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여행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의 이야기
최순욱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앞서 읽은 <에다 이야기><북유럽 신화>는 전자는 원전이고, 후자는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신화 이야기라는 각자의 미덕이 있다. 다만 북유럽 신화를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로서는 다소간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척 시의적절하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의아하지만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열정적 아마추어리즘의 산물은 건조한 프로페셔널보다 대중성과 흡인력에서 대체로 우위에 있다고 언급하고 싶다. 오히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가려운 점을 적절히 잘 긁어주고 있다라고.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평설이라는 점이다. 산문 에다와 운문 에다를 고루 활용하여 북유럽 신화의 전반을 훑고 있으며, 전체로서 신화의 일관된 틀과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에서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화의 선형 체계를 존중하되, 그리스 신화 또는 인도 신화 등 타지역의 신화도 소개하고 비교함으로써 보편적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판타지 소설과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에 깃든 북유럽 신화의 요소도 건드리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초심자, 그리고 심화 이해를 희망하는 독자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후반부에는 북유럽 신화의 파생으로서 반지 이야기도 함께 다루고 있는데, 게르만 부족의 내부적 다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제재가 지니는 중대한 의미와 함께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호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과거에 일독은 단지 겉핥기에 불과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미처 간과했던 인상적인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본다.

 

아스가르드의 신은 아제 신족과 바네 신족의 혼합이다. 뇨르드와 자식인 프레이야, 프레이르는 바네 신족에 속한다. 두 신족은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평화조약을 맺고 하나가 된다. 이는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던 집단 간의 융합 과정을 신화화한 것이니, 우리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도 동일한 의미다.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은 신과 대등한 지위와 능력을 지닌다. 토르의 활약이 없었다면 아스가르드는 진작에 거인들에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딘과 지혜 대결을 벌인 바프투르드니르, 토르 일행을 농락한 우트가르드-로키만 보더라도 그들의 지혜 또는 힘은 참으로 막강하였다. 이런 거인들이 신들-엄밀히는 토르에게 쉽사리 제압당하는 것은 당대인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라는 비평은 함의가 매우 깊다.

 

이렇게 강력한 거인들이 왜 비슷한 능력을 가진 신들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걸까. 이것은 고대 북유럽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북구의 혹독한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다. (P.363)

 

이에 따르면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는 토르는 단지 싸움꾼 천둥 신이 아니다. 토르가 죽인 거인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거친 자연의 형상화이며, 따라서 토르는 농업의 신이요, 농부의 수호자”(P.79)라는 점이 흥미롭다.

 

토르 못지않게 로키에 대한 해석 역시 관심이 쏠린다.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머물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책에서는 로키를 불의 신으로 설명한다. 불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하지만 잘못될 경우 전부를 불살라버리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아스가르드에 필요하지만 위험한 존재인 로키와 동질성을 지닌다. 저자는 트릭스터의 관점으로 로키를 설명한다. 로키는 아제 신들과 함께 지내지만 그의 본성은 거인이다. 신과 거인은 존재론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볼 때, 로키는 언젠가 신들을 배반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로키는 불의 신이면서도 불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로키가 종종 들불이라는 뜻의 로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도 짐작이 갈 것이다. 로키가 불의 신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으면 앞장에서 설명한 로키의 성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P.132)

 

이 책에는 앞선 책들에서 간과하거나 깊숙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앞서 소개했던 오딘과 지혜 대결을 벌인 바프투르드니르, 인간의 신분을 만든 헤임달, 신과 결혼하려다 목숨을 잃은 난쟁이 알비스, 브리징아멘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굴복하여 난쟁이들과 밤을 보낸 프레이야 이야기는 흥미로운 동시에 완전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신들의 일면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예전에 <니벨룽겐의 반지>를 읽었지만 단지 독일 중세의 전설 또는 서사시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이제 북유럽 신화의 시각에서 반지 이야기를 바라보니 전체적 구도와 저작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옴을 이해할 수 있다. 게르만 일부 종족에서 벌어진 갈등과 분쟁, 그리고 몰락 정도가 아니다. 북유럽 신화사에서 라그나뢰크의 전조이다.

 

뵐숭 가문과 니플룽족, 그리고 훈족과 구드룬이 벌이는 혼돈으로 가득한 핏빛 이야기는 이제 곧 라그나뢰크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에 다름 아니다. (P.449)

 

신과 거인의 대립, 아스 신들과 로키의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발더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와 요툰헤임에 국한된다. 세계 전체를 뒤흔들 대사건이 되려면 인간들의 세상, 즉 미드가르드조차도 살육과 배반, 혼돈으로 뒤섞여 세상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화와 전설, 역사가 혼재된 반지 이야기가 라그나뢰크에서 갖는 의미라고 하겠다.

