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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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는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를 통해서이다. 선배 작가의 글 속에서 철저하게 보조적 역할 만을 묵묵히 수행하는 착한 후배 작가의 인상이 지배적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요가를 수련하는. 문득 이 작가가 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의 문체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 말이다.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이 붙어있다. ‘파괴적이고도 충격적이며 반도덕적인 소설이라는 뒤표지의 카피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어떻게 썼길래?

 

파격적인 작품이다. 예상보다도 더욱. 내용 자체는 간단하다. 앞날 어둡고 외롭고 소외된 불쌍한 청춘. 그들의 방황과 일탈, 좌충우돌. 차라리 진부하다. 이를 상쇄하는 게 제재와 문체와 묘사다. 먼저 포르노 못지않은 적나라한 성교 묘사. 근래 발표된 문학작품들에서 예전과 비교하면 충격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성풍속과 성묘사가 빈번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김연수, 김이설 언뜻 떠오르는 면면이다. 그들도 이 대담한 작가에 비하면 약과다. 확실히 야설과 야동이 초등학생들한테도 일상적인 용어로 정착한 현 세태를 반영하는 듯하다.

 

작중 화자는 이십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남성과의 교합 경험이 제법이다. 오로지 과격한 섹스만을 위해 만나는 남자친구, 나이트클럽에서 술에 취해 기억도 나지 않는 남성, 노래방 호스트로 일하는 제리 등. 여성전용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선택하고 노는 풍습은 남녀의 성만 바뀌었을 뿐 남자들의 놀이문화와 판박이다. 제리의 입을 통해 호스트들의 나날도 알게 되었다. 피어싱에 대한 상세한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자칫하면 통속 소설 내지 수준 높은 야설에 그칠 작품을 수렁에서 구해낸 것은 무엇보다도 문체에 있다. 성적 감흥을 촉발하고 고조하고자 일부러 자극적인 묘사와 표현을 남발하는 야설과 달리 작가는 무미건조한 문장을 구사한다. 매우 외설적이지만 일상적인 사소한 행위인 양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작중 장면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나와는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 속, 영화 속 한 장면인 듯.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비주류이자 마이너리거들이다. 사회적 지위는 별 볼일 없는 지방 야간대학생들. 졸업 이후에 대한 환상과 희망이 없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에서 벗어난 수도권 변두리의 대학가와 노래방 등이다. 화자의 집은 서울이지만 서울은 그의 무대가 아니다. 주로 들르는 상점도 지하상가. 시간적 배경을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밤의 인물들이다.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섹스를 하는 때는 항상 밤이다. 낮은 밤의 활동을 예비하는 휴식과 보조적 시간에 불과하다.

 

내가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나는 늘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아였고 인간쓰레기였다.” (P.106)

 

나야말로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하고,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사회에서건 평생 소외만 받으며 살아갈, 그야말로 글러 먹은 인생이었던 것이다.” (P.107)

 

화자의 개인과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확실한 점은 가정사가 평탄치 않다는 점이다. 화자와 엄마 간에는 일절 대화가 없고, 서로 마주치는 것도 극히 꺼린다.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 단순한 동거인에 불과하다.

 

그게 다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나 자신이나 가족, 친구, 앞으로의 일......삶의 모든 불안정한 일들 따위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P.155)

 

누군가는 말한다.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아니다. 청춘이라고 아픈 게 아니다. 누구든지 아픈 법이다. 청춘은 아직 고통에 대응하는 수단과 참을성이 부족하다. 같은 고통도 청춘에게는 유달리 심한 열병으로 다가온다. 그게 청춘이다. 화자를 포함한 작중 인물들은 모두 소외된 존재들이다. 모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소외를 달래기 위해 그들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몸을 흔들며 섹스를 하고 웃음을 판다.

