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생활
모리스 메테를링크 지음, 김현영 옮김 / 이너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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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파랑새>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유명한 마테를링크(예전에는 메테를링크로 알았는데 외국어표기법이 변경된 모양이다)는 후기에 이르러 에세이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 작품을 포함한 곤충 3부작 외에, <꽃의 지혜> 등 자연관찰에 남다른 흥미를 지닌 듯하다.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언제나 은둔과 고독을 지향한 것을 알 수 있다.

 

<꿀벌의 생활>에서 작가는 양봉가의 시각으로 꿀벌을 관찰하면서 보고 듣고 읽고 깨우친 사항을 차근차근 적고 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경과된 1901년에 발표하였지만, 내용에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양봉 벌꿀의 생태와 양봉가의 양봉 방식이 본질상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음에 기인한다.

 

우리가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주로 접하게 되는 동물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야생 동물의 세계다. 생활 주위에 친숙한 존재인 개,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과 소, 닭, 양, 염소 등의 사육동물은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는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매우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문 양봉가나 동물학자가 아닌 중에서 분봉의 기이한 열광, 벌집 건축의 우수성, 여왕벌들 간 생존을 건 혈투, 결혼 비행과 수벌의 비극, 대대적인 수벌 살육과 같은 신기하면서도 비극적이며 당혹스러움을 자아내는 행태 등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백하지만, 모든 일벌들이 암컷임을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최후이자 최상의 지위를 자부한다. 자연을 깊이 관찰한 애호가일수록 자연 앞에서 인간의 부족함과 한계를 절감한다고들 한다. 대자연이라는 호칭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외경과 겸허함을 드러내는 존칭이다. 마테를링크도 마찬가지다. 꿀벌의 생태를 소개하는 틈틈이 그는 꿀벌의 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의견에 대항하여 꿀벌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과학적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꿀벌 종의 미래를 염두에 둔 것이 밝히고 있다. 그들과 대비할 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상대적 우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회의적이기조차 하다.

 

“나는 지금 다른 생물에게도 우리와 다른 어떤 지성이 있고, 그들이 우리에게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작은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정신적인 영역에 대해 그렇게 큰소리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다.” (P.37)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할 때에도 꿀벌에 대해 말한 것 이상의 것을 말할 권리가 없다. 우리도 어쩌면 단순히 고통에 대한 공포, 쾌락에 대한 이끌림을 따르고 있을 뿔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우리가 지성이라 부르는 것 역시 동물의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기원이나 사명에서 다르지 않다.” (P.51)

 

꿀벌의 속성 중에서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은 매우 철저하다. 집단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면 무수한 희생도 그들은 기꺼이 감내하는 듯하다. 그 무자비함은 진화 단계에서 일정부분 불가피한 측면을 지니지만, 지나치게 무게중심을 두면 인류가 겪은 전체주의의 악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기본 가치는 개인과 사회의 적절한 조화와 배분에 있다.

 

작가는 꿀벌 사회를 지탱하는 집단의지를 ‘꿀벌의 정신’으로 부른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성체계처럼 작동하여 개개의 꿀벌들이 벌집의 번영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끝내는 자아 희생을 감내하도록 통제한다.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터무니없고 비이성적으로 비치겠지만 섣부른 비난과 멸시를 퍼붓지 말자고 한다. 인간보다 더 크고 우월한 외계의 이방인이 우리를 관찰할 때 인간도 결코 꿀벌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 이해는 편협하며 단편적이다. 현상의 일면 만을 흘끗 보아놓고 마치 핵심을 간취한 것처럼 기고만장해서는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기에 바쁘다. 인간을 제외한 타 동물, 특히 곤충류는 이성적인 고민 없이 전적으로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적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도처에서 인간을 뛰어 넘는다. 인간이 자족하고 방심하는 순간 자연은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변이성을 보여준다. 자연 법칙은 인간 의도에 부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종(種)의 생존과 불멸을 위해 꿀벌은, 자연은 지고의 노력을 경주한다. 인간의 평가에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

 

