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르.브리기타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25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지음, 권영경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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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프터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하다. 세속 잡사에 어수선하던 머릿속이 평온해지고 엉클어진 실타래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슈티프터의 글을 계속해서 찾아 읽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맛 때문이다.

 

경제적 곤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의 인간성과 인간 본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의 글에는 사랑과 자연이 공존하다. 그의 사랑은 열정과 정념이 난무하는 숨 가쁘고 육체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의 자연 또한 인간을 압도하고 위협하는 거대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조화롭게 균형을 유지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품어주는 그러한 자연이다. 겉치레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내면의 깊이와 우아함을 중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레 작품의 기품을 높여준다.

 

<콘도르>는 그의 데뷔작이다. 네 개의 장은 ‘밤’과 ‘낮’, ‘꽃’과 ‘열매’의 각기 대응되는 표제로 이루어져 있어 작가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무언가를 초조히 기다리며 잠 못 이루는 젊은 화가가 바라보는 창밖 도시의 밤 정경. 용감하게 열기구에 올라타 비행의 꿈을 성취하려는 젊은 여성. 남성과 동등하고자 하는 여성의 도전은 무모한 오만이었음으로 끝나고 남녀의 갈등은 눈물과 입맞춤으로 화해를 이룬다. 이윽고 화가는 길을 떠난다. 여인에 더 당당한 존재로 거듭나기 위하여.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다.

 

이 작품은 몇 가지 관점에서 되씹어보게 한다. 코르넬리아의 용기와 도전은 작중의 평가처럼 오만하고 무모한 것이었는지. 남성에 비해 수동적이고 연약하다는 인식은 작품이 씌어진 당대의 통상적 관념이지만, 현대적 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이다. 한편 화가는 떠나고 훗날 코르넬리아는 스스로를 자책하는 장면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다. 그들은 화해하고 상호간의 사랑을 인정하였지만, 화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신분높은 여성에 당당하기 위하여 화가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을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코르넬리아는 그를 떠나게 한 원인이 결국 자신이 열기구에 탄 행동임을 자책하는 것이다. 이로써 남녀 간의 사랑은 실현에 있어 결국 세속의 틀과 한계에 가로막히고 만다.

 

“사랑은 아름다운 천사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한 사랑은 죽음의 천사와 다름없다!” (P.18)

 

<브리기타>는 슈티프터 문학의 본령에 가깝다. 슈티프터의 장기인 숲이 아니라, 헝가리 대평원을 무대로 거칠고 황량한 들판과 그곳을 개척하며 삶의 영역으로 구축해 나가는 사람의 의지와 소박한 인간성, 특히 헝가리 전통에 대한 서술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현재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분리되었지만, 19세기에는 하나의 연방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는 같은 나라 내에서도 이국적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작가는 서두에 이런 문장으로 작품의 전개방향을 짐작케 한다.
“추한 사람의 얼굴에서도, 금방 그 가치를 끌어낼 수는 없지만, 가끔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P.53)

 

화자와 소령의 여행 중 인연으로 결국 화자는 소령이 정주한 헝가리를 방문한다. 화자는 세상을 탐구하고 체험하고픈 방랑벽을 지녔으며, 화자의 눈으로 우리들도 대초원의 광활함을 대리 체험할 수 있다. 소령은 넓은 영지를 지닌 지주이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내세우지 않고 하인 및 목동, 인부들과 평등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화자는 궁금하다. 소령이 발견한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소령은 황야의 농지개간과 인부들과 어울리는 삶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을 다니면서 평소 늘 멀리서만 찾아 헤매던 이런저런 행복을 이 곳에서 비로소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죠.” (P.99)

 

슈티프터 글의 특징은 이따금 나타나는 작가의 서술식 의견 개진에도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관과 인생관, 미적 관점 등을 독자에게 강요함이 담담하게 표명하는데, 자칫하면 도덕적 설교로 받아들이기 딱 좋은 내용이지만, 딱딱하고 지루함이 없이 이게 은근히 가슴에 와 닿는다.