 

그때 불현듯,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절대......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함께 있고 싶었다.” (P.54)

 

나는 그냥, 지금의 나만 좀 아니었으면, 누군가 내 옆에 좀 있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자지만,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함께였던 적이 없었다. 여럿이 술을 마시는 이 순간조차도 나는 혼자라는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P.80)

 

화자가 제리에게 매달리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웃음을 파는 가식에 불과하지만 똑바로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 지불할 돈만 있다면 일체의 관계 형성이 어려움 없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존재. 서늘하고 건조한 가슴에 따스한 한줄기를 기대하고 싶은 존재. 그것이 화자만의 일방적 기대이자 부질없는 소망이지만.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찰나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제발 진심이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만큼은 제발, 진심으로 함께 있어 주었기를 바랐을 뿐이야.” (P.181)

 

부부 간에도, 가족 간에도, 사제 간에도 소통은 점차로 단절되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개체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다. 세상은 현실은 단편화, 파편화되고 있음을 알고 여기에 익숙해지고 편안해하는 게 우리네들이다. 딱한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섹스를 나누어도 내 본질을 결코 변하지 않았다. 나는 늘 혼자였고, 그런 내 곁에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머물러 주지 않았다.” (P.213)

 

문득 체온이 그리워진다. 따뜻한 마음 한구석을 몸서리치게 열망한다. 서로에게 손을 뻗치지 않으면서도 누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고대한다. 영원한 불통과 단절. 아니면 대화와 소통.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선택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작품에서 전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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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 유령 / 민중의 적 / 들오리 동서문화사 월드북 203
헨릭 입센 지음, 소두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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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의 대표작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과 다른 세 편이 실린 신원문화사판 <페르귄트> 이렇게 두 권만 있으면 입센의 중요작품은 거의 섭렵할 수 있다. 각설하고 5편 중에서 <인형의 집><유령>은 따로 단상을 정리하였으므로 두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만 대상으로 삼는다.

 

1.민중의 적

 

곽복록 판과 함께 유이한 번역본이다. 앞선 두 작품들이 가정 내 결혼관계의 진실성을 주된 제재로 하였다면, 여기서 입센은 시각을 가정 밖으로 돌려 개인과 사회 간 관계를 집중적으로 추구한다. 가정을 억압하고 왜곡시키는 압력이 제도와 관습에서 비롯될 때, 사회에서도 올바르지 못한 현상이 촉발되리라는 예측은 당연하다.

 

사회대중과 민중을 위해 불의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일어선 스토크만 박사. 기대와는 달리 그는 민중의 적이요, 사회의 반역자로 비난받고 철저히 고립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군은 그의 가족과 친구인 선장을 제외하면 부정적 전형들이다. 시장, 언론인, 기업인은 물론 대다수 주민들마저도.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인 사회라는 통상적 인식과 달리 개인이 도덕적이고 정의롭지 못할 때 소위 정의사회 구현은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사익과 정의가 상충할 때 개인의 태도에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부고발자 스토크만 박사는 자신의 정의와 용기가 주민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행복해한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한 그에게 오히려 연민의 정마저 품게 되며, 언론과 권력을 빼앗긴 지식인의 자화상이 그대로 노정된다. 왜곡과 탄압으로 대중에게서 지탄받을 때 순수한 개인은 무력하고 나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회유에 굴복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신의 순수성마저 불순으로 의심받게 만든 장인의 주식 매집. 그의 장인 모텐 히일은 기회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한편 표리부동한 선동적 진보 언론에 대한 날선 비판과 매도에서는 언론의 본질에 대한 의문 제기와 입센의 분노마저 느낄 수 있다. 정당을 고기 가는 기계에 비유한 대목은 씁쓸하지만 정곡을 찌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토크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다들 잘 들어둬. 우린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다. 그래서 외로운 거야. 하지만 외로움은 우리를 강하게 키워줄 거야. 우린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다......” (P.236)

 

결말은 비장하다. 성난 군중의 아우성과 물리적 위협의 점증. 정의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개인의 용기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민중의 적을 제거할 것을 외치는 어리석은 민중. 민중의 적은 민중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선뜻 떠오른다.

 

스토크만: 인간의 겉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저절로 민중이 되지는 않더란 말입니다. 민중의 명예는 반드시 성취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이라는 이름도 역시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P.216)  

 

2. 들오리

 

개인, 가정은 물론 사회 차원에서도 진실은 항상 중요하다. 진실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 한 모든 관계는 허상이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인간 권리의 지칠 줄 모르는 투쟁자인 입센은 불현 듯 발걸음을 돌린다. 밖을 향한 시선과 발언을 자신에게로 향한다. 진실의 정당성은 부인할 수 없지만, 진실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은 것인가? 부조리한 사회, 왜곡된 현실을 개선하거나 전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언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욱이 그 진실이란 게 당사자들에게는 상기하기도 싫을 정도로 무참하고 뼈아픈 내용이라면 굳이 진실을 파헤치는 게 올바른 것일까?