 

라그나뢰크는 절대로 사악하거나 어두운 것이 아니다. 물론 밝은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라그나뢰크에는 그저 창조와 죽음이 하나로 얽혀 있을 뿐이다. (P.497)

 

파괴를 통한 창조, 창조를 위한 파괴. 이것이 라그나뢰크다. 타락한 세상을 태초의 불꽃 거인 수르트르의 불로써 정화함으로써 이제 신과 거인의 시대는 끝났다. 물론 신들의 후예는 잔존하였지만 그들은 더 이상 불멸의 존재로서 권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후 세계는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변모할 것이다. 오딘과 프레이야가 대비했지만 막지 못했고, 토르와 로키조차도 벗어나지 못한 운명의 굴레. 독자의 안타까운 심정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바퀴는 거스를 수 없음을 북유럽 신화는 뚜렷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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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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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스노리 스툴루손의 <에다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북유럽 신화의 원전으로서 정통성을 지닌 반면 13세기에 지어진 작품이다 보니 아무래도 오늘날 독자의 시각으로는 비체계적이고 이해가 어려운 대목이 제법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순전히 북유럽 신화 입문자를 위한 이야기 형식으로 개작한 북유럽 신화라고 하겠다. 북유럽 신화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과 지식 없이도 충분히 재미나게 읽을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북유럽 신화의 전반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매우 유용하다. 또한 스노리의 책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의아하게 여겼던 점들이 이 책에서는 또렷이 드러나는데 작가가 다양한 저작물을 활용한 덕분이다.

 

오딘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들의 아버지이고 또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이든 아니면 인간이든, 오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P.29)

 

북유럽 신화에서 최고신은 오딘이다. 그는 신들의 수장인 동시에 인간의 창조자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상이 물푸레나무와 느릅나무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지혜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한쪽 눈을 포기한 오딘, 라그라뢰크를 대비하기 위해 죽은 전사의 영혼을 거두었던 오딘. 하지만 대체로 그는 최고신이라는 관조자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신화의 상당 부분은 토르와 로키의 모험과 사고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로키를 오딘의 아들로 설정하였지만, 실제 로키는 신족이 아니라 거인족에 속한다. 신족과 거인족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음에도 로키가 어떻게 신들의 세계에 합류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로키가 오딘과 피를 섞은 의형제라는 점도 의아스럽다. 관련 내용은 신화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최고신이여, 당신과 나는 아주 오래전에 피를 섞은 사이 아닙니까. 그렇죠?”

위대한 오딘이여, 그때 당신이 맹세하기를, 연회석상에서 서로 맹세를 나눈 의형제 로키가 함께 있어야만 술을 마시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P.268)

 

로키의 온갖 술수와 배신, 그리고 사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로키를 처벌하지 못한다. 바로 오딘과 로키의 맹세 때문이다. 로키가 발드르의 죽음을 초래하고 부활을 저지한 데다 신들을 모욕하였음에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징은 로키의 자식을 죽이고 그를 묶어두는 데 불과하였다. 아마도 신들에게 있어 로키는 필요악에 가까운 존재라고 하겠다.

 

그에게 가장 감사함을 느낄 때조차 마음 한구석에는 분노의 기운이 남아 있고, 그를 가장 미워할 때에도 어느 정도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P.63)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이 단일 종족이 아닌 점도 기묘하다. 오딘과 토르 등이 속한 에시르 신족과 프레이와 프레이야가 속한 바니르 신족이 전쟁의 결과 평화 조약을 맺고 연합했다는 사실, 그리고 로키의 존재로 미루어 복잡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난쟁이에게서 얻은 보물을 바치는 상대가 오딘, 프레이, 그리고 토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신계에서 최상위의 지위를 가진다는 점도 파악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불멸성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북유럽 신화의 신들도 자연사하지 않는 점에서 불멸이지만 그것이 여신 이둔의 사과에 의존한다. 게다가 그리스 신화와 달리 여기 신들은 다른 신 또는 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제약적임을 알 수 있다. 하물며 크바시르는 난쟁이들에게 목숨을 앗길 정도로 약한 존재이다. 신들이 로키의 세 자식, 특히 늑대 펜리르를 그토록 잡아두려고 애썼던 것도 늑대에게 목숨을 빼앗길 우려에서 비롯됨이었다.

