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캐럴 네버랜드 클래식 16
찰스 디킨스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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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보다도 주인공 이름으로 더 기억되는 작품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서는 한층 인기가 높다.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유령을 만나서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 명작을 이제 새삼스레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역시 읽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설과 타 장르 간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표피적인 줄거리가 아닌 원작의 의도와 표현을 음미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크루지는 맷돌 봉을 움켜쥔 손아귀처럼 그악스럽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였다. 스크루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남 등쳐먹기 좋아하고, 교활하고, 악랄하고, 치사하고, 탐욕스럽고, 추잡한 늙은이! 무정하고 냉정하기로는 쇠망치로 두들겨 대도 불똥 하나 튀기지 않을 부싯돌 같고, 음험하고, 제 생각만 하기로 치자면 꽉 다문 굴 껍데기 같다. 내면에 들어앉은 냉혹함 탓에 스크루지의 생김새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P.11-12)

 

자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을 이렇게 혹평한 작가가 달리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업에만 매달려 사랑과 이별하고 일체의 인간적 감정과 교우를 단절하는 스크루지.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거부하고 조카의 초대를 차갑게 거절하는 스크루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의구심마저 들면서도 문득 요즘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스크루지와 대동소이할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게 세속적으로 성공의 왕도라고 인정받고 있으므로. 그렇기에 스크루지 영감은 평생을 그 길을 따른 것이리라.

 

스크루지가 바랐던 삶은 바로 그런 삶이었던 것을! 복잡한 인생의 길에서 이리 비집고 저리 비집고 해서 제 갈 길을 헤치고 살아가려면 인간적인 동정심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이치에 밝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실속이라고 스크루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P.13)

 

대다수 우리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지 공휴일로 인식될 뿐이나 서구사회는 의미와 분위기가 이 작품에서처럼 확연하게 다르다. 예수 탄생의 의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설파한 교훈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이다. 일 년 내내, 평생을 이를 실천하면서 살면 최선이겠지만 최소한 크리스마스 무렵만이라도 그 정신을 되새기자는 생각이다. 작중에서 이는 스크루지 조카의 말로 명료하게 표현된다.

 

세상에는 굳이 그 덕을 보지 않아도 그냥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참 많아요. 크리스마스가 특히 그렇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요, 크리스마스가 갖는 어느 한 가지 의미를 따로 떼 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 치고요, 크리스마스라는 신성한 이름이나 크리스마스의 유래에서 절로 우러나는 친절과 용서와 자비와 기쁨이 가득한 때라고 생각해 왔어요.” (P.18)

 

그래도 스크루지는 운이 좋았다. 개심 여부는 최종적으로 본인에게 달렸지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만과 타성에 물들어 주변의 관심과 조언을 곡해하고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외로움에 젖은 스크루지의 어린 시절, 그리고 가족의 온기를 유일하게 남겨준 여동생과의 추억이 남겨준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아니었을까.

 

과거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과 교훈,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게 만든 그의 잘못된 선택이다.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보여준 서기 가족과 조카네 가족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바라보면서, 여러 면에 걸쳐 작가가 길게 서술하고 묘사한 크리스마스의 유쾌한 분위기와 장면들. 일상적인 냉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축복을 보여주는 그들. 약했던 여동생을 연상시키는 가냘프고 연약한 꼬맹이 팀을 바라보는 스크루지. 그리고 스크루지를 향한 유령의 통렬하기 그지없는 비판.

 

하느님의 눈에는, 저 아이처럼 수백 만의 가난한 자의 아이들보다 네가 더욱더 쓸모없고 살리기에 적당치 않은 인간이니. , 신이시요! 나뭇잎에 붙은 벌레 같은 인간이, 굶주리고 있는 제 형제들 가운데에 쓸데없이 남아도는 인구가 있다는 소리를 하다니!” (P.120)

 

의외였던 점은 스크루지의 개심이 겉으로 표출된 시점이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과의 만남 이후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회상되지 않는 미래의 불쌍한 인간의 실체를 아직 목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반복해서 자신이 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유령들이 잇따라 그에 출몰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목적을 이해하고, 심지어 미래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르겠다고 할 정도다.

