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키
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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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피드의 날>의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국내에 존 윈덤의 소설은 이렇게 딱 두 편만 나와 있다. 일단 분량이 두껍지 않고 내용과 문체가 평탄하여 읽어나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머릿속에 인간 아닌 존재가 들어와 원래와는 다른 인간이 되는 현상, 이것을 이 책에서처럼 귀신들림이라고 지칭하든 아니든 간에 여러 심령 소설의 주된 소재이다. 지구상의 인간 아닌 외계의 다른 존재가 지구를 방문하여 인간과 접촉하는 설정 역시 숱한 공상과학 장르의 단골 소재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68년이니 아마도 이런 유형의 작품에서는 선구자 격이라고 할 것이다.

 

초반부의 낯설고 당혹스러운 예감, 그것은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공포스러운 요소가 뒤따를 것이라는 불안 섞인 전망에 기인한다. 초반의 불안한 압박감을 견뎌내면 이후 작가가 제시하는 방향이 뜻밖에도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이때부터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 소설의 지향점에 대해서, 초키라는 존재의 정체와 작가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혼자 중얼거리는 점만 제외하면 주인공인 평범한 열두 살 매튜는 초키에게 여러 혜택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지적 능력의 제고, 예술적 안목과 솜씨의 향상, 무엇보다 물속에서 맥주병 신세였던 그가 동생의 목숨마저 구할 정도로 선수급 수영 실력을 발휘한다. 매튜의 관심은 넓어지고 사회 인식과 책임감도 증가한다. 한마디로 초키는 인간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색다른 특징이다.

 

이 대화가 끝난 후에 나는 돌아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신과 말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은 기쁠 것이다. 매튜 부모의 다른 부분, 즉 엄마, 즉 당신의 아내는 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매튜에게 해롭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나를, 즉 당신을, 즉 매튜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으므로 유감이다. (P.229-230)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미친 사람이라는 꼬리표다. 이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화형을 당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된 역사적 기억이 그리 멀지 않다. 미친 사람은 사회 내 정당한 일인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폴리가 피프를 만들어내고 함께 지냈던 것은 아직 아이 때였기에 가능하였다. 매튜는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나이다.

 

매튜는 초키와의 공생이 익숙해짐에 따라 그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반면 매튜의 부모는 초키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하려 애쓰고 노심초사하기에 급급하다. 특히 매튜 엄마는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아니기를 믿고 싶은 마음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려 들고, 진실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는 이, 즉 랜디스에게 거부감마저 일으킨다.

 

다행하게도 공포소설이 아니기에 우여곡절 후에 초키는 매튜에게서 떠나간다. 그가 매튜의 아빠에게 자신의 정체와 강신 목적 등을 매튜의 입을 통해 밝히는 제11장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여기서 매튜의 안전을 위해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유와 더불어 초키는 예언자적 풍모를 보인다.

 

모든 지성체를 양성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다. 이성의 가장 단순한 불꽃도 횃불이 되리라는 기대로 키워야 한다. 좌절한 지성의 굴레를 풀어야 한다. 생각이 좁은 지성에게는 넓힐 힘을 주어야 한다. 높은 지성은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머물렀다. (P.234)

 

인간 지성에 대한 찬사, 한층 높은 차원의 지성 고양을 위할 필요성과 사명, 매튜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다짐. 조금씩 나아가기에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퍼즐이 풀리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지. 여기저기에 힌트를 하나씩 뿌리고, 한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영감을, 어느 날 모여서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해롭지 않을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퍼즐은 언젠가 풀리리라. 비밀은 밝혀지고 은폐되지 않으리라...오랜 시간이 걸린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마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 날은 온다...온다... (P.247)

 

작가의 집필 의도를 헤아려 보고 싶다. 심령현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작가는 랜디스와 토르비 경에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들은 초키가 확실하게 실재하는 존재임을 증빙하는 역할을 맡았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역시 제11장의 예언자로서의 초키가 핵심인가? 그의 예언은 갑작스럽다. 후반부까지 여유롭고 굴곡 없이 진행되던 흐름에서 작가는 서둘러 결말을 내리고 작품을 끝맺으려고 한다. 초키의 예언 대목이 작품 전체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겉도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게 비단 나뿐인지 궁금하다. 오직 작가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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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도해자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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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한바탕 우당탕하는 셰익스피어 초기의 희극이다. 한 성질 사나운 여성을 바람직한 사회 질서의 틀 내로 교화하는 내용은 당대에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문학작품은 시대 풍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부여받는다. 이 희극은 오늘날 변화된 인권 및 페미니즘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변화된 의미 부여를 잘 나타낸다.