 

3장 초원의 과거 편에서도 “인간이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운 면을 지닌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피상적으로 보이는 감미로운 환영에 이끌려,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P.114)로 시작하여 두 면에 걸쳐 이러한 서술이 나타난다.

 

브리기타는 외모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피해를 받은 여성이다. 주변의 냉대는 자연스레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신도 굳이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브리기타에게 숨겨진 내적인 보물을 발견한 이가 소령, 즉 슈테판이다.

 

슈테판과 브리기타의 결별은 예상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찬미하는 남자라도 속성상 외적 아름다움에 무심치 못한다. 또한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더구나 외모가 빼어나지 못한 경우 더더욱 일말의 불안감을 가슴에 품기 마련이다.

 

무려 십오 년 이란 인고의 세월동안 소령은 여행과 방랑으로, 브리기타는 어린 아들의 양육과 황무지 개간으로 내적 성숙을 이루었다. 조심스러운 재회는 우정으로, 우정은 드디어 사랑의 재발견으로 점화되며, 해피엔딩으로 마친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역경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엔 외모의 편견을 통한 인간관계의 어긋남에 대한 엄혹한 비판이 있으며, 노력과 행동을 통한 인물의 발전과 성숙의 가치도 보여준다. 게다가 여행과 방랑을 통해 본 헝가리 초원의 풍경과 그네들의 생활 모습은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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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펠루스 추기경 바벨의 도서관 19
구스타프 마이링크 지음, 조원규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해제, 이승수 해제 / 바다출판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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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덧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하나이다. 20세기 전후를 살다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인데, 대표작 <골렘>이 유명하다고 한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되고 읽어보는 작가다.

 

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분량에 비해 독해가 제법 용이하지 않다.

 

1.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요한 오버라이트>는 비교적 명료하지만 여운은 길다. 조부의 묘비에 새겨진 Vivo 라는 단어와 정말로 죽고 나면 새겨진다는 오버라이트의 설명은 부조화의 생경함을 부여한다. 정말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의 핵심은 오버라이트가 들려준 시간 거머리를 찾아간 이야기에 있다. 시간 거머리는 “인생의 참된 수액인 시간을 우리 심장에서 빨아먹는” 허깨비같은 존재들이다. 기다림과 희망을 짓밟아버려야 이를 극복할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나는 살고 있다’가 아닌 ‘나는 살아 있다’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부질없는 “희망과 갈망 그리고 기다림”은 “자아의 마술적인 힘이 영혼에서 흘러 나가도록 하여” 추악한 분신 유령(도플갱어)를 살찌우고 부유하게 할 뿐이다.

 

오버라이트는 깨닫는다. “우리 자신이 시간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었던 것이오. 물질처럼 보이는 육신은 흘러나온 시간에 다름 아니었소” (P.33). 그래서 그는 삶에서 ‘기다림과 희망’을 영원히 근절하여 자신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민다.

 

오버라이트의 각성은 모든 욕망의 해탈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의 말마따나 하나의 ‘자동기계’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 경지에 오른 이에게 세상의 대소사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다만 “눈처럼 흰 배를 타고 기슭없는 영원한 생의 바다로 항해”(P.34)하는 오버라이트가 과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2. <나펠루스 추기경>은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이다.

