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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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돈키호테 1부를 읽은 후의 짤막한 상념들

 

먼저 이 촌평은 114일에 쓴 것이다. 한동안 뭉그적거리다 마음을 다잡고 단숨에 초고를 어지럽게 적어놓았는데, 일단 생각난 바를 대강 쏟아놓은 후 차츰 틀을 잡아 정리를 해나갈 의도였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생각대로 되던가. 어찌어찌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보니 두 달쯤 시간이 경과하게 되었다. 다시 읽어보니 한심할 정도로 형편없게 느껴지지만 이제 독서에 대한 상념도 오락가락 하는 사정인지라 다시 가다듬는다는 게 터무니없을 것 같아 그냥 초고 그대로를 수록한다. 그래야 책상 한구석에 놓인 책도 치울 수 있을 것이며 내 마음도 찜찜함을 덜 수 있을 것이다.

 

      

1. 구입한 지 거의 십년이 다되어 읽다. 그리고 읽은 지 3개월가량 지나 겨우 촌평을 쓰다. 아니 이것은 촌평이 아니라 차라리 넋두리다. 백에 구십구 인이 좋다고 하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일인이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조심조심 토로한다. 임금님 귀의 진실을 숲에서 외치는 심정으로.

 

2. 중학교 때 헌책방에서 구한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의 돈키호테를 읽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머릿속에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

 

3.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완독을 마친 소감은 흠, 글쎄, 뭔가 미진함. 솔직히 썩 만족스럽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4. 돈키호테를 제외한 국내 번역된 세르반테스의 주요 작품들은 거의 읽었다. 다른 작품들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느껴졌다. 세르반테스의 어법에 친숙하지 않아서라는 비판은 적절치 않다.

 

5. 역으로 세르반테스를 여럿 읽은 게 돈키호테의 매력을 감소시킨 게 아니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돈키호테는 세계문학사상 첫손 꼽히는 불후의 명작의 자격이 없다. 고전과 명작은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다.

 

6. 돈키호테의 뛰어남을 알아채지 못한 지적 수준이 낮은 독자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확실히 그럴 수도 있다. 문학 작품, 특히나 돈키호테처럼 해학적 재미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설의 경우 분석보다는 자체의 감흥을 중시한다. 문학의 가치는 일차적으로 감동(감명 또는 재미도 포함해서)이다. 분석과 비평은 후순위다.

 

7. 혹시 망설이지만 번역 상의 문제는 없을까? 이 대목에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번역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페인어문학자이며 세르반테스 연구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도 그가 번역한 세르반테스의 작품에서 불만을 느낀 적이 없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있다. 이것은 그의 전적으로 단독 번역이 아니라 대학원생들과 합동 번역이라는 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지연의 번역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김구용 번역본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줄 한줄 원문에 최대한 가깝게 꼼꼼하게 번역한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읽다 보면 내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는 건지 아니면 한문 고전을 읽는지 헷갈린다. 삼국지연의는 대중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면에서 이 책에서도 번역 자체에는 흠잡을 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 다만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출판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무수한 아류본을 양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중 친화적인 작품이라면 정통 고전 어투가 아니라 통속적이며 구어체적 요소가 강했을 것이라는 게 무리한 추론은 아니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완전히 배치된다.

 

결국 이 사항은 다른 번역본을 읽어야만 비교가 가능하다. 민용태 번역본을 잠깐 훑어보았다. 단독 번역에 구어적 어투를 반영하고 있다. 차후 이 번역본을 읽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이 일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독자의 함량 미달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판단 불가 상황이다.

 

8. 내용상으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1) 마르셀라 이야기 (P.168~169)

 

아름답기에 사랑받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초원에서의 고독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랑을 거절당한 그리소스토모가 죽자 친구 암브로시오는 마르셀라를 비난한다. 이에 대한 마르셀라의 답변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논리정연하다. 마르셀라의 외침은 여권주의의 구호를 수백 년 앞서 선구적이다.

 

2) 죄수들을 풀어준 이야기 (P.267)

 

강제로라고? 아니 국왕 폐하께서 무슨 일을 강제로 시키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죄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사람들이 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강요라는 것 아니냐?”

 

돈키호테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최우선시하고 있다. 국왕일지라도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 사회 정의를 무시하는 발언인 듯하지만, 여기에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기득권층과 지배층의 강압에 대한 반발심이 내재된 것이다.

 

3) 둘시네아 공주의 숭배 이유와 돈키호테의 이성 (P.327)

 

내가 둘시네아 델 토보소 공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은 나에게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공주님인 것이다......나 역시 알 돈사 로렌소라는 훌륭한 아가씨를 아름답고 정숙하다고 생각하고 믿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그저 내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공주님이라고 생각하면 될 뿐이다.”

 

돈키호테가 광기에 빠져서 농부 여인을 공주로 착각하여 숭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누군가 공주로 여겨서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이를 광기로 치부하지 말자.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상대방을 실제 이상으로 뛰어나고 아름답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하지 않는가. 주변에서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연인들도 부지기수다. 이들을 미쳤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자가 오히려 미친 사람이다.

