 판소리계 소설과도 일정 유사성을 보인다.

 

내용 면에서 애정 소설인 동시에 사회 소설임이 곳곳에 드러난다. 결정적으로 분조의 내심 묘사와 전개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의 내부 축은 우쓰미 분조와 오세이 간 애정의 형성과 혼다 노보루의 개입으로 인한 단절이라는 삼각관계이다. 외부 축은 우쓰미 분조의 관계(官界) 취직과 면직, 부조리한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이 담당하다. 내외를 연결하고 아우르는 것이 19세기 후반 일본 사회의 세태와 풍속에 대한 풍부한 묘사이다. 여성들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서구문물 유입에 따른 문화와 관습의 변화 등이 비교적 세밀하게 언급되어 있어 이채롭기조차 하다.

 

아무래도 독자 입장에서는 애정 관계의 변화가 흥미가 당긴다. 분조의 눈에 비친 오세이는 외모와 언행, 지성의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한 여성상이다. 작가와 독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일개의 원숭이처럼 그저 유행이나 쫒는 여자가 되었다.” (P.37)
“오세이는 실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여자이다.” (P.249)

 

분조도 나중에야 깨닫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오세이는 개화의 겉멋에 취한 평범한 여성에 불과한데, 분조는 여기에 자신의 마음 속 이상형을 투사하여 요조숙녀의 가면을 씌우고 이에 흐뭇해하였던 것이다.

 

분조와 노보루는 소설 첫 장면에서 자못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분조와 달리 노보루는 외향적이며 처세에 능란하다. 다소 능력이 있지만 성격적으로는 비열하며 호색한으로서 그에 대한 분조의 평가는 매우 혹독하며, 노보루와 오세이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혐오가 강렬해짐을 알 수 있다.

 

7장의 당고자카로 국화구경을 가려는 장면에서 동행을 거부하는 분조를 노보루가 놀리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 분조는 입안으로 “바보같은 놈”을 두 번 되뇌는데 처음은 노보루에게 향한 것이지만 나중은 자신을 향한 비난이다. ‘바보같은 놈’은 분조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미하는 상징적 어휘다. 개화와 근대의 물결에서 깊은 사려와 진정한 배려 같은 종래의 덕목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분조의 비극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분조의 처신에 답답하기 그지없다. 과감하게 오마사의 집을 나와서 독립생활을 구하였다면 종국적으로 분조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오세이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작용하였다. 나중에는 수렁에서 오세이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이 가출을 막았다.

 

“이렇게 오세이를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뿐만 아니라 저버리면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분조” (P.281)

 

분조의 우유부단과 불행동을 손가락질하기는 쉽지만 자신을 분조의 입장에 놓고 보면 뾰족한 대안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의 독자적 예술작품으로 이 소설은 비교적 성공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빨리 넘기고 싶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작품은 작가의 고심참담과 심사숙고의 산물이 아니다. 젊은 작가가 일필휘지의 경지에서 휘갈겨 쓴 글이다. 그럼에도 형식과 내용에서 많은 즐길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우(天佑)의 발로라고 하겠다.

 

※ 부록으로 두 편의 작가 에세이를 수록하고 있어 작가와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
    - 나의 언문일치의 유래
    - 내 반생의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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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지혜 - 꽃에서 펼쳐지는 탄생과 소멸의 위대한 생존 드라마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성귀수 옮김, 조영선 그림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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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이후 마테를링크는 에세이, 특히 자연관찰 부문에 몰두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들은 곤충 3부작 외에 1907년 작인 <꽃의 지혜>이다.

 

목차와 해설, 연보 등을 모두 포함해도 160쪽 밖에 되지 않는 데다 활자와 조판도 여유롭고 원작에 없는 예쁜 꽃그림 삽화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어 실제 글의 분량은 부담 없는 편이다. 아담하고 예쁘장하여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책이니만치 내용을 외면할 수는 없다. 마테를링크는 꽃을 포함한 식물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뜨릴 것을 주문한다.

 

이동이 자유로운 동물에 비해 뿌리로 땅에 천착하여 온 삶을 감내하는 식물의 천형(天刑). 좌절과 포기 대신 삶에의 무한한 본능을 이루기 위하여 끝없는 노력과 지혜를 발휘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원적 본능은 (개체의) 생존과 (종족의) 번식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자 분투하며 짝짓기와 출산에 혈안이 되는 현상은 다 연유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이러한 꽃들의 사례를 소개하여 우리네 인식을 각성시키고자 한다.

 

“우리 인간의 기술적인 영감이라고 해봐야 바로 엊그제 일이지만, 꽃의 재능과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세월을 이어 온 것입니다.” (P.82)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채로운 지성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동일한 수준의 희망과 이상을 좇아 매진하는 것 같습니다.” (P.103)

 

가루받이, 즉 수분(受粉)을 위한 꽃들의 치열하고도 다각적인 의지적 연구와 고안은 식물의 수동성과 정태성이라는 선입견에 철저히 물들어 있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사실로 비친다. 그들의 기발하면서 정교하기 그지없는 수분 장치를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다.

 

통발의 기압과 수압으로 조절되는 밸브 장치, 꽃자루를 스스로 끊어버려 삶과 생식을 교환하는 나사말의 수꽃, 비터멜론의 경이적 씨앗 분사력 등 예는 한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난초를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지혜의 증거로 추천한다. 오르키스 마쿨라타, 피라미드 난초, 카타세툼, 개불알꽃, 두레박난과 같은 난초과 식물의 자세한 수분 전략과 전술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명료하면서 섬세한 필치로 기술된 글을 읽자면 파브르의 곤충 못지않은 감명을 느끼게 되고, 과연 식물들도 이성과 지혜를 갖춘 존재라는 주장에 무작정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테를링크가 심혈을 기울여 꽃의 지혜를 설파하는 이유는 마지막 장에 드러난다. 바로 인간의 참다운 지혜에 대한 논지로 안내하기 위해서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과 꽃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본질적 기운과 원리는 동일함을 발견하고 자만을 벗어던지고 더 겸손해지자고 말이다.

 

“꽃과 우리가 서로 닮았고, 꽃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역시 가지고 있으며, 꽃의 방법과 습성과 관심과 성향과 욕망이 우리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 우리가 억누를 수 없는 본능으로 희구하는 모든 것은 저절로 그 당위성을 확보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삶의 곳곳에 꽃의 지혜가 만개할진대, 어떻게 그 삶이 악과 죽음, 어둠과 허무에 대한 승리의 몸짓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P.142)

 

이 책의 미덕은 반복하자면 간결한 가운데 꽃들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알려지지 않은 신기한 사례들을 독자에게 소개하여 새삼스레 관심의 조명을 비추는 데 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가 지금부터 근대 자본주의가 정점을 향해 달음박질치던 백 년 전임을 염두에 두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인간 위주의 관점을 탈피하고 자연에 눈 돌릴 것을 주창한 작가의 선구적 혜안에 탄복할 따름이다. 그것도 거창하고 단조로운 논설이 아니라 꽃을 제재로 한 얄팍한 에세이를 통해서.

 

여기에 더해서 원작에 없는 수채화풍의 아름답고 세밀한 꽃 그림들은 글을 통해서는 막막할 수도 있었던 꽃들을 눈앞에 생생하게 살려내어 책에 한층 격조를 높이고 있다. 이는 꽃 사진을 게재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한마디로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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