 

비단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몇 가지 내용은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의 보편적 결혼관습이기에 그렇다 하자. 페트루치오가 밝힌 결혼의 목적은 비단 개인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페트루치오) 돈만 많으면 페트루치오의 / 신붓감으로 충분해. 내 구애의 춤에서 / 장단을 맞춰 줄 수 있는 건 재산이지. (P.49, 12)

 

페트루치오에게 결혼은 순전히 재산 증식의 수단일 뿐이다. 여기에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의미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21장에서 그가 카테리나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의 액수를 요구하는 장면 또한 이를 명확히 한다.

 

페트루치오가 아내 카테리나를 이른바 길들이는 방식 또한 논란이 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자행한다. 음식 안 주고, 잠 못 자게 하며 친정에 못 가게 하는 등 일련의 행위는 요즘이라면 제아무리 가정 내라고 할지라도 가정폭력으로 고발당하기에 십상이다. 페트루치오가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은 그가 스스로 내뱉듯이 매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아내에게 스스럼없이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가 아내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페트루치오) 나는 내 소유물의 / 주인 노릇을 할 거니까. 신부는 내 물건이자 재산이죠. / 신부는 내 집, 내 가재도구, 내 들판, 내 창고, 내 말, / 내 황소, 내 당나귀, 그 무엇이 되었든 내 것이죠. / 이런 신부가 여기 있는데, 누구든 건드려 봐요. (P.101, 32)

 

남편이 아내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 주장이 인정되는 분위기가 바로 당대 사회이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일개 재산에 불과하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맞선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기에 교화가 필요하고 교화의 궁극적 목적은 차라리 본능이라고 할 정도의 절대적 복종이다.

 

(카테리나) 당신이 / 저것을 뭐라고 부르든 옳은 말이에요. / 카테리나에게도 항상 옳은 말일 거예요.

(호르텐시오) 페트루치오, 하고픈 대로 하게. 자네가 승리했군. (P.141, 45)

 

지적으로 뛰어나고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카테리나는 남자를 우습게 여기며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저항 없이 페트루치오가 결혼하게 되는 까닭이 궁금하다. 그녀의 고집 정도라면 아버지의 강요쯤은 가뿐히 물리쳤을 텐데. ‘작품 해설에서는 페트루치오의 능력이 다른 남자들보다 그나마 우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타협책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데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건 이미 카테리나의 주체성에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페트루치오와 결혼하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한때나마 성질을 죽여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더욱 뛰어난 인물을 고르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

 

동생인 비앙카를 보라. 그녀는 극 중에서 여러모로 비앙카와 대비되는 빼어난 신붓감으로 칭송되며 여러 남자의 구혼을 받고 자신이 남편감을 선택한다. 비앙카는 환경을 직시하고 결혼 시장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을 완벽히 실현한 얌전한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매 중 더 성공적 결혼에 도달한 사람은 비앙카이며, 이 점에서 그녀는 카테리나보다 뛰어나다.

