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2
제인 오스틴 지음, 최정선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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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엠마 우드하우스에게,


엠마, 이렇게 불러도 큰 실례는 아니겠지요? 미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통해 당신과 다소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엘튼 부인처럼 경우 없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 중에서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을 대표작으로 꼽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중적 인지도와 선호도 면에서 비교 해봐도 실제로 그렇습니다. 엠마 당신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제법 있으니 별로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이 항상 동행하지는 않으며, 주인공들에 대한 평가도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소설 <엠마>가 분량이 많다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게 아닐까요. 현대 독자들은 두터운 책을 힘들어하는 추세랍니다. 장편소설 중에서도 소위 경장편이 최근에 두드러지는 경향도 이를 말해주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자신은 <엠마> 보다는 <오만과 편견>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건이 속출하며 엠마 당신이 쉴 새 없이 좌충우돌하는 약간은 우연과 인위성에 의존하는 작품 전개 구조가 재미와는 별도로 선뜻 다가오지 않습니다.


엠마, 당신은 엘리자베스와 엘리너와 비교하면 활발하고 역동적이지만 약점이 두드러지는 인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좋은 가문 배경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자신은 이를 굳건히 지켜야 할 원칙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있는 반면, 타인 특히 해리엇에 대해서는 이것이 급격히 흐트러짐을 보게 됩니다. 해리엇에 대한 맹목적 편애로 당신은 해리엇의 상황과 처지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사랑하는 해리엇에게 두 번이나 사랑의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슬픔을 겪게 하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엘튼 씨와 해리엇을 엮어주려는 눈물겨운 노력에서 엘튼 씨가 보여준 적극적 관심과 호의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는지 독자들은 이미 눈치 챘답니다. 미스 제인 페어펙스와 딕슨 씨의 관계를 의심하는 듯 한 발언을 할 때 프랭크의 응대에서 뭔가 미묘한 변화를 당신을 제외한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었지요. 당신처럼 분별력 있고 똑똑한 분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이성 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의존한 당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이 아니었을까요? 


엠마, 당신은 스스로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당신은 좋은 가문에, 뛰어난 미모에 탁월한 지적 감수성과 배려심을 가진 젊은 여인입니다. 신분 고하와 연련 다소를 막론하고 모든 남성들이라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미혼 남성의 경우라면 결혼 상대자로서 현실적으로든 또는 공상에서나마 한 번씩은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결혼에 대한 의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바램마저 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거지요.


당신이 호의를 가지기 힘들었던 두 인물, 엘튼 부인과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해서 전자라면 나 역시 마찬가지 의견입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속물적이며 과시적인 데다가 타인에 대한 우러나오는 배려심과 동정심이 결핍된 졸렬한 품성의 타입 말이죠.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친절도 그다지 호의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지위의 상대적 우월함에 기초한 불우이웃돕기 차원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불쌍한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지나치게 옹졸하고 편향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뒤늦게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점에 대해서는 기쁘게 생각합니다만.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지요. 당신이 제인의 입장과 처지에 놓여 있다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보다 공감과 이해심을 요청하는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빼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집안 처지라 앞날에 대한 밝은 기약도 갖기 어려우며, 부유한 동년배의 여성으로부터 아무런 친교와 친절도 받지 못한 상황. 누구나 다 마찬가지랍니다. 내세울만한 게 없는 처지에서는 세상에 당당하기 어렵습니다. 소극적이고 주저하며 조용함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차갑다고 오해하고 해리엇이 백배는 낫다고 주저 없이 단언하는 당신은 섣부르고 가혹합니다. 나이틀리 씨의 평가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어요.

“제인 페어펙스도 감정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녀는 감정이 섬세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자제력에 있어서나 인내심도 강한 편이지요. 다만 툭 터놓는 맛이 없고, 모든 것을 속으로만 감추는 사람이지요.” (P.3120


엠마, 한 가지 궁금한 사실은 당신이 남들의 인연 맺어주기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이상할 정도랍니다. 미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의 경우 결혼은 이상이 아닌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현실적인 사안입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거의 인정되지 않는 시대적 분위기, 소위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나면 노처녀로 일생을 보내며 경제적 궁핍을 감수해야 하는 불안감. 젊은 아가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괜찮은(경제적, 사회적으로) 남성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이건 매우 당연하므로 그네들의 관심사가 전적으로 여기에 쏠려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엠마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은 몸이 불편하고 성미가 까다로운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당분간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스스로가 잘났음을 자각하고 있기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합한 상대를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도 작용했겠지요. 더군다나 가정교사였던 미스 테일러를 웨스턴 부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즐거운 기억도 추가됩니다. 이런 요인들과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분수를 넘는 자신감이 결합되어 결국 해리엇의 결혼 주선이라는 외견상 터무니없는 세 바탕의 에피소드를 연속해서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당신의 사고는 기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만과 편견에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해리엇의 출신에 대한 환상과 나이틀리 씨가 높게 평가하는 농부 마틴 씨에 대해 지닌 계급적 차별의식. 자신에 대한 엘튼 씨의 구애에 대해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에 대해 해리엇의 결혼 가능성을 부추기는 이중적 잣대. 이성적으로는 미스 제인 페어펙스에게 다정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모순된 행동 등.