 

스크루지는 줄곧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 보고 있는 환영 속에서 새 사람이 되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P.156)

 

이쯤에서 그쳐도 충분할 텐데 디킨스는 스크루지를 왜 끝까지 미래의 유령과 동행시켰을까. 이왕 뺀 칼이니 휘둘러야 한다는 뜻은 아닐 텐데. 그것은 시체의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버림받은 시체의 정체를 예감하지만 인정하길 부인하는 스크루지는 변명하고 회피하고자 애쓴다.

 

유령은 그 흔들리지 않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시체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의 뜻은 알았습니다. 제가 할 수만 있으면 그 뜻을 실천하겠고요. 허나 제겐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요.”

그러자 유령이 스크루지를 보는 듯이 느껴졌다. 스크루지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P.168)

 

자신의 암울한 과오와 비참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직시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시체의 교훈은 스크루지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리라. 굳건한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은 개심과 신심이야말로 앞으로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변함없이 초심을 지켜나갈 것이므로.

 

나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 즐겁고 행복한 삶. 그것은 비단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된 정신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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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을 사랑한 군인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9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이한중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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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역사에 남을 위대한 야생 동물들

 

궁리에서 발간한 시튼 동물기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편인 동시에 작가로서도 최 말년의 작품에 해당한다. 수년 후에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으니. 부제에 걸맞은 이야기는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 정도로 봐야 하리라. 이걸 포함해서 절반 정도의 이야기가 늑대를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서문에 늑대에 대한 나의 연민과 관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P.9)이라고 밝힌다.

 

<식인 늑대 라베트><프랑스 늑대 왕 쿠르토>는 인간 세계를 압도하는 최고 포식자로서의 늑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 다 거대한 크기, 사냥꾼을 따돌리는 명석한 두뇌, 그리고 사람고기에 대한 집착으로 역사적 명성을 남겼다. 인간은 거대한 포식자에 열광하는 습성이 있다. 공룡에 대한 애정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라베트와 쿠르토의 삶과 영광, 그리고 죽음을 서술하는 작가의 필치에는 흡사 영웅의 생애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찬사와 탄식이 함께 배어 있다.

 

거대한 늑대는 그렇게 쓰러졌다. 끝까지 싸우다 숨을 거둔 것이다. 무쇠 창을 물어뜯으며 저항하면서 당당하게 죽어 갔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시체더미 위에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 이제는 죽었다. 그렇지만 승자는 그였다. 라베트는 그렇게 죽었다. (P.302)

 

라베트가 식인 늑대로 악명을 떨쳤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 개체로서 그러할 뿐이었다. 쿠르토는 스케일이 남다르다. 늑대 무리를 이끌고 파리시를 장기간 포위할 지경이었다고 하니 글을 보면서도 이게 과연 실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쿠르토가 활약하던 때는 잔 다르크와 동시대라고 하니 시대적 배경을 보면 그러할 수도 있겠다 싶다. 세상과 자연이 모두 어지러우면 자고로 역사상에 언제나 비상식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법.

 

온 땅에 무정부 상태와 기근과 질병이 난무했다. 소작농들은 힘없이 죽어 나갔고 비옥한 농지들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시절 탓인지 늑대들은 무리 지어 탐욕스러운 약탈을 일삼았다. (P.306)

 

그해 프랑스는 학살의 해였다. 외국의 적들과 도적 떼들이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황폐화시키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했다. (P.318)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대목은 루브르의 어원을 알게 되었으며, 수비대장의 고귀한 희생을 잔 다르크의 그것과 동일시한 점이다.

 

그밖에 <아일랜드 늑대의 최후>, <하얀 늑대와 용감한 아들><늑대의 법>은 늑대와 인간의 대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늑대의 고귀성과 불굴성, 그리고 인간과 늑대의 교감 등을 두루 다루고 있다. <소녀와 늑대>는 인간을 두려워하는 법을 학습한 현대의 늑대를, <러닝보드의 늑대>는 길들여진 늑대를, <린컨과 밤의 부름>은 야성을 상실하고 가축화된 개에게 남겨진 태곳적의 끈질긴 야성의 편린을 알게 해 준다.

