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반할 지도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알고 보면 반할 시리즈
정대영 지음 / 태학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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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어릴 적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메르카토르 도법의 세계지도가 집에 있었는데, 전지에 그대로 베낀 기억도 있다. 요즘도 책이나 미디어에서 특정 도시나 지역이 소개되면 네이버 지도나 구글맵으로 찾아보곤 한다.

 

우리나라의 옛 지도하면 상식적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나 역시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해야 국사 시간에 배운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정도 추가될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뜻밖에 옛 지도가 많이 남아있음에 우선 놀라고, 옛 지도가 매우 다채로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세계지도, 전국지도, 그리고 지역지도 등. 휴대용 지도인 <수진일용방>와 특수목적 지도인 <삼남해방도><강화도이북해역도> 등도 있다.

 

오늘날 지도는 정확성과 사실성이 제일의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옛 지도는 일부를 제외하면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오늘날과 옛날은 지도의 필요성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대다수 서민은 태어난 고장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었다. 즉 지도의 수요가 미약하였고 일부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지도가 크게 발달할 동기가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의 과학적 지도가 유입되었으나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천하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 대청일통천하전도 등을 고집하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현실보다 관념에 치우친 편협한 사고와 인식으로 왜곡되고 퇴행한 지도를 낳게 한 낙후된 시대정신은 조선과 중국이 똑같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옛 지도는 저자의 설명과 같이 현실적인 지도와 회화적 지도로 나눌 수 있다. <대동여지도> 등과 같이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실성에 주력한 지도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으나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회화식 지도가 자체로서 더욱 흥미롭다. 이는 지도인 동시에 한 편의 그림이니 기능성과 아울러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지자체에서 발간하는 관광지도 중에는 주요 포인트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례가 있는데 회화식 지도는 이와 유사하다. 소개된 <완산부지도>와 여러 지방지도가 여기에 속한다.

 

과거의 아름다운 옛 지도를 무조건 찬미할 수는 없다고 본다. 미적 요소에 대한 높은 평가는 후세의 관점일 따름이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지도의 기본 요소를 충족시킨 가운데 심미성을 부가하였다면 예술성이 한층 돋보였겠지만 이를 결여한 아름다움은 당대의 기술과 지식의 역부족을 드러내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기에 옛 지도의 허실이 있다. 그럼에도 회화적 지도는 현대의 기능적이며 과학적인 지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의 관심을 유인할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는 상상과 사람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련한 역사적 왜곡은 단지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어쨌든 그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진 바탕에는 지도를 바라보는 옛사람들의 긍정과 부정의 인식이 병존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열악한 시대적 배경에서도 지도 제작에 헌신한 선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척 뜻깊고 흥미롭다.

 

[정상기]의 지도는 조선 후기에 폭넓게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경준, 정철조, 황윤석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지도를 고쳐 나갔으며, 정상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역시 끊임없이 수정을 했다. 그야말로 지도 제작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김정호가 있었다. (P.86)

 

저자는 이중 정철조와 황윤석의 교류를 특별히 소개한다. 그리고 하백원이란 인물도. 남쪽 시골에서 나 홀로 세계지도와 조선 전도를 그려 낸 그의 노력은 단지 호사가의 것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서삼경과 시문을 달달 외우고 써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인정받던 시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초심을 유지하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저자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한없다.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말. 수많은 고지도 제작자들도 그러했으리라......그들이 당대에 부귀영화와 인정을 원했다면 이런 일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헤아릴 길 없는 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P.182)

 