언뜻 보면 제가 당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정어린 관심의 표명이라고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도저히 적개심을 품을 수가 없군요. 나이틀리 씨 또한 동종의 감정을 가졌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신에게 화를 내거나 실망하기도 하면서도 당신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을 테지요. 위에서 말한 결점들은 당신이 자아내는 모든 미덕에 비한다면 하찮습니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싹싹하면서도 즐겁고 활기찬 태도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말과 태도는 즉흥적이지 않고 대부분 신중한 분별력에 기반하여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외모와 신분은 엠마 당신 자신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입니다.


우리말 중에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엠마 당신은 나이틀리 씨의 당신에 대한 감정을 단순한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만 여겼습니다. 당신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해석하였지요. 진정으로 소중한 존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우연히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땅히 그러하듯이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오롯이 우리를 지켜보며 감싸주고 따뜻한 마음을 베풉니다. 대개는 뒤늦게야 이를 깨닫고 뼈저린 후회를 하지만요.


해리엇이 나이틀리 씨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당신 자신의 숨겨진 감정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화살처럼 날아드는 생각은 바로 나이틀리 씨는 자기말고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P.438)


이쯤에서 소설에서 당신을 창조한 미스 제인 오스틴을 생각합니다. 그녀는 약혼자에게 파혼 당하고 노처녀로 오빠네 집에 얹혀살며 생활을 위해 글쓰기를 하게 되는 불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형편에 대한 한탄을 엠마 당신의 입을 통해 잠시 엿볼 수 있습니다.


“독신 생활이 혐오감을 주는 것은 가난 때문이야! 쥐꼬리만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자는 우스꽝스럽고 흉하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딱 알맞지만 일정한 수입을 가진 독신 여성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존경받을 수 있고 호감도 줄 수 있지.” (P.98)


미스 제인 오스틴은 불과 6편의 소설만을 세상에 남겨놓았지만 후대에 문학사상의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서 거창한 인류사적 사건과 이념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당시에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일상의 소소하고 자잘한 사건과 인물 등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아이템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애정사와 맞물려 그녀에게 무궁한 소재와 대리만족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통해 불변하는 인간사와 인간관계의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으며, 국경과 시기를 달리하는 사고와 관습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엠마, 부디 나이틀리 씨와 잘 사시고 부모를 닮은 멋지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서 많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좋아하는 팬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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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재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33
히구치 이치요 지음, 임경화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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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섣달그믐

2. 키 재기

3. 탁류

4. 십삼야

5. 갈림길

6. 나 때문에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문학사 상에서 독보적인 여류작가이다. 불과 24세의 새파란 나이에 요절했다는 생의 이력은 그가 남긴 몇 편 안되는 단편들의 탁월한 작품성에 장식적 아우라를 더해 준다. 물론 그의 작품에 내재된 조숙한 천재의 반짝거림과 더불어 시간의 무게만이 부여할 수 있는 노숙함의 결여는 피할 길이 없다. 특히 일부 초기작은 이러한 순진함이 이야기를 문학이 아닌 흥미로운 미담(美談) 차원으로 퇴색시키기도 한다.

 

이런 약점을 넘어서는 그의 대단한 점은 20세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작품 활동을 마감하였음에도 넘칠 정도로 충분한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다는 데 있다. 때는 문호 개방과 메이지 유신 이후 20여년 만에 남성 작가들도 근대성의 원초적 의미를 갓 발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처지에서, 평생 가난에 허덕이는 입장에서 그의 글에는 유한계급 사람들의 여흥으로서의 글쓰기와는 구별되는 지향점을 찾을 수 있다.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그네들을 향한 따뜻한 공감과 연민은 사회적 하층계급(하녀, 화류계 여성 등)에 대한 시선으로 확산된다.