“꿀벌은 여름의 영혼이다. 꿀벌은 풍요의 시기를 알리는 시계다. 가볍게 날아다니며 향기를 내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날개다. 그리고 춤을 추는 지혜로운 빛이고, 흔들리는 빛의 속삭임이며, 몸을 쭉 뻗고 엎드려 쉬는 대기의 노래다. 그녀들이 나는 모습은 진정한 환희, 눈에 보이는 작고 확실한 음표다.” (P.42)

 

작가의 꿀벌 찬미는 아름다운 애정으로 가득하다. 애정은 꿀벌의 행동 양식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솔직한 이해에 토대를 두었다. 마테를링크는 자연과학적인 꿀벌의 한계와 약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부풀린 기대와 헛된 희망을 자신의 애정물에 불어넣지 않는다. 꿀벌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면서 그녀들을 사랑한다. 조심스레 단언컨대 인간끼리의 바람직한 사랑 방식도 이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의 의도와 문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번역에 임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로 자자한 작가의 명성을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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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 신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9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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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로 소위 대중미술서로 대박을 친 저자의 후속작이다. 예기치 않은 전작의 성공을 거둔 저자는 다음 저작을 쓰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전작과 유사하되 식상하지 않으면서 재판의 혐의를 피하는 묘책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무난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후속작이다. 상대적으로 참신성과 혁신성은 떨어지지만  좀 더 진지한 이론적 면모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 회화를 넘어선 여러 미술 장르의 관심도 보여준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사안이다. 그림에 대해서 사전 및 배경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하여도 그림이 저절로 가슴 속에 확 다가오지는 않는다. 화가 및 작가들의 반복되는 습작과 운동선수들의 끊임없는 연습처럼 체화시켜야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 감상에서 행하는 것은 실제 감상행위를 가리킨다. 그림을, 조각을, 건축을 보지 않고 감상능력이 증대될 것을 기대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알면 관심을 갖게 되고, 다음 수순으로 자주 접하다 보면 더 잘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잘 봐야죠. 귀 기울여야죠. 어느 순간 보이는 것이 전과 다르고, 들리는 것이 전과 다른, 돈오의 경지가 옵니다.” (<잘 보고 잘 듣자>에서)

 

동양화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인간의 의의는 분명 서양화와는 다르다. 저자의 설명처럼 산수화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산과 물 뿐만 아니라 어진 자와 슬기로운 자를 의인화[요산요수(樂山樂水)]하고 있다. 산수화는 산수를 그리되 심상화된 산수를 그린다는 것이다. 심상 또는 뜻, 정신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옛 초상화는 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압도적으로 강인한 표현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전신(傳神), 즉 이형사신(以形寫神)을 매우 중시한다. (<정신을 그리다> & <초상화의 삼베 맛>에서) 외모를 초상화 주인공의 입맛과 지위에 걸맞게 잘 꾸미는 게 아니라 생생한 내면세계를 얼굴에 여하히 잘 불러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외적, 내적 가면을 벗어던진 소위 생얼의 재현이 지상목표였다는 것이다. <송인명 초상>과 <유척기 초상>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회화에서 문화적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지닌 미적 감정은 소속된 생활 공동체의 지배적인 관념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집적이 은연중 투사되기 마련이다. 그림 속 잉어는 출세를, 해오라기와 연꽃은 과거급제를 상징하는 것은 문화코드를 모르면 도저히 함의를 파악할 재간이 없다. (<물고기와 새>에서) 단원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와 조숙의 <숙조도(宿鳥圖)>를 관통하는 정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거칠고, 성글고, 스산하고, 허허로운 맛이다. (<가난한 숫에 뜬 달> & <조선의 텃새>에서)

 

노력을 요할지라도 보면 읽히는 그림은 얼마나 행복한가. 장승업의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나 유운홍의 <부신독서도(負薪讀書圖)>처럼 스토리가 있는 그림은 이야기를 파악하면 더 이상 생경하지 않다. (<음풍과 열정> & <보면 읽힌다>에서) 뚜렷한 이야기가 없더라도 감상하는 나와 그림 간에 대화가 가능한 작품도 존재한다. 이때 그림은 더 이상 낯선 타인이 아니다.

