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하서명작선 28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주)하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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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 출판사의 어린이 또는 청소년을 위한 문학시리즈를 쭉 훑어나가다 보니 몇몇 생소한 작품명과 작가명이 눈에 띈다. 그렇게 문득 호기심이 발동하여 급히 구해본 게 이 책이다. 알고보니 동화쪽에서는 거의 고전급으로 인정받는 것 같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전업 작가는 아니고 여성 운동과 환경 운동에 매진하면서 거기에서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달랑 이 책 하나만 출판되어 있어 다소 아쉽다.

 

표제와는 달리 애벌레 두 마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들이 벌이는 일종의 모험담과 경험담을 소개한다. 물론 애벌레가 나중에 나비로 탈바꿈하게 되므로 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다만 표제를 보고 꽃들과 관련된 작품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겠다.

 

이 책은 비판적 독자에게 이중적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린이의 계몽을 대상으로 삼은 측면에서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충분히 감동적이다. 반면 성인 독자의 눈으로 보면 주제의식이 너무 앞서있고 교훈의 제시가 직설적이어서 세련되지 못한 인상을 받게 된다. 조금만 더 문학적으로 포장하여 다듬었으면 더욱 멋진 작품이었을 텐데.

 

현대 사회는 정글과도 같은 경쟁사회라는 점, 그래서 남을 앞서기 위해서는 밟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경쟁자들을 제쳐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리는 모두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때로는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근원적 의구심을 품기도 하지만, 그런 나약한 감정일랑 일치감치 던져버리는 게 보다 유익하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식한다.

 

성공하지 못하는 건 다 자기 탓인 거야!”

인생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라구. 마음을 단단히 먹는 수밖에 없단 말이야.” (P.108)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행복하게 지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경쟁의 미래를 포기하지 못한다. 치열한 분투 끝에 애벌레 탑의 꼭대기에 도달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남들보다 위에 서있을 뿐. 독자는 줄무늬 애벌레가 피도 눈물도 없는, 성공 신화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개체가 아님을 안다. 그와 경쟁하는 수많은 애벌레들도 마찬가지로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개성을 지닌 독립된 생명체다. 하지만 경쟁의 도상에서 고유성과 존엄성을 즉시 매몰되면 맹목적 일부로 전락할 뿐이다.

 

노랑 애벌레는 맹목적 경쟁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한다. 그저 바닥을 기어 다니는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창공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눈부시고 고귀한 존재, 나비가 될 수 있는 길을. 개체의 내적 완성을 통한 도약과 비상으로의 변모. 그것은 불확실하고 고치 속에서 오랜 시간을 갇혀 지내며 애벌레의 존재성을 포기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미지의 길을, 다수와 떨어져서 홀로 걸어가야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것은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건 예전에 생각지도 못한 건데. 내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건 바로 용기 때문이다. 만약 내 몸 안에서 실을 뽑아낼 수 있다면 나도 나비가 될 수 있을 거야.” (P.100)

 

이 동화의 끝 장면은 시사적이다. 나비가 된 줄무늬 애벌레. 두 마리의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정겹게 다듬이를 쓰다듬는다. 이윽고 초원을 팔랑이며 날아간다. 여기에는 오직 이미지만 있을 뿐 일체의 글자는 배제하고 있는데, 말로는 표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다른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P.175)

 

그것은 작가의 간절한 염원 자체이기도 하다. 모든 애벌레들이 땅바닥을 기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웃들을 적으로 삼고 오로지 높은 곳을 오르고자 하지 않는 것. 애벌레들이 나비가 되지 않는다면 초원은 더 이상 아름다운 꽃들로 넘쳐나지 않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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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2018-07-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경쟁의 도상에서 고유성과 존엄성을 즉시 매몰되면 맹목적 일부로 전락할 뿐이다-> 문법에도 맞지 않고 일부로 어렵게 쓴 느낌
 
아낌없이 주는 나무 외 청목 스테디북스 62
셸 실버스타인 지음, 이상영 옮김 / 청목(청목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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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 실버스타인의 대표작 세 편을 한 권에 모두 담았다. 연전에 앞의 두 편을 읽었는데 도서관에서 잠시 짬을 내어 읽는 바람에 차근차근 음미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 이 책을 구하였다. 편집과 판형 등에서 이편이 보다 일반적이어서 무난하다는 장점도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의 아낌없는 희생이 다시금 가슴 찡하다. 나무는 그것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내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자연스레 아이를 향한 부모의 모습이 투영된다. 부모와 나무를 비유한 데서 문득 풍수지탄이 떠오른 걸 보면 동·서양의 인식이 비슷하다.