 

먼저 <섣달그믐>은 한 편의 결말 반전의 에피소드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지만, 빈부와 사회적 지위 격차에 대한 원시적 인식이 순진하게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 하녀 오미네는 단돈 이 엔이 절박하지만, 주인여자에게는 일일이 신경 쓰기도 싫은 사소한 사안에 불과하다. 여기에 전처소생의 장남과 계모 간이라는 가정 내 전통적 대립 요소가 반영되어 집안 갈등을 증폭시킨다. 장남 이시노스케의 심중에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이치요는 생활고 때문에 유곽 근처에서 한동안 거주한 적이 있다. 당시의 체험이 반영된 작품이 <키 재기>인데,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이 책에서도 표제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읽어보면 확실히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종종 유곽에도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요시와라와 현대의 유곽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내세울만한 곳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 소녀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인식과 태도, 관계와 감정의 생성과 변화를 다룬 일종의 성장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축제날에 한바탕 큰길파와 골목파 간에 주먹다짐이 벌어져 소동이 일어났지만 그들 모두는 결국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자라날 것이다. 고리대금업자가 되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토목 기술자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신뇨처럼 출가하는 아이도.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집 아이는 역시 가난함을 무릅쓰고. 그들에게 어린 시절의 떠들썩한 일화와 친우들은 조만간 추억으로 회상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자라서 커나가고 어른이 되는 법이다.

 

언제나 항상 인형놀이나 하고 소꿉장난만 하고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 아아, 싫어, 싫어. 어른이 되는 것은 싫어. 왜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거야. 하다못해 일곱 달, 열 달, 아니 일 년 전으로 돌아갔으면” (P.93)

 

언니의 뒤를 따라 게이샤가 되는 미도리의 상념과도 같이. 철부지 어린 시절이야말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다. 이치요도 우리도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풋풋함은 곧 다가올 거센 세파와 대비되어 더욱 아련한 아쉬움과 애상을 불러일으킨다.

 

유곽, 집창촌, 창녀촌, 매음굴 등 지칭하는 용어는 다르지만 이들이 가리키는 본질은 동일하다. 그곳은 유녀, 매춘부, 창녀라 불리는 여성들과 이들의 몸을 찾는 손님들과 소위 상거래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치요는 <탁류>에서 이곳의 인물과 정경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유곽은 역사적으로 그 어디에서도 사회적으로 환영받고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무시한다고 해서 사실의 존재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유곽이 생성되고 운영되는 현실, 양갓집 여인이 유녀로 전락하게 되는 사회경제적 현상을 직시하자. 가정을 가진 남성들이 유녀에게 홀려 가산과 가정을 탕진하고 수렁으로 몰아넣게 되는 참혹한 현실도 실재한다. 작가는 시끄럽게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양태를 간명하게 기술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빈곤층 여성이 사회적 지위를 일거에 제고시킬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는 부유한 집안에 시집가는 방법이다. 특히 여성의 외모가 뛰어난 경우 매우 유리하고 가능성이 높은 전략이다. 이렇게 신분차를 뛰어넘어 결혼에 이른 여인네들의 삶은 과연 행복한가. 이렇게 작가는 묻고 있다. 전형적인 불행의 사례를 눈앞에 제시하면서. 달님에게 경단을 바치는 <십삼야>의 밤에 친정으로 가출한 오세키와 아무것도 모르고 딸의 결혼의 결과에 흐뭇해하는 부모의 모습이 극적인 대조를 보인다.

 

사랑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결혼 생활이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뒤늦어서야 깨닫는다. 지위, 재산 등과 같은 요소는 일종의 겉치장에 불과하다. 자신의 인생에 삶의 의의를 두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장식은 소임을 다하면 잊혀지고 버려지기 십상이다. 그때 비로소 애써 숨겨두고 눌러왔던 본연의 속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우리들은 회한에 눈물짓는다. 오세키와 이사오, 오세키와 로쿠노스케 역시 시대가 낳은 비극의 소산이다. 이치요도 알 것이다. 이것이 당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대를 막론하고 지역을 불문하고 어디에나 공통된 슬픔이라는 사실을.

 

<갈림길>은 빈곤층 젊은 여성의 또 다른 대안을 보여준다. 부유한 집의 첩으로 들어앉는 선택이다. 허영에 들떠 첩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자발적 선호로 첩의 길을 무릅쓰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가난과 현실을 탈출하는 최후의 마지못한 수단이다. 오쿄는 바느질 일만 하는 삶에 지쳤을 것이다. 해도 해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호구지책에만 급급한 자신의 처지. 눈앞에 꿈으로나마 터널의 빛나는 출구를 바라볼 수 있다면 고생도 가난도 기꺼이 달게 감수하련만. 기치조는 이런 오쿄를 이해하지 못한다. 열여섯 꼬맹이에 불과한 외톨이지만 그는 시대에 당당히 도전할 패기를 지니고 자신의 삶을 개척할 가능성을 지닌 남자이므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오쿄와 기치조의 선택은 이렇게 서로 다르다.