옛 지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야 마땅하다.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를 보면 지도와 지리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경우를 가끔 접하게 된다. 과거의 지리와 지금의 그것이 동일하다는 무언의 가정이 발견된다. 과거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 지금의 강릉이 옛날에도 여전히 동해안의 지역인지는 엄정한 지리 고증을 통해 분명하게 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깊이 있는 역사 연구와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연구부터 느리지만 꼼꼼히 선행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발걸음은 행정구역을 모두 표시한 정밀한 역사 지도의 완성이라 생각한다(P.160).”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 책은 옛 지도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다양한 옛 지도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소개된 지도가 좀만 더 크고 지도의 내용 자체에 대한 설명이 좀만 더 상세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후속 저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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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대왕 사계절 1318 문고 7
크리스티네 뇌스트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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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원작이 발표되고, 1997년에 번역본이 출간된 이 작품이 청소년 문학 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모은 까닭은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으로 파악할 수 있다. 민주화 투쟁 이후 독재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고 자유언론이 가능해진 때 이 소설이 지향하는 독재주의 청산 및 소통의 강조는 당시 시대적 요구에 정확히 부합하였다.

 

이 책에서 독재자는 누구인가? 볼프강네 가족에서는 아빠이며, 쿠미-오리 사회에서는 오이대왕이다. 독재자의 공통적 속성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올바르며 나머지 구성원은 무지하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걸 견뎌내지 못하며 타인에 대한 인격적 존중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 가운데 아빠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들 스스로도 몹시 놀랐고 아빠는 우리보다 더 경악했다. 아빠가 다시 한 번 위협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P.37)

 

볼프강네 가족을 먼저 보자.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으로 여겨졌으나 오이대왕이 등장하면서 내재한 모순과 균열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볼프강네 가족은 매사에 아빠의 승인과 허락이 있어야 수영장, 극장,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게 가능하다. 아빠가 원하는 것만 먹거나 입고 TV를 볼 수 있고 하물며 허락해야만 웃는다. 아무리 어머니가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주장해 봤자 할아버지의 의견대로 비정상적인 가정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작품 내에서 아빠가 마르티나의 과외 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명령하는 사례가 전형적인 경우로 예시된다.

 

쿠미-오리들이 대왕이 없으면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할아버지가 말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 줄 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 (P.25)

 

오이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이대왕은 자기의 존재가 없다면 쿠미-오리 사회의 만사가 엉망이 될 거라는 확신을 품고 있다. 볼프강이 쿠미-오리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재자로서의 그의 실체가 드러나며, 볼프강 아빠의 도움을 받아 쿠미-오리사회를 물바다로 만들려는 복수 계획에서 오이대왕의 잔인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이대왕과 볼프강의 아빠는 모두 독재자로서 공통분모를 지니므로 양자가 소위 죽이 잘 맞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볼프강의 아빠가 오이대왕에게 동정심을 품는 건 그에게서 자신의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볼프강네 가족들이 오이대왕과 아빠를 유사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게는 오이대왕과 아버지의 차이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어머니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P.81)

 

볼프강네 가족에게서 벌어진 해괴한 사건과 함께 이 작품의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 볼프강과 하슬링거 선생님과의 갈등이다. 볼프강은 하슬링거 선생님이 유독 자신에게 매정하고 각박하게 구는 게 그를 놀려댔던 과거사의 잔상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자칫 악화일로를 향해 가지만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의외의 결과로 귀결된다. 하슬링거 선생님의 교육적 지도에 대한 오해가 양자 간의 우연한 소통으로 비로소 풀렸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있잖아!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보지 못했어. 하슬링거 선생님은 내게 교사로서의 당연한 노여움만 느끼고 계셨던 거야.’ (P.158)

 

볼프강네 가족에 닥친 오이대왕 사건의 경우도 갈등이 봉합되고 해결되는 외양을 띤다. 아빠는 자신이 오이대왕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고, 오이대왕은 유모차에 실려 집에서 내쫓김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만족스러운 해법이 아님을 독자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오이대왕이 등장하여 가족의 화합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니다. 가족의 위기는 그 이전에 내재하고 있었으며 오이대왕이 표출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오이대왕은 퇴출당하였지만 아빠의 전제적 성향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이대왕 사건으로 아빠의 권위는 많이 실추되었고 가족들의 자유를 요구하는 성향이 강화되었음은 사실이다. 볼프강네 가족의 위기는 아빠와 나머지 구성원 간 사고와 소통의 단절에서 비롯되었다.

