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
워싱턴 어빙 지음, 박경서 옮김 / 문학수첩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앞서 읽은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과 이 책을 읽으면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주요 작품들은 대충 훑어보는 셈이다. 여기에는 모두 20편의 단편 및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으며 절반가까이는 앞서 읽은 책과 중복된다. 여기서는 중복되지 않은 글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한다.

 

<립 밴 윙클><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은 중요 작품이니만치 약간 첨언한다. <립 밴 윙클>의 주인공이 돌아온 마을에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며 이렇게 외친다.

 

모르겠어요!......나는 내 자신이 아니오. 나는 다른 사람이오. 저기 저 사람이 나요. 아니, 저 사람은 내 자리에 들어간 다른 사람이오......나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 (P.27)

 

가엾은 립.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이 어디 당신뿐이겠는가? 20년이 흐르지 않더라도 매분 매시마다 스스로를 확신하지 못하는 게 바로 오늘날의 자화상이다.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은 구성미가 탁월함을 새삼 깨닫는다. 슬리피 할로우에 대한 소개 후 이커보드에 대한 소개가 역시 이어지고 카트리나를 향한 이커보드의 장밋빛 몽상이 시작된다. 저녁파티에 가는 길의 행복한 심경은 돌아올 때 불행하고 불안한 심정과 대비를 이룬다. 목 없는 기사와의 대치 후 이커보드의 행방불명은 초반과 맞물려 전설 하나를 추가한다.

 

어빙은 자신의 방랑벽을 고백한다. 그는 낯선 장소와 인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단순한 엑조티시즘 차원이 아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보다는 신생 미국에는 없는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자취와 체취를 맡고 싶어 했다. 유물과 유적에 결부된 수백 년 동안 전해진 반쯤은 역사이고 절반은 전설과 설화가 되어버린 옛사람들의 흔적.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랜 옛적부터 내려온 소박하고 예스러운 관습과 풍습 등. 그것은 한편으로는 시적이고 낭만적인 취향의 반영인 동시에 또한 일천한 미국인들의 정신 체계에서 결여된 영역이며, 일종의 문화적 콤플렉스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작가가 영국 체류 시 런던과 같은 대도시를 피하고 올드 타운이나 또는 시골에 시선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시골에서는 아직 근대화와 도시화에 물들지 않은 영국인의 전통적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점은 세계 어디나 공통적인 사례다. 영국인은 전원생활을 더욱 선호한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목가적 작가들은 자연을 이따금 방문해 자연의 일반적 매력만 관조하지만, 영국의 시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즐긴다. 그들은 자연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그것의 가장 세밀한 변덕까지 관찰한다.” (P.102)

 

작가는 영국 풍광의 가장 큰 매력은 고유한 미덕과 전원에 대한 애정을 계속 유지하는 그들의 도덕적 감정이며, 소박하고 아름다운 가정 풍경에서 드러나는 잔잔한 애정이 핵심 되는 모체라고 찬미한다.

 

어빙은 특히 시골 교회를 주목한다. 낯선 지역에 가면 가장 먼저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외진 마을에서 들은 슬픈 사랑에 걸음을 멈추고>, <저 세상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곁으로> .

 

영국 사람들의 성격을 관찰하는 데 영국 시골 교회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P.106, <시골 교회와 영국 신사의 풋풋한 교감>)

 

나의 경우 시골 교회의 아름다운 자연의 고요함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있다.” (P.149, <저 세상의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곁으로>)

 

작가의 옛것에 대한 호기심은 런던 시내의 옛 수도원 유적에 대한 뜻밖의 탐사 장면을 잃어버린 미지의 문명의 사적을 발굴하는 듯한 과장된 드라마틱함으로 장식한다(<런던의 유물이 내는 신비의 소리들>). 리틀 브리튼에 대한 소개 문구는 어떠한가?