 

미안해, 아무 것이라도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구나.

나는 늙어 버린 나무 그루터기일 뿐이야.

미안해...... (P.51)

 

요즘은 집집마다 애완동물을 제법 많이 키운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들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어디 개뿐이겠는가. 고양이, 거북이, 이구아나, 앵무새, 하늘소, 열대어 등 키우는 방식은 다르지만 사랑을 쏟는 심정은 동일할 것이다. 개중에는 사람보다도 더 각별히 애정을 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한가지다. 상대방 또는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이 내게 사랑의 념을 품고 살뜰하게 마음을 써준다면 마음은 저절로 그쪽으로 향하게 마련이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 사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승화된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값싼 코뿔소를 사세요>에서 우리가 코뿔소를 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일은 아주 쉽습니다. (P.112)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 쪽>은 역설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잃어버린 한 조각을 찾기 위한 동그라미의 고행이 눈물겹다.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그가 갈구하는 것은 완전한 동그라미로 거듭나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데 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뒤뚱뒤뚱 굴러가는 동그라미, 바다도 건너고 산길도 낑낑대며 올라간다. 여러 조각들을 만나지만 너무 크거나 작아서 아귀가 맞지 않고 모양이 안 맞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꼭 맞는 조각을 만나서 그들은 완벽한 동그라미로 거듭난다. 이제 그들에게는 오로지 행복만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하지만 완벽한 동그라미는 너무 잘 굴러서 주변과 이웃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입이 막혀 즐거운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찾았던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는다. 비록 다시 이가 빠진 동그라미로 돌아갔지만 이제 그는 이전보다 행복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래서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서 정처 없이 배회한다. 그것은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지식, 재능 아니면 영혼의 갈증을 달래는 신앙일 수도 있다. 완전함을 지향하는 정신이 인류 발전의 흐름이긴 하지만 완전함이란 어차피 불가능하지 않은가. 오히려 현재의 자신에게서 간과했던 미덕이 없는지 되돌아본 적이 있는가. 부족함에서 행복을 발견한다면 안분지족은 안자만의 즐거움은 아닐 것이다.

 

원래 이가 빠진 동그라미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잃어버린 한 조각은 애시당초 없을 수도 있다. 그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가는 탐색의 과정은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자신과 세계를 되돌아보는 구도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그가 첫 번째로 마주친 조각이 이를 웅변한다.

 

난 너의 읽어버린 조각이 아니란다.

난 누구의 부분도 아니고

난 그냥 하나의 조각일 뿐이라구. (P.153)

 

실버스타인의 글과 그림은 언제나처럼 간명하면서 핵심을 잘 짚어간다. 진실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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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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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사랑과 비정상적인 사랑이라는 구분이 가능할까? 꽃다운 선남선녀들의 풋풋하고 산뜻한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동정어린 격려를 받는다. 우리들은 이를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칭한다. 그럼 아름답지 못한 사랑도 있다는 말인데.

 

비정상적이니 아름답지 못하다니 하는 말들은 사랑의 당사자가 아닌 국외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표현이다. 두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사랑은 오직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선악, 미추, 윤리와 도덕 등의 개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은 사랑을 둘러싼 부차적 요소이며, 사랑이 아닌 사회가 덧붙인 것이다.

 

세 명의 주요 인물은 모두 비주류요 반사회적이다. 우선 아밀리아는 세상에서 기대하는 전형적인 상과 배치되는 여성이다. 장대한 기골에 괴팍한 성질, 남들과 어울리는 삶을 거부하는 태도 등등. 라이먼은 불치병에 걸린 꼽추로 출신과 배경 모두 미지의 인물로 아밀리아와 친척 간이라는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 마빈 메이시는 신체적 조건으로는 지극히 우월하지만 흉악한 범죄자다.

