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1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박동원 옮김 / 동녘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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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내한테 이 작품을 읽어봤냐고 물었다가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있다. 자신은 학창 시절에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하면서. 본시 안티 기질이 다분하여 남들이 많이 읽은 책은 일부러 외면하던 스타일이라 호기심과 무관심의 경계선에 오랫동안 올려두었던 책을 홧김과 오기로 읽는다.

 

제제의 영상에 어릴 적의 나, 오늘날의 우리 아이들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 된다. 독자들치고 제제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지 못하는 이는 없으리라. 그의 꼬마 악마적인 장난에 절레절레 손사래를 치거나 다소 심하지만 너털웃음으로 넘기는 반면 가혹한 매를 맞고 버림받은 아이마냥 방치되는 장면에는 가슴 한구석이 찡하다. 고백하건대 통근 전철에서 책을 읽으면서 찔끔거리는 눈물을 삼키느라고 창밖 멀리 응시한 적이 두어 번 정도 있다.

 

제제에 대한 주변의 평은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들을 포함한 이웃들에게 그는 극도의 장난꾸러기일 뿐이다. 제제에게 호의적인 이해를 갖는 인물들도 있다. 빠임 선생님은 제제를 황금 같은 마음씨를 가진 아이”(P.119)라고 부른다. 뽀르뚜가가 제제에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연유도 단순한 동정과 연민의 차원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제제의 집이 가난에 허덕이지 않았다면 제제와 그의 장난에 대응하는 태도가 좀 더 너그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글로리아 누나 외에는 자신을 감싸고 포용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 가족의 모습. 심한 장난으로, 밖으로만 떠도는 외에 제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달리 없다. 비록 남달리 영리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지만 겨우 다섯 살, 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였으므로. 제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어릴 때에 꽤 많은 매를 맞고 자랐다. 심한 장난도 있었고, 대개는 말을 안 들어서다. 하라는 것은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꼭 해버리는. 그래서인지 제제가 끔찍한 매를 맞는 대목에서는 마치 자신인 마냥 슬픈 추억이 물밀 듯 몰려옴을 느낀다. 자신의 말대로 제제는 정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생명이었던가.

 

작고 못생긴 라임오렌지나무가 처음부터 제제의 맘에 들었을 리 없지만, 나무는 제제에게 말을 걸어주고 그의 말을 싫증내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악연으로 시작한 뽀르뚜가와의 만남은 역으로 더없이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제제는 뽀르뚜가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다. 뽀르뚜가에게 매달리는 제제에게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동년배의 또래와 우정을 갖게 되고, 부모 형제에게 가족으로서의 사랑과 애정을 품는 법인데 제제는 그러하지 못하다.

 

아이가 철이 들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에드문두 아저씨의 말처럼 생각이 자라고 커서 우리 머리와 마음을 모두 돌보게 돼. 생각은 우리 눈과 인생의 모든 것에 길들게 돼.”(P.100)는 현상이지만, 또한 현실을 깨달음을 뜻한다. 현실이 마법세계가 아니며 행복과 기쁨보다는 불행과 슬픔을 마주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인생은 고()라고 하는 거창한 설법이 아니더라도 제제는 가장 소중한 존재의 상실을 통해 뼈저리고 적나라한 현실과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삶을 노래하는 시는 꽃이 아니라 물 위에 떨어져 바다로 떠내려가는 수많은 이파리들과 같은 것이었다.” (P.244)

 

이제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아픔이란 가슴 전체가 모두 아린, 그런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죽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P.270)

 

제제에게 있어 부성(父性)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다. 실직한 아빠를 대신해서 생계를 위하여 밤늦도록 일하는 엄마의 존재에 대한 인정과 그를 대신하는 글로리아 누나를 통해 제제는 모성(母性)의 향수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반면 아빠의 실직은 집안 전체에 어둠을 가져왔다. 제제가 이를 뼈저리게 절감한 것은 크리스마스의 가라앉은 분위기와 선물의 부재를 통해서다. 가난뱅이 아빠, 무능한 아빠, 폭력적인 아빠의 대척점을 제제는 뽀르뚜가에서 찾는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니까요.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아요. 그리고 내 가슴속에 행복의 태양이 빛나는 것 같아요.” (P.202)

 