 

리틀 브리튼은 런던의 심장부, 다시 말해 영국인 기질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풍스러운 사람들과 유행으로 가득 차 있던 과거의 전성기 시절처럼 지금도 런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P.190, <런던의 중심부 리틀 브리튼의 옛 영광들>)

 

여기에는 옛 놀이와 관습이 잘 지켜지고 있으며, 불가사의한 물건이나 명소들이 많으며, 현인들과 위인들이 많다. 약종상 스크림, 부유한 치즈장수, 선술집 주인 바그스탭 등. 두 개의 연례행사 성 바돌로매 장과 런던 시장 취임일은 어떻고.

 

나는 이곳을 국민성이 황폐해지고 타락했을 때, 마치 종자벼처럼 저장되어 있던 강인한 영국인 기질의 원리가 되살아나 국민성을 부흥시킨 훌륭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좋았다. 나는 또한 이곳에 고루 퍼져 있는 일반적인 화합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P.198)

 

다소간의 과장과 유머와 예찬이 혼효된 작가의 리틀 브리튼 찬미는 곧이어 다가오는 변화와 몰락의 운기를 예감하기에 장엄한 회상미마저 풍긴다.

 

오래된 관습과 전통에 매혹되는 작가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호기심은 브레이스브리지 가문의 저택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절정에 달한다. “옛날의 축제 풍습과 시골의 놀이에 유달리 큰 관심을 지녔던 작가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문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축일이므로 축제의 규모와 화려함도 단연 으뜸일 테니까.

 

하지만 모든 옛 축제 중에서 크리스마스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가장 가슴이 뛰는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엄숙하고 신성한 느낌을 주는데, 흥겨움에 섞여 우리의 정신을 신성하고 고귀한 즐거움의 상태까지 끌어올려 준다.” (P.220, <옛 크리스마스는 사라진 것일까?>)

 

근대화에 따라 예부터의 진심어린 축제 관습이 소멸되는 현상을 관찰하며 작자는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즐거움과 흥분이 가족적인 감정과 더불어 여전한 행복한 풍경을 보면서 뭉클한 정서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놀라고 설레며 흥분되는 심정으로 브레이스브리지 가문에서 크리스마스이브와 축일 만찬을 함께 한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영국 시골의 전통적 크리스마스 파티와 놀이 풍습을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는 자리였으니 작가의 심경이 어떠했을지 짐작 가는 일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옛 영국식”(P.255)으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올드 스타일의 문화라고 하겠다.

 

국외자의 시각으로는 낯설고 이색적이며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노신사 가문의 관습과 문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제법 적지 않다. 훌륭한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보수주의의 참된 사례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사회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옛것에 집착하는 묵수주의적 전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작자 또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보편적이 될 수 없음을,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덧없는 관습들이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는 지금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이 집이 어쩌면 영국에서 이런 관습들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유일한 가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283, <영국 노신사의 환대와 에피소드 3>)

 

어빙의 따뜻한 인간미는 유럽과 앵글로 색슨계 인종 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읽은 책의 <포카노켓의 필립>과 마찬가지로 여기-<정열과 평원을 빼앗긴 한 늙은 인디언의 고백>-에서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불행한 운명을 동정한다.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과 박해를 솔직 과감하게 비판하며, 피쿼트 족의 운명과 최후를 기술하면서 그들의 고귀함과 숭고함을 고양한다. 어빙의 예상과는 달리 인디언들은 멸종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하지만 정열과 평원을 빼앗긴 인디언을 더 이상 인디언으로 부르는 게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빙은 자신의 스케치북에 엉성하고 시시한 메모만 들어있을 걸 우려하고 양해를 구하지만, 실은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보석들이 잔뜩 숨어있다. 게다가 각 소품들은 작가가 대충 쓱쓱 그린 게 아니라 크레용(crayon)으로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그린 가작으로서 전체가 수미일관하는 교묘하고 정교한 짜임새로 엮여있어 가치를 더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노 쓰라유키 산문집 지만지 고전선집 615
기노 쓰라유키 지음, 강용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 작품>

1. 고금와카집 가나 서문 (古今和歌集假名序)

2. 도사 일기 (土佐日記)

 

기노 쓰라유키는 일본 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인에 속한다. 10세기 초 헤이안 시대 전기에 칙찬 와카집인 <고금와카집>의 주 편찬자로서 가나 운문문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도사 일기>를 써서 가나 산문문학, 특히 일기문학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기노 쓰라유키는 <고금와카집>의 편찬자로서 뿐만 아니라, 가나 서문(이것도 일본 최초의 가나 산문이라고 한다.)에서 와카에 대한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 평론가이기도 하다. 가나 서문은 와카의 본질과 효용, 기원, 표현 형식, 역사와 편찬 경과로 구성되는데, 논리적으로 배열된 체계만 보더라도 치밀한 이론적 분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와카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견해다.