 

<나 때문에>는 비정한 작품이다. 부부 관계, 나아가 인간 관계에서 외화(外華)를 향한 욕망의 뿌리 깊음과 물질 욕구에 대한 집착의 폐해를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와 유사하게 화류계에 바람 들린 아내의 가출로 남편은 하급관료에서 오직 돈을 부르짖는 고리대금업자로 변모하여 수만금의 부자가 된다.

 

데릴사위로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가 된 사위에게 아내는 이제 거치적거리는 존재에 불과하다. 애시당초 그들에게 순수한 애정은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자식이라도 있다면 공통의 화제거리가 생기겠지만 이마저도 없으니 둘 사이는 더욱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아내는 고귀한 집안 출신도 아니며 품위나 행동거지 면에서도 고위 관료인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자신에게 온갖 아양을 떠는 예쁘장한 여인네들이 화류계에 넘쳐난다. 부부 사이의 파국은 예정된 일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서서히 갈라지는가 아니면 치졸함과 결합하여 급격하게 무너지는가는 부부에게 달려있다.

 

이치요는 서구 근대문화의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해설에 따르면 그의 문체는 근세 일본의 전통적 문체를 답습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외형적 한계에서도 그의 작품 내용이 당대의 주류 작가들이 인지하지 못한 사회의 깊은 저변을 훑어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짧은 생과 맞물려 경이롭기조차 하다.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과, 살아온 이력 및 주변 환경을 작품세계에 반영한 결과로 작품의 주인공이 가난한 집안의 여인으로 비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낮은 신분, 그리고 성적 피지배계층인 여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젊은 여성들의 삶의 행로는 선택에서 오늘날과 달리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단 미모를 무기로 상류층 집안과 결혼하여 일거에 제약을 뛰어넘는 방안이 최선이다. 정실부인(<십삼야>)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첩이 되는 길(<갈림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마음의 끌림은 고려 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현재의 처지를 불가피하게 인정하고 가난하지만 정직한 길을 답습하는 대안이다(<섣달그믐><나 때문에>의 전반부).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은 있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기 그지없어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표피적 화려함에 압도되어 걷기로 결심한 길에서 이탈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 그것이 도덕적 무감각과 결부되면 게이샤가 되어 화류계에 종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탁류>). 화류계로 통칭되지만 층위는 상이하다. 단순 매춘부에서 고급 게이샤에 이르기까지. 마치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집창촌의 여성들과 소위 강남의 텐프로로 일컬어지는 여성들 간에 인식상 넘사벽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키 재기>에서 초키지, 쇼타로, 산고로, 신뇨 등이 훗날 어떻게 성장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저마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의 미래의 모습이 전부 바람직하고 훌륭한 형태로 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다. 온실의 화원에서도 부패한 독초가 생겨나듯이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오는 게 가능하다. 인생의 행로에서 환경 요인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

 

미도리가 어엿한 유녀로 성장하는 대목에서 가슴 한켠이 아릿하지만 그나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작가 이치요의 나직하고 절제된 어조의 덕택이다. 원치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녀는 세상의 빛과 어둠을 너무 빨리 봐버렸다. 삶의 숨겨진 원리를 너무 일찍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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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사는 즐거움
이덕무 / 솔출판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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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는 학문과 일생을 통해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하고 보전하는데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독서 목적, 성리학 외의 소위 잡학에 대한 관심, 고증학적 치밀함 등은 순전한 지식욕의 추구 차원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영혼의 순정하고 충일함을 구현하기 위함이며, 외적으로는 가난, 질병 등의 물리적 제약으로 인하여 내적인 수양이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는 알고 있다. 인간의 성정은 거울과도 같이 깨끗하고 맑지만, 나날이 닦아주지 않으면 금세 손때가 묻고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가 <사소절>을 쓴 연유도 여기에 있다. 선비는 작은 행실, 사소한 예절부터 주의를 기울여 법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 그는 말한다. “작은 예절을 닦지 않고 큰 의리를 실천하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P.4). 이 책에서 이덕무는 선비 자신은 물론 아이와 부녀자가 지켜야 할 일상의 규율 등을 상세히(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밝히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모든 예절이 현재 시점에서 전부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오늘날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가르침도 분명히 있다. 더욱이 유가의 기본 틀을 신봉하고 수호하려는 그의 자세는 세세하고 꼼꼼한 측면까지 신경을 쓰다 보니 과도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은 옥석을 가리는 심경에서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진부한 옛말이라면 저자가 이런 글을 쓴 당대의 문화적 배경의 실상을 파악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부부의 화목은 가정의 행복이다. 화목하면 아무리 빈천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못 된다. 부부의 불화는 가정의 재앙이다. 불화하면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기쁠 것이 못 된다.” (P.78)


“남편과 시부모가 사납게 성질을 부리거든, 부인 된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받들어 더욱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조금도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P.92)


여성의 예절 편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화목한 가정의 중요성은 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금과옥조다. 다만 화목 유지의 책임을 조선시대에서는 여성에게 부과하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없이 참고 견디라는 것, 그것은 시집가서 시댁의 귀신이 될지언정 친정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뿌리 깊은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여자가 윷놀이를 하고 쌍륙치기를 하는 것은 뜻을 해치고 위의를 거칠게 만드는 일이니, 나쁜 습속이다.”


