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스 BLISS - 내 안의 찬란함을 위하여
임현정 지음 / CRETA(크레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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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세 번째 책이며, 자전적 내용으로는 <침묵의 소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앞서 두 권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이 책도 손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개인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물론 개인적 경험도 언급하지만 이는 저자의 의견 또는 주장을 입증하거나 강화하는 예시로서 기능한다.

 

저자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에의 지름길인 유명 콩쿠르 입상자 출신이 아니다. 유명 음반사의 눈에 띄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저자의 행보는 독특하다. 편하고 안정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는데 음악원 교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음악 기획사를 차려 틀에 박힌 음악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작년에 나는 비록 가보지 못했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독주회는 보기 드문 대담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강조한 것은 음악에의 순수한 헌신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견디며 저자가 절실하게 깨우친 것은 음악의 순수성과 사회의 비순수성이다. 인종적, 음악적 차별에 주저앉지 않고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침묵의 소리>에서 상세히 접한 바 있다.

 

성공을 위한 콩쿠르에 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느니, 다시 말하자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오로지 음악 자체에만 몰두하고, 음악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결심이다. (P.41)

 

콩쿠르는 음악도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도 같다. 저자는 더욱더 비판적인데, 특히나 음악계에 판치고 있는 부조리 사례와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콩쿠르의 심사위원 직을 내려놓으면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사임서’(P.42)는 이에 대한 저자의 강렬한 반응이다.

 

이 책에 담긴 음악을 향한 사랑과 음악을 대하는 헌신적 태도는 물론 저자 자신에게서 비롯하겠지만, 같을 길을 따르는 후배들이 엉뚱한 길에서 방황하거나 잘못될 길로 향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일념도 담고 있다. 워낙 특이한 저자의 이력을 통해 유형화된 경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음악가로서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예시를 보여주면서.

 

그렇기에 이 책은 곳곳에 후배들을 향한 절절한 조언과 지침을 담고 있다. 추상적 도덕과 훈계 문구가 아닌 것은 오로지 저자 체험의 산출물인 탓이다. 붉은색 글자 배경의 문장을 유심히 숙독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유명한 것존경스러운 것에 대한 차이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조건 성공만 재촉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P.162)

 

또한 무대를 앞두고 겪게 되는 압박과 긴장, 초조를 극복하기 위한 아홉 가지 방법(P.120)은 연주자들도 공연에 앞서 이렇게나 긴장함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저자의 효과적인 경험담을 공유할 수 있어 후배 연주자들 또는 음악계가 아니더라도 강연, 발표를 앞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음악은 자체로 순수하고 아름답고 고상하지만, 음악인은 다르다. 그 또한 사람이기에 생활인으로서 여러 부침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직업 연주자라면 더하다. 무대공연 실패는 경력의 나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간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사교 관계에 애쓰기도 한다. 그럴수록 음악의 순수성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은 몇 개의 음악으로만 한정되고 만다. 저자는 과감한 도전을 외친다.

 

존재의 감각까지 마비시키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린 생명체, 어둠을 눈부시게 수놓은 별, 하늘을 적시는 황혼, 사랑스러운 이의 얼굴과 같이 시공간의 흐름과 몸의 고통까지도 망각하게 한다. 뇌와 심장도 모르는 사이, 입술 사이로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새어나온다. (P.142)

 

아름답지 않은가. 이러한 사고를 품을 수 있고 이런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작곡자의 영감을, 연주자를 통해 청중과 교감을 이루어낼 때 우리는 음악에서 지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세속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우리는 구도자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오로지 영혼의 숨결만으로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떤 것도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온전하며 완전하다는 것을 느끼는가. (P.187-188)

 

익숙한 에세이로 가볍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작의 후반부에서 영적인 충만을 갈구하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의 지향점은 단순히 기교로서, 흥미로운 예능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음악이야말로 언어가 끊긴 곳에서 비로소 의미를 발하는 매체다.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감성과 영성의 순간. 음악의 아름다움이 자체로 아름다운 나 자신과 만나 찬란함을 이루는 때.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음악적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우리는 음악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연주를 아직 좋아하지 못한다. 이전에 층층이 쌓인 수많은 연주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의 연주관에 공감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일까. 다만 저자의 책들을 읽으면서 새삼 그가 음악과,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는 음악 연주만큼이나 글을 잘 쓴다. 그리고 책 뒷부분의 십여 장은 저자의 연주 화보를 흑백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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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1일(토) 15:0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윤아현 (피아노)

프로그램

  - 바흐, 프랑스 모음곡 4번 E flat 장조 BWV 815

  - 브람스, 6개의 피아노 소품 Op.118

  - 월터 사울, 야상곡 (2012)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 장조 Op.22