 

야마토 노래, 즉 와카는 사람의 마음을 씨앗으로 해서, 무수한 말이 잎이 된다......본 것이나 들은 것으로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 노래다.” (P.37)

 

그는 서문 서두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는 와카의 본질인 동시에, 보편적인 시와 노래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여섯 가지 표현 형식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해와 공감이 들지 않으며, 오히려 기원과 역사가 보다 흥미롭다. 만엽집 시기인 나라 시대의 히토마루와 아카히토를 거쳐 소위 당대의 6가선의 작품 특성에 대해 형식과 내용, 기법 등의 관점에서 명료하게 비평을 가하고 있다.

 

노래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물의 참된 의의를 분별하고 있는 사람은 넓은 하늘의 달을 보는 것처럼 노래가 처음 흥륭했던 옛날을 우러러보며, 이 책이 편찬된 지금 세상을 반드시 그리워할 것이다.” (P.61)

 

저자는 위의 문장으로 서문을 끝맺는다. 자신이 이룩한 과업에 당당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아울러 저자의 발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도사 일기><고금와카집>이 편찬된 후 거의 삼십 년 후에 저자가 도사(현재의 시코쿠 남부) 지방관 임기를 마치고 수도 교토로 돌아가는 두 달 간의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역자의 해설처럼 일기(日記)는 기존에 기록 내지 실록의 성격이 강하였는데, 기노 쓰라유키는 문학으로서 일기 장르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특이하게 여성 저자임을 가장하고 있는데, 남성으로서 가나 글을 쓰는 데 대한 은폐와 아울러 제삼자적 시각을 통해 관찰과 묘사에 있어 상대적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당대의 바닷길 여행이 험난했음을 곳곳에서 알 수 있다. 불순한 날씨 때문에 출항을 못하고 오미나토에서 열흘을, 무로쓰에서는 일주일이나 항구에서 대기하였으며, 오미나토에서 나하까지는 밤새워 노를 저었다고 하므로 항해술과 장비가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서 뱃길 여행은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저자와 그의 아내는 도사에서 사망한 딸에 대한 애틋함과 슬픔의 감정을 항해 중 도처에서 드러낸다.

 

수도로 돌아가게 되나 다만 딸아이가 없는 것이 슬플 뿐이고 한없이 그리워진다.” (P.68)

 

모두 다 생각나고 어느 것이나 전부 정겹고 그립게 생각되는 중에 이 집에서 태어난 여자애가 함께 돌아오지 못한 것이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P.114)

 

작중 인물들은 많은 와카를 읊는데, 작자에 남녀와 노소의 구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는 와카 짓기가 일상화되어 기본적 소양으로 여겨진 듯하다. 기쁨과 슬픔도, 두려움과 안도의 심경을, 멋진 경치를, 내면의 상념을 노래로 주고받는 장면은 급박한 상황마저도 아취와 운치 있게 변화시킨다.