 

신들의 지역인 아스가르드 역시 헤임달이 감시를 하는 비프로스트를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다고 하면서도 거인 오거가 감쪽같이 오딘의 망치를 훔쳐 가는 게 가능할 정도로 보안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낸다. 산의 거인 덕택으로 튼튼한 성벽을 쌓았지만 토르의 묠니르에 거의 전적으로 치안을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그나뢰크가 시작되자 무지개다리와 성벽은 무용지물에 불과하였다.

 

수르트와 무스펠의 아들들은 화염 속에 서 있고, 헬과 로키의 전사들은 땅속에서 나타난다. 흐림의 부대인 서리 거인들도 그곳에 와서 발 디디고 서 있는 진흙땅을 얼려버린다. 펜리르도 그들과 함께하고 미드가르드의 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적들이 모두 그날 그 자리에 모이는 것이다. (P.288-289)

 

신들의 최후는 발드르의 죽음에서 촉발된다. 신들과 로키의 해묵은 갈등이 마침내 이를 계기로 폭발하고 신들의 적대세력이 합심하여 아스가르드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들의 구성을 보면 한마디로 다국적 동맹군이다. 오딘도, 토르도 모두 쓰러지고 헤임달마저 로키와 대결 후 함께 목숨을 잃는다. 자기편이 결국 이겼다는 로키에게 헤임달은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이건 끝이 아냐. 끝은 없어. 그저 옛 시대의 종말일 뿐이지.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죽음 뒤에는 항상 부활이 따라와. 넌 패한 거야.” (P.294)

 

그렇다. 라그나뢰크는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의 멸망이지 세계의 최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그드라실은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서 있으며 그 안에 인간 생명을 품고 있기에. 훗날 그들의 자손은 신들의 세상 이후에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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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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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최초의 작품집이다.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채로운 성향의 작품을 통해 오사무 초기의 문학세계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만년>이라는 표제가 독특하다. 대체로 작가 자신의 삶에서 제재를 끌어낸 작품이 내용과 분량 면에서 주를 이루는데, <추억>, <어릿광대의 꽃>이 그러하다.

 

나는 지고 있는 꽃잎이었다. 약간의 바람에도 파르르 떨었다.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사소한 멸시를 받아도 죽을 듯이 괴로웠다. (<추억>, P.46)

 

<추억>을 통해 독자는 작가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다. 그리고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의 촉각도 감지할 수 있다. 두 명의 여인, 즉 숙모와 미요에 관련된 추억이 이야기에 아스라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미요와의 포도 따기 장면이 풍기는 은근한 정서는 고대 일본에서부터 내려오는 고유의 독자적 미학과 상통한다.

 

나는 만족했다. 그만한 추억이라도 미요에게 심어 준 것은 나로선 힘껏 애쓴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요는 이제 내 것이 되었어, 하고 안심했다. (P.70)

 

<어릿광대의 꽃>의 주인공은 유명한 <인간실격>과 동일하게 오바 요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두 작품의 친연성을 작가는 의도하였으리라. 동반 자살에 실패한 후의 오바의 일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의외로 문병 온 친구들로 인해 시끌벅적하고 간호사도 한데 어울려 살짝 유쾌한 정서마저 내비칠 정도다.

 

나는 삼류 작가가 아닐까? 아무래도 기분을 너무 낸 것 같다. 파노라마식 해 가며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꾀하고는, 마침내 이 모양으로 우쭐거린다. (P.130-131)

 

작가의 동 사건에 대한 소설 속 파노라마적 장면 전개라는 외양을 띠고 있는데, 작가의 주관적 개입이 반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잦은 빈도는 불필요하기보다는 오히려 씨줄과 날줄처럼 독자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가의 개입은 독자가 작품에 함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통제하여 독자가 보다 비판적으로 작품을 대하도록 유도한다. 작가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훗날의 작품과 형식적 차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작가의 개입은 <완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늘 절망 곁에서 상처 입기 쉬운 어릿광대의 꽃을 바람도 못 쐰 채 만들고 있는 이 서글픔을 네가 이해해 준다면! (<어릿광대의 꽃>, P.149)

 

벌어진 사건과 작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즐겁고 유쾌한 척하는 어조는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딱한 동정심을 유발한다.

