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시리즈 Ⅳ

일시 : 2025년 4월 19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이정은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5번 G장조 Op.79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5번 D장조 Op.28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0번 G장조 Op.14 No.2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8번 E flat 장조 Op.31 No.3


* 세줄평

베토벤의 소나타 가운데 마이너한 곡목이라 더욱 관심이 끌렸는지 모르겠다. 첫곡 첫소절을 듣는 순간 아 이 곡이었구나 하는 감흥이 솟아오른다. 전곡 음반을 듣다보면 대중적이지 않지만 귀에 선뜻 다가서는 선율과 리듬. 전반부의 곡들도 좋지만, 후반부의 15번과 18번 소나타는 밝음과 어두움, 경묘함과 중후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곡이라고 하겠다. 전심으로 이 곡을 대하는 피아니스트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중 연주회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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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4월 18일(금)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유세형 (피아노)

프로그램

  - 바흐-부조니, 합창전주곡 '깨어라, 목소리가 우리를 부른다' BWV 645

  - 바흐-부조니, 전주곡과 푸가 BWV 552

  - 리스트-호로비츠, 헝가리 광시곡 2번

  - 바그너-쉘링,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전주곡

  - 바그너-리스트,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

  - 차이코프스키-플레트네프, 콘서트를 위한 '호두기 인형' 모음곡


* 세줄평

간만에 접하는 역동적이고 스케일 큰 연주다. 바흐의 오르간적 울림을 부조니와 독주자가 합심하여 웅장하게 울려주고 있다. 헝가리 광시곡은 약음과 강음의 절묘한 대비, 바그너 곡의 침잠하는 듯한 교향적 울림 모두 좋다. 호두까기 인형곡으로 마무리함은 청중과 독주자 자신을 위한 배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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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4월 15일(화) 19:30

장소 : JCC 아트센터 콘서트홀

연주 : 허원숙 (피아노)

프로그램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A flat 장조 Hob.XVI: 46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E단조 Hob.XVI: 47bis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C장조 Hob.XVI: 21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E장조 Hob.XVI: 22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F장조 Hob.XVI: 23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D장조 Hob.XVI: 24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E flat 조 Hob.XVI: 25

  -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A장조 Hob.XVI: 26


* 세줄평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를 실연으로 듣기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게다가 전곡 연주회라니. 전반부는 놓쳤지만 남은 연주회라도 부지런히 참석해야겠다. 자주 감상 안해서 그렇지 곡 하나하나가 모두 생기있고 어떤 곡은 무게감도 보여준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중간적 성격이랄까. 분명 곡마다 개성미가 철철 넘치고 리듬과 선율도 흥미롭다. 새로운 감상 레퍼토리가 생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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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대산세계문학총서 170
에두아르트 뫼리케 지음, 윤도중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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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트 뫼리케는 슈만과 볼프의 독일 가곡으로 일반적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시인과 작가로서 뫼리케의 본령은 생소하고 의외로 다가온다. 이 책에 실린 노벨레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와 동화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는 뫼리케를 알기 위한 매우 적절한 선택이다.

 

1. 프라하 여행길의 모차르트

 

모차르트는 클래식 음악사상 최고의 천재로서 영화 <아마데우스>의 이미지가 굉장히 각인되어 있다. 살리에리와의 대결 관계는 이 소설에서도 불구대천지원수등의 표현으로 강조된다. 대중으로서는 모차르트의 때 이른 죽음과, 음모론을 연계하고 싶은 유혹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듯하다.

 

각설하고 같은 천재라도 모차르트는 베토벤과 다르다고 한다. 베토벤의 자필 원고를 보면 무수히 수정과 삭제, 퇴고를 반복한 자취가 있는 반면 모차르트의 그것은 마치 베껴 쓴 듯 깔끔하다고 하니. 그러한 음악이 오늘날 아름답기 그지없는 최고의 명곡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확실히 뮤즈의 영감을 전수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라는 음악사상 전대미문의 현상을 그의 삶과 음악을 연관 지어 이해하려는 문학적 시도다. 빈에서 프라하로 연주 여행을 가는 여정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모차르트라는 다채로운 인물의 불후의 음악과 필멸의 삶이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흘러넘칠 듯한 풍요로운 음과 선율로 특징 지어지는 것처럼 그의 삶도 일체의 유보 없는 현세 지향적임을 보여준다. 고도의 초인간적인 영감을 끌어내는 작업에 몰두하는 건 결국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음을 잦은 우울증의 발현으로 암시하면서.