 

수년 만에 돌아온 집은 관리인의 소홀로 퇴락한 자취가 역력하다. 저자는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렇게 <도사 일기>에서 저자는 종래 기록의 성격을 뛰어넘어 개인의 감정 표현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써 여류 문인에 의한 후대 일기 문학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니 비록 길지 않은 글이지만 그 의의는 제법 묵직하다고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영대장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125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정형 옮김 / 소명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읽기 어려운 책이다. 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우선 책을 찾기가 만만찮다. 대형서점에 가더라도 반드시 있을 거라고 확신하기 어렵다. 게다가 명색이 고전소설이지만 문학 서가가 아니라 인문학 서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인터넷서점 이용이 훨씬 용이하다. 책 자체는 어떠한가? 학술서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중량감 있는 단단한 양장본에 574쪽의 두께, 다소간의 관심 있는 독자의 지갑마저 망설이게 만드는 가격(현재는 50% 할인행사 중이므로 사정이 낫다). 책장을 슬쩍 넘겨보면 빽빽한 조판과 세세한 각주는 역시 소설보다는 학술서를 상기시킨다. 본문은 330쪽까지이며, 이후는 원문 영인본을 수록하였다. 역시 일반 독자보다는 연구자를 위한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각설하고 <호색일대남>과 <사이카쿠가 남긴 선물>에서 이하라 사이카쿠는 근세 조닌 계층의 호색과 유곽 풍습을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조닌 계층의 문화를 일부 이해하게 되었지만 조닌은 무엇보다 상인이다. 조닌의 본령을 알려면 장사와 거래와 관련된 상인으로서의 성공과 실패, 애환을 살펴봐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일본영대장>은 독특하면서도 의의가 큰 작품이다. 옮긴이는 이 작품을 일본 최초의 본격 경제소설(P.3)로 칭하면서 “상인의 입신출세담이나 파멸담을 통해 금은만능의 조닌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날카롭게 묘사”(P.6)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 소설은 전체 6권인데, 각 권마다 5편씩이니 총 3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편은 대체로 전반부에 일반론적 교훈이나 설교, 후반부에 실제 사례 형식으로 구성된다. 각 편에 한 명에서 여러 명의 상인들의 일화나 일대기가 소개되어 있으므로 등장하는 조닌들의 수는 수십여 명에 해당한다. 이들의 상업적 스토리는 지역적으로 일본 전체를 포괄하며, 성공과 출세, 실패 후 재기, 성공 후 실패, 당대 성공 후대 실패 등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제시되어 있다.

 

사이카쿠의 특징은 매우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인물은 순전한 허구적 존재가 아니라 실존 인물을 살짝 변용한 경우가 대다수이며 따라서 일화도 실제 발생하였던 사례다. 인물의 대화는 현실에서 상인들 간에 주고받거나 충분히 발언했음직한 내용이다. 상업거래의 화폐 단위와 금액도 당대 시세를 반영하여 꼼꼼하게 계산하고 있다. 이로써 독자는 작중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게 되며, 인물과 일화의 사실성은 흥미를 유인하는 효과를 갖는다.

 

다양한 업종에 여러 노력과 수단으로 부자, 즉 장자(長子)가 될 수 있지만, 부자들의 공통점은 분명 존재한다.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라고 하겠지만. 게다가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하듯이 부를 쌓기는 어려워도 낭비하는 길은 쉬운 법이니 경계해야 할 타산지석의 사례도 여럿 볼 수 있다.

 

-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어도 오래가지 못한다. 요행은 반복되지 않으며, 어긋난 마음가짐은 사필귀정으로 이어진다.
  : 권3-3, 권3-4, 권4-4 등

 

- 적절한 사업 아이템 발굴이 중요하다.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하찮은 기회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
  : 권1-1, 권1-5, 권2-3, 권2-4, 권3-1 등

 

- 지혜와 재주가 뛰어나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부자는 운도 따라야 한다. 거부는 어찌 보면 하늘이 내린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거부가 될 수는 없으니 소부라도 되려면 그래도 본인의 능력을 믿고 게으름 없이 노력할 수밖에.
  : 권2-2, 권3-4, 권5-1, 권6-2 등

 

-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자세가 중요하다. 성실과 정직은 장사뿐만 아니라 세상사의 필수 요건이다. 허상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직시해라.
  : 권2-5, 권3-4, 권4-2, 권4-3, 권4-4, 권6-3, 권6-4 등

 

- 사업에 실패해도 실의에 빠져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위기와 실패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 권4-2 등

 