 

남편에게 순종하게 길들여진 카테리나가 다른 여성들에게 남편에 대한 도리를 장문의 대사로 설파하는 52장은 이 희극의 일대 하이라이트다. 11장과 52장의 카테리나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을 두고 옮긴이는 카테리나의 표면적 복종이 전략적 선택이므로 페트루치오의 외견상 승리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표면적 굴복 후 카테리나의 대사들에서 드러나는 과장과 익살, 그리고 남성 인물들을 겨냥한 조롱 때문이다. 카테리나의 복종은 오히려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P.5)

 

따라서 이 작품은 여성의 복종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절대적 순종은 남성의 환상에 불과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P.6)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페미니스트가 아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기본적으로 이 희극을 심오한 후기작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 내면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주며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P.173)

 

이 작품을 <맥베스><햄릿> 등과 동등한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복합적 성격과 다양한 해석이라는 심화된 의미 부여는 과잉 해석의 우려가 크다. 카테리나의 불복종의 근거로 제시되는 마지막 대사의 과장과 익살은 당대 희곡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를 두고 내심 조롱한다고 볼 근거는 미미하다. 외형적 꾸밈이든 내면적 순종이든 카테리나가 페트루치오에게 굴복하였음은 사실이다.

 

작품 해설에서 슬라이와 카테리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자 모두 당대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교화 역시 정당하다. 교화의 주체는 당연히 각각 영주와 남편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청교도들처럼 자신의 연극에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거나 심각한 교훈이나 삶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트라니오가 루첸티오에게 충고하듯, 지치고 긴장된 일상 삶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 연극이 필요하며,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극을 즐겨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P.178)

 

옮긴이는 작품 해설결말에 가서 갑자기 기존의 견해와 상치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지지 말고 희극으로서 극 자체를 즐기라는 게 작가의 의도일 수 있다고. 서막의 슬라이가 재등장하지 않는 이유 또한 작품의 희극성에 충실한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라는 해석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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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피드의 날 미래의 문학 7
존 윈덤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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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 줄 예상 못 했다. 이 소설의 아동용 축약판의 효과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원작이 아동용처럼 흥미진진할 활극일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완벽히 오판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다, 그것도 대단히. 서문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은 명상적이고 논설적인 특징”(P.9)이 작품 전반을 두드러지게 지배한다.

 

전반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계열이었지만, 후반기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논리적 환상소설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P.521)

 

작품해설에서는 작가 존 윈덤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늑한 파국의 대가라는 호칭은 그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칭찬이다. 20세기 중반 양 이념 체제 사이에 놓인 영국인의 불안 반영은 중산층이 최적이다. 하류층은 먹고사는 일에 당장 관계없으면 관심 두지 않으며, 상류층은 이따위 고민을 하기엔 너무 고상하고 남의 일에 불과하다. 오직 중산층이야말로 당대 사회의 불안과 모순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위협적 존재가 연달아 세 건이 나타나는데, 혜성(으로 인한 시력상실)과 전염병이 먼저 영향을 미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괴멸적 파국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시력상실에 자포자기하여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누군가는 있을 것이며, 그네들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을 영위할 것이기에.

 

저 끔찍하고 낯선 괴물들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어찌어찌 만들어 낸 것이었고, 또 우리 나머지가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전 세계 각지에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저놈들의 존재 때문에 자연을 비난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저건 인간이 길러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P.382)

 

반면 트리피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활용을 위해 대규모로 인공 재배를 하는 식물이다. 사람은 산업적 목적을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생산했는데 그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외면하였다. 당시에는 충분히 통제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으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그렇게 오판한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신이 아님에도 신처럼 행동하며 신이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저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거야. (P.103)

 

눈멀고 전염병에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더듬더듬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의 눈앞에 트리피드가 등장한다. 작중의 트리피드는 영리하다는 점에서 매우 지능적이다. 그들은 사람의 약점이 어딘지 알며, 공격 기회를 노리며 엄폐할 줄도 안다. 그들이 돌기를 두드리며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 그리고 메이슨네 농장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압도적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놈들보다 더 우월한 특징은 단 하나뿐이지. 바로 시력이야.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놈들은 볼 수가 없지. 우리가 시력을 빼앗기고 나면, 그런 우월함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되겠지. 우리는 그놈들보다도 더 열등한 신세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놈들은 시력 없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P.101)

 

전통적 법 규범과 사회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평화와 안전의 보장은 더는 불가능하다. 남은 식량을 두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고, 정상인과 맹인 간 지위의 우열과 역할 분담이 불가피하다. 과거와의 이별. 고통스럽지만 낯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이런 당혹감과 자괴감,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은 작품 내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모조리 현실임을, 그리고 결정적임을 비로소 시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결코 말이다. 내가 이제껏 알던 모든 것이 끝나 버렸던 것이고... (P.125)