 

제기랄, 나는 사람들이 놓치고 뒤로 미루고 내버려두는 걸 생각해서는 안 되오. 신과 인간에 대한 의무를 얘기하는 게 아니오. 온전한 향유, 매일 우리 발아래 놓인 소박하고 순수한 즐거움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오. (P.14)

 

작가는 모차르트 최후의 대작 오페라 <돈 조반니>와 관련한 설정을 집어넣으면서 시골 혼례식 장면의 사실성을 확보하고, 마지막 석상 장면의 무시무시함을 처음 공개하면서 청중을 충격에 빠뜨리는 동시에 오이게니로 하여금 모차르트의 임박한 슬픈 장래를 예감케 한다. 백작 가문의 여러 사람 중 모차르트를 진실로 이해하는 오직 오이게니 혼자뿐이다.

 

이 사람이 빠르게 그리고 막을 수 없이 자기 자신의 불꽃으로 생명을 불태운다는 것, 그가 발산하는 지나친 불꽃을 실제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지구상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확실, 아주 확실해졌다. (P.95)

 

작가는 이야기를 흐름에 따라 순탄하게 그려가지 않는다. 모차르트가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 된 계기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대목, 오렌지 나무와 관련한 백작 가문의 오랜 추억 이야기, 모차르트 부인이 털어놓는 소위 여행 가방 안 보물 이야기 등이 삽입되면서 흐름을 방해하는데, 산만하게 보이는 구성은 결국 작가가 의도적으로 모차르트라는 인간의 다면성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임을 깨닫게 된다.

 

2. 슈투트가르트의 도깨비

 

동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 길고 난삽하고 비비 꼬인 줄거리에, 굉장히 긴 삽입 이야기의 반복적 등장 등으로 한마디로 어수선함을 안겨준다. 아마도 동화라는 분류는 이것이 도깨비와 인어, 마법 구두 따위의 비현실적 존재의 등장, 남녀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 등으로 일반적 소설 문학보다는 환상적 요소가 강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작품을 이끌어가는 남주는 기능공 제페이며, 중간에 잠시 여주 브로네의 이야기가 나오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밧줄 타기에서 결합한다. 전체적으로는 제페의 여정이 작품의 동인이 되는데, 고향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여러 지방을 방랑하다가 다시금 고향으로 복귀하는 지역적 배경을 지닌다.

 

너희가 밧줄 위에서 혼인을 약속했다고? 그래, 모든 성인에게 맹세코, 그 바보 같은 짓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그런 일은 우리 슈바벤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장한 젊은이들아, 행운을 빈다.” (P.221)

 

백작 영주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슈투트가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슈바벤 지방의 향토적, 문화적 색채를 담뿍 담고 있는 일종의 지방주의 문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동화에서 주인공들에게 도움을 주고 끝내 결합시키며,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탱해 나가는 존재는 난쟁이 도깨비다. 인간에게 분탕질과 해악을 끼치는 유형이 아니라는 점, 이상한 힘을 지닌 측연을 얻기 위해 인간과 거래하는 도깨비는 분명 이채로우면서 흥미 있는 캐릭터라고 하겠다.

 