- 작은 돈도 소중히 여기고 근검절약해야 한다. 사치는 나라도 기울게 한다. 구두쇠를 인색하다고 비웃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오히려 합리적 소비관을 지녔다.
  : 권2-1, 권3-1, 권3-2, 권4-5, 권6-1, 권6-4 등

 

- 자식 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부는 2대를 넘기지 못한다. 창업주의 각고노력을 자식은 알지 못한다. 더구나 장사에 전념하다보면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데는 소홀하기 마련이다.
  : 권1-2, 권5-3, 권5-5, 권6-1 등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근세 일본 사회는 부의 축적과 아울러 자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따라서 현세에서 부자가 된다면 후세의 지옥도 꺼리지 않을 정도로 조닌의 금전욕은 불타올랐다(권3-5). 제아무리 뛰어난 예능인이라도 궁핍하다면 상인의 가치관에서는 무능력자에 불과하다(권6-2). 존중할 만한 장자도 있는 반면 비양심적, 천박한 졸부의 폐해도 많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고의파산 사례가 전형적이다(권3-4, 권6-4).

 

진정한 장자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돈이 많은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제대로 일을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다(권4-1, 권6-4). 돈이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건강하면서 자기 분수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집이 번창해도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거나 부부가 헤어지게 되면 잘 안 풀리게 되는 데 이런 것이 세상사이다.” (P.288)

 

마지막 편의 세 부부 가족 사례(권6-6)는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자와 조닌의 모습으로 판단된다.

 

이 책은 통속소설이다. 내용도 근세 일본의 조닌들의 실제적 치부와 파산 사례를 담고 있어 제법 흥미롭다. 반면 저자와 출판사는 이 책을 고전 저작으로 접근하고 있다. 편집 자체도 딱딱하여 학술서적에 가까운데 상세한 각주는 오히려 가독성을 저하시킨다. 국내에 최초 소개되는 작품이니만치 학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소설작품은 소설다운 느낌이 나야 제 맛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리피 할로의 전설 펭귄클래식 132
워싱턴 어빙 지음, 권민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수록 작품>

1. 아내

2. 립 밴 윙클

3. 실연

4. 책 만드는 기술

5. 과부와 아들

6. 문학의 가변성

7. 시골 장례식

8. 유령 신랑

9. 포카노켓의 필립

10. 마을의 자랑거리

11. 낚시꾼

12. 슬리피 할로의 전설

 

미국 문학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워싱턴 어빙의 <스케치북>에 수록된 36편 중 대표적인 12편의 단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케치북>은 견문담, 민담, 단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성격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는 작품집으로서 작가가 고향 주변에서 보고들은 이야기 및 영국 여행의 체험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말에서 어빙은 모험적 성향을 고백한다. 낯선 곳을 방문하고 특이한 인물이나 풍습을 관찰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눈부시게 찬란하며 웅장하고 장엄한 풍경도 물론 운치 있지만, 미국에도 자연절경은 충분하다. 그는 신대륙에는 부족한 고대의 스러져가는 유적, 역사적이고 시적인 연상을 일으키는 유럽의 매력에 관심을 갖는다. 회고적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읽은 <알함브라>와 같이.

 

그의 글은 명확한 장르 구분이 어렵다. <립 밴 윙클><슬리피 할로의 전설>을 허구성에 주목하여 단편소설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허드슨 강 유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 성격을 강조하면 옛이야기의 재현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신변잡기적 수필에 속하는 글이 명확한 경우도 있으며, 짤막한 전기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여지의 글도 존재한다. 어빙이 <스케치북>이라고 명명한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더욱이 필명마저 제프리 크레용이다.

 

작가의 최초 저작은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미국인들의 역사를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뉴욕의 역사>)이라고 한다. <립 밴 윙클>의 주인공 인명도 지역적 배경도 역시 네덜란드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슬리피 할로의 전설>에서도 주인공의 적수인 통뼈 브롬 역시 네덜란드계다. 어빙은 <뉴욕의 역사>를 디트리히 니커보커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두 단편도 출전을 니커보커라고 명시하고 있다. 뉴욕의 역사를 보면 초기 개척자가 네덜란드인이었으며, 네덜란드령으로서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어빙처럼 기이한 옛적 민담과 전설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는 작가는 여기에 주목하였으리라.