 

누나는 그 모든 것이 어린아이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라는 것을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했다.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P.101)

 

아빠가 자신의 독선적 성향을 극복하고 구성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족의 위기는 상존할 것이며 제2, 3의 오이대왕이 볼프강네 집안에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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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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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은 내게 무엇보다 <한시미학산책>의 저자로 친숙하다. 오래전에 사놓고도 서가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어 빚진 심정이 들고 마음이 아프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한시를 제재로 삼고 있는데, 독자층을 초중등생을 하여 좀 더 쉽게 풀어쓰려고 있다. 서두와 말미에 지칭하는 벼리는 저자의 초등학생 아들이라고 한다.

 

잠깐 구성을 훑어보면 열아홉 개의 장을 나누고 각 장마다 한시의 묘미를 다채롭게 음미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태로 한시와 관련 배경 및 이해를 돕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각 장의 분량도 대여섯 쪽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이 관심과 집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을 피하고 있다. 소개된 한시 원문 소개는 책 뒤에 일괄 수록하여 관심 있는 사람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고, 책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소개도 마찬가지로 책 뒤에 수록하여 참고하도록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매우 친절하게 한시의 세계에 입문하도록 도와주고 있는 셈이어서 굳이 청소년 독자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도 무난하게 읽기 좋게 되어 있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P.24)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P.58)

 

한시(漢詩)도 언어와 문자의 형태만 달리 했지 시()라는 문학 형식임은 동일하다. 우리가 시에서 기대하고 느끼는 정서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시대와 문화에 따른 일부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과 속성은 마찬가지다. 살며 사랑하며 죽는 과정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교감과 소통을 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를 주저리주저리 문장으로 엮으면 산문이 되며, 말과 글을 아끼고 다듬어 운율을 집어넣으면 시가 된다. 따라서 저자가 이야기마다 화두로 삼는 한시의 속성 내지 본질은 결국 시의 그것을 가리킨다.

 

비록 덤덤하지만 그 속에 시인의 투명한 정신이 담겨 있을 때 진짜 시가 된다. 겉 꾸밈만으로는 안 된다.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P.38)

 

시를 통해 우리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던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새롭게 만나려면 새롭게 보아야 한다. 남들 보는 대로 보아서는 그 사물의 새로운 점이 보이지 않는다. (P.77)

 

한시는 우리말로 된 시와 다른 독자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수천 년간 내려온 한문학의 전통과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탓에 특유의 정신과 관습이 우러난 것이다. 사군자를 노래한 시는 사군자 자체의 외적 아름다움만을 찬미하지 않는다. 선비들은 사군자 속에 깃들인 정신을 사랑하였다. 여기서 소개한 설중매의 고고한 아취가 그러하다.

 

저자는 정운의(情韻義)’라는 개념도 소개한다.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노래되다 보니 새로운 뜻을 갖게 된 것”(P.83)이라고 한다. 헤어질 때 주고받는 버들가지, 쓸쓸한 가을 부채의 의미는 자체로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니 무심히 넘길 게 아니다.

 

한시에서 한자라는 외형을 벗겨내고 보면 옛사람들의 민낯을 여실히 볼 수 있다. 그들도 우리네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자식의 죽음에 땅을 치며, 실의에 빠져 낙담하다가도 절의를 새삼 다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임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며, 매운 시집살이의 아픔을 시어에 절절히 녹이기도 한다. 정약용의 일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아내의 오래되어서 해진 치마가 단지 훌륭한 예술품으로 변모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가족과 자식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산의 찬찬한 글귀 속에 들어있는 절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정한 사람이리라.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난다.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P.99)

 

편의상 한시라고 통칭하지만 수천 년간 수많은 사람이 남긴 글이므로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지은이의 성, 신분, 상황에 따라 다양함의 넓이와 깊이는 엄청나다. 같은 제재를 다루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지어진 시가 존재하며, 동일한 제재와 정서를 묘사하지만 지은이의 개성에 따라 묘미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자연 속의 은거를 노래하지만 누구는 고독과 쓸쓸함을, 반면 은일의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시라고 어렵게 여길 필요는 없다. 한자가 신경에 거슬린다면 우리말 번역본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된 시문학을 번역시로 음미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물론 원문 자체를 독자가 직접 해독하고 감상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모든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은 없다. 우리말로 옮긴 시 작품에 공감할 수 있고 호기심이 커진다면 그때 가서 해당 언어를 익혀 직접 원문에 도전할 수 있다.