 

4) 기사소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 (P.438)

 

기사소설에서 말하는 그 어떠한 기사들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소. 그 모든 것들은 한가로운데 창의력만 있는 사람들이 각색하고 꾸며낸 이야기이며, 일꾼들이 그 책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며 기분을 전환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오. 내 정말 당신에게 장담하건대, 그러한 기사들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무훈이나 터무니없는 사건들 역시 이 세상에서는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소.”

 

돈키호테의 표면적 집필이유는 유행하던 기사소설의 허구와 폐해를 알리기 위해서다. 이 부분은 이러한 집필이유가 명확히 드러난 대목이다. 15세기 스페인은 기사도 소설의 전성기였다. 이는 기울어가는 황금세기의 번영과 사치 아래 심화된 사회적 계급적 갈등을 짐짓 덮어두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피카레스크 소설이며, 돈키호테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허위와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5) 종교 경찰과 돈키호테의 대치 (P.639)

 

이리 오너라, 천박한 놈들아. 쇠사슬에 묶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붙잡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는 사람을 너희들은 노상강도라고 부르느냐? ,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고......이리 와라. 종교 경찰이 아닌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종교 경찰의 면허를 갖고 있는 노상 강도놈들아, 말해봐라.”

 

광인이 아니면 당대 스페인에서 종교 경찰에게 감히 욕설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 절대주의가 지배하며 이단으로 선언되면 화형에 처해지는 사회. 여기에서 개인의 신체와 양심의 자유는 어불성설이다. 돈키호테가 당대인들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범인들은 내뱉을 수 없는 불만들을 대놓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데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6)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이유와 그의 이성 (P.660)

 

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바람들지 않았습니다. 왕이라 해도 바람을 넣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저는 섬을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더 나쁜 것들을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일한 만큼 얻는 법입니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교황도 될 수 있고, 섬의 영주도 될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광기에 빠졌다는 말에 대해 산초 판사는 이렇게 반박한다. 누구나 불가능한 것을 꿈꿀 자유가 있고 때로는 그것이 삶의 목표와 활력이 되기도 한다. 매주 로또 복권을 구입하며 인생역전을 꿈꾸는 가난한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돈키호테를 따르는 것은 반복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망상에 가까울 수 있지만 보다 큰 꿈을 꾸기 위해서다.

 

7) 당대 연극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인식 (P.668~671)

 

연극이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거울이며 관습의 표본이며 진실의 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상연되고 있는 것들은 엉터리의 거울이고 우둔함의 표본이며 방탕함의 상입니다.”

훌륭한 연극을 보면 관객은 속임수를 즐기고, 진실을 배우며, 사건에 감동하고, 이성을 통해 분별력을 갖고 심한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모범적인 일에 명민해지며, 악에 분개하고 미덕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 광인 돈키호테를 바라보는 세인들의 인식 (P.703)

 

그는 돈키호테의 얼굴에 비오듯 주먹질을 해댔고, 그 가련한 기사의 얼굴은 목동처럼 피투성이가 되었다. 교회법 연구원과 신부는 웃음을 터뜨렸고, 경찰들은 즐거워 들썩들썩하면서 싸우느라 얽혀 있는 개들을 부추기듯 두 사람의 싸움을 부추겼다. 산초 판사만이 절망에 빠졌는데, 주인을 돕지 못하게 괴롭히는 참사원의 조수를 내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때리고 쥐어뜯으며 싸우는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환호와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것이 소위 이성을 갖춘 정상적인 사람들의 작태다. 그들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광인 취급하며 일말의 동정심을 품고 있지만 내면 한편에서는 기묘한 볼거리이자 놀림거리로 여기고 있다. 돈키호테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신부와 이발사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서는 산초 판사가 오히려 이성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광인은 누구고 제정신은 누구란 말인가. 세상이 술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난 사람은 미쳤는가 아닌가.

 

9) 작품해설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정상인이 아니라 광인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광인의 입을 빌어서 당시 교회와 성직자 귀족 등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조소함으로써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P.720)

 

세르반테스의 문학에는 사회 구석구석에 살고 있는 인문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제 세르반테스 시대의 사회는 귀족이나 부유한 상류층들만이 아니라 하류계급의 건달, 매춘부, 깡패, 이교도 등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하류계층의 인간들도 우리의 이웃이며, 이 세계를 꾸려가는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현대소설의 특징을 보여준다.” (P.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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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8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소화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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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한창이던 어느 날 문득 서릿발 같은 바람도 잠잠해지고 하늘도 맑게 갠데다 제법 햇볕도 온화한 기색이 깃들인다. 성미 급한 봄꽃들은 이제야 봄이 진군을 시작했나보다 서둘러 꽃망울을 터뜨리거나 부풀리기에 힘쓴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혹한이 휘몰아치고 칼날 같은 위세에 절로 옷깃을 여미기에 급급해진다. 여린 꽃잎들은 그대로 얼어서 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봄을 머금은 망울은 속절없이 얼어붙은 채 겨우내 소망이 부질없어진다.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던가. 아직 진정한 봄은 이르지 않았건만 봄을 기대하는 어린 영혼들은 거리에 뛰쳐나가 꽃샘추위에 몸을 덜덜 떨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을 읽는 심정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세 가지의 봄을 다루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상의 봄예술의 봄인생의 봄. 작가의 말이 어느 정도나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 소설은 봄 자체를 그린 소설이 아니다. 한겨울에 봄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젊은 영혼들의 울분과 좌절을 기술한 소설이라는 게 보다 적합한 의견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편을 면면히 흐르는 기조는 어둡고 차분하면서 가라앉은 분위기다. 멀리서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혀 알 수 없기에 희망도 빛도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기시모토의 방랑과 아오키의 발병으로 가시화된 겨울의 절정은 기시모토의 이루지 못한 죽을 결심과 아오키의 자결로 이어진다. 현실의 생기에 넘치는 봄과 인물들의 대비가 강렬하다.