 

이런 세 명 간에 펼쳐지는 사랑과 애증의 삼각관계는 오히려 처연하다. 사랑의 이유는 당사자 외에는 알 수 없다. 아니 당사자조차도 진정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 사랑은 의도가 아니라 자연이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차라리 미워하는 편이 나은데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의 행로, 그것이 사랑이다. 독자는 라이먼에 대한 아밀리아, 마빈 메이시에 대한 라이먼의 감정을 폄하하지 못한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작가의 어조는 일견 담담한 듯하면서 우울하다. 그는 아밀리아에게조차 일말의 동정적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 감정과 사건이 고조되면서 흥분이 터져 나올 시점에서도 그는 나직하면서 약간은 시니컬하게 상황을 묘사한다. 슬프고 애틋한데 오히려 실소가 나올 때의 처참한 심경을 겪어보았는가. 그런 면에서 작가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를 왜 쫓아냈는지 궁금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라이먼의 정체도 불투명하게 놓아둔다.

 

사랑의 힘으로 마빈 메이시는 선하고자 노력하였고 사랑의 배신으로 더욱 철저하게 악인이 되었다. 사랑의 작용으로 아밀리아도 온기와 활기가 넘치는 카페를 만들었으나 사랑이 떠나가자 카페는 폐허가 되었다. 더불어 마을도 다시금 황량하고 쓸쓸하게 퇴색되었다. 라이먼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그 길이 제아무리 고통스럽고 굴욕적이라도 당사자는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므로.

 

그로테스크.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의 내용과 느낌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위와 같다. 배경, 인물, 성격, 사건 어느 것 하나 낯설고 기이하지 않은 게 없다. 하물며 결말조차도 섣부른 기대를 저버린다. 무엇보다 작가가 민낯으로 드러내는 고독과 단절의 사랑 방정식이 더욱 황량하며 으스스하다. 그럼에도 차마 외면하지 못함은 그것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음에서일 것이다.

 

진실이라? 작가가 그리고자 한, 그리고 아밀리아가 드러내지 않고자 한 진실은 무엇일까? 독자는 이것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작가의 독특한 사랑관을 피력한 유명한 다음 대목이 이해에 단초를 제공한다.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랑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 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P.49-51)

 

우리는 이 대목을 통해서 아밀리아가 마빈 메이시와의 결혼생활을 거부하게 된 연유를 추론할 수 있다. 보다 뒤에서 작가는 아밀리아의 결혼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 사랑 이야기는 서글프고 우스꽝스러울지언정, 진정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는 사랑하는 사람, 그 당사자의 영혼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신 외에 그 누구도 이 같은 사랑, 아니, 다른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P.64)

 

더불어 아밀리아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꼽추 라이먼과의 사랑을 유지하는 까닭도 해석 가능하다. 그녀는 꼽추를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후에 꼽추가 마빈 메이시와 함께 집을 떠났을 때도 그녀가 받은 충격은 금전적인 것보다 사랑의 상실이 더욱 컸기에 세상을 거부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밀리아는 사랑을 알고 기쁘게 하기 위해 카페를 열었다. 카페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교류를 함으로써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탈피하여 인간다움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카페의 폐쇄는 사랑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를 원형처럼 소환하였다. 슬픈 카페의 노래는 열두 명의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의 노랫소리와 본질적으로 동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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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토리 이야기
민병훈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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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원작이라는 표기가 앞표지에 뚜렷하다. 보지는 못했지만 꽤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인 듯하다. 하지만 일본 최초의 모노가타리라는 역사성을 지닌 작품이라는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책은 230면의 분량이지만, 후반부에는 일본어 원문을 수록하였고, 부록으로 다케토리 이야기와 관련된 해설과 자료가 실려 있어 실제 한글 번역문은 104면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이야기집이라고 하겠다. 부록은 이 작품의 생성과 설화와의 관계, 주목할 만한 의의 등을 소개하고 있어 작품의 심화적 이해에 유용하다. 여러 점에서 이 책은 일반 감상자보다는 학습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의 모노가타리와 달리 이 작품은 사실성보다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다. 노인이 가구야 히메를 발견한 게 대나무 속에서였고, 수개월 만에 쑥쑥 자라서 구혼자가 생길만큼 성장한 점은 친숙한 민담 및 전설 등과 다를 점이 없다. 게다가 끈질긴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가구야가 내건 허혼 요건은 더없이 터무니없으며, 이를 달성하려는 다섯 구혼자들의 노력도 판타지와 코믹 요소가 혼재되어 황당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재미를 가져온다. 더욱이 가구야가 원래 있던 달세계로 승천하는 광경은 가히 압권이다. 한마디로 전기소설(傳奇小說)로 분류될 수 있겠다.