 

화자를 포함한 다른 인물들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죽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무얼 찾는지도 모르면서 불안하게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더듬다가 죽음이 방 안에 와 있다는 걸 깨닫는 임종자들.” (P.42)

 

하지만 라트슈필러는 달랐다. 그는 ‘푸른 형제들’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면서 믿음의 겨자씨, 믿음의 핵, 믿음과 희망의 독의 정체를 깨닫고 “뱀파이어의 가면”을 잡아채 벗긴다. “잠에서 깨듯 명료하게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이라는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 우리 영혼을 고갈시켜서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 고유한 자아를 훔쳐가 버렸지요.” (P.46)

 

인생의 무의미성, 내면의 자아를 상실한 슬픈 인생에 대한 추상같은 자각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든지 거기에는 마술적인 이중의 의미가 들어 있소이다. 마술적이지 않은 일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겁니다.” (P.54)

 

그는 일상성 속의 환상성의 잠복을 절실하게 인식한다. 라트슈필러로 하여금 호수의 깊이를 재려는 계속적 시도를 하게 만든 원동력이 이런 인식이다.

 

“호수의 아가리는 언제고 내게 거듭 선언할 것이오. 지구의 겉껍질 위에서 햇빛을 받으면 끔찍한 독이 자라날 테지만, 가장 내밀한 밑바닥 심연은 그로부터 자유롭다고, 깊이는 순수함이라고.” (P.54)

 

이런 라트슈필러도 인간의 내생적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 푸른 바꽃 아코니툼 나펠루스와 나펠루스 추기경의 유리공의 예기치 못한 등장은 인간 본성의 불가피한 취약성을 드러낼뿐더러, “지구의 겉껍질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자라는 끔찍한 독”의 강력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3. <네 명의 달 형제들>의 주인공은 달(月)이다. “태양은 유한한 존재에 풍족한 기쁨을 누리고픈 열망을 심어” 넣는다. 반면 “달은 현혹적인 광채로 인간들이 그릇된 상상에 빠져들도록” 하여 인간 사회에 부정적 기운을 흩뿌린다. 달의 독이 든 숨결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라고 착각하며 산업문명과 기계화에 맹목적으로 열광한다. 작가는 이 단편에서 현대 기계문명에 부정적 인식을 확고히 한다.

 

백작의 시종인 화자의 이름은 작가와 동일한 구스타프 마이링크다. 화자가 모시는 주인과 그 친구들은 공전하는 달의 네 모습 즉, 보름달, 반달(상현/하현), 그믐을 형상화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시계와 같아지도록 결정된, 부실한 사물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P.68)
“인간은 이제 팔 수 있는 것만을 현실로 여기게 되었다는 거요.” (P.69)

 

인간의 물질주의화와 자본주의화에 대한 비판이 신랄하다.

 

“달은 독이 든 숨결로 인간의 뇌에 생각들을 잉태시켰고, 그 생각들이 눈에 보이게 출산된 것이 기계들이라는 말이었어요.” (P.71)
“기쁨을 모르는 영구기관이 된다는 말입니다.” (P.72)

 

제1차 세계대전의 분노와 광기는 여기에서 재해석된다.

 

“세상에 증오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이미 오래전부터 기계들은 스스로 힘을 갖게 되었는데, 인간들은 아직도 눈이 멀어 자기들이 주인인 줄로 알고 있지요.” (P.80)

 

달의 형제들은 요한 오버라이트와 같은 본질의 존재을 실토하고 있다. 인간성을 탈피한 자동기계라는 사실을.

 

“달의 형제들인 우리는 영원한 존재의 상속자입니다. ‘나는 살고 있다’고 하지 않고 ‘나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 존재” (P.72)

 

그러기에 그들은 인간성의 발현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는 인간들의 뇌 안에서, 기만적이고 냉철한 이성의 새롭고도 거짓된 광채로 살아가야한 합니다. 그들이 태양을 달과 혼동할 때까지, 그리고 빛인 것은 모조리 불신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P.86)

 

마이링크의 작품은 짙은 종교적 신비주의를 바탕에 깔려 있어 몽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작중에도 거론되는 종교집단인 필라델피아 형제들, 푸른 형제들, 장미십자단 등은 언뜻 들어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래가 깊은 소수 종교집단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 정도다. 여기에 인간과 사회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추구와 반문이 환상적 요소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여하튼 웬만해서는 소설을 재독하지 않는 나로 하여금 꼼꼼히 두 번을 읽게 만든 묘한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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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기의 영웅들 - 켈트 신화 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 3
김석희 옮김 / 이레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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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의 한 권으로 판형이 매우 크다. 282*240이므로 통상적인 신국판보다 훨씬 더 큰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시리즈의 특성상 오로지 글이 아니라 상당한 수의 사진과 도판 자료를 수록하고 있어 시각적 인지효과를 높이고 있다.