 

방 밖에선 오후의 햇볕이 반짝이며 넘실거려서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거리의 수목들조차 지금은 새로운 잎으로 갈아입을 때로, 그 푸르고 밝은 색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셨다. 모든 만물은 생기에 넘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었다.” (P.229)

 

작품 전편의 주인공은 물론 기시모토 스데키치지만, 그의 비중은 전반부에서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전반부에서는 그의 문학적 친우들인 아오키, 스게, 이치카와의 신변과 사고가 보다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특히 아오키의 굵고 짧으면서도 강렬한 삶은 인상적이다.

 

아오키를 비롯한 친우들의 소망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19세기말 당대 일본이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 및 지성에서 보다 개화되고 계몽된 사회로 발전해 나가도록 자신들이 일조를 하고 그 성취를 목도하는데 있다. 하나 뿌리박힌 인습과 고루한 편견에 사로잡힌 세인들을 일거에 문화인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과업이었으면, 그들의 몰이해와 저속함에 고매한 이상과 깊은 감성을 지닌 젊은 영혼들의 좌절은 예견된 결과나 다름없었다. 세상은 그들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도록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오키는 분투하다가 꺾였”(p.264)으며, 다른 친우들도 각자 나름의 행로를 밞아나가게 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를 생각해야만 된다. 10, 20년 뒤에도 보일지 어떨지 모르는 청년의 꿈을 지금 보려고 해 봤자 그렇게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 (P.300)

 

함께 젊은 생명의 싹을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같은 마음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벌써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으로 각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는 왠지 슬펐다.” (P.306)

 

작중에서 기시모토의 방황은 분명한 사유를 드러내지 않는다. 은인의 집에서의 가출과 두 번에 걸친 방랑이 참을 수 없는 당대에 대한 반기의 의사표시 또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처절한 위안의 발로라고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 <><파계>의 성공 이후 발표된 작품임에도 그의 중요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단초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전편을 관통하는 기시모토의 애매한 행위의 모호한 동기. 반면 기시모토의 심경을 다르게 파악해 볼 수도 있다. 그는 작중에서 문학과 미술에 다소간 재능을 가졌으며 원체 다정다감하여 눈물을 곧잘 흘리며 연약한 의지력을 지닌 인물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말수가 적은 것으로 묘사된다.

 

전반부의 열의에 찬 청년들의 격정적이며 확고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서는 무게중심이 기시모토의 진퇴양난의 처지와 우유부단한 내적인 고민으로 침잠한다. 맏형의 수감으로 졸지에 집안 생계를 떠맡게 된 기시모토의 분투와 괴로움.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는 아직 미숙한 청년에 불과하며 삶의 최전선에 뛰어들고자 하는 의사도 취약하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마저 포기하면 가족들은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기시모토는 가쓰코의 죽음을 듣고 더욱 침울해졌다. 어느 때는 일할 마음도 없었다. 때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있었다. 형수가 있었다. 불행한 형이 있었다. 아이코가 있었다. 그가 일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먹는 것조차 곤란하다.” (P.294)

 

식구들은 구할 수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P.315)

 

반면 아오키의 분사에 자극받은 그의 정신은 포도청 같은 나날의 생계를 떠나서 확고한 방향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이상과 영혼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가도록 요구한다. 가족에 대한 의무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대한 갈망의 상충이 빚어내는 긴장과 갈등, 고뇌와 가쓰코의 사망에 따른 심적인 동요와 상실감은 기시모토를 점점 외지고 깊은 곳으로 가라앉게 만든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과거의 추억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하나 천진한 어린 시절의 허위성만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케노하타라면 이전에는 날아서라도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점차 기시모토의 발길이 뜸해졌다. 가도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에 재미가 없었다. 언제나 잠자코 물러앉아 있다 온다.” (P.298)

 

그는 많은 것들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P.316)

 

작품의 말미는 다소간 싱겁다. 그는 센다이의 학교 교사로 떠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가족의 생활비는 멀리 있는 둘째형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개인의 독립과 발전을 도와주지 못하는 가족의 족쇄, 꽉 조여 오며 벗어날 길 없을 것처럼 단단한 수갑을 작가는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벗겨낸다. 기시모토의 그동안의 처절한 고민과 심적 전투가 읽는 이로 하여금 무안할 지경으로.

