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 고전 명작을 집중적으로 읽고 싶을 때 작가와 작품의 선택이 난감할 때가 많다. 손쉬운 방법으로 출판사별로 경쟁적으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무작정 읽어도 나쁘지 않다. 대개 열에 여섯, 일곱 정도는 검증된 작가와 작품 위주로 선정되고 나머지는 출판사별로 독자적인 기준으로 작품 선정을 하는 듯하다.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일정 지식을 갖춘 상태라면 비판적 안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초심자의 경우 편향될 우려도 있다. 또 하나 가이드북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평생 독서 계획><세계문학사 작은사전>을 참조하고 있다. 이런 책들의 장점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단점을 언급하자면 지침서, 실용서에 가까운 성격이라 그 자체의 재미는 별로 없다는 점이다.

 

문학가이드 성격을 지니면서도 자체로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어 초심자의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는 책, 이것이 바로 이 책을 기획한 의도라고 하겠다. 이런 유형의 책은 한둘이 아니다. 그 점에서 지은이가 장영희 선생이라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의 글을 읽는 이를 자연스레 문장에 몰입하게 만든다. 기발하고 세련되며 아름답기 그지없는 어휘와 문체를 구사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박하고 겸손하며 마음씨 좋은 고모 또는 이모가 곁에 앉아서 조근조근한 어투로 구수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앉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수십 쪽을 넘겨 읽어도 좋고 한두 장씩 천천히 읽어나가도 좋다.

 

언급된 작가와 작품들 중 상당수는 이미 읽어본 사례들이다. 예이츠, 위대한 개츠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돈키호테, 월든, 이방인 등등. 어렸을 때 청소년용으로만 읽거나 이름만 들어본 작품도 제법 있다. 주홍글씨, 세일즈맨의 죽음, 사일러스 마아너, 백경, 레미제라블, 음향과 분노,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반면 이번에 처음 들어본 작가들도 존재한다. 영미시 시인들의 다수가 그러하며, 헨리 제임스, 손톤 와일더,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등이 그러하다.

 

아는 작가와 작품들을 장영희 선생이 자신의 개인적 일화와 감상 등을 섞어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솜씨에 빠져 새삼스레 반추해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다. 신문 칼럼용이라 분량, 독자층의 제한을 염두에 두는 만큼 심오하고 상세한 분석과 감상을 풀어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읽은 독자는 추억을 되살리고 안 읽은 독자에게는 소개된 작가와 작품을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깔끔하게 글을 맺고 있다.

 

에세이 류의 글이 지나치게 딱딱하면 안 되므로 글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아무래도 지은이의 개인사가 많이 언급되어 있다. 대학교수로서 수업 관련한 일화 등도 솔깃하며 쏠쏠한 즐거움을 안겨주지만, 무엇보다도 심금을 울리는 것은 지은이의 신체적 장애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일상이다. 동정은 당연히 사양하겠지만 배려를 신경 쓰기는커녕 장애를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편견을 품고 박대하는 일화는 씁쓸함을 자아내며, 우리네들의 자화상이 여전히 아름답지 않음을 인식하게 한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하는 길들임은 서로 간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것이 마음의 진실한 교류를 통해 가능하다고 할 때, 장애를 장애 그 자체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덧붙임 없이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달라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과도 상통한다. 브라우닝 부부의 러브스토리가 더없이 아름답고 가슴속을 저며 오는 연유이기도 하다. 모든 사랑이 브라우닝 부부와 같이 예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에밀리 디킨슨은 사랑은 하나의 완전한 고통이며, 아픈 경험이라고 토로한다. 지은이는 문학의 주제를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어떻게 사랑하며 사는가에 귀착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작가들은 결국 이 한 가지 주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66)

 

나중에 이 책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읽을 때 지은이가 언급한 사랑과 삶의 시각에서 문학을 이해해보고 싶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내세울 것 없는 소시민 아버지의 고독과 슬픔을 이해하고 싶다. 사회와 가족의 냉대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어깨 움츠린 아버지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리라. <위대한 개츠비>위대한은 여전히 불가해하여 다시 한 번 읽을 계획이지만 순수한 꿈과 희망이라는 설명에 이해의 단서를 찾는다. <안네의 일기>를 통해 지은이는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고 단언한다. 명분과 이해관계를 위해서 일반론으로 접근하기 쉽지만 당사자가 본인 또는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내게 이름만 유명한 <황무지>가 쉬운 시가 아니라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라는 점이 오히려 호기심을 당긴다.