 

앞표지 사진의 강렬함이 우선 눈길을 끈다. “패배에 반항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켈트족 족장이 제 가슴에 칼을 찔러넣고”(P.6) 있는 기원전 225년경의 조각품이라고 한다.

 

켈트족은 기원전에 이미 전성기를 누렸고 로마 제국의 발흥과 더불어 세력을 상실하고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8면의 켈트 강역도를 보면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서로는 아일랜드에서 남으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부, 동으로는 다뉴브 강을 따라 오늘날의 터키 중부까지 뻗어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터키의 갈라티아, 프랑스의 갈리아 등의 지명에 그 흔적이 여실하다.

 

하지만 켈트 문명은 로마 제국과 중세 기독교 세계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고, 오늘날 아일랜드와 웨일즈 일부에 명운을 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도 거의가 이들 아일랜드와 웨일즈의 신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 외 브리튼과 브르타뉴의 아서 왕 전설이 후반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켈트 문명과 신화에 대한 전반적 개요이며, 이어서 아일랜드의 켈트 신화와 웨일즈의 켈트 신화가 소개된다. 마지막 부분은 아서 왕전설이다.

 

아일랜드의 것은 투아하 데 다난과 피르볼그 족과의 전투, 그리고 다난 족과 인간인 밀레투스 족과의 전투, 이어서 인간 세계의 전설적 영웅인 쿠쿨린과 핀 및 기타 신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편 웨일즈 신화는 마비노기온의 네 지편이 중심이 되어, 축복받은 브란과 위대한 영웅 쿨루크 등이 등장한다. 사실 이 내용들은 앞선 책들을 통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접한지라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매우 큰데, 산만한 신화의 내용을 솜씨 좋게 요약하고 있으며, 사진자료 및 참고 설명이 잘 되어 있어 초심자의 이해를 제고하는데 유익하다.

 

아서 왕의 전설은 요즘 내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장르이다. 아서 왕은 신화와 영웅담이 혼재되어 있을뿐더러 각 지역별(브리튼, 브르타뉴, 독일)로 동일 인물에 대한 명칭도 다를 뿐만 아니라 파생된 독자적 외전이 존재하여 일목요연하게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는 아서 왕의 역사와 전설을 대조하며, 주요 등장인물인 멀린, 가웨인, 란슬롯,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의 열전과 아울러 성배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혼란스러웠던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기분이 좋다.

 

켈트 문명과 신화는 내적으로는 사제인 드루이드들이 문자기록을 하지 않고 암송으로 문명의 핵심을 전수하는 방법의 한계와, 외적으로는 중세 기독교의 종교적 침입과 탄압으로 상당 부분이 소실된 상태다. 하지만 유럽 문화에는 여전히 켈트족의 자취가 역력하니, 마법과 환상, 요정과 유령 등이 살아 숨 쉬는 그 세계는 분명 예수와 이성이 지배하는 정통 유럽의 문화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과장하면 기독교 문명이 양지를 지배한다면 켈트 문명은 서양인의 음지를 지배한다고 할 정도다.