 

20세기에 발흥한 추상화는 여전히 난해하고 당혹스럽다. 추상화는 그림과 감상자 간 이야기와 대화를 스스로 거부한다. 추상화에는 그림 속의 대상(인물, 사물 등)이 부재한다. 회화 자체의 자율적인 존재가치를 부르짖는 것이 추상화다. 도구, 표현, 색채, 구도 등에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림의 본질과 화면의 자율성을 인정한다. (<화면이여, 말하라> & <달걀 그림에 달걀이 없다>에서) 그림이 본래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색채가, 화면의 배치가,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면 표현 기법 자체가 비로소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주목 받는다. 무엇이 회화의 본질인지는 미지수다. 소위 형식과 내용의 고전적 갈등의 전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과도한 구상중심주의에 대한 극단적 반작용이 추상화로 드러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술에 있어서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의 독자적 가치와 생명력의 영속성에 대한 주장이 지속적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림이 나날이 어려워지고 이해 불가능하게 되면서 그림보다 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기현상이 생겼다. 아무도 정답을 모르므로 큰 목소리로 남보다 먼저 외치는 사람이 해석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예술의 감상과 비평은 독단과 편애의 결과라고 한다. (<불확실한 것이 만든 확실 – 서원> &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하물며 추상화의 영역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인의 유언과 찬미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자신 만의 안목을 가지고 찬찬히 살피고 주의 깊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좋은 그림을 구별하고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미술 젓가락 사용법>에서) 외화내빈하는 겉치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제대로 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울러 과도한 의미와 상찬을 덧붙이는 데도 있다. 옹기도, 전통 기와도 우리네 시대에 와서 슬픈 운명을 맞이하였다. (<생활을 빼앗긴 생활용기 – 옹기> & <그저 그러할 따름 – 기와>에서) 반대로 물 건너간 막사발은 다완으로 승격하여 일본의 다도를 완성한 선승 센노 리큐의 깊은 철학적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일본의 국보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과 유적(幽寂)의 미학이라고 한다. (<물 건너간 막사발 – 다완>에서)

 

미술(또는 예술)의 역할 내지 위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미술은 높이 떠받들고 외경해야 할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네와 더불어 일상 속에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게 마땅한 존재인가. (<말과 그림이 싸우다>에서) 무엇이 우리네 삶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해줄 것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네 민화 재발견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저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덜 세련된 것이 주는 만만함과 예상에서 벗어난 일탈, 그곳에서 솟아나는 유머와 너름새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라도 다 즐거운 감동을 안기나 봅니다.” (<어리숙한 그림의 너름새>에서)

 

이쯤에서 저자가 극찬한 최순우의 글을 읽고 싶다. (<‘봄 그림’을 봄> & <아름다움에 살다 아름다움에 가다>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아는 눈과 느끼는 마음을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서나마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은 소박한 바램을 터무니없는 과욕으로 치부해버릴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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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코트 심해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이수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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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가스대>는 <잃어버린 세계>의 후속작이다. 챌린저 박사를 포함한 주요인물 4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챌린저 시리즈의 하나다. 분량 상으로는 중편에 해당한다. 시간적으로는 전작의 수년 후, 장소는 런던과 근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스펙트럼의 프라운호퍼 선이 흐릿하게 보이는 현상에서 에테르의 변화를 추론하고 이것이 지구상의 생명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으로 예측하는 챌린저 교수의 주장은 거침없는 쾌도난마와도 같다.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이후에 전개되는 모골이 송연하고 오금이 저리는 인류역사상의 일대 재난을 경험하게 된다. 작가의 비길 데 없는 장점, 즉 독자를 자신의 글에 몰입시키는 능력은 여전하다. 일견 평범한 글쓰기로 오인될 수 있지만 점층되는 긴장의 제고와 심화되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증폭되는 이야기의 재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챌린저 박사가 말하는 에테르는 서양의 근대 과학사 및 철학사에서 한때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개념이다. 코난 도일의 당대에는 다소간 생명력을 유지하였으나 아인슈타인 이후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빛이 전해지는 매질, 항성으로부터 항성으로 퍼져 있으며 전 우주에 고루 퍼져 있는 미세한 에테르의 변화일 수 있을 것이오. 우리는 에테르의 대양 깊숙이에서 느린 해류를 타고 떠다니고 있소.” (P.159)

 