 

남보다 앞서고 뛰어나게 보여야 인정받고 대우받는 세상이다. 평범함은 죄악시되기 일쑤다. 우습다. 제아무리 그래봤자 인류의 대부분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보통 사람들인데 말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거짓된 삶을 사는 셈이다. 실버스타인의 동화는 너무 확연한 주제에도 잊혀버린 진실을 깨우치는 힘이 있다.

 

인간의 가장 크고 중요한 덕목이 사랑이라고 할진대 사랑할 줄 모르는 마음이 가장 큰 결함이다. 신체적 결함만 장애는 아니다. 사지육신 멀쩡한데 마음과 영혼의 고갱이가 빠져있는 것보다 더 큰 장애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의연하다.

 

까짓, 동전 구하는 거지로 오인되고 예쁜 잠옷을 안 입으면 어떠랴. 온 세상이 풍비박산 나는 듯 왁자지껄 시끄러운데, 나는 이 아름다운 봄날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한 번 만져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P.202)

 

마지막 장에서 지은이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수년 전 가볍게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척추암으로 전이되었음을. 입원과 수술을 위해 학교도 칼럼도 더 이상 지속해 나갈 수 없음을 알린다. 담담한 듯 서술하지만 그 심경이 얼마나 참담할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으리라. 수십 년을 괴롭힌 신체적 장애가 이제는 또 다른 극한을 요구하는 있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방성통곡을 하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다. 여기서 지은이는 생명의 원초적 귀중함을 생각한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앞으로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지만 우리는 나중의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래의 글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모든 삶의 과정은 영원하지 않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고통,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회생하는 봄에 새삼 생명을 생각해 본다. 생명이 있는 한 이 고달픈 질곡의 삶 속에도 희망은 있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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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신진 작가 한강은 1998년에 아이오와 대학 주최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하여 수개월 간 미국에 머물렀다. 작가는 어떤 계기로 무슨 목적을 갖고 출국했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뭔가에 쫓기듯 부랴부랴 떠난 듯한 인상으로 나는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좌절을 겪었다든지 또는 창작욕의 고갈을 느꼈다든지 추측하였지만, 후의 내용으로 봐서는 섣부른 지레짐작이었다.

 

이 책은 사람과의 만남 글이다. 작가의 말 그대로 미국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해당한다. 간결하고 소략한 글 속에서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들, 그네들의 일상 속에 감춰든 개성, 고통, 사랑, 삶 등이 작가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다. 소설을 쓰건, 시를 쓰건 작가이건 아니건 누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애환을 한둘 지니고 있다.

 

인디언인 살리달에게서는 진행형인 인디언 차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통의 삶을 박탈당한 그녀는 자의반 타의반 스스로를 추방하여 유목의 삶을 선택한다.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한 감정을 누가 섣불리 공감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만났던 이들 중에서 마흐무드와 페이민이 유달리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아시아권이라는 지리적 공감대 탓일까. 팔레스타인의 유혈 역사와 불안한 정세, 미얀마의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투옥될지 모르는 불안 등이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마흐무드의 말처럼 그것이 인생이므로.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때로는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 바로 그것들이 모두 인생이라는 듯이...... (P.74)

 

그럼에도 마흐무드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사랑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는 작가의 의견에 숙연히 부정한다.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다며.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들.

 

글쎄, 사랑을 둘러싼 것들도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본질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순전한 기쁨과 행복만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왠지 모를 한숨, 슬픔, 가슴 아픔 등이 없다면 사랑은 일면적이고 획일적으로 치우쳤을 것이다. 사랑하기에 질투의 감정이 발생하며, 이별의 쓰라림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재회의 순간을 기다리면서. 이 모든 게 바로 사랑이다.