 

재언한다면, 이 책은 켈트 신화에 대한 교과서적 입문서다. 하지만 여기서 포괄하는 내용이 기실 켈트 신화의 거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이 책의 장점인 동시에 잔존한 켈트 신화의 빈약함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한편 생각의나무 출판사에서 세계10대문명 시리즈로 나온 <켈트>라는 책이 있는데, 역시 커다란 판형을 자랑한다. 몇 장 들추어 본 결과 고고학과 역사학적 관점에서 켈트 문명을 다루고 있어 이것과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만 신화 외에 문명으로서 켈트를 알고 싶으면 꽤나 유익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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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기담문학 고딕총서 9
앰브로스 비어스 지음, 정진영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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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 편의 <세계의 환상소설>에서 ‘치카모가’가 소개된 앰브로스 비어스의 단편집이다. ‘기담문학 고딕총서’의 일환으로 출판된 것이니 역시 구분하자면 환상소설 범주에 해당된다. 비어스는 이외에도 <악마의 사전> 등 주로 냉소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꼬집는 글들로 당대에 유명하였다고 한다.

 

표제작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을 포함하여 수록된 17편의 소설들은 짧은 분량에서도 환상소설이 그 생경함과 기이함을 잃지 않고 잘 보여줄 수 있는지 여실히 입증한다. 총칭하여 환상소설이지만 순전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부터 공포문학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비어스는 공포와 살인에 유독 관심이 많은 듯하다. 수록작 모두 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으로는 미국 남북전쟁 전후와 서부 개척기를 주로 다룬다. 괴기 공포물은 모두 인간의 두려움을 자양분으로 작품이 전개된다. 대규모 인명 살상은 소위 말하는 유령과 악령이 판치기 좋은 사건이다. 납량물에서 공동묘지와 폐가가 자주 다루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인적이 드문 미지의 외진 곳, 맹수와 정체모를 위협적 존재가 돌아다니는 깊은 숲 등에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마련이다.

 

분량의 제약 상 비어스는 사건과 인물,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건너뛰고 특징적인 요소만 강조한다. 그림으로 치면 소묘나 캐리커처 정도라고 할 정도인데,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충분한 여백의 효과를 준다. 그리고 끝에는 강렬한 반전! 읽는이는 결말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되새김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짤막한 감탄과 동의의 표현(예, 아하!)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여름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번갈아 가며 소위 귀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경험을 대부분 갖고 있으리라. 개중에는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도 있지만, 잠시 음미해야 공포가 밀려오는 부류도 있다. 비어스의 이 작품들을 읽다보면 문득 제재와 배경은 이와 다르지만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데,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 심리의 본질적 요소는 유사한데 연유할 것이다.

 

수록작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기이한 초자연적 체험을 다룬 유형(핼핀 프레이저의 죽음, 카르코사의 주민, 요물, 심리적인 난파), 인간 심리에 미치는 공포의 영향을 다룬 것들(시체를 지키는 사람, 인간과 뱀, 표범의 눈), 죽은 영혼이 등장하는 작품들(매커저 협곡의 비밀, 덩굴, 이방인, 오른발 가운뎃발가락), 기이한 죽음 자체를 다룬 소설들(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 개기름, 막힌 창, 막슨의 걸작, 내가 좋아하는 살인, 말 탄 자 허공에 있도다)이다.

 

이들 작품에서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구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순수한 스토리가 주는 재미와 환상적 요소의 효과(두려움, 기이함, 생경함, 의아함 등)를 즐기면 충분할 것이다. 작가 자체도 이를 의도했으리라 본다.

 

공포와 살인이 주가 되면 효과 극대화를 위해 잔혹함이 배가되기 마련이다. 잔혹함은 흔히 피와 살이 튀기는 수단을 취한다. 따라서 과거는 물론 현재도 환상소설은 통상 B급 장르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과거 문학의 대가들, 모파상,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호손, 포 등이 환상문학의 대가였다는 사실과, 소설의 제재가 시대적, 장소적 배경의 구체성이라는 제약 조건을 뛰어넘어 작가의 순전한 창작을 발휘할 수 있는 점, 그리고 인간 내면의 은밀한 비이성적 영역의 존재라는 측면을 고려하며 여전히 환상문학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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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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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처음만 힘들었다. 처음만 견디면 그다음은 참을 만하고, 견딜 만해지다가, 종국에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P.58)

 

작중 화자인 윤영의 상념이다. 또한 김이설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나의 상념이기도 하다. 처음 이 작품을 읽는 이라면 김이설의 화법과 표현 수위에 강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선정적 효과만 노린 것 외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의 세태에 대한 처절한 고발임도 알게 되어 높은 평가를 보내리라.