 

이 작품은 입센의 자기질문과 자기반성을 담고 있다. 몰락했지만 소시민으로서 안락한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얄마르에게 친구 그레거스가 찾아오면서 은폐되었던 진실이 탄로 나고 갈등이 꿈틀거린다. 잔인한 진실은 안온한 삶을 위협하고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대립된다. 냉엄한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거짓을 뿌리치고 허위로 가득 찬 가정은 깨뜨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진실을 모른 체 살아가는 삶은 실상은 거짓된 것이었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그레거스: 얄마르는 마음을 푹 놓고, 기만의 한복판에 순진하게 정착해 있어요......‘가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은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P.259)

 

얄마르: 지나, 고생스럽고 가난해도 좋지 않아? 이래도 우린 가족이니까. 난 이렇게 말하겠어. “이 집이라서 행복하다.”” (P.271)

 

그레거스는 순진한 이상주의자다. 진실만 있으면 세상이 바로잡히고 행복으로 뒤덮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상과 정의의 병의 대표자다. 그가 가정의 비밀을 얄마르에게 폭로하는 것도 진실의 토대에서 새로운 부부관계의 출발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의사 렐링은 대조적 관점을 갖는다. ‘인생의 거짓이 오히려 얄마르에 유익하다고 믿는다.

 

렐링: 인생의 거짓. 인생의 거짓이란 놈은 사람에게 기운을 주는 힘을 지니고 있거든......평범한 사람에게서 인생의 거짓을 빼앗는 건 그 사람에게서 행복을 빼앗는 것과 같은 거요.” (P.334~335)

 

얄마르는 분개하고 이성적으로는 그레거스에 동조하나, 그에게는 행동에 옮길 용기와 능력이 결여되었다. 가출을 선언하다가 주저하고 슬그머니 포기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희비극이다. 그레거스의 예상과는 달리 얄마르의 가정은 균열되고 풍비박산을 목전에 두게 되기까지 이른다. 딸 헤드비의 애꿎은 죽음은 방점을 찍게 되고.

 

들오리는 얄마르의 표상이다. 자꾸만 물속으로 숨어 파고들려고 하는. 들오리는 얄마르 집안의 거짓된 관계의 총체적 지칭이다. 헤드비가 들오리를 죽이려다 자신만 죽게 된 사실은 시사적이다. 얄마르의 가정은 파괴되는 반면, 베를레와 셀비 부인이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혼 생활에 들어서게 된다는 전개도 역설적이다. 입센은 인간에 대해 회의적이고 비관적 견해를 품게 된 듯하다.  

 

3. 바다에서 온 여인

 

가정극이라는 면에서 <인형의 집>, <유령>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전작들이 작품 활동의 중기에 해당하여 대체로 표현이 직설적인 반면 이 작품은 후기에 쓰여져 보다 상징적 요소가 풍부하다. 결론에 있어서도 전작들이 비극적 파국으로 치닫는 것과 달리 긍정적인 매조지를 보여주고 있어 입센의 시각과 작품 세계가 변모하였음을 알게 해준다.

 

남녀 간 결혼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품의 주 테마다. 결혼관도 <인형의 집> 시기보다는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결혼을 남녀 간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전적인 신뢰로 인식한다. 의사 봔겔과 아내 엘리다의 결혼은 겉보기와는 달리 올바르고 행복한 관계는 아니다. 아내는 전처의 아이들에 대해 무심하고 방관한다. 남편과 아이들은 죽은 전처의 생일을 위장하여 기념하고 있다.

 

엘리다: 어쨌든 우리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 진실이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그곳에 와서 나를 샀다는 거예요......그렇지만 문제는 내가 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당신과 함께 살게 된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P.421)

 

엘리다는 바다에서 온 여인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바다에 친화감을 느낀다. 바다에서 날마다 수영을 즐기며, 일상을 지탱하는 낙이다. 미국인 선원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녀는 초조해 한다. 엘리다는 선원에 대해 두려움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갖고 있다. 그 사람보다 현재의 남편이 더 훌륭함을 알면서도 내심 결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즉 선원에 대해서는 충동에 이끌린 언약을 하였으며, 봔겔에 대해서는 경제적 관점이 우선했다는 스스로의 자책감이다. 이것은 참다운 결혼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엘리다: 아무도 나의 선택을 막을 수 없어요. 당신도, 그 누구도 말이에요.” (P.429)

 

노라와 마찬가지로 엘리다도 가출을 결심한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강제할 법적 권리가 있다. 헬메르처럼 봔겔도 아내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깨인 인물이다. 아내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의사를 존중하는 게 올바름을 깨닫는다. 엘리다의 부인의 뒤바뀐 선택은 남편과의 관계에서 진정하고 진실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해서다. 이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부인은 시골로 떠나지 않고 처음으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해피엔딩?