* 세줄평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은 개인적으로 글렌 굴드를 애호하기에 연주자의 피아니스틱한 접근이 와닿지 않는다. 마지막 지그는 괜찮았지만. 이어지는 브람스 곡의 연주도 좋았지만 이곡은 대체로 아직은 친해지기 어렵다. 월터 사울은 연주자의 이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음향은 현대적이지만 곡자체는 다가가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큰 스케일로 이지와 감성 양면에 호소하는 베토벤의 음악은 역시 좋다.
첫곡의 실수로 긴장이 풀어지지 않은 까닭일까 연주 내내 피아니스트의 표정이 굳어 있다. 청중의 성의어린 박수에도 연주자는 앙코르 없이 음악회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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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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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작가가 설계한 예측 불가능한 함정에 누구라도 빠질 수밖에 없어서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이런 수법은 거의 전적으로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작가는 여기서 탐정 푸아로의 다채로우면서도 뛰어난 역량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애초 초반부터 그를 포로토 씨라는 낯선 영국식 발음으로 주변 인물이 동일인임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한다든지, 그의 직업을 은퇴한 원예가로 하여 방심토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반부에는 탐정으로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푸아로의 유능함을 화자와 함께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푸아로는 고개를 내젓고는 가슴을 활짝 편 다음 우리에게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대단한 인물인 양 으스대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가 정말로 훌륭한 탐정일까 하는 의혹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의 대단한 명성이 혹시 요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P.138)

 

화자인 의사 셰퍼드와 독자와 주변 인물은 그의 명성에 회의적 견해를 품는다. 제아무리 명성 높은 탐정이라도 이 사건 자체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행방불명된 랠프 페이턴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푸아로의 유명한 회색 세포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른 주변 인물 모두를 향해 질타한다.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며, 아무리 자그마한 거라도 솔직히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용의자들을 안심과 긴장 사이에서 쥐락펴락 분위기를 일변하는 푸아로의 능력에 화자인 의사 셰퍼드는 새삼 탄복한다. 푸아로는 셰퍼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처음 할 일은 그날 저녁 일어난 일을 명료하게 알아내는 겁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P.218)

 

푸아로는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답니다. 증명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말입니다!” (P.308-309)

 

작중에서 의사 셰퍼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소설의 전개를 이끄는 중요한 화자인 동시에, 푸아로의 조수 역할도 맡는다. 셜록 홈즈의 왓슨처럼, 푸아로의 헤이스팅스처럼 말이다. 살해된 애크로이드 경의 친구이자,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를 비롯한 집안 사람의 전적인 신뢰를 지닌 인물.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알며, 가십과 본능에 의존하는 누이 캐롤라인과는 차별되는.

 

저는 진실을 원해요.”

플로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실을 말입니까?”

모든 진실을요.” (P.116)

 

진실은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궁극의 가치인가. 이렇게 푸아로를 개입시킨 플로라마저 진실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살해당한 애크로이드 본인마저 진실을 숨기지 않았는가. 애크로이드 양과 애크로이드 부인, 관리인 러셀 양, 랠프 페이턴, 블런트 소령, 비서 레이몬드, 파커 집사, 하녀 어슐러 본 등 모두가 진실을 은폐한다. 이 정도는 숨겨도 사건 해결에 영향을 없을 거라 판단하면서. 이것을 푸아로는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사실의 불일치에서 그는 단서를 찾고 파헤치고 연결하고 확장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이 작품에는 여러 가정이 등장한다. 만약 애크로이드가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의 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면, 애크로이드가 집안 씀씀이를 구두쇠처럼 가혹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 러셀 양, 파커, 어슐러 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애크로이드가 앞서 독살된 애슐리 페러스 부인과 우정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또 하나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반추하게 만든다. 진범이 처음부터 애크로이드를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개인적 금전 사정의 어려움, 한번 잘못된 선택에 따른 벗어날 수 없이 연속된 패착, 친절과 위선의 일상적 가면을 뒤집어쓴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은닉했던 본성의 가면을 비로소 꺼낸다. 그는 페러스 부인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다지 유감스럽지 않다. 이걸 맞췄다면 나 자신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므로. 그럼에도 푸아로가 결정적인 의구심을 품게 된 단서에 나 역시 약간은 의아한 낌새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소간 뿌듯한 마음도 있다. 다만 스포일러가 될까 봐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감상문 기록이 못 되어 이 점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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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2월 22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오지현 (첼로), 박은희 (피아노)

프로그램

  - 슈만,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Op.70

  -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1번 F단조 Op.120, No.1

  - 펜데레츠키, 비올라 독주를 위한 카덴차

  - 비외탕, 비올라 소나타 B-flat 장조 Op.36


* 세줄평

독주악기로서의 비올라는 낯설다. 과연 어떤 소리를 들려줄까. 연주곡이 거의 처음 듣는 곡들인데, 무척이나 아름답다. 펜데레츠키 작품조차 흥미롭다. 무엇보다 바이올린 작품으로 유명한 비외탕의 비올라 소나타가 이렇게 좋을 수가. 확실히 비올라의 음향은 육성과 비슷하다. 그것이 더욱 절절한 호소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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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2월 15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체임버홀

연주 : 신성희 (바이올린), 김종윤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4번 A단조 Op.23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8번 G장조 Op.30, No.3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10번 G장조 Op.96


* 세줄평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시리즈의 피날레라고 한다. 그렇게 대중적인 레퍼토리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번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었지만, 오늘 연주곡목은 머리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연주가 시작되자 귀에 익은 선율이 생소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후반부의 소나타 10번이 인상적이다. 유심히 귀 기울이니 간과하였던 아름다움이 오히려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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