 

시튼이 많은 늑대 이야기를 전한 까닭은 늑대에 대한 애정과 아울러 늑대가 유럽과 미국에 그토록 맹위를 떨쳤던 사실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두뇌와 야수성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집단 사냥을 즐겨한 그들에게 대항할 맹수가 없었기에 아마도 인간의 개입이 없었다면 늑대는 여전히 최고의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친구 동물은 누가 뭐래도 개다. 이 책에서도 <전달병 캐럿><행크와 제프>를 통해 인간과 진실한 유대와 공감을 주고받는 개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개의 도움을 얻어 목숨을 구한 인간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며, 단지 가축이 아닌 영혼의 동반자에 가까울 정도로 교감을 나누는 사람과 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떨어져 살아갈 수 없는 행크와 제크의 슬픔에 동감하게 된다.

 

행크는......개였어요. 그러지...말았어야 했는데. 나를 용서한 것처럼...나도 용서를 했어야 하는데. 행크는 내 개였어요. ...내 개였어요.” (P.264)

 

그럼에도 시튼은 야생 동물의 가축화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야생 동물의 순수성과 도덕성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방울뱀과 혈투를 벌이는 쥐(<쥐와 방울뱀의 혈투>)를 옹호하는 건 쥐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의 불굴의 용기에 감탄해서다. 경탄 어린 어조로 묘사하는 사막의 요정 캥거루쥐(<사막의 요정>)를 잡아 가두려는 시도가 부질없음을 깨달아서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놓아둘 때 치커리(<붉은 다람쥐의 모험>)의 야생의 모험담이 의미 있으며, 작가가 환상적으로 그려 내는 숲의 밤(<숲 속의 밤>)의 두려움과 정취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린컨과 마찬가지로 가축이 된 황소(<칠링햄의 야생 들소>)조차도 내재한 야성의 본능을 결코 상실하지 않음을 보자.

 

표제작 <표범을 사랑한 군인>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독자는 표범과 군인의 옛 연인을 동일시하게 된다. 아름다움과 표독함, 사랑과 독점욕이 한데 어우러진 치명적인 사랑. 실현되지도 완성할 수도 없는 비극적 운명이 예고된 표범과의 사랑은 팜므 파탈을 연상시킨다.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는 사랑은 오래갈 수 없다. 군인과 옛 연인의 이별이 비극으로 끝났듯이 그가 표범에게서 헤어날 길은 유일할 길만이 남아 있을 따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여전히 그녀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간절히 엿보고 있었지만 고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리라는 것을, 죽도록 슬픈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P.355)

 

인간과의 우정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물과 얄팍한 이익을 위해 자식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키는 부모. 인간과 다름없는 사랑을 바친 암표범.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쁨과 헌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엄마 곰(<엄마 곰의 기쁨>)의 모성은 인간 여성이 갖는 감정과 무엇이 다른가?

 

시튼은 말미에 이렇게 묻는다, 어느 쪽이 짐승이냐고. 우리가 시튼의 동물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표피적 흥미 이상의 것이 담겨 있어서다. 미처 알지 못했던 종이 아닌 개체로서의 동물의 모습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것이 인간과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해 주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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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 -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 수업
조혜진 그림, 신현주 글, 김선욱 감수, 마이클 샌델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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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원저를 청소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면적으로 편집한 책이다. 많은 그림과 커다랗게 강조하는 글꼴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듯하지만, 각 장의 끝에 마이클 샌델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원저의 내용이 압축, 요약된 대목은 분명 중학생 이상의 수준에 가깝다. 아직 원저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이 책이 원저에 얼마만큼 충실하였을지 판단할 수 없다. 감수자가 꼼꼼히 봤을 테니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믿고, 저자의 말처럼 원저를 읽기 위한 디딤돌로 생각하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답변자의 가치관과 정치적 견해가 포함될 수밖에 없기에 토론은 갈등으로 이어지고, 우리나라처럼 이념, 지역, 세대 간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구분되는 사회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공개하는데 더더욱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원저자는 이러한 공개적 논쟁이 바람직하다고 옹호한다.