 

, 나 같은 인간이라도 어떻게든지 살고 싶다.” (P.370)

 

끝 대목에서 차창 밖을 스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읊조리는 기시모토의 생각이다. 혹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년들이여, 아무리 절망과 좌절이 깊더라도 결코 자신을 버리거나 버리지 말라. 당장은 봄이 이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라도 인내하고 버티어 살아가다 보면 가까운 시일에 봄이 성큼 다가옴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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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 다른 세상으로 나 있는 창문을 보여주는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5
제인 오스틴 지음, 신미향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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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제인 오스틴에게,

 

겨우 마흔을 넘어 불귀의 객이 된 당신의 작품들 가운데 유작으로 출판된 작품이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지요. 이 둘은 집필된 시기를 보면 사실 매우 커다란 간극을 보여주는데, 전자는 처녀작 또는 습작이라고 해도 무방한 반면, 후자는 거의 말년에 쓴 작품이니까요.

 

제가 예전에 쓴 당신의 소설들에 대한 촌평을 보면 알겠지만, 초기에는 당신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제한된 배경과, 반복되는 소재, 그리고 유사한 구성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와 반짝이는 문체는 평가하지만요. 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점차로 당신의 작품들에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우리에게는 한 명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만 필요합니다. 제2, 제3의 세르반테스는 달갑지 않습니다. 프루스트와 조이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런 면에서 미스 제인 오스틴, 당신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합니다. 상투적이라는 말은 곧 보편적임을 가리키지요. 상투적이지만 진부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희노애락의 표현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이 소설을 당신의 후기 걸작들과 나란히 놓고 비평한다면 지나치게 가혹한 행위이겠지요. 당신의 정교한 개작의 손길을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한 작품이니까요. <노생거 사원>은 사실 대가 제인 오스틴의 풋내기 시절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싱싱한 날것의 묘미를 느낄 수 있지요, 훗날의 프로페셔널 소설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설프고 설익은 듯하지만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충만하고, 소녀적 감성이 깃들어 있으며 확고한 자기주장도 펼 줄 아는 그런 당신의 윤곽이 작품 내에 어른거립니다.

 

작중 여주인공 캐서린은 나이에 비해 올바른 사리분별을 갖춘 모범적인 아가씨로 묘사됩니다. 이는 친구였던 이사벨라의 숨겨진 경박성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는 미덕이기도 합니다. 그런 캐서린의 유일한 약점은 고딕 기담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래드클리프 부인의 우돌포에 홀딱 정신이 빠져든 장면이 작중에 기술될 정도니까요. (이 장면을 통해 보면 당신 역시도 고딕 기담에 제법 관심이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캐서린이 노생거 사원에 머물게 되면서 증세는 더욱 심해집니다.

 

“상처 입은 불행한 영혼의 수녀에 대한 끔찍한 기록들과 오래된 전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P.173)

 

자신이 머물게 된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여는 대목, 역시 방에 놓여있던 아주 오래되고 커다란 옷장의 서랍에서 발견한 종이 뭉치 에피소드, 이렇게 그녀의 공상과 상상은 증폭되다가 종내에는 틸니 부인의 방에서 뭔가 끔찍한 범죄의 흔적을 찾으려는 모험으로 이어지지요. 그러다가 틸니 씨와 딱 마주치게 되지요.

 

“몰랜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P.247)

 

위의 질타는 고딕 기담에 매혹되어 정신을 잃은 모든 독자를 향한 선승이 내려치는 죽비의 일타와도 같은 것입니다. 캐서린도 환한 대낮에는 간밤의 자신의 행동이 터무니없음을 깨닫지만 어찌할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순간적으로 이성이 흐려지게 된 것입니다.

 

“어제 한 상상들은 그야말로 너무 어리석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현대적으로 잘 꾸며 놓고 항상 사람이 드나드는 방에서 이상한 내용의 종이가 발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고 상상한 거나 누구라도 열 수 있도록 열쇠까지 마련되어 있는 옷장을 자신이 처음으로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P.215)

 

“생각은 아직 그런 근거 없는 공포로 인해 느끼고 행동했던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그 모든 생각이 자위적이었고 스스로 만들어 낸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너무도 자명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중요한 것으로 지레짐작해 받아들이고 사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두려움이나 공포를 갈망하고 있었던 탓에 모든 일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P.249)

 

그래도 캐서린 정도나 되니까 이쯤에서 올바른 각성을 했다고 봅니다. 당대에 고딕 소설에 푹빠져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으며 이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도 당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한편 바스에서 만난 소프 남매는 당시 최고의 행운으로 치부하였으나 훗날 되돌아보면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음이 드러나지요.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인색하고 이기적인”(P.121)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개념이 전혀 없음이 클리프턴 소풍을 캐서린에게 강요하는 대목에서 극적으로 노정됩니다. 이 대목에서 착잡한 심경이 드는 이유는 현대에도 이런 부류가 사회의 주류로 득세하고 있음에서입니다. 이들은 교묘한 언변과 흠잡을 데 없는 예의범절, 그리고 뛰어난 사교성으로 존경받을 사람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타인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밟고 올라서거나 이용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만면에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말솜씨와 세련된 태도로 상대하다가 한순간에 냉혹한 표정으로 찬바람 나게 등을 돌려버리고 마니까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캐서린의 과단성과 확고한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그래도 가야겠어요. 지금 어디에 있든 가서 만나야 해요.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제 판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도록 설득당하지 않아야 잘못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라고요.” (P.125)