 

한시 속에 담겨 있는 우리 옛 선인들의 생각과 마음은 지금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단다. 다른 점은 옛날에는 한자로 썼는데 지금은 우리말로 쓴다는 것뿐이지. (P.178)

 

청소년 독자층을 대상으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다. 한시의 내용이 특별난 게 아니며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은 동일하다는 것. 한시가 한갓 진부한 옛 유산에 불과하지 않고 현대에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라는 것. 한시 자체를 어렵게 여기지 말고 친숙하게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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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바트 비룡소 걸작선 16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 지음, 박민수 옮김 / 비룡소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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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이라고 틀을 정해 놓기가 애매한 작품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환상 풍의 성장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주는 다채로운 의미 부여는 녹록지 않다. 독일 동부 지역, 폴란드와의 인접 지역이라는 지리적 배경, 환상과 마법이 당연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중세의 시대적 배경. 굉장히 이국적인 동시에 묘한 비현실성을 자아내는데 작가의 서술도 사실성에 얽매이지 않아 한층 그러하다. 작품 전체에 일관된 통일성보다는 각지에 흩어진 마법사와 관계된 신비한 개별 에피소드를 한데 그러모은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음식은 훌륭하고 풍족하잖아. 게다가 머리 위에 지붕도 있고-예전 같으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저녁에 잘 곳을 걱정해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침대는 따뜻하고 기분 좋게 말라 있고 그런대로 푹신한데다가 빈대나 벼룩도 없고 말야. 이건 거지 소년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니겠어? (P.32)

 

크라바트가 코젤브루흐의 방앗간에 안착하게 된 연유다. 나날의 끼니와 잠자리 걱정을 하는 처지에서 안정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앞뒤 잴 필요조차 없다. 궁핍한 중세의 경제적 상황을 알게끔 해준다.

 

배고픔이 가시면 그때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볼 심적 여유가 생기는 법. 방앗간이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도망칠 생각을 품지만 이미 늦었다. 마법의 서약으로 그는 철저하게 주인 마법사에게 예속된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잇따른 도망 시도가 무위로 돌아감을 첫 번째 꿈속에서 겪게 된다. 작품 말미에 메르텐의 탈주가 실패하고 자살 시도마저 가로막히는 대목에서 독자는 주인 마법사의 절대적 위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호언장담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방앗간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는 내가 결정한다!” 주인이 소리쳤다. “나만이 그걸 결정할 수 있어!” (P.245)

 

주인이 직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대우가 나쁘지 않고 마법도 배울 수 있으니 별일 없다면 직공들이 방앗간에 안주할 수 있으련만 하나의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은 일 년에 한 명씩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력으로 막을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엄숙한 법칙과도 같다. 크라바트는 자신에 유달리 친절하고 의지했던 톤다와 미할이 연거푸 죽음을 맞이하자 현상을 용인할 수 없다. 게다가 이들의 죽음은 방앗간 내에서 언급조차 금기시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나날을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크라바트의 방앗간 생활은 삼 년간 지속되며 매년 비슷한 양식이 반복된다. 누군가의 죽음과 새로운 구성원의 등장, 마법사의 대부가 등장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의문의 방아 찧기, 부활절 의식 등. 작가는 여기서 역사성을 불어넣기 위해 아우구스트 선제후와 귀족으로 변신한 주인의 회담 장면을 삽입한다. 스웨덴과의 전쟁을 계속할지 중단할지의 의사결정에서 마법사는 전쟁을 주창한다. 죽음을 부르는 사악한 편에서 보자면 평화는 불편한 법이므로.