 

의견 충돌의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미루거나 피해서는 안 됩니다. 정의에 관해 경쟁하는 여러 원칙들을 두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은 성숙하고 자신감 넘치는 민주주의의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원저자의 말에서)

 

마이클 샌델은 정의에 대한 주요한 견해를 크게 세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한 제레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행복의 질적인 부분에 주목한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공리주의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데 사회적 의사결정에 완벽한 동의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다수결의 원칙 또한 공리주의와 멀지 않다.

 

행복의 질은 개인마다 똑같을 수 없기에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과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자유롭게 거래되고 교환되는 곳을 시장으로 보면, 자유시장주의자가 등장한다. 여기서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고 완벽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모르겠지만, 시장의 무결성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으로 알고 있다. 원저자도 이렇게 언급한다.

 

흔히 우리가 시장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를 강조해요. 바로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어요. 사람들 사이의 선택과 합의가 정말 공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거예요. (P.87)

 

이어서 원저자는 칸트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하면서 존 롤스에 이른다. 그는 마이클 샌델에 앞서 정의론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인데, 서가에 꽂혀 있는 두 사람의 책을 보면 뿌듯함과 동시에 갑갑한 심정이다. 샌델은 존 롤스의 정의의 원칙 중 차등의 원칙에 근거하여 미국의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의 정당성을 의제에 올린다.

 

우리 사회도 양성평등 또는 사회적 약자 배려의 차원에서 차등적 보상을 실행하는 정책을 실행할 때면 특히 근래 들어 굉장한 논쟁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구조적 차별을 바로잡으려는 조치가 역차별에 해당하는지는 이해당사자마다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지금 여기에서 피해를 보는 나는 앞서 말한 차별과는 관련 없는데 오히려 불이익을 감수하라고 할 때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 마이클 샌델은 고립된 개인이 아닌 공동체 내에 소속된 개인의 의무로서 공동체주의를 제시하여 타당성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나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보는 연대의 의무는 아주 특별해요. 그 의무에는 우리가 떠안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거든요. 이 책임은 역사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찾는 도덕적인 인식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우리를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 보고 연대의 의무를 찾는 것이 정의로워 보입니다. (P.183)

 

공동체주의의 논거로 불만을 잠재울 수 있지만 완전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 공동체주의는 자칫 개인을 억압하는 집단주의화 우려가 잠재되어 있다. 원저자 또한 개인의 선택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부언함은 이를 의식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의 선택에 있어 도덕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정의가 도덕과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면, 정의를 실현하는 방안 또한 도덕과 종교와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정의는 어떻게 보면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서로가 자신들의 대답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면 분쟁의 화약고가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갈등 확대를 우려하여 정의에 대한 논쟁을 외면하고 회피할 것인지, 아니면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정면으로 정의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지속할 것인지.

 

정치와 법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건 불가능하기에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하는 정치를 해야 해요. 공동체의 삶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나아가야 해요. 도덕과 가치를 고민하는 정치는 도덕을 회피하는 정치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P.211)

 

마이클 샌델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원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에 이른다. 다만 그것이 실행이라는 현실적 과제와 맞닥뜨렸을 때 여전히 앞길에 커다란 어려움이 드리워져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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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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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처절한 작품이다. 처절함은 리어 왕에게서, 잔인함은 글로스터 백작을 통해 표출된다. 두 사람이야말로 단연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표제로 볼 때 리어 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글로스터 백작이 주인공인 까닭은 리어 왕과 함께 비극을 유발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인물이어서다. 글로스터 일가와 관련된 얘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까닭이다.

 

두 사람의 운명은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들은 닮은꼴이다. 반목-그들의 반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하는 형제를 둔 글로스터 백작과 역시 그러한 자매를 둔 리어 왕. 간언(間言)에 연약한 전자와 감언(甘言)에 취약한 후자. 양자는 성격도 유사한데, 성급함과 함께 직진성이 그것이다.

 

이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진실에 충실한지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이다. 그 정도는 때로 섬뜩할 지경이다. 우리가 코딜리아의 순수함이나 사랑과 진실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189)

 

리어 왕의 성격적 결함은 노인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코딜리아의 집요한 강경함은 극 초반에 두드러진다. 작중 인물들이 모두 찬미하는 인물임에도 독자는 그녀에게 그다지 공감대와 동정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아버지를 닮은 듯 일체의 타협에 굴하지 않는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한다. 자식에게서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은 리어 왕의 바람이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한다. 물론 그녀의 생각은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적인지는 않다. 작품 해설에서도 이를 언급한다.