 

다른 하나의 부류는 작가 자신을 희화화하는 듯한 유형이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원숭이 얼굴을 한 젊은이>에서 발견되는 특색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의 어이없을 정도의 우스꽝스러움이다. 당사자는 진지하고 고매한 척하지만 외인의 눈에는 재주도 없는 마당에 게으르기 짝이 없는 무위도식하는 한량에 불과하다.

 

좋아. 그렇다면 네게 묻지.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어깨를 흔들거나 고개를 떨구거나 나뭇잎을 잡아 뜯으면서 어슬렁 어슬렁 헤매고 다니는 저 남자, 그리고 여기 있는 나.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 P.261)

 

<역행>은 두 가지 유형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노인의 그는 <인간실격>의 오바 요조를 연상시킨다. ‘결투의 그는 좌충우돌하는 자신을 희화화하지만, 해학미가 두드러진다. 해학적 요소는 <원숭이 섬>으로 이어지지만, 여기서는 안온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를 감내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나타난다.

 

오사무는 옛이야기에서 소재와 문체를 빌려와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방법도 택하고 있다. <어복기>가 자아내는 고적함과 스와의 쓸쓸함이 독자에게도 풍겨온다. <로마네스크>는 선술, 싸움, 거짓말의 달인이라는 설정과 그네들의 역설적 삶의 방향이 묘한 웃음과 함께 씁쓸함을 안겨준다. 이 두 작품은 앞서 다른 책에서 읽은 바 있다.

 

내용에 앞서 독특한 문체가 눈길을 사로잡는 유형으로는 단연 <참새><장님 이야기>. 전자는 쓰가루 방언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번역본으로는 독특한 음색을 알기 어렵다. 후자는 두서없이 읊조리는 듯한 문체가 인상적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가속도로 진행되는 문장을 따라가자면 숨이 가쁠 정도다. 문체로 말하자면 <>도 빠질 수 없다. 아포리즘과도 같이 개연성 없이 나열되는 문장들은 시적 감수성과 함께 단속적이나마 화자의 사고와 형편을 엿볼 수 있다.

 

죽을 생각이었다. (<>, P.7)

어떻게든, 되겠지.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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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 희곡집
아서 밀러 지음, 김윤철 옮김 / 평민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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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의 작품집이다. 유명한 <시련> 외에 <대가>, <추락이후>가 수록되어 있다. 최초에는 <시련>이란 표제로 출간되었는데, 개정판을 내면서 지금과 같은 제목으로 변경하였다. 적절한 변경이다.

 

1. 시련 (The Crucible, 1953)

 

<시련>은 앞서 민음사 판을 읽은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건너뛴다. 솔직히 당분간은 재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인간 이성의 던전을 다시 헤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진실의 적나라함이란. 아서 밀러는 타협하지 않는다.

 

2. 대가 (The Price, 1968)

 

등장인물이 4명에 불과한 단출한 희곡이지만, 내용이 뿜어내는 무게감과 박력은 남다르다. 대공황으로 몰락한 집안과 무능력자가 되어버린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학업과 꿈을 희생한 차남 빅터. 집안을 뛰쳐나가 개인의 성공에 매진한 장남 월터. 전반부를 통해 독자는 빅터의 자기희생에 공감하며 연락도 되지 않는 무정한 월터를 매도한다. 아울러 빅터와 의견 대립을 보이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에스터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반전은 월터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월터의 저의를 의심하며 가족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빅터. 월터의 반문은 충격적이다. 그건 환상에 불과하다고. 사업은 실패했지만 비참한 생황을 영위할 정도로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 그 사실을 빅터 자신도 알고 있다는 점. 자기희생은 불가피하게 의무가 아니라 빅터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 아버지는 자신을 돌본 빅터보다도 자신을 버리고 의사로서 성공한 월터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 등.

 

물질적 부의 추구와 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여부는 각자의 선택이다. 자기희생의 삶, 의무의 삶은 경제적 성공을 포기한 비싼 대가였다. 빅터는 자신의 선택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희생과 책임의 두꺼운 갑옷으로 자신을 변호하였다. 에스터의 반응을 통해서 그리고 처분을 기다리는 고가의 살림살이를 통해 독자는 월터의 발언이 진실에 가까움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빅터에 대한 동정과 화해에 실패한 형제를 향한 연민을 품는다.