 

아니에요. 이 세계는 끝장났어요. 그리고 우리만 남았어요...이제는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해야만 해요. 도움의 손길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P.436)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다. 살아남고 세대를 영속하기 위한 집단 형성이 필수다. 과거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물자들을 이제는 없이 살거나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집단은 서서히 소멸할 것이다. 작품 내에서 윌프레드 코커와 듀런트 여사의 집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하며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마이클 비들리 일행의 논리는 충격적이고 비도덕, 비윤리적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장은 코커와 빌의 귀에 낯설고 터무니없으며 부정의 하게 들린다. 코커는 이 집단을 깨뜨려버리며(나중에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한다.) 빌은 현실적 타당성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신네 무리가 애초부터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다만 옳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옳지 않은 것처럼 들렸을 뿐이지. (P.309)

 

인간화된 식물과 비인간화된 인간의 접점은 셔닝 농장을 접수하고자 하는 전체주의 집단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군사 독재적이며 봉건적인 농노제 발상은 인류가 기껏 수천 년 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인간 존중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전복한다. 오죽하면 차라리 트리피드가 낫다고 작중 인물이 토로하겠는가.

 

화자이자 주인공인 빌 메이슨은 틈나는 대로 생각과 사고에 빠져든다. 그는 졸지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혼자가 되었고 막무가내식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품의 서두 또한 앞이 안 보이는 그가 주위 상황을 탐지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빌과 조젤라를 포함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한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사회체제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일거에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만물의 영장이 발달시켜온 수준 높은 문명의 기반은 시력상실이라는 재앙 하나로 존속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취약하였다는 점. 그래서 트리피드의 창궐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 이것들이 겹쳐 드리운 짙은 절망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일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거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전하고 확실해 보였던 세상을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바로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이번 일이 준 충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22)

 

이런 처지에 대해 하늘을 원망할 수 없음이 후반부에 빌의 입을 통해 언급된다. 이 모든 게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운명이라는 것을. 눈앞에 뻔히 위험이 닥쳐옴에도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와 같이 우리들이 행동 하였음을.

 

정확히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떻게 해서이건 간에, 이건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전염병도 있죠. 그건 장티푸스가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P.472)

 

작품의 결말은 일변 전망적이다. 코젤라와 빌은 전략적 후퇴라는 표현으로 와이트섬으로의 자신들의 퇴각을 정당화한다. 언젠가는 다시 준비를 갖추고 돌아와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이기에. 자신들이 못한다면 아이들이 아니면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믿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살아갈 의미와 희망이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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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신은 고양이와 10편의 옛이야기 - 논장 전래동화 3, 프랑스편
샤를 페로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경온 옮김 / 논장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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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모두가 동화책에서 또는 아동 만화영화로 친숙하게 접하여 이제는 진부하기조차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동화들의 원작 원본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이솝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의 각색된 동화와 원작의 내용과 뉘앙스는 비교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페로가 쓴 11편의 이야기 중 전반부 8편은 산문, 후반부 3편은 운문이다. 작가는 산문 동화의 각 이야기를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동화 장르의 세속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태도인데, 그 교훈이 항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음이 흥미롭다. 예컨대 푸른 수염에서 작가는 이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남편은 현실 세계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오히려 부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밝힌다. ‘신데렐라에서는 신데렐라의 매력을 마법으로 현실화하는 은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빨간 모자의 내용이 일반적인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의외다. 비극으로 끝나는 빨간 모자도 그렇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식인귀 출현이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가 우리는 기껏 전반부에 밖에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 물론 공주를 잠에서 깨우는 왕자의 입맞춤도 없다.