에테르의 변화로 발생한 교란은 모든 사람에게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며, 그것은 사람들의 언행이 평소와 달라진 점이다.
“오늘은 모든 게 이상해 보였다. 모두가 기묘하고 예기치 않은 말을 했다. 꿈 속 같았다.” (P.172)

 

코난 도일이 전 인류의 절멸이라는 거대하고 극단적인 현상을 제기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는 점은 챌린저 교수와 서멀리 교수의 언쟁 속에 나타난다. 지구상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최후의,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독단 혹은 독선일 수 있다. 인간은 자연과 타 생명체 앞에서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한바탕의 끔찍한 해프닝으로 결론 났지만, 작가가 굳이 ‘위대한 각성’이라고 표현한 연유가 있다. 유사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인류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은 이 작품이 발표된 지 불과 일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독가스대와도 같은 재난과 마주쳤다.

 

같은 영국을 배경으로 한 단편 <하늘의 공포>는 순전한 상상력이 더 가미된 작품이다. 조이스 암스트롱이라는 비행사의 유고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3만 피트 이상의 특정한 상층 대기(작가가 공중 정글이라고 표현하는) 속에 존재하는 괴물을 다룬다. 대기 상층부는 물론이고 대기를 벗어난 우주 탐사가 빈번해진 현시점에서는 가정의 근거 자체가 희박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아직은 비행기의 이용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성능도 취약한 시절임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독자에게는 충분히 실감나게 다가왔을 소재일 것이다.

 

코난 도일은 여기서 비행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보여준다. 단발기가 서서히 고도를 높이면서 조종사가 받는 인상과 겪게 되는 현상이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점층적으로 긴장을 높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상당히 긴 비행 대목은 분량 면에서도 또한 작가가 기울인 공력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미지의 존재나 현상에 공포를 품는다. 밤, 심해, 정글, 죽음과 사후 세계 및 영혼 등. 여기에 하늘과 우주를 추가하더라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알지 못하는 것은 친구인지 적인지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최선보다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코난 도일은 인간의 약점과 본능의 틈을 잘 헤집고 들어간다.

 

<마라코트 심해>는 작가의 말기작이다. 서양의 아틀란티스 전설과 심령학을 교묘하게 결합한 경장편 분량의 해양 모험소설에 해당한다. 마라코트 박사와 화자이자 필자인 헤들리, 기계공 스캔런이 모험을 겪는 인물이다. 창조된 캐릭터는 챌린저 시리즈의 4인방에 비하면 개성과 매력도가 뒤떨어진다. 과학소설의 조건 중 하나인 과학적 근거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해저 2만5천 피트 아래의 심해를 일반적인 강철로 제작한 탐사선을 타고 내려갈 수 있으며, 그곳에서 사람이 특수 장비 없이 유영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작가는 마라코트 박사의 입을 빌어 압력이 의외로 심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 한편 심해가 원생생물의 부패로 인한 가스 빛으로 의외로 어둡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참신한 맛이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심해의 온갖 기괴한 생물을 상상에서 현실로 불러오는 신기함과 호기심에 있다. 게와 바다가재의 중간형태의 거대한 생물, 거대한 담요고기, 몸길이 30피트의 검정 가오리, 길이 200피트 정도는 되는 바다뱀, 녹색 도끼비불 같은 프락사, 거대한 전기 바다 민달팽이, 심해판 피라냐인 하이드롭스 페록스 등. 그리고 아틀란티스 전설. 일찍이 플라톤이 제기한 전설은 곧 잃어버린 고대 문명과 결부되어 강인한 생명력을 현재까지 드리우고 있다. 철학자 베이컨도 관련 저작을 남긴 바 있다. 도일은 아틀란티스의 풍요와 타락, 그리고 최후를 사고 영상의 형식을 빌려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살아남은 후손들이 건설한 심해의 아틀란티스의 묘사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 7장은 ‘검은 얼굴의 군주’와의 대결이다. 말년에 코난 도일이 심취한 심령학의 영향이 여기서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아틀란티스를 파멸로 몰고 갔던 악마가 거대한 폐허의 신전에서 되살아나서 고대문명의 후손마저 절멸시키려고 한다. 흑마법과 백마법의 대결이라!