친족 간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통놀이를 장려하는 관점에서 보면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하물며 이덕무가 현대인들의 고스톱 놀이를 본다면 기절할 지경이리라. 과연 바둑이나 장기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답다. 


선비가 지켜야 할 것으로 언급한 시시콜콜한 예절 중 몇 가지 사례다. 우습기도 하며 어처구니없을 지경이다. 물론 지키면 좋겠지만 생리학적으로 불가피한 경우는 어쩌란 말인지.


“남과 함께 회를 먹을 때에는 겨자를 많이 먹음으로써 재채기를 해서는 안 되며, 또한 무를 많이 먹고 남을 향해 트림하지 말라.” (P.140)


“상추·취·김 따위로 쌈을 쌀 때에는 손바닥에 직접 놓고 싸지 말라. 점잖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P.141)


단편적 내용만으로 별 볼일 없는 책으로 치부해서는 잘못이다. 의외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딱딱한 예의범절만 나열하지 않고, 과거와 선대의 구체적 사례와 인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옛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위 미신이라는 영역(관상,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에 대한 이덕무의 입장은 단호하다. 


“담명(談命)·석자(析字)·관상(觀相)·감여(堪輿)를 하는 부류는 본디 마음이 삐딱하여 좋지 못한 사람들이다. 백성을 우롱하고 요망한 말로 마구 속이니 사군자는 물리쳐 멀리해야 한다.” (P.243)


세상이 날로 삭막하고 흉흉해지고 있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의 사회적 충격은 가족 간, 친족 간 정리마저도 나날이 옅게 만들고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는 가족 전체가 아니라 오직 본인들의 사고와 입장만을 독선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덕률을 무시하면 가정이 본연의 모습과 역할을 유지할 수 없다. 뿌리가 흔들리는 사회와 국가는 불안정의 위험과 대가를 멀지 않은 미래에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옛말은 낡은 허언이 아니다. 개인 각자가 스스로의 참모습을 계발하고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이토록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가르침을 여럿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학문을 하는 적절한 단계를 제시하는데, 한학을 공부할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되겠다.


“대학·논어·맹자·중용은 학문을 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계단이 일사불란하다. 그 뒤를 이어서 공부할 책은 격몽요결·소학·근사록·성학집요로서, 규모가 정밀하여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계안이니, 나는 일찍이 그것은 후사서(後四書)라고 불렀다.” (P.180)


사람 간 교제에 관하여 경구라고 할 만한 문장도 있다.


“거짓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교활해지고, 참된 인품은 사람을 많이 상대할수록 더욱 숙련된다.” (P.199)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우도(友道)는 어떠한가.


“겸손하고 공손하며 아담하고 조심하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명절(名節)을 서로 부지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담박하여 바라는 바가 없고 죽음에 임하여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P.199)


이덕무는 정통 유학자다. 그는 평생 한학을 공부하고 갈고 닦는데 심신을 전념하였다. 한글은 부녀층과 서민층에서 일부 사용되었지만 점잖은 선비들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뿐더러 구태여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수많은 시작품이 모두 한시(漢詩) 형태임을 기억하자. 그런 이덕무가 한글에 대하여 제법 흥미롭게 언급한 대목을 찾게 되어 기억에 남기는 차원에서 끝으로 이를 옮겨 적는다.


“훈민정음은, 자음·모음의 반절과 초성·중성·종성과 치음·설음의 청탁과 자체(字體)의 가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비록 부인이라도 또한 그 상생상변하는 묘리를 밝게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말하고 편지하는 것이 촌스럽고 비루하여 모범적인 것이 될 수 없다.”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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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5
다야마 가타이 지음, 한영옥 옮김 / 소화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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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일본 근대문학에서 자연주의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미 <이불><시골선생>을 읽어서 생소한 작가는 아니다. 이 작품은 이어지는 <아내><인연>과 함께 3부작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타이는 작품에서 서술 기법 상으로 평면묘사 이론을 추구한다.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는 작가의 주관을 더하지 않고 내부적 설명이나 해부의 과정에서도 조금도 더 보탬이 없는 있는 그대로 진행시키는 것”(P.294)이다. 이러한 평면묘사는 대상을 개인과 사회의 구분 없이 두루 적용할 수 있으며 실제 서구에서는 자연주의 문학이 사회와 제도의 부패와 모순을 폭로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은밀하게 잠재되어 있는 내면적 고민과 갈등 등의 노출에 집중하고 있다. 다야마 가타이는 이러한 경향의 시초라고 하겠다.