뽀르뚜가를 잃었음에도 제제는 자신의 아빠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뭣 때문에 날 무릎에 앉혔을까? 저 사람은 내 아빠가 아냐. 내 아빤 돌아가셨어. 망가라치바가 내 아빠를 죽였어.” (P.290)

 

밍기뉴가 첫 번째로 피운 작고 흰 꽃 한 송이로 제제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였듯이 제제는 뽀르뚜가의 상실과 생사를 오간 열병으로 유년 시절에 작별을 전한다. 그들은 꿈의 세계를 떠나 현실과 고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었다.”(P.285). 작가는 이 작품의 결말을 밝고 즐겁게 끝맺지 못하였다.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제제와 밍기뉴, 뽀르뚜가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여운을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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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1. 왕표는 어떻게 구원되었나

2. 마르코의 미소

3. 죽음의 젖

4.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

5. 네레이데스를 사랑한 남자

6. 제비들의 노트르담

7. 과부 아프로디시아

8. 목잘린 칼리

9. 마르코 크랄리에비치의 최후

10. 코르넬리우스 베르그의 슬픔

 

이 작가의 이름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창비세계문학 중 프랑스 편에 수록된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를 읽으면서부터다. 물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이라는 작품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묘한 분위기의 이 단편을 읽고 수록된 작품집이 일찍이 번역 출간된 적이 있었지만 절판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중고서점을 수소문해서 겨우 구하게 된 나름 사연이 깃든 책이다.

 

유르스나르가 밝히는 동양은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지역적 개념과 아울러 문화적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역적으로는 발칸반도 이동에서 인도를 거쳐 일본까지를 포괄하며, 문화적으로는 비 정통기독교 문명지역을 가리킨다. 정교와 힌두교, 불교와 같은. 구체적으로 보면 <왕표는 어떻게 구원되었나>는 중국, <겐지 왕자의 마지막 사랑>은 일본, 그리고 <목잘린 칼리>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다. 나머지 작품들은 그리스와 발칸 지역의 전설과 민담들을 연원으로 삼는다. 마지막의 <코르넬리우스 베르그의 슬픔>만은 암스테르담이 배경이지만 기본 정서는 여타 단편들과 유사하다.

 

동방을 다룬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와 작품들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먼저 이국적 정서다. 서구 주류문화에서 볼 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문화적으로도 상이한 타국의 낯선 인물과 문물을 소재로 다루었으니 생경함이 주는 이국적 흥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국적 요소는 신비함 내지 기이함과도 결부된다.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물과 현상들을 대할 때 우리들 가슴 속에는 낮선 두려움이 뭉실거린다. 두려움과 호기심은 신비함의 필수 구성요소다.

 

이 작가는 순전한 창작보다는 역사적 제재를 도구로 글쓰기를 행한다. 대표작은 물론 이 작품집에 실린 이야기들도 전설, 민담과 민요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자술하고 있듯이. 역사 이야기는 사실(史實)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어서 독자들이 허구마저 사실인 마냥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작가는 엄선한 사실을 통해, 그리고 스스로가 꾸며놓은 허구를 갖고 자신의 메시지에 역사의 권위를 더할 수 있다.

 

한편의 책으로 섣부른 판단은 곤란하지만, 유르스나르는 반전의 기교와 아이러니, 조소(차라리 암소(暗笑)라고 해도 좋을)적 태도를 선호하는 듯 보인다.

 

마르코를 주인공으로 한 두 단편의 경우 전자에서 이교도들의 온갖 수단에도 완벽하게 시체처럼 위장하여 탈출에 성공한 마르코가 후자에서는 작은 노인과의 충돌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역사적 에피소드인 동시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의적 이야기다. 겐지 왕자를 다룬 이야기에서는 花散里 여인의 울부짖음은 그녀의 헌신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울림을 전해주며, 네레이데스를 사랑한 남자가 대가로 이성을 상실했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부러워한다. 과부 아프로디시아의 사랑의 죽음은 숭고함보다는 희극적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집이 발표된 해는 1938. 당시 유럽 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목전에 두고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서구문명의 종말과 반성을 요구하는 여러 사상과 저작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작품집도 서구문명의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올바른 자신의 이해는 타인의 시각에서 더 객관적이고 정확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림에 비교할 때 추악한 현실을 인식한 황제의 추상같은 질책. 현실을 초월하여 물아일체가 되어버린 왕표의 사라짐. 예술의 절대성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모색이 깃들여있다. 님프들을 사악한 존재로 여겨서 절멸시키려고 하는 수도사와 동정과 자비의 마음을 일깨우는 마리아, 순수한 인드라의 여신인 칼리가 추악한 창녀의 몸뚱이를 빌어 환생하여 영과 육의 갈등으로 고뇌하는 대목은 당대 유럽의 불안정하고 대립적인 정세와 이의 해소를 위한 작가의 나름대로의 해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은 위대한 화가며, 우주의 화가라는 말을 듣고 코르넬리우스 베르그는 씁쓸히 낮은 목소리로읊조린다.