 

대다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오치쿠보 이야기> 정도만 여성 주인공으로 기억될 뿐. 그런데 최초의 모노가타리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것도 비교적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는 점이 이채롭다. 가쿠야 히메는 노인이 혼인을 언급하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할 필요성을 오히려 반문한다. 게다가 여성 입장에서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당대 결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뿐이 아니라 겨우 구혼자들을 물리쳤더니 임금이 권력의 힘으로 후궁을 삼겠다는 곤란한 형편에 놓여도 이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 후궁 생활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인데, 억지로 후궁 생활을 하게 하신다면 사라져 버리겠습니다. (P.76)

 

이 이야기는 여러 어원(語源) 설화를 담고 있기도 하다. 가구야 히메를 차지하기 위한 다섯 구혼자의 노력은 제각기 헛수고를 하거나 가짜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해당 일화 마지막에 이에서 유래한 어원을 소개하고 있다.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마치 와카의 가케고토바를 연상시킨다. 예컨대 (부처의 가짜) 바리때를 버리는 것과 부끄러움을 버리는 뻔뻔함(하지오 스테루)을 연계시키거나 불쥐의 가죽옷을 가짜로 만든 게 탄로나 보람이 없게 된 아베 우대신의 이름을 빗대어 보람 없다(아헤 나시)고 하는 등 해학적 풀이와 연결시키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일본 최고봉인 후지 산의 어원 풀이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다.

 

쓰키노 이와가사가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오른 일에 연유하여 그 산을 병사로 넘치는 산, 즉 후지산(富士山)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 불사약과 편지를 태운 연기는 지금도 구름 속으로 피어오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P.104)

 

가구야 히메는 원래 달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잠시 이 세상에 머물다가 달세계로 승천한다. 동화에 나오는 천녀(天女)니 선녀와 같은 설정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승천의 개념 이상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이 세상에 정들었다 한들 원래 고향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가구야는 한숨짓는다.

 

달을 보면 왠지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나도 모르게 슬퍼집니다. 어찌 다른 근심이 있겠습니까. (P.85)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플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P.88)

 

여기서 승천은 귀천(歸天)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가구야는 꽃다운 젊은 나이에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며, 이것이 승천으로 미화된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다케토리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다. 작중 인물은 모두 실패와 상실을 겪고 슬픔을 맞이한다. 다섯 구혼자와 임금은 가구야 히메를 얻지 못하며, 노인 부부도 애지중지 키운 딸을 달나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가구야도 원래의 세계로 가는 게 슬플 따름이다.

 

이야기 곳곳에 산재된 해학적 요소와 배치되는 애잔한 정서감이 묘한 여운을 드리운다. 이것이 단순히 최초의 모노가타리로서의 역사성을 뛰어넘어 현대에도 의미를 지니는 연유가 아닐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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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대령
다니엘 디포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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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디포의 소설이다. 디포만큼 명성의 빛과 그늘이 두드러지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어지간한 문학전집과 어린이용 동화전집에도 모두 수록될 만큼 유명한 대표작이 있는 반면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전적으로 외면 받고 있으니. 대표작의 위용이 드높은 만큼 읽는 와중에 자연스레 상호 비교 및 대조를 하게 된다.

 

떠돌이 부랑아로 태어나 소매치기로 살았고, 병사가 되었고, 탈영까지 저지른 인간이 바로 나였다. 이 넓은 세상에 안락한 집도 없고, 먹고 살 변변한 직업도 없고, 그저 날 때부터 한 짓이라고는 나쁜 짓거리뿐이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P.146)

 

피카레스크 소설 또는 악한소설로 분류되는 장르가 있다. 디포의 경우에는 <몰 플랜더스>가 여기에 속한다. 잭 대령의 전반부는 분명 피카레스크적 성격이 강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도둑질의 길로 뛰어들어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고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려 전형적으로 타락의 나락으로 빠지기 직전의 잭. 여기서 한 가지 피카레스크 소설은 주인공의 나쁜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 주인공이 그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엄정한 고발도 내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의 대표작 <로빈슨 크루소>는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다. 근대인의 상업과 무역의 요소와 개척자적 정신이 주인공의 삶에 어우러져 있다. 이 요소를 더 극대화한 게 <잭 대령>의 후반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구세계(영국)에서 신세계(아메리카)로 추방되어 밑바닥에서 개과천선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식민지 농장과 유럽과의 교역, 카리브 해의 밀무역 등을 통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천만을 무릅쓰고 막대한 부를 쌓는다.