 

입센은 섣부르게 긍정적이지 않다. 봔겔의 큰딸 볼레타로 하여금 엘리다의 전철을 따르게 한다. 볼레타가 중년의 안홀름으로부터의 청혼을 승낙한 사유는 역시 가정 탈출 욕구와 경제적 요인의 결합이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명령에 따른 선택은 아니다. 그녀가 새엄마의 전철을 그대로 반복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다만 이를 통해서 엘리다와 볼레타의 선택이 단순히 일개인 차원이 아닌 사회 집단적 사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엘리다: (격렬하게) 나를 미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 유혹! 여기엔 바다와 같은 힘이 있어요!” (P.442)

 

이 작품에서 바다는 신비롭고 상징적인 존재다. 엘리다와 선원은 바다에 대한 친화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으며, 바다에 대한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을 갖는다. 그녀에게 선원은 바다와, 봔겔에게 엘리다는 바다와 같게 느껴진다. 무섭고 두렵지만 매혹적인 존재로서.

 

엘리다가 바다에, 선원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의 반영이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꿈꾸고 개척하는 미래의 삶 말이다. 봔겔과 엘리다를 놓아주고, 엘리다가 다시 봔겔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진실과 자유의지의 토대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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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로봇 스누트의 모험
브라이언 게이지 지음, 캐서린 오토시 그림, 한강 옮김 / 더북컴퍼니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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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도시를 배경으로 로봇을 소재로 한 동화다. 로봇간의 대결이란 면에서 <트랜스포머>를 연상시키지만, 스스로 사고하는 로봇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아이 로봇>과도 유사성을 지닌다. 다만 내용 전개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감안하면 동화라고 해도 고학년에 어울린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독재자 빅 브라더가 사람들의 의식과 감정을 통제한다. 그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로 사람들을 감시한다. 이 책의 기본 토대는 로봇판 <1984>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돔 시의 로봇들은 광채 로봇, 경비 로봇, 일벌레 로봇의 계급으로 구분되며 도시를 이끄는 리더는 파더 스크린이다. 파더 스크린은 자체로 선전 도구이자 감시 기구이다. 모든 일벌레 로봇은 빛을 생산하는 작업에 매진해야 하며, 그들은 전설적 영웅 를 찬양하고 닮고자 애쓴다. 일하고 소비하고 잠자는 일상의 반복이지만 일벌레 로봇들은 행복하다.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비주류, 불평불만자는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와 조직의 안녕을 깨뜨리는 저해 요인이다. 조직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신속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 반면 그들은 외관상 평화로운 조직이나 사회에 실상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경보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다. 이 작품에서는 꼬마 로봇 스누트가 그러하다. 스누트는 호기심 가득하고 궁금증을 품고 있으며 항상 공상에 젖어 있다. 생산 능률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가장 형편없는 로봇이다. 스누트는 가장 뛰어난 로봇이기도 하다. 대장장이 로봇 실로는 스누트를 뛰어난 지능을 지닌 로봇으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돔 시의 로봇 사회는 철저한 독재 사회다. 파더 스크린, 즉 실로의 동생 시로가 지배하는 광채 로봇이 지배계급을 이룬 가운데 체제 위협적인 요소는 일체 통제되며 끊임없는 세뇌 공작으로 일벌레 로봇들은 자신들이 실상은 빛의 로봇이라는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한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인간 사회에 적용시켜보면 과두 지배체제, 언론 왜곡, 교육 통제, 감시의 경찰국가, 우민화 정책, 조작된 영웅 등 독재 정권이 즐겨 사용하는 모든 기법들이 그대로 확인된다. 여기에 저항하는 개인은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이자 매국노로 지탄된다. 사회에서 조직으로 범위를 축소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중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 된다. 조직에 충성하던가 아니면 입을 다물라. 내부고발자(whistle blower)는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곤란하다. 사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받거나 조직과 조직 내 이웃들의 안녕을 뒤흔드는 불편한 존재로 치부되며 설사 정당하더라도 그는 조직에 머무르지 못한다. 조직과 평범한 성원들은 내부고발자를 미워하는 법이다.