 

얼마나 불행인가요, 신딕씨, 신이 풍경화로 그치지 못한 것은.” (P.129)

 

 

 

*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어 이제 독자들이 쉽게 구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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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축사 솔 네즈 - 헨릭입센 희곡전집 1
헨리 입센 지음, 이주상 옮김 / 예니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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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입센의 작품세계를 거칠게 구분하여 볼 때, 대중적으로 유명한 희곡들은 중기 사실주의에 속한다.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왜곡과 부조리, 이의 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가정을 뛰쳐나가고 사회와 정면으로 대결을 벌이는 인물들에 우리는 갈채를 보내고 통쾌한 대리만족도 느낄 수 있다.

 

입센의 후기 작품들은 상징주의로 분류된다. 이 말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작중 인물의 대사나 행동, 배경 등에 교묘히 숨겨져 암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극의 구성도 결말을 향해 직선으로 향해 있지 않고 살짝살짝 변죽만 울리면서 독자를 감질나게 하며 갈짓자 행보를 거듭한다. 별 수 없다. 독자는 보물찾기를 하듯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고 이따금 멈춰 서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할 수밖에.

 

<대건축사 솔네즈>는 독특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입센 자신의 개인생활과 육성이 절절이 묻어난다. 그의 나이 이미 육십 대 중반.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입센이지만 서서히 육체적, 정신적 쇠약의 기미를 절감한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만남. 이것은 작중에서 힐다 봔겔과 솔네즈의 관계로 설정된다.

 

입센에게서 결혼 생활의 의미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바다에서 온 여인>에서 겨우 희망의 싹을 발견하지만, 대체로 불평등과 억압과, 소통 단절로 형식적 관계 유지 차원에만 머물고 있다. 의례적이 상투적인 대화만 거듭할 뿐 진실과 교감이 없는 부부 관계는 기실 남남이나 진배없다. 극중의 솔네즈와 그의 부인 알렌처럼.

 

작가는 여기에서 비로소 온전히 개인에 몰두한다. 솔네즈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는 존재는 종전처럼 사회와 관습이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다. 대건축사로 성공한 솔네즈, 그의 화려한 성공은 이면의 어둠과 함께한다. 그는 성공을 위해 주위의 인간관계를 계산적으로 관리한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여직원 카쟈의 순정을 교묘히 이용할 줄도 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소외의 길을 구한다.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이해와 공감을 거부한다. 솔네즈에게 아내는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마음의 병을 갖게 된 환자일 따름이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솔네즈에게 유일한 두려움은 젊은이다. 그는 자신보다 유능한 젊은 세대가 곧바로 등장하여 자신을 몰아낼 것에 대한 강박 관념에 시달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체계화되고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벌써 입센은 인물의 이상 심리에 초점을 맞춘 극작품을 발표하였다. 오로지 성공만을 쫓으며 살아온 중년 세대.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을 만한 시기에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노리며 무섭게 다가서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 입센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볼 수도 있다. 기존 입센 작품에서 세대 간 갈등은 이념 갈등의 형태로 표출된 반면 이 작품에서는 직설적인 세대 간 이해 갈등으로 여과 없이 그려지고 있다.