 

피카레스크 소설의 결말은 대개 비극이다. 인생의 나락에 놓인 주인공이 자신의 어둡고 비참한 일생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본보기삼아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교훈을 남긴다. 반면 잭 대령의 후반기 생은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매우 성공적이다. 잘못된 출발을 하였지만 올바른 삶,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 생의 행, 불행이 뒤바뀔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작품을 고리타분한 교훈을 의도한 따분한 소설로 오해할 필요는 없다. 교훈은 던져버리더라도 로빈스 크루소보다 훨씬 극적이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며 당대 사회의 밑바닥과 식민지 농장의 엄혹한 실정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벌이는 스페인령과의 밀무역은 품목과 수량, 거래방법 등이 대단히 사실적이어서 새삼 작가인 디포의 풍부한 관련 지식에 놀라게 된다.

 

전반부의 잭 대령이라는 인물은 양면적이다. 그는 스스로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라고 주장하며 무수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이를 무지와 나쁜 환경의 탓이라고 되풀이하여 변호한다.

 

나는 선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고 악의에 대해서도 그 기미조차 몰랐다. 다시 말하자면 내 관점에서 내가 영위하던 삶은 악의가 전혀 없는 삶이었다. (P.52)

 

앞서 말했듯이 배운 게 아무것도 없었던 어린 시절로 말미암아 나는 그저 무지했고, 함께 지내던 아이들의 무디어진 양심과 못된 심성의 영향으로 분별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더해서 내 무지는 내가 지금까지 쭉 해온 일들 탓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양심에 대해 그 어떤 의식도 없었고 일탈 범죄를 저지르는 일에 대해 그 어떤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P.76)

 

이런 그의 태도는 일생에 걸쳐 지속된다. 서두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했으면서도 후에 불리한 순간이 오면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발뺌한다. (작가의 의도일까 아니 단순 실수일까?)

특정한 정치적 의식도 갖추지 못한 채 프랑스군 또는 스코틀랜드 군에 합류하여 모국인 영국군에 저항하는 일종의 반역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여러 차례의 실패한 결혼생활도 자신과 무관한 전적으로 운명 또는 부인들의 귀책사유 탓이다. 이 작품 또한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의 남성소설이다. 그럼에도 전작과는 달리 여성의 비중이 다소 늘어났으며, 국왕의 사면을 받기 위한 장면에서는 전적으로 부인에게 의존하는 주인공의 유약한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잭 대령은 상업과 무역상 영리행위 추구에는 대단히 민감하다. 그는 성공한 농장주로서 농장 경영에 만족하거나 일부 양보하더라도 영국과의 교역으로도 충분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부의 맹목적 축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로빈슨 크루소>에서도 일부 드러났듯 상업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리라. 다만 그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으로 제시된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로빈슨 크루소>와 마찬가지로 <잭 대령>에서도 종교적 심화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무인도에서 종교적 반성과 참된 신앙회복을 통해 꿋꿋하게 버텼던 것처럼 잭 대령도 지식인 노예와의 대화를 통해 죄와 회개의 의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무인도의 로빈슨과는 달리 잭 대령은 종교적 각성이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지배가치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잘못된 행위와 그릇된 판단을 무수히 반복한다. 이 점은 전작의 나이브함에 대한 인간성의 복잡 미묘함의 사실적 묘사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특히 시대를 앞서 간 디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농장주의 흑인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처우와 체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후에 잭 대령은 농장관리인이 되고 농장주가 되어서 노예들에게 인도주의적 대우를 해준다. 스토 부인의 소설이 발표되기 백년도 훨씬 전에 작가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잭 대령의 일생은 로빈슨 크루소보다 훨씬 다채롭고 극적이다. 양 대륙을 넘나들며 종횡무진하게 전개하는 그의 활동과 맞닥뜨리는 각종 사건들. 독자들은 잭 대령의 삶의 여정과 궤적을 뒤따라가기에도 숨이 벅차다. 왠지 작가가 서두르는 기미마저 느껴진다. 방대한 서사를 한 권에 무리하다시피 집어넣다보니 혼란스러움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무심하게 전면을 주시하고 있는 천진한 소년 그림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의 잭 대령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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