 

너는 일벌레 로봇이 아니야, 친구. 너는 혁명가야!......그래, 나는 혁명가야.” (P.71)

 

스누트는 자의든 타의든 혁명가다. 그는 의문과 의심을 품고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보이지만 미묘하게 흠이 존재하는 돔 시의 체제, 그 작은 틈으로 인해 돔 시의 로봇 사회와 지배 체제는 붕괴되었다. 빛이 사라지자 스누트를 포함한 일벌레 로봇들은 물론, 광채 로봇과 경비 로봇들은 모두 멈춰버렸다.

 

동화는 속성 상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과장과 비약, 상상의 요소가 풍부하다. 이 작품의 경우 결말은 예측 가능하면서도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데, 태양이 떠오르면서 빛의 로봇들이 모두 회생한다는 점이다. 나비로 탈바꿈한 페르난도는 자연의 위대함을 상징적으로 예증한다. 돔 시의 로봇들은 진실을 몰랐다 하더라도 실로가 이를 숨기고 있었던 점, 그리고 끝내 오브와 파편에만 주의를 환기시킨 점은 쉽사리 정리가 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장편 동화 한 편에 너무나 많은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게 아니었을까. 작가 자신의 이념, 자유와 정의의 본질, 개체와 조직, 사회의 관계, 인공과 자연, SF적 요소와 극적 재미 등. 조금만 욕심을 덜 부리고 스토리라인을 압축하였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옮긴이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작가가 번역을 하는 경우는 간혹 있으므로 특이할 게 없지만 동화도 쓰는데다가 외국 동화도 번역을 하니 무슨 작품을 어떻게 번역하였을지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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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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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책에는 하멜에 관해 간략한 기술만 언급된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표류했는데 십여 년간 억류되었다가 일본으로 탈출하였다라고. 그리고 벨테브레(우리 이름으로 박연)도 함께 언급한다.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을 통해 새삼 하멜을 포함한 화란인 선원들이 조선에 오게 된 연유, 그들이 조선 땅에서 보고들은 것들과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를 되짚어 보니 그네들의 표류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책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하멜의 기록을 토대로 조선왕조실록과 개인 문집 등의 자료를 토대로 보완하여 하멜의 조선생활을 재정리하였다. 부록으로 하멜표류기의 본문 번역을 수록하고 있다. 17세기 이방인이 남긴 많지 않은 기록만을 가지고 현대의 우리가 내용 이해와 공감을 갖기란 부족할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단지 해설을 덧붙이지 않고 표류기를 다시 쓰고 있어 하멜의 표류와 탈출 이후까지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좋은 기획이다.

 

하멜 일행이 무려 13년간이나 조선에 억류되었던 사연이 먼저 궁금하다. 그네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인도적 배려였을까 또는 다분히 정치적 의도에서 이루어진 행위였을까? 인도적 고려라고 호의적으로 보기엔 이후 그네들에 대한 처우와 궁핍한 나날이 설명되지 않는다. 통행 자유를 일정 부분 허용하면서 동래 왜관에 접근 금지령과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마다 원근 지역으로 소개된 사실 등을 보았을 때 정치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단 말인가? 앞선 벨테브레와 같이 소위 남반국의 무기와 기술을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북벌 정책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화란인들의 신분과 지위는 무엇일까? 포로, 죄인 아니면 난민? 응당 난민으로 간주되어야 하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네들을 희망에 따라 일본으로 보내지 못했다면 최소한 조선에서 정착시키기 위한 법적, 제도적 지원이 뒤따라야 할 텐데 매우 미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신경 쓰인다고 전원 죽일 것인가를 무려 사흘간이나 조정에서 논의했다는 자체가 어이없다. 게다가 소위 좋은 사령관, 나쁜 사령관이라는 하멜의 기록처럼 지방수령의 개인적 성향과 방침마다 그네들에 대한 처우는 천차만별을 보인다.