 

코딜리아의 작중 비중이 낮은 것은 비극을 이끌어내는 리어 왕의 대척점에서만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원한을 복수하려는 그녀의 전쟁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것은 불가피한데 어쨌든 그녀는 외세인 프랑스의 왕비로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전하.

(리어) 없습니다?

(코딜리아) 없습니다.

(리어)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다시 해봐. (11, P.17-18)

 

리어 왕과 코딜리아의 대화는 선()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자석의 같은 극끼리 서로 끌어당기지 못하듯 닮은꼴인 그들은 내내 밀쳐내기만 한다. 여기서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을 말하여 사랑을 인정받고, 사랑함에도 사랑을 말하지 않아 사랑을 부인 받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며, 이것이 리어 왕의 비극의 출발점이다. 리어 왕의 처사가 가져올 비극을 예언하는 인물은 켄트와 바보가 둘뿐이나, 켄트는 추방당하고 바보는 바보일 뿐.

 

(바보) 당신 땅을 내주라고 조언한 신하 불러 / 내 곁에 세우고 당신이 그 사람 역을 하면 / 친절한 바보와 신랄한 바보는 바로 보여. / 얼룩옷 바보는 여기에, 또 하나는 거기에.

(리어) , 나를 바보라고 부르는 거냐?

(바보) 다른 칭호는 다 줘버렸잖아. 그건 당신이 가지고 / 태어났고. (11, P.45)

 

(바보) 넝마 걸친 아비는 / 자식들이 눈 돌리나 / 주머니 찬 아비는 / 자식들이 친절하지. / 최고 창녀 운명여신 / 거지에겐 문 안 열어. (24, P.76)

 

<리어 왕>에서 바보는 독특한 인물이다. 리어 왕을 따라다니면서 시종일관 풍자와 해학을 자아내는 그는 극의 지나친 엄숙성과 비극성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여기에 더해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지니고 대놓고 직언하지만 아무도 수용하지 않는데 그의 비극성이 드리운다. 리어 왕이 광기에 완전히 휩싸인 후 그가 더는 극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등장할 이유가 없어서이리라.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올바니와 에드거만 빼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도 드물게 참담하다. 고너릴과 리간은 극이 전개될수록 패륜과 음욕에 물든 본성을 드러내는데, 에드먼드를 쟁탈하고자 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에드먼드는 형을 내쫓고 아버지를 처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장본인이다. 서자로서의 그의 좌절과 분노를 십분 이해하고 출세욕을 참작하더라도 그의 죄악은 용서받을 수 없다. 그리고 콘월 공작.

 

올바니와 콘월은 리어 왕의 사위이자 왕국의 후계자임에도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고너릴에게 바보라고 불릴 만큼 충성스럽고 성실한 올바니는 고너릴의 행동과 성격에 영합하길 거부한다. 그는 리어 왕에 대한 글로스터 백작의 충정에 감복한다. 그가 훗날 유일하게 생존한 후계자로서 그가 사태를 정리하고 왕국을 계승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올바니) , 몹쓸 인간 고너릴, / 당신은 그 얼굴을 때리는 무례한 바람 속의 / 먼지만도 못하오. 그 성질이 두렵소. (42, P.125)

 

(올바니) 글로스터, / 국왕에게 보여준 충정에 감사하고 / 눈에 대한 복수는 꼭 하리다. (42, P.128-129)

 

콘월은 리간과 함께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인물이다. 리어 왕의 사자인 켄트를 죄 주면서 그는 이미 리어 왕의 권위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그의 오만하고 잔인한 면모는 자신을 배반한 글로스터 백작의 두 눈알을 뽑는 잔인한 처벌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잔인함은 결국 자신을 향한 부메랑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콘월) 그건 절대 못 볼 거다. 이봐, 의자를 꽉 잡아. / 네 눈알을 내 발로 짓밟아 주겠다.