 

페이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동기 역시 같다. 자신의 뿌리이자 문화이고 언어가 있을 수 있는 자리가 그 땅이므로. 사랑이 있는 곳을 떠나서 그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작가의 친구 미란의 결혼 스토리는 책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오랜 연원을 지니기에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마침 이 책 다음에 고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을 읽고 있어서 그런지 새삼 반성하게 된다. 이런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해 나가는 그네들의 용기와 사랑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일상에 부대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짬을 내지만 그저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낼 따름이다. 그저 남들처럼 물 흐르듯이 살아갈 뿐 대단한 존재도 아닌 나 따위가 끙끙대봤자 하며 방기하는 때도 있다. 그럼에도 무역회사에서 일하며 늦은 밤에만 글을 쓸 수 있는 하이도 포기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피곤해도 그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순간이므로.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도 마찬가지다, 파비앙의 성당 이야기처럼. 나처럼 미미한 존재의 그나마 미미한 행위의 무의미성에 대해서.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다. 결과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자신에 충실할 뿐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P.36)

 

프로그램을 마친 후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 꿈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겠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서로 간에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리라는 사실을. 그걸 알면서도 그들은 아낌없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은 영원히 한없이 풍요로울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가 아이오와에서 얻은 것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었기에.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P.226)

 

이 글의 진면모는 미국 체류를 전후하여 타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면, 일화 등을 통해 서른 즈음 작가에게 길게 드리워진 반향일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청춘 시절과 (작가를 떠난) 수수한 일상에 대한 크로키라고 볼 수도 있다.

 

2003년에 초판으로 낸 책을 2009년에 개정판으로 새롭게 다듬었다. 장정, 지질, 편집이 내용과 어울려 정갈하면서도 예쁜 느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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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모험 환상문학전집 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성곤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아문센과 스코트 대령에 의한 1911년 남극점 도달로 정점에 달한 남극대륙 탐험을 소재로 에드거 앨런 포가 모험소설을 발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1838년이다. 쥘 베른도 아닌 에드거 앨런 포라니 놀랍기 이를 데 없다. 시는 물론이고 탐정소설, 환상문학에서도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그가 모험문학 장르에서도 명작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에서는 후대의 스티븐슨과 베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양모험 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대양 항해, 폭풍우, 선상 반란 등. 어디 그뿐인가? 포의 전매특허인 공포와 괴기적 요소도 빠뜨릴 수 없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을 연상케 하는 유령선과의 마주침.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작가는 후반부에서 남극대륙 탐험이라는 유례없는 대도전을 감행한다. 사실과 가상이 교묘히 뒤섞여 있어 흥미와 긴박감을 안겨주는 탐험일지. 미지의 땅에서 만나는 낯선 원주민들. 그는 선배인 디포도 잊지 않았다. 이어 종결부는 너무나도 아스라한 환상 자체를 보여준다.

 

약 이백년 가까이 경과한 옛 모험소설에 진부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깊이 매료된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뛰어난 글쓰기 덕택일 것이다.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잇따른 사건의 연속과 긴장감 넘치는 팽팽한 구성, 고어적 폭력과 유혈을 상세히 묘사하여 끔찍한 처절감을 안겨주는 과감성.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 모르지만 해양 항해와 지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이 주는 사실감. 남극해 주변의 섬들의 방문과 위도와 경도의 제시 등이 창작인지 실제인지 궁금해서 구글 지도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사실에 근거한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순전한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는 한계위도 이하에서부터이다.