 

(에스터) 당신이 언제까지나 모든 잘못을 형님이나 체제나 그 밖의 다른 것에 전가할 수는 없는 거예요! 당신은 자유로운데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 하고 있어요. 그게 나를 미치게 만들어요! (P.214)

 

(월터) 지금 이 순간까지 넌 진실을 대면할 배짱을 갖지 못했던 거야! 너의 실패가 너한테 도덕적인 권위를 주는 줄 착각하지 마! (P.244)

 

3. 추락이후 (After the Fall, 1964)

 

<시련><대가>가 지극히 사실주의적 작품이라면, 이 희곡은 <세일즈맨의 죽음>처럼 표현주의 요소가 많이 혼합되어 글자로보다 실제 무대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봐야 더욱 극 이해에 수월할 것이다.

 

작가가 몸소 겪은 매카시즘의 충격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미키의 변절과 루의 자살, 그리고 내적 갈등을 겪는 쿠엔틴. 작가가 <시련>에서 비이성의 광기와 인간의 양심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매카시즘이 한 축을, 그리고 마릴린 몬로와의 결혼 생활의 체험이 다른 축을 형성하여 이원적 구성으로 혼합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이해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사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인물들의 대사도 모호하거나 생략된 형식이어서 마치 빈 간극은 독자 또는 관객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메꾸라는 작가의 의도인 듯도 하다. 실제 연극이라면 무대 자체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극은 쿠엔틴의 마음과 생각과 추억 속에서 이뤄진다. 의자 하나가 있을 뿐 무대엔 전통적인 의미의 가구가 전혀 없다. 벽도 없고 실제적인 경계도 없다. (P.251)

 

배우들은 마치 우리들 마음속에서처럼 순간에 나타났다가 순간에 사라진다. 이들이 사라질 때 꼭 무대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대화의 내용이 주어진 순간에 누가 살아있고 누가 죽어있는지를 분명히 밝혀줄 것이다.

그러므로 무대는 소용돌이치고 훨훨 날아다니는데 이는 마음이 자신의 표면과 심층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P.251)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 광풍을 에덴동산의 추방에 비길만큼 중차대한 사건으로 간주한다. 추방 이후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갖게 되었고 결백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타인에게 결백을 요구하며, 결백하지 않을 경우 단죄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게다가 요구하는 진실이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반하는 성격일 경우 우리는 이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집단 폭력과 위세 앞에서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루의 자살에 쿠엔틴이 기쁨과 해방감을 느끼는 이유 또한 지극히 인간적이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루의 변호를 맡았지만 사회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루는 쿠엔틴의 내면의 배반 심리를 알아챘던 것이기에 최후의 순간에 그의 이름을 외쳤으리라.

 

(쿠엔틴) , 이게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래요!......결백한 사람들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 영혼의 어딘가에 그 기쁨의 공범자, 자신에게 짐이 되었던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그 안도감, 그 기쁨의 공범자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이해하겠습니까? (P.306)

 

쿠엔틴을 둘러싼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도 결백과 진실은 상존한다. 루이즈는 훌륭한 여인이지만 쿠엔틴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단. 쿠엔틴 못지않게 지적이고 성취욕이 있는 그녀는 전통적 아내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루이즈의 이미지는 훗날 <모르간 산을 내려가다가>에서 데오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쿠엔틴과 매기의 만남은 우연에서 비롯되었지만 필연적이다. 쿠엔틴은 굳이 순결한 체하지 않는 매기에게서 오히려 참된 진실을 발견한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는 쿠엔틴에 비하면 매기는 보잘것없는 신세였으나 나중에 매기가 가수로서 성공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매기의 단물을 빨아들이는 업계와 그 안에서 지쳐가는 매기를 바라보면서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쿠엔틴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홀로 남은 쿠엔틴 앞에는 아직 홀가가 남아있다. 홀로코스트의 죄의식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여인. 대학살의 희생자 앞에서는 누구도 결백하지 못함을 깊이 공감하는 홀가. 쿠엔틴은 홀가를 향해 다가간다.

 

이 작품은 복잡한 관계망을 중첩하고 있다. 쿠엔틴의 가족관계, 부부관계, 친구관계, 그리고 사회관계. 이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결백과 진실이다. 작가는 사실주의적 기법만으로는 적절한 표현이 어렵다고 판단하였기에 단순하고 상징적인 무대와 함축적인 대사. 그리고 여러 관계를 쉼 없이 들락날락하는 다층적 구조를 통해 진실이 일차원적이 아니며 완전한 결백은 선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보는 이에게 적시한다.