 

코난 도일은 종종 작품 속에서 당대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아틀란티스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교훈을 끌어낸다. 이것이 양차 세계대전을 사이에 둔 유럽의 정세를 감안할 때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과민한 소치인가.

 

“아틀란티스 인들의 흥성과 몰락으로부터 배운 교훈은, 국가에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그 지력이 영혼은 앞지를 때 온다는 것이다. 이 구문명을 파멸시킨 것은 바로 그러한 위험이었고, 어쩌면 우리의 종언 또한 그런 식으로 닥칠지 모른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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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호의 모험 - 황금양피를 찾아 떠난 그리스 신화의 영웅 55인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 지음, 김원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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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기원전 2세기의 인물이다. 희랍어로 씌어진 서사시로서 원문은 총 5,385행으로 <일리아스>의 3분의 1 분량이라고 한다. 희랍 원전을 번역하였는데 내용 전달하여 주력하여 현대적 산문형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장중한 고전 운문체의 느낌 대신 에피소드가 곁들여진 한바탕 모험담의 인상이 강하다. 이는 옮긴이의 의도라고 하겠는데 조금이나마 더 독자에게 친숙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2005년 이 번역본에 이어 2010년에 강대진 번역본도 출간되었는데, 책소개에 따르면 보다 원전에 충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레퍼런스로 삼기 위한 목적이리라. 이 김원익 번역본의 장점은 먼저 서두에 30여 면에 달하는 충실한 해설에 있다. 작가에 대하여, 작품에 대하여 아무래도 생소한 이들을 위하여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희랍 신화의 한 영역에 포괄된다. 황금양피를 찾기 위한 모험은 아폴로니오스의 창작이 아니다. 희랍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작품 해독에 어려움을 느끼고 지속적 흥미를 갖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지도다! 신화적이거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저작에서는 지도는 필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막연히 낯선 지명을 쭉 나열하면서 전개되는 사건 및 활동들을 막무가내로 쏟아놓는 것은 독자에 대한 실례다. 충실한 지도는 직관적 내용 이해와 심화 인식에 크게 유용할뿐더러 암흑의 바다에서 독자를 구조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아르고호의 원정로를 따라 희랍과 흑해 주변, 그리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전도는 아르고호 모험의 스케일과 고난의 깊이를 생생하게 입증한다. 실로 아르고호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3개 대륙에 걸친 모험을 떠난 것이다.

 

55인의 영웅들이 가져오고자 하는 황금양피의 정체가 궁금하다. 무슨 대단한 보물이기에 온 희랍의 영웅들이 집결하여 그 물건을 찾고자 온갖 고난을 무릅쓰는 모험을 감행할 정도인가. 황금양은 계모에게 곤경당하는 프릭소스 남매를 구하기 위하여 제우스가 보내준 신성한 동물이며, 나중에 제물로 바쳐졌다. 그 양피는 프릭소스가 자신을 거두어 준 콜키스의 아이에테스 왕에게 선물로 주었다. 백번 생각해 보아도 황금양피는 희랍의 것이 아니며 타국의 것을 무력을 불사하면서까지 가져가고자 하는 것은 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더욱이 양피에 무슨 비상한 능력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왕권, 태양 또는 부의 상징 등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존재하는데 신빙성이 높지 않다.

 

원정대의 대장은 아이손의 아들 이아손이며, 그는 헤라 여신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영웅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그를 포함한 소위 영웅들이 정말 영웅이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여색에 쉽게 빠지고(렘노스 섬을 봐라) 위험과 난관 앞에서는 사기가 축 쳐져서 소심하게 구는 그들이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이기조차 하다. 특히 아이에테스를 두려워하여 쩔쩔매며 비겁하게 처신하는 장면은 가관이다. 작가도 몇몇 대목에서 이아손을 교활하다고 표현한다.