 

매년 반복되는 방앗간의 나날은 크라바트에게 한가지 선택이 불가피함을 알려 준다. 안주와 도전 중에서의 선택. 다소간의 부정과 불의를 감내할 수 있다면 안락하고 평온한 삶이 보장되어 있다. 우정과 정의를 선택하면 불편과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목숨마저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향해 걸어갈 것인가. 마법의 위력은 강력하며 이를 갖고자 하는 유혹이 커질수록 삶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올바른 방향에서 멀어지게 된다. 톤다의 무덤에서 주기도문을 떠올리지 못하는 크라바트의 모습처럼.

 

이 작품에서 크라바트의 꿈은 작품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현실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방앗간의 진상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하며, 톤다의 도움을 구하고 자신에 닥칠 앞날을 예시하여 대비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네 번째 꿈에서 크라바트는 꿈속에서 칸토르카의 도움으로 마법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칸토르카는 마치 크라바트에게서 그 어떤 오점을 지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크라바트는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칸토르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칸토르카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P.263)

 

칸토르카는 크라바트에게 구원의 여신의 의미를 지닌다. 주인의 마법에 씐 방앗간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힘이라는 상투적이고 진부하지만 설득력 있는 설정이라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크라바트가 칸토르카를 연상하고 환상 속에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꿈속에서 교감을 갖는 대목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순수성을 나타낸다. 오로지 그런 사랑이라야 마법사의 시험을 거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굴레에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칸토르카가 말했다.

나를 걱정하기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걸 말이에요. 그 때문에 당신을 알아본 거예요.” (P.337)

 

주인은 크라바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마법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매혹적인 유혹의 자리. 우정과 사랑의 복수를 굳게 다짐하지 않았다면 흔들릴 수도 있지만 크라바트는 단호하다.

 

그리고 유로를 잊을 수 없다. 바보스러운 유로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크라바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현실적으로 주인에게 대항할 힘이 없는 유로로서는 그것이 자신을 보전하는 최상의 방책일 수밖에. 크라바트는 주인의 함정에서도 유로를 향해 빈 총을 쏘면서 마법에 굴하지 않고 우정을 중시하는 참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크라바트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이색적이며 흥미롭지만 의외로 읽기가 만만치 않은 작품. 작가의 다른 작품도 경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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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놀 청소년문학 28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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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엔 유쾌 발랄하기 그지없는 이 책은 사실 매우 씁쓸한 현실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표면상 줄거리는 가난해진 조지나가 개를 훔쳐 그 사례금으로 집을 구하는 데 보태고자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생답지 않은 치밀한 작전과 방법 모색은 독자에게 감탄을 주지만, 어쩔 수 없는 경험과 사고의 한계도 드러낸다. 훔친 개를 어디에다 둘지 또는 훔친 개의 먹이는 어떻게 조달할지 등등의 중요한 사항들을 깜빡 놓쳐버리는 것이다.

 

조지나의 아빠는 가족을 버리고 가출한 무책임한 인물이다. 작중에 부부간의 심각한 갈등이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구체적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조지나 엄마에 따르면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서라고 추정될 따름이다. 졸지에 거리에 나앉은 조지나 입장에서 아빠는 모든 사태의 원인이므로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다. 조지나는 아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는다.

 

이 차가 싫었다. 구석구석 다 지겨웠다. 나는 핸들에 두 손을 얹고는 운전하는 척해보았다. 부릉, 부릉, 부릉, 운전 시늉을 하는 내내, 아빠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해졌다고 우릴 차에서 살게 만든 나쁜 사람. (P.50)

 

반면 조지나 엄마는 어떻게든 가족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말 그대로 고군분투한다. 상황에 분개하지만 절망하지는 않는 모습, 가족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자세. 조지나에게 아빠는 부정적 인물, 엄마는 긍정적이고 지향해야 할 인물로 인식됨은 당연하다. 작중에서는 이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조지나의 생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다.