 

(쿠엔틴) 인간은 자기를 용서해야 돼! 우린 아무도 결백할 수 없어. 더 이상 뭘 원해?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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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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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는 사회적 메시지 전달 매체로서 희곡을 소설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장르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것이 그가 소설이 아닌 희곡에 주력한 까닭이리라. 자신이 사회에 대하여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대사의 형식으로 직접적 표현이 가능하므로. 이것이 소설과의 근본적 차별점이다. 그의 대표작인 사회극 작품들이 모두 그러하다.

 

이 희곡에는 몇 가지 가치 선택의 갈등이 잠복하여 있다. 먼저 가장 커다란 축인 켈러의 반사회적, 반국가적 행위의 동기다. 켈러의 해명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는 자신의 가족들, 나아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결함 있는 부품을 선적하였다. 전시 상황에서 조금만 삐끗하거나 약점을 노출하면 몰락하고 만다는 강한 불안감이 내적 동기가 되었으리라.

 

(어머니) 가족을 위해서 그 일을 했다는 게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켈러) 이유가 된다고!

(어머니) 그 애에겐 가족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어요.

(켈러)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P.129)

 

켈러는 자신의 도덕률에 당당하다. 가족과 자식을 위한 아버지의 행동은 윤리적으로 면책이라고 주장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난하더라도 가족들에게서만 이해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그가 전후 기간을 꿋꿋하게 버티고 가족과 사업을 지킨 기반이다. 장남에게서, 그리고 마지막에 편지를 통해 차남 래리로부터 자신의 행위가 전면적으로 부인 받게 되자 켈러는 스스로의 앞선 발언처럼 자살을 선택한다. 그로서는 자기 삶의 목표와 존재 이유를 잃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을 테지만 이런 면에서 그는 구질구질한 유형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래리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지극한 모성애의 산물이 아님을 극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낸다. 마당에 쓰러진 나무를 래리의 운명과 결부시킨다거나 기적처럼 귀환하는 전시 군인의 기사를 철석같이 믿는 그녀에게서는 사실 수용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그에게서는 수용이 가져올 두려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 왜 아주머니 마음속은 래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 걸까요?

(어머니) 왜냐하면 살아 있어야만 하니까.

() 그렇지만 왜요, 아주머니?

(어머니) 왜냐하면 어떤 일들은 그래야만 하고, 또 어떤 일들은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이야. 태양이 떠올라야만 하듯, 그래야만 하는 거야. (P.47)

 

래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그녀의 말에서는 비이성적인 집착과 강박감이 느껴진다. 그녀에게 래리는 다른 가족 구성원보다 월등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크리스와 앤의 결합 계획을 인정하지 않고 앤을 래리와 굳이 묶어놓으려는 그녀의 시도에 안타까움과 어처구니없음을 품으면서도 일말의 동정심을 발견하는 것은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어머니) 얘야, 네 동생은 살아 있어. 왜냐하면 그 애가 죽었다면 네 아버지가 죽인 게 되기 때문이야. 이제 날 이해하겠니? 네가 살아 있는 한 그 애도 살아 있어. 하느님께서는 아들이 제 아버지 손에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단다. 이제 알겠지, 안 그래? 알겠지. (P.117)

 

독자는 크리스와 앤에게서도 의문을 품는다. 무엇보다도 크리스는 진정 자신의 아버지가 무죄이며 정당하다고 믿는지를. 조지의 추궁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 아버지의 고백으로 진실을 접하게 되자 법의 심판을 받도록 권유하는 장면 등을 통해 우리는 크리스가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선한 인물임을 알게 된다. 독자 역시 크리스의 입장이라면 아버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샅샅이 파헤치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적 최소한의 믿음이 있다. 비록 수는 크리스를 가식적 이상주의라고 비난하지만 개인적 감정 이외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짐이 대사가 그의 성품을 잘 알려준다. 크리스는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재능이 없다는.

 

(켈러) 물론이지, 그 애는 내 아들이었어. 하지만 래리는 그들 모두가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 생각에도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군. 그들이 내 아들이었던 것 같아. (P.141)

 

래리의 죽음과, 크리스의 절규가 주창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것은 이 작품의 주제이자 표제이기도 하다. 켈러가 크리스와 래리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확장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사망한 21명의 젊은 조종사들이 모두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비도덕적인 행동 선택은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작가는 켈러의 과거와 현재의 행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켈러와 크리스의 극중 대사처럼 전시 상황에서는 쓰러진 시신들 위에서 부를 걸머쥐는 게 성공한 삶이며 그것에 도덕적 책임을 지니지 않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작가는 크리스의 입을 통해 이를 비판하고 싶었으리라. 가장 가까운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크리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아는 것 말이에요.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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