 

솔네즈: 결국 그랬었군요. 할바드 솔네즈!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주어라! 가장 젊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라!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라! 기회를! 기회를!” (P.24)

 

솔네즈: 젊은 세대들이 날 노려보고 있습니다......언젠가 젊은 세대들이 절 찾아와 기회를 달라고 소리치며 내 방문을 두드릴 것이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때는 할바드 솔네즈, 건축사는 끝장이오.” (P.34)

 

솔네즈: 날더러 문을 열어주라고?......안돼. 그건 그럴 수 없어. 젊은 세대! 그건 새로운 변화요...내 삶의 한계는 젊은이들 때문이오. 그건 하늘이 내린 최후의 심판이기도 하오.” (P.46)

 

힐다 봔겔의 극중 역할은 다층적이다. 그녀는 솔네즈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한편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무모함을 감수하게끔 충동한다. 높은 탑 위의 솔네즈를 본 소녀시절의 환상에 젖어 있는 그녀의 행동은 솔네즈의 이상을 고취하는 동시에 자신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의 실현에 집착하는 병리적 속성을 보인다.

 

솔네즈의 아내 알렌은 어떠한가? 그녀의 정신적 외상은 혼란스럽다. 힐다와의 대화에서 그녀는 화재로 인한 아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애지중지하던 인형들의 상실이다. 그녀는 회상하며 눈물마저 흘린다.

 

알렌: (눈물을 흘리며) 내가 아끼던 예쁜 인형들......, 가엾은 것들! 그걸 구해냈어야 하는 건데! 생각만 해도 가엾어서 견디질 못하겠어요.” (P.80)

 

솔네즈의 최후는 운명적이다. 삶의 진실을 내면에서도 가정에서도 세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난한 영혼. 그의 빈 마음을 이상에 대한 허상과 야망을 향한 과욕으로 대체시키는 역할을 바로 힐다가 맡는다. 힐다와 솔네즈는 이상의 갈구자라는 면에서 이상적인 파트너십을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다. 반면 그것이 참다운 현실의 삶에 근거하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음은 그네들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솔네즈가 세우고 오르고자 하는 탑은 인간을 영역을 넘는 신의 영역이다. 구약성서에서 바벨탑을 자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고 신이 인식하듯이. 인간이 사는 집에는 높은 탑이 필요 없다. 오직 신이 거처하는 곳에 높은 탑이 존재한다. 솔네즈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인가 아니면 금기를 깨뜨리려는 영웅인가. 힐다는 망상을 부추겨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인물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힘을 불어넣는 존재인가. 그런 의미에서 추락한 솔네즈를 두고 내뱉는 힐다의 마지막 대사는 작품의 말미를 장식하게 충분하다.

 

힐다: 하지만 그분은 해내셨어요. 나의 위대한 건축사! 솔네즈! ...” (P.98)

 

입센은 이 작품에서 사건 전개와 같은 구성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서 여러 가지 암시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대사는 의미 자체가 아니라 앞뒤 문맥과 인물들의 행동, 어조, 조명 등의 무대 등과 같은 요소들의 영향을 통해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 작품 전체에 모호성과 신비성 내지 기이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힐다: (분간할 수 없는 어조로 그러나 냉정하게) 대건축사 솔네즈의 새 집에 꽃을 달아요.

솔네즈: 그래, 인간들이 사는 집이 될 수 없는 새 집에...... (솔네즈는 정원문으로 퇴장)

힐다: (이상한 표정으로 창틀 옆에 선다. 잠시 후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신기한 일이지......대건축사 솔네즈......”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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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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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아이한테 읽혀도 괜찮을지 막상 내가 읽고 나니 자신 없어진다. 어릴 적 TV를 통해 본 삐삐 이야기는 여전히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유쾌하고 통쾌한 천하장사 말괄량이 삐삐. 아이들과 재미와 추억을 공유할 의도로 삼부작을 구입했건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소심해진다.

 

삐삐의 언행이 통쾌함을 안겨주는 이유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사회적 상궤를 거부하고 도전하는 데 있다.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아이, 학교도 가지 않고 괴상한 옷차림으로 다니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가 친구로 여긴다면 대다수의 부모는 질겁할 것이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토를 다니는 아이, 어른들이 대화를 하는데 함부로 끼어들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아이를 좋아할 어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의 없는 아이, 버릇없는 아이, 이것이 어른들이 보는 삐삐의 모습이다.