 

메데이아의 사랑과 도움이 없었다면 아르고 호의 모험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솔직히 이아손의 업적 보다 메데이아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청동 황소의 불길도 무력화시키고, 뱀의 이빨을 뿌려 땅에서 솟아나온 병사들을 물리친 것도 모두 메데이아의 마법과 조언 덕택이다. 황금양피를 지키는 용을 잠재운 것도 메데이아였다. 메데이아가 아버지와 동족, 그리고 조국을 버리고 이아손을 따라나선 것은 에로스의 화살이 불러일으킨 사랑의 힘이다. 아폴로니오스는 특히 메데이아의 사랑의 심리 묘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후에 메데이아는 희랍 신화에서 제일가는 악녀로 지탄받는다. 그녀는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오빠를 죽였으며, 사랑의 배신에 절망하여 자신의 두 아들을 죽였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건 메데이아에게 이아손의 배신은 감내할 수 없는 분노와 치욕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아손 보다는 메데이아를 탓하는 것은 희랍신화의 남성우위의 가부장적 구조에 기인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작품에서는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혼인까지만 내용이 전개된다.

 

지도의 원정로를 짚어가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아르고 호의 모험담이 여정의 길이를 감안할 때 매우 불균형하게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원정 여정은 이렇다. 희랍 중부의 이올코스를 출발한 아르고 호는 헬레스폰토스와 보스포로스를 지나서 흑해에 진입한다. 아나톨리아 반도 북부 해안을 따라서 동진하여 흑해 동안의 콜키스에 도착한다. 귀로는 콜키스에서 아나톨리아 반도 해안 중간까지는 동일하다. 이후 흑해를 가로질러 이스트로스강[다뉴브강] 하구로 진입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아드리아해로 빠져 나온다. 다시 바람에 밀려 지중해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에리다노스강[포강]을 거슬러 올라간 후 알프스의 호수에서 프랑스의 로다노스강[론강]을 통해 지중해로 나온다. 이후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거쳐 희랍 서안에 다가가지만 역시 바람에 밀려 아프리카의 리비아로 상륙하여 고생하다가 간신히 신의 도움으로 출발지 이올코스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두 여로를 비교해보자. 길이와 난이도를 감안할 때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비희랍은 그리 관심이 없는 듯 간략한 분량만을 기술에 할애하고 있다.

 

솔직히 아르고 호보다도 더 대단하고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아이에테스의 추격대다. 일대는 아르고 호를 따라서 이스트로스강을 앞질러 가기도 하였으며, 다른 일대는 보스포로스를 거쳐 희랍 근해에서 아르고 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로써 콜키스의 아이에테스의 강대한 위세와 막강한 권위를 짐작케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르고 호는 귀환하였고 영웅들도 일부 손실을 겪었지만 임무를 완수하였다. 제우스와 헤라의 분노는 가라앉았고 그들의 정의는 회복되었다. 이 시점에서 묻고 싶다. 아르고 호 모험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는지를. 그들이 겪고 무릅쓰고 헤쳐 나온 위험과 고난이 나타내는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단순한 모험심에서 그들이 배를 띄운 것은 아니다. 지리상의 발견을 위한 것도 더더욱 아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의 불가측하고 불가해한 운명을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의 위력도 신의 행위라고 수용하였다. 신이 먼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필요에 의해서 신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도 있다. 운명과 자연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제아무리 위대한 영웅일지라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인 것처럼.

 

친절한 돌리오네스인들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게 되어 이아손은 키지코스 왕의 가슴에 창을 꽂았다. 이 대목에서 작가의 탄식을 보자.
“인간은 절대로 이런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커다란 운명의 그물이 쳐져 있다. 키지코스도 영웅들과 싸우던 그날 밤 바로 그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P.98)

 

메데이아가 자신을 추격한 오빠 압시르코스를 죽이기 위하여 계책을 꾸미는 장면에서 아폴로니오스는 이렇게 외친다.
“무정한 에로스여,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증오의 씨앗을 뿌리십니까! 당신으로부터 끔찍한 불화와 탄식과 불평뿐 아니라, 다른 숱한 고통들로 비롯됩니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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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세계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
아서 코난 도일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코난 도일 경이 수편의 모험소설을 썼다니 흥미롭기 그지없다. 더욱이 후대에 지속적 영향과 자극을 주어 마이클 크라이튼은 동명의 소설을 썼고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크라이튼의 작품을 토대로 유명한 <쥐라기 공원>을 제작하였다. 20세기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셜록 홈즈에 못지않았던 셈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소설은 사실상 매우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장르 특성 상 사실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독자들은 작가가 제시하고 인물들이 겪는 모험과 탐험이 어느 정도 그럴 듯하다고 여겨야 한다. 순전한 공상 내지 상상의 소산이라면 환상 내지 백일몽으로 치부해 버리기 쉽다. 게다가 소설로서의 요건상 문학적 상상력은 필수적이다. 사실성과 상상력이 인절미에 떡고물을 묻히듯 적당하게 어울려 있어야 독자는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재미는 대중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순수문학도 비록 의미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재미 가 미흡해서는 박물관의 유물이나 박제가 되고 만다. 당대 및 후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생생하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몰입도는 이처럼 중요하다.