 

삶의 모습은 사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과 풍족한 삶, 부모 또는 형제 없이 사는 삶,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살과 불행으로 판단하는 삶 등. 여기에 때와 장소와 민족이라는 구분자까지 넣는다면 더더욱 복잡다단하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본질적 양태는 대동소이하다는 데서 아이러니와 아울러 동질적 안도감조차 느끼게 된다.

 

삶은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쳐 간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람이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종교와 예술과 미신 그리고 억제되지 않는 본능에의 갈구를 탐닉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인이 천진한 아이와 싱싱한 청년을 볼 때 마주치는 모순된 감정은 그래서 오히려 자연적이다.

 

요시다 가문의 형제와 모친의 생과 사를 그린 이 작품의 소재는 지극히 평범하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자식을 키우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가족을 위해 꿈을 버리고 하급관리로 살아가는 맏형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만해도 우리 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고부(姑婦) 간의 갈등은 상존하며, 며느리와 시누이의 갈등 또한 뿌리가 오래되었다.

 

가족은 인간이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도록 튼튼하게 키워내는 화분이며 온실이다. 성년이 된 개인은 보다 탁 트인 너른 공간에서 훌훌 거리낌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여기서 자칫 개인과 가족의 관계는 퇴행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부모는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자식을 어느덧 훌쩍 자라서 제 몫을 할 나이가 되면 뿌듯함과 대견함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식이 부모의 노고를 알아주고 감사의 염을 항상 보여준다면 모르겠지만, 사랑은 원래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부모와 자식 간의 생각이 동등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는 부쩍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와 신세에 불현 듯 비탄을 느끼며,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새로운 가정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자식에 일말의 배신감마저 품게 된다.

 

건강히 장수하다가 평온한 임종을 맞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하던가. 연로해지면 온갖 질병에 시달리기 일쑤며, 대개 금방 낫지 않고 만성이 된다. 긴 병에 효자는 없다. 긴 투병은 본인은 물론 나머지 가족들마저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게 한다. 그나마 있던 한 줄기 애정마저 어느덧 흐릿해지고 암암리에 빨리 저세상으로 가시길 바라는 상황이 되고 만다.

 

거기에는 더 이상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신 어머니는 없었다.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로서 또한 스러져 가는 불유쾌한 하나의 괴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P.189)

 

언뜻 진부하고 상투적인 인생의 흐름이어서 오늘날 드라마에서는 다루기조차 않지만 이런 면면이야말로 기실 우리네 삶의 숨길 수 없는 진실한 모습이다. 작가가 주목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 백여 년 전의 일본 가정의 모습이 사소한 문화적, 시기적 차이를 감안하고 본다면 현재의 가정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노모와 맏아들 료의 갈등은 우선 편모가 흔히 갖는 상실감과 소외감에 연원한다. 노모로서는 맏아들이 늙고 혼자인 자신 앞에서 마누라와 희희덕거리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료는 가장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만의 한 가닥 영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한다. 이러한 갈등이 첫째 아내의 죽음, 둘째 아내와의 이별을 가져왔으며 갓 결혼한 셋째 아내와 노모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른 자식들인 센노스케와 히데오도 다소간 같은 심경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일견 서운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자식의 불효와는 다른 차원의 사안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이 꾸역꾸역 솟아올랐다.” (히데오, P.178)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인 것이다.” (센노스케, P.190)

 

새로운 세대가 대두되면 나이든 세대는 퇴장을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 심정적으로는 다소 서운하더라도 불가피한 현상이다. 혹여 료의 노모처럼 중병에 걸려 서서히 스러져 간다면 간병하는 가족들도 지치게 마련이다. 불효라고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매도하기는 어려운 게 이 또한 삶의 자연적 측면인 탓이다. 결국 사람의 삶도 죽음도 홀로 가야하는 길이다. 절절하고 뼈저린 아픔이지만 홀로 감내해야 할 몫이다.