 

어른들이 정해준 틀과 규범의 한계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아이. 엉뚱하면서 과감한 발상을 아무 일 아닌 듯 생각하고 행동으로 나타내주는 아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매순간 흥미와 모험심을 유발하는 친구이므로 당연히 열렬한 환호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어른들보다 훨씬 힘이 커서 경찰들도 도둑들도 차력사도 단번에 제압하는 아이. 재빠른 몸놀림과 초인적인 대담성과 균형감, 운동신경으로 서커스단을 능가하는 재주를 보이는 아이. 이런 삐삐에게 열광하지 않은 또래 아이들이 과연 있을까.

 

삐삐는 문명의 아웃사이더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와 세계를 방랑하였다. 배에서는 학교도 없고, 사회의 정교한 예절과 도덕과 관습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런 아이가 어쩔 수 없이 육지 생활, 사회생활을 겪게 되었으니 혼란과 충돌은 일정 부분 불가피하였으리라. 삐삐 자신도 자각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다들 나더러 버릇이 없다고 해.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바다에서는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P.165)

 

난 얌전해지기는 틀렸나 봐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걸요. 앞으로도 절대 얌전해지지 못할 거예요. 그냥 바다에서 지낼 걸 그랬어요.” (P.180)

 

삐삐의 심성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한 아이를 괴롭히는 여러 아이들을 혼내주거나, 도둑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폴카 춤을 춘 후 떳떳한 금화를 나눠주는 장면을 보자. 무엇보다 화재가 났을 때 아무도 손쓰지 못하는 건물에 갇힌 아이들을 구하는 대목을 보면 삐삐의 사려분별과 용기를 재평가하게 된다.

 

작가는 삐삐의 좌충우돌과 기행을 통해서 아이들의 눈을 붙잡아 맬 단순한 재미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언뜻언뜻 내비치는 삐삐의 말에는 위선과 허식에 얽매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과회에서 부인들이 자기네 가정부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자 삐삐는 자기 할머니집의 가정부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일화들을 계속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할머니는 그를 훌륭한 가정부라고 인정했다는 전언을 들려주면서 말이다.

 

그래도 내 아이가 삐삐와 같은 언행을 따라하거나 그런 아이를 친구로 어울린다면 흔쾌히 허용할 수 있을까. 구구단을 몰라도 잘 살 수 있고, 수학 교육을 바보 같은 장난으로 일소에 부치고 술래잡기나 하며 놀겠다고 선언하며, 예쁜 분홍빛 버섯을 덥석 베어 문다거나 가루 설탕을 바닥에 뿌리고 걷는 재미를 시연해 보인다면 말이다. 머리는 그래야 한다면서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소심한 부모의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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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비룡소 클래식 12
위더 지음, 하이럼 반즈 외 그림,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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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와 파트라슈. 주인공 이름만 들어도 어린 시절 가슴 쨍하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떠오른다. <플랜더스의 개>. 우연히 얻게 된 아동용 책을 두 아이들이 열심히 읽는다. 특히 글밥이 조금만 많아도 질색하던 둘째 녀석이 웬일인지 반복해서 읽는 모습이 신기하다. 그래 이 참에 제대로 된 원작을 보게 해줘야지 하고 주문한 게 이 책. 절반의 성공이다. 원작을 알 수 있게 된 점이 성공이라면, 원작이 오히려 더 분량이 적다는 점에서 당황. <플랜더스의 개>는 채 백 쪽이 되지 않는다. 중편 이야기 정도쯤. 내용 전개도 비교적 간단한 편이라 뭔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데, 애니메이션과 이를 토대로 한 시중 동화책의 부풀리기와 덧칠의 영향 탓이다. 게다가 파트라슈는 흰 털북숭이 또는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개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파트라슈는 넬로의 보조적 존재가 아니다. 작중 주인공은 사람과 동물이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인생 경험은 넬로보다 파트라슈가 더 많기에 넬로의 소망과 희망의 부질없음에 그는 안타까워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잔인성과 이기심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이므로.

 

새 주인은 술주정뱅이에다가 짐승 같은 사람이었어요. 파트라슈의 하루하루는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동물에게 고통을 나눠 주는 건, 이 땅의 기독교도들이 신앙심을 보여 주는 한 방법이었어요.” (P.15)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흔히 기대하듯이 훈훈하고 흐뭇한 웃음 대신 서늘함과 뿌연 눈물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세계의 명절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법은 아니라는 자명함에도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깨닫게 하면서. 크리스마스에 더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점도. 비단 크리스마스뿐이랴.