 

워싱턴 어빙의 문체는 진지하고 무겁지 않다. 가볍지 않은 경묘한 필치로 유머를 담아서 독자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이 점에서는 후대 오 헨리의 단편을 연상시킨다. 다만 어빙은 만연한 세상의 풍조를 우회적으로 콕콕 찌르는 풍자가 있다. 풍자적이고 해학적이지만 빈정거림과 조소와는 거리가 멀다. 은근한 해학미라고 하겠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경박한 세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오래된 미덕을 상실하고 부박해지며, 겸양과 인정보다 포장과 욕심에 치우치는 풍조. 당대 미국도 현대 못지않았던 듯하다.

 

예상보다 훨씬 흥미로웠던 독서였다. 솔직히 립 밴 윙클이야기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게다가 문학가로서 어빙의 성명은 그다지 높지 않으므로 자칫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녔다. 그런데 웬걸, 그의 글이 이토록 잔잔한 재미와 유머를 가져다 줄 줄이야.

 

배경과 내용상으로 대략적으로 작품군을 구분한다면, 민담과 전설, 가족과 풍습, 세태 풍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 작가는 부부, 연인, 가족 간의 진실한 사랑에 대해 경건한 상념을 품는다. 인정의 순수하고 고결한 면모와 아름다운 전통 및 관습이 희박해져 감을 안타까워한다.

 

<아내>. 아내의 참모습은 시련을 함께 겪어봐야 알 수 있음은 녹슬지 않는 진리다. 장식품으로 생각하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기특한 마음은 부부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한다. 여인은 약하지만 아내는 의외로 강하다.

 

<실연>. 남성과 여성의 사랑과 실연을 받아들이는 정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남성에 비해 여성은 사랑에 올인 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않는 경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태생적 성향일지 아니면 사회적 역할 차이에 따른 후천적 차이일지 궁금하다.

 

<과부와 아들>은 모성애의 의미를 재음미해보는 기회. 노파의 가난하지만 진실하면서도 품위 있는 슬픔의 모습에서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시골 장례식>에서는 장례식에 꽃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좋은 풍습의 의미를 살펴보고 시골을 제외하고 사라지고 있는 것에 탄식한다.

 

<마을의 자랑거리>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상실에 애틋함을 느낀다.

 

2. 세태 풍자는 유머와 해학미가 넘치는 작품들이다.

 

<책 만드는 기술>. 책은 저자의 순수한 창의와 진지한 연구의 산물이었다. 베끼기, 짜깁기 등의 기법을 통해 당대에도 쓰레기 같은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던 듯. 대영도서관에서 백일몽의 형식을 빌려 매우 풍자적이며 해학적이다.

 

<문학의 가변성>. 대영도서관에 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고서와의 대담 형식으로 순수하고 불변한 언어의 허상과 종이와 인쇄술로 문학이 과포화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시인의 불변적 가치를 찬미하는데, 셰익스피어에 대한 작가와 고서 간 견해차가 흥미롭다.

 

3. <립 밴 윙클>, <슬리피 할로의 전설>, <유령 신랑>은 민담과 전설을 배경으로 한다.

 

<립 밴 윙클>. 보통 <스케치북>이라고 하면 이 립 밴 윙클을 떠올린다. 오래된 전설에 근거하여 캐츠킬 산맥 지역의 신비성을 결부시킨 한 잔 술을 먹고 수십 년을 잠든 사나이는 동양 고전에도 상응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미국 독립전쟁 전후, 바가지 긁던 아내의 죽음 등 기묘한 상황 설정으로 절로 유머를 자아낸다.

 

<슬리피 할로의 전설>도 목없는 기사의 민담을 기반으로 기묘하고 으스스한 공포가 일순간 반전하여 어처구니없는 허탈감마저 자아낸다. <유령 신랑>도 독일을 배경으로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민담이다.

 

4. 기타

 

<낚시꾼>은 늙은 낚시꾼과의 만남을 다루고 있는데, 전형적인 신변잡기적 수필에 해당한다.