 

내용의 신비성, 다의성 못지않은 잔혹성으로 주목받은 푸른 수염은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푸른 수염이 자신의 전처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부인에게 열쇠를 주면서도 열어보지 말라는 푸른 수염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브와 판도라를 상기시키는 유혹에 약한 여성에게 다시 유혹의 시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우리는 당대의 엄격한 계급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가 잠에서 깨면 외로울까 염려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함께 잠재우는 요정. 막내아들을 드카라바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농부들에게 무서운 위협을 자행하는 고양이. 양자 모두 사회적 하층민에 대한 경시 풍조가 암암리에 배어 있다. 그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백 년 후에 공주가 깨어날 때 낡은 성 안에서 홀로 얼마나 놀랄까 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요정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요정은 마법의 요술봉으로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건드려서 마술을 걸었답니다. (P.18)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손에 조각조각 토막날 줄로 아시오. (P.73)

 

똑똑하지만 못생긴 리케가 잘 생기게 변하고, 아름답지만 멍청한 공주가 똑똑해지면서 이른바 흠잡을 데 없는 한 쌍으로 결합하는 고수머리 리케의 결론에 모두가 흡족하지는 않다. 사랑의 힘의 위대함을 찬미할 수 있지만 껄끄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동생 공주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 동생 공주는 애초 리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언니 공주의 극적인 변모와 행복한 미래가 두드러질수록 동생 공주의 존재감은 왜소해지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현실 세계의 독자 시각에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흘리고 있을 동생 공주의 슬픔과 원망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온다.

 

꼬마 엄지의 전반부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유사하다. 원래 비슷한 이야기인지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모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식을 죽이려는 꼬마 엄지네 부모와 꼬마 엄지 형제를 잡아먹으려는 식인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가식은 불필요하다. 꼬마 엄지가 꾀로써 식인귀의 재산을 훔쳐 오는 장면 또한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이것 또한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젤리디스당나귀 가죽은 모두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남편 임금과 아빠 임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젤리디스를 괴롭히는 남편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요새로 보면 전형적인 의처증에 해당하는데, 이를 묵묵히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델리디스의 순수하고 변함없는 마음은 물론 감탄스럽지만 사랑과 미움, 행복과 고통은 언제라도 한순간에 표변될 수 있다는 씁쓸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나귀 가죽신데렐라와 비슷한 전개 구조를 지닌다. 여주인공의 어려운 생활, 지저분하고 더러운 취급을 받는 외모, 그녀를 애타게 찾는 왕자, 그들의 사랑을 매개하는 유리 구두와 운명의 반지. 여기에는 가족관계의 근본적 결함도 내포한다. 전자는 계모와 전처소생 자녀의 갈등, 후자는 아빠의 딸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 그나저나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내를 잃자마자 무슨 연유로 미친 듯이 재혼에 목매었던 아빠 임금의 속내가 궁금하다.

 

마법의 요정우스꽝스러운 소원들역시 그림 동화집에 볼 수 있는 해학적 소재의 얘기로서 양자 모두 말의 소중함과 신중함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옮긴이의 말처럼 페로 동화들은 친밀함과 생소함의 상반되는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대중적 동화와 만화의 서사의 원형으로서 오늘날은 자칫 진부하고 전근대적-특히 페미니즘 시각에서는-이지만 17세기 페로가 쓸 당시의 관점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서문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동화의 기본 정신을 강조한다. 요즘은 후자를 많이 경시하지만 전자만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 동화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런 동화는 필요가 없으므로.

 

구스타브 도레는 서사의 기저에 드리워진 어둡고 뒤틀린,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핵심을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꼬마 엄지에서 실수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의 식인귀의 얼굴은 압권이다. 다만 그의 음산하고 충격적인 삽화는 이게 과연 동화책에 적합한지 근본적 의문점을 제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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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연발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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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The Comedy of Errors

 