 

이 대목은 그녀의 두드러진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소설 주인공으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녀와 소프 남매와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한 관계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노생거 사원>은 이밖에도 흥미로운 특징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의도인지 아니면 미숙성의 반영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다른 데서 찾기 어려운 색다른 재미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당신의 소설 옹호론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당대 비평가들의 근시안적인 졸렬한 비평과 독자들의 위선적인 이중적 태도를 함께 비판하고 있지요. 작가인 당신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린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내놓은 작품들이 세상 그 어떤 분야의 작품보다 열렬하고 진솔한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지만, 지금까지 소설만큼 많은 비난을 받은 분야는 거의 없다.” (P.38)

 

또한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작가의 직접적 개입과 어조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역시 다른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입니다. 작가는 인물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캐서린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꾼 또는 변사의 역할을 자처합니다. 필요할 경우 흐름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의도와 판단을 독자에게 직접 밝힘으로써 작품 전개와 독자의 이해를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려는 것이 당신의 의도라고 이해됩니다만.

 

“다음 페이지부터 시작될 바스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모험으로 들어가기 전에, 독자들이 주인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캐서린의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P.12)

 

“그렇다, 소설! 필자는 자신들이 창작해낸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경멸을 섞어 비난하는 일부 소설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색하고 졸렬한 태도는 결코 취하지 않을 것이다.” (P.38)

 

“그렇지만 내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나의 주인공은 혼자서 치욕스러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도저히 행복한 분위기를 묘사할 수 없는 상황이다.” (P.292)

 

제인 오스틴 양, 이 소설은 이미 서두에서 밝혔듯이 후기 작품들에 비하면 분명히 어설픈 점이 존재합니다. 구성과 문체 면에서 보이는 약점을 굳이 옹호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키지는 못합니다. 남성 주인공 틸니 씨의 개성이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독자는 나이어린 캐서린이야말로 뚜렷한 독자적 개성을 지닌 인물임을 발견할 수 있지요. 여기에 후기작들에서는 볼 수 없는 작가인 당신의 적극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하나의 흥밋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당신은 때 이른 죽음으로 미처 초고를 손질하지 못했다고 저세상에서 아쉬워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체로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가작이니까요. 비제의 유일한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초기 교향곡들이 후세인들에게는 베토벤과 브루크너, 말러의 대작 못지않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작품들로 인정받고 있음을 상기하세요. 아, 멘델스존의 초기 현악 교향곡들도 마찬가지군요.

 

잠시 후면 마지막으로 <설득>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입니다. 조만간 다시 글을 띄우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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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작품명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하였다. 종교적 소재를 다룬 작품이겠거니 나아가서 종교에서 매우 민감한 파계 사유라면 남녀 간의 정욕에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파계>는 훈계-아버지의 엄한 유훈-를 깨뜨린다는 의미였다.

 

전근대사회와 근대사회를 구분 짓는 특징 중 하나는 계급제 즉, 신분제의 철폐에 있다. 조선시대의 양반, 평민, 천민, 일본의 사무라이, 상민, 천민 등의 신분적 차별은 근대화를 선언하는 도상에서 명목상 폐지되었다. 하지만 이는 명목에 불과하였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신분 질서가 하루아침에 소멸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에서 족보를 신뢰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족보만 보면 우리는 모두 당당한 왕족 내지 양반 가문의 후손들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천민은커녕 평민이라고 밝히는 가문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주인공 우시마쓰는 백정의 아들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정은 천민 중에서도 그야말로 최하층이었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신분철폐령에 따라 법률적으로는 평민이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기존 평민과 구별되는 신평민으로 분류되었다. 우시마쓰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아버지의 노력 덕택으로 주위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범학교를 다니고 모범적인 초등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역시 내면에 계급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신평민에 대한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 멸시와 모욕적 언사, 그것은 그에게 개개가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차라리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지식과 이성을 통해 각성한 자아와 배치되는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과 고뇌를 겪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도 사회의 일원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거야.” (P.66)

 

왜 신평민만 그렇게 천대받고 치욕을 당하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보통 인간에 낄 수 없는 것일까? 왜 신평민만 이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인생은 무자비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P.303)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임에도 그것이 새삼스레 여겨지는 것은 당대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비추어서이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초반에 분명히 설정되어 있음을 독자에게 알린다. 독자는 이미 알고 있다. 우시마쓰는 자신의 신분을 공개할 것이다. 요는 그 시기가 언제쯤이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어떤 갈등을 겪는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자칫하면 지루하게 늘어질 우려도 있기에 전개 과정에서 독자가 긴장과 흥미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는데 작가의 역량이 판별될 것이다.