 

<포카노켓의 필립>은 전혀 의외다. 아메리칸 인디언 전사의 투쟁적 삶을 기술하는데, 비교적 긍정적이어서 당대의 인식과 다른 비주류적 견해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 백인들의 인디언에 대한 주류적 견지는 야만, 미개, 폭력 등과 같이 여전히 부정적이다. 자신들이 인디언들의 땅을 침략하고 빼앗았다는 인식은 갖고 있지 않다. 반면 어빙은 식민개척자들의 탐욕과 편협, 무자비에 대해 비판하면서 타고난 영웅, 천성적으로 고결한 투쟁으로 필립을 평가한다. 고고한 정신, 긍지 높은 가슴, 길들여지지 않는 열정 등 자유로운 인디언 전사를 기리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수식어가 있을까?

 

어빙의 인식에도 물론 한계는 존재한다. 필립 당시에 인디언들의 적은 영국이지만, 미국 독립 이후에도 그들의 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것을 어빙이 놓친 것인지 아니면 부러 외면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그의 가슴은 따뜻하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함브라 2 기담문학 고딕총서 6
워싱턴 어빙 지음, 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알함브라에서 마주친 인물들(백작가족, 퇴역군인)에 얽힌 일화를 삽입하는 외에 어빙은 1권에 이어 이국적인 민담과 설화를 계속한다.

 

- 사랑의 순례자 아흐메드 알 카멜 왕자: 헤네랄리페 성

- 무어인의 유산에 관한 전설: 칠층탑

- ‘알함브라의 장미와 시동의 사랑: 왕녀들의 탑

- 태수와 잘난 척쟁이 공증인

- 외팔이 태수와 아라비아 준마를 타고 온 병사: 베르밀리온 탑

- 신중한 두 동상의 전설: 린다락사 정원

 

작가가 이렇게 옛이야기를 여러 편 소개하는 연유는 그것이야말로 알함브라의 매력을 온전히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이리라. 낡고 쇠락한 옛 유적의 외형에서 사람들은 영화로웠던 과거의 흔적을 발견할 뿐이며, 더불어 시간의 속절없음과 무상감을 절감할 따름이다. 알함브라와 결부된 이야기는 굳어 있는 유적에 온기를 불어넣고 역사와 민담 속 인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흥미진진한 사건과 애절한 사랑, 기이한 전설 등 현재에도 스러지지 않는 신비로움이 알함브라 자체의 이국적 정경과 이슬람 문화와 어우러져 마법적 인상을 세인들에게 깊이 드리운다.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강력한 마법은 스페인 사람들이 무어인들의 문화에 대해 품은 생경한 신비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며, 어마어마한 보물은 재정복 이후 여전히 가난한 후인들의 부에 대한 기대와 소망과 환상이 단편적 사실에 근거하여 터무니없이 증폭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알함브라는 스페인 무슬림인들의 최전성기에 조성된 것이 아니다. 알함브라 궁전은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이때는 11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기독교 세력들의 대대적 이슬람 축출 활동의 와중이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알함브라의 창건자, 아부 알라흐마르와 완성자, 유세프 아불 하기그의 장은 한 줄기 장엄한 낙조를 바라보는 심정이다. 이슬람 세력의 쇠퇴는 이미 확연해지고, 왕조의 연명을 위해 봉신을 자청하고 동족을 공격해야 하는 처지. 알함브라의 슬픈 운명은 창건과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어빙은 알함브라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듯하다. 마지못해 그라나다를 떠나는 자신을 보압딜과 비교하여 치코 2라고 지칭할 정도로. 그의 덕분으로 알함브라는 세인의 관심을 얻게 되어방치와 폐허 상태를 벗어나게 되었고, 이후 스페인 정부는 알함브라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여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관리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을 보면 워싱턴 어빙과 알함브라는 서로에게 운명적인 인연이었다.

 

각 권마다 알함브라 궁전을 그린 장면들이 십여 개 정도 삽화로 들어가 있다. 폴 귀스타브 도레와 존 프레데릭 루이스 등 저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