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의 초원 순난앵 마루벌의 새로운 동화 1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상열 옮김 / 마루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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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 중에는 내용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장정과 디자인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는 책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책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연둣빛 초록의 시원하고 상쾌함이 앞뒤 겉표지를 온통 휘감고 있다. 안표지는 앞과 뒤가 전혀 분위기가 다른데 앞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잿빛 옷을 걸치고 몸을 한껏 웅크리며 걸어가는 어린 남매가 스산함을 안겨준다면, 뒤는 신록의 봄을 맞이하여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숲속을 역시 눈에 확 띠는 가벼운 빨간 옷으로 갈아입은 남매가 손을 잡고 신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아가 되어 의지할 곳이 없어진 어린 오누이, 이들의 노동력을 한껏 착취하고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지 않은 이웃동네 농부. 동화에서 흔한 전형적인 구도라고 하겠다. 착한 어린이, 나쁜 어른. 대개 결말은 아이들은 행복하게 되고 어른은 벌을 받게 된다. , 이 작품은 좀 다르다. 농부는 아이들을 잃어버린 것 외에 별다른 손실이 없으니 말이다.

 

오누이의 고향 순난앵과 이웃 뮈라 마을은 전혀 상반되는 이미지의 고장으로 표현된다. 뮈라 마을 이야기를 할 때 삽화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의 잿빛 톤으로 일관하고 있어 오누이의 고생담을 시각적으로 여실히 드러낸다. 그곳 사람들은 인상과 어투에서도 불친절과 비딱함을 보여준다. 반면 순난앵에서는 모든 것이 밝고 즐겁고 경쾌하다.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놀며 맛있는 음식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누구나 고달프고 힘든 때면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공상한다. 현실이 가혹할수록 공상의 나래는 더한층 강렬한 행복을 안겨준다. 아이들에게 순난앵 마을은 어릴 적 부모와 같이 살던 행복했던 시절을 연상시킨다. 매일같이 한겨울에도 허름한 의복에 과로한 노동에 시달리며 겨우 허기만 면할 정도의 열악한 생활에서 오누이는 탈출을 꿈꾼다.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살던 시절에 현실의 순난앵이 그렇게 천국과도 모습을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은 뭉클하면서도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녀는 성냥불 속에서 환상을 통해 행복과 천국을 공상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유혹이지만 소녀로서는 어차피 매일반이다. 매서운 한겨울, 춥고 배고프고 지친 오누이는 앞으로 순난앵에 갈 수 없게 되자 영원히 순난앵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그들에게 뮈라 마을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들의 행복은 순난앵에서 찾을 수 있다.

 

오누이를 이끄는 빨간 새는 깃털이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이 새빨갛고, 맑은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부르면 나무 가지에 쌓여있던 눈송이들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불우한 오누이를 위로하는 동시에 현실이 아닌 다른 곳,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영혼의 전령이자 안내자일 것이다.

 

빨간 새의 안내에 따라 순난앵을 오고가던 오누이는 마침내 두 마을을 연결하는 한번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 문을 살그머니 닫는다. 이제 그들에게 암울했던 시절은 한갓 추억으로만 남게 되리라. 다행이다, 그들이 그나마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어서... 그곳이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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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 작은책마을 20
손춘익 지음, 이은천 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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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심술꾸러기 상어와 이상한 안경

2. 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

3. 꽃씨와 봄

4. 멍멍이의 자장가

5. 바닷속 장난감 풍금

6. 나룻배의 첫 손님

7. 민들레와 나비

8. 시골로 간 예쁜이

9. 까치와 야옹이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 의미에서 동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일단 배경은 시골이나 자연이 되어야 하리라. 각박한 도시에서의 삶은 왠지 전통 동화랑 어울리지 않는 성 싶다. 다음에 등장 인물들도 순박한 시골 아이 또는 동물과 식물 등의 자연물이 적당해 보인다. 때로는 우화에 가깝다 해도 본질상 동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심술꾸러기 상어와 이상한 안경><바닷속 장난감 풍금>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물고기들에게 벌어지는 장난기 섞인 일화를 가벼우면서도 우습게 잘 그려내고 있다.

 

<멍멍이의 자장가><까치와 야옹이>는 각각 강아지와 고양이라는 대표적 동물을 내세웠다. 아기의 낮잠을 다른 동물들이 방해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는 강아지의 노력이 가상하다. 반면 까치를 잡아먹으려고 무리하다가 진퇴양난에 빠진 고양이 또한 밉상스럽기보다 우스꽝스럽다. 강아지와 고양이에 대한 우리들의 전래상의 심상은 변함이 없다.