 

그러자 탈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내 마음속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희미해졌다. 다음 순간 나는 떨어지고 싶은 강렬한 유혹에 빠졌다. 그것은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열망, 그리고 정열이었다. (P.219)

 

포라는 작가의 특색은 여일하다. 일상에 대한 비일상, 밝음에 대한 어둠, 평온 대신 불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천착, 현실을 넘는 환상과 괴기스러움,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 본능. 이런 속성들이 유명한 단편들뿐만 아니라 이 장편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아니라면 감히 시체의 살을 뜯어먹는 거대한 갈매기의 피범벅된 부리와 완전히 썩어빠진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몸서리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가 노리는 효과는 분명 공포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후 <산호섬> 등에서 인육을 먹는 식인종은 단골로 등장한다. 실제 사실의 반영인 동시에 독자들의 관심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데 적절한 소재이며, 야만인에 대한 종교적,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효과도 지닌다. 그 점에서 포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극한상황에 도달했을 때 다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소수의 생명과 육체를 희생하는 대목, 즉 문명인이 인육을 먹는 장면을 천연덕스럽게 툭 던져놓고 있다. 작가는 냉정하다. 화자인 아서 고든 핌과 동료 선원인 덕 피터스를 제외하고 그램퍼스 호배에 탔던 모든 이가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는 선인도 악인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을 구조하고 후에 남극 탐험에 나선 제인 호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한다.

 

만년설과 빙산만이 가득한 남극해를 돌파하여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갔더니 기후가 온화하며 기이한 자연현상을 보이는 낯선 섬에 도착하였다는 설정은 현대의 우리 눈으로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당대의 독자들과 그들이 지닌 과학과 상식의 수준에서 볼 때 무리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포는 풀리지 않는 괴이한 복선을 반복하여 드리우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어두운 검정색의 세계에 사는 원주민들은 흰색에 대해 병적인 공포심을 품는다. ‘테켈리 리라는 단어 속에 내재된 미지의 신비한 공포는 극점 가까이 도달한 핌 일행이 마주친 하얀 가루의 소나기를 뿜어내는 하늘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폭포에서 정점에 달한다. 마지막 장면은 두려움 보다는 신비함의 극치일 것이다.

 

322. 부쩍 어두워졌지만, 우리 앞의 하얀 휘장이 쏟아놓는 파도의 빛 때문에 그나마 좀 환했다. 거대하고 창백한 수많은 새들이 하얀 베일 너머로 끊임없이 날고 시야에서 사라져가면서 끝없이 <테켈리 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누누가 보트 바닥에서 몸을 움직였으나, 만져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받아들이려고 활짝 벌리고 있는 폭포의 포옹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러나 우리의 길목에 갑자기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큰, 수의를 입은 사람의 형상이 물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마치 눈처럼 완벽하게 흰색이었다. (P.230)

 

작가는 이 대목에서 핌의 수기를 중단시킨다, 매우 현명하게도. 더 이상의 진전은 자신에게도 부담스럽겠지만 한편 독자의 흥미와 상상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점에서 끝내는 극적 효과도 노리지 않았을까. 독자는 못다 한 결말에 대해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부록으로 수록된 단편 <빙원의 스핑크스>1897년에 쥘 베른이 미완결된 결말에 대한 나름대로 구상한 덧붙이기다. 역량 있는 작가이므로 제법 흥미롭고 그럴듯한 끝맺음을 보여주지만 포의 과감하고 치밀한 작품 성격과 스타일과는 판이함을 나타낸다. 자신만의 전개를 위해서 원작의 내용과 합치되지 않는 면도 존재하고 무엇보다 포가 그렇게 강조한 흰색에 대한 고려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어 단절된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고든 핌이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산전수전 온갖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은 그에게 합당한 죽음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독자로서의 내면의 반발심을 억누르기 어렵다. 분량 면에서도 그렇고 쥘 베른이라면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역자의 해설은 인간 심리와 꿈과 무의식, 흑백의 대립과 인종 갈등까지 폭넓고 심층적으로 작품 분석을 하고 있어 포의 이 소설이 단순한 모험문학이 아님을 알려준다. “자아 발견과 탐색의 여행”(P.284)라는 분석에는 일부분 동감하지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단편소설과 몇몇 시 작품을 통해 문학계에 불후의 명성을 남긴 에드거 앨런 포.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는데 잔인하고 어두운 작품 분위기와 모호함과 당혹감을 안겨주는 결말 부분 등 대중적 모험소설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본 듯하다. 역으로 이런 점들이 그의 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특색이자 장점으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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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자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3
J.M 바스콘셀로스 지음, 이광윤 옮김, 김효진 그림 / 동녘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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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는 외로운 아이였다. 가족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슬픔, 그 옆에 라임 오렌지나무와 뽀르뚜가가 있다. <햇빛사냥>의 제제는 입양되었다. 새 가족 속에서 제제는 여전히 외로운 소년이었다.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존재는 아담, 모리스 그리고 파이올리 수사다. 그리고 제제는 어느덧 청년으로 자랐다. 그의 곁에는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친구 따르씨지우를 빼고는. 제제는 아직도 고독하다. 이따금 그는 세상을 향한 격렬한 슬픔과 분개를 표출한다. 동일한 행동과 반응이지만 어린 제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그의 내면이 새삼 낯설고 궁금하다.