 

이 소설의 가족 관계 역시 범상하지 않다. 애당초 가족 관계란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해체되는 가족 관계에서 과감히 해체하지도 못하고 해체를 막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서 온몸으로 세찬 풍파를 감내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김이설의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의 몫이다.

 

“참을 만큼 참고도 더 참아야 하는 건 가족이었다. 남은 반찬만 갖다 버릴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식구도 갖다 버렸으면 싶었다.” (P.46)

 

작가는 전작과의 차별성을 성(性)에 부여한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여성들이 경제적 궁핍에서 손쉽게 택할 수 있는 수단은 자신의 몸을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방면에 매우 관대한 편이며, 암암리에 만연해 있다. 성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작중 화자의 일탈을 묘사하며 작가는 사회와 개인의 모럴과 생존의 모럴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그녀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 절박한 것이며, 생존은 반드시 도덕을 요구하지 않는다. 더구나 성적 행위는 반드시 제공받는 타자를 요구하며, 이때 타자는 지위와 돈에 있어서 우위를 점하는 갑에 해당한다.

 

김이설 소설의 주인공은 환경과 운명의 폭압에 의연히 맞설 만큼 꿋꿋하지 못하다. 좌절과 분노와 체념을 동반하는 그네들의 모습은 지극히 연약하기에 차라리 인간적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밝은 장밋빛이 아니다. 가슴속에 품은 작지만 소박한 믿음이 끝끝내 그들로 하여금 땅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어 내게끔 하고 있다. 그것은 절망이 주는 희망의 역설이라고 하겠다.

 

“그래도 나는 남편과 함께라면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현재보다 더 나쁜 경우는 없었다.” (P.47)

 

“모든 일은 한꺼번에 터지곤 한다. 어떤 일이 더 생겨야 최악이 되는 걸까...최악을 생각해보니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았다.” (P.154~155)

 

<나쁜 피>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윤영도 주저앉지 않는다. 자신이 손가락질하고 마뜩찮아 하던 가족들의 전철을 밟지는 않겠다는 결의이다. 동시에 자신의 삶을 결코 외적 환경에 종속시키지 않겠다는 주체성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것은 눈물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다.

 

“엄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좀 달라지고 싶었다. 이제와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P.171)

 

“집까지의 거리가 내 일생의 모든 밤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멈췄다 움직이기를 몇 번을 더 해야 끝이 날까. 끝이, 있기는 할까. 나는 남편의 허벅지를 세게 붙잡아 내 등에 바짝 붙였다.” (P.188)

 

“왕백숙집으로 출근하던 첫날 아침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참는 건 잘했다. 누구보다도 질길 수 있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P.193)

 

자극은 곧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더 큰 자극이 아니면 유사 수준의 자극은 무심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더 강하고 더 짙은 자극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과 <나쁜 피>를 연달아 읽은 나도 김이설의 자극과 충격 요법에 쉽사리 익숙해져 버렸다.

 

의도 여부를 불문하고 김이설의 작품은 자극과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일정 부분 대중적 관심은 기실 그것에 대한 관음증적 기대감이라고 하겠다. 꿈꾸지만 행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은밀한 훔쳐보기. 이는 곧 한계에 봉착한다. 자극과 욕망 충족은 주기가 매우 짧다. 현명한 작가라면 이의 함정을 건너뛰어야 한다. 작가는 전작의 한계를 성(性) 요소의 도입으로 이번에 회피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음의 행보는 작가 김이설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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