 

남미 아마존 강 상류 유역 어딘가로 설정한 지리적 배경은 현시점에서 보면 신빙성도 떨어지고 시대착오적이다. 코난 도일이 이 작품을 발표한 게 1912년, 이미 백 년 전이다.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당시의 지리적 인식 수준과 과학적 지식 역량의 한계를 인지한 상태에서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점만 유념하면 의외로 상당한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책을 펼쳐드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딱 고정시키는 능력이 정말로 탁월하다. 스토리텔러로서 코난 도일의 역량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쥐라기 공원>에 익숙한 독자의 시각에 익룡을 제외한 육지 공룡은 정작 초식공룡 이구아노돈과 스테고사우루스만 등장하여 심심하기는 하다. 커다란 두꺼비 같은 무시무시한 정체모를 공룡류가 등장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티라노사우루스나 알로사우루스, 아니면 벨로시랩터 등은 나오지 않는다.

 

작품 후반부의 주요 사건은 원인류와 현대 인디언 부족 간의 생사를 건 종(種)의 전쟁이다. 인간의 승리로 끝나는 전투의 결말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미묘하다. 진화론에 입각한 우세한 종의 승리에 대한 찬미인지, 아니면 냉소적 희화화일지.

 

“수많은 세대에 걸친 숙원과, 협소한 역사 속에서 펼쳐진 증오와 학살, 박해와 학대의 모든 기억이 하루만에 통째로 불식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영장(靈長)의 자리에 올랐고, 수인(獸人)들은 자신의 위치를 감수하게 되었다.” (P.260)

 

작품의 내용 외에 명확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협력, 성격과 행동의 뚜렷한 대비 등이 작품에 다채로움과 다이내믹을 더해 준다. 챌린저 교수와 서멀리 교수는 체격과 외모, 성격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이지만, 풍부한 학문적 역량을 통해 작품의 과학적 지식 제공에 큰 기여를 한다. 록스턴 경은 탐험단의 실질적 대장이라고 할 정도로, 학문적 영역을 제외한 분야에서 그의 존재와 역할이 없었더라면 탐험단은 진작에 괴멸되었을 정도다. 그의 거의 완벽하다시피 한 (사냥과 스포츠 등에서) 역량은 오히려 비현실적이기조차 하다. 화자인 멀론은 기자로서 탐험단의 기록을 담당한다. 탐험단의 발견 성과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수인데 직업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미식축구 선수인 그의 신체적 능력 또한 탐험을 위해서는 최적이라고 하겠다.

 

록스턴 경이 가져온 값진 다이아몬드를 분배하며 작가는 독자에게 속편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모험광 록스턴 경은 재차 잃어버린 세계를 방문할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실연당한 멀론은 주저할 필요가 없다. 후대 많은 소설과 영화 등에서 상투적 수법으로 자리 잡게 된 여운을 남기는 장치를 이렇게 코난 도일은 앞서 써먹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감내하고 떠나려고 하는 걸까? 극지 정복, 최고봉 등정, 사막 횡단, 심해 탐사 같은 고전적 유형을 떠나서 알프스에서 산악자전거 타기, 스카이다이빙 등의 소위 익스트림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긴 가까이는 테마파크에서 자이로드롭이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 바로 그 멋진 위험이야말로 삶의 소금이라고 할 만한 존재야. 그걸 다시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살아갈 가치가 있는 거지. 우리 모두 너무 부드럽고 지루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어. 광활한 황무지와 넓은 공간 만 주어진다면, 나는 언제든지 손에 총을 쥐고 발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나설 용의가 있네.” (P.95)

 

존 록스턴 경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는 노마드에 대한 갈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섣불리 부인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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