이 작품 역시 흐름 자체는 매끄럽고 유려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작품 전개와 직간접적인 연관을 지닌 다채로운 삽화와 회상 등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여기에 작가가 친애하는 독자여하며 직접적으로 작중에 개입하여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늘어놓고 서사 전개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찌 보면 제페의 인생 여행담은 부차적이며, 슈투트가르트 지방의 전반적인 문화와 풍속을 보여주는 게 주안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작중 이야기로는 제페가 장인 부인에게 들려주는 파일란트 박사 이야기,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시장 인형극, 슈투트가르트 축제 가장행렬의 흥겨운 장면 등이 나온다. 무엇보다 웬만한 단편 분량으로 들어 있는 아름다운 요정 라우의 이야기가 핵심적인데, 민음사 출간본에서는 이 이야기만 단독으로 실려 있다. 라우, 도깨비, 제페 모두가 측연이라는 물건을 통해 통시대적으로 연결되어 문화적 정체성을 특징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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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2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김효신 옮김 / 나남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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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 번역의 페트라르카 산문선 세 권 중 마지막에 이르렀다. 앞서 읽은 <고독한 생활>이 페트라르카 개인과 종교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반면, <종교적 여가>는 순전히 기독교적 사유를 다루고 있다. <나의 비밀>은 오롯이 페트라르카의 개인적 삶과 사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책의 원제는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갈등에 대하여>라고 한다. 하지만 통상 <나의 비밀>로 불리는데, 이는 페트라르카 자신이 용인한 바다.

 

그러니, 나의 작은 책이여! 너 또한 너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사람들의 모임을 피해서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 소망일 터이다. 사실 너는 나의 비밀이며 또 그렇게 불릴 것이다. (P.16, <서문>)

 

이 산문집은 특이하게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대화자는 페트라르카 자신과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를 존경한 페트라르카는 자기 작품 곳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주 인용한다. 페트라르카 사상의 두 축은 키케로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진리의 여신이 곁에서 이를 지켜본다고 하는 설정. 두 사람은 사흘에 걸친 진지한 대화를 교환한다. 대화의 주제는 프란체스코가 그즈음 겪고 있는 정신적 위기 진단과 이의 극복 방안이다. 대화를 주도하여 이끄는 존재는 단연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에 비해 프란체스코의 역할은 소극적이며 방어적이다.

 

<인간의 비참함과 구원에 대한 첫 번째 대화>

 

이 대목에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이 명쾌하고 단호하게 펼쳐진다. 인간의 불행은 인간 자신이 불행과 비참에서 벗어나려고 열렬히 원하지 않아서라는 것.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났지만 인간 자신의 선택으로 악덕을 행하고 스스로 불행에 빠진다. 누구라도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라지만, 한마디로 뜨거운 소망이 아니라 미지근한 바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프란체스코는 자신이 소망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단번에 통박 당한다.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그 무엇보다 가장 뜨겁게 소망하고 있지 않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이 열망은 오직 다른 소망을 모조리 없애 버린 사람에게만 온전히 생길 수 있네. 말할 필요도 없이 인생에는 소망의 대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지만, 최고 행복의 욕구로까지 높아지려면 먼저 다른 대상들을 모두 무시해야 하네. (P.39)

 

프란체스코를 포함한 대다수 인간의 비참함은 그들 영혼이 이것저것에 많이 사로잡혀 있어서 정작 중요한 자기 영혼의 구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헌신과 전념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는 주장이다. 중병에 걸린 환자는 오직 병이 낫기만을 바랄 뿐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혼의 병에 대한 두 번째 대화>

 

아우구스티누스는 많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영혼의 병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짚어나간다. 여기에 등장하는 병은 교만, 시기와 탐욕, 야심, 대식, 분노, 정욕, 우울병으로 기독교의 소위 일곱 가지 대죄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영혼이 이처럼 많은 적의 위협에 둘러싸여 있음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며, 지식의 외연 확장보다도 내면에 대한 이해와 각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하늘과 땅의 크기, 바다의 넓이, 천체의 운행, 풀과 나무나 돌의 일, 자연의 비밀 등을 안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면, 그래서 무엇 하겠나? (P.66)

 

이러한 의견은 방투산 등반기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대목이기도 하다. 인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 세속의 부와 명예를 갈망한 나머지 사후의 영원한 부를 도외시한다고 비판한다. 프란체스코가 이러한 모든 죄악에 다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며 대식과 분노는 가볍게 넘어가지만, 탐욕과 야심에 대해서는 통렬하게 논박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네는 세상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버렸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이 경멸했다는 그 야심을 샛길에서 노리고 있어. 자네의 여가, 고독, 세상일에서의 도피, 그리고 연구 활동이 마찬가지로 야심에 이끌리고 있네. 자네의 연구 활동의 목적도 지금까지 쭉 명예였던 것이야. (P.91)

 

요는 이상의 모든 속된 욕망을 탈피해야 진정한 미덕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인데,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성인의 반열에 오를만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속의 끈을 놓지 못하는 페트라르카로서는 머리는 알지만 몸은 쉽게 따르기 어려운 요구라고 하겠다.