(글로스터) 늙어 죽을 때까지 살고 싶은 사람은 / 날 살려주시오!-, 잔인하다! , 신들이여!

(리간) 한쪽이 다른 쪽을 비웃을 테니까!-저쪽도. (37, P.117)

 

(콘월) 못 보게 할 테다. 빠져라 눈깔아. / 이제 네 밝은 빛은 어딨느냐? (37, P.118)

 

이제 주인공인 리어 왕에 집중하자. 리어 왕의 잘못은 오로지 두 딸을 믿었고 일순간의 화에 사로잡혀 막내딸을 추방한 데 있다. 그의 화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을 수 있고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가능성도 있다. 그의 잘못이 최악의 보답을 받을 정도로 크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간언에 속아 넘어간 글로스터 백작도 마찬가지다. 자칫 찻잔 속의 태풍마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조그만 잘못이지만 셰익스피어는 간단하게 다루지 않는다.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와도 같이 미처 추론하거나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상황을 확장한다.

 

셰익스피어가 여기서 가장 공들이고 독자들이 가장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대목은 미친 리어 왕의 모습에서다.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혀 광기에 휩싸인 채 광야를 방황하며 울부짖는 리어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어리석음과 나약함과 고독함과 맹목적일 정도로 집요한 의지를 단숨에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리어 왕은 바로 이 장면이다.

 

(리어) 하늘은 저에게 인내를 주소서, 인내가 필요하오! / 신들이여, 이 불쌍한 노인이 보이지요. / 나이만큼 근심에 찬, 둘 다 많아 비참한. / 아비에게 반항토록 이 딸들을 선동한 게 / 당신들이라면 저 또한 바보처럼 순하게 / 참지 않게 하소서. 고귀한 분노 내려 / 이 남자의 두 뺨을 여자들 무기인 눈물로 / 더럽히지 마소서. 그래, 이 무정한 마녀들아, / 내 너희 둘에게 철저히 복수하여 온 세상이- / 난 할 테다.- 뭘 한진 모르지만 그것은 / 지상의 공포가 되리라! 너흰 내가 울 것 같지? / 아냐, 난 안 울어. (폭풍우 소리) / 울 이유는 충분하나 울기 전에 이 심장이 /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질 것이다. / , 바보야, 난 이제 미치련다. (24, P.87)

 

(리어) 바람아 불어라, 뺨 터지게! 사납게 불어라! / 하늘과 바다의 폭풍우야, 첨탑들이 잠기고 / 풍향계가 다 빠질 때까지 내뿜어라! / 참나무 쪼개는 벼락의 선구자, / 생각보다 더 빠른 유황색 번갯불아, / 내 흰머리 태워라! 만물을 뒤흔드는 천둥아, / 둥글게 꽉 찬 세상 납작하게 깨부숴라! / 조물주의 틀을 깨고 배은의 인간 빚는 / 모든 씨앗 한꺼번에 엎질러라! (32, P.91-92)

 

비틀거릴지언정 결코 무너지지 않던 그가 끝내 무너지는 대목은 마지막으로 믿었고 사랑과 후회로 뒤섞인 채 다시 보기를 염원해 마지않았던 코딜리아의 죽음에 이르러서다. 그로서는 더 이상 버틸 기력도 의미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리어 왕과 글로스터 백작의 얘기는 죄악의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인간 본성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주요 비극작품들에서 한결같이 다루는 제재와 마찬가지로. 그는 <오셀로><맥베스> 등에서보다 한층 큰 스케일로 감정의 진폭을 극단으로 확장한다. 너무나 미미하여 간과될 수 있는 존재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보여주었을 때 실체를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별것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조차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연약한 이성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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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반할 지도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알고 보면 반할 시리즈
정대영 지음 / 태학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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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박물관 큐레이터가 들려주는 신비로운 고지도 이야기

 

어릴 적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메르카토르 도법의 세계지도가 집에 있었는데, 전지에 그대로 베낀 기억도 있다. 요즘도 책이나 미디어에서 특정 도시나 지역이 소개되면 네이버 지도나 구글맵으로 찾아보곤 한다.