 

우시마쓰는 파계를 감행하고 싶다. 비밀을 숨기는데 따른 심적 불편과 정서적 불안을 감내할 정도로 담대하지 못하다. 작품에서는 우시마쓰의 두려움과 괴로움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파계를 할 경우 그는 두 가지 두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신분이 공개됨에 따라 자신이 가르치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며, 전혀 다른 데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점차로 은근히 깊어가는 오시호에 대한 관심도 단절될 것이 분명하다. 한편 파계는 아버지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아버지가 무슨 연유로 만근의 훈계를 명령했는지 잘 아는 처지에서 더구나 인륜의 관점에서도 이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는 아비를 버릴 셈이냐.” (P.166 )

 

여기서 또 하나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작가의 문제 제기가 존재한다. 파계는 육친의 아버지와 정신의 아버지 간의 선택에 대한 갈등의 사안이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수치스러운 혈연을 숨기기 위해 필사의 노력과 희생을 무릅쓴다. 정신적 아버지는 신평민임을 숨기지 말고 당당히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라고 요구한다.

 

우시마쓰가 도살장에서 정신적으로 방황을 거듭하는 장면(P.166)은 이러한 갈등의 한 정점이다. 렌타로의 지적 세례를 받은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하면서 그를 추종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자신이 그와 같은 계급임을 밝히고 싶어 한다. 양자 사이의 팽팽한 입장 차이가 작품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우시마쓰의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 구실을 하고 있다. 우시마쓰가 세 번이나 렌타로를 모르는 사람처럼 부인하는 대목(P.219)은 흡사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는 성서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렌타로를 향한 우시마쓰의 숭배는 동일한 계급 출신이라는 차원을 떠나 그가 주장하는 인간답게 살고 대접받을 보편적 권리에 대한 이성과 감성 차원에서의 절대적 동의에 근거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년일 때 아버지와 가족의 울타리와 보호 아래서 양육되던 우시마쓰는 이제 울타리가 속박으로 여겨진다. 울타리 밖은 거칠고 잠재된 위협이 도사린 미지의 세계이지만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 수는 없다. 렌타로는 외부세계의 훌륭한 사표였다.

 

우시마쓰는 눈과 서리 아래서 싹튼 어린 풀이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심과 두려움으로 닫혀버려 안쪽의 생명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눈과 서리가 해를 맞아 녹는 것에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젊은이가 마음이 가는 선배 앞에 경모의 정을 바치고 활발하게 전진하는 데 무슨 이상함이 있으리.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우시마쓰는 렌타로에게서 감화를 받고 정신의 자유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P.153)

 

우시마쓰는 렌타로의 죽음에 불현 듯 각성한다. 신분을 숨기고 노심초사하는 삶은 거짓의 삶’(P.319)이라는 사실을. 진실한 자신을 속이고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삶은 결코 생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 양심에 당당하고 세상의 편견을 질타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은 처절한 자기 고백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나는 백정입니다. 조리입니다. 불결한 인간입니다.” (P.336)

 

한편 작가는 우시마쓰를 둘러싼 여러 인물군상을 소개하면서 사회 내에 팽배한 부조리와 그릇된 전근대적 인식이 당대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는지를 알려준다. 신분질서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은 제법 합리적인 인간으로 표현되는 우시마쓰의 친구인 긴노스케도 피해갈 수 없다.

 

신평민이 아름다운 사상을 가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도저히 안 들잖습니까. 하하하.” (P.54)

 

백정은 일종의 특이한 냄새가 있다고 하는데, 맡아보면 알 수 있지 않겠나?” (P.284)

 

게다가 사회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질이 아주 삐뚤어져 있지. 그런 신평민 속에서 남자답고 똑똑한 청년이 나올 리가 없어. 어떻게 그런 패가 학문이라는 방면에 고개를 들 수 있겠나.” (P.284)

 

비열한 성격을 가지고 이상하게 비뚤어진 말만 하는 것이 하등인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주제넘게 사회에 참견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것부터 잘못이야. 그 선생 따위에게는 가죽이라도 만지작거리면서 온순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참으로 어울리는데!” (P.292)

 

더욱이 교육계는 가장 깨끗한 곳이어야 함에도 당대에도 그러하지 못하였다.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부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되는 교장과 분페이, 군 장학관의 삼각관계가 두드러진다. 학교를 자신의 권력욕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려는 교장과, 정치에 의지하여 출세를 도모하려는 분페이의 이해관계는 딱 맞아떨어진다.

 

지방에 와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의 첫 번째 요건은-다름이 아니라 이 교장처럼 세속적인 마음가짐이다......현명한 교육자는 언제나 지방회 의원과 결탁하여 제자리를 굳게 다지기를 꾀하는 것이 보통이다.” (P.24)

 

교장의 비교육자적 처사는 우시마쓰를 배웅하려는 학생들을 결석계도 안 내고 무단으로 등교하지 않는다며 반강제적으로 소환하는 데까지 이른다. 작가는 탄식한다.