 

<꽃씨와 봄><민들레와 나비>는 꽃을 소재로 삼았다. 전편은 외딴 곳에 떨어진 꽃씨 하나가 매서운 겨울의 시련을 견뎌내고 예쁜 꽃으로 피어나는데 성공하였다는 어쩌면 진부하기조차 한 제재인데 관건은 식상함을 잊게 만드는 글 솜씨와 표현에 달려 있을 것이다. 후편은 보다 우화에 가깝다. 민들레와 일편단심을 약속한 나비가 다른 꽃들의 화려함과 유혹에 빠져 민들레를 잊어버리는 점, 시들어버리는 민들레와 찬바람이 불어 쇠락한 나비가 민들레를 찾아 헤매는 장면. 이런 점들이 인간들의 세상과 마음속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시골로 간 예쁜이>는 상대적으로 독특한데, 도시에서 시골로 보내지는 장난감들의 슬픔과 애환, 그리고 두려움이 강하게 드러난다. 영화 <토이 스토리>를 통해 알 수 있듯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한때의 즐거움이자 추억이지만, 장난감들에게는 자신의 전 생애라고 하겠다. 그네들이 시골 아이들에게서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를 바란다. 다만 언제 적에 쓰인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 대 시골이 부유 대 가난으로 도식화된 점이 눈에 거슬린다.

 

<송아지가 뚫어 준 울타리 구멍><나룻배의 첫 손님>은 시골을 무대로 삼은 작품이다. 전편에서 비로소 사람이 제대로 등장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송아지다. 이웃하여 의좋게 지내던 친구 두 명이 어미 소가 송아지를 낳기 시작하며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단지 며칠 상간으로 어차피 태어날 송아지임에도 남보다 더 먼저 가지고자 하는 욕망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원래 사람 사이는 사소한 걸로 틀어진다. 한번 벌어지면 쉽게 아물지 못하는 게 또 인간관계이기도 하고. 그것은 자존심 내지 쑥스러움 등 다양한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사람들의 허점을 무심히 아우르는 송아지들을 보며 급소를 한방 맞은 듯 멋쩍음을 느끼게 된다.

 

후편에서 나룻배를 타고 장으로 팔려 나가는 송아지의 심정은 이와 다르다. 송아지를 팔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한 농부와 팔릴 운명에 처한 송아지, 그네들의 삶도 표정도 신산하기 그지없다. 강물을 오고가는 나룻배는 손님들을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네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연도 강물에 드리운다. 긴 겨울을 마치고 이른 봄에 맞이하는 첫 손님, 나룻배의 마음도 분명 새롭게 들떠 있다. 매해 노랑나비가 첫 손님으로 나타나기만을 바랄 뿐.

 

동화의 본질은 작가의 말처럼 동심을 위한 문학이다. 동심을 그리고, 동심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학. 그것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가슴 가득한 흐뭇함과 뭉클함을 느낄 수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형적인 전통적 동화라고 불릴 만하다.

 

도시 아이들의 눈으로 볼 때 수록된 많은 글들의 내용이 이제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먼 옛적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골과 자연의 정감을 듬뿍 담은 글과 그림을 보면서 아이들이 어떤 인상과 느낌을 갖게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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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는 어른이 되기 싫어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7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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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시리즈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닌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삐삐라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너무나 개성적이다. 빨간 머리, 주근깨투성이 얼굴, 짝짝이 긴 양말, 기다란 신발로 대표되는 외모는 물론 터무니없는 힘과 대담한 용기를 지닌 인물은 비현실적이다. 모든 동화의 궁극적 목적은 아이들의 사회화에 있다. 건전한 가치관을 지니고 가족, 사회, 국가에 적합한 인격의 형성.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삐삐는 완전 낙제점이다. 부모 없이 홀로 사며, 학교에도 가지 않고 매일 같이 놀기만 하며 돈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면서 펑펑 쓰기도 한다.