 

우리나라의 옛 지도하면 상식적으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나 역시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껏해야 국사 시간에 배운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정도 추가될 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뜻밖에 옛 지도가 많이 남아있음에 우선 놀라고, 옛 지도가 매우 다채로움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세계지도, 전국지도, 그리고 지역지도 등. 휴대용 지도인 <수진일용방>와 특수목적 지도인 <삼남해방도><강화도이북해역도> 등도 있다.

 

오늘날 지도는 정확성과 사실성이 제일의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런 점에서 옛 지도는 일부를 제외하면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오늘날과 옛날은 지도의 필요성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대다수 서민은 태어난 고장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었다. 즉 지도의 수요가 미약하였고 일부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지도가 크게 발달할 동기가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이미 서양의 과학적 지도가 유입되었으나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천하도, 천하고금대총편람도, 대청일통천하전도 등을 고집하였음은 주목할 만하다. 현실보다 관념에 치우친 편협한 사고와 인식으로 왜곡되고 퇴행한 지도를 낳게 한 낙후된 시대정신은 조선과 중국이 똑같이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옛 지도는 저자의 설명과 같이 현실적인 지도와 회화적 지도로 나눌 수 있다. <대동여지도> 등과 같이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실성에 주력한 지도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으나 아무래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회화식 지도가 자체로서 더욱 흥미롭다. 이는 지도인 동시에 한 편의 그림이니 기능성과 아울러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지자체에서 발간하는 관광지도 중에는 주요 포인트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면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사례가 있는데 회화식 지도는 이와 유사하다. 소개된 <완산부지도>와 여러 지방지도가 여기에 속한다.

 

과거의 아름다운 옛 지도를 무조건 찬미할 수는 없다고 본다. 미적 요소에 대한 높은 평가는 후세의 관점일 따름이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지도의 기본 요소를 충족시킨 가운데 심미성을 부가하였다면 예술성이 한층 돋보였겠지만 이를 결여한 아름다움은 당대의 기술과 지식의 역부족을 드러내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여기에 옛 지도의 허실이 있다. 그럼에도 회화적 지도는 현대의 기능적이며 과학적인 지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중의 관심을 유인할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는 상상과 사람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으므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련한 역사적 왜곡은 단지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어쨌든 그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진 바탕에는 지도를 바라보는 옛사람들의 긍정과 부정의 인식이 병존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런 열악한 시대적 배경에서도 지도 제작에 헌신한 선인들의 존재를 알게 되는 무척 뜻깊고 흥미롭다.

 

[정상기]의 지도는 조선 후기에 폭넓게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경준, 정철조, 황윤석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지도를 고쳐 나갔으며, 정상기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역시 끊임없이 수정을 했다. 그야말로 지도 제작의 르네상스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김정호가 있었다. (P.86)

 

저자는 이중 정철조와 황윤석의 교류를 특별히 소개한다. 그리고 하백원이란 인물도. 남쪽 시골에서 나 홀로 세계지도와 조선 전도를 그려 낸 그의 노력은 단지 호사가의 것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서삼경과 시문을 달달 외우고 써 내려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인정받던 시절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하게 초심을 유지하고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저자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한없다.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의 길을 가겠다는 말. 수많은 고지도 제작자들도 그러했으리라......그들이 당대에 부귀영화와 인정을 원했다면 이런 일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헤아릴 길 없는 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P.182)

 

옛 지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져야 마땅하다. 우리 역사, 특히 고대사를 보면 지도와 지리에 대한 인식 부족의 경우를 가끔 접하게 된다. 과거의 지리와 지금의 그것이 동일하다는 무언의 가정이 발견된다. 과거의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 지금의 강릉이 옛날에도 여전히 동해안의 지역인지는 엄정한 지리 고증을 통해 분명하게 해야 한다. 저자의 말대로 깊이 있는 역사 연구와 이해를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연구부터 느리지만 꼼꼼히 선행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발걸음은 행정구역을 모두 표시한 정밀한 역사 지도의 완성이라 생각한다(P.160).”는 의견에 동의한다.

 

이 책은 옛 지도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일깨우고 다양한 옛 지도를 알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소개된 지도가 좀만 더 크고 지도의 내용 자체에 대한 설명이 좀만 더 상세하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후속 저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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