 

, 교육자가 교육자를 꺼린다. 동료로서 질투하고, 인종으로서 경멸하고-세상을 태우는 불꽃은 출발 순간까지 우시마쓰의 신상을 쫒고 있었던 것이다.” (P.365)

 

결국 시마자키 도손은 <파계>를 통해 바람직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악습과 편견, 사회적 부조리를 일거에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는 근대적 개인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가족제도와 아울러 종내에는 개인의 양심이라는 도덕적 차원으로 귀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당대 일본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사유는 사람들이 숨기고 싶었던 문제, 혹은 미처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죄악을 전면에 내세워 통렬한 반성을 요구함에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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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84 2014-06-23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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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외 7편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14
시마자키 도손 지음 / 소화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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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작품>

1. 애비

2. 쓰가루 해협

3. 가축

4. 세 여자

5. 성장 준비

6. 폭풍우

7. 식당

8. 분배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자연주의 사조를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파계>이며, 문학동네에서 번역본이 나와 있다. 워낙 이 작품이 유명하여 다른 그의 작품들은 가려버린 느낌이지만 애초 그의 문학적 출발은 시인으로였으며 낭만주의 시작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파계> 외에 국내에 출간된 작품으로는 이 단편집과 또 다른 장편인 <> 정도이다.

 

이 책은 도손의 단편 중에서 초기의 세 편과 후기의 다섯 편을 수록하였다. 옮긴이는 도손이 쓴 단편의 맛을 고루 음미하기 위하여, 그의 처녀 단편집과 마지막 단편집에 실린 단편을 고루 배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초기작들은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향하여 자신만의 글쓰기 양식을 아직 확립하지 못한 자취가 역력하다. 자연주의라는 이념에 지나치게 충실하기 위하여 비일상과 파격의 사건을 소재로 택하고 있다. 남김 없는 삶의 재현이 일상의 삶을 외면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텐데.

 

<애비>에서 작가는 분명 인간 성욕의 억누를 길 없는 분출과 도덕적 판단의 헛됨을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오시마의 아들 미사오의 애비는 누구란 말인가? 숙부, 화자인 나, 스나가, 헌 옷 장수, 아니면 요시돈. 남녀의 사귐이 들꽃과 꿀벌처럼 자유분방함이 자연스럽다는 작가의 주장이 심금에 닿지 않는 연유는 역시 윤리적 잣대를 치울 수 없기 때문이다.

 

<쓰가루 해협>은 아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부인을 위로하고자 떠난 선상 여행이 배경이다. 혼슈와 홋카이도를 나누는 쓰가루 해협, 러일전쟁의 위태로운 상황, 아들을 닮은 서생의 만남과 헤어짐. 한때의 우연한 에피소드일 따름이다.

 

<가축>은 버림받은 암캐의 살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과 사랑스럽지 못한 외모를 이유로 개를 박대하고 없애려고 하는 인간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속성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새끼를 낳은 그날 아침 그 놈은 처음으로 인간에게서 구박이 아닌 말과 행동을 보게 된다. 이후 그 놈의 형편은 역전될 것인가? 그렇더라도 깨지기 쉬운 불안한 평화와 행복일 것이다.

 

 

소재는 물론 구성과 문장의 호흡도 퍽퍽하여 그다지 뛰어난 인상을 받지 못해 명성에 비하여 대체로 범작인가 의구심을 가졌을 때 반전을 가져온 것이 후기 작품들이다. 거의 이십년에 가까운 시간적 경과는 도손의 개인적 삶은 물론 문학세계에도 커다란 변모를 가져왔을 것은 불문가지다.

 

<세 여자>는 온천 요양 온 미쓰코를 중심으로 여학교 동창들인 모모코와 다에코의 세 여자의 인생의 행로를 담담히 그리고 있다. 그녀들은 교육받은 소위 신여성들이다. 미쓰코는 또 다른 친구 나쓰코와 잡지 발행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지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추구하지만, 정서적 면에서는 아직 구시대에 끈을 드리우고 있다. 그녀들 중에서 삶에 좌초하거나 전통에 타협해서 아니면 가정의 꿈에 젖어서 가려던 길에서 벗어날 이들도 적지 않다. 남은 이들도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과 각오를 품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모든 남녀 성인들에 해당되지만, 당대 신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물음이리라.

 

미쓰코는 깊은 혼돈의 안개에 닫혀져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모모코와 같은 친구조차도 마찬가지로 저물기 쉬운 저녁과 같은 청춘의 한때를 오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P.64)

 

문득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면 감상과 회한에 빠져들게 된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자신. 그것은 모모코가 가르치는 여학교를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고엽으로 바뀌기 전의, 싱싱한 생명의 반짝임”(P.77)으로 넘쳐나는 어린 학생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감상과 비관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현실을 인지하지만 현상에 주저앉지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태도. 그래서 미쓰코는 다시 한 번도쿄로 돌아가려고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놓지 않는 삶에 대한 한 조각의 긍정, 그것이 도손의 후기 작풍의 특징일지도 모른다고 섣부르게 추론한다.