 

울어 주고, 슬퍼해 주고, 위로해 주어도 결국 이 몸은 혼자 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P.184)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하는 덧없음에 비애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P.199)

 

이렇게 해서 사람은 태어나고 또한 죽으면서 세상은 흘러가는 것이다.” (P.209)

 

그러나 이것이 인간인 것이다. 이것이 자연인 것이다. 가는 자는 가게 하라. 사라지는 자는 사라지게 하라.” (P.269)

 

노모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격식에 따라 장례식이 거행되고 남은 자식들을 제외하고 조문객들은 모두 떠난다. 부모 잃은 자식들의 심정, 그것은 더 이상 과거와 동일하지 않다. 진작 부모로부터 홀로선 존재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한 가닥 끈마저 완전히 절연된 외톨이가 된 처지다. 상징적, 심리적 의지도 기대할 곳이 없어졌다. 그들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와 생활이 펼쳐졌다.

 

그 누구나 모두 그 앞에 새로운 생활이 펼쳐지는 걸 보았다. 형제간의 관계에서도, 부모라는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완전히 독립된 자유와 허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P.234)

 

이제부터는 정말 혼자다. 넓은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 차올랐다.” (P.268)

 

이처럼 이 작품은 한 가족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의 양태와 관계를 치밀하게 모색하고 있다. 작가 자신의 가족사가 바탕이 된 민감하고 어두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작품 전체의 색조는 온화하고 담담하다. 여기에는 작가의 의식적 감정 부여를 회피한 의도적 노력이 주효하다. 이 점에서 뒤에 나온 <시골 선생>과 다소 차이가 있다. 가타이의 장기인 세밀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묘사는 전원에 국한하지 않고 요시다 가족 간의 심리를 각 개인의 처지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듯 기술한다.

 

생과 사는 인간의 영원한 테마다. 삶과 죽음은 인간과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 주위에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정경이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새삼 발견하는 삶의 성격은 작품해설과도 같이 이러한 모습이다.

 

삶에는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진실한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P.296)

 

인생이란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이다.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으면서 세상은 돌아가는 것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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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미친 바보 - 이덕무 산문집, 개정판
이덕무 지음, 권정원 옮김, 김영진 그림 / 미다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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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이덕무란 인물이 궁금해졌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결국 그가 남긴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글에는 남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있으며, 은연중에 개성적인 사고와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다. 어쩌다가 한두 편은 인위적인 글쓰기가 가능하지만, 결국에는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산문선에서 볼 수 있는 이덕무는 어떠한 모습일까? 온화하면서도 옹골찬 선비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서자 출신인 그는 언제나 신분의 한계와 제약을 절감하면서도 글 읽기를 그치지 않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준다. 간서치(看書痴)라는 자술처럼 그는 책읽기에 미친 존재였으며, 독서의 폭의 광대무변과 지식의 박학다식은 당대에 유명할 정도였다. 그의 박학함을 알려면 이 책에 실린 ‘중국의 문인과 문장에 대하여’와 ‘조선의 문인과 문장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충분하다.


그가 독서를 하는 목적은 단순한 지식 축적도 아니며 입신양명의 목적에 구애됨 없이 오로지 마음을 닦고 성정을 길러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하고 보전하기 위해서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정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P.51)


이러하였기에 당대 한시 4대가의 일인으로 손꼽히는 그였음에도 세인의 평가도 “품행을 제1로, 학식을 제2로, 박문강기를 제3으로, 문예를 특별히 제4로”(P.12) 칠 정도였다고 연암 박지원은 술회한다.


그는 글쓰기에서 무엇보다도 타고난 본성과 순수한 진정을 가장 우선시하였다. 자신의 첫 문집명을 <영처문고>라고 한 연유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처녀의 수줍음과도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자신과 문장을 단속하고자 함이다. 이런 심안을 가지고 자연과 사물, 세태와 인정을 바라보면 인위는 줄어들고 자연스러움은 늘어나게 된다. 모방하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미가 물씬 풍기는 청언(靑言)이 가능하게 된다.


“모방만 한다면 인위적인 것은 많고 자연스러움은 적을 것이다. 문장이란 하나의 조화인데, 조화가 어떻게 얽어매어 모방할 수 있겠는가?

무릇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문장 하나가 가슴속에 담겨 있는데, 이는 마치 그 얼굴이 서로 닮지 않은 것과 같다.” (P.96)


이덕무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에 적극 호응하였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적 이상은 정조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다만 그는 연암과 초정 같은 이들을 벗으로 하였기에 다른 글쓰기에 좀 더 관대하였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마음을 기울이는 것”(P.160)을 중시하였기에 속빈 글쓰기를 경계하였다. 