 

파트라슈에게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넬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사람이었다면 맛있는 음식, 원기를 되찾아줄 온기, 아늑한 잠자리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었겠지만 파트라슈의 우정은 그런 것과 달랐어요.” (P.88)

 

화자의 시각은 전지적 시점을 택하여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인물의 행위와 심경까지도 속속들이 들려준다. 어조는 담담하면서도 약간의 따스함과 동정심을 품고 넬로와 파트라슈를 바라본다. 자칫 값싼 감상에 빠지기 쉬울 텐데 휩쓸리지 않도록 꿋꿋하게 기조를 유지하는 작가의 인내심에 경탄한다. 반면 주변 인물에 대한 묘사는 시니컬하며 회의적이다. 작가는 기독교인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위에 냉소한다. 루벤스의 명작을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성당, 넬로의 순수성을 믿으면서도 마을의 유일한 부잣집에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주민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복합적이다. 단순한 연민과 동정을 넘어 종을 뛰어넘는 사랑과 우정을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인간보다 더 나은. 그리고 부끄러움을 품게 만든다.

 

넬로와 파트라슈에게는 길고 구차한 삶보다 차라리 죽음이 더 자비로운 일이었지요. 죽음은 충직한 사랑을 품었던 한 생명과 순진무구한 믿음을 지녔던 또 다른 생명을 데려갔습니다. 사랑에 대한 보상도 없고 믿음 또한 실현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말이지요.” (P.97)

 

<뉘른베르크 스토브><플랜더스의 개>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분량 면에서는 전편보다 오히려 더 길다. 전자가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라면, 후자는 사람과 사물의 교감을 제재로 한다. 스토브가 그 대상이다. 그렇다, 난로! 못생기고 천편일률적인 난방도구를 연상하지 말자. 사면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자체로서도 예술품으로서 뛰어나게 제작된 커다란 난로다. 공장에서 찍어낸 게 아니라 장인이 수작업으로 만든 공예품. 아우구스트의 집은 가난하다. 빚을 지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형편에 이러한 스토브는 일종의 사치다. 오래 전에 우연히 발견하여 대대로 내려온, 그래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히르슈포겔. 히르슈포겔에 무한한 애정을 품는 아우구스트. 아버지는 감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돈에 급급하여 스토브를 팔아넘긴다.

 

소년의 어린 시절은 이제 자신에게서 깡그리 사라져 버렸습니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고 밝은 성격도 함께 사라져 버렸지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삼키느라 소년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지쳐 있었어요. 자신에게는 이 일이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P.141)

 

이후 전개는 작품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우구스트와 히르슈포겔의 여행담으로 이어진다. 아홉 살 난 어린이가 과감하게 집을 뛰쳐나가 스토브와 함께 있고자 추위와 허기, 공포를 무릅쓰고 온갖 고생을 같이한다. 그것은 존재의 양식을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 덕분이리라.

 

작품 속에는 어른과 아이의 행동 간 극명한 대조가 묘한 긴장을 제공한다. 소중한 스토브를 팔아치운 아버지를 원망하기는 쉽지만 불가피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아버지를 비난하며 가출한 아들. 당대도 지금도 쉽사리 용서받거나 인정받기는 어려운 행위다. 물론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현실 세계는 동화와는 다르므로. 왕을 속여 넘긴 신뢰하던 신하의 사기적 행위. 터무니없는 중간마진을 챙긴 골동품상 등. 이들과 전적으로 순수함으로 가득 찬 아이 아우구스트와는 헤아릴 길 없는 간극이 놓여있다.

 

사람과 사물이 상호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 공감과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사물은 이를 받아들일 영혼을 갖추어야 한다. 작가는 오로지 모작이나 위조품이 아닌 진품만이 영혼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진실한 존재 간의 따스한 교감을 꿈인지 환상일지 모를 장면에서 뉘른베르크산 스토브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제 삶은, 속이 텅 빈 채 도시의 웅장한 방에 썰렁하게 서있는 것보다 훨씬 충만했습니다......진심으로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던 그 초라한 집에서 나온 이상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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