번역본의 표제는 다채롭다. ‘실수 연발또는 실수연발외에 헷갈려 코미디’, ‘착오 희극’, ‘오해 연발 코미디’, ‘실수연발의 희극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극의 내용을 반영하면 실수보다는 오해 또는 착오가 더 적확한 표현이지만, 이로 인한 실수가 빚어내는 해프닝을 염두에 둔다면 실수라는 표현도 무난하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초기작에 속한다. 전성기의 작가에게 발견할 수 있는 잘 짜인 구성과 개성 넘치는 인물, 긴장감 높은 극적 전개와 같은 요소를 동일하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무대에서 상연하면 쉴 새 없이 뒤바뀌는 인물들의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관객마저 머리가 얼얼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말장난과 더불어 때를 가리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기다란(무려 5면에 걸친다!) 농담을 주고받는, 특히 제2막 제2장에서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그러한데, 대목은 이 작품의 본질적 요소로서의 희극과 해학을 맛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착오의 희극은 성립할 수 없다.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각각 쌍둥이라서 외모가 똑같다고 하지만, 살아온 지역과 환경이 다르므로 옷차림, 말투 및 태도 등이 분명히 구별될 터이므로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헷갈린다는 것은 지나친 설정이다. 다만 이 작품은 comedy. 표제에 대놓고 희극 또는 소극이라고 적시했으므로 작품도 장르에 충실하다. 여기서 독자는 희극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에서 팔짱을 끼고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면 웃음은 사라지고 만다. 코미디는 어디까지나 코미디로 너그럽게 봐주고 웃을 심신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 저분들은 /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모르겠어. / 저분들 말에 맞장구치면서 참아 보자. / 위험을 감수하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자. (P.52, 2막 제2)

 

주변 인물들의 착오와 오해에 대해 두 명의 안티폴러스는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특히 타지에 와서 모두가 아는 체하는 당혹스러움 가운데서도 혼돈을 부추기는 것은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의 모호한 태도다. 그는 아드리아나에 이끌려 함께 식사하며, 앤젤로가 전해주는 목걸이를 주저함 없이 받아든다. 그의 판단은 일단 상황에 따라가면서 지켜보자는 것인데.

 

(루시아나) 신과 같은 남자들은 여성들의 주인이요 / 지배자라는 걸 몰라? 만물의 영장으로 / 이 광활한 세상과 거친 바다의 지배자이며 / 물고기나 새보다 뛰어난 지성과 / 영혼을 타고난 인간이야. / 그러니 남자들 뜻에 따르는 게 좋아. (P.30, 2막 제1)

 

주인공들의 오인된 정체성에 기름을 붓는 것은 에베소의 안티폴러스와 아내 아드리아나 간의 불화다. 남편의 부정에 대한 의심에, 오해 연발로 인한 인물들의 배배 꼬이는 사건들로 부부 간 갈등은 증폭되고 서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품게 된다. 여기서 아드리아나의 비교적 평등주의적 부부관에 맞서 봉건주의적 부부 윤리가 강조되고 있는데 루시아나와 수녀원장은 여성의 복종을 강조한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의 희극 정신이 작중에서 유달리 돋보인다. 그는 안티폴러스와 틈날 때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주인으로부터 농담이 지나치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이다. 4막 제3장에서 보여주는 경관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해학가로서 드로미오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해 주겠다고 속여 구속하고 / 쇠약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면서 / 죄수복을 입히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하기 위해 / 무어인들이 쓰는 창을 휘두르진 않지만, / 곤봉을 휘둘러 사기를 치면서 /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잡놈 말입니다. (P.97, 4막 제3)

 

마지막 막에서 헤어졌던 부부와 부자, 형제들이 모두 상봉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이지언은 사면을 받는다. 이렇게 모든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전형적인 희극답다. 게다가 이 모든 소동이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것 역시 전통적 미덕의 수용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특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작품은 가치관의 갈등이나 인물 대립보다는 착오와 오해를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인물의 개성이나 가치관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들의 성격이 아니라 정체성 오인과 착오에서 생겨난 소동이 희극성의 근거로 작용하는 소극(笑劇)이란 말이다. (P.151)

 

어릴 때 집에 십여 권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출판사는 동서문화사였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나름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는 읽었는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해졌기에 올해 상반기에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탐독하자는 큰 목표를 정했다. 최종철 번역본으로 주요 작품을 읽고 이제 미번역본은 시기순으로 출판사, 번역자별로 선별하여 차근차근 나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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