 

<사랑과 명예욕에 대한 세 번째 대화>

 

여기서는 특히 사랑과 명예욕을 집중하여 다룬다. 이는 특히 페트라르카 개인과 관련하여 중대한 사안이라고 판단해서이다. 당연히 프란체스코는 강력하게 반발한다. 여태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발언에 고분고분하던 그로서는 드물게 보는 반항이다. 명예욕은 물론, 특히 사랑의 감정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 옹호는 절절하게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자신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으며, 그녀로 인하여 자신이 세속의 유혹을 벗어나서 영혼을 고양할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어떤 사랑도 절대자를 향한 사랑을 앞설 수 없으며, 비등한 수준까지 가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 현재 자네가 그녀 덕택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자네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러나 그녀가 현재의 자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진실을 말하고 있네. (P.143-144)

 

나아가 그는 라우라를 향한 페트라르카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함을 파헤친다. 개인적으로 <칸초니에레>를 몇 권 읽으면서 의아하였던 게 한 여인에 대한 젊은이의 사랑이 평생에 걸치도록 절절한 감정을 촉발하는 게 가능할까였다. 사랑에 흠뻑 빠져 있던 시기는 당연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후 수십 년 동안을 절대적 미의 화신으로 라우라를 찬양하는 건 다른 연유가 있을 것이며, 아마도 라우라의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단호하게 지적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실제로 자네는 그녀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도 이름에 더욱 매료되어 그 이름과 똑같이 발음되는 것은 모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허영심으로 우러러보기에 이르렀네. (P.156)

 

페트라르카가 여인의 이름 Laura를 라틴어 Laurea와 자주 혼용하여 사용하였다는 점, 그가 계관시인으로 추대받은 사실을 대단한 명예로 여겼다는 점을 보면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은 곧 시인으로서 자신의 승리를 뜻한다고 하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옮긴이 해제에서 역자가 상세하게 풀이하고 있다.

 

시인 페트라르카에게 연인 라우라가 진실로 탄생한 순간은 아비뇽의 생 클레어 성당에서 아름다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라우레아라는 말이 시인 안에서 자라나 그녀와 일체화되었을 때이리라. (P.228, <옮긴이 해제>)

 

이쯤에서 페트라르카가 생전에 이 작품을 공개하지 않은 까닭을 유추할 수 있다. 너무나도 솔직한 내면의 고백이기에 차마 이를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랑의 연가로 명성이 자자한 칸초니에레도 흠이 갈 수 있으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프란체스코에게 사랑과 명예욕을 버리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욕망을 알고 있기에, 다만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 숭고함을 지향하려는 영혼의 미덕을 성취함에 있어 저해되지 않도록 조절하라는 정도이다. 매우 온건한 요구이기에 프란체스코가 충분히 따를 만한 수준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이를 완곡히 거절한다. 그는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 없다고 토로한다. 결국 사흘에 걸쳐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진리의 여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노력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면 다시 처음의 논쟁으로 돌아가게 되네. 자네는 의지가 약하다고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오로지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탁하세. 자네가 아직 길을 잃고 헤매고 있어도 하느님께서 걸음을 인도하시고 안전한 곳에 다다르게 해 주시도록 말일세. (P.217)

 

결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글자 그대로만 보면, 정신적 위기에 빠져 있던 프란체스코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커다란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페트라르카는 여생을 계속해서 방황과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명백한 해법을 프란체스코가 스스로 거부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가 가장 중시한 감정인 사랑과 명예욕을 후순위로 놓는 삶을 고르기보다는 정신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것을 끝내 붙잡고 가리라는 의지. 그것은 종교인이 아닌 세속신의 삶, 나아가 결국 그가 성직자가 아닌 시인의 길을 선택한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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