 

화란인들은 어쨌든 십년 이상이라는 기간 동안 조선에 정착하였다. 그네들이 불현 듯 조선 땅을 떠나게 계기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싶다. 기록을 보면 하멜 일행은 분명히 정착의도를 지녔다.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고 타협을 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1656년에 도성에서 전라도로 내려와 전라병영에 정착한 후 1663년에 분산 수용되기까지 그네들은 7년간 한곳에 정주하였다. 그들이 분산수용된 것은 수년 간 지속된 장기 흉년의 여파였다.

 

우리는 이렇게 헤어지는 것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곳에 정착해서 이 나라 방식에 따라 집과 가구, 작은 정원 등을 살 만하게 장만해 왔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장만하느라 힘깨나 들었는데, 이제 다 버리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P.248)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은 이들도 있었다고 하니 분명히 그네들은 조선에 영구 거주할 의향도 다분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네들에게 탈출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그렇다. 그들은 포로도 죄인도 아닌데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일생을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각오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이 배를 구하고 탈출하여 나가사키 항에 들어가서 일본 관리를 대면한 장면은 이전 조선의 사례와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무려 53항목에 달하는 질문을 두 번 반복하였던 것인데 화란인들에 대한 것은 물론 상당수가 조선의 현황과 정세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심문과정이었다. 당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국가 역량의 차이를 여기서도 알 수 있다.

 

하멜이 남긴 기록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대체로 사실에 근거하여 신뢰성이 높은 편이다. 그는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층의 당대 조선인들을 만났다. 표류기 자체는 물론 별도의 조선왕국기를 읽다 보면 마치 인류학자가 미지의 원시 부족들을 방문하고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지니고 충실한 인류학적 문명기록을 후세에 전승하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서양인의 시각을 통해 수백 년 전 선조들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니 생경과 친숙이 공존하는 낯선 문명을 접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코레시안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되지 못합니다. 남을 속여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생각합니다.......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입니다......그들은 피를 싫어합니다.” (P.292)

 

매우 적확한 관찰이며 요즘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하멜 일행이 조선인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합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들에게 우리 말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P.292)

 

모처럼만에 읽은 좋은 책이다. 먼지 쌓인 고전에 숨결을 불어넣은 저자 겸 역자에 감사를 표한다. 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이런 책을 쓰기까지의 헌신과 연구는 지난하였으리라.

 

문득 하멜 일행이 벨테브레(박연)과 상면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역만리 미지의 나라에서 생사를 점칠 수 없는 불안하고 두려운 순간에 대면한 같은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동향인의 존재. 참으로 반가우면서도 한없는 감사의 념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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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르 솔롬 - 헨릭입센희곡 전집 3
헨리 입센 지음, 이주상 옮김 / 예니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뭔가 알 듯 말 듯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여 내가 이해하고 파악했다고 생각한 내용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니면 일개인의 전적인 오독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상당 부분 입센 자신에게서 비롯하는데, 그가 사회극에 신비와 상징적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한 후기에 해당한다.

 

입센은 <민중의 적>, <들오리>에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하였다. 당대 노르웨이의 사회와 정치적 정세를 반영하듯이 그의 작품에는 이념(보수/진보)간 갈등, 세대(/)간 갈등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여기에서는 크롤과 모르텐스가드가 대립적 구도에 놓여 있으며, 로즈메르는 레베카의 영향력에 의해 보수에서 진보로 전향 중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작품을 보면 이념적 갈등이 상호비방을 넘어서 물리적 대립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입센의 이른바 타락한 좌파언론인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여전하다. 모르텐스가드가 로즈메르의 전향을 환영하면서도 그의 신앙포기는 정치적으로 불리하다고 은닉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그러하다.

 

로즈메르는 전직 목사로서 저택의 주인이다. 지주로 판단되지만 작중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다만 지역 주민들의 여론형성에 커다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신분임은 확실하다. 작품명은 단순히 로즈메르의 집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저택이 갖는 어둡고 황량한 분위기와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로즈메르솔롬은 배경에 그치지 않고 존재 자체가 작중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레베카: 이곳 로즈메르솔롬에서는 한시라도 편안한 날이 없어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것 같아요.” (P.32)

 

헬세스부인: , 아가씨, 갓난아이들이 로즈메르솔롬에서 우는 법은 없어요......어른이 되면 웃는 법도 없데요. 살아있을 동안 대체 웃는 사람이 없다고 해요.” (P.107)

 

레베카는 진보 이념의 신뢰자로서 로즈메르의 전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로즈메르의 죽은 아내 비타의 친구이다. 여기서 로즈메르와 비타, 레베카의 묘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비타는 정신병으로 자살한 것으로 작중에서 처리된다.