 

삐삐와 같은 비사회적 인물의 독특한 행위와 소위 정상 사회와 충돌하여 일으키는 충격과 불협화음은 당장의 흥미와 통쾌감을 독자에게 안겨줄 수 있으나, 갈등과 놀라움은 곧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이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배경을 옮기는 것이다. 작가는 스웨덴의 작은 항구 마을에서 남태평양에 있는 삐삐의 아빠가 다스리는 식인종의 섬으로 삐삐와 친구들을 이동시킨다. 이 책의 후반부가 삐삐 일행이 섬으로 가는 여정과 섬에서 즐겁게 노는 장면들, 그리고 악당과의 대결 등으로 구성된 연유도 그렇게 이해된다. 게다가 미지의 낯선 곳으로의 여행, 천국과도 같은 행복한 시간 보내기, 가슴 졸이는 신나는 모험 등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가슴 설레게 하는 공통의 소재가 아니던가.

 

삐삐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어른들의 가식과 위선이다. 그럴듯한 외형을 한 꺼풀 벗겨보면 허위의 가면 속에 숨겨놓은 탐욕과 일그러진 영혼이 소위 어른이란 미명 하에 언행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성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것이 감추고 싶은 사회의 참된 현실이다. 여기에 반발하고 도전하고 거부하면 착하고 귀염 받는 아니가 아닌 나쁜 아이가 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삐삐는 문제아다.

 

삐삐와 친구들의 남태평양 행은 현실도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적 굴레와 규범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냥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다시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토미와 아니카는 삐삐와의 즐거웠던 시절을 한때의 추억으로 삼고 어른이 되기 위한 정상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하며 되돌릴 수 없는 행복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어른이 되지 않게 해주는 약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러나 삐삐는 알고 있다. 그런 약은 가능하지 않음을. 자신이 토미와 아니카, 아니 독자들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어른의 세계를 거부하는 다른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비현실적 존재임을.

 

삐삐는 머리에 손을 얹고 눈앞에 깜빡거리는 촛불의 작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하지만 삐삐는 꿈꾸는 듯한 얼굴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촛불을 훅 껐다.” (P.180~182)

 

화려했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듯이 즐겁고 행복했던 한바탕 꿈도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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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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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정크> 같은 정크 소설을 세 편 연달아 쓰기는 힘들었던 탓일까? 이번 <그랑 주떼>는 분량이 중편으로 줄어들었고 작풍도 보다 온건해졌다. 전작들의 강렬하고 노골적이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맛의 재현을 고대한 독자라면 실망감을 맛보았으리라. 작가는 전작들에서 과다 묘사와 과소 표현의 극단을 오간 반면 여기에서는 전적으로 과소 묘사로 전향하였다.

 

작가의 비주류 인생에 대한 천착은 여전하다. 작품은 무용원에서 아르바이트 강사를 하는 화자의 현재와 유년 시절이 교차하여 전개되고 있다. 유년 시절만큼이나 현재 화자의 처지도 별 볼일 없는 형편이다. 화자는 껑충한 키에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받는 아이였다. 친구 따라 무용을 배웠으나 완벽한 기초 동작에도 불구하고 발레는 이른바 젬병이다.

 

화자는 유치원 아이들의 무용복 환복을 도와주다가 문득 유년 시절의 가슴 아픈, 그리고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떠올린다. 두 건의 성추행 경험, 낯선 남자와 사촌오빠. 어린 화자는 자신의 피해를 주변 어른에게, 고모에게 알렸으나 돌아온 건 침묵과 은폐에 대한 강요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충격과 당혹, 공포와 배신감 등으로 아이가 느꼈을 감정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진실에 대한 흔들리는 가치관. 밝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무너지는 신뢰와 상실감.

 

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동시에 매우 쓰고, 거칠고, 추악한 존재야......진실을, 대상을, 실상을 보지 않고 네 멋대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본 네가 아주 멍청했던 거야. 어리석었던 T. (P.97)

 

진실은 거짓이 되어야 했고, 거짓은 거짓 아닌 진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나는 살 수가 있었다. 너는 이 거짓말을 믿어야 해. 나는 이 거짓말을 믿어야 했다. (P.110)

 

화자는 세상과 마음의 문을 닫는다. 찰나적, 표피적 관계만 가능하다. 영혼의 단짝처럼 여겼던 리나와도 스스로 결별한다. 리나와 그는 가는 길이 다르다, 더 이상 타인에게서 상처받고 싶지 않다, 리나의 우정도 결국 진실하지 못하리라. 화자는 삶과 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루저인 자신을 철저히 인식한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스스로 비하시키는 것은 작가이지만 동시에 화자 자신일 것이다.