 

자신 속에 있는 것은 빈약함뿐이다. 그러나 이 약한 자신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자. 가령 어떤 작은 것이라도 끝없는 힘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믿고 가자.” (P.79)

 

딸을 키우는 홀아비 아버지는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힌다. 이전까지 아빠의 기쁨이자 공주님이며 인형이었던 딸은 더 이상 없다. 내심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딸이 여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 어린아이와 어른의 도상에서 혼란스럽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성장 준비>에서 다루는 세계가 이것이다. 지금이라면 별다를 게 없겠지만, 당대로서는 이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소재였을 것이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은 일본인들의 삶과 정신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이에 비견될 만한 자연 재해는 사후 여파란 면에서 2011년의 동일본 지진과 해일 정도가 아닐는지. 대지진 전후를 배경으로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이 출발하는 세대와 이를 씁쓸하게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대비를 보여주는 게 <식당>이다. 지진 전 고다케 상점 주인의 딸로서 후에는 마님으로서 평생을 보내온 오미와는 아들이 상점을 되살려주길 고대한다. 아들은 대지진을 통해서 인정 세파의 무쌍함과 덧없음을 알아차렸다. 과거에 안주하고 뒤돌아본다는 건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눈을 전면으로 향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비록 어머니 오미와가 서운해 할지언정. 고다케 상점의 회복은 반문마냥 그에겐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아직 어머니는 그런 꿈을 꾸십니까?” (P.161)

 

자신이 익히 알던 도쿄는 고다케 상점과 더불어 영영 과거의 기억으로 묻혀버리게 되었음을 오미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함...

 

<분배><폭풍우>는 유사한 배경을 공유한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 일찍 아내를 여위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작가인 화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첫째와 화가 지망생인 둘째, 그리고 막내는 딸아이라는 점도. 필경 일정 부분은 작가 자신의 실생활에서 차용했음을 짐작케 하여 묘한 동질감마저 느끼게 한다.

 

어른이 나이 들어 쇠약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철부지 아이들이 어느덧 훌쩍 자라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매진하기 위하여 보금자리를 떠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기특하고 대견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씁쓸한 여운이 남지만 어쩔 수 없다.

 

<분배>의 화자는 생각지 못한 뭉칫돈이 생기자 이의 처리를 두고 잠시 고심한다. 저축을 하여 노년의 여생을 대비할 수도 있지만, 화자는 자식들이 각자의 장래를 위한 든든한 노잣돈으로 분배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닐까? 자신들의 근검과 희생은 본인들의 성공과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식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바라는 것 말이다. 자신들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뒷전이다. 화자의 담박한 언명과도 같이.

 

내 앞에는 아직 조금밖에 들여다보지 않은 노년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기까지 데리고 온 네 자식들을 위해, 무엇인가 각자 도움이 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긴 여행 도중의 길가에서 생각지도 않게 생긴 수입을 슬쩍 남겨두고 가려고 했다.” (P.194)

 

<폭풍우>는 수록작 중에서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 가장 비중이 커다란 작품이라고 하겠다. 훌쩍 자란 아이들에게 현재의 집은 비좁기 그지없다. 역시 작가인 화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생각을 지니고 적당한 집을 아이들을 통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7년이나 함께 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하기 위해 조금씩 전진해 나아갔다. 아버지인 화자는 집밖의 폭풍우가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파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네 아이들 간의 다툼과 소동이라는 폭풍우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일편단심으로 지키는 사람, 그것이 바로 부모이다.

 

하야가와 켄과 기노시다 시게루를 외치던 셋째가 프랑스의 빗세르를 찬사한다. 이처럼 세 아이들은 각각 변해가고 있었다.”(P.116) 그리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것에 현혹되는 그들은 아버지를 기존의 것에 천착하는 구시대의 인물로 여기게 된다. 증폭되는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댐의 수문을 개방하듯이 그들에게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출구를 열어주는 일이다. 비록 한동안은 모두에게 강한 폭풍우”(P.116)가 휘몰아치더라도.

“......내가 몸을 일으켰을 무렵에는 지난 7년 동안 계속해 온 듯한 쓸쓸한 폭풍우의 흔적을 다시 볼 마음이 일어났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 큰아들의 집을 볼 때까지는 나에게 생기지 않았던 일이다.” (P.139)

 

첫째가 농부로서 고향에서 그런대로 제법 무난히 지내는 광경을 보면서 화자는 다소간 신뢰에 무게를 더할 수 있게끔 되었다. 둘째도 곧이어 형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한다. 셋째도 나름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막내딸도 여성적인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모두 모두 그렇게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좋아.” (P.141)

 

중요한 것은 남이 정해준 길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은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화자도 지금 사는 집을 버린 마음을 되돌려 다시 한 번 좁고 답답한 이 집에서 버텨 보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초기작은 처음에 자연주의 경향에 집착한 나머지 과도한 소재와 표현, 구성으로 인위적이며 정제되지 못한 느낌을 주었다. 연륜과 각고의 노력 덕분인지 후기작, 특히 <폭풍우>에 와서는 자연주의 사조가 자신의 삶과 펜에 녹아들어가 두드러지게 강조하지 않아도 작품 속에서 깊은 풍미를 갖출 수 있게끔 발효되었음을 알게 된다. 지극히 담박하고 은은하면서도 삶과 세상에 대한 관조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고 해도 과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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