 

로즈메르는 자유인을 지향한다. 사회적 관습과 이념적 억압을 떨치고 순전한 자유의지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인물이 자유인이라고 하겠다. 작중에서 로즈메르는 명석한 두뇌와 굳건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비쳐지지 않는다. 그는 귀가 얇은 편에 가깝다. 어려서는 가정교사 브랜델에, 성장해서는 학교장인 손위처남 크롤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제 그의 의지처는 레베카다.

 

로즈메르의 전향과 레베카와의 동거(同居)는 크롤을 필두로 한 보수파로부터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여기서 비타의 사망 배경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비타의 자살은 순전한 정신적 발작의 소산인가 아니면 발작을 부추긴 계기가 존재했던 것은 아닌가. 이 대목에서 극 전개는 크게 소용돌이친다.

 

비타의 죽음에서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 로즈메르와 레베카가 정신적으로 긴밀해질수록, 소외되고 아이마저 갖지 못한 비타의 자괴감은 더해간다. 로즈메르에 대한 레베카의 사랑마저 알아차린다. 자신이 남편에게 걸림돌이 될까 우려한(극중에서는 나중에 레베카의 다음 대사로 구체화된다. “당신은 그런 결혼의 암흑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병들어가고 있었지요.”(P.127) 비타의 선택. 이러한 사실이 두 사람의 자유인 노력의 성공 목전에서 드러나게 되며, 로즈메르는 혼란스러워한다.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레베카는 애정을 품었지만 로즈메르는 동지애(“레베카와 내가 공통으로 믿는 남녀 간의 순수한 동지애”(P.100)로 받아들인다. 이후 그는 깨닫는다. 그것은 우정을 가장한 사랑이었음을.

 

로즈메르: 아니, 어쩌면 레베카 우리 두 사람의 결합은 마음으로 맺은 결혼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마 맨 처음부터. 내가 언제나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건 그 때문인 것 같아.” (P.113)

 

로즈메르와 레베카의 동반 투신이라는 충격적 결말은 의외였기에 놀라움이 더 컸다. 그들은 도덕적인 죄의식을 지녔지만 한 점 부끄럼 없을 정도로 떳떳하고 결백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스스로의 무죄를 입증할 길도 인정받을 가능도 없다. 그들의 자살은 당대 사회에서 동기, 노력, 행위의 순수성을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함과 결국 자유인은 사회, 이념, 그리고 삶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타가 로즈메르를 놓아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듯 레베카도 로즈메르를 자유인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수하기 위하여 투신하고자 한다. 로즈메르는 삶의 주체성을 회복할 결심을 한다. 입센의 희곡에서 <유령>을 제외하면 주인공들이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 로즈메르도 레베카도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다.

 

로즈메르: 난 우리의 삶의 자유를 되찾을 결심을 했소, 레베카.” (P.155)

레베카: 그건 패배가 아니에요. 전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요.” (P.155)

 

그들은 진정한 부부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패배자이면서 승리자이다.

 

입센은 이 작품에는 숨겨진 차원과 상징들을 빈번하게 구사하고 있다. 비타가 최후를 맞기 전에 행한 일련의 행위들, 로즈메르의 가정교사였던 진보주의자 브랜델의 변모, 그리고 레베카의 출생의 비밀들은 자체로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백모단원, 저수지와 인도교, 무엇보다 로즈메르솔렘 그 자체는 극중의 사건과 분위기를 미묘하게 암시하고 유도한다. 백모단원의 경우 다른 입센 해설책자에서는 백마의 전설로 풀이하고 있어 약간은 혼란스럽다.

 

이 책의 특장점은 충실한 작품해설이다. 통상의 일반론적 해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상징주의 연극 관점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 심리에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여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파헤친 내용은 주인공들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으며, 도출해 낸 결론도 인간은 자연이나 환경에 지배당하는 존재라는 허무주의적이면 자연주의적 시각을 지닌다.

 

* 이 책도 일찍이 절판되어 구할 길이 없다가 용산도서관에서 겨우 빌려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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