 

, 맙소사! 죽어 버리겠어. 죽어 버릴 거야. 없어져 버릴 테야! 이 불행하고, 고통스럽고, 보잘것없는 삶을 끝내 버리고 싶어! 아아......! (P.53)

 

스무 살을 맞이하게 될 제제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나는 이를 독립 본능의 발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전의 제제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눈물을 흘렸다면 건장한 제제는 세상에 도전하기를 열망한다. 거친 무대에 뛰어들어 열정을 불태우고 싶고,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싶은 젊은이. 그는 우리에 갇힌 야생동물처럼 불안하게 서성인다. 가끔씩 포효한다.

 

그 집에서 뛰쳐나가 방랑자처럼 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애정을 찾고, 사랑을 구하며,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넓디넓은 이 세상에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여행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까? (P.47)

 

국내의 경우 병역 의무와 보편화된 대학 및 대학원 진학, 취업 곤란 등의 사유로 인해 남성들의 사회 진출이 매우 늦어져 보통 이십대 후반 내지 삼십에 다다라서야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늦은 취업과 주택 마련 비용의 상승 등으로 경제적 독립과 결혼은 더더욱 지연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반면 서구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대학 진학을 하든 아니면 취업을 하든지 간에 자식이 독립을 하는 문화가 보편적이라고 한다.

 

나는 턱을 괴고는 아버지를 향해 가만히 웃기만 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어쩌면 저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 어찌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78)

 

제제에게 돌아가 본다. 입양된 처지에서 가족들은 그에게 온전히 친밀한 존재는 아니다. 비록 과거보다는 위의 인용과 같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지만 부자가 상호 일정 양보와 타협을 한 결과일 뿐이다. 여기에는 아버지의 와병도 한몫을 거들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했지만 장래에 대한 방향 설정을 아직 못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나딸이라는 도시는 별로 큰 도시가 아니므로 여기에서 제대로 정착을 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학을 중퇴한 그는 자연스레 빈둥거릴 수밖에 없는 여건에 처해진 셈이다. 이 작품에서 제제의 일과 중 상당한 분량이 수영에 할애되고 있는 연유가 그러하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인 사정, 게다가 가족과의 삶은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 그의 마음은 밖으로 시종 떠나있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스무 살이 되는데도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P.39)

 

그의 아버지는 제제의 심중을 다소간 이해한다. 제제의 장래 설계에 대해 특정하게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인내심을 보여준다. 그토록 바라던 참다운 아버지의 태도, 즉 자식을 애정으로 토닥거리고 진실한 공감으로 이해해주는 모습을 제제는 조금씩 발견하게 된다. 다만 제제의 첫사랑에 대해서는 제외하고. 우리는 제제의 아버지가 씰비아와의 교제 중단을 요구하는 구체적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직 연애를 하기엔 어리다고 보는 건지, 아니면 제제 누나의 말대로 그녀가 품행이 단정하지 못한 더럽고 구역질나는 계집일지도 모른다.

 

젊은이가 성인으로 자리 잡는 계기는 사랑과 결혼이다. 제제는 아버지의 수술을 앞두고 연애를 끊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랑의 중단,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잃어버렸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겪어야 진정한 감정이다. 제제 자신도 아버지도 제제의 감정의 깊이와 진정성을 과소평가한 셈이다. 오랜 시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제제가 비로소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을 만났는데 강제로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의 삶에는 더 이상의 기쁨도 의미도 없고 오직 절망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나를 파멸시키고 있었다. 그 모든 것 때문에 내 안에서는 더 살고 싶은 의욕이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다. (P.138)

 

헤어짐의 고통을 절절히 깨달은 제제가 씰비아와 재회한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작별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가족들하고. 자신만의 작은 세상도, 유년기 시절도 이제 이별이다. 그것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예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제제처럼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건 쓰디쓴 실패의 나락을 겪어든 어차피 떠나야 할 길이다. 제제의 앞날에 축복을!

 

아버지는 나에게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 주었던 것이다. 갑자기 겁이 났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넓고, 많은 비밀이 있어서 우리 인간들이 그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불쌍한 존재 하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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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지기 2015-02-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동녘의 마케터입니다.

저희 책을 읽고 또 리뷰까지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리뷰도 해주시고 저희 출판사의 책을 읽어 주셨는데 동녘에서 진행하는 SNS 이벤트 소식을 못 받으시는 것 같아 동녘의 페이스북 주소를 알려드려요.

www.facebook.com/dongnyokpub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를 누르시면 계속 해서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올해부터 자체적으로 여러 이벤트를 많이 진행할 예정이니 기대해 주시고, 행운까지 거머쥐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하구요. 절대 독자님을 귀찮게 하거나 클릭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음력 새해에도 늘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라며 앞으로도 좋은 독서 하세요. 고맙습니다. ^^
 
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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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본 지 꽤 오래됐다. 예이츠를 집중적으로 읽을 때 그의 시집을 여러 편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그때 영한대역판 또는 번역판으로 읽으면서 시도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 수가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종의 선입견이겠지만 시는 원어로 읽어야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산문에 비해 운문의 경우 번역을 통해서는 도저히 원작의 향기를 느낄 수 없다는. 그렇다면 우리 시는 읽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므로 결국 시를 안 읽는 핑계에 대한 일종의 자기 정당화랄 수밖에. 그것이 예이츠를 읽으며 번역시도 어쨌든 시인의 감성과 이미지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제법 소득이다. 이 책에서도 예이츠의 시 두 편이 소개된다.

 

시인은 모두 삶에 대한 사랑을 노래”(P.6)하는 이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감각과 감성을 통해 자기의 심장으로 우리를 대변해주는 사람”(P.6)들이라고. 여러 사랑 중에서 시인의 감수성을 가장 잡아당기는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이 책의 표제도 사랑에 눈떠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부여받는 생일”(P.7)을 뜻한다고.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생일, 크리스티나 로제티, P.17)

 

사랑은......아주 작은 방이라도 하나의 우주로 만드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세계. 각자가 하나이고 함께 하나이니. (새 아침, 존 던, P.41)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주세요......

영원함으로 당신이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사랑해야 한다면, 엘리자베스 배릿 브라우닝, P.49)

 

우리는 함께여야 합니다. 그대와 나 (그대와 나, 헨리 앨포드, P.103)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107)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글로리아 밴더빌트, P.181)

 

이성 간의 애잔하고 절절한 사랑은 새봄의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듯 하다가 시샘하는 바람과 추위로 시련을 겪기도 한다. 사랑의 기쁨은 항상 슬픔과 동행한다. 절기가 언제나 봄철일 수 없듯이 눈부시게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도 변하게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서 옛 모습을 잃거나 영원한 이별이라는 운명의 타격을 마주하기도 한다.

 

......사랑이란 바람 한 번 불면

떨어지고 마는 활짝 핀 꽃뿐이란 걸......

가슴을 늦게야 배운다는 것, 그것만 가여워하세요. (가여워 마세요. 에드너 St. 빈센트 밀레이, P.45)

 

그녀에게도 8월이 지나갔네......

그녀도 중년이 될 테니. (찻집, 에즈라 파운드, P.123)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슬픈 장례식, W. H. 오든, P.87)

 

가버린 나날들을 생각하네. (눈물이, 덧없는 눈물이, 앨프레드 테니슨, P.99)

 

워낙 영미시에 문외한인지라 소개된 작품을 물론 시인들로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이가 있으면 다행일 정도다. 처음 듣는 시인들이 부지기수다. 저자는 이 책을 딱딱하게 만들 의도가 전혀 없다. 순전히 시 소개와 시의 이해를 위한 저자의 감상을 수록하였을 뿐 시인 소개와 해설은 매우 간소에 그친다. 중요한 것은 시를 읽는 독자의 가슴이리라. 이른바 심금에 다가오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명시라고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지니지 않는다. 화가 김점선의 삽화라고 쉽게 칭하기에는 비중과 노력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그림들도 책의 분위기에 크게 일조한다.

 

어쨌거나 사랑을 한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행복하다. 사랑의 추억은 그의 가슴속에 영원한 따뜻함을 남겨줄 것이므로. 그것이 숨겨놓은 사랑이든, 설익은 풋사랑일지라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많은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졌으니.

 

......나를 경멸하다가도......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지 아니하노라. (소네트 29, 윌리엄 셰익스피어, P.61)

 

내 열정은 깨어나 격렬하게 싸우지만

당신은 여전히 평화롭기만 하군요. (그 누구에게, 조지 고든 바이런, P.143)

 

......사랑을 좇다가 삶을 마친다. 그것뿐이다. (사랑에 살다, 로버트 브라우닝, P.153)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고, 잠들지 않았습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죽지 않았으니까요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마세요, 매리 프라이, P.165)

 

어디 사랑뿐이겠는가- 일상과 생존의 늪에 빠져서, 성공의 빛에 눈이 멀어서, 우리는 삶을 힘겹게 영위하는데 급급해할 뿐이다. 저 앞에 둥실 떠있는 무지개의 허상을 좇아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옆을 살피거나 뒤돌아 볼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달음박질에 매진한다. 그것이 만길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한줄기 내리막길임을 알지 못한 채. 당사자에게는 진지하고 절박한 생존의 몸부림이 시인의 눈에는 어이없게 비친다.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멜른의 피리 소리에 영혼이 홀린 생쥐와 아이들 마냥 보일 뿐이다.

 

과학이여! (과학에게, 에드거 앨런 포, P.127)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잠들기 전에 갈 길이 멀다. (눈 오는 저녁 숲가에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 P.173)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여유, W. H. 데이비스, P.119)

 

나는 숲속으로 가리라

눈같이 활짝 핀 벚나무 보러. (나무 중 제일 예쁜 나무, 벚나무, A. E. 하우스먼, P.195)

 

이 책에 수록된 시들도 아름다운 작품들로 엄선되었지만, 책과 시를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저자 장영희의 맛깔스런 감상이다. 그의 문체는 은근하고 겸손하면서 다가서기 어렵게 고고한 척 젠체하지 않는다. 밝고 친근한 어조로 우리들에게 좋을 것을 권하고 행여나 우리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진가를 알아채지 못할 까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소녀 적 이미지를 간직한 이웃 누님 같은 분위기를 전해준다. 오직 영혼이 맑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 문장에 배어있어 글을 읽는 자체만으로도 상쾌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암으로 투병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를 보면서 훗날의 일을 아는 우리는 괜스레 가슴 한켠이 찌릿하다. 그렇기에 아래의 시구들은 저자 자신을 노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삶은 아주 멋진 것들을 팝니다......

전 재산을 털어 아름다움을 사세요.

사고 나서는 값을 따지지 마세요. (물물교환, 새러 티즈데일, P.33)

 

나 죽어갈 때 말해주소서......

모든 아름다운 걸 사랑했노라고......

삶을 삶 자체로 사랑하며......

아이들처럼 노래했노라고. (기도, 새러 티즈데일,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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