“고인들의 글 쓰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구속을 받아도 안 되지만, 완전히 버리는 것도 옳지 않다.” (P.98)


모기에 대하여 세밀히 관찰하면서 모기의 주둥이를 ‘꽃 같은 주둥이’(P.256~257)로 표현한 옛글의 올바름을 깨달은 그가 옛사람들의 꼼꼼하고 치밀한 관찰에 감탄하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우리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이덕무의 여러 글들이 실학풍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고 평가받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벗이자 후배인 이서구에게 <성학집요>와 <반계수록>, <동의보감>을 좋은 책으로 추천한 근원이 이것이다.


이덕무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은 용납되지 못한다. 연암과 친하지만 자못 의외다. 비록 연암의 소설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주로 <삼국지>나 <수호전> 등을 비판하지만 소설 전반에 대한 그의 평가는 혹독하다. 오늘날 흥미 위주의 통속 소설에도 이 비판은 유효하다.


“소설에는 세 가지 미혹된 것이 있다. 헛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억지로 맞추려 하고, 귀신을 말하고 꿈을 말했으니, 지은 사람이 첫 번째 미혹된 것이다. 허황된 것을 감싸고 천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번째 미혹된 것이다.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번째 미혹된 것이다.” (P.189)


그는 자신을 수양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선비는 거울과 먹줄같이 처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거울은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기 쉽고, 먹줄이 똑바르지 않으면 나무가 굽기 쉽다”(P.177)고 첨언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고래로부터 소위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의 견해가 대립되어 왔다. 설혹 성선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순수하고 천진한 품성을 부지런히 닦고 밝히지 않으면 거울과 먹줄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간과하기 쉬운 후천적 노력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여 오히려 신선하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후하게 대하지 말고, 나를 헐뜯는 사람이라고 해서 야박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 (P.179)


개인적으로 마음에 다가오는 문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과 교언에 약하다.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라도 듣게 되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가슴 한켠에 앙심을 품는다. 귀에 쓴 말을 하는 사람이 선의를 가진 이라면 조언을 고맙게 수용해야 함이 마땅하며, 선의가 아니라면 타인에게 원한과 적개심을 살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도(道)는 노장사상에서는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근본 원리이지만, 가까이로는 바람직한 인성을 유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데서 심해지고, 사람의 재앙은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데서 생겨난다.” (P.199)


“도란 일상생활 가운데 지극히 얕고 가까운 것에 있다. 집안에 물을 뿌리고 깨끗이 쓸며 말을 따라 대답하는 것만큼 얕은 것이 없고,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보다 가까운 것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거의 대부분 이것을 무시하고 높고 큰 것을 엿보며 먼저 하늘의 원리를 말하고 역의 법칙을 논하려고 한다.” (P.198)


이덕무는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도학자인가? 그렇지 않다. 그가 남긴 편지글을 보면 사려 깊고 풍부한 인간성이 깊이 드러나 있다. 조카 이광석에게 보내는 글(P.127)에서 보면 보통 우리네와 다름없는 일상적 친근미가 보여서 정답게 다가온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건강해라’ 이것이 우리네들의 통상적 덕담과 기원 인사말 아니겠는가? 더욱이 그의 표현은 은근한 유머가 깃들어있어 읽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배어난다.


윤가기에게 보내는 글에서는 좋은 책을 구하게 되면 자기만 보지 말고 자신도 볼 수 있도록 꼭 빌려달라고 간곡히 청한다. “책을 빌려주는 것이 바로 천하의 큰 보시”(P.140)라고 애달플 정도로 하소연하는 대목에서 역시 ‘책에 미친 바보’라는 평판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행복론을 살펴본다. 


“아무 일이 없을 때조차도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데, 단지 사람들은 스스로 알지 못할 뿐이다.” (P.233)


당신은 행복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답변할 사람이 과연 얼마큼 많을지 궁금하다. 남녀 간, 가족 간의 사랑과 행복이 뼈에 새겨질 정도로 짜릿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항상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훗날 돌아보았을 때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행복은 무념무사(無念無事)에 가깝다. 파란만장하고 격동적인 삶은 행복하지 않다. 대양을 항해하는 뱃사람은 바람과 파도가 일면 걱정도 커진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인간 이덕무와 그의 글쓰기를 한눈에 잘 알게 해준다. 책 구성도 자화상, 내가 책을 읽는 이유, 문장과 학풍에 대하여, 벗들과의 대화, 군자와 선비의 도리, 자연과 벗 삼아 등 주제별로 그가 남긴 글들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는 점도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덕무란 인물이 보다 친근하면서 존경스러운 존재로 다가온 것은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기회가 닿는다면 좀 더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만큼 그의 글에서는 담박하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쌉싸름한 국화와 그윽한 매화의 내음이.


참고로 4백 면에 가까운 분량 중에서 후반부의 백여 면은 부록으로, 역자 주와 연보, 등장인물과 책의 소개, 그리고 원문이 수록되어 있어 책읽기에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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