 

나는 춤을 전혀 추지 못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었다......애초부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었기에, 나에게는 별다른 불만이나 원망이 자라날 수조차 없었다. (P.27)

 

나는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뭐라도 할 수 있는 힘이, 뭐라도 될 수 있는 힘이 아주 조금도 없는 병신 같은 인간이었다. (P.107)

 

유치원 아이들을 무용복으로 갈아입히고 화장실로 데려다 주고 수업이 끝난 후 원복으로 다시 갈아입히면서 화자는 홀연히 가슴 속에 뭔가가 쑥 빠져나감을 느낀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레를 출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높이 날아오르는 그랑 주떼를.

 

작가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나긴 방황의 청춘, 그 처절한 절망의 날들 속에서야 나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 오던 대상과 내가 용서해야 할 대상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P.130)

 

상처에 천착하고 마냥 싸안는다고 통증이 사라지거나 상흔이 지워지지 않는다. 상처와 아픔과 슬픔이 나를 휘감고 지배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인정하고 줄일 수 있으면 만족할 필요가 있다. 화자가 어린 아이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각자가 저마다의 홀연히 빛나는 빛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처를 통해 가려졌던 고유한 아름다운 빛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화자는 무대의 중앙으로 선뜻 나아갈 각오, 그랑 주떼를 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처음 책을 읽고 난 후 언뜻 든 생각은 이게 뭐지?’하는 의아스러움이었다. 이야기가 좀 더 나아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뒷맛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의 사건과 유치원 아이의 환복과 화자의 그랑 주떼의 연결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위와 같은 연결고리가 떠올랐다. 상처, 단절, 화해.

 

작가의 청춘 3부작이 완결되었다. 마지막 중편을 통해서 작가는 전작과 확연히 달라진 작풍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향후 작품에 대한 진전 방향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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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 생각하는 숲 1
셸 실버스타인 지음 / 시공주니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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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마을문고 독서시리즈 세 번째. 한 시간 정도에 세 권을 읽은 셈이니 아무리 분량이 적은 아동도서라고 하더라도 수박 겉핥기만 하고 온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다음에 정독할 기회를 다시 갖도록 해야겠다. 어쨌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한 이 작품을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읽어나간다.

 

셸 실버스타인의 특징이자 장점은 글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삽화를 그린다는 점이다. 글과 그림이 이질적이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혼연일체로 반영하고 있음은 큰 미덕이며, 덧붙여 간소하며 담백한 문장이 모노크롬의 삽화와 매우 잘 어울리고 있다.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부분에 주목할지 궁금하다. 설마 나무의 경제적 유용성을 언급할 아이들은 없을 것으로 믿는다. 나로서는 나무를 자연으로 확대 적용하면 자연의 관대함과 대비되는 인간의 탐욕을 연상한다. 인간은 자연에게 의지해 살다가 어느덧 조금씩 조금씩 빼앗다가 종내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인간이 결국 의존할 것은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굳이 자연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으로 의인화하면 더욱 흥미롭다. 우리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또는 아이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각자에게 질문을 던져봄직 하다. 우리는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도 헤아리지 못한 채 오로지 자기의 필요와 관점에서만 상대방(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단순한 지인이든)은 물론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자성해 본다.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항상 이익과 혜택만을 기대하는 우리들.

 

아이는 어릴 적 나무의 품에서 나무를 제일로 여기고 즐겁고 행복해한다. 나무에 걸어놓은 하트 표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아이가 나중에 크면서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생활을 위하여 서서히 나무를 떠난다. 나무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내주면서도 마냥 행복하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아이가 행복하다면.

 

문득 나무가 부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다. 부모는 아이가 살아가는 내내 헌신한다. 양육, 학업, 취직, 결혼, 주택, 사업자금 등등. 아이는 너무나 당연한 자기 몫인 양 부모에게 요구한다. 나무가 아낌없이 제 몸을 주는 동안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듯이 부모도 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아이가 자라나고 부모는 늙어간다.

 

마지막 장면은 다소 감동적이다. 모든 것을 내준 나무는 행복했지만 사실은 행복하지 않았다. 늙어 지친 아이가 돌아와서 기대고 앉을 곳을 만들어 주었을 때 나무는 진정 행복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아이에게 진정 가치가 있고 사랑하는 아이가 곁에 있음에서다.

 

언제나처럼 실버스타인의 삽화는 여운을 남긴다. 아이를 향해 반가운 마음에 가지를 손 마냥 내뻗는 나무. 아이와 서로 꼭 껴안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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