 

땅이 갈라져서 날 집어삼켰으면 하고 바랐다. 뒤를 돌아보고서, 나와 토비와 자동차, 그 모든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루앤 고드프리를 발견하자마자, 루앤의 표정에서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P.11)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인식의 태도는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집안이 멀쩡할 때 조지나는 루앤과 단짝친구로 지냈다. 조지나의 처지를 알아차린 후 루앤은 조지나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복장도 외모도 점점 지저분해지는 아이, 공부도 숙제도 점점 나빠지는 아이. 아이도 부모도 결코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이를 깨달은 조지나의 태도 역시 스스로 루앤과 거리를 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 아이들에게 가난이란 표피에 불과함을 아무리 역설해 본들 그들에겐 역시 씻을 수 없는 수치임에 불과하다. 한편 조지나가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솔직히 교사에게 털어놓았다면 좀 더 나아졌겠지만 자신의 비참함을 타인에게 밝히는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후반부에 잠깐 등장하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무키 아저씨를 보자.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토비의 말마따나 부랑자로 분류된다. 집도 절도 없이 나날이 떠돌아다니며, 변변한 차도 없이 자전거에 의존해 초라한 침낭으로 유숙하는 인물. 속절없는 떠돌이 부랑자다. 작가는 팻시 아줌마의 시선으로 그가 매우 행복해 보임을 보여준다. 흔한 선입견과 달리 그는 낙관적이며 사려 깊고 오히려 지혜롭다고 할 정도다. 그에게 있어 물질적 부는 선택적 요인에 불과하다. 조지나와 윌리의 진실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는 이를 전적으로 조지나의 판단에 맡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신조를 말해줄 뿐이다. 그것이 조지나에게 던진 의미는 의외로 깊고 오래간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껏 무키 아저씨를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잘못 안 것은 아니지만). 그 아저씨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똑똑하다. 그리고 좋은 발자취를 남기는 사람이다. (P.236)

 

카멜라 아줌마의 말처럼 힘든 일을 겪다 보면 나쁜 짓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힘든 일을 겪는 모든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힘든 일을 헤쳐나가기 위한 손쉬운 해결책을 찾다 보면 나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제아무리 동기와 배경을 참작하더라도 나쁜 짓이 잘못이라는 근원적인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지나는 개를 훔치고 사례금을 받은 후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단순한 교환의 방식에만 주목하였다. 훔친 개의 딱한 처지, 졸지에 애정이 어린 개를 잃은 주인의 심정, 게다가 사례금에 갈등하는 주인네의 고민 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지나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 그런 정의(情意)적인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론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일은 꼬이기 마련이며, 무키 아저씨의 신조처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P.203)이다.

 

그저 날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만 하며, 아주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그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어버렸기 때문에, 그것도 너무도 많이 휘저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P.215)

 

여러 성공한 아동문학처럼 역시 결말은 훈훈하다. 조지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개를 돌려주며 카멜라 아줌마는 조지나를 용서한다. 조지나의 엄마는 온 가족이 그토록 염원하던 집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제 서서히 조지나의 일상도 회복될 것이다. 학교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지나는 윌리와 카멜라 아줌마를 만났고, 무키 아저씨의 지혜를 얻었다. 고약한 냄새가 아닌 좋은 냄새가 나는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으며, 살면서 뒤에 남겨놓은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누나 진짜 못됐다.”

이런 제기랄. 꼭 지금 그 말을 내뱉어야 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왜냐하면 나 자신도 지금 딱 그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난 정말 못됐다. (P.114)

 

앞으로의 조지나는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더는 동생으로부터 못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솔직히 말해서 카멜라 아줌마가 사례금을 마련하도록 열심히 부추길 때의 조지나는 참으로 못된 아이였으니까. 다만 끝까지 못된 길을 걷지 않았다